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보상
마가복음 10장 28-31절 / 1991년 2월 24일 / 낙산교회
김상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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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문]
지난 두 주일에 걸쳐 나는 우리 낙산교회가 하나의 사교적 집단이나 좀 편안한 예배의 장으로 머물거나 지식을 나누고, 그야말로 다 아는 이야기를 다시 푸는 지식인의 모임으로 머물 가능성에 대하여 우려했다. 지식인의 병폐라 할 수 있는 행동력의 부족, 원리도 있고 방향도 있으나 구체적 참여가 없는, 아무 누구도 당신이 우리의 이웃이라 하는 사람이 없는 집단으로 머물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원론을 말하는 자리이기보다 각론을 말하고, 깔끔한 경건보다 손에 흙을 묻히고 피를 묻히는 진실된 경건을 향하여 나아가자는 말씀을 드렸다.
한 부자 청년이,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어떤 율법학자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예수에게 물었다. 계명 중에서 인간 관계와 관련된 계명을 그런대로 지켜 온 청년이었다. 그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예수는 그에 더하여 “네가 가진 것을 무엇이나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다. 그런데 그 청년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슬픈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나갔다. 제자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언제나 그랬듯이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변하여 이렇게 말한다.
“보십시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왔습니다.”
이 말씀을 새겨 보자.
첫째, 여기 “저희는 … 주님을 따라왔습니다.”라는 말은 예수의 운동, 이념의 실현이 자신들의 목표임을 고백한다.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다. 바로 다음에 기록된 말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와 내 복음을 위하여 …버린 사람은”이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연결해 본다면 그저 예수를 따라다니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모든 것을 버리게 되는 그런 버림이 아니다. “나와 내 복음을 위해서”다. 그것은 예수의 운동, 예수의 이념의 구현, 예수의 가르치심을 실현하기 위해서 장애가 되는 것을 버리기도 하고, 또 그 실현을 위해서 쓰기도 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신앙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미 건조해질 대로 건조해진 신앙 속에는 이런 고백이 있을 수 없다. 이미 타성에 젖어 자동화된 신앙생활 속에는 이런 고백이 있을 수 없다. 건조해졌다는 말은 박제된 신앙이라는 뜻이며, 자동화되었다는 것은 주일 아침이면 교회로 가고 끝나면 다시 집으로 순환하는 생활을 말한다. 공동체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 “주님을 위하여”라는 목적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박제된 신앙, 자동화된 신앙생활을 털고 살아 있는 목적이 우리에게 있게 되기를 바란다.
둘째, “저희는 … 주님을 따라왔습니다.”라는 고백 속에는 하나의 자랑, 긍지가 있다. 더구나 슬픈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나간 저 부자 청년과 비교할 때 자기들의 결단과 따름이 얼마나 돋보이는가 하는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심리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것을 나무랄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베드로나 제자들과 같은 자부심이 없다. 겸손하여 없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버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주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는 당당한 말은 고만두더라도 무엇 하나 버린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문제다. “예수와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우리는 장애가 되는 무엇을 버렸는가? 또 적극적으로 무엇을 쓰고 있는가? 경건한 신앙, 깊이가 있는 신앙의 행위가 있고 그에 대한 자부와 긍지가 있기를 바란다.
셋째,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왔습니다.”라는 말속에는 보상을 구하는 심리가 담겨 있다. 그것은 예수의 다음 말로 극명해진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와 내 복음을 위하여 …를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백 배나 받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의 심중에 있는 보상 심리를 예수께서 간파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근본에 보상 개념은 중요한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유치한 계산속이라고 백안시한다. 또 자본주의적인 사고라고 사시적으로 본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욥기)이나 신약성서의 예수의 로기온(말씀)에는 보상 개념이 분명히 있다. 예수께서 본래 중요 개념이 아닌 보상을 자주 말씀하신 것은 우리를 잘 아시기 때문이 아닐까? 보상이 있다 해도 안 하는데 보상이 없다 하는데 하는 위인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 점을 우리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어린아이같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상 같은 것은 필요없다는 깊은 신앙으로 살아가면 좋은 일이다. 그런데 보상은 필요없다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보상을 기대하고 행동하는 것보다 더 못하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버리면 이 세상에서 백 배나 받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행동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 교회에 자주 오게 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오늘 듣기 싫은 말씀을 더 말씀드리고 도망가려 한다. 낙산교회에서 받는 인상 세 가지를 이야기하겠다.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예배에 생기가 없다는 인상이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그렇다고 무슨 긴장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담을 높이 쌓은 성곽들이 여기 집합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아니 받을 수 없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반응이 없다. ‘아멘!’, 할렐루야’는 결코 못할 짓이다. 그것이 갖는 허위성도 우리는 잘 안다.
대개 강의를 하시는 교수들이 많은데 조용하지만 강의가 쏙쏙 빨려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열심히 강의하지만 도무지 허공을 맴도는 것을 느끼게 되는 그런 경우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눈을 감았다든가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외형은 문제가 아니다. 눈을 감아도 대화하는 격동이 있을 수 있고, 눈을 뜨고 있으나 만나지지 않는 단절이 있다. 낙산교회 예배에서는 “아 참, 참으로 미동도 하지 않는구나!” 이런 탄식이 일어난다.
왜? 우리에게 달려갈 공동의 목표가 없는 것 아닌가? 그저 앉아 있어도 달성될 목표가 아니라 달리고 또 달려서야 이루어내게 되는 공동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 개인의 생활도 그렇거 니와 교회 공동체도 그렇다. 그럴 때 개인도 교회도 활기가 넘치게 된다. 마음을 열고 감격하기도 하고 뜨겁게 응답하기도 하는 젊은 활기가 넘치게 되기를 바란다. “슬픈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일마다 감격스런 표정으로 기뻐하며 떠나가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봉직했던 교회는 대체로 부자 지식인들이 모인 교회였다. 그런데 예산을 세우기를 전년비 8%를 인상하기로 정하고 주정 헌금을 작정시켜 보면 어쩌면 그렇게 딱 맞추는지 전년비 8%, 혹은 9%가 높아진다. 예산은 8%인데 작정하고 보니 20%가 넘었다든지 95%가 높여졌다는 기적은 생각할 수가 없다. 닳고 닳은 것이다. 또 교회의 중진이고 부자인데도 연말까지 작정한 헌금을 외상으로 미루는 사람도 있다. 결산이 예산을 넘어가면 돈이 남으니까 안 내고 만다. 남는데 무엇 때문에 내느냐는 것이다. 말하자면 “올해도 무사히 무임승차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다. 지식인들의 계산속이다. 혹 낙산교회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된다. 무임승차자는 없을 것이지만 우리도 타격은 없고 기적은 없는 것 아닌가? 이것이 두 번째 인상이다.
요 며칠 전 어느 주간 잡지에 대형 교회의 예산과 씀씀이에 대한 기사가 길게 실린 것을 보았다. 대표적인 대형 교회의 이름을 들어 연간 예산이 얼마인가를 밝혀 놓았다. 몇 십부터 몇 백억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거의 모든 교회가 말하자면 사실대로 예산을 문서화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 많기도 하고, 그러기에 공개되면 구설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는 한 달 선교비로 목사에게 2억원을 주고 있다고도 적어 놓았다. 기사의 초점은 많이 내는 교회치고 그것이 결국 거의 교회 내부에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러한 기사를 들추어 볼 필요도 없이 오늘날 교회들의 대형화와 개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화에 대하여 호된 비판적 입장을 이미 견지하고 있다. 그 부당함을 여기서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마도 거창한 교회당을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담임 목사를 두려 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유지비, 목회자 생활비 등에 예산의 절대 비율을 배정하지 않는 것은 타당하다.
취지는 그런 재정을 아껴 바르게 써 보자는 것일 것이다. 좋다. 그렇게 하자. 여기에 실적이 있어야 한다. 부담 없이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어서 좋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운동, 그의 이념의 구현, 그의 가르침의 실현을 위하여 “보십시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는 자부심, 긍지, 자랑이 있어야 한다. 더 많이 적극적으로 버리라. 부자 청년은 슬픈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나가지만 우리는 이렇게 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긍지, 자랑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
세 번째 인상은 우리의 신앙이 모두 성숙한 것 같아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보상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유치하다. 이런 분위기가 차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좋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것이 보상의 원리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진실된 경건에 보상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을 유치하다고 거부하지 말자.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어린아이처럼 그 기대를 솔직하게 갖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와 내 복음을 위하여 …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 … 백 배나 받고 …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누가 백 배나 받게 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경건에 보상이 있다고 가르치신 예수보다 우리의 신앙이 더 높다고 가장하지 말자. 받아들여 순진한 신앙생활을 해 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