損失[손실]과 未知[미지]의 길
- 전영택
『예수믿으면 福[복]을 받는다』. 『예수 믿으면 天堂[천당]간다』하는 것이 흔이 하는 말이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일이 잘 되고 萬事亨通[만사형통]하야 忽然[홀연]이 武陵桃源[무릉도원]에 泰平生活[태평생활]을 하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이 例事[예사]요, 실상 누구나 예수를 믿어서 (現世[현세]에서나 來世[내세]에서나) 安心[안심]과 喜樂[희락]과 幸福[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事實[사실]이다. 그러나 예수의 宗敎[종교]는 잃어버리는 道[도]요, 失敗[실패]와 不幸[불행]과 患難[환난] 苦痛[고통]이 닥처오고 未知[미지]의 길, 〇〇不安[불안]의 길을 가야하는 冒險[모험]의 生活[생활]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라서 무엇을 얻고저하고 利[이]와 德[덕]을 보고저 한다면 그는 큰 狼狽[낭패]를 볼 것이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하면 잃을 것이오 또 누구든지 나를 위하야 제 목숨을 잃으면 차질시니』(마태 16:25)하셨고 사도 바울은 『내가 저를 위하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분토로 여긴다』(빌립보 3:8)하였다. 예수를 따르고저 하는 자는 예수를 위하야 『집이나 형제나 누이나 부모나 자식이나 田土[전토]를 버리라』하였으니 무릇 現世[현세]의 사랑이나 財物[재물]과 모든 내게 있는 것을 바려야 하고 다시 現世[현세]에서는 얻기를 바라지 말어야하고 現實的[현실적] 幸福[행복]을 바라서는 안될 것이어니와 설혹 來世[내세]의 福樂[복락]과 神靈[신령]한 恩惠[은혜]라도 받기를 바라는 바라므로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은 眞[진]짜 宗敎[종교]가 아니오 眞正[진정]한 宗敎人[종교인]의 精神[정신]이 아니다. 웨 그런고하니 宗敎[종교]는 하느님에게, 또 예수를 위하야 兄弟[형제]를 위하야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오 잃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朝鮮敎會[조선교회]가 가는 곳마다 쓸슬하고 信者[신자]나 不信者[불신자]나, 敎役者[교역자]나 항〇 社會人[사회인]이나, (그 生活[생활]과 사람을 對[대]하는 態度[태도]가) 별도 다른 것이 없을뿐 아니라 도리어 더 〇하고 더구나 近日[근일]에 敎會內[교회내]에 이로 筆舌[필설]도 옴길 수 없고 말하기도 붓그러운 醜聞[추문]이 각금 들리는 것은 그 속에 아모리하아도 무슨 큰 病痛[병통]이 있는 까닭일지니 그렇지 아니하면 神聖[신성]한 예수의 道[도] 예수의 敎會[교회]가 설마 그럴수가 있으랴 그러면 이 病因[병인]이 무엇인가 내 미련한 생각에는 이 病因[병인]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에 처음 傳道[전도]를 할때에 始作[시작]과 出發[출발]을 잘못한 까닭인 것 같다. 무엇을 얻고저하는 마음으로 福[복]을 받고 樂[낙]을 보자는 뜻으로 하였기 때문인줄 안다. 우리 信仰[신앙]이 現實的[현실적] 幸福[행복]이나 靈的[영적] 或[혹]은 未來[미래]의 幸福[행복]이나 말할 것 없이 그 動機[동기]에 있어서 무엇을 要求[요구]하고 얻고저하므로 믿는 功利的[공리적] 態度[태도]에서 나왔다면 根本心理[근본심리]에 있어서 잘못이다. 이러한 動機[동기]와 心理[심리]를 가지고 믿어왔기 때문에 그 實生活[실생활]에 있어서 모든 하는 態度[태도]에 있어서 사랑과 의리가 없고 쓸쓸하고 冷冷[냉냉]하야 結局[결국]은 예수의 가신 길과는 어그러지는 딴길을 가게 되나니 대개 그 動機[동기]와 精神[정신]이 예수의 그것과 背馳[배치]되는 까닭이다.
세례요한이 예수께 대하야 말한바 『그는 興[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衰[쇠]하여야 할지니』한 것이 곳 基督敎[기독교]의 根本的[근본적] 精神[정신]이다. 세례요한의 이 態度[태도], 이 精神[정신]은 實[실]로 예수의 先驗者[선험자]로서 偉大[위대]하고 또 當然[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十字架[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祭司長[제사장]과 書記官[서기관]과 長老[장로]들이 히롱하는 말로 『저가 다른 사람은 구원하였으되 제몸은 구원치 못하는도다』 한 것은 어리석은 말이면서 또한 事實[사실]이요 眞理[진리]이었다. 남을 救[구]하려면 내 몸은 救[구]하지 못하는 것이오 내 몸을 救[구]하려면 다른 사람은 救[구]할 수 없는 法[법]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목숨을 바려 속죄하야 주려함이라』 예수에게 있어서는 받으려함이 目的[목적]이 아니오 바리고 주는 것이 目的[목적]이다.
이 精神[정신]을 그대로 받고 나아간 이는 使徒[사도] 바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히는 지혜롭고 우리는 弱[약]하되 너이는 强[강]하고 너히는 尊貴[존귀]하니 우리는 卑賤[비천]하야...』(고전 4:10)... 한 것을 보든지 또 자기와 그리스도와 사이의 사랑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아모 것도 끊을 것이 없다하는 그로서 『내가 큰 근심이 있어 항상 마음에 애통하노라 대개 나의 兄弟[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야 내가 그리스도께 끊어지는데까지 이를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로마 9:23)하는 悲壯[비장]한 心情[심정]을 보든지 그는 예수의 마음 그대로 가지고 그대로 살아간 사람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언제나 얻을랴고 하는 거지의 心理[심리]를 버리고 내 것을 잃어버리고 泰然[태연]하고 남에게 주어서 기쁨을 느끼는 丈夫[장부]의 氣槪[기개]를 가져야 하겠다. 하물며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안되기를 〇〇하고 발목을 잡아 끌어내리려고 하는 惡魔的[악마적] 心理[심리]를 가져서 될 수 있으랴.
우리는 예수를 爲[위]하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뷘손뷘몸으로 아부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서 未知[미지]의 길을 떠나간 것 같이 服役[복역]과 冒險[모험]으로 갈 것이다. 그리하야 얻을 것이 있다면 하느님이 아실 일이요 우리의 알바 아니다.
무엇을 받고저 얻고저 〇〇 바라는 생각으로 하든 그릇된 信仰生活[신앙생활]을 버리고 잃어버리고 주고저 하는 生活[생활]의 길로 再出發[재출발]을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