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의 탐구
- 전도서를 읽음 -
「落穗」
1934년 10월 5일[1]
[출처]
- 「신학지남」 16권 5호(1934.11), 30-39
- 『낙수』, 1940년, 13-28.
-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1권, 21~27.
-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1권, 34~44.
[원문 요약]
현대인은 생명의 충실을 갈망하면서도 생명의 공허를 느끼며 분주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현대인의 모습은 삶의 참된 의미를 찾고자 했던 전도서 기자의 심정과 맞닿아 있다. 전도자는 자연과 인생의 끝없는 윤회를 관찰하며, 지혜나 세속적인 향락조차 결국 헛되고 무의미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억압과 불공평이 난무하는 사회상과 더불어 지혜자와 우매자 모두에게 똑같이 임하는 죽음이라는 비도덕적 현실 앞에서 깊은 허무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허무주의에 머물지 않았다. 현실을 긍정하면서도 결국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하는 것만이 인생의 본분이라는 궁극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은 하나님 품에 쉴 때 비로소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생사의 위기에 처한 현대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속죄의 은총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찾아야만 한다.
[원문 소개]
現代人[현대인]처럼 生命[생명]의 充實[충실]을 渴望[갈망]하면서도 生命[생명]의 空虛[공허]를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들은 奔走[분주]하다. 피비린내 나는 「경쟁」[2]을 계속[3]한다. 그러나 저들이 만들어 놓은 커다란 空殼[공각][4]을 채워 놓을 生命[생명]의 샘을 찾지 못하였으며 거기에는 平和[평화]도 없고 喜悅[희열]도 없고, 創造[창조]의 기쁨도 없다. 現代人[현대인]의 內面生活[내면생활]을 가장 銳利[예리]하게 批判[비판]한 名著[명저]라는 「道德序論[도덕서론]」(Walter Lippmann : A Preface to Morals)[5]을 쓴 월터 리프만[6]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들이 暫間[잠간] 걸음을 멈추고, 왜 自己[자기]가 그렇게 奔走[분주]해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奔走[분주]하면 結局[결국] 얻는 것이 무엇인가를 靜思反問[정사반문][7]한다면 「自己[자기]도 알지 못하노라」고 自白[자백]안할 수 없을 것이다. 저들의 大多數[대다수]는 享樂[향락]의 蜘蛛網[지주망]에 걸려서 自己[자기]에게 닥쳐오는 事件[사건]의 意味[의미]와 價値[가치]를 判斷[판단]하기도 前[전]에 벌써 그 事件[사건]을 受理[수리]해 버릴 수밖에 없이 되었다. 저들의 生活[생활]에는 嚴格[엄격]한 道德的[도덕적] 標準[표준]이 그 權威[권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오, 오직 절충된 與論[여론]과 流行[유행]이 있을 뿐이며 저들의 世界[세계]에는 嚴然不可侵[엄연불가침]의 目的[목적]을 가진 主宰者[주재자]가 있어 統治[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肉體的[육체적], 政治的[정치적], 經濟的[경제적] 事變[사변]의 機械的[기계적] 必然[필연]이 있을 뿐이며 저들은 저들 自身[자신]이 萬古[만고]의 大經綸[대경륜] 안에서 그 偉大[위대]한 劇的[극적] 大團圓[대단원]을 爲[위]하여 活動[활동]하는 한 目的意志[목적의지]를 가진 俳優[배우]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現代文明[현대문명]이란 한 宏壯[굉장]한 機械[기계]의 틈바구니에 끼어 도는 한 機械的[기계적] 存在[존재]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8]고 하였다. 그러므로 저들이 萬一[만일] 뜻없이 大路[대로]로 달음박질하던 그 걸음을 멈추고 좀더 깊게 생각한다면 이 일하는 것이 저 일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며 무슨 일하는 것이 아무 일도 안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에 對[대]하여 深刻[심각]한 疑惑[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或[혹]은 虛無[허무]를[9] 云謂[운위]하고 그 生活[생활]은 頹壤[퇴양], 煩悶[번민] 그렇지 않으면 斷片的[단편적], 機械的[기계적]의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옛날 “코헬레트” - 傳道者[전도자] -의 心情[심정] 그대로를 發見[발견]한다.
傳道書[전도서]! 이것은 體系[체계]선 哲理[철리]를 말한 것도 아니며 深奧[심오]한 信仰[신앙]을 말한 것도 아니라 다만 「生[생]의 意義[의의]」를 찾아 實在[실재]의 世界[세계]를 더듬어 빈들에 헤메던 巡禮者[순례자]의 피엉킨 속임없는 紀錄[기록]이라고 봄이 可[가]한 것이다.
그는 于先[우선][10] 自然[자연]과 人生[인생]의 萬般事爲[만반사위][11]에서 그 無意味[무의미]하고 끝없는 輪廻[윤회]를 發見[발견]하였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제 뜨던 곳으로 달음질 치도다.」[12]
하는 歎息[탄식]으로 始作[시작]하여 “바람은 南[남]으로 가고 또 北[북]으로 돌아와 쉬임없이 불어도 結局[결국]에는 제 길을 따라 돌아들 뿐이요 江[강]물은 쉬임없이 바다로 흘러들되 바다는 그 때문에 차본 적이 없으니”(1:5-7) 모든 것은 오직 같은 곳을 헤메일 뿐이요 아무러한 創造的[창조적] 喜悅[희열]도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萬事[만사]는 오직 疲困[피곤]과 倦怠[권태]
말로 못할 疲困[피곤]과 倦怠[권태]!
눈은 보기에 滿足[만족]이 없고
귀는 듣기에 참(充滿[충만])이 없도다”[13]
하였다.
人間[인간]에는 目的[목적]도 없고 進步[진보]도 없고 오직 끝없는 循環[순환]이 있을 뿐이매
“이미 있은 일이 將次[장차] 이룰 일이며
이미 이룬 일이 將次[장차] 이룰 일이라
해 아래 새 것이란 하나 없도다.”[14]
그리고 萬一[만일] 어느 누가 무슨 새것을 發見[발견]했노라고 떠든대야 結局[결국] 알고보면 歷史以前[역사이전]부터 있던 일이오 오직 그 記錄[기록]이 泯滅[민멸]된 것뿐이다(1:10, 11). 世上萬事[세상만사]가 새 것이 없고 또 새 것이 없을 것이니 오직 같은 것의 循環[순환], 循環[순환], 循環[순환]일 뿐이다. 그러면 이 循環[순환]의 意義[의의]는 果如何[과여하]?[15] 오직, 虛無[허무], 虛空[허무]!
“헛되고 헛되어 虛無中[허무중]의 虛無[허무]로다
모든 것이 오직 헛된 것 뿐이로다.”[16]
하는 것이 그의 人生觀[인생관]이다.
그러면 그는 이 人生觀[인생관]이 當然[당연]한 結論[결론]이라 하여 이에 그대로 주저앉은 卑怯[비겁]한 一種[일종]의 虛無主義者[허무주의자]였던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探究[탐구]를[17] 더하고 觀察[관찰]을 더하여 오직 實在[실재]를 찾아 巡禮[순례]의 걸음을 이어나간 勇敢[용감]한 眞理[진리]의 探究者[탐구자][18]였다. 그는 豫言者[예언자]들과 같이 地平線[지평선] 저쪽을 넘겨다보는 宗敎的[종교적] 熱情[열정]을 願[원]하지도 않았으며 이스라엘 民族[민족]의 特別[특별]한 蒙召[몽소][19]를 자랑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經驗[경험]과 觀察[관찰]을 通[통]하여 오직 現實[현실] 그대로의 人生[인생]을 凝視[응시]하려 한 것이었다. 世上[세상]의 卑怯惰弱[비겁타약]한 學徒[학도]들은 眞理[진리]를 探究[탐구]하는[20] 마당에 있어서 좀더 明瞭[명료]한 思索[사색]을 願[원]한다는 것보다도 아예 思索[사색]의 重任[중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까닭에 或[혹]은 在來[재래]의 傳統的[전통적] 獨斷[독단]에 依據[의거]하여 스스로 安逸[안일]을 貪[탐]하여 或[혹]은 獨斷[독단]만을 가지고 思索[사색]의 自由[자유]를 彈壓[탄압]하여 조금이라도 傳統[전통]에서 벗어난 생각이면 모조리 不道德[부도덕] 或[혹] 危險視[위험시]하는 實例[실례]가 不遑枚擧[불황매거]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 敎人[교인]은 이렇듯 正軌[정궤]에서 벗어난 傳道者[전도자]의 「虛無哲學[허무철학]」을 그의 가장 眞摯[진지]한 眞理探究[진리탐구]의[21] 記錄[기록]으로 認[인]하여 正典中[정전중]에 編入[편입]할만한 思想的[사상적] 雅量[아량]을 가진 者[자]들임을 기뻐 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 虛無[허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世界[세계]에서 實在[실재]를 사모하여 荊棘[형극]의 길을 더듬고 있다.
우선 그는 「智慧[지혜]」의 길을 찾아 보았다. 無智[무지]의 山[산]이 眼前[안전]에 가로 막혀서 實在[실재]가 虛無[허무]로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實踐哲學[실천철학]의 門[문]을 더듬어 그때 世代[세대]에서 가장 높은 智識[지식]과 智慧[지혜]의 所有者[소유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얻은 바 智慧[지혜]와 智識[지식]은 正當[정당]한 報酬[보수]를 받지 못하였다. 알면 알수록, 無智[무지]는 그 영역을[22] 넓히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煩惱[번뇌]만 불어갈 뿐이다.
“꾸부러진 것을 펼 道理[도리] 없고
不足[부족]한 것을 補充[보충]할 길 없으니”[23]
사람의 智慧[지혜]와 智識[지식]이란 無意味[무의미]한 手苦[수고]일 것 뿐이다.
“智慧[지혜]가 많으매 煩惱[번뇌]가 많고
智識[지식]이 더하매 苦痛[고통]이 더하니
알게라 이 또한 바람잡이었도다.”[24]
그는 다시 擧世[거세][25]가 如水之趨下[여수지추하][26]로 汲汲[급급]히 追求[추구]하고 있는 所謂[소위] “幸福[행복]” - 享樂[향락], 特[특]히 肉的[육적] 享樂[향락]의 길을 더듬어 보았다. 그는 이미 얻은 智慧[지혜]와 批判力[비판력]을 잃지 않는 限[한]에서 最大限度[최대한도]의 享樂[향락]을 所有[소유]하였다. 그에게는 大闕[대궐]이 있고 葡萄園[포도원], 公園[공원]이 아름다웠으며 婢僕[비복]과 牛羊[우양]이 구름같이 모이고 金銀[금은]이 山積[산적]한데 그 속에는 音樂[음악]이 있고 美女[미녀]가 있어 世俗[세속]의 榮華[영화]가 其極[기극]에 達[달]하였다(2:4-10). 그러나 한번 걸음을 돌이켜 그 걸어온 자취, 그 建設[건설]한 事業[사업]을 點檢[점검]하는 때 모든 것은 一場春夢[일장춘몽]! 거기에 남은 것은 오직 情慾[정욕]의 불길에 타다가 남은 한 무더기 死灰[사회][27]뿐이었다.
“보아라 모든 것은 헛되어[28] 바람잡는 것 같으니
해 아래 有益[유익]한 것 하나 없도다.”[29]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告白[고백]인가? 智識萬能[지식만능], 科學萬能[과학만능]의 妄想[망상] 아래에서 오직 現象[현상]만을 보고 實在[실재]를 볼줄 모르며 오직 斷片[단편], 刹那[찰나]만을 알고 永遠[영원]을 사모할 줄 모르는 사람, 오직 利慾[이욕]과 肉的[육적] 幸福[행복], 享樂[향락]을 追求[추구]하여 피비린내 나는 殺伐[살벌]을 敢行[감행]하는 사람은 이제 이 「傳道者[전도자]」의 고백에[30] 귀를 기우리고 이 傳道書[전도자]의 經驗[경험]을 나누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智慧[지혜]의 世界[세계], 享樂[향락]의 世界[세계]에서 오직 空虛感[공허감]만을 깊게 한 「傳道者[전도자]」는 다시 한번 世上[세상]을 보았다. 世上[세상]은 그래도 如前[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世上[세상]은 그래도 循環[순환]하고 있다. 意味[의미]야 있던 없던 움직이는 그 自體[자체], 循環[순환]하는 그 自體[자체] 存在[존재]하는 그 自體[자체]는 實在[실재]로 볼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서 그는 宿命論的[숙명론적] 宇宙觀[우주관], 人生觀[인생관]으로 기울어졌다. 參羅萬像[삼라만상]은 오직 旣定[기정]의 鐵則[철칙]에 얽메어 그 안에서 그 所定[소정]의 코-스를 運行[운행]하고 있는 것 뿐이다. “나는 때”, “죽는 때”를 어쩔 수 없으며 “심는[31] 때”, “거두는[32] 때”가 또한 變[변]할 바 못된다. 自然界[자연계]가 이 鐵則下[철칙하]에서 運行[운행]됨은 勿論[물론]이어니와 우리 各個人[각개인]의 心理作用[심리작용]까지도 그러하여 “웃는 때”, “우는 때”, “즐기는 때”, “怒[노]하는 때”가 모두 心理的[심리적] 鐵則下[철칙하]에서 되는 한 必然的[필연적] 結果[결과]이며 社會的[사회적] 事實[사실]이 또한 그러하여 “戰爭[전쟁]하는 때”, “平和[평화]하는 때”가 다 定[정]한대로 오는 것뿐이다(3:1-8)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러고보니 現代[현대] 大多數[대다수]의 科學者[과학자], 實驗心理學者[실험심리학자], 唯物論的[유물론적] 歷史觀[역사관]의 主唱者[주창자]들은 結局[결국] 이 “傳道書[전도자]”의 心情[심정]을 附演[부연]한 것 以外[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勿論[물론] 無神論者[무신론자]는 아니었다. 이 모든 鐵則[철칙]의 背後[배후]에는 神[신]의 豫定[예정]이 계심을 是認[시인]하였다. 그러나[33] 그 主宰者[주재자]이신 神[신]은 오직 차디찬 執權者[집권자]이어서 人情[인정]에 끌리며 人類[인류]에게 特別[특별]한 關心[관심]을 가지시는 이는 아니었다.
이렇게 宿命的[숙명적]이오 必然的[필연적]인 宇宙[우주]와 人生[인생]이라 할지라도 萬一[만일] 그것이 道德的[도덕적] 必然[필연]이라면 거기에는 새로운 意味[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우선 人間社會[인간사회]에서 道德[도덕]의 施行[시행]을 찾고져 勞力[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勞力[노력]은 헛된 것이었다.
“나는 해 아래서 되는 온갖 壓迫[압박]을 다시 한번 돌이켜
살폈노라.
나는 눌리운 者[자]의 눈물을 보았노라.
그러나 安慰者[안위자]는 있지 않더라.
저들을 壓迫[압박]하는 者[자]는 더욱 强暴[강포]하더라.
그러나 安慰者[안위자]는 있지 않더라.”[34]
이렇게 壓迫[압박]만 있고 伸冤者[신원자]는 볼 수 없는 데다가 隣人間[린인간]에 嫉妬[질투]가 있고(4:4-6) 君民間[군민간]에 隔離[격리]가 있어(4:13-16) 萬民[만민]의 歡呼裡[환호리]에 王位[왕위]에 오른 賢君[현군]도 孤獨[고독]과 怨望中[원망중]에 餘生[여생]을 마치게 되는 것이 當時[당시]의 社會狀[사회상]이었다.
그러나 萬一[만일] 現在[현재]의 이런 不公平[불공평]이 있다 할지라도 어느 其間後[기간후]에 各其[각기] 그 所行[소행]에 對[대]한 道德的[도덕적] 報應[보응]을 받는다면 問題[문제]는 또한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35] 世上[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惡人[악인]의 報應[보응]받는 義人[의인]도 있고
義人[의인]의 報應[보응]받는 惡人[악인]도 있으니
이 또한 헛되다고 나는 말하노라.”
- 8:14[36]
그리하여 하나님은 義[의]로 統治[통치]하신다고 볼 수 없게 되었다. 世上[세상]에는 道德的[도덕적] 統治[통치]는 있지 않다. 그러나 어느 反面[반면]에는 또한 道德的[도덕적] 報應[보응]이 아주 없다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2:26)[37]. 그러므로 그는 非道德的[비도덕적]이라고 보이는 하나님의 統治[통치]에 對[대]하여 不平[불평]하거나 反逆[반역]하는 態度[태도]는 取[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神意[신의]의 神祕[신비] 不可測[불가측]임에 머리를 숙이고(7:24)[38] “밤낮으로 자지 않고” 探求[탐구]할지라도 그 全貌[전모]는 永遠[영원]히 감추인 神祕[신비]임을 嘆息[탄식]할 뿐이었다[8:16, 17][39].
이렇게 사람은[40] 智慧[지혜]가 미치지 않는 世界[세계]를 必然[필연]이라고 보는 것은 하나님 便[편]에 서서 보는 한 推斷[추단]이다. 萬一[만일] 이것을 사람편에서 본다면 이 必然[필연]은 오직 주책없는[41] 한 偶然[우연]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다시금 해 아래를 살펴보니
競走[경주]가 반드시 빠른 者[자]의 것이 아니며
戰爭[전쟁]이 반드시 힘센 者[자]의 것이 아니더라.
智者[지자]가 반드시 먹을 것 얻는 것도 아니며
哲人[철인]이 반드시 富者[부자]됨도 아니더라.
고기가 벗어못날 그물에 걸림같이
새가 올무에 걸려듬 같이
때와 偶然[우연]이 저들 위에 덮치는 것 뿐이더라.”
- 9:11, 12[42]
그런데 不可解中[불가해중]의 不可解[불가해], 非道德的[비도덕적]인 것 중의 非道德的[비도덕적]인 것은 “죽음”이라는 事實[사실]이었다. 이 “죽음”이란 것은 智慧[지혜]와 無智[무지]를 가리지 않으며 義人[의인]과 惡人[악인]을 分柬[분간]하지[43] 않는다. 智慧[지혜]로운 者[자]는 눈이 밝고 無智[무지]한 者[자]는 어둡다 하자. 그러나
“저들 雙方[쌍방]에 똑같은 事變[사변]이 臨[임]함을 내가 깨달았노라. 그리하여 내 혼자 말이 미련한 者[자]에게 臨[임]하는 그것이 내게도 그대로 臨[임]할 것이니 그러면 내가 왜 더 智慧[지혜]로왔던고>[44] 아아 智慧[지혜]로운 者[자]가 미련한 者[자]와 똑같이 죽으리로다.”
- 2:14, 15[45]
“한가지 事變[사변]이 모든 者[자]에게 똑같이 臨[임]하나니 義人[의인]에게와 不義[불의]한 者[자]에게, 善人[선인]과 惡人[악인]에게, 깨끗한 者[자]에게와 더러운 者[자]에게 犧牲[희생]안드리는 者[자]에게, 어진 이에게 臨[임]하는 그것이 罪人[죄인]에게, 盟誓[맹서]하는 者[자]에게 오는 그것이 盟誓[맹서]않는[46] 者에게 똑같이 臨[임]함이로다.”[47]
이렇게 現世[현세]만을 보는 때 죽음이란 不可解[불가해], 非道德的[비도덕적] 暴君[폭군]이었다. 그러나 萬一[만일] 現世[현세]의 彼岸[피안], 죽음의 저쪽 나라에서 公平[공평]한 報應[보응]을 받는다면 어떨까?[48] 하지마는 이것은 現今[현금]의 “傳道者[전도자]”, 차디찬 現實[현실]만을 보려는 그에게는 손조차[49] 댈[50] 수 없는 題目[제목]이었다.
“짐승에게[51] 臨[임]하는 일이 人生[인생]에게도 臨[임]하다니
臨[임]하는 事變[사변]은 둘다 一般[일반]이로다.
이도 죽고 저도 죽어
한 呼吸[호흡]을 가졌으니
人生[인생]이 짐승보다[52] 나은 것 없으매
둘이 다 똑같이 헛된 것 뿐이로다.
둘이 똑같이 한 곳을 가나니
다 같이 흙에서 나서
다 같이 흙으로 돌아가도다.[53]
누가 알리오 -
人生[인생]의 魂[혼]은 위로[54] 올라가고
짐승의[55] 魂[혼]은 땅으로 내려가는[56] 줄을!”
- 3:9-21[57]
現實主義者[현실주의자]인 그로서는 個人[개인]의 靈魂不滅[영혼불멸]을 云謂[운위]할 수도 없었으며 論[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58]
그는 現實[현실]의 觀察[관찰]을 通[통]하여 “人生[인생]의 意義[의의]”를 發見[발견]하려고 이리 더듬고 저리 더듬었으나 結局[결국] “공허감” 더한 것 뿐이었다. 그는 인생의[59] 미래에[60] 대하여[61] 개인적으로나[62] 國民的[국민적]으로나 何等[하등] 所望[소망]을 가지지 못하였으며 現在[현재]의 生[생] 自體[자체]에 對[대]해서도 아무 樂觀的[낙관적], 熱情的[열정적] 態度[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떤 때에는 “오래 前[전]에 죽은 이가 아직껏 살아있는 이보다 더 幸福[행복]스럽고 아직 誕生[탄생]하지 않은 이가 죽은 이나 산 이보다 훨씬 더 幸福[행복]스럽다고”(4:2, 3)[63] 한 적도 없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아주 生[생]을 否定[부정]하고 死[사]를 讚美[찬미]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현실적[64]이었다. 생의[65] 意義[의의]가 없다면 死[사]에는 더구나 意義[의의]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빛은 참으로 甘美[감미]한 것이어서 눈으로 太陽[태양]을 보는 것은 愉快[유쾌]한 일이로다”(11:4)[66] 하는 生[생]의 快樂[쾌락]을 말하였으며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67] 낫다”(9:4)[68]고도 斷言[단언]한 것이다.
意味[의미]야 있던 없던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나으니 아마도 살자 하고서야 미련하게 어렵게 살 것은 무어냐? 될 수 있는대로 智慧[지혜]롭게 愉快[유쾌]하게, 죽음 오는 때까지 걱정놓고 살아볼 것이 아닌가? 이런 견지에서[69] 그는 이에 유익한[70] 실제적[71] 교훈과[72] 지혜를[73] 많이 기술[74]하였다(5~7, 11장). 그의 記述[기술]한 智惠[지혜]와 敎訓[교훈]은 現實生活[현실생활]을 좀더 滋味[자미]스럽게 하기 爲[위]한 한 方便[방편]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오, 永遠[영원]한 眞理[진리]와 不變[불변]의 道德的[도덕적] 權威[권위]에 根據[근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極[극]히 淺薄[천박]한 것이 많으며 또 機會主義的[기회주의적]인 것도 많다. 例[예]한다면
“그러므로 너무 義[의]롭지[75] 말고
너무 智慧[지혜]롭지도 말라.
(그 때문에) 因苦[인고] 當[당]할건 무어냐?
너무 惡[악]하지도 말고
너무 미련하지도 말라.
네 때가 이르기 前[전]에 죽을 건 무어냐?”[76]
한 것 같은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야 별것[77] 없으니 “現在[현재]를 享樂[향락]하라”, “네 몫에 태인 이 짧은 一生中[일생중] 먹고 마시고 하나님의 作定[작정]해 주신 快樂[쾌락]을 누릴 수 있는 데까지 누리라”고 再三[재삼] 高潮[고조]하였다(2:24~26, 3:13, 22, 5:18, 8:15, 11:8~10).[78] 그리고 이를 成就[성취]키 爲[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智慧[지혜]를 求[구]하라. 宇宙[우주]와 人生[인생]의 窮極的[궁극적][79] 實在[실재]나 絶對[절대]의 眞理[진리]를 探求[탐구]하기 爲[위]한 智慧[지혜]가 아니라 現實生活[현실생활]을 좀더 滋味[자미]롭게 할 實際的[실제적] 智慧[지혜]를 求[구]하라고 付托[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現實的[현실적]인 그에게도 信仰的[신앙적] 一面[일면]이 發露[발로]됨을 볼 수 있으니 아마도 現實生活[현실생활]만을 充實[충실]케하며 즐겁게 함에도 創造主[창조주]인 하나님을 除外[제외]하고서는 成就[성취]할 길 없음을 깨달은 까닭인가 한다. — “네 나이 젊었을 때에 네 創造主[창조주]를 記憶[기억]하라” 한 一句[일구]는 思想的[사상적] 連結[연결]으로 보든지 文脈上[문맥상]으로 보든지 심히[80] 不自然[부자연]하여 後人[후인]의 삽입한 것으로 認[인]하는 學者[학자]가 많으나 思想的[사상적] 連結[연결]의 不足[부족]한 것은 全體[전체]를 通[통]하여 한 두 곳 뿐이 아니니 이 句節[구절]만을 꼬집어 말하는 것은 불온당하다. 차라리 作者[작자] 自身[자신]의 思想的[사상적] 추이로[81] 看做[간주]함이 可[가]할 것이다. 그리고 現實生活[현실생활]의 喜樂[희락] 中[중]에서 結局[결국] 宗敎的[종교적] 喜悅[희열], 創造主[창조주]를 記憶[기억]하는 喜悅[희열]이 모든 喜悅[희열]보다도 더욱 뛰어남을 認定[인정]안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그는 그의 巡禮記[순례기]를 끝막으려 할 때
“젊었을 때에 네 創造主[창조주]를 記憶[기억]하라.
不運[불운]의 날이 臨[임]하기 前[전]에
그리고 “내게는 藥[약]이[82] 없노라”고
말할 歲月[세월]이 이르기 前[전]에
해가 어두어지고
달과 별에서 빛이 떠나며
비온 後[후] 구름이 거두기 前[전]에.
집 지키는 者[자] 떨고
힘쓰는 者[자] 굽혀지는 때
맷돌가는 비자가[83] 적고 한가하며
유리窓[창]으로[84] 내다보는 婦人[부인]이 빛을 잃을 때
통한 거리에 門[문]이 닫히고
맷돌 소리가 낮아지는 때
지꺼리는 새소리 弱[약]하여지고
노래의 딸들이 鈍[둔]해 지는때
높은 곳을 두려워하고
한길 걷기도 무서워하는 때
銀[은]줄이 끈어지고
金[금]잔이 깨어지기 前[전]에
샘물가에서 물甁[병]이 부서지고[85]
바퀴가[86] 우물 위에서[87] 상하기 前[전]에”
-7:1~7
이렇게 刻一刻[각일각] 닥쳐오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를 凝視[응시]한 傳道者[전도자]는 모든 理論[이론], 모든 智慧[지혜]를 다 내어놓고 오직 네 創造主[창조주]를 記憶[기억]하라는 한마디 말밖에 付托[부탁]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니 하나님을 떠나 人生[인생]은 있지 못한다. “結論[결론]으로 통틀어 말하노니 하나님을 敬畏[경외]하고 그 命令[명령]을 지키라 이것은 모든 사람의 本分[본분]이니라. 대개 하나님께서 모든 行爲[행위]와 그 모든 隱密[은밀]한 일에 對[대]하여 善惡[선악] 間[간]에 審判[심판]하시리라”(12:13, 14)[87] 하고 그는 結局[결국] 하나님께로 더듬어 들었다. 길 잃었던 羊[양], 집 떠난 蕩子[탕자] 돌아오는 발걸음을 우리는 여기서 찾아보고 눈물로 맞아 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 하나님 안에 쉴때[89] 까지는 우리에게 安心[안심]이 없을 것이다. 때는 지금 生[생]이냐? 死[사]냐? 하는 危機[위기]에 處[처]해 있다. 現代人[현대인]은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十字架[십자가] 아래 모여 贖罪[속죄]의 恩寵[은총]을 通[통]하여 새로운 自我[자아]를 받아야 할 것이다.[90]
[핵심 키워드]
- 생명의 공허: 현대인들이 겉으로는 분주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내면적으로 겪는 상실감과 허탈감을 의미한다.
- 기계적 존재: 현대 문명이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목적의식 없이 수동적으로 돌아가는 인간 군상을 뜻한다.
- 코헬레트(전도자): 생의 의의를 찾아 실재의 세계를 헤매며 솔직한 탐구의 기록을 남긴 순례자를 지칭한다.
- 끝없는 윤회: 자연과 만사에서 발견되는, 아무런 목적이나 진보 없이 동일한 일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현상이다.
- 허무주의: 인생의 맹목적인 순환 속에서 참된 의미나 창조적 희열을 찾지 못할 때 빠지게 되는 사상적 결론이다.
- 진리의 탐구자: 전통적 독단이나 비겁한 안일함에 빠지지 않고, 실재를 찾아 용감하게 사색을 이어나가는 자이다.
- 무지의 산: 인간의 유한한 지혜와 지식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인식의 한계와 깊은 번뇌를 상징한다.
- 일장춘몽: 권력과 부, 육체적 향락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다 타버린 재(死灰)와 같은 덧없는 것임을 비유한 말이다.
- 숙명론적 우주관: 삼라만상은 물론 인간의 심리와 사회적 사실까지도 기정의 철칙에 얽매여 궤도를 운행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 비도덕적 통치: 현세에서는 선악에 대한 공평한 보응이 이루어지지 않아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마저 의심하게 되는 현실을 뜻한다.
- 신의 신비: 인간이 밤낮으로 탐구할지라도 그 전모를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불가측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 비도덕적 폭군: 지혜자와 우매자, 의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하게 덮쳐오는 죽음을 비유한 표현이다.
- 현실주의자: 삶의 허무 속에서도 생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살아있는 현재의 빛과 유쾌함을 긍정하려 한 태도이다.
- 기회주의적 지혜: 절대적 진리나 영원한 도덕률이 아닌, 짧은 일생을 다소 무난하게 살아가기 위해 추구하는 세속적 방편이다.
- 영혼불멸: 차디찬 현실주의의 한계를 넘어 인간과 짐승의 죽음 너머에 있는 영혼의 행방을 묻는 종교적 한계 상황이다.
- 죽음의 검은 그림자: 늙음과 죽음이 각일각 다가오며 인간의 육체적 능력과 감각이 쇠퇴해가는 엄연한 현실을 묘사한다.
- 창조주를 기억하라: 모든 사색과 쾌락의 끝에서 허무와 죽음을 직시한 전도자가 내린 삶의 궁극적인 해답이다.
- 인생의 본분: 세상 만사를 판단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목적이다.
- 탕자의 귀향: 방황하며 진리를 찾던 전도자가 결국 창조주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영적 회심의 발걸음을 비유한다.
- 속죄의 은총: 생사의 위기에 처한 현대인이 십자가 아래서 참된 평안을 얻고 새로운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핵심 문장]
- “現代人[현대인]처럼 生命[생명]의 充實[충실]을 渴望[갈망]하면서도 生命[생명]의 空虛[공허]를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의미: 물질문명은 고도로 발달했으나 참된 평화와 창조의 기쁨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역설적인 내면을 정확히 꿰뚫어 본 문장이다.
- “저들의 生活[생활]에는 嚴格[엄격]한 道德的[도덕적] 標準[표준]이 그 權威[권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오, 오직 절충된 與論[여론]과 流行[유행]이 있을 뿐이며”의미: 진정한 도덕적 권위나 진리가 상실된 채, 대중의 타협적인 여론과 유행만이 삶을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한계를 비판한 것이다.
- “傳道書[전도서]! 이것은 體系[체계]선 哲理[철리]를 말한 것도 아니며 深奧[심오]한 信仰[신앙]을 말한 것도 아니라 다만 「生[생]의 意義[의의]」를 찾아 實在[실재]의 世界[세계]를 더듬어 빈들에 헤메던 巡禮者[순례자]의 피엉킨 속임없는 紀錄[기록]이라고 봄이 可[가]한 것이다.”의미 : 저자가 성경의 '전도서'를 어떤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핵심 대목이며, 전도서를 거창한 종교적 정답이 담긴 책으로 볼 것이 아니라, 삶의 허무라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 뼈저리게 아파하며 방황했던 한 인간의 진실한 탐구 기록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미 있은 일이 將次[장차] 이룰 일이며 이미 이룬 일이 將次[장차] 이룰 일이라 해 아래 새 것이란 하나 없도다.”의미: 역사의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인간의 유한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는 새롭지 않다는 깊은 허무감을 보여준다.
- “헛되고 헛되어 虛無中[허무중]의 虛無[허무]로다 모든 것이 오직 헛된 것 뿐이로다.”의미: 생의 맹목적인 순환과 끝없는 윤회를 치열하게 성찰한 끝에 도달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절망감을 압축하여 고백한 것이다.
- “그러면 그는 이 人生觀[인생관]이 當然[당연]한 結論[결론]이라 하여 이에 그대로 주저앉은 卑怯[비겁]한 一種[일종]의 虛無主義者[허무주의자]였던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探究[탐구]를 더하고 觀察[관찰]을 더하여 오직 實在[실재]를 찾아 巡禮[순례]의 걸음을 이어나간 勇敢[용감]한 眞理[진리]의 探究者[탐구자]였다.”의미 : 전도서의 저자(전도자)가 깊은 절망을 노래했지만 결코 단순한 비관론자나 허무주의자가 아님을 강조하고 평가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이 문장을 통해, 전도서에 담긴 '허무'라는 고백이 삶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를 찾기 위한 가장 치열하고 진지한 탐구의 과정임을 보여주고 있다.
- “智慧[지혜]가 많으매 煩惱[번뇌]가 많고 智識[지식]이 더하매 苦痛[고통]이 더하니 알게라 이 또한 바람잡이었도다.”의미: 유한한 인간의 이성과 지식은 궁극적 진리에 닿지 못한 채 도리어 자신의 한계만을 자각하게 하여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뼈아픈 통찰이다.
- “한번 걸음을 돌이켜 그 걸어온 자취, 그 建設[건설]한 事業[사업]을 點檢[점검]하는 때 모든 것은 一場春夢[일장춘몽]! 거기에 남은 것은 오직 情慾[정욕]의 불길에 타다가 남은 한 무더기 死灰[사회]뿐이었다.”의미: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 향락을 누려보아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한 줌의 재로 허망하게 바스러지고 마는 삶의 덧없음을 일깨워준다.
- “智識萬能[지식만능], 科學萬能[과학만능]의 妄想[망상] 아래에서 오직 現象[현상]만을 보고 實在[실재]를 볼줄 모르며 오직 斷片[단편]. 刹那[찰나]만을 알고 永遠[영원]을 사모할 줄 모르는 사람...”의미: 영원하고 거룩한 가치를 외면한 채, 눈앞의 단편적인 현상과 유물론적 쾌락에만 집착하는 타락한 세태를 향한 준엄한 경고이다.
- “나는 눌리운 者[자]의 눈물을 보았노라. 그러나 安慰者[안위자]는 있지 않더라.”의미: 강자의 억압 속에서 눈물 흘리는 약자들을 위로하거나 구원해 줄 자가 없는 부조리하고 냉혹한 현실 사회의 비극을 탄식한 문장이다.
- “惡人[악인]의 報應[보응]받는 義人[의인]도 있고 義人[의인]의 報應[보응]받는 惡人[악인]도 있으니 이 또한 헛되다고 나는 말하노라.”의미: 현세에서는 선악에 대한 인과응보가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마저 회의하게 만드는 모순된 세계의 단면을 지적한다.
- “競走[경주]가 반드시 빠른 者[자]의 것이 아니며 戰爭[전쟁]이 반드시 힘센 者[자]의 것이 아니더라.”의미: 인간의 재능이나 맹렬한 노력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지 않으며, 인생은 알 수 없는 섭리와 우연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 “아아 智慧[지혜]로운 者[자]가 미련한 者[자]와 똑같이 죽으리로다.”의미: 아무리 위대한 지혜를 쌓은 자라도 결국 미련한 자와 동일하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생명의 근원적 평등함과 비극성을 토로한다.
- “人生[인생]이 짐승보다 나은 것 없으매 둘이 다 똑같이 헛된 것 뿐이로다.”의미: 모두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생물학적 숙명 앞에서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 역시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극단적인 허무의 표현이다.
- “누가 알리오 - 人生[인생]의 魂[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魂[혼]은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의미: 눈에 보이는 차디찬 현실만을 관찰하는 입장에서는 사후 영혼의 행방을 감히 확신할 수 없는 무지와 영적 불안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다.
- “빛은 참으로 甘美[감미]한 것이어서 눈으로 太陽[태양]을 보는 것은 愉快[유쾌]한 일이로다”의미: 비록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헛된 삶일지라도, 살아 숨 쉬며 빛을 보는 현재의 삶 그 자체를 긍정하고 누리려는 끈질긴 생에 대한 애착을 나타낸다.
- “宇宙[우주]와 人生[인생]의 窮極的[궁극적] 實在[실재]나 絶對[절대]의 眞理[진리]를 探求[탐구]하기 爲[위]한 智慧[지혜]가 아니라 現實生活[현실생활]을 좀더 滋味[자미]롭게 할 實際的[실제적] 智慧[지혜]를 求[구]하라고 付托[부탁]한 것이다.”의미 : 거창하고 추상적인 진리를 좇기보다는, 당장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과 현실을 더 풍요롭고 즐겁게 만들어줄 실용적인 지혜를 찾으라는 뜻이다.
- “젊었을 때에 네 創造主[창조주]를 記憶[기억]하라. 不運[불운]의 날이 臨[임]하기 前[전]에”의미: 생의 기쁨과 활력이 아직 넘칠 때, 육신의 쇠락과 죽음의 어둠이 덮치기 전에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교제해야 한다는 준엄한 요청이다.
- “이렇게 刻一刻[각일각] 닥쳐오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를 凝視[응시]한 傳道者[전도자]는 모든 理論[이론], 모든 智慧[지혜]를 다 내어놓고 오직 네 創造主[창조주]를 記憶[기억]하라는 한마디 말밖에 付托[부탁]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의미: 세상의 온갖 복잡한 사색과 지혜를 모두 거친 끝에 남는 단 하나의 궁극적인 진리는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임을 천명한 것이다.
- “하나님을 敬畏[경외]하고 그 命令[명령]을 지키라 이것은 모든 사람의 本分[본분]이니라.”의미: 지식, 쾌락, 철학적 허무 등 모든 길을 섭렵하고 돌아온 탐구자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 이유와 의무를 확고하게 선언한 것이다.
- “길 잃었던 羊[양], 집 떠난 蕩子[탕자] 돌아오는 발걸음을 우리는 여기서 찾아보고 눈물로 맞아 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의미: 길고 험난한 사상적 방황 끝에 결국 창조주의 품으로 항복하며 돌아온 전도자의 감동적인 회심과 영적 귀향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 “하나님 안에 쉴때 까지는 우리에게 安心[안심]이 없을 것이다.”의미: 유한한 인간의 영혼은 그 창조적 근원인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하기 전까지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적 갈증과 불안을 겪는다는 깊은 통찰이다.
- “現代人[현대인]은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十字架[십자가] 아래 모여 贖罪[속죄]의 恩寵[은총]을 通[통]하여 새로운 自我[자아]를 받아야 할 것이다.”의미: 생명의 공허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참된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거듭나야 한다는 숭고한 기독교적 구원의 메시지를 제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