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4일 수요일

[범용기 제2권] (94) 다시 “한신” 캠퍼스에 - “갈리하”의 서거와 “호니” 총무

“갈리하”의 서거와 “호니” 총무

위에서 언급한대로 갈리하 캐나다연합교회 외지선교부 총무는 나와 작별한 몇 주일 후에 ‘저쪽 나라’로 갔다.

부총무로 있던 ‘호니’가 총무로 승진됐다.

그는 총무 취임 직후 인사 겸 한국을 방문했다. 우선 ‘한신’에 들렀다. 귀중한 자기들 ‘선물’인 3만 불이 고스란히 사라져 버린 것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현지 선교사들의 보고도 연방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호니’ 총무는 ‘일언반구’의 해명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그동안 얼마나 상심했습니까? 신학교에 대한 재건 공정(工程)[1]에도 지장이 있을까 싶어 ‘만불’을 갖고 왔습니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감격했다. 역시 대국인답다고 느꼈다. 들러준 것만도 고마운데 끝까지 선의로 과오를 극복하려는 도량이 부러웠다.



[각주]
1. 공정(工程) - 작업이나 제조 과정

[범용기 제2권] (93) 다시 “한신” 캠퍼스에 - “한신” 캠퍼스에

“한신” 캠퍼스에

나는 조승제의 강권(强勸)으로 서울에 오기는 했지만 한신 캠퍼스에 들어가기는 싫었다. 신당동 박억섭 집에 들러 거기서 유숙했다. 박억섭은 경동교회 창설 때 교인으로서 서울공대 졸업생이다. 그는 서울 공대를 졸업했지만 실업계에 진출하여 홍콩ㆍ대만 등지와의 무역에서 적잖이 성공(?)했다. 주택도 호화롭게 생활도 넉넉했다. 그는 전에도 내가 피곤할 때면 언제든지 자기 집에서 몇 주일이고 쉬라고 했다.

지금 나는 진짜로 피곤해졌다.

그는 내 방을 따로 마련하고 신학교에는 비밀로 진짜 “정양”[1]을 즐기게 한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다.

신학생들이 알아채고 그때 3학년이던 박만서 군이 택시를 몰고 기습해서 나를 납치하다시피 캠퍼스에 운반했다.

전교생이 함성을 올리며 나를 공중에 치켜올린다.

그래서 다시 ‘한신’에 주저앉았다.



[각주]
1. 정양(靜養) - 깨끗하고 조용한 곳에서 쉬면서 몸과 마음을 안정시킴

[범용기 제2권] (92) 돌아와 보니 - 그후의 조선출

그후의 조선출

조선출은 실직자가 됐다. 어디 갈 데도 없고 해서 거처를 옮기지도 못한다.

그 동안에 모친상(喪)도 당했다.

청주제일교회에서 청빙서가 왔다. 나는 그를 권했다.

“어느 시골 교회에 가서 3년 동안만 목회에만 충실해라. 그리하면 네 신앙과 인격에 덮였던 암운(暗雲)이 걷힐 것이다. 그런데 청주제일교회는 큰 교회일 뿐 아니라, 충북에서 모교회다. 딴 생각 말고 승낙해라.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의 ‘목회’에만 전념해라….”

그는 그러기로 했다. 그리고 부임했다. 그러나 ‘버릇’은 고쳐지기 어려운 것 같았다.

세광학원 이사진, Y.M.C.A. 이사진 등등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결국 Y.M.C.A. 총무가 됐다. 더 큰 대구 Y. 총무로 옮겨 앉는다. 청주제일교회는 공연히 어수선하게만 됐다. ‘한신’ 졸업생 안봉걸 목사가 차분하게 목회해서 차츰 정돈되어 갔다.[1]

그 후 지금까지의 얘기는 생략한다.

김춘배 대신에 C.L.S. 총무가 됐다고 들었다.

그는 유능한 사람이다. 그러나 ‘수단’이 ‘진실’을 넘어서 뛴다. 출세와 권력욕이 양심과 정의를 상회(上廻)한다.

억지로 ‘Somebody’ 되려는 영웅주의가 그의 생애를 그르친 것이 아닐까?

그는 송창근, 함태영에게는 ‘충신’으로 자처하는 것 같았다.

내가 신학교 학장직을 송창근에게 물려줬을 때, 조선출은 명동 어느 다방에서 ‘축하연’을 베풀고 나까지 초청했다.

강원도에서 개척 교회를 목회하는 강원하[2]는 우리 집에 찾아와 통곡했다. 같은 사건에서도 세태(世態)는 이렇게 두 극(極)을 달린다.

송창근은 김천 목회 시절에 김정준, 정대위, 조선출을 특별히 사랑했다. 어느 날 밤, 그들 셋은 함께 촛불 아래서 송창근에게 세례를 받았다. 정대위는 얼마동안 부목사로도 같이 일했다. 공덕귀[3]도 그의 밑에서 전도사를 시무했다.

그러니까 조선출이 송창근의 학장 취임을 ‘경사’로 여기고 자축한다는 것은 이유없달 수 없겠다. 그 자리에 나까지 초대한 것은 나를 ‘야유’하려는 악의에서라기보다도, 내가 송창근과 형제같이 지내왔으니 자기들 삼촌처럼 생각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물론 ‘호의’만으로서의 해석이겠다.



[각주]
1. 안봉걸 목사는 한신대학 1952년 제11회 졸업생이다.
2. 강원하 목사는 제7회(1948년) 졸업생이다.
3. 공덕귀(孔德貴, 1911~1997) - 경남 통영 출생. 1936년 동래일신고등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 1940년 일본 요코하마 공립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김천 황금정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1946년 조선신학교 여자신학부 전임강사가 되고 1949년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해위 윤보선과 결혼하였다. 1969년 안동교회 여전도회장을 역임한 이래 주로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사회활동을 해왔으며, 1972년에는 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서울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4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초대 인권위원장이 되어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 투신하였다.

[범용기 제2권] (91) 돌아와 보니 - 기장 총회는 어떠했는가?

기장 총회는 어떠했는가?

나는 총회 총무 서정태에게 캐나다연합교회 보조금 2만 불을 수교했다. 그리고 그것을 중점적으로 사용할 것을 요청했다.

대전, 논산, 부산에 기장 교회가 신설됐다. 그 선교비의 열매다.

전주 김세열 교회에서도 얼마 나누어갔다.

이남규가 경영하는 목포 영명중고등학교에서 얼마의 분깃을 받아갔다.

‘한신’에서는 처음 3만 불은 떼웠지만 캐나다 여선교회에서 추후해 보내온 3만 불로 교사건축비 미불액(未怫額)은 청산되었다.

이렇게 뭔가 돼 가는 것 같으니 교회 정치의 노장(老將)들도 모두모두 ‘한신’ 재단에 열을 올린다.

남한에는 꽤 큰 도시나 마을에도 기장 교회가 없는 데가 많았다. 자유하는 신앙을 갈망하는 크리스천은 예수가 유대교 회당에서 몰려나듯 소외와 냉대를 각오해야 했다. 자칫하면 ‘편싸움’이 유발된다. 새 교회당도 필요하고 새 목회자도 맞이해야 했다.

캐나다 선교부에서 ‘기장’ 총회에 보낸 2만 불은 주로 이런데 집중적으로 쓰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육성된 교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불평도 생긴다. “왜 같은 사정에 있는 우리 교회는 빠졌느냐?”, “왜 같은 사정인데 저 교회는 우리 교회보다 많이 줬느냐?”, “우리도 더 줘야 하겠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불평이다.

“교인들이 안간힘을 다 들여 허물어진 교회당을 재건했는데 종각도 못 올리고 내부도 엉망이다. 교인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지쳤다. 조금씩이라도 도와줘야 하겠다.”

총회 총무 서정태는 시달리기에 바빴다.

위원회를 만들어도 마찬가지다. 거기서도 같은 문제로 ‘옥신각신’이다.

‘세광학원’ 재단에 오는 돈은 좀 늦어졌다. 세광고등학교는 교사건축비 ‘미불’로 차압[1] 직전에서 허덕인다. 총무 서정태에게 호소한다. “교회 신설에 쓸 돈 얼마를 잠깐만 유용(流用)[2]하도록 해 주시오. 캐나다서 돈이 오면 곧 갚겠소….”

마음씨 좋은 서정태는 아무 결재 없이 그렇게 했다.

‘세광’에서는 돌려주지 않는다.

“이미 먹어서 소화된 걸 다시 끄집어낼 도리는 없소. 사정이 펴이면[3] 갚으리다….”

이러니, ‘기장’ 총회 노장(老壯) 목사들은 자기네게 온 돈이 가로 흘렀다고 분개한다.

좀 늦었지만 ‘한신’에 보내온 3만 불에 대해서도 속으로 질투하는 것 같았다.

“총회 신학교지 김재준의 신학교냐? 그것도 총회 회계에 넣고 총회 결재를 통과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건 캐나다 총회에서 직접 신학교 보조금으로 Earmark[4]를 달아 보낸 거니까, 신학교 이사회 소관이지, 총회의 직접 사무는 아닐겁니다” 하고 나는 일소에 붙였다.

그때 총회 장소가 서울 성남교회당이었기 때문에, 이남규, 김세열 등 원로들이 내 사택에 찾아왔다.

“신학교 당국이 총회를 거역하고 ‘학장’이 총회를 무시한다면 질서가 유지될 수 없지 않소?” 이남규는 울긋불긋 분노의 분화구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조용조용 말했다.

“나는 신학교 학장 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아니오. 당장 이 자리에서 사직할테니 여러분이 맡아 하시오.” 하고 나는 일어섰다.

그들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별말 없이 나간다.

이건 내 잘못된 추측이었기를 바라지만,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김재준이 신학교에 그대로 앉아 있는 한, ‘한신’이 총회 직속 신학교라 해도 이름뿐이고 실권은 없을 테니 이번에 ‘한신’을 총회 교권 속에 잡아넣어야 한다. 그가 캐나다에서 3만 불이나 얻어왔으니 그의 지반은 갈수록 굳어질 것이다. 이 기회에 돌격하자!”

이 일을 위해서 호남과 영남이 합작한다. 충북은 반쯤 영남에, 충남은 반쯤 호남에 가세한다. 경기는 중립(?)이다.

예수를 배제하기 위해서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헤롯당이 합작한 것과 비슷하다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조선출 사건도 같은 배경에서 연출된 ‘드라마’였다.

나는 ‘기장’ 교회들의 조속한 건설과 발전과 자립을 위해 밤낮 ‘염원’을 올렸다. ‘돈’만 있으면 문제없이 여름 초목처럼 무럭무럭 자라리라 믿었다.

그래서 큰 돈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얻어왔다.

돈과 함께 탐욕이 따라온다. 전에는 가난해도 긍지를 갖고 의좋게 돕고, 같이 걱정하고, 격려하던 동지 목사들이 이제는 아웅다웅 싸운다. 교권욕이 풍선같이 부푼다.

신학교도 총회도 마찬가지다. 돈을 얻고 친교를 잃었다. 욕심이 사랑을 먹었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교회는 역시 은혜와 진리 위에 서야 한다. 은혜와 진리가 교회의 양식이요 그 터전이다. 교회는 ‘마몬’[5]의 사동(使童)일 수가 없다. 돈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돈’을 쓸 줄 아는 성숙한 ‘청지기’에만 적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과보다 크다. 무한대로 크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신’은 건재하다.

그리고 이남규도 김세열도 ‘기장’의 원로 목사로 머문다. 김세열은 탈선했다지만 돌아올 것으로 믿는다.



[각주]
1. 차압(差押) - ‘압류’(민사소송법에서 집행 기관에 의하여 채무자의 특정 재산에 대한 처분이 제한되는 강제 집행)의 비표준어
2. 유용(流用) - 남의 금전이나 물품을 허가없이 다른 일에 돌려씀
3. 펴이다 – 제대로 잘되어 가다
4. Earmark : 배정하다
5. 맘몬(mamon) - 부, 재물, 소유라는 뜻으로, 하느님과 대적하는 우상 가운데 하나를 이르는 말

2026년 3월 3일 화요일

[범용기 제2건] (90) 돌아와 보니 - 신학교 교수들은?

신학교 교수들은?

신학교 교수들은 그 동안에 온전히 방관 상태였다. 그 이유를 나는 모른다.

나는 불평했다.

“나는 내 갈 길을 혼자서라도 가겠지만, 소위 진리 파지(把持)[1]를 말하는 너희는 무엇하고 있느냐? 진리는 인간의 증거를 통하여 산다…” 하고 편지를 띄웠다.

교수단에서는 신학교 측과 총회 측에서 각기 한 사람씩 선출하여 공개토론회를 열자고 제의해 왔다.

장소는 경동교회 예배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총회 측에서는 배성근을 ‘대변자’로 내세웠다.

신학교수단에서는 서남동 교수를 뽑았다. 서남동 교수는 풍부한 재료를 인용하여 한국교회사의 흐름과 세계 신학사상의 역사적 조류와 ‘한신’ 분규의 지하수(地下水)와 분출 현상 등등을 연대별 도표까지 붙여 장장 세 시간의 명강연을 했다. 배성근은 온전히 압도된 것 같았다.

그는 말했다.

“나는 신학자가 아니므로 학문적인 이론은 없다. 그러나 총회 산하의 신학교육기관은 총회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

‘총회’는 법왕청이 아니다 하고 야유하는 소리도 들린다. 거수로 승부를 결정한다. 거의 전부가 서남동 켠이었다. 배성근이 망신했달까, 총회가 망신했달까!

‘한신’ 교수진 체면은 섰다.



[각주]
1. 파지(把持) - 꽉 움키어 쥐고 있음

[범용기 제2권] (89) 돌아와 보니 - 설립자 김영철은?

설립자 김영철은?

그는 시종 총회에 나와 있었다. 그는 어느 휴식 시간에 별실에서 ‘한신’ 관계자들을 소집했다.

“‘한신’을 살리는 길은 김 목사와 조선출이 함께 나가는데 있소!”

그는 나에게 사직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그럼 이사회를 소집하시오. 이사회에서 결정 되는대로 하지요.”

나는 퇴장해서 저켠 뜨락 모새기에 혼자 앉아 있었다.

‘갑론을박’(甲論乙駁)으로 설립자는 곤경에 빠졌다.

나에게 ‘사과’(謝過)하고 나의 참석을 요청한다.

나는 들어갔다. ‘설립자가 주책없다’는 까십이 돈다. 나는 “내 사건으로 설립자와 여러분에게 심려를 끼치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행정 문제이기 전에 신앙과 양심의 문제니까 나는 내 양심대로 내 길을 갈 것뿐입니다” 하고 앉았다. 모두들 흐지부지 흩어졌다.

[범용기 제2권] (88) 돌아와 보니 - “평심원”에서

“평심원”에서

내가 광주 백영흠 목사 댁에 은거한지 이틀 후던가 동산병원[1] 여(呂) 의사(女의사이기도 하다) 그룹 세 분(?)이 찾아왔다.[2] 그들은 서울 혜화여의전 재학 중에도 몇 번 우리 집에 찾아온 일이 있는 ‘옛 친구’들이다.

그들은 광주 동산병원[3]에 취직됐지만 단순한 ‘의사’로서 만족하기에는 너무 ‘비전’이 컸다. 그들은 결핵요양원을 설립했다. 그들의 월급에서 성별하여 ‘제단’에 바친 성금으로 사설 요양원을 세웠다. 요양실, 의료실, 주방, 식당 등이 갖춰진 아담한 한국식 기와집이었다.

그들은 나를 거기에 안내했다. 고장은 백운산 계곡이어서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한다. 아직 “이름”이 없다. 그들은 나에게 작명(作名)을 청한다. 나는 ‘평심원’(平心園)[4]이라 이름했다. 현액(懸額)[5]도 써달래서 썼다. 낭간 밑 두툼한 도리[6] 위에 걸어놓았다. 고전문화재 같이 의젓했다.

나는 거기서 숙식하며 한 주일쯤 지냈다. 고독과 정사(靜思)[7]가 나의 일과였다. 멀리 폭포 밑에도 가보았다. 그렇게 높지는 않아서 수량이 풍부했다. 나는 알몸으로 폭포 웅덩이에 허리까지 잠궜다.

얼음냉수 같아서 곧 나왔다. 폭포 바로 밑은 파랗게 깊은 ‘심연’이어서 조금 무시무시해진다. 돌아오는 길에서 독사 한 놈을 두들겨 잡았다. 늘어졌지만 채 죽지는 않았다. 요양원까지 왔다. 요양원 별실에 있는 젊은이 둘이 뛰쳐나와 그 뱀을 달라한다. 뭣하려느냐? 했더니 구어 먹는다고 했다. 닭고기보다 더 맛나다는 것이었다. 구워서 몇 점 내게 가져왔다. 진짜 별미였다. 난생 첨 먹는 뱀고기다.

이 젊은이 둘 중에 한 사람은 ‘한신’ 재학생이었다. 입학은 했지만 ‘소명감’ 같은 것은 없다고 느껴져서 고민했다. 그 ‘진실’이 그를 이런 데로 이끌어 온 것이었다.[8]

그는 우수한 지성(知性)의 소유자였다. 소명감을 경험하려고 혼자 산중에서 철야기도도 해보고 난신고행도 얼마 해봤지만 아무 응답도 없었다 한다. 내게 상담을 요청한다.

나는 말했다.

“네가 네 본위로 하느님을 불러 내리려는 것은 오만하다. 그건 너 자신을 위한 ‘영적 탐욕’이다. ‘믿음’이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한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신앙이란 풀 자라듯 안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전개되고 성장하고 열매 맺는 장기 공작이다. 지금은 초조하고 불만스럽고 의혹에 차 있다 해도 그것 때문에 믿음 자체를 포기하거나 단념해서는 안 된다. 그런 데로 꾸역꾸역 계속하노라면 긴 세월 안에서 몰래 몰래 자라는 것이다. 신학교에 돌아가 공부를 계속해라.”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큰 교회 목사로 충성하고 있다. 해외 유학도 했다.

나는 지금 ‘신종선’을 두고 하는 말이다.[9]

또 한 청년은 사범학교 속성과를 마치고 소학교 교사로 있는 사람이었다. 인생 문제에 고민하여 신경쇠약의 한계선까지 이른 진지한 젊은이였다.

나는 그에게 권했다.

“혼자 고민해봤자, ‘자학’ 밖에 되지 않는다. ‘한신’에 와라 입학시켜주마!” 했다.

그는 그렇게 용단하고 ‘한신’에 입학했다.

‘선과’에 들어왔지만, 그 동안에 5년제 중고등학교 전 과목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한신’ 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마쳐 학사, 석사 칭호까지 획득했다. 지금 금호동 천은교회 목사로 충성과 지성을 겸한 목회에 전념한다. 단기간이지만 영국 유학도 했다. 노력가라 하겠다.

‘한신’ 시간 강사로도 봉사하고 있다 한다. 이름은 이기영이다.

그렇게 생각하노라면 나의 백운산 피신 생활 며칠도 하느님 ‘은혜의 질서’ 중 한 토막이었다고 감사한다.

총회에서는 헌법, 신앙고백서, 권징조례, 예식서 등등이 일사천리로 무수정 통과됐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출 사건에 대하여는 재판부가 설치되고 이남규가 재판장이 됐단다.

재판부에는 내가 반드시 출두해야 한다고 강권한다. 나는 안 간다고 고집했다. “나는 영어로 말한다면 Sick and Tired[10] 했다. 삶아먹든 구워먹든 마음대로 해라” 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이튿날 그는 다시 왔다. “싸움은 끝까지 싸워야지. 최후 결전장에서 후퇴하면 되느냐? 같이 가자” 하고 잡아 일으킨다.

그래서 다시 갔다.

이남규 재판장 앞에 앉았다.

나는 말했다.

“내가 할 말은 여기 다 쓰여 있으니 더 말하지 않겠다.”

그는 “알았다”면서 나가라고 한다.

결국 판결문은 간단했다.

“조선출은 학교 공금을 변상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출에게는 변상 능력이 없으므로 그것은 결손 처분에 붙인다. 동시에 조선출은 ‘한신’에서 퇴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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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자 사건]은 제46회 총회 회의록

[부록 제1호] 한국신학대학 경리조사 처리에 관한 건 ☞ 44쪽 이하를 참조



[각주]
1. 『범용기』(제2권)에는 동산병원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평심원에서 장공과 만났던 실제 인물인 이기영 목사가 ‘제중병원’(현재 광주기독병원)으로 수정해 주었다.
2.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여성숙 선생을 가리킴, 개신교(초교파) 독신여성 수도공동체인 ‘디아코니아자매회’ 설립자
3. 제중병원(현재 광주기독병원)
4. 『범용기』(제2권)에는 평심원(平心院)으로 적혀있지만, 당시 평심원에서 장공과 만났던 실제 인물인 이기영 목사가 평심원(平心園)으로 수정해 주었다.
5. 현액(懸額) - 그림이나 글자를 판에 새시거나 액자에 넣어 문 위나 벽에 달아 놓은 것
6. 도리 – 집이나 다리 따위를 세울 때, 들보와 직각으로 기둥과 기둥을 건너서 위에 얹는 나무
7. 정사(情思) -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생각함
8. 당시 장공과 상담한 이기영 목사(1967년 졸업)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에 한신대 1년 중퇴하고 요양 중이었던 사람은 이종헌 목사(1964년 졸업)라고 한다. 이기영, “그리스도인의 지성과 자유한 삶을 구현하신 분”, 장공 김재준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회, 『장공 이야기』(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1), 284-292쪽. 이종헌 박사는 1939년 4월 27일 제주에서 태어나 한국신학대학, 연세대 대학원으로 마치고 제주YMCA,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활동하였다. 1971년 데니슨(Daneson)의 그룹에 영향받아 한국인간관계교육협회가 생기고 빈센트 신부(Dr. Vincent)와 그룹치료를 10년간 활동한다. 영국 버밍험대학에서 상담수업 디프로마(Diproma) 취득하고 미국 클라인벨 박사에게서 목회상담을 배웠다. 서울 강남(1985~1995), 양평(1996~2011)에서 상담 및 그룹치료 활동을 하였으며, 2012년부터 제주에서 서양상담의 대안인 한국상담 아리랑풀이작은그룹 운동을 펼치고 있다.
9. 신종선, “지금도 마음속에 깊이 살아 계시는 분”, 장공 김재준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장공 이야기』(오산: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1), 135-140. 이 부분에 대해서 장공 김재준 목사는 그 당시 평심원에서의 인연을 신종선 목사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신종선 목사(서울노회 공로목사)는 『범용기』에서의 기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실 나는 광주 백련계곡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으며 더욱 평심원에 들른 적도 없다. 물론 뱀을 요리하여 구어 스승을 대접한 일도 없다. 아마도 김 목사님이 약간 기억의 착오를 일으키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분의 이 기억의 착오 속에서 깊은 은사의 정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그분이 나를 한 제자로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정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추모하면 할수록 김 목사님은 나의 훌륭한 은사이셨다.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언제나 나는 그 분에게 상담하여 나의 소명감의 고민을 해결 받은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분은 나의 인생의 중요한 시절에 나를 가장 보람있는 길로 인도하여 주신 은사이시었다. 비록 일종의 기억의 착오가 포함되어 있지만 보잘 것 없는 나를 우수한 지성의 소유자로 과찬하여 삶의 용기를 북돋우어 주셨고, 내가 권하는 뱀 고기를 싫어하지 않으시고 받을 만큼 마음의 고향을 잃고 방황하던 나를 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 박게 해주셨던 것이다.” 당시 장공과 상담한 두 청년은 앞페이지에서 언급했듯이, 이종헌 목사와 이기영 목사이다.
10. Sick and Tired : 아주 싫어진, 진절머리가 나다

[범용기 제2권] (94) 다시 “한신” 캠퍼스에 - “갈리하”의 서거와 “호니” 총무

“갈리하”의 서거와 “호니” 총무 위에서 언급한대로 갈리하 캐나다연합교회 외지선교부 총무는 나와 작별한 몇 주일 후에 ‘저쪽 나라’로 갔다. 부총무로 있던 ‘호니’가 총무로 승진됐다. 그는 총무 취임 직후 인사 겸 한국을 방문했다. 우선 ‘한신’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