위기의 한국교회, 만우 송창근에게 길을 묻다

이 글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발행하는 [세계와 선교]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만우 송창근 목사
만우 송창근 목사

1) 들어가며


한국교회는 위기의 시대에 직면해 있습니다. 더 이상 교회의 메시지는 사회에 울림을 주지 못하고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대형교회의 세습문제, 목회자들의 성추문을 둘러싼 개인적인 일탈행위는 가장 도덕적이어야 하는 종교의 부패와 타락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회 속에서 교회는 한없는 욕망을 추구하면서 사회 속에서 갈등과 혐오를 조장하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오로지 성공만을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양적으로 성장한 것만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편협한 사고는 오늘날 수많은 부작용을 양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 믿고 복받는다’는 것이 강조되면서 마치 복 받은 자, 성공한 자만이 올바른 신앙이라는 잘못된 신념을 갖게 하였고, 이러한 왜곡된 메시지는 기독교의 수준을 ‘값싼 은혜’를 갈망하는 저렴한 종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 현 상황이 지속되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에서 지금의 사회적 현상은 위기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말로는 ‘위기’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에 대해서 말은 ‘위기’라고 하지만, 위기 극복을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변하려는 마음가짐은 1도 없는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말로는 위기라고 하지만 그 위기를 극복하려는 마음가짐 자체가 결여된 것, 이것이 가장 커다란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과는 다르게 교회는 여전히 성공만을 추구합니다.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면 성공하지 못한 자의 질투심으로 치부해 버리고 있습니다. 대형교회의 세습을 욕하지만, 정작 그것은 본인들이 대형교회를 이루지 못한 열등감의 표출이라고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소위 외형적으로 성공한 교회는 위기를 위기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을 위기라고 본다는 것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데, 자기들이 잘나가는 것은 잘못된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변화로 인식하지 못하는 불감증은 점차 기독교를 파멸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하루 아침에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점차 멸망의 조짐이 있었지만 그것을 스스로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멸망한 것입니다. 기독교 역시 하루 아침에 몰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벌써부터 그 조짐은 서서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를 교회에서 볼 수 없습니다. 미래학자가 향후 20년 안에 기독교 인구가 500만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어쩌면 노령화사회로 인해서 노년층이 미래 기독교인구의 절반 이상을 감당해주기 때문에 그나마 500만을 유지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습니다. 


숫적인 감소가 위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매년 각 교단에서 교인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날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위기를 통해서 교회는 점점 더 심각한 상황 속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비대면 예배는 그동안 익숙했던 예배의 틀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코로나 이후에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법이 모색되고 있습니다. 본 글은 그 가운데 하나의 방법으로 만우 송창근 목사의 삶과 영성을 통해서 위기 극복의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2) 만우 송창근 목사의 삶과 영성


만우 송창근 목사는 1898년 10월 5일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웅상동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서북지역인 평안도가 홀대를 받아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함경도는 홀대조차도 하지 않는 존재감 자체가 없는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접했던 송창근은 1910년경 북간도의 명동학교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10대 소년이었지만 나름 자신의 길을 걸어보기 위한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동학교에서 송창근은 황의돈, 장지영, 정재면, 박태환, 김철 등에게 민족주의 사상에 대해 배웠습니다. 한일합방이 일어난 즈음에 감수성이 예민했던 청소년기를 민족주의 사상이 투철한 학교에서 배웠다는 것은 향후 그의 민족목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송창근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남긴 ‘벽도 밀면 문이 된다’는 것은 그의 삶 자체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 후 송창근은 개인적인 의지로 광성학교를 찾아갔고, 광성학교의 교장인 이동휘 선생을 만나 그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이동휘는 소년 송창근에게 자신의 길이 아닌 송창근만의 길을 가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이후 송창근은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지만, 그 길의 출발과 계속되는 여정 속에는 이동휘 선생의 가르침이 늘 함께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송창근은 서울로 올라와서 피어선 성경학교를 다니면서(1916~1919년) 당시 민족지도자인 이상재 선생을 만나고 YMCA 활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을 한층 높여나갔습니다. 3ㆍ1운동으로 남대문교회 조사였던 함태영이 검거되었을 때 그 뒤를 이어 남대문 교회에서 조사로 사역하였습니다. 송창근의 삶을 추적해보면 늘 송창근은 자신과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항상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ㆍ1운동 이후 조선인을 위한 참다운 교역자의 부재를 절실히 느낀 송창근은 1921년 9월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먼저 문학을 공부하였으며(1922년 일본 동경 동양대학),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청산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선교사들에 의한 교육이 아닌 진정 한국 민족의 교육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송창근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도미하여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샌프란시스코 신학교, 프린스톤 신학교, 웨스턴 신학교, 아이리프 신학대학). 송창근은 아이리프 신학교에서 “유대사상에 근거해서 본 바울의 믿음으로 인한 구원사상”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단순한 학문적 자랑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학문에 대한 종합을 시도하였습니다. 1932년에 귀국한 송창근은 평양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습니다. 송창근 목사는 신학과 목회 현장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성 교회의 설교와는 달리 지성적 성찰이 뚜렷이 드러나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1936년 그는 산정현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으로 내려가서 호주장로회 선교부 지원을 받아서 남부민동에 ‘성빈학사’(聖貧學舍)를 설립하였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목회를 실천하였습니다. 이러한 목회를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생 흠모하고 사랑했던 성 프란시스의 청빈의 영성이라는 사실은 송창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는 실로 1200년대의 위대한 기독교 성인을 700년 뒤의 동방의 한국에서 재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창근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닮겠다고 결정했으면 그대로 삶속에서 실천하는 의지의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존경한다고 하면서, 조금만 삶이 힘들어지면 은근슬쩍 삶과 타협하는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1936년에 송창근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경에 검거되었고, 1939년 12월에 무죄가 선고되었지만 이후 일제 검사가 다시 공소하여 2년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결국 1941년 11월 17일에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감옥에서의 시련과 역경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민족의 아픔과 고난받는 자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 이후에 친일의 길을 걷고 변절했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의 삶의 무게를 느낀다면 그런 가벼운 평가를 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던 송창근은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을 때, 조선인에 의해 운영되는 신학교를 새로 세우는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승동교회의 김대현 장로가 거금을 내놓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신학교 설립 운동이 가속화 되었습니다. 이때 송창근 목사는 일제의 감시를 받는 몸이기 때문에 믿을만한 사람으로 김재준 목사를 김대현 장로에게 소개하였고, 이후 김재준 목사의 헌신으로 조선신학교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신학교는 한신대학을 거쳐 오늘의 한신대학교에 이르렀는데, 어느 특정한 한 사람의 설립자가 아닌 김대현 장로와 송창근 목사, 김재준 목사가 함께 힘을 합하여 세운 학교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


해방 직후, 조선신학교의 신학교육으로 인하여 총회에서 보수와 진보로 치열하게 대립하였는데, 송창근 목사는 장로교의 분열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와중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송창근 목사는 납북되어 이후의 생사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니다. 본격적으로 신학교육을 위해 헌신하려고 했을 때 그의 건강이 그를 발목잡았고,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그를 괴롭혔으며, 이념이 그를 붙잡아 갔습니다.


3) 나아가며 : 위기에 대해 물어본다면, 송창근은 자신의 삶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송창근 목사의 삶과 사상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삶을 통해서 드러났고, 그의 삶은 그의 사상을 현실에 적용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우의 사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전통 속에 면면히 흘러오는 영성의 전통이었고, 종교개혁의 사상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특별히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1900년대 초중반을 살다간 만우 송창근에 의해서 기독교 전통의 영성이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한국 민족을 향해 소개되었고, 종교개혁의 전통 역시 만우 송창근을 통해서 체화되어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유의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흔히 앵무새처럼 자신의 것은 잃어버리고 서양의 것만 무분별하게 수입하는 신학이 아니라 스스로 실험하고 그것을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도록 소화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박사학위 논문에서 언급하였듯이 학문적인 욕심보다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표현하려고 했다는 것은 높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학문을 했다는 점은 오늘날 신학을 공부하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단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나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신은 장공의 머리와 만우의 가슴이 조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듯이, 만우의 삶은 열정이 있는 삶이었고, 자칫 냉철함만 강조될 수 있는 한신과 기장에 생명력을 심어주는 영성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창근 목사하면 프란시스의 영성만을 떠올리지만 그는 철저하게 성서를 전달하기 위해서 목회자들이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소양에 대해서 다양한 학문적인 성취를 언급하였습니다. 목회자는 단지 성경만을 가르치는 성경교사가 아니라 성경이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오늘의 다양한 문화적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제대로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오늘날 한신의 교수들과 기장의 목회자들이 송창근의 삶에서 주의깊게 생각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송창근 목사가 많은 사람을 이끌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가깝게는 함경도 오지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는 장공 김재준 목사를 역사의 복판으로 이끌어냈고, 수많은 제자들을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끌어냈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후배들이나 제자들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고, 길을 해쳐나갈 수 있도록 최대한 협력하고 도와주었습니다. 이것은 진정 성서에서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준 가르침입니다. 제자들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자들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대학의 강단에서 학생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신학대학 교수들의 몫이라면, 현장 교회에서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올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회자들의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위기는 기독교의 근본 메시지에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오늘날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시기를 묵묵히 걸어나간 송창근 목사와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오늘의 나를 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보다 훨씬 어려운 시기를 온몸으로 살아낸 그들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위기의 상황 속에서 묵묵히 기독교의 메시지를 찾아나가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만우 송창근 목사는 우리 민족이 가장 힘겨운 시기를 걸어온 인물입니다. 불투명한 미래, 아무도 걸어보지 않은 미래를 뚜벅뚜벅 외롭게 걸어간 것입니다. 우리가 위기의 한국교회에 대해서 송창근에게 길을 물었을 때 송창근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대답할 것입니다. 송창근이 걸어간 길은 종교개혁자들이 걸어간 길이고, 성 프란시스가 걸어간 길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가 걸어간 길입니다. 그는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라는 찬송을 즐겨 불렀다고 합니다. 그 찬송의 가사처럼 그가 걸어간, 그리고 그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추천하는 길은 예수가 함께 걸어야만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