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0일 화요일

[범용기 제3권] (22)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재야 민주원로들 모임

재야 민주원로들 모임

1973년 12월 13일 YWCA 알로하홀에서 모인 ‘민주원로회의’도 사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간부들이 주최한 것이었다. 이 모임이 실현되기까지에는 장준하가 무던히 수고했다.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도 나왔다. 신교측에서는 한경직을 나오게 할 작정으로 그 임무를 내가 맡았다. 두어번 찾아갔었고 모이는 당일 오는 길에 들러서 데리고 나왔다. 이분들이 정계의 원로라지만 과거의 경력으로 볼 때에는 정적(適)이던 쓰린 기억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계로 치더라도 가톨릭과 신교, 유교, 천도교, 불교 등등의 다른 충성대상을 갖고 있는 분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다는 그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훈제가 사회하고 천관우가 취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내가 인사말씀이라고 했다. ‘말씀’이래야 간단한 것이었다. “민주한국이 독재에로 급전직하[1]하는 위기에 있어서 민주정치의 원로되시는 분이 한자리에 모일 기회라도 마련되기를 바라왔습니다. 그 우리의 숙원이 이루어져서 오늘 이렇게 모실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여러 어른들을 한자리에 모시게 되는 순간, 우리 임무는 끝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모임입니다. 말씀들 하십시오.” 했다. 한참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어느 분인가가 말을 꺼냈다.

“이렇게 모일 기회란 좀처럼 만들기 어려운 건데 주최하신 분들의 수고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왕 모였으니 우리 서로 기탄없이 얘기해 봅시다” 한다.

그리고 “회 진행을 위해서 좌장을 한 분 모시기로 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는 백낙준 박사가 최연장자신데 백 박사님 사회하시지요.”

만장일치였다.

결의된 중요사항은 -

① 자유민주한국을 회복하려는 우리의 목표는 더 토론할 것도 없는 명제로 채택하고

② 우리 낫살[2]이나 먹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또 성명서나 내고 헤어진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니 박 ‘대통령’에게 직접 면담을 요청하자.

③ 그러나 면담이 허락된 때에도 이쪽에서 말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 대비하여 우리의 말하려는 내용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동시에 제출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등등이었다.

제3항의 얘기는 김수환[3] 추기경이 자기 경험에서 하는 말이었다. 김 추기경은 세 번 박정희와 만났는데 세 번 다 ‘박’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한다. 한 번은 진해에서, 두 번은 청와대에서였는데 세 번 다 식사를 같이하자는 것이었다. 교회로서의 반정부운동이 표면화한 무렵이었는데 진해별장에서 일부러 초청이 왔었다.

식사시간에 식탁에서 만나도록 짜여 있는 ‘프로’였다 한다.

식탁에 앉아마자, 박정희 씨는 자기 얘기를 끄집어낸다. 시국담에서 시정방침에서, 얘기는 그칠 새 없다. 손님은 말 끄어낼 짬이 없게 군다. 그래서 듣기만 하다가 ‘박’의 얘기 끝날 무렵이면 비서장인가가 들어와서 “각하! ○○ 가실 시간입니다” 한다. ‘박’은 “오, 그래?” 하고서 자리를 뜬다. 그 밖에도 두 번 청와대 초청에 응했었는데, “이번에는…” 하고 말할 항목을 외이다싶이 해 갖고 들어간다. 그러나 여전하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면담’했다는 실속없는 선전재료에 이용되지 않기 위해서 미리 서면진술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말했다.

“신문사에서는 그때마다 김 추기경이 박 대통령과 직접 면담했다. 박 대통령은 추기경을 만찬에 초청하여 단독회담했다… 등등으로 보도된다. 그래서 가톨릭은 ‘친여’로 변질된 것 같이 보이고, ‘박’은 기독교에 관대하다는 인상을 받고… 이래저래 ‘나’만 손해보고 이용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그럴듯해서 문서기초위원과 면담위원을 선출했다. 기초위원으로서는 천관우, 김재준, 유진오[4]가 선출되고 면담위원으로서는 유진오, 함석헌, 이인[5], 백낙준[6], 김수환 등이 선출되었다.

초안은 곧 작성되었다. 천관우가 기초하고 김재준, 유진오가 수삼차 검토하고 마감으로 면담위원들과 최종검토를 했다. 유진오 씨는 법률가니만큼 무척 신중하고 단어 선택에 정확을 기하는 것이었다. 수정에 수정을 가했지만, 자구와 용어 문제였고 내용이 고쳐진 것은 아니었다.

마감으로 면담위원들과 검토할 때에는 유진오가 축조 낭독하며 검토를 받는 책임을 졌다. 그때에는 주로 ‘이인’ 씨가 비판을 했다. 그분도 법률전공이라 허술한 데가 없었다. 주목되는 것은 우선

① “탄원서”라는 용어가 제거됐고,

② “박대통령 각하에게”라는 구절도 제거되었다.

“각하”가 다 뭐냐는 것이다.

“건강을 빕니다…”도 빼버렸다. 마감에 붙이는 인사 “하나님의 축복을 빕니다…” 등도 물론 제거됐다.

글 이름은 진정도 탄원도 아닌 “건의서”로 되었고, 우리의 건의내용 이외의 다른 아무 군소리도 섞이지 않았다.

이것을 장지에 활자로 인쇄하여 15인 연서로 청와대에 갖고 가기로 했다.

면담신청은 절차대로 제출됐지만 아무 화답도 없었다. 그래서 1973년 12월 19일에 이미 준비된 건의서를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직접 수교했다.



[각주]
1. 급전직하(急轉直下) - 사태나 형세가 갑자기 바뀌어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진행됨
2. 낫살 – 지긋한 나이를 낮잡아 이르는 말
3. 김수환(金壽煥, 1922~2009) - 본관은 광산(光山). 1922년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다. 조부 김보현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는 김영석, 어머니는 서중하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졸업, 1947년부터 1951년까지 가톨릭대 신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66년 주교, 1968년 대주교,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4. 유진오(兪鎭午, 1906~1987) - 호는 현민(玄民).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 1926년 4월 동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였다. 1929년 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33년부터 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 1937년에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중일전쟁 이후에 친일활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문인의 길을 접고, 교육자, 법학자,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기초위원으로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였고, 1953년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다. 1966년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는데, 1967년 1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에서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하고 자신은 총재로 취임했으며, 7대 국회의원에 종로구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5. 이인(李仁, 1896~1979) - 호는 애산(愛山). 일제강점기 의열단 사건, 광주학생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안창호 사건 등을 맡은 법조인. 초대 법무장관이 되었으나 이승만과 뜻이 맞지 않자 물러났다.
6. 백낙준(白樂濬, 1895~1985) - 1985년 평북 정주군 관주면 출생으로, 장로교 목사이며 역사학자로 호는 용재(庸齋)이다. 1913년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신성학교 교장인 매큔(G. S. McCune)의 도움으로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1916년 9월). 매큔의 모교인 미주리 주 파아크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하고(1922년 6월), 미국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에 들어가 1925년 9월 졸업하였다. 바로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대학원에 입학해 종교사학을 전공하여 1927년 「조선개신교사」로 예일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 교장, 연희대 총장, 연세대 총장,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문교부장관에 취임 후 교육행정가로 활동하였다. 1960년 4ㆍ19 의거 이후 참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8월 초대 참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6년 9월 민중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고사하였고, 1967년 민중당과 신한당 양당의 합당추진을 지지하면서도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1980년 2월 국정자문회의 위원, 1983년 2월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였다. 1985년 1월 13일 사망하여,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범용기 제3권] (21)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아버지를 따라온 관용

아버지를 따라온 관용

맨처음 Y에서 종로서로 올 때부터 관용은 따라다녔다. 그는 종로서 강당에도 같이 와서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너는 왜 여기 와 있니? 집에 가거라!” 하고 몇 번 타일렀지만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다들 ‘효자’라면서 나를 부러워했다. 관용은 조서 꾸밀 때에도 같이 조사 받고 사진이니 지문채취니에도 같이 참여했다. 그야말로 “죄 없는 죄인”, 이름 없는 서명자였다 할까? 아버지를 혼자 두고 나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라 짐작된다.

그날 밤 남산에까지도 따라갔었지만 들여놓질 않아서 돌아왔다고 했다.

[범용기 제3권] (20)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15인 민주 시국선언

15인 민주 시국선언

- 1973. 11. 5 -

나는 집에 있었지만 정수일 군이 간단없이 소식을 전해줬고, 함석헌, 천관우 역시 용케 CIA 감시를 벗어나 우리집에 자주 찾아와 주었다. 장준하는 자가용차가 있어서 더 자주 찾아올 수 있었다. 때로는 내가 청파동 함 선생 댁에 가는 일도 잦았고, 천관우 집에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결국 “민주회복을 위한 시국선언문”이 천관우 초안으로 작성되었다. 수삼차 우리 집에서 셋이 검토했다. 33인 정도의 서명이라도 받으려고 발표기간을 늦추어 보았으나 모두들 서명을 꺼린다. 결국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주동자들 이름만이었다.[1] 장준하가 모모한[2] 분들 서명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 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장준하” 이름은 이 성명서에서 빠졌다. 그것은 장준하가 “민주통일당” 최고위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끼어들면 우리가 어떤 정당 agency[3]같이 도맷금으로 오해되기 쉽다는 것 때문이었다. 수고는 기껏하고서 이름이 빠진다는 것은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모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준하는 잘 참았고 그 후에도 계속 앞장서서 협력했다.

우리는 비밀리에 발회식[4]을 위한 집회장소를 찾았으나 아무데서도 응해주지 않았다. 물론 “동창회”니 “계” 모임이니 운운하는 구실로 정수일 군이 교섭해 보는 것이었지만 소용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YMCA Bar에 1973년 11월 5일 오전 10시 정각에 모이기로 밀약[5]했다. 지학순 주교와의 연락은 정수일이 맡아서 원주로 오갔던 것이다. 그때에는 김지하도 자유였다.

Bar에 차 마시러 들어가는 손님을 밀어낼 까닭은 없다. 우리 몇 사람이 같이 차 마시며 얘기하고 싶으니 “칸막이”를 세워달라고 해서 그대로 되었다.

바루[6] 전날 밤에 신문기자는 천관우가, 선교사와 외국인 기자는 내가 맡아서 그들이 정각에 YMCA ‘빠아’에 오도록 연락하자고 했다. 나는 캐나다 선교사 ‘비챰’ 집에 가서 내일 열시에 카메라 갖고 YMCA Bar에 오면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해 두었다. 외국기자는 어디 있는지 몰라서 비챰도 책임질 수 없다고 한다.

11월 5일 열시 정각에 다 모였다. YMCA 당국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태극기를 벽에 부치고 국민의례까지 했다. 사회는 천관우, 선언문 낭독은 내가, 취지 연설은 함석헌, 그리고 교회 대표로 지학순 주교가 연설했다. 성명서를 채택하고 만세삼창까지에 15분도 안 걸렸을 것이다. 한국 신문기자들이 수십 명 둘러서서 플래쉬를 터뜨린다. 외국 기자도 몇 사람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건 김지하가 시간보다 일찍 와서 Y호텔에 유숙하는 외인 기자 몇 사람을 불러 같이 커피 마시면서 얘기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취지설명 연설에서 함석헌도 5분 정도 밖에 얘기하지 않았다. 보통 그의 연설은 길어지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아주 요약된 내용이었고 CIA의 살인행위도 실례를 들어가며 얘기하였다.

“만세삼창”이 끝나는 바로 그 순간에 중무장한 종로경찰서 특공대가 밀어닥쳤다. 우리는 할 일을 다했으니 아쉬울 것 없었다.

“누가 사회자요?”

“내가 사회자요.” 하고 천관우가 나섰다.

“집회 허가 맡았오?”

“안 맡았오.”

“그럼 불법집회요.”

하면서 그들은 성명서 남은 것을 압수하고 벽에 붙인 순서 포스터, 태극기 등등을 뜯는다. 신문기자들은 어느새 벌써 딴 데로 뺑소니쳤다. 사진 필름 뺏길까봐서였다고 한다.

“다 갑시다” 하고 경관들은 말한다.

“그럽시다” 하고 우리는 따라나섰다.

밖에는 커다란 츄럭 두 대가 서 있었다. 아마도 굉장히 많은 사람을 잡아갈 예산이었던 것 같다.

츄럭 한 대에 열댓 사람이 탔으니 엉성하기 짝이 없다.

김지하는 역시 젊은이라, “이거 플래카드라도 들고 네거리를 데모 행진이라도 해야 멋질텐데 츄럭에 실려 구경거리밖에 안되니 맥빠진다…” 하며 혼자 냉소했다.

종로 경찰서 대강당에 들어갔다. 텅 빈 홀에 열 댓이 앉았으니 흥이 안난다.

평생 소제[7]라곤 해본 것 같지 않았다. 먼지 구덩이에 쓰레기가 너더분하다.[8] 함석헌은 “이거 빗자루만 있었으면 우리 소제라도 하겠는데!” 하며 진짜 안타까와 한다.

아무데도 못 나가게 하고 순사 몇이 지킨다. 오줌은 담배꽁치[9] 부벼박는 재 담은 도람통에 갈기란다. 나도 한 두 번 실행했다.

열시 쯤 들어갔는데 새로[10] 세 시가 되도 아무 소식이 없다.

“사람 오랬으면 왜 그랬다는 말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소!” 하고 여기저기서 불평이다.

“상부에서 지시가 안와서 그럽니다” 하고 무슨 주임인가 하는 경관이 들어와 대답한다. 이 영감들 가두느냐 놓느냐의 정책결정이 안났다는 말인 것 같았다.

오후 네시 쯤 돼서야 나가자고 문을 연다. 한 사람이 하나씩 맡아서 조서를 꾸민다. 그들의 조서란 것은 천편일률적인 양식의 것이다. 성명, 생년월일, 원주소, 본적지, 현주소, 경력 등등을 물으며 그것을 일일이 적는다. 그리고서는 ‘집회허가 맡고 모였느냐?’는 것만 묻고 성명서 내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었다.

조서가 끝나고서는 사진을 찍는단다.

벽에 기대 세워 놓고 명패를 턱 밑에 비끄러매고서[11] 찍는 것이다. 그 밖에도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이모저모[12]로 사진을 찍고 두 손바닥을 시커먼 먹즙에 눌러 지문을 뜬다.

그리고서는 시말서[13]를 쓰라는 것이었다.

무슨 시말서냐고 물으면 “집회 허가를 안 맡고 모인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과 “이제부터는 허가 맡고 모이겠다”는 내용의 시말서를 쓰면 된다는 것이었다.

시말서 쓰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섯시 퇴근시간이 됐는데도 승갱이[14]는 풀리지 않았다.

함석헌, 천관우, 나 셋만 고등계 주임실에 두고 다른 사람은 아래층 어느 방에 옮긴다. 개별격파 작전인 것 같았다.

“이건 형식뿐인데 뭘 그러십니까? 그렇게 쓰시구서 나갔다가 내일 또 데모를 해도 상관없습니다….”

“아랫분들은 다 쓰고 나갈 차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서…”

그래도 안 되니까, 이번에는 우리 셋을 따루따루[15] 나놔서[16] 졸른다.

나는 지하실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고문실인 모양이다. 가지각색의 고문도구가 벽에 걸려 있다. 실지로 고문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뭐라고 몇자 적으세요! …”

“우리 다같이 행동했는데 나 혼자 하느니 안 하느니 하고 딴짓 할 수는 없지 않소?”

별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그럼 세분이 같이 의논해 보세요!” 하고 전엣 방에 데리고 간다. 셋이 같이 있다.

딴 녀석이 들어와서 이번에는 비교적 젊은 천관우를 조른다.

“글세, 내야 뭐, 어른 두 분께서 쓰신다면 따라가는 것 뿐이지요!” 하고 천관우는 시치미[17]를 뗀다.

그럭저럭 일곱 시가 됐다.

“이거 뭐 별로 책임질 것도 없는 글짜 몇 마디 적으시면 곧 나가실텐데 왜 그러고 계십니까?” 하고 고등계 주임이란 자가 끼어든다.

함석헌은, “허, 우리 뭐 나가려고 들어온 줄 아시우?”

우리는 그의 농담쪼의 진담이 그럴듯하다고 속으로 감탄했다.

또 한 가지 함석헌은 각서 쓰기를 거부하면서,

“우리는 집회허가제 자체를 반대하노라고 그러는 건데 허가 맡고 집회 하겠다고 각서를 쓴다면 우리는 뭐 되라는 거요? 제 손으로 제 눈 찌르라는 것이오?”

서장이 만나잔다고 서장실에 가자는 것이었다. 다들 갔다. 서장은 “어른들 이렇게 뫼셔서 죄송합니다…” 하며 미소와 온유로 대한다. 질문 비슷한 말은 내게와 김지하에게만 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 박사님 금후에도 이런 선언서를 계속 발표하시렵니까?”

나는 “선언서는 다시 안 낼랍니다” 했다. 모두들 의아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이어서 “선언서란, 3ㆍ1 독립선언서처럼 한 번만 내면 되는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그 선언서의 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이 있을 것 뿐이오. 우리도 그럴 것으로 믿소.” 했다. 모두들 직성이 풀린 모양이어서 머리를 약간 끄덕였다.

김지하에게는 “금후에도 그런 시를 계속 쓰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마도 “오적” 시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김지하는 “시란 것은 영감이 오면 안 쓸래 안 쓸 수 없을 겁니다” 하는 뜻의 대답을 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서장은 죄송하다면서 “그럼 나가십시오” 한다. 문밖에 나서자 새까만 자동차가 기대린다.[18] 한 차에 하나씩 우리 셋을 태우는 것이었다. 지학순 주교를 위시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유로 흩어지라고 한 모양이었다.

깜장 차는 남산으로 간다. 제5극이라나 한데로 들어갔다. 거기서 또 험상스런 사복조사관에게 꼭 같은 따위 조서재료 노릇을 했다. 조서가 끝나자 옆에 있던 오(吳) 과장이란 사람이 잡담을 건다.

그는 일제시대부터 유명한 형사라고 들었다. 함북 청진 경찰서에 있었고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해삼위[19]에도 가서 같은 일을 한 사람이라고 했다. 유도심문에는 아주 기술자라는 평이었다.

나는 오 과장에게 “이북 얘기나 좀 하시구려!” 했더니 이북의 남침계획과 그 군사배치, 로케트 발사위치 등등을 자세하게 얘기한다. 그러는 동안에 장국밥이 들어와서 저녁이라고 먹었다.

국장이 만나잔다고 한다. 오 과장 안내로 국장실에 갔다.

국장이란 사람은 삼십대의 다부지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제가 두시에 어른들을 다 댁으로 모시라고 전화를 했는데 바보같은 놈들이 이렇게 늦게까지… 참 죄송합니다….”

그리고서는 자기 소개를 한다. 평양 출신인데 자기 아버지도 장로고 자기도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다닌 일이 있다고 했다.

“저희들도 ‘애국’ 하노라고 이러는 겁니다. 우리가 이 일을 안한다면 벌써 공산당 천지가 됐을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KCIA 업무와 고충, 유신체제 선전, 박정희 대통령 선전 등등을 유창하게 늘어 놓는다.

“우리 대통령 각하는 아주 소박하게 솔직하고 애국적인 분이십니다….”

이런 선전이 끝나자, 함석헌에게 “무슨 말씀하실 것이 있으면?…” 한다.

함석헌은 예의 독설로 CIA에서 서울법대 어느 교수를 고문살인한 것부터 온갖 탄압정책을 비난했다. 다음으로 나더러 얘기하라기에 나는 “해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서 국내 사정을 자세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해외에서 보는 대로는 전의 동백림[20] 납치사건, 이번 김대중 납치사건 등등으로 우리 정부는 ‘정부’라기보다 ‘깡패집단’이라고 혹평받는 경우가 거의 전부고 따라서 국제여론에서 고립되어 갑니다. 해외국민으로서 긍지를 가지기 어려워요. 왜 정부로서 당당하게 소환하지 않고 ‘납치’ 같은 비열한 방법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라도 하려고 나왔는데 이번에도 국민의 기본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정부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이런 민주선언을 낸 것입니다….”

그러노라니 벌써 밤 열한시가 됐다.

또 깜장차에 실려 집에 왔다. 그러는 동안에 N.C.C. 김관석 총무가 우리의 석방을 위해 각처로 애타게 돌아다녔다고 했다.



[각주]
1. 당시 서명한 15인은 강기철, 계훈제, 김숭겸, 김재준, 김지하, 박삼세, 법정, 이재오, 이호철, 정수일, 조향록, 지학순, 천관우, 함석헌, 홍남순 등이다.
2. 모모한 – 아무아무라고 손꼽을 만큼 뛰어난
3. 에이전시(agency) - 경제적인 활동 따위를 대행하거나 주선하여 주는 사람이나 회사
4. 발회식(發會式) - 새로 조직된 회(會)의 첫 모임으로서 행하는 의식
5. 밀약(密約) - 남몰래 비밀리에 약속함
6. 바루 - ‘바로’의 비표준어
7. 소제(掃除) - 먼지나 때 따위의 더러운 것을 말끔히 닦고 쓸어서 깨끗하게 함
8. 너더분하다 –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어수선하다, 듣기 싫고 번거롭게 길다
9. 담배꽁치 – 담배꽁초(피우다 남은 작은 담배 도막)
10. 새로 – 12시를 넘긴 시각 앞에 쓰여, 시각이 다시 시작됨을 이르는 말
11. 비끄러매다 – 끈이나 줄 따위로 서로 떨어지지 못하게 붙잡아 매다
12. 이모저모 – 이런저런 여러 가지 면
13. 시말서(始末書) - 일을 잘못한 사람이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어 온 경위를 자세히 적는 문서
14. 승갱이 - ‘승강이’(서로 자기 주장을 고집하여 옥신각신하며 다툼)의 방언
15. 따루따루 – 따로따로(한데 섞이거나 함게 있지 않고 여럿이 다 각각 떨어져서)의 방언
16. 나놔다 - ‘나누다’의 방언. 제주지역에서는 ‘ᄂᆞ놔다’로 적는다
17. 시치미 – 매의 임자를 밝히기 위해 주소를 적어서 매의 꽁지 털 속에 매어 둔 네모난 뿔을 이르는 말. ‘시치미떼다’는 ‘자기가 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거나 알면서 모르는 체하다’는 뜻.
18. 기대리다 - ‘기다리다’의 방언
19. 해삼위(海蔘威) - 러시아 연해주 지방의 항구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를 한자음으로 바꾸어 이르는 말
20. 동백림(東伯林) - 1990년 독일이 통일되기 이전, 동독의 수도. ‘백림’(伯林)은 ‘베를린’(Berlin)의 음역어이다.

[범용기 제3권] (19)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15인 민주선언 전후의 정황과 치열한 민주학생 궐기

15인 민주선언 전후의 정황과 치열한 민주학생 궐기

1972년 10월 18일에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 씨가 일본 동경에서 성명을 발표했다지만, 국내에서는 깜깜이었고 그 후 해외에 와서야 듣게 됐다. 그는 “10월 17일 박정희의 긴급조치는 통일을 빙자하여 자기의 독재영구집권을 노리는 놀랄만한 반민주적 조치다”라고 했다. 1973년 8월 8일에 김대중은 KCIA에 납치됐다.

1973년 10월 2일의 서울대 문리대학생 3백여 명의 데모와 선언문은 학생 궐기의 대표적인 발언이라고 보였다. 그들은 이제 “생존권” 자체를 들고 나왔다.

“전국민 대중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잔혹한 현실을 이 이상 더 좌시할 수 없어 각자의 양심이 명하는 대로 분연히 궐기한다”라는 전제에서

① 정보팟쇼통치의 즉시 중지와 자유민주체제의 확립

② 대일예속화의 즉시 중지와 민족자립경제체제의 확립

③ 중앙정보부의 해체와 김대중 사건의 진상규명

④ 기성정치가, 언론인의 맹성[1] 촉구 등등이었다.

1973년 10월 4일에 서울대 법대학생 3백여명과 서울대 상대생 2백여 명도 각기 선언문 발표, 데모에 나섰다.

모든 데모는 교문 밖에까지 나갈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1973년 11월 5일의 15인 민주선언이 나온 후, 같은 날에 경북대생 2백 명이 노골적인 반정부데모를 감행했다. 11월 7일에는 서울대 공대학생 5백여 명이 교내집회 데모, 무기한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11월 8일에는 서울대 교양학부생 1,400여 명과 가정대학생 150여 명이 반정부 집회를 열었다. 1973년 11월 9일 고대생들은 구속학생 석방요구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같은 날에 서울대 농과대학, 서울대 치과대학도 반정부 집회를 열었다.

1973년 11월 9일 – 같은 날 한국신학대학생들이 반정부 선언을 발표했다.

그후 학생궐기는 매일 계속됐다. 일간신문에서 크게는 못내도 서너줄씩 삼단기사로 학교이름, 데모학생수, 잡힌 학생수, 마무리 등은 빼지 않고 발표할 수 있었다. 방송으로서는 ‘기독교방송국’에서 교묘하게 자세한 진상을 보도하곤 했다. 그래서 기독교 방송이 전국 청취자를 독점하다시피 됐다는 것이었다. 이제 List를 적는다면 1973. 11. 12일에 이화여대생 약 4천명, 13일에 이화여대, 감리교신대, 고려대생의 교정안 집회, 14일에 고대, 연대, 성균관대, 서울신대생의 반정부집회, 15일에 고대생 2천여 명 시위, 16일에 연대생 2천여 명, 숙대생 3천여 명 시위집회, 17일에는 서울대 음대생, 서강대생, 한신대생의 단식투쟁, 19-20일에는 서울대 사범대생 2천여 명, 경희대, 한신대의 궐기가 있었다.

그래서 1973년 11월 21일에는 서울대의 여덟 단과대학에 휴강조치령이 내렸으나 학생들의 투쟁은 계속됐다.

12월에 들어서는 부산수대, 경북대, 영남대, 전남대, 광주제일고 등이 반정부투쟁에 합류했다.

1973년 11월 28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여섯 단체 공동주최로 유신체제 비판 구국기도회가 열렸다.

11월 29일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언론자유를 위한 결의문”이 발표됐다. 이튿날인 11월 30일에 중앙일보, ‘동양라디오’ 기자 150명이 “말살된 언론의 기본권을 다시 살리자”라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단식투쟁에 나섰다.

12월 3일에 동아일보 기자 약 260명이 집회를 열고 데모관계 보도의 제약에 항거하고 언론자유수호선언문을 발표했다.

1973년 12월 4일에 각계의 치열한 반정부 기운에 압력을 느낀 김종필 국무총리는 종교계, 학계, 언론계와의 “대화의 광장”을 제안했다.



[각주]
1. 맹성(猛省) : 매우 깊이 반성하는 것.

2026년 3월 9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18) 캐나다에 갔다 오고 - 다시 서울에

다시 서울에

캐나다에 있는 동안에도 “제3일”을 위한 글을 써 보냈다. 이상철 목사는 헌 자동차를 몰고 나와 함께 캐나다 동부지방을 할리팩스까지 역방[1]했다. 그 일기는 1973년 9월호(제36호) “제3일”에 “오토방랑 10,700리”라는 제목으로 발표돼 있다.

“방랑”에서 돌아오자 귀국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 동안 – 1973년 7월 6일에 박형규가 정부전복 음모라는 엉터리 죄목으로 구치감[2]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왔다. 3월 부활절 때 남산 잠두에서의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학생들이 “민주주의는 부활한다” 등등의 전단을 뿌리다가 잡혔는데, 자금출처가 박형규였다는 데서 구속된 것이라 한다.

나는 여기 있을 경우가 아니라고 느껴서 곧 귀국하려 했다. 이민국에 갔더니 이민국 차석이란 분이 진정으로 만류한다. “국내에 있었대도 망명해야 할 처진데 왜 구태여 돌아가려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간다니까, 자기가 그동안에 영주권 신청을 해 놓을테니 일이 생기거든 즉석에서 다시 오라고 한다. 주한 캐나다 대사관에도 특별취급으로 즉석에서 비자를 주도록 공한을 보낸다고 한다. 스캍 박사도 일부러 오셔서 만류하셨다. ‘신자’ 더러는 “김 목사 신발 감춰 놓으라”고 농담하셨다.

바로 얼마 전에 본국 다녀온 토론토의 김희섭 박사 말에 의하면, 서울에서 일본 ‘달각바리’[3]들 설치는 꼴, 일반시민의 무표정한 체념상태, 이대로 간다면 민족자멸이란 결론밖에 없을 것 같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래도 민주운동에 앞장섰다는 늙은이들이 가만 있을 수 없을 것은 사실이다.

나는 부랴부랴 떠났다. 그것이 아마도 1973년 9월이었던 것 같다. 이상철 목사는 내가 나가면 구속이라도 될 것 같았었는지 전송한다면서 LA로, 다시 하와이에까지 따라와 하와이 비행장에서 작별했다. 하와이 사는 김봉화[4] 여사와 그의 부군도 비행장까지 나와서 “이제라도 도로 들어가자”고 졸랐다. 나를 아껴주는 그 애뜻한 충정이 너무나 고마웠다.

김포공항에서 민주수호 연락원(?)인 “정수일”[5] 군을 만났다. 혼자 나와서 마치 정보원이 끌고 가듯이 나를 끌고 저켠으로 걷는다.

“지금 함석헌, 천관우 등 여러분이 김 박사님을 기대리고[6] 있습니다. 이거 뭔가 해야지 이렇게 있어서야 되겠나 하고 날마다 걱정이랍니다. 8ㆍ15에 민주성명이라도 내려 했는데 못하고 말았으니 김 목사 오면 곧 착수하자고 고대한답니다. 우선 김 목사님 의사를 전해야 할텐데 백지 서명이라도 제게 해주세요” 한다. 나는 그를 신임하는 처지였기에 백지 서명을 해 줬다.

정세는 폭발적이었다. 김대중은 8월 8일에 동경 ‘프린스 호텔’에서 박정희의 정보원 손에 납치되어 구사일생으로 지금 자택감금을 당하고 있다. 학생들은 데모에 나섰다가는 잡혀간다. 그러나 일반 시민은 꿀먹은 것도 아닌데 ‘벙어리’ 같았다.



[각주]
1. 역방(歷訪) - 여러 곳을 차례로 찾아가 봄
2. 구치감(拘置監) - 일제강검지, 미결수를 가두어 두는 감옥을 이르던 말
3. 딸깍바리 – 일상적으로 신을 신이 없어서 마른날에도 나막신을 신는다는 데에서 나온 말로, 가난한 선비를 이르는 말
4. 김봉화 여사는 한국전쟁 당시에 미국의 YMCA와 연락되어 미국으로 지도자 수업을 다녀왔으며, 연세대 의과대학 홍승훈 교수와 결혼하여 1967년 남편 홍 박사를 따라 하와이에 가서 13년간 체류하다가 1980년에 귀국하였다고 한다. [중앙일보 1982년 8월 21일자 신문]
5. 정수일 씨는 1960년대 말에 지역에서 사과농사를 짓다 무작정 서울 원효로에 있는 함석헌 선생 집으로 찾아갔다. 이후 그는 함석헌,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 등이 공동대표로 있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일을 돕게 되었다. 1977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이 되기도 하였는데, 35년이 지난 2013년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평택시민신문, 2013년 6월 26일 기사]
6. 기대리다 - ‘기다리다’의 방언

[범용기 제3권] (17) 캐나다에 갔다 오고 - 다시 캐나다에

다시 캐나다에

캐나다로 간 아내는 둘째 며눌애[1] 효순의 주선으로 스카보로 종합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 경과는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다할 병은 없다는 데도 어쩐지 위가 아프다면서 음식도 못먹고 잠도 못잔다는 것이었다. 효순의 편지로서는 위암 증세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캐나다 다녀올 준비를 서둘렀었다.

여권 수속은 약 두 달 걸렸다. 그래서 1973년 1월말이었던가 집을 떠났다.

아마도 서북항공기로 알라스카의 앵커레지에서 기름 보급받고 토론토에 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캐나다의 아내는 내가 간 날부터 멀쩡하게 일어나 잘 먹고 잘 자고 씻은 듯이 나아버렸다. 아이들이 모두 웃는다.

“뭐니 뭐니해도 ‘엄마’에게는 ‘아버지’가 제일이야!”



[각주]
1. 며눌 - ‘며느리’의 방언

[범용기 제3권] (16)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때 - 두 번째 연금

두 번째 연금

1972년 10월 27일, 유신헌법 발표 때에도 나는 자택연금을 당했다.

성북서에서 4년째 나를 맡고 있다는 신 형사가 와서 - “김 박사님을 모시고 있으래서 이렇게 왔습니다.” 그러나 밤에는 유심스레 따라다니는 것 같지 않았다. 따라다녔자 괴로울 건 없지만.

그는 낮에 어디로 나갈 때면 - “치안국에서 전화 오거든 잠깐 식사하러 나갔다고 해 주세요” 하고 부탁한다. 밤에는 오질 않았다. 하루에 한 번씩 들러 상황보고 재료를 얻어가는 것 뿐이었다.

[범용기 제3권] (22)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재야 민주원로들 모임

재야 민주원로들 모임 1973년 12월 13일 YWCA 알로하홀에서 모인 ‘민주원로회의’도 사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간부들이 주최한 것이었다. 이 모임이 실현되기까지에는 장준하가 무던히 수고했다.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도 나왔다. 신교측에서는 한경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