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6일 금요일

[범용기 제2권] (124) 재건 국민 운동 - 재건 국민 운동

재건 국민 운동

박정희가 아직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였다.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였던지 “재건 국민 운동”[1]이란 것을 만들었다. 의장은 이관구로 이미 발표됐다. 그러나 부의장 자리와 중앙위원 등은 아직 선정되지 않았었다.

하루는 홍종인이 기어코 신문회관까지 같이 가자고 조른다.

같이 갔다. 사람들이 배꾹 차 있었다.

‘재건 국민 운동 발기총회’란다.

이관구가 사회하고 있었다. 홍종인은 “김재준 박사님을 부위원장으로 추대합시다” 하고 발언한다. 두말없이 박수 환영이다.

나는 ‘국민 재건 운동’에 완전무식자니까 할 수 없다고 재삼 거절해 봤으나 통하지 않았다. 홍종인이 내 등을 밀어 맨 앞에 내세운다. 나는 퇴장하기도 안됐고 해서 나갔다. 취임사를 한마디 하라는 것이다.

나는 말했다.

“지금 ‘정부로부터 국민에게’ - 라는 ‘상의하달’(上意下達)은 거의 기계적으로 되지만 ‘국민으로부터 정부에’의 ‘하의상달’(下意上達)은 거의 단절됐다. 일방통행은 민주적일 수가 없다. 이런 마당에서 이 국민운동이 국민의 의사와 소원을 정부에 전달시키는 ‘하의상달’의 구실을 할 수 있다면 그런 조건에서 취임을 승낙한다. 그것이 안 되면 언제든지 물러난다”고 했다.

그후 무언가 모임이 잦았다. 시민회관에서 무슨 시국강연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나도 연사로 몇 번 ‘데뷰’했다.

중앙위원회가 모였다. 국민의 소리를 정부에 전달하려면 우선 국민의 소리가 어떤 것인가를 기탄없이 직접 들어야 한다. 위원들이 총동원하여 둘씩 둘씩 짝지어 전국 각 지방을 뜯어 맡고, 직접 현지에서 그 지방국민들과 면담해봐야 한다는 제안이 가결됐다. 순회할 지방과 날짜까지 결정되어 사무국에서 그대로 진행시켰다.

순회한 위원들의 보고회가 열렸다. 그들이 발굴한 것은 모두 일상생활에 직결된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거의 90%가 현실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었다고 한다. 가능한 최선의 개선안도 구체적으로 제시된 데가 많았다. 우리는 그것을 정리하여 “이런 것이 ‘민의’였습니다” 하고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고하고 요청하기로 했다.

다 준비된 어느 날 우리는 전원이 최고회의 의장을 그의 사무실에 방문했다.

약 30분 후에 박 의장이 나타나 일일이 악수한다. 무던히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였다.

대변인이 준비한 문서에 따라 국민실정과 소원사항을 보고하고 선처를 바란다고 했다. 박 의장은 우리의 노고를 감사한다면서 성의껏 하겠노라 했다.

그리고 “이런 국민사상, 국민도의, 국민의례 등등의 개선은 여러분이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저희들도 적극 협력하렵니다….” 했다.

그리고서 자리를 떠난다.

그러나 그 후에는 아무 소식도 없다. 얼마 후에 우리 사무국장이 현직 고급장교 누군가로 대체됐다. ‘재건국민운동’은 온전히 군대화 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운동 어느 회합에도 나가지 않았다. 얼마 더 있다가 이관구가 나가고 유달영[2]이 의장이 됐노라면서 수유리 우리 집에까지 찾아왔다. 간곡하게 협력을 청한다.[3]

그러나 나는 끝까지 거절했다.

그 후에 ‘국민의례준칙 작성위원’으로 기독교적인 각도에서 간결화한 내 초안을 내놓은 일도 있었지만, 결국 유교 전통이 채택됐다는 것을 책이 나온 다음에사 알았다.[4] 국민이 거의 전부가 유교 의례(儀禮)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 사실인 한, 그럴 것이라고 이해했다. 어쨌든 간소화한 것은 사실이어서 결혼식 같은 것도 5분이면 거뜬이 끝나도록 돼 있었다.

상ㆍ제(喪祭) 의례도 상상이상으로 간소해졌다. 일반사회에서는 많이 실천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도루묵이 됐다. 좋든 궂든 민속(民俗)을 고친다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이 아니라고 실감했다.



[각주]
1. 재건국민운동(再建國民運動) – 5ㆍ16 군사정변 직후부터 국민의 도의ㆍ재건의식을 높이기 위해 벌였던 관주도적 범국민운동(1961년 6월~1964년 8월). 유진오, 유달영, 이관구 등이 본부장을 역임했다. 이관구는 3대 회장으로 1963년 5월부터 1964년 1월까지 활동했다. 『범용기』에서는 홍종인의 ‘적극적인 권유’로 참여했다고 나오는데, 제2대 회장을 역임한 유달영(1961.9~1963.4)이 세 번이나 방문하여 참여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허은, 「‘5ㆍ16 군정기’ 재건국민운동의 성격」(『역사문제연구』 제11호, 24쪽).
2. 유달영(柳達永, 1911~2004) - 호는 성천(星泉). 죽림공립보통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원 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를 졸업하였다. 1956년 미국 미내소타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고, 1972년 건국대학교에서 명예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30년대에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이었던 최용신과 함께 농촌계몽운동을 하였으며, 1942년 김교신의 『성서조선』에 실린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을 문제삼은 일제에 의해 잡지가 폐간되고 독자 300여명이 검거되는 사건이 있을 때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59년부터 1979년까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5ㆍ16 군사 정변 이후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하였다. 1980년대 이후부터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3. 유달영은 제2대(1961.9~1963.4)와 제6대(1979.6~1985.3)를 역임했기 때문에 아마도 유달영이 아니라 이완구 다음으로 제4대 회장을 맡은 임병직(1964.2~1964.10), 아니면 제5대 고재욱(1964.10~1976.6)일 것이다.
4. 1969년 3월 5일에 제정되어 대통령고시 제15호로 나온 ‘가정의례준칙’을 말하는 것 같다.

[범용기 제2권] (123) 5ㆍ16 군사반란 1961 - 성서해설 내고

성서해설 내고

1962년 1월이었던가 -

지문각 출판사를 경영하는 김성무 씨가 일반대중을 위한 ‘성서해설’을 써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지금까지 CLS[1]에서 내는 기독교서적은 자기 본위의 ‘전도용’이라는 인상 때문에 일반 시민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련다고 했다. 그도 ‘불신자’였지만, 그런 착상을 했노란다.

그가 너무나 성실해 보이길래 승낙했다.

한 달 안에 탈고해 줘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자택연금 상태였기 때문에 외출도 여의치 않았고 용돈도 궁했었다. 나는 쓰기 시작했다.

단 시일 안에 나온 책이어서 일종의 Patchwork[2]같이 됐지만, 그래도 내나름대로의 색깔이나 맥박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었다. 지도 그리기와 연대표 만들기에는 막내 아들 관용의 손이 도왔다. 일종의 번역물이었고 좋게 말해서 ‘편저’였지만, ‘저’(著)로 했다. 출판사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서문에서는 그것을 밝혔다.[3]

몇 달 안에 다 팔렸다. 의례 재판(再版)해야 할 것이었지만 지문각에서 『한국인명사전』, 『한국역사사전(?)』[4] 등 방대한 출판물 간행을 준비 중이어서 성서해설 같은 소책자에는 맘 쓸 여유가 없었다. 하루는 그와 함께 편집사무실에 들러 봤다. 수십 명 저명 학자들이 산떼미 같은 재료류를 앞에 놓고 여념 없이 붓을 놀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해냈다. 그리고 파산했다. 오랜 후일에 『성서해설』은 딴 출판사에서 간행해서 캐나다에 있는 내게도 열아무 책이 보내 왔었다.



[각주]
1. 대한기독교서회를 말함
2. Patchwork : 여러 조각(부분)들로 이뤄진 것, 일명 ‘짜집기’
3. 김재준, 『성서해설』, 지문각, 1962년
4. 1963년에 이홍직이 편찬한 『국사대사전』(전 2권)을 말함

[범용기 제2권] (122) 5ㆍ16 군사반란 1961 - 기자들에 대한 탄압

기자들에 대한 탄압

기자들의 보도망을 졸라맨다. 정부 각 부서 출입기자는 그 부서에서 발표하는 기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쓰지 못한다. 기자들의 ‘특종기사’, 일본말로 ‘독구다네’(特種)[1]는 없다. 지방기사를 못 쓴다. 어떤 사건을 기사화 했을 경우에는 객관적인 증거재료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기자들은 걸핏하면 끌려 가 개 패듯 두들겨 맞는다. ‘부아’가 난다. ‘발산’할 고장은 ‘대포집’, 술집이다. 사내(社內) 편집기자들도 마찬가지다. 기껏 정성들여 쓴 ‘에세이’가 편집국장 손에서 빠져버린다. 윤전기[2]에 들어가기 바로 전에 CIA 검열관이 현장에서 지워버린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천관우[3]는 비밀리에 준비했던 자기 논설을 CIA 검열통과 직후에 감쪽같이 윤전기에 넣는다. 그런 ‘기습’이 성공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천관우는 동아일보 전무이사이기도 했다. 몇 번이고 문초를 당했다. 그러나 그도 끈덕졌다. 경찰에서는 광고주들을 공갈해서 광고 원(源)을 막았다. 광고는 신문경영의 ‘생명선’이다.

마감판에는 동아일보 사장 고병욱을 연행했다. 천관우를 전무이사 자리에서 축출하라는 지령이었다. 순하디 순한 그도 ‘부아’[4]가 났다.

“아예, 당신들이 다 맡아 하시오!”

“이 자식, 우리가 언제 신문을 하지 말랬나? 어디 맛 좀 볼래?”

50이 지난 늙은이가 실컷 두들겨 맞고 겨우 풀려 나왔다. 그는 천관우에게 고충을 호소했다.

그래도 나가란 말은 차마 못한다.

정치깡패가 동원됐다. 천관우가 퇴근할 즈음에는 동아일보 현관 앞에 수십 명 악당들이 어깨를 재면서 슬쩍 쳐다본다. 옆구리를 툭 다치며 뒤를 따른다. 어느 밤중의 길가에 시체가 되어 어느 술집 컴컴한 길가에 버려질지 누가 알 것인가? 그런 경우에는 검시도 안한다.

“술 주정꾼이 넘어져 죽었다”로 끝난다.

동아일보에서는 그런 일을 이미 경험했었다.

동아방송에서 방송프로와 방송극 창작으로 이름났던 젊은 작가 ‘조동화’가 밤중에 두들겨 맞고 다방골 술집 앞에 시체같이 버려졌던 사건 말이다.[5] 가족들이 찾아 돌아다니다가 발견해서 동사(凍死) 직전에 살아났지만, 그의 작가 활동은 일시 중단될 밖에 없었다. 그는 전영택 목사의 사위다.

결국 천관우도 동아일보를 사면했다.



[각주]
1. 特種(とくだね, 토쿠다네) - 신문 등의 특종기사
2. 윤전기(輪轉機) - 원통형의 판면과 이와 접촉하면서 회전하는 인압 원통 사이에 둥글게 감은 인쇄용지를 끼워 인쇄하는 기계
3. 천관우(千寬宇, 1925~1991) - 호는 후석(後石). 충북 제천 출생. 1937년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며, 1944년 경성제대 예와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학부에 진입하면서 한국사를 전공했다.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 1951년 대한통신 기자로 일하면서 언론계에 투신하였다. 1952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네소타대학 신문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54년부터 한국일보, 조선일보 등을 거쳐 1968년 『신동아』 필화사건으로 그만두기까지 언론계의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 뒤 3선개헌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가 가시화됨에 따라 반독재ㆍ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다. 유신체제 속에서는 감시와 탄압이 심해서 칩거하며 한국사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전두환 정권하에서 관직을 맡게 되면서 변절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4. 부아 – 분하고 노여운 마음
5. 조동화(趙東華, 1922~2014) - 함북 회령 출신으로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후 1963년 동아방송에 입사하였다. 동아방송 재직 시 이른바 1964년 ‘앵무새 사건’과 1965년 ‘테러 사건’을 겪었다. 장공이 언급한 사건은 1965년 9월 8일 새벽에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몰매를 맞은 사건으로 갈비뼈가 세 군데나 금이 갔었다고 한다.

[범용기 제2권] (121) 5ㆍ16 군사반란 1961 - 신문의 날

신문의 날

‘신문의 날’[1]이란 것이 제정되어 제1회[2] 신문이 날에는 동아일보사에서 강원룡 목사의 기념강연이 있었다.[3] 나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신문인들의 말에 의하면 감명이 컸다고 전해졌다. 동아일보에서는 크게 취급되었다.

그 다음해 ‘신문의 날’에는 나에게 강연 부탁이 왔다. 나는 시간에 맞춰 갔다. 사람들은 다 모여 기다린다. 그런데 내 강연보다 먼저 ‘박 대통령의 연설’이 있다는 것이었다. ‘대독’이 아닌 ‘자독’(?)이라니 기다릴 밖에 없었다. 기대리기에[4] 지쳐서 사회자와 연사는 강단에 올라앉으라고 한다. 단상에서 또 반시간 이상 기다렸던 것 같다.

결국 가마잡잡한[5] 작은 체구의 박 씨가 어깨를 재면서 낭하[6]에 나타난다.

주최자 측에서는 모두 단에서 내려 낭하에서 모셔 들인다. 들어와 단상에 나타난다. 그러나 나는 내 자리에 시종 앉아 있었다. 기립도 안했다. 그는 자기 할 말을 마치고 나간다. 또 따라들 나간다. 나는 그냥 앉아 있었다. 내 강연 순서 때에나 일어난 셈이다.[7]

거기 모인 청중은 대부분이 신문기자들일 것인데 내 태도에 분개한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한국의 신문은 주어진 재료의 보도만이 아니다. 소위 ‘경세의 목탁’[8]이어야 한다고 했다. 언론이 자유와 정의를 위한 횃불이나 목탁이 될 수 없다면 한국 민족은 암흑 속에 비참할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 ‘기자’는 ‘예언자’ 구실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 말에 대한 반응은 측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덕분에 고재욱[9], 홍종인, 오종식[10] 등 신문계 원로들과 알게 되었다.



[각주]
1. 신문의 날 –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 창간일(1896년 4월 7일)을 기념하고 독립신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날로 1957년 4월 7일 창립된 한국신문편집인협회(초대 회장 이관구)가 정한 것이다.
2. 당시 신문 기사(동아일보, 경향신문)를 살펴보면 정황상 1964년 제8회 신문의 날 행사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1957년에 신문의날이 제정되었다면 제1회부터 4회까지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행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3. 동아일보, 경향신문의 1964년 4월 6일자 기사를 참고하면 ‘신문의 공정’이라는 주제로 제8회 신문의 날 행사가 있었으며, ‘신문의 공정’이라는 제목으로 강원용 목사가 강연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4. 기대리다 - ‘기다리다’의 방언
5. 가마잡잡하다 – 약같 짙게 가무스름하다. 규범 표기는 ‘가무잡잡하다’이다.
6. 낭하(廊下) - 건물 내부의 긴 통로
7. 동아일보, 경향신문의 1965년 4월 6일자 기사를 참고하면 ‘신문의 성실’을 목표로 내건 제9회 신문의 날(1965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는 기사가 있다. 이날 김재준 목사는 ‘신문의 성실’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8. 목탁경세(木鐸警世) - 목탁은 세상을 깨우는 소리라는 말
9. 고재욱(高在旭, 1903~1976) - 호는 심강(心崗). 전남 담양 춠니. 서울에서 중앙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아자부중학교, 야마가타고등학교를 거쳐 경도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1931년). 1931년부터 동아일보에서 활동하였으나 1940년 동아일보 폐간으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광복 후 동아일보가 복간되면서 다시 언론 활동에 종사하였다. 1961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 1965년 국제신문협회 한국위원장이 되었으며 동아일보 사장이 되었다. 1971년 동아일보사 회장이 되었고 1975년 명예회장이 되었다. 김성수의 처조카로 1966년에 인촌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0. 오종식(吳宗植, 1906~1976) - 호는 석천(昔泉). 부산 출생. 동래공립보통학교와 동래사립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도요대학 전문학부 문화학과를 졸업하였다. 광복 이후 민주일보, 민중일보를 거쳐 경향신문, 서울신문, 평화신문, 한국일보등의 주필을 지냈으며 1060년 서울신문사 사장, 1962년 부산 국제신보사 사장, 1966년 한국신문연구소 소장과 한국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범용기 제2권] (120) 5ㆍ16 군사반란 1961 - 신문윤리위원회와 “신문의 날”

신문윤리위원회와 “신문의 날”

1961년 7월 30일 ‘한국신문윤리위원회’가 구성됐다. 그것은 언론 규제법으로 언론을 완화하기 위한 언론인의 고충에서 태어난 것이었다.[1]

어쨌든 각 신문사 대표와 문학인 종교인 중에서 위원을 뽑아 위원회라는 자치기관을 만들었다. 종교계에서나, 문인 중에서 한무숙[2] 여사, 대학에서 김중한 서울 법과대학교수, 언론계에서 한국일보사장 장기영[3], 동아일보에서 우승규[4] 논설위원, 그리고 언론인 원로로 홍종인[5], 이관구[6] 등도 위원이었다고 기억된다.[7] 여기서 ‘세계신문윤리강령’에 준한 ‘한국신문윤리실천요강’이 채택되어, 언론계 자체 내에서의 문제건, 신문에 의한 명예훼손 소송, 기타 중요 사건들을 다루었다. ‘가정재판소’ 비슷한 성질의 것이어서 언론재판소랄까, 어쨌든 신문계 인사들의 무대였기에 종교인 대표로서의 나는 별로 발언하지 않았다.

김용구[8] 씨가 사무국장으로 실무를 맡아 수고했다. 실지로 다룬 것은 2, 3건에 불과했다.



[각주]
1. 한국신문윤리위원회는 1961년 7월 ‘신문윤리실천요강’을 제정하고, 1961년 9월 21일에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2. 한무숙(韓戊淑, 1918~1993) - 호는 향정(香庭). 서울 출생. 부산 봉래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부산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처음에는 화가를 지망하여 일본인 아라이(荒井筏久代)에게 사사하기도 하였다. 1940년 김진흥과 혼인한 후 작가로 전향하였다. 1942년 『신시대』 장편소설 공모에 『등불 드는 여인』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근대사의 흐름을 다룬 「역사는 흐른다」 이외에「생인손」, 「송곳」등을 발표하였다.
3. 장기영(張基榮, 1910~1977) - 호는 백상(百想). 서울 용산 출신. 한남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들어갔다. 1950년 한국은행 부총재로 승진하였으나 1952년 사임하고 조선일보 취체역 사장이 되었다가 1954년 4월 방일영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1954년 5월 『태양신문』을 인수하여 『한국일보』로 바꾸어 창간하였다. 1964년 한일회담의 막후에 관여했고, 1971년 민주공화당에 참여하여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백상예술대상은 그의 호에서 유래했다.
4. 우승규(禹昇, 1903~1985) - 호는 나절로. 서울 출생. 1919년 상해임시정부 청년당원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1923년 상해 혜령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임시정부 신문을 발행하는 일을 맡았으며, 1931년 귀국하여 조선일보, 중앙일보, 매일신보 등의 기자로 일하다가 1947년 경향신문사 입사하여 편집국장이 되었다. 1954년에서 1966년까지 동아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편집고문, 이사겸 논설위원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5. 홍종인(洪鍾仁, 1903~1998) - 평남 평양 출생. 1921년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1925년 『시대일보』 기자를 시작으로 평생 언론활동에 종사했다. 1929년 조선일보사로 자리를 옮겨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조선일보로 복귀하여 계속 언론활동을 하였다. 1944년 학병 입영에 대해 긍정적으로 서술하여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다.
6. 이관구(李寬求, 1898~1991) - 호는 성재(誠齋). 19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때 일본 자객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궁내부 대신 경직(耕稙)의 손자이다. 1924년 일본 교도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26년 동대학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26년부터 1931년까지 보성전문학교에서 강사로 있으면서, 1927년 신간회에 참여하였다. 신간회 회장이며 조선일보사 사장인 이사재의 발탁으로 조선일보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경향신문사 부사장 겸 주필(1959-1960)로 있을 때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는 논설을 쓰기도 하였다.
7. 1961년 9월 21일 발족 당시 위원장은 김세완(대한변호사협회)이었고, 윤리위원으로는 이관구, 장기영(한국일간신문발행인협회), 우승규, 홍종인(한국신문편집인협회), 정종식(기자), 김중한(교육계), 김재준, 한무숙(기타)로 구성되었다.
8. 김용구(1929~2019) - 감리교 신학교, 노스웨스턴대학교,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함

[범용기 제2권] (119) 5ㆍ16 군사반란 1961 - 대한일보 논설도 쓰고(1962)

대한일보 논설도 쓰고

1962

나는 비교적 조용하게 수유리에 은거(隱居) 했다.

그렇다고 동면(冬眠) 상태였던 것은 아니다.

설교 부탁은 여기저기서 거의 매주일 되었다. 교회 창립기념예배니, 누구의 환갑잔치니, 목사위임식이니 하는 등등의 교회 행사에는 거의 빠짐없이 초청된다. 약혼식, 결혼식 주례로서의 빈도도 상승한다.

신문 잡지 등에서 ‘잡문’ 부탁도 온다.

친구의 유혹이 있으면 명산 대천에 관광도 간다. 말하자면 유유자적(悠悠自適)[1]이다.

하루는 황혼이 짙어 컴컴한 수유리 내 ‘장막’에 김연준 대한일보[2] 사장이 찾아왔다. 그는 나를 늘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선생님, 대한일보 논설위원으로 모시고 싶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사설은 신문사로서의 주장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제가 신문을 맡은 바에는 사설이 독특한 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설’이 시사(時事)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며 구차한 콤멘트나 하는 정도라면 또 하나의 신문을 경영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정치구 경제구 문화구간에 ‘도의’(道義)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저는 ‘도의’ 사설을 꼭 넣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밖에는 부탁드릴 분이 없습니다. 며칠에 한 번씩 잠시 들러 주십시오, 그때는 제가 제 차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 바쁜 시간에 이렇게 먼 길을 찾아주셨는데 거절하기 죄송합니다만, 그러면 가담가담[3] 잡문이라도 적어 보내겠습니다. ‘사설’은 너무 어마어마하구요.”

그는 “꼭 논설위원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면서 떠나갔다.

그때 마침 내가 강원도 정선지방을 탐승[4]한 일이 있었기에 그 기행문 비슷한 걸 적어 보냈더니 그 비좁은 지면을 계속 할애해 주었다.

얼마 지나서 그는 또 밤에 찾아왔다. 말하는 도중에 라디오에서 ‘중대방송’이 있다면서 진행 중의 프로를 중단한다. 우리도 잠시 얘기를 중지했다. ‘통화개혁’이란 것이다.[5]

“손해 당할 조건은 없습니까?” 했더니 자기에게는 아무 영향도 없다면서 태연했다.

그럭저럭 나는 대한일보가 KCIA에 의하여 폐문될 때까지 10년 동안 논설위원 책임을 계속했다. 그야말로 날마다 잠시 들르는 정도였지만 논설위원 회의에는 꾸준하게 참여했다.

그때 논설위원으로서는 강영수[6](주필), 주요한[7](회장), 허우성, 한태연[8], 신상초[9], 조동필, 엄요섭, 김은우[10], 민병기[11](후기에) 등등이었다. 모두 야당적인 평론가들이었지만, 강영수 주필만은 치밀한 신중론자로서 가시 돋친 단어를 매끈하게 갈아 넣는 명수였다.



[각주]
1. 유유자적(悠悠自適) - 속세를 떠나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편안하게 삶
2. 대한일보(大韓日報) - 한양재단에서 『평화신문』을 인수하여 1961년에 창간한 일간신문(1973년 폐간). 이 신문은 한양대학교가 건학정신으로 삼은 ‘사랑의 실천’을 사시(社是)의 첫째로 내세우고 시시비비(是是非非)에 입각한 ‘엄정중립’의 기치를 표방하였다.
3. 가담가담 - ‘이따금’의 북한어
4. 탐승(探勝) -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님
5. “화폐개혁 10원을 1원으로” - <경향신문 1962년 6월 10일>
6. 강영수(姜永壽, 1912~1997) - 호는 백담(白潭). 경기도 개성 출생.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경성일보, 동아일보, 한성일보, 대동신문, 서울신문, 중앙일보, 경향신문, 평화신문 등을 두루 거치고 대한일보 전무겸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기독교신문 사장을 역임했다.
7. 주요한(朱耀翰, 1900~1979) - 평남 평양 출생. 개신교 목사였던 주공삼의 맏아들이며, 소설가 주요섭의 형이다. 1912년 평양 숭덕소학교, 1918년 일본 메이지학원 중등부, 1919년 도쿄 제1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창조』에 「불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이후 전향 선언을 하고 친일 행각을 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다가 풀려났으며 1950년 조만식을 중심으로 창당된 조선민주당 선전부장과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1960년 민주당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ㆍ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8. 한태연(韓泰淵, 1916~2010) - 호는 율산(栗山). 대한민국 법조인, 정치인. 함경남도 영흥 출생. 일본 와세다대학 법하과, 영남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및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광복 이후 성균관대학교,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쳤다. 대한일보 논설위원도 겸하였다. 5ㆍ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을 도와 유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9. 신상초(申相楚, 1922~1989) - 평북 정주 출생. 1935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후쿠오카고등학교 문과를 마친 뒤, 동경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했으나 1944년 일본 학병으로 중국전선에 배치된 후, 탈출하여 조선의용군 일원으로 항일전쟁에 참가하다 광복을 맞았다. 해방 이후 20여년간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활동을 계속하였다. 언론활동을 활발하게 하였으며, 1954년부터 죽을 때까지 흥사단 활동을 하였다. 제1공화국 때부터 『사상계』를 통하여 반정부 계열의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유신체제에 협력하였으며 제5공화국 정권에 협력하였다.
10. 김은우(金恩雨, 1916~1999) - 서울 출생. 김종우 목사(기독교대한감리회 초대 감독)의 차남. 배재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 문과, 일본 릿교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미국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언론인 강영수, 조풍연, 사학자 홍이섭, 법학자 이항녕 등과 교유하였다. 1945년부터 1981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가르쳤다. 대한일보 및 경향신문 논설위원, 세계일보 사장, 배재학당 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1. 민병기(閔丙岐, 1927~1986) - 서울 출신. 민영환의 증손이다. 1949년 고려대학교 법정대학 졸업, 도미하여 매크리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고, 1956년부터 1970년까지 고려대학교 강단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경향신문과 중앙일보사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73년 민주공화당에 참여하면서 정치계에 발을 내딛었다. 1979년 주프랑스대사 겸 주모로코대사로 임명되었고, 1983년부터 인천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범용기 제2권] (118) 5ㆍ16 군사반란 1961 - 제5대 대통령

제5대 대통령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 선거를 1963년 10월 15일에 거행했다. 그는 윤보선과 대결했다. 동아일보에서는 그가 여수ㆍ순천 반란사건 때 숱한 ‘동지’들을 죽음의 시장(市場)에 팔아넘긴 배신자란 것을 자세하게 폭로했다. 그의 사상을 믿을 수 없다는 여론이 연탄가스처럼 국민의 분위기를 덮는다.

그는 초조했다. 온갖 부정과 관권, 금권, 지폐남발 등을 통하여 백병전(白兵戰)을 벌였다. 윤보선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표결과는 박정희가 470만 2640표고 윤보선이 454만 661표로서 겨우 15만 표차로 박정희가 이겼다.[1] 윤보선이 “정신적 대통령은 내다” 했다는 것은 반드시 헐뜯는 말이 아니었다고 본다.

그는 언론인이 싫었고 또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언론규제법’을 구상하고 있었다.[2] 그는 ‘일부 몰지각한 언론인, 학생 등이 알지도 못하면서 망동한다’는 뜻의 담화를 발표했다.

나는 “누가 몰지각자냐…” 하는 식으로 반격하는 발언을 어느 신문에 발표했다. 아주 짧은 단장(短章)이었다.

그게 ‘박’의 독재지향성에 대한 나의 선전포고가 되고 말았다. ‘박’의 담화는 언론자유에 대한 장송곡(葬送曲) 서장(序章)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각주]
1. 당시 선거는 15일에 시행되었고, 공식적으로 당선공고는 10월 19일에 발표되었다. 
1위 : 박정희 4,702,640 
2위 : 윤보선 4,546,614 
3위 : 오재영 408,664 
4위 : 변영태 224,443 
5위 : 장이석 198.837 
기권 : 송요찬, 허정
2. 민정 이양 후에 언론과 정부의 갈등이 고조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부정적인 언론관과 관련이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 언론이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부패하고, 심지어는 공산주의 색채를 띠기도 하므로 언론은 자숙해야 하고, 필요한 경우 규제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을 철저히 막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언론규제의 입법을 강행하였고, 이는 언론파동(1964년 7월 18일)이 일어난 배경이 되었다. 언론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4년 8월 2일 제15차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고, 정부는 8월 5일 오전 임시 국무회의에서 「언론윤리위원회법」 공포를 의결해 법률 제1652호로 공포하였다. 이후 언론계와 정부와의 갈등이 지속되다가 당시 동양통신 사장이며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국회 재경위원장인 김성곤의 준재로 언론계와 정부대표가 회합을 갖고, 9월 8일 언론계 대표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사태 수습을 건의하였고, 9월 9일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언론윤리위원회법」의 시행 보류를 발표해 38일간에 걸쳤던 언론파동은 일단 수습이 되었다.

[범용기 제2권] (124) 재건 국민 운동 - 재건 국민 운동

재건 국민 운동 박정희가 아직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였다.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였던지 “재건 국민 운동” [1] 이란 것을 만들었다. 의장은 이관구로 이미 발표됐다. 그러나 부의장 자리와 중앙위원 등은 아직 선정되지 않았었다. 하루는 홍종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