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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서 발행한 [십자군]과 김재준 – [십자군] 목차 수록

7월 16, 2026

북간도에서 발행한 [십자군]


김재준은 북간도에 있는 은진중학교 교유로 취임한 이후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십자군」이라는 개인 잡지를 발간하였다. 평양신학교 기관지인 「신학지남」은 글을 쓰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 김재준으로서는 자신의 사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1920년대 장도빈의 밑에서 편집 실무를 했던 경험과 「신학지남」의 편집 실무의 경험이 「십자군」의 발행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1]

김재준은 1937년 5월에 「십자군」 창간호(제1권 제1호)를 발행하였다. 1938년 2월에 제2권 1호(통권 6호)를 내고 더 이상 발행할 수가 없었다. 비록 여섯 권이지만 십자군에 실린 글들은 김재준이 처음으로 자신의 사상을 온전하게 표현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편 김재준은 1940년에 단행본 『落穗(낙수)』를 발행하였는데 거기에는 김재준이 「신학지남」과 「십자군」에 발표했던 글의 다수가 실려있다. 따라서 해당 글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는 『落穗(낙수)』와의 비교가 필요하다.[2]

김재준이 발행한 [십자군] 제1권 제1호 이미지


[십자군] 총 목차

☞ 각 글을 클릭하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십자군 제1권 제1호] 소화 12년 5월(1937년 5월)


[십자군 제1권 제2호] 소화 12년 6월(1937년 6월)


[십자군 제1권 제3호] 소화 12년 9월(1937년 9월)


[십자군 제1권 제4호] 소화 12년 10월(1937년 10월)


[십자군 제1권 제5호] 소화 12년 12월(1937년 12월)


[십자군 제2권 제1호] 소화 13년 2월(1938년 2월)


[십자군]의 의미


해외 유학을 통해 풍부한 신학적 식견을 갖춘 김재준이 1932년 귀국하면서 마주한 조선의 현실은 그의 신학적 사고에 거대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일제 말기의 점증하는 억압적 식민 체제와 이에 편승하거나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조선 교회의 현실은 그의 신학이 더 이상 이론적 사변에 머무를 수 없음을 깨닫게 하였다. 당시 조선 교회는 일제 식민 지배의 현실 속에서 적당히 순응하거나, 외면하여 현실도피를 하거나, 타협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내부적으로는 교권주의와 교리적 경직성에 사로잡혀 초기 선교기의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은 김재준에게 신앙의 순결성과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신학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고 고통스러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그는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현실의 불의에 침묵하는 것을 직무유기로 보았다. 특히 숭인상업학교 재직 시, 『신학지남』을 통한 보수적 교권과의 충돌은 그에게 이론적 신념이 현실의 벽 앞에서 어떻게 시험되고 단련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평양에서의 경험 이후 북간도 은진중학교에서 재직했던 시기는 김재준 사상의 실천적 면모를 더욱 심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단지 교사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지성인의 역할을 넘어, 억압받는 민족의 삶의 현장, 즉 기독교적 민족운동의 현장 실천자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기독교 잡지 『십자군』의 편집인으로서 그는 암울한 시대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민족적 고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십자군』은 당시 청년들과 한국 교회에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으며, 김재준은 지면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더욱 넓게 전파하고 청년들의 행동을 촉구했다. 이 시기는 김재준이 자신의 신학을 단순한 ‘지적ㆍ학문적 사유’ 수준에 머물게 하지 않고, 민중 속에서 숨 쉬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실천하는 신학’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신학이 단순한 ‘자유로운 신학 사유’를 넘어, 실제 공동체적 실천과 역사 변혁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동력으로 진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북간도에서의 그의 활동은 이후 그가 주창할 ‘토착화된 한국 신학’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각주]
1. 주재용, “한국 신학사에 있어서의 김재준의 위치,” 484. 주재용은 「십자군」의 발행과 이후 발행하는 「제3일」을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다. 「십자군」에서는 십자가에서 부활을, 「제3일」에서는 부활에서 십자가를 본 신학을 전개하였다고 본 것이다.
2. 의도적인지 아닌지 간혹 「신학지남」의 글과 「십자군」의 글이 『낙수』에서는 수정된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대부분 오타 수정이지만 가끔 단어를 의도적으로 바꾸거나 문장을 수정한 부분이 발견된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신학지남]에서 만우 송창근과 장공 김재준의 활약 - [신학지남] 목차 수록

7월 16, 2026

신학지남에 송창근과 김재준이 합류하게 된 배경


1927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평양신학교 신약교수로 취임한 남궁혁 박사가 1928년에 「신학지남」의 편집인이 되면서 「신학지남(神學指南)」은 새로운 변신을 도모하였다. 1918년 평양신학교 기관지로 창간된 「신학지남」[1]은 당시 장로교 신학을 대변하는 잡지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기관지였다.[2] 

남궁혁은 신학교 교수들과 在外 선교사들 이외의 본국인 정규 기고자를 보강하였다. 이때 일본에서 철학을 연구한 숭실전문학교 교수 채필근 목사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산정현교회 박형룡 전도사가 집필진에 합류하게 되었다.[3] 남궁혁 박사는 이후 보다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 1933년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송창근과 김재준을 정규 기고자로 초청하였다.[4] 나아가 남궁혁은 김재준에게 「신학지남」의 편집 실무를 맡겼다.[5]

김재준은 「신학지남」의 편집 실무를 맡으면서 「신학지남」의 1933년 5월호(제15권 제3호)부터 1935년 5월호(제17권 제3호)까지 글을 게재하였다.[6]

미국 유학시절 장공 김재준과 만우 송창근


신학지남 목차 : 1933년 1월호부터 1935년 5월호까지


「신학지남」에 실린 김재준의 글들을 살펴보려면 당시 함께 실렸던 글들과 비교해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당시 편집 실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김재준은 자신의 글 이외에 함께 실린 다른 글들도 살펴보았을 것이고, 적절한 시기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글을 기고했을 것이다. 「신학지남」에 수록된 김재준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글이 어떤 글들과 함께 발표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제15권 제1호] 1933년 1월호

  • 도끼날 잃은 일군 / 남궁혁
  • 예수는 개인전도자의 모범 / 이눌서
  • 예수와 민주주의 / H. Cotton
  • 가서 제자삼으라(상) / 스미스저ㆍ이눌서역
  • 미로에 방황하는 자유주의 신도에게 / 채필근
  • 현사상의 역사적 배경(속) / 박형용
  • 기독교의 윤리문제 / 송창근
  • 야곱 베-메의 신비도 / 강흥수
  • 천문강요 / 이성휘
  • 만국주일 공과 / 어도만
  • 에레미야서강의(속) / 박형룡


[제15권 제2호] 1933년 3월호

  • 진의와 허의 / 남궁혁
  • 가서 제자삼으라 / 스미스
  • 반신학적 경향 / 박형룡
  • 신앙의 실재화 / 채필근
  • 천문강요 / 이성휘
  • 추도량 목사 / 편집인
  • 주일학교 선생에게 / 곽안련
  • 주일공과 / 어도만
  • 로마서 강해 / 남궁혁
  • 빌립보 강해 / 남궁혁
  • 베드로후서 강해 / 나부열


[제15권 제3호] 1933년 5월호

  • 바울의 생활관 / 남궁혁
  • 관념의 신, 실존의 신 / 스미스
  • 부흥회의 障害(장해) / 이눌서
  • 진리를 말하는 사도 / 채필근
  • 욥기에 현한 영혼불멸 / 김재준
  • 성령과 교역자 / 고려위
  • 천문 講臺(강대) / 이성휘
  • 隨想(수상) / 강흥수
  • 기독교회의 사회約條(조약) / 한경직
  • 주일학교 선생에게 / 곽안련
  • 로마서강해 / 남궁혁
  • 빌립보강해 / 남궁혁
  • 베드로후서 강해 / 나부열


[제15권 제4호] 1933년 7월호

  • 기독관에 대한 역대의 이단 / 남궁혁
  • 바른 말을 하여 책망할 것이 없게 하라 / 이눌서
  • 조선기독교와 교회운동 / 정인과
  • 正信(정신)과 迷信(미신) / 채필근
  • 신학자와 설교가 / 송창근
  • 천문강대 / 이성휘
  • 소년성경학원방문기 / 일기자
  • 주일학교 선생에게 / 곽안련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빌립보강해 / 남궁혁
  • 로마서강해 / 남궁혁
  • 베드로후서강해 / 나부열


[제15권 제5호] 1933년 9월호

  • 그리스도를 평범한 생애에서 봉사하자 / 남궁혁
  • 종교학이란 무엇인가 / 채필근
  • 창조론주의와 진화론 / 이눌서
  • 그리스도의 愛慕(애모) / 송창근
  • 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야의 내면생활 / 김재준
  • 기독교와 노예 / 김택민
  • 성 프란시스 교단 생활기 / K 생
  • 주일학교 선생에게 / 곽안련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로마서 강해 / 남궁혁
  • 아가서 강해 / 남궁혁
  • 베드로후서 강해 / 나부열


[제15권 제6호] 1933년 11월호

  • 신비적 속죄론 / 박형룡
  • 인간이상의 합치점에 서신 예수 / 채필근
  • 창조주의자와 진화주의자가 합의할 수 있느냐? / 이눌서
  • 오늘 조선교회의 사명 / 송창근
  • 巡禮(순례)의 讚歌(찬가) : 시편 제84편 
  • 옥스퍼드그룹의 의의와 그 활동 / W. F. 로렌스
  • 그리스도의 애모 / 송창근
  • 아모스의 생애와 그 예언 / 김재준
  • 靜思 二三(정사이삼) / 장공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평양노회목사 가족 구제부 證券案(증권안) 실시에 대하여 / 곽안련
  • 로마인서 강해 / 남궁혁
  • 베드로후서 강해 / 나부열
  • 아가서 강해 / 이성휘


[제16권 제1호] 1934년 1월호

  • 정화운동의 필요 / 남궁혁
  • 신비적 속죄론(續) / 박형룡
  • 완전한 성년창조 / 이눌서
  • 어거스틴의 ‘신의 존재한 증명’에 대하여 / 채필근
  • 유혹(三) / 송창근
  • 仰慕(앙모)의 至情(지정) 시편 제42:43 / 편집인
  •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 / 김재준
  • 그리스도의 애모 / 송창근 
  • 에스겔 전편강도 / 곽안련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만세반석열리니 – 그 작자와 그 감화 / 장공
  • 지도자의 필요한 성격 / 곽안련
  • 로마인서 강해(完) / 남궁혁
  • 베드로후서 강해 / 나부열
  • 아가서 강해 / 이성휘


[제16권 제2호] 1934년 3월호

  • 일심단합 / 남궁혁
  • 스웨덴붉과 신예루살렘 교회 / 박형룡
  • 독일 나치쓰와 신교통일문제 / 채필근
  • 조선교인의 신앙을 논하여 성경적 신앙에 及함 / 송창근
  • ‘流謫(유적)의 원한’ 시편 제백삼십칠 / 편집인
  • 마음의 거문고(강도) / 곽안련
  • 강도도형[7] / 편집인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부활주일강도 / 곽안련
  • 변치 않는 설교제목 / 장공
  • 일터로 가는 이들 : 일인일언 / 곽안련
  • 갈라디아인서 강해(일) / 남궁혁
  • 바라보는 마음과 바라는 마음 / 장공
  • 베드로후서 강해 / 라부열
  • 聖(성)어거스틴의 기도
  • 아가서 강해 / 이성휘


[제16권 제3호】 1934년 5월호

  • 아동예배와 교회 당국자의 책무 / 남궁혁
  • 스웨덴붉과 신예루살렘교회 / 박형룡
  • 교회란 무엇인가 / 채필근
  • 조선기독교의 위기 / 송창근
  • 새 양심의 창조 / 김재준
  • 그리스도의 애모 / 송창근
  • 이상적 어머니(母주일 설교) / 곽안련
  • 인생과 종교 / 강윤림
  • 靈西亞(영서아)의 종교 / 편집인
  • 酒魔(주마)박멸론 / 백해수
  • 깨보이는 마음, 깨보는 마음 / 장공
  • 교회건물의 화재보험에 대하여 / 곽안련
  • 갈라디아인서 강해 / 남궁혁
  • 베드로후서 강해 / 남궁혁
  • 아가서 강해 / 이성휘


[제16권 제4호] 1934년 7월호

  • 칼빈신학과 현대 생활 / 남궁혁
  • 요한 칼빈의 일생 / 송창근
  • 칼빈의 예정론 / 박형룡
  • 칼빈의 교회관과 교회 정책 / 채필근
  • 칼빈신학과 그 감화 / 이눌서
  • 예정신학에서 예정신앙에 / 송창근
  • 성서해석가로 본 칼빈 / 나부열
  • 강단의 칼빈 / 곽안련
  • 핍박 / 요한 칼빈 – 장공 역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여름실과 / 곽안련
  • 아가 강해 / 이성휘 


[제16권 제5호] 1934년 9월호

  • 조선교회의 과거 오십년을 회고하면서 / 남궁혁
  • 원두우 목사의 생애와 그 사업 / 백낙준
  • 亞扁薛羅(아편설라) 목사의 생애와 그 사업 / 아펜실라孃
  • 마포삼열 목사의 생애와 그 사업 / 나부열
  • 스웨덴붉과 신예루살렘교회 / 박형룡
  • 나의 체험하는 신 / 채필근
  • 진화론을 부인하는 諸(제)사실 / 이눌서
  • 그리스도의 애모 / 송창근
  • 복음적 설교 / 김인준
  • 그리스도의 죽음 / 박형룡
  • 청년의 최고 이상 / 곽안련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강도도형 / 곽안련
  • 갈라디아인서 강해 / 남궁혁
  • 아가서강해 / 이성휘 


[제16권 제6호] 1934년 11월호

  • 양심생활 / 남궁혁
  • 기독교의 贖罪(속죄)사업은 창조적 집대성 / 채필근
  • 속죄일과 희년과의 관계 / 권찬영
  • 신경의 직조화 / 스미스저, 이눌서역
  • 실재의 탐구(전도서를 읽음) / 김재준
  • 그리스도의 애모 / 송창근 신역
  • 만국전도순방기 / 권태의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갈라디아인서 강해(五)


[제17권 제1호] 1935년 1월호

  • 권두언 : 自覺ㆍ停頓ㆍ建設(자각ㆍ정돈ㆍ건설)
  • 새해의 첫 표어 / 남궁혁
  • 새생활의 전제 / 송창근
  • 초대 교회의 특색 조선교회진흥론(기일) / 김화식
  • 죄와 성 / 채필근
  • 그리스도의 보혈 / 이눌서
  • 성서와 인류 / 최지화
  • 그리스도의 애모(신역) / 송창근
  • 뿍맨 운동과 그 비판 / 김재준
  • 성화(설교) / 곽안련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갈라디아인서 강해 / 남궁혁
  • 교회건축과 인간건축 / 편집실
  • 요한일서 강해 / 나부열
  • 아가서 강해 / 이성휘


[제17권 제2호] 1935년 3월호

  • 일 하러 가자 / 남궁혁
  • 영국 웨일스, 인도, 조선삼처의 부흥連結(연결) / 이눌서
  •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는 악마의 유혹 / 채필근
  • 신앙과 행위의 교량 / 김화식
  • 復活祭日(부활제일)의 아침 / 편집자 - 장공
  •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연구 / 김재준
  • 부활당일의 주님의 현현(설교) / 곽안련
  • 고한경희목사의 순교를 조함 / 이학인
  • 강도도형 / 곽안련
  • 목사의 사생활론 / 송창근
  • 졸업생 제군에게 주는 선배들의 고백과 부탁 / 편집실
  • 진정한 설교 / 뿌리-드
  • 갈라디아인서 강해 / 남궁혁
  • 요한일서 강해 / 나부열
  • 아가서 강해 / 이성휘


[제17권 제3호] 1935년 5월호

  • 교회의 병과 그 성서적 치료방법 / 이눌서
  • 교회의 부흥 / 채필근
  • 로마인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 남궁혁
  • 예루살렘의 종교회의와 바울 / 김화식
  • 바울의 신앙경험과 기독교의 사상적 부흥 / 이학봉
  • 감격의 생활 / 송창근
  • 주기도묵상 / 나부열
  • 위대한 終結(종결) / 김재준
  • 독서(문화운동에 대하여) / 곽안련
  • 강도도형 / 곽안련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포도원 허는 작은 여우(어린이주일설교) / 곽안련
  • 갈라디아인서 강해 / 남궁혁
  • 요한일서 강해 / 나부열
  • 아가서 강해 / 이성휘

[신학지남]에서 김재준과 송창근의 역할과 의미


김재준과 송창근의 글의 특징


김재준과 송창근이 「신학지남」에 기고한 글을 보면, 김재준이 ‘성서’에 대한 글을 집중적으로 올린 반면, 송창근은 ‘교회’에 대한 글을 집중적으로 올렸다고 볼 수 있다. 김재준 입장에서 송창근의 ‘교회론’에 동의하고 있었기에 따로 교회에 대한 글을 올리지 않았으며, 반대로 송창근의 입장에서 김재준의 ‘성서관’에 동의하고 있었기에 따로 성서에 대한 글을 올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한경직이 적극적으로 글을 기고했더라면 성서에 대한 글 중에서 신약에 대한 내용이 보다 풍부하고 다양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박형룡의 입장과 김재준의 입장


박형룡의 입장에서 자유주의자인 김재준과 송창근은 1935년 5월호를 마지막으로, 채필근은 1935년 9월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신학지남」에 글을 기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 박형룡 본인도 밝혔듯이 줄기차게 문제제기를 한 성과였다. 박형룡의 입장에서 본다면 변증학을 선택했기 때문에 어떤 것을 진리라고 인식하고 그것을 변호하고 수호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8] 그렇기 때문에 그 진리의 기준에 김재준의 글이 맞지 않았음을 인식한 순간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김재준의 글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했던 것이다.[9] 반면 김재준의 입장에서는 성서신학에서의 다양한 비평은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더욱 진리답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역사적 비평을 통해서 성서를 더욱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진리에 한 걸음 더 나아간다고 본 것이다.[10] 

김재준 글의 특징


김재준의 글쓰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는 신앙을 바탕으로 글을 쓴 것이다. 그는 복음의 자유를 침해하여 교리의 문제를 가지고 ‘이단 재판’을 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라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복음의 자유’ 개념은 곧바로 ‘양심의 자유’ 개념과 통한다.[11] 그는 이러한 양심의 자유의 기반 속에서 글을 썼고, 그가 쓴 글에 대해서는 무한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의 글이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는 것은 단지 현학적으로 자신의 글쓰기 기술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을 치열하게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는 언행일치를 뛰어넘어 ‘문행일치’를 위해 노력한 학자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자연스럽게 도덕적 행동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김재준의 문장력은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도 인정할만한 수준이었다.[12] 김재준이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은 인간적인 고민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말하려고 한 노력이었다.[13] 또한 이 논문의 연구방법은 역사비평학이었다. 성서 본문을 역사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살펴보고 설명하고자 애썼다.[14] 이것은 당시 한국 장로교의 주류 세력인 근본주의자들의 성서 해석방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글이었다.[15]
그러나 어떤 신학자의 입장을 그의 글에서 파악하기에는 실제로 그 신학자가 쓴 글을 우선적으로 주의 깊게 읽는 독서가 필요하다. 김재준의 글을 선입견 없이 읽어보았을 때 그가 ‘성경파괴자’이고 기독교 신앙을 해치기 위한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16] 오히려 박형룡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든 글은 김재준의 글이라기보다는 송창근의 글이었다. 그리고 채필근 역시 박형룡의 입장에서 자유주의자로 인식되었지만 그의 글에는 전혀 자유주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중도에서 조금 보수쪽으로 기울어진 글을 많이 발표하였다.

[신학지남]의 신학적 수준 향상에 기여


「신학지남」 전체를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김재준과 송창근이 기고하던 시절의 「신학지남」은 보다 내용이 다양하고 풍부했다고 본다. 김재준은 박형룡의 글에서 착안하여 ‘뿍맨 운동’에 대한 글을 기고하였다. 박형룡 역시 김재준이나 송창근을 의식하고 자신의 글을 보다 설득력이 있게 다듬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김재준으로서는 신학지남에 다양한 양식의 글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유학 시절에 배운 신학을 실제 현장에서 실험적으로 적용하는 시기를 가졌던 것이다. 학문으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실제 현장 속에 조금 더 깊고 넓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형룡으로서는 아쉽게도 박사학위를 받을 때의 신학적 입장에서 이후 한국의 교계의 교권 다툼 속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서 학문적으로는 후퇴한 것이다. 진보적 신학이건 보수적 신학이건 과거의 모습보다는 조금 나아진 현재가 되어야 하고 현재보다는 더 나아진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하지만 그런 점에서 박형룡과 보수 신학은 한동안 제자리 걸음과 후퇴를 보여준 것이다.[17] 이것은 자신이 배운 신학을 계속적으로 단련시키고 훈련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박형룡으로서는 교권의 헤게모니 싸움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음으로 교세의 차원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신학의 차원에서는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다.



[각주]
1. 홍치모,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의 신학지남의 역할,” 「신학지남」, 제254호 (1998.3): 24-26. 「신학지남」의 영문 표기는 「The Theological Review, A Theological and Homiletic Quarterly」로 되어 있다. 신학지남은 신학적이며 설교학적 계간지로서 그 본래적인 성격과 내용은 신학의 실제적인 면을 다루는 실천신학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7회 회의록에는 「신학지남」 제1권 제2호가 2500부가 팔렸다고 전한다. 참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회 회록』(1918.9), 25쪽. 한편 1928년 남궁혁이 편집책임을 맡으면서 영문 표기는 “The Theological Review”로 바뀌었으며, 이 시기에 신학지남이 초기에 지켜왔던 실천신학 분야가 약화되는 인상을 주었다.
2. 이호우, “1930년대의 성서관 논쟁과 신학적 패러다임의 형성,” 79. 1916년에 감리교 신학교에 「신학세계」 창간호에 양주삼 목사의 구약에 대한 고등비평이 실리기 시작했다. 반면에 1918년 평양 장로교신학교에서 출판하기 시작한 「신학지남」은 성경에 대한 일체의 비평을 용납하지 않았다.
3. 박형룡 박사는 이후 1930년에 평양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박형룡의 입장에서 채필근 목사는 자유주의자였지만 온건한 자유주의자로서 자유주의와 정통주의의 평화공존을 주장하는 정도였다고 보았다. 참고. 채필근, “迷路에 彷徨하는 自由主義信徒에게,” 「신학지남」 제15권 제1호 (1933년 1월호): 24-28.
4. 송창근은 「신학지남」 제15권 제1호(1933년 1월호)에 “기독교의 윤리문제”라는 글을 처음 기고하였다.
5. 홍치모,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의 신학지남의 역할,” 32. 남궁혁은 김재준 목사를 평양신학교 교수로 초빙하려고 직접 혹은 간접으로 여러 번 시도하였지만 평양신학교의 선교사 교수들은 김재준 목사의 신학배경이 자유주의적이라는 이유에서 거절하였다고 한다.
6. 김재준은 「신학지남」에 ‘김재준’, ‘장공’, ‘편집인’ 등의 필명으로 게재하였다.
7. 홍치모,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의 신학지남의 역할,” 「신학지남」 제254호 (1998.3): 26-27. ‘강도도형(講道圖形)’이라는 말은 설교계획(Sermon plan) 또는 요약설교(Sermon Outline)을 의미한다. 신학지남의 총색인을 살펴보면 실천신학 분야의 논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 “신학지남 논문 총색인(1918-1983)”, 「신학지남」 제50권 제4호 (1998.3): 311-373.
8. 이상웅, “초기 박형룡 박사(1897-1942)의 신학 형성 과정에 대한 소고,” 「신학지남」 제79권 제1호 (2012.3): 235.
9. 주재용, “한국신학사에 있어서의 김재준의 위치,” 462-463. 박형룡에 의하면 한국교회가 신학을 수립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신학체계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적전통의 正信仰”을 그대로 보수하는 신학이요 한국교회가 창립되던 때 받은 신학을 “영구한 소유로 확보”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교회가 창립되던 때 받은 신학이라 함은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을 의미한다. 참고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56), 263.
10. 주재용, “한국신학사에 있어서의 김재준의 위치,” 471; 장동민, “1930-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에서의 소위 ‘자유주의’ 해석의 문제,” 217. 김재준이 성서에 대해 고등비평적인 접근을 한 것은 성경의 진리를 보다 학문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함이었다.
11. 장동민, “1930-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에서의 소위 ‘자유주의’ 해석의 문제,” 214-216.
12. 홍치모, “한국보수신학의 입장에서 본 김재준,”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서울: 풍만출판사, 1986), 286-310. 김재준의 예리한 문장은 젊은 독자층을 사로잡았다. 그는 글에 있어서 재사(才士)였다. 젊어서 문학서와 소설을 많이 탐독한 것이 그로하여금 명문장가로 만들었다.
13. 주재용, “장공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184-187. 김재준의 관심은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하심, 즉 역사에 있었단. 그의 역사의식을 가장 강하게 자극한 것이 예언자 연구였다. 김재준은 예언자 연구를 통해 혼돈과 부패, 무기력해 가는 당시 우리의 어두운 시대에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했고, 그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려고 하였다. 이 일념에서 그는 성서에 대해 학문적인 접근을 했던 것이다. 한국교회에 감추어지고 있었던 성서를 다시 발견해 드러내 놓으려고 하였다.
14. 김재현, 허선호, “장공 김재준의 마태복음 5:5 해석에 관한 연구: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성서 해석학을 위하여,” 「신학연구」 제79집 (2021.12): 108-109. 김이곤은 장공의 성서해석에서 전반적으로 구속사적이고 기독론적인 관심에 초점을 맞춘다. “실로 구속사적이고 기독론적인 관심은, 장공에게 있어서는 구약과 신약을 포함하는 성서 전체를 해석하는 중심적 파라미터(parameter)였던 것이다.” 이영미는 장공을 “비평적이면서 고백적인 현실참여의 성서 해석을 펼친 신학자”로 보았다. 송순열은 장공의 삶과 성서 해석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장공의 삶과 성서 해석을 한 평행선에서 살펴볼 때, “역사적 패러다임의 선구자”, “실증적 패러다임으로부터 해방과 실천적 해석”, “성육신으로 승화된 패러다임”으로의 변천과정이 있다고 보았다.
15. 주재용, “한국신학사에 있어서의 김재준의 위치,” 462. 박형룡에게 있어서 김재준의 신학은 기왕에 한국장로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파괴적 도전의 신학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16. 장동민, “1930-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에서의 소위 ‘자유주의’ 해석의 문제,” 194. 김재준의 글을 면밀히 검토한 장동민은 1930년대 김재준의 글들 가운데에서 성경의 영감이나 전통적인 교리를 반대하는 글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김재준이 글을 통해서 부정하려고 하였던 것은 성경의 영감이 아니라, 이른바 ‘교리주의적 성경해석’이었다고 주장한다.
17. 장동민, “1930-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에서의 소위 ‘자유주의’ 해석의 문제,” 200-202. 박형룡은 박형룡은 그의 학위논문, “Anti-Christian Inferences from Natural Science”(1931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소재 남침례신학교)에서 프린스턴의 이와 같은 해석의 유동성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적어도 박형룡은 그의 학위 논문에서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유지하면서도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기보다는 자연과학의 발견들을 인정하고 이를 해석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귀국한 이후에 그의 신학적 행보는 축자영감설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후퇴하였다.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및 휘호

1월 24, 2026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 본 내용은 김경재 교수가 집필한 『김재준 평전』(2001)에 수록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1901년 9월 26일

함북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꼴마을에서 김호병 씨와 채성녀 씨의 2남 4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남


1905년 ~ 1910년

서당 훈장이셨던 부친으로부터 『천자문』, 『통감』,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을 읽고 몸에 익히면서 가풍을 따라 유교의 세계에서 소년 시기를 자람


1910년 ~ 1915년

9살 때 경원 향동소학교 3학년에 편입, 고건원보통학교를 마치고, 회령 간이농업학교를 졸업(13~16세)


1915년 ~ 1917년

회령군청 간접세과 고원으로 취업


1917년

18세 때 장석연 씨의 맏딸 장분여와 결혼. 이후 일생을 해로하면서 3남 3녀를 낳고 기름


1917년 ~ 1920년

회령군청에서 웅기 금융조합 직원으로 전직. 웅기에서 만주, 시베리아로 망명하는 애국 지사들을 수시로 보며 가냘픈 민족 의식이 싹트기 시작


1920년

웅상 출신 청년 전도사로 서울 남대문교회 송창근 전도사의 방문을 받고, 나라와 교회를 생각하고 뜻을 품음. 웅기금융조합 사직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남


1920년 ~ 1923년

중동학교 고등과에 편입. 서울 YMCA 영어 전수과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이상재ㆍ윤치호ㆍ신흥우 등의 강연을 듣고 신문화 흡수에 전력함. 톨스토이와 성 프란시스 전기 등을 탐독하고 청빈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음


1924년

승동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연합 사경부흥회 때,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믿기로 결심하고 회심을 경험함. 믿은 지 3년 후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1924년 ~ 1926년

함북 경흥에 귀향하여 용현소학교, 귀낙동소학교 신아산소학교에서 교사로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침


1926년 ~ 1928년

일본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에서 고학하면서 자유로운 학풍에서 신학 공부. 1928년 아오야마 신학부 졸업. 기독교 사상과 신앙을 주축으로 한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칠 것을 설계함. 졸업반 때 귀향하여 두만강 유역 교회를 순방 강연함


1928년 9월 ~ 1932년 5월

미국에 유학함. 1928년 9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업하고, 1929년 9월 미국 웨스턴 신학교에 편입학. 같은 학교에서 1932년 5월 신학사(S.T.B), 1932년 5월 신학석사(S.T.M) 학위를 받음. 미국 경제 공황에 직면하여 귀국함. 미국 유학 시절 송창근, 한경직과 특별한 신앙 동지로서의 우의를 굳건히 함


1933년 4월 ~ 1936년 4월

귀국 후 평양에서 3년을 지냄. 1933년 4월 숭인상업학교 교유에 취임하고, 평양 산정현교회 집사직으로 봉사하다가 1933년 8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講道師) 인허를 받음. 1936년 4월 신사 참배 문제와 민족 교육 금지 문제로 숭인상업학교 교유직을 사임함. 이 무렵 순교자 열전 연구에 몰두함. 평양 3년 머무는 기간 동안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등 젊은 소장 학자들은 평양신학교 신학 연구지 『신학지남』에 기고자로 관계를 맺게 되고, 유형기 박사의 『단권 성경 주석』 번역자로서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세 사람 연서로 성명서를 냄


1936년 8월 ~ 1939년 9월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에 봉직하면서 3년을 간도에서 청년 교육에 힘씀. 1936년 8월, 은진중학교 교유에 취임. 1937년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받음. 1937년 5월부터 1938년 2월까지 월간 『십자군』을 발간함


1939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평양신학교가 폐쇄됨


1939년 9월 ~ 1940년 2월

서울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의 재정을 기반으로, 조선신학원 설립 기성회가 발족(김대현, 송창근, 김영주, 차재명 중심) 설립 사무 실무 책임자로 김재준 목사가 간도 은진중학을 사임하고 설립 사무를 전담하여 추진


1940년 3월

조선신학원이 경기도 도지사 인가로서 승동교회에서 개교. 설립자 겸 원장에 김대현 장로, 이사장에 함태영 목사, 교수로서 윤인구, 김재준 임명


1941년 ~ 1944년

일제 말기 조선신학원 끝까지 지킴. 일제에 의한 관제 『조선 혁신 교단』 시절(1942)과 조선신학원과 감신의 『합동 강의』 기간 동안에도 조선신학교 교장으로서(1943~46) 학교를 지킴


1945년

해방의 기쁨과 함께 8월에 「기독교 건국 이념」 집필 발표. 9월에 천리교 본부 건물을 미군정청으로부터 인수 불하받아 동자동 교사 시대 교수로 일함. 12월에 경동교회를 설립함


1946년 3월

송창근 박사가 제4대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고, 김재준은 한경직과 함께 교수가 됨. 6월 장로교 남부 총회에 의해 총회 직영 신학교로 지정


1950년 1월

『십자군』을 속간하여 1951년 8월까지 속간 30호 발간함


1950년 ~ 1951년

6ㆍ25 동란으로 같은 해 8월 송창근 학장 북으로 피랍. 1951년 3월 부산 피난 전시 대학 개강. 부산 항서교회당 및 남부민동 임시 천막 교사에서 수업.


1951년 4월

학교명을 한국신학대학으로 변경, 김재준 목사 학장 서리에 취임


1953년

장로교가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분열. 장로회 37회 대구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직 파면 선언, 한국신학대학 총회 인준 취소, 한신 출신 교회 취임 거부, 이미 위임된 한신 출신 목사들의 노회 재심 등을 불법적으로 결의. 대구 37차 총회의 불법성에 저항하여, 같은 해 6월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장로회 38회 호헌총회를 개최. 기독교장로회 탄생


1953년 ~ 1957년

서울 환도 후 동자동 교사에서 학장 서리 겸 교수로서 봉직


1958년 ~ 1959년

1957년 12월,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새 캠퍼스로 입주. 김재준 목사 제6대 학장으로 취임. 캐나다 연합교회 초청으로 순회 답방(1958.8~1959.9)


1959년 5월

밴쿠버에 소재한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립대학교 유니온 칼리지에서 명예신학박사 수여받음


1961년

5ㆍ16 군사정변으로 군사 정권에 의해 60세 정년제 강행으로 동년 9월 한국신학대학 학장직 및 교수직에서 강제 퇴임. 쌍문동 국민주택으로 이주함


1961년 8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이 됨


1965년 4월

한국신학대학 명예학장으로 추대됨. 9월에 기독교장로회 총회 총회장으로 추대됨. 한신학원 제7대 이사장으로 피선(1966.9~1970.9)


1965년

한ㆍ일 굴욕 외교 반대 국민 운동을 한경직 목사와 주도하여 영락교회에서 대중 강연, 교회의 대사회 참여 운동 시작


1970년 9월

월간지 『제3일』 창간. 박형규, 현영학, 서광선, 이문영,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등이 동인으로 참여


1972년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장이 됨. 12월에 유신헌법이 발포됨


1973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장으로 추대됨.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김재준, 함석헌, 천관우, 지학순, 이병린)


1974년 3월

캐나다로 출국. 11월에 북미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직 수임(2회 연임)


1974년 10월

캐나다에서 『제3일』 속간. 1981년 6월호까지 속간 60호 발간


1975년

북미주한국인권수호협의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됨


1983년 9월

귀국


1983년 ~ 1985년

전국 국토 순례. 『재야 원로 모임』에 참여하여 민주화 운동과 평화 통일 운동을 지속함


1987년 1월

고문으로 살해당한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발기인이 됨.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유언으로 남김


1987년 1월 27일

서울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에서 87세로 별세


생명 평화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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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김재준의 『낙수(落穗)』 :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책

1월 14, 2026

80년 전에 발간된 「낙수」

長空 김재준 목사(1901~1987)는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이후 1930년대 초반에 「신학지남」의 편집 실무를 맡아보기도 하였다. 이때 김재준 목사는 신학적 글과 함께 짧은 단상들을 「신학지남」에 다수 발표하였다. 그런데 당시 한국의 신학계의 상황은 선교사들이 가르쳐준 신학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시대였다. 새로운 신학적 사고를 하고 있던 장공은 결국 「신학지남」의 편집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교육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던 김재준 목사는 1930년대 중반 이후에 평양과 간도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특별히 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서 가르쳤던 학생들은 이후 한국기독교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강원룡,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등).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장공은 개인 잡지로 월간 「십자군」을 창간해서 많은 글들을 발표하였다.

1939년에 조선신학원 설립을 위한 실무를 맡게 되어 간도를 떠나 서울로 자리를 옮겼을 때, 마침 「교문사」를 창간한 최인화 씨가 김재준 목사를 찾아왔다. 그는 「신학지남」과 「십자군」에 실렸던 김재준 목사의 글을 단행본으로 출간할 것을 권고하였고, 그 결과 1940년에 『낙수』라는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시대를 초월하여 새로움을 전해주는 책

1940년대 일제강점기의 말기, 해방, 그리고 혼란 속에서의 격동기에 김재준 목사의 『낙수』는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강조하고, 신학을 바탕으로 한 성서를 보는 시각을 폭넓게 제시한 책이었다. 특히 해방 전후와 6ㆍ25를 거치는 격동의 시기를 지내면서 시대의 우울함 속에 방황하던 청년들에게 기독교적 가치관과 올바른 역사 의식을 제시해 주었다. 한신에서 신학을 공부하거나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에 속한 목회자들 중에는 이 『낙수』를 접하고 신학과 목회를 결심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낙수』에 실린 글은 80년이 지난 오늘에 읽어도 새롭게 다가오는 글들이 많다. 그 중에서 “주일학교 교사에 대한 몇 가지 제언”이라는 글은 오늘의 교회 현장에서 다시 읽어도 손색이 없는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교회학교의 상황이 80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변함없고 오히려 후퇴했다는 느낌을 전해주기에 서글픈 생각이 들 정도다.

『낙수』는 예언자들 중에서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등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도와주며, 교회 역사를 통해서 신앙을 지켜낸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성서와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책이었다.


장공의 필체를 복원하는 작업

아쉽게도 1940년에 발행된 『낙수』의 원본은 쉽게 구할 수 없다. 대학교의 도서관에서도 고문서로 취급이 되어서 열람이나 대여가 제한되고 있는 실정이다. 『낙수』에 실린 글들이 1971년에 편집 출간된 『장공전집』(전 5권)과 1992년에 편집 출간된 『장공전집』(전 18권)에 대부분 수록이 되어 있지만, 옮기는 과정에서 오탈자가 생겼고 시대적 상황(맞춤법 등) 속에서 수정(?)이 가해져서 변형되었다. 그래서 『낙수』에 실렸던 글들은 글의 전체적인 주제에는 변함이 없지만, 부분적으로 애초에 ‘장공의 필체’가 변형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장공은 가끔 옛말과 방언을 즐겨 사용했다. ‘스사로’가 ‘스스로’의 방언이고, ‘거저’가 ‘그저’의 방언이며, ‘도모지’가 ‘도무지’의 옛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장공의 글을 읽다보면 남다른 맛을 느낄 것이다. 또한 장공이 즐겨 사용한 한자어를 있는 그대로 읽다보면 독자들이 장공 자신도 느끼지 못했던 장공만의 독특함을 새롭게 느낄수도 있다고 본다.


『낙수』의 원문을 최대한 살려야 하는 이유

누군가는 장공을 앞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지속되는 한, 한신대학교가 지속되는 한 ‘장공’이라는 이름과 ‘장공의 글’은 다양한 방법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의 신학을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장공이 남긴 글은 다양한 신학의 분야에서 언급되고 검토되기에 충분한 내용들을 갖고 있다.

장공의 글의 원문을 복원하는 작업은, 나중에 장공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1차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공의 글은 1990년대의 어휘나 1970년대의 어휘가 아닌 1940년대의 어휘로 접해야 제 맛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1940년판 『낙수』의 원문을 복원해서 올리도록 할 것이다. 되도록 오탈자까지도 동일하게 복원하려고 노력했으며,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를 위한 서비스로 음역을 달아놓았고 낯선 용어와 어휘는 각주로 설명을 추가하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80년 전의 문서이기 때문에 인쇄상태가 좋지 못해서 알아보지 못하는 글자가 있고, 마지막 몇 페이지는 누락되어서 할 수 없이 1971년판 『장공전집』을 참고했음을 미리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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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장공기념사업회’에 있을 때 『낙수』를 일일이 타이핑해서 각주를 넣어 교보문고 POD로 출판한 적이 있다. (아직도 인터넷 상에서는 주문이 가능하다) 당시에 오타까지 똑같이 베끼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그 작업을 하면서 장공의 글이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다는 느낌을 가지기도 했다. 만약 그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오늘날 한국의 신학은 더욱 풍성해졌을 것이라고 예상해 본다.

아래 이미지를 클릭하면 교보문고에서 출간한 『낙수』를 확인하고 주문할 수 있다.

이 블로그에는 책으로 접하기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낙수』의 글들을 정리해서 하나씩 올려놓으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각주를 추가할 수 있으면 추가해 보려고 한다. 

장공 김재준과 북간도, 그리고 잡지 《십자군》 발행에 대하여

1월 13, 2026

평양에서 북간도로: 새로운 모색을 꿈꾸다


김재준(1901-1987)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1933년부터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유로 부임하였다. 당시 평양에는 송창근 목사가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로 시무하면서 김재준이 평양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시기에 김재준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기관지인 『신학지남』의 편집 실무를 담당하면서 글을 기고하였다. 그러나 그의 글에 대해서 보수 정통주의를 표방한 박형룡 등이 문제를 삼기 시작하였고, 결국 『신학지남』에 글을 더 이상 기고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학교에는 점차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가 강화되기 시작하였는데, 김재준은 개인적인 신앙으로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적 요소를 가진다고 생각하여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사직하였다(1936년).

숭인상업학교를 그만두고 몇 달이 지나자, 숭실전문학교 교장 마우리 박사가 김재준을 찾아왔다. 김재준을 추천하기 위해서였다. 김재준은 바로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교유, 즉 교목 겸 성경교사로 부임했다. 은진중학교는 캐나다 선교부에서 지원하고 있었다. 김재준은 이 나라 이 민족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새 세계, 새 인류의 지도자가 될 창조적 소수를 길러내는 학원’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뚜렷했다. 김재준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은진중학교에 갔다.

1937년 5월호 『십자군』 제1권 제1호

1937년 5월호 『십자군』 제1권 제1호


북간도에서 잡지 『십자군』을 발행하다


김재준은 북간도 은진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잡지 『십자군』을 발행하였다. 『십자군』 발행에 대해서 『장공 김재준의 삶과 신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김재준이 용정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용정에서는 신사참배가 강요되지 않았다. 김재준은 자신이 평양에서 쓴 『순교자 열전』을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일본 영사관을 찾아갔다. 그러나 담당직원은 원고를 읽어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두고 가라고 했다. 한 달쯤 지나서 다시 김재준은 영사관을 찾아갔다. “너무 잔인한 기록이어서 민심을 자극할 것 같고 신사참배 거부소동이 야기될 우려도 있으니 출판은 중지하는 게 좋겠소.”라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원고라도 돌려 달라는 김재준의 요청에 “원고도 압수하기로 결재났소!”라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에 김재준은 정기간행물로 잡지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정기간행물은 검열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십자군(十字軍)》 첫 호를 냈다.

《십자군》은 만주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던 김재준이 이태준의 협조를 얻어 창간한 월간지이다. 창간호부터 2호까지는 총 12면의 얇은 팜플릿에 불과했지만 제3호부터는 국판 40면으로 확장시킬 만큼 독자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재준은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가 아닌 사회의 각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이 활동하기를 원했다.

... 1937년 5월 창간되었지만 일제의 규제로 인해 1년도 채 못 된 1938년 2월에 폐간되었다. 그 후 1950년 속간되고 1957년까지 간행되었다. 이 잡지를 통해 김재준은 한국의 몰역사적 보수 정통주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주체적 역사 참여 신학을 강조했다.

【참고】 장공김재준목사기념사업회, 『長空 김재준의 삶과 신학』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14), 82-83. 


잡지 『십자군』의 의미에 대하여


잡지 『십자군』은 1930년대 김재준이 발행한 개인잡지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1930년대 상황을 한 목회자(교사)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내용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1) 김재준과 성경 번역

한 목회자의 글이지만 『십자군』에 실린 글에는 상당히 중요한 글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우선 김재준은 『십자군』을 통해서 구약성경 창세기 1장부터 4장까지 사역해서 소개하고 있다. 당시에 개역성경 번역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기간에 히브리어 실력은 누구보다 뒤지지 않았던 김재준이었지만 번역위원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재준은 『십자군』을 통해서 성경 창세기를 사역한 것이며, 특별히 김재준의 사역은 당시 개역성경에 비해 여러모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고】 이환진, “「十字軍」(1937-1938)에 실린 김재준 목사의 창세기(1-4장) 번역의 특징,” 「성경원문연구」 제32호 (대한성서공회, 2013): 7-29.

2) 김재준과 교회연합 운동

그리고 십자군에는 특별히 ‘교회연합’(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김재준의 입장이 다수의 글에 소개되어 있다. 1930년대 교회연합운동은 위기의 시기였다. 장로교의 불참으로 결국 교회연합이 와해되었고, 그러한 틈을 이용해서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것이다. 만약 당시에 장로교가 불참하지 않고 연합운동이 활발했다면 일제가 그렇게 쉽게 연합공의회를 강제로 해산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재준은 당시에 장로교 목사이지만 교회연합에 대해서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었는데, 1930년대 교단의 지도층 인사가 교회연합에 대해서 강조한 사례는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변방(북간도)의 한 목회자가 교회연합에 대해 강조한 사례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있는 자료라 생각된다. 아울러 이러한 김재준의 교회연합에 대한 생각은 이후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출범 이후에 적극적으로 교회연합에 참여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3) 김재준의 청빈 사상과 어거스틴

김재준이 성 프란체스코의 삶을 자신의 청빈의 모델로 삼았다는 것은 기장의 목회자라면 당연히 아는 상식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십자군』에서 김재준은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번역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김재준 자신이 어거스틴의 글을 ‘경건 문학’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김재준의 청빈은 후에 한신대학교의 ‘학문과 경건’에서의 ‘경건’의 바탕이 되는데, 여기에 어거스틴의 참회록이 그의 경건의 하나의 뿌리로 인식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김재준이 번역한 참회록에서 화자인 어거스틴은 끊임없이 절대자인 신(하나님)을 찾고 갈망하고 있다. 김재준은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고대 기독교 교부 중에서 어거스틴에게서 그 모델을 발견한 것이라고 본다.

4) 한국교회사의 의미있는 초기 사료

그 밖에도 십자군의 다양한 글들은 한국교회사의 초기 사료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쉬운 것은 현존하는 『장공전집』에는 십자군의 글이 다수 누락되어 있으며, 현대인들이 보기에 어려운 한자어, 그리고 해독이 불가능한 단어와 문구가 있어서 보다 집중적인 관찰과 검토가 필요하다.

[사도행전 10:9-10, 47-48] 경계를 넘나드는 교회 – 1996년 6월 11일, 김상근 목사

경계를 넘나드는 교회 사도행전 10장 9-16, 47-48절 / 향린교회 [회상 노트] 한국 교회의 노인화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노인들이 교회를 완전히 점령한 상태다. 엄격히 말하면 노인 문화와 노인 정서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문화적 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