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와의 연대
마태복음 12장 1-8절 / 1992년 9월 10일 / 낙산교회
[회상 노트]
3년 전 부활주일이었다. 문익환 목사님이 돌연히 방북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보수파는 공격의 호기를 잡은 것이다. 포문을 일제히 열었다. 무분별하고 사려 없는 짓이라고 공격했다. 우리가 빌미를 주었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때를 얻었다 싶었던 게다. 잔뜩 부리던 엄살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반동이 시작된 것이다. 공안정국을 만들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니 교회는 제 길을 찾지 못한 채 반동의 역사에 오히려 편승한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 같은 구두선을 걷어차 버릴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는 사회적 기득권자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최고의 이념은 ‘승리주의’다. 교인들이 이를 바란다. 교회의 지도력들이 이를 선호한다.
나 역시 기득권자다. 상대적 가진 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반공 이데올로기 문화 속에서 분명히 치열한 반공주의자로 살아 왔다. 여기에 신앙적 힘, 미래를 열고 현실을 개혁해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리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결단이 필요한 것인가? 어떤 구조를 창출해야 할까? 어떻게 가능한가? 물론 교회도, 교인들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단색을 지향해서는 안 된다. 조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그러면서도 예수의 교회이기에 반드시 가야하고,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선교 과제가 있다.
나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지향해 온 이 고백을 기장 교단이라도 이루어 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싸여 있었다.
교회는 예수의 정신에 따라 약자, 민중지향적 당파성을 드러내야 한다. 상당한 한국 교회가 그리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사관은 교회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내 삶에도 적용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당혹함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민중지향적일 수 있을까? 간혹 그런 경우도 있다. 우리는 그를 ‘성자’라 부르기도 한다. 그것이 무얼까? 비켜 가는 수법이 아닐까? ‘성자’는 흔한 것이 아니다. 어쩌다 나온다. ‘성자’ 아닌 절대 다수에 나를 숨길 수 있다. 옳은가? 죽을 때까지 작으나마 노력을 해야 한다. 교회가 그 장(場)일까? 그래야 한다.
나의 갈등을 고백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민중에 대한 정의는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갈릴리 예수의 운동을 우리는 민중 해방운동이었다고 이해한다. 예수의 운동의 중요한 핵심이 민중 해방에 있었다면 우리도 그 운동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장 낮은 수준이라 하더라도 예수의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당위요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원 70년 전후에 팔레스틴에서 일어났던 유다 민중의 반로마제국, 반식민 투쟁에서 예수는 오히려 역기능을 한 것 아닌가 하는 근거가 성서 여러 곳에 있다. 특히 산상수훈이 그렇다. 중성적 분위기에서 산상수훈을 읽으면 그야말로 지당한 말씀이요 은혜의 말씀, 성현의 말씀이다. 그러나 팔레스틴 유다 민중의 반로마제국, 반식민, 반착취 운동의 민중 현실 속에서 산상수훈을 읽으면 우리는 크게 당혹하게 된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나님이 그들을 아들이라 부르실 것이다”(5:9).
“누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을 돌려대고, 누가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주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라”(5:39-41).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5:44).
“너희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6:25).
예수의 이런 어록이 하나의 책으로 편집되던 때는 당혹스럽게도 바로 유다 민중들의 반로마 투쟁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당시 팔레스틴에서 민중 해방, 독립 투쟁을 하던 사람들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들 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라고 느낄 것이다. 가난한 민중에게 의식주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빼앗겨도 자족하고 지내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취해야 할 자세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 해방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그들에게 ‘원수 사랑’,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대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예수의 행태를 본다면 의아한 부분이 더 발견된다. 예를 들어 당시 유다 민중들이 매국노로 매도했던 세리들이 예수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점이라든지, 아무 저지도 받지 않고 체제 수호의 본거지인 회당에 마음대로 드나들고 또 거기서 가르쳤다는 점 등이 그렇다.
그렇다면 예수는 소위 친로마 평화주의자이거나 그 아류였을까? 그는 단지 유대교를 혁신하려고 했을 뿐인데 그것이 민중봉기 획책으로 오인되어 정치범에 대한 처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져 죽음을 당한 것일까?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화운동이나 우리의 민족 화해운동은 앞에서 말한 산상수훈 등에 성서적 전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평화신학, 평화목회도 그렇다. 만약 예수의 운동이 바로 철저한 평화운동 이외의 다른 운동일 수 없다면 광주 학살, 5공화국의 대국민 박해와 착취와 비리는 어떻게 해야 하며, 6ㆍ25 때 미국이 저질렀다고 북한이 주장하는 전쟁 이상의 만행이나 북한군이 저지른 남한에서의 학살 행위는 어떻게 처리해야할 것인가?
나는 반드시, 예수의 사회적 삶의 자리를 바탕으로 하여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가장 뚜렷한 사회적 삶의 자리는 착취당하고 가난하고 굶주린 민중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가난한 자는 경제적, 정치적 약자들이었다.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먹지 못하여 배고팠다는 기록은 여기저기에 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도 “예수께서는 시장함을 느끼셨습니다.”(마 21:18-19) 여기 시장함이란, 점잖게 그리고 먹을 것이 있는데 아직 먹지 않아서 느끼는 배고픔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그냥 배고픔이다. “예수께서는 배고픔을 느끼셨습니다.” 라는 뜻이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이야기도 그렇다. 이것은 예수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간식을 먹은 것이 아니다. 왜 밀을 잘라 먹느냐고 시비를 걸어온 바리새인들에게, 다윗 왕이 배고팠을 때 제사장 밖에는 먹을 수 없는 제사빵을 먹었고 또 자기 동료들에게도 나누어 먹게하지 않았느냐고 응수하였다. 이것을 보면 간식으로 먹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것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만의 상황이 아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 아래 있던 팔레스틴 민중의 사회적 현실이다.
예수는 이렇게 응수하고는 재빨리 안식일 논쟁에서 민중 현실로 저들의 시선을 돌려 놓으신다. 배고픈 민중의 현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말씀의 대상자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다. 먹을 것이 있고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이다. 배가 고파 안식일인 줄 알면서도 밀을 훑어 먹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의 추종자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그들은 율법 준수의 눈으로 민중을 보고 있지만, 예수는 오히려 저들과 함께 사는 삶의 길을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 말에 유념해야 한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희생제물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면…” 하는 말이 그것이다. 이것은 이 배고픈 사람들, 곧 민중의 배고픔이 자비로써 극복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비를 줄 수 있는 자들이 빈민과 연대할 때 극복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빈민과의 연대가 희생제물,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나 종교 행위보다 우선한다는 참으로 혁명적 선언이다. 하나님은 빈민들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안식일 준수나 예배 행위보다 더 중요하고 화급하게 여기신다. 갈릴리 민중의 빈곤 극복의 문제를 절실한 선교과제로 부각시킨 예수는 급기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고 잘라 말한다.
세례 요한도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과 나누어 가지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눅 3:11)고 가르쳤다. 딱히 부자가 아니더라도 상대적 소유자라면 상대적 빈곤자와 나누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선교의 대상은 대체로 기득권자들이었다. 요한도 빈곤자와의 연대를 요구했고, 그것이 회개요 구원이라고 한 것이다.
빈곤자, 팔레스틴 민중들은 누구인가? 힘없어 뺨맞고 고소당하고 속옷까지 빼앗기고 강제당하는 사람들이다. 박해를 당하고 그러나 먹을 것도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앞서 말한 예수의 산상수훈은 바로 그들에게 준 위로요 격려의 말씀이 아니겠는가! ‘당신들이 그렇게 당하고 사느냐? 그러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이다. 네 오른뺨을 치더냐? 왼뺨까지 대라. 박해하는 그 놈들을 위해 차라리 기도하라. 먹을 것 없지? 하늘 아버지께서 주실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민중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보편적인 진리를 가르친 말씀이라고 말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진한 예수의 눈물, 민중을 사랑하는 눈물이 거기 듬뿍 담겨 있다. 그렇지 않고야 그때 그 상황에서 예수께서 그런 김빼는 말씀을 하셨을 리 없다.
낙산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가 사랑하셨던 팔레스틴 민중들은 오늘도 우리 사이에 있다. 모양은 다르고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앞에 그들이 있다. 어떻게 배고픈 민중과 떡을 나눌까? 두 벌 옷을 어떻게 절대 빈곤자와 나눌까? 이러한 질문이 우리의 과제가 되어야 하고 이것이 우리의 고뇌가 되어야 한다. 솔직히 혼자 할 수 없어서 연대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여기 신앙공동체를 이룬 것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만이 교회 공동체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아니다. 그러나 빼놓아서는 아니 되는 존재 이유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의 클럽으로 모인 것이 아니다. 좋은 말씀을 한 주일에 한 번쯤 부담 없이 듣기 위해 여기에 모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낙산 신앙 공동체가 이 연대를 어떻게 이루어 낼 것인가? 지금 낙산교회 안에서, 낙산교회와 다른 교회 간에, 사회 속에서 이 연대 구조를 창출해 내야 한다. 이것을 정직하게 고민하고 갈등하여 기어코 예수의 빈민 연대운동의 대오에 서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회개요 축복이요 구원이다. 주님은 희생제물을 기다리시지 않는다. 자비, 자비를 기다리신다. 주님이 기다리시는 것은 약자와의 연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