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1:1-3, 30:9-11] 하나님과 군마, 희망은 무엇인가? - 1994년 6월 12일, 김상근 목사

9월 14, 2026

하나님과 군마, 희망은 무엇인가?

이사야 31장 1-3절, 30장 9-11절 / 향린교회


[회상 노트]

기장이 ‘새 역사’를 시작한 날을 기념하는 총회 선교주일에 다시 향린교회 예배 설교를 맡았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는 처음 대북 포용정책을 썼다. 비전향 출소 장기수인 이인모 옹을 북으로 송환했다. 나는 민간이 만든 송환추진위원장이었다. 내가 6ㆍ25 피해 가족이라는 것이 위원장을 맡기는 이유였던 것 같다. 나는 김국홍, 함세환 노인 송환운동도 했다. 그들을 북으로 보내자는 것은 인도주의다.

이리 가던 남북 관계가 갑자기 곤두박질을 친다. “불바다” 운운하는 북에, “초전박살”, “북진통일” 등의 구호로 맞받아친다. 미국은 속도 빠르게 전쟁 시나리오를 내지른다.

기장이 이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고 확신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은 우리 총회가 총회 선교주일로 지키는 주일이다. 한국 교회, 특히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무엇이어야 하며 기장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하는 주일이다. 그리고 우리의 교단인 기장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이 시대의 바른 교회이기 위하여 함께 결단하는 주일이다.

우리 기장도,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갖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과제를 함께 갖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맡겨진 시대적인 사명이 따로 있다. 물론 그것이 꼭 우리에게만 맡겨진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독선이다. 그렇게 깨닫고 거기에 서는 모든 교회의 사명이다. 그런 교회가 있다면 교파를 따질 것이 없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특수한 사명이 있다. 하지만 이 시대에 교회가 함께 가지는 사명은 ‘민주화’요 ‘통일’이라는 민족적인 과제라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이 성스런 과제에 매진하려는 이때, 우리의 현실은 반민주, 반평화통일로 급하게 떨어지고 있다. 전쟁 도발의 위험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기장 교회가 어떤 고백을 가지고,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던 기원전 700년경이다. 강대한 나라 앗시리아가 침공해 오자 이스라엘은 얼른 이집트에게 원병을 청한다. 그 길밖에 이 전쟁의 위기를 모면할 길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옳은 판단이라 할 수 있다. 힘을 힘으로만 막을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것을 비판한다. 비판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군사력만을 믿고 있을 뿐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않고 하나님께 구원을 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예언은 성서 여기저기에 있다. 예언자 호세아도 이렇게 예언한다.

“너희는 밭을 갈아서 죄악의 씨를 뿌리고 반역을 거두어서 거짓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는 네가 병거와 많은 수의 군인을 믿고 마음을 놓은 탓이다”(호 10:13).

예언자는 한발 더 나아가 바로 그 결과 이스라엘이 재앙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그것을 ‘악’이라고 규탄한다.

여기서 우리는 논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외침의 위기에서 다른 외군의 도움을 구해서라도 힘으로 맞서는 것이 현실적인 것이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현실적인 것이냐?’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구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비판이 가능하게 된다. ‘외군을 불러들인다는 것을 옳지 않다 할지 모르지만, 그냥 망해 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아니, ‘정치, 군사적인 문제를 신앙이라는 극히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도대체 잘못된 것’이라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은, 반드시 국가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일도 그렇다고 성서는 쓰고 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우리 조상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 보시고,
주께서는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주께 부르짖었으므로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믿었으므로 그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시 22:3-5).

우리는 이것을 흔쾌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리의 지성에 맞지 않고 우리의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 없다. 곤경을 당하면 그것을 헤쳐 나갈 방도를 찾아야지, 신앙적 차원으로 가는 것은 비약이요 그야말로 아편적인 효과를 가져올 뿐이라 생각하는 것이 차라리 정상일 수 있다.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면 그 사업을 일으킬 방도를 찾아야지 무슨 40일 기도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그것을 정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학교 성적이 떨어졌으면 공부하는 것이지 10일 금식 기도한다면 정상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극히 현실적인 삶의 사건을 이른바 신앙의 차원으로 넘겨 어물어물 현실과 직면하지 않으려는 소위 종교적 태도를 우리는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군사력을 의지하는 것이 왜 악인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사야 예언의 핵심은 이집트가 하나님일 수 없다는 것이다. 군마에는 영이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집트 사람은 사람일 뿐이요, 하나님이 아니며, 그들의 군마 또한 고깃덩이일 뿐이요, 영이 아니다.”

강대한 나라 이집트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이 더 큰 무력을 가졌다는 뜻인가? 무력을 덜 가진 이집트를 믿느니 더 큰 힘을 가진 하나님을 믿자고 하는 것인가? 힘의 문제가 아니다. 영의 문제다. 거기에는 ‘영’이 없다는 것이다. ‘영’(mah)이란 ‘정신’, ‘얼’이다. 이집트에, 그 군마에 정신도, 영혼도, 영도, 혼도 없다. 그런데도 그것을 믿는 것은 불신앙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이집트도 치시고 두 나라는 모두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 군사적 문제이기에 앞서 신앙의 문제다.

그러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에게 구원을 청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30장 941절은 이집트에게 구원을 청해도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를 이렇게 선언한다.

“이 백성은 반역하는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손으로서,
주의 율법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자손이다.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환상을 보지 말아라.’ 하며,
예언자들에게 이르기를 ‘옳은 것을 보지 말아라. 부드러운 말을 하여라.
거짓된 것을 보여라. 정도를 버려라. 바른 길에서 벗어나거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이야기를 우리 앞에서 그쳐라.’”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는 것, 하나님에게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주의 율법을 준행하고, 선견자들에게 환상을 보게 하며 예언자들에게 정의를 말하게 하고 강한 원칙을 주장할 수 있게 하며 거짓을 거부하게 하고 정도를 가게 하며 바른 길을 걷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에 ‘영’이 있게 함이요 정신, 혼, 얼이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에 서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의 위기는 무엇인가? 강한 군대가 없는 것인가? 아니다. 강대한 나라의 도움이 없는 것인가? 아니다. 그들에게 이집트가 있었다. 이집트의 군사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위기가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화급하게 이루어 가야 할 것은 민족의 정신, 혼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위기는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군사력, 오직 군사력의 문제라 판단한 것이다. 군사력의 뒷받침이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 이스라엘은 재앙을 맞는다. 이집트도 망한다. 이스라엘의 희망은 하나님인가, 군사력인가? 하나님인가, 이집트인가? 하나님인가, 국력인가?

오늘 우리 민족이 처한 형편을 생각해 보자. 늦었지만 분단 50년 만에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모든 민족이 염원하게 되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통일을, 평화적인 통일을 주장하면 그는 감옥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적 통일이 우리 모두의 염원이 되었다. 나아가 곧 실제로 통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남의 정부는 결코 흡수 통일을 아니 하겠다 했고, 북의 정부는 일방이 이기고 타방이 지는 통일은 아니 하겠다 했다. 그러던 한반도가 갑자기 전쟁 주장에 휩싸이게 되었다. ‘불바다’ 발언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북진 통일’, ‘초전 박살’이 다시 등장한다. 미국은 다른 민족을 상대로 50일 전쟁이니 90일 전쟁이니 평양 공격이니 하는 시나리오를 공개하고 있다.

남의 대통령은, 북의 전통적인 우방인 러시아로 날아가 전쟁이 나더라도 북을 돕지 말라 한다. 외무부 장관은 중국으로 달려간다. 전쟁이라도 해서 이번 기회에 통일을 해버리겠다는 심산이다. 전쟁을 하기만 하면 이기는 것은 명확하다고 호언한다. 이유는 경제력이 월등하고 무엇보다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물론이고 엄청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도 이에 지지 않는다. 끝까지 핵 사찰을 강제하고 제재를 한다면 남은 물론 미국에까지 불행이 몰아치게 될 것이라 위협한다.

갑자기 우리 민족은 6ㆍ25 이후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도대체 남과 북의 철학이 무엇인가? 그것은 ‘힘의 철학’이다. 정복의 철학이다. 고깃덩이에 불과한 무기를 믿는다. 하나님 아닌 강대국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 미국은 우리를 도울 것이다. 6ㆍ25 때처럼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를 도운 것은 결과였을 뿐, 실은 미국 자기들을 여기 한반도에서 지켰던 것 아닌가? 미국은 남을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세계 지배 전략의 하나로 그렇게 할뿐이다.

지금은 이데올로기 냉전 시대가 아니다. 경제 전쟁 시대다. 이데올로기 냉전에서 경제 전쟁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다. 이 과도기에 우리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남과 북이 가야 할 길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또다시 전쟁터가 되자는 것인가! 또다시 동족상잔의 비극의 길을 가자는 것인가! 또다시 우리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40년 쌓아올린 남북을 초토화해 버리자는 것인가! 또다시 미국에 기대어 북을 이기고 민족은 미국에 종속시킬 것인가! 우리의 희망은 무엇인가? 하나님인가, 군사력인가? 하나님인가, 미국인가? 하나님인가, 국력인가?

지금 우리 민족의 문제는 군사력의 문제가 아니다. ‘영’의 문제다. 민족에게 영이 있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게 될 것인가? 길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을 바라는 데 있다. 그에게 구하는 데 있다. 우리 민족의 위기는 무기가 없는 데 있지 않다. 남북의 무력을 합한다면 놀랍게도 세계의 군사 강대국 대열에 넉넉하게 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위기는 달려갈 이집트가 없다는 데 있지 않다. 미국이 있다. 중국이 있다. 러시아가 있다. 유엔이 있다. IAEA가 있다. 이집트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이 민족이 살 길이 아니라 한다.

길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을 바라는 데 있다 한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견자들이 환상을 보는 것이다. 찬란한 민족의 내일의 환상, 원수 되었던 남과 북이 서로 얼싸안고 콧물, 눈물 흘리며 뉘우치고 춤을 추는 환상을 보는 것이다. 문익환 목사님의 환상처럼 멍석말이로 숨을 거둔 민족이 꿈틀 살아나 덩실덩실 춤을 추는 환상을 보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옳은 말을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어려운 때 민족의 자리에서 민족이 살 수 있는 옳은 길을 밝히는 것이다. 기득권자, 권력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골라 하지 않는 것이다. 저들이 평화라 하면 평화라 하고, 저들이 전쟁이라 하면 전쟁이라 하고, 저들이 북진 통일이라 하면 북진 통일이라 하는 것이 부끄러운 말이다. 예언자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거짓된 것을 보이지 않고 정도를 취하며 바른 길을 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지 않고 러시아로 뛰고 중국으로 달려가며 미국의 고깃덩어리를 기댄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족의 파멸이다. 아니, 이집트가 망한 것처럼 미국도 망한다.

오늘 기장이 왜 따로 존재해야 하는가? 교파주의는 타기할 반기독교적인 것이다. 교파로만 존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시대 우리가 따로 있음으로 감당하는 몫이, 긍정적인 몫이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하는 제약은 없다. 교파를 따질 것 없이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을 함께 가는 모든 교회의 몫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선견자의 몫이다. 환상을 보는 것이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 형편이라 하더라도 그 복판에서 차라리 환상을 보는 것이다. 민족이 파멸하는 악몽이 아니라 살아나는, 꿈틀꿈틀 하나가 되는 환상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환상이 한국 교회의 환상, 나아가 민족 전체의 환상이 되어야 한다.

기장의 몫이 무엇인가? 예언자의 몫이다. 옳은 것을 보아내야 한다.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다. 거짓을 배척하는 것이다. 민족이 마땅히 가야할 정도를 취하고 바른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예언자의 자리에 우리가 섬으로 한국 교회가 급기야 거기 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장의 몫이다. 이것이 재앙을 막는 것이다. 민족을 살리는 것이다. 미국까지, 일본까지, 세계를 살리는 길이다. 하나님의 재앙이 지구 땅에 쏟아지지 아니하게 하는 길이 여기에 있다.

기장 교회 교인이 된 여러분, 나는 교파 의식을 갖자고 요청하지 않는다. 바른 기장 교회로 우리의 교회를 세우자고 권면한다. 민족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행동하는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자고 동의를 구하고자 한다. 향린교회를 사랑하라. 아끼라. 소중하게 여기라. 보수 교회 교인들이 자기들의 교회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라. 그리고 기장을 사랑하라. 아끼라.

“너희들의 의로운 행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로운 행실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5:8-9).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슴에 담으라. 작은 일이라도 그 길을 따라 가는 일을 하라.

[누가복음 12:49-53] 가정 - 그 부정성과 창조성, 1994년 5월 8일, 김상근 목사

9월 13, 2026

가정 – 그 부정성과 창조성

누가복음 12장 49-53절 / 낙산교회


[회상 노트]

그 해 1월이었다. 문익환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급보를 받았다. 창동에 있는 한일병원으로 달려갔다. 멀쩡하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문 목사님은 언제부터였던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던지셨다. 감옥 드나들기를 “신랑이 신부의 방에 들어가듯” 했다. 그분이 자신의 방에 써 붙힌 글귀다.

“나보다 아버지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마태복음 10:37).

주님의 가르치심이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는 심도(深度)에 언제나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가정을 온전케 하는 일 또한 버릴 수 없었다.

문익환 목사님이 감옥에서 나온 후 함세웅 신부, 지선 스님 그리고 나를 불러 ‘통일운동을 이제는 당신들이 나서서 하라’고 당부하셨다. 당신은 뒷방에서 통일맞이 준비를 하겠노라 했다.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다. 당부를 부탁받은 나 외의 두 사람은 홀몸들이다. 내게는 가정이 있다. 아직 통일운동의 길은 험난하다. 나에게 있어 가정은 한없는 보금자리이지만 나를 묶어 놓는 말뚝이기도 했다.

그러셨던 문 목사님이 돌아가셨다. 그분의 부탁을 이제 물릴 수도 없다. 가정도 소중하고 민족 문제도 소중했다. 그 둘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나는 그즈음에 또 한가지 역사적인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1980년 5ㆍ18 광주학살과 민중항쟁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이었다. “5ㆍ18 진상규명 및 광주항쟁정신계승국민위원회”를 결성했다. 나는 상임대표를 맡았다. 그러나 모든 언론이 외면했다. 국민들도 두려워하는 눈길을 줄 뿐이었다. 처음엔 너무 외로웠다. 우리 가정이 감당하게 될지도 모를 고난을 사실 더 두려워했다. 그러나 전두환ㆍ노태우 등을 정동년 등 피해자들이 고소하고, 김상근 외 293명이 고발하여 그들을 끝내 재판에 세웠다. 길고 어둡고 두꺼운 투쟁이었다.

가정주일에 하는 일반적인 설교였지만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갈등과 질문에 대한 성서의 답을 내가 내 입을 통해 말하고 또 내가 내 귀로 들은 것이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 한다. 이미 가정에 대한 생각을 할 연세가 지난 분도 계시지만 지난 주일이 ‘어린이 주일’이었고,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다. 어린이 주일이라는 것도 일본과 우리나라 교회만이 갖는 날이다. 어린이 주일을 가지고 그 하루, 어린이를 높이고 또 어린이와 가까이 지내고 어린이를 세우도록 하자는 것 역시 그 배경에는 우리의 반어린이 문화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서양의 가정 주일 전통을 도입하되 어버이 주일로 성격을 바꾼 것 역시 그 배경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어머니 주일로 했다. 그러다가 어버이로 다시 바꾼 것이다. 하여간 가정보다 더 화급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어머니의 노고라고 여겼던 것 같고, 어머니 주일이라 한 것은 역시 반여성 문화가 그 배경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아버지의 위상도 문제라는 위기 의식이 작용한 것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어버이날을 정한 것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버이 자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디 어머니의 노고만이냐? 아버지의 노고도 어머니 못지않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전혀 반대인 것 같다. 지금 어린이는 가정의 왕이다. 소년ㆍ소녀 가장도 있고 학대받는 어린이도 있고 고아원에서 자라야 하는 어린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린이는 가정의 왕이다. 부모들이 절절맨다. 그저 ‘그래, 그래’ 한다. 엄격한 금기가 있고 규제가 있던 시절에 자란 우리의 어린 시절과 비교하면 왕 이상이다.

어떤 때는 우리 눈에 사뭇 거슬린다. 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무슨 놈의 애를 저 따위로 키우나?’ 이런 생각을 가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떼를 쓰면 부모가 꼼짝 못한다는 것을 안다. 오늘의 어린이들은 거절당하고 규제받고 그래서 자제해 본 경험이 없을 것이다. 어린이는 공부하는 것 빼고는 모두가 제 맘인데 어린이 주일까지 둘 필요가 있을까? 즐거움 중에 더 즐거우라, 그런 것인가?

가정도 그렇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가정제일주의가 아닌가? 가정이라면 벌벌 한다. 요새 남자들에게 어린이는 왕이고, 제 부인은 대왕대비 마마쯤 된다. 요새 가장들에게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아마 가정이라 할 것이다. 괜찮은 거다. 권위주의 문화가 깨진 거다. 가히 가정주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남자들만 별로 재미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아직도 여성, 아이들의 해방이 요원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만 이 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옛날에는 남편은 그가 어쨌거나 ‘하늘 같은 남편’이었다. 아이들에게도 아버지는 그런 존재였다. 출생 신분, 사회적 지위, 경제 능력에 따라 공경하고 경애하지 않았다. 남편이니, 부모이니, 못났더라도 지위가 낮더라도 공경했다. 경애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사회적 지위도 높아야 하고, 특히 경제 능력이 있어야 존경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남자들은 직장에서 사회에서 돈을 벌고 지위를 높이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는 것이다. 삶의 속을 들여다보면 가정에 매인 것이다.

시대가 여기에 이르게 되면 가정 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눈이 가정에 붙들려 있으니 가정 외의 것이 보일 리 없다. ‘가정이 편안하면 그만’이라는 소시민적 행복감 속에 매몰되는 것이다. 공동선, 정의, 평화, 이런 것이 보일 리 없다. 혹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을 위해 일하게 되지는 않는다. 시간을 내고 돈을 내는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격언은 작은 나쁜 짓이라도 그것이 곧 큰 나쁜 짓을 하게 되는 출발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말에서 전혀 다른 적극적인 뜻을 찾을 수도 있다. ‘정의, 평화 등을 위해 나를 주고 내놓는 일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해볼 때에야 가능하게 된다’는 뜻으로 원용할 수 있을 것이다. 천리를 가겠다고 나선 것은 아니나 한 걸음을 떼고 그리고 또 떼고 또 떼고 보니 천리를 가게 되는 것이다. 나를 주어보고 시간을 내보고 돈을 내보고 그래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첫걸음을 꽉 붙들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가정이다. 예수에게도 가정 문제가 심각했던 것 같다. 33세가 되도록 결혼을 안했다면 그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대단히 특이한 경우다. 결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일찍이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던 것 같다. 아버지 요셉이 언제 사망했는지 기록이 없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아버지가 생계를 꾸리는 정상적인 가정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30세가 되도록 결혼도 안 하고 생업에 종사한 것은 그가 가정을 그만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생계를 꾸리면서도 진리의 삶, 민족의 문제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삶, 더 넓은 삶, 하늘의 뜻을 좇아 사는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가정과 이른바 공생애 사이에 갈등했다. 이런 그의 갈등은 성서 여기저기에 나타나 있다.

공생애 초기에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형제자매들이 예수를 찾아왔다. 이 일을 제자들이 전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 다’”(막 3:33-35).

그러나 그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할 때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십자가 곁에 있던 마리아를 한 제자에게 부탁하셨다. 성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로부터 그 제자는 그분을 자기 집으로 모셨다”(요 19:26-27).

여기 예수에게서 가정을 소중하게 여긴 것과 그 가정이 더 폭넓은 삶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두 면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아니, 예수는 급기야 가정의 분열을 부추기기까지 하셨다. 식구들끼리 맞서는 상황,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갈라지는 상황을 일으키신다.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서로 갈라질 것이다”(눅 12:52-53).

자연히 그렇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소중한 가정이지만 더 넓은 삶을 가로막는 요인이라면 진통을 겪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가정의 갱신이요 가정의 위상, 내용을 바꾸어 내야 한다는 말씀이다. 가정이 감옥이 되고 착고(着錮)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정이 있어서 더 나은 삶, 더 넓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러한 가정으로 질적 변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식구 모두의 삶의 증진을 위하여 토의하고, 가진 것을 비록 조금이라도 나누자는 결단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높은 뜻이 있으면 그 뜻을 이루어 가도록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가정에서 용기를 얻고 힘을 얻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뒤로 물러서고 싶으나 가족들의 성원에 힘입어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그런 가정을 창조해 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가정을 이루어내야 한다. 잠언 17장 1절은 대단히 간단하고 상식적인 가르침이지만 여기에 철학이 있다.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

이런 철학을 넉넉하게 공유하는 가정은 화목하다는 표현 이상의 가정이다. 우리는 이런 가정을 이루기 위해 어떤 모양의 분열을 야기시킬 수도 있어야 한다.

교회도 하나의 가정이다. 가정의 모양을 갖추어야 한다. 아버지들도 있고 어머니들도 있어야 한다. 형도 누나도 아우도 있어야 한다. 모두가 우리 식구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몇 되지 않는 교인들인데 누가 누군지, 뉘 집 아이고 어떠한지 모르기도 하고, 서로 상관도 하지 않는 풍토라면 믿음의 가족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2세들을 위해 이런저런 배려도 함께 해야 한다. 신앙 공동체란 그래서야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내 집의 자식을 위해서는 돈을 펑펑 써도 교회의 2세들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바르게 성장케 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 교회에 장래가 있을 리 없다. 출세를 위한 투자가 아니라 바른 삶을 세우기 위한 투자와 계획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하나의 게토가 되게 하자는 것은 아니다.

잔잔한 소시민적 안정과 행복 속에 빠지면 바른 교회가 아니다. 여기서 서로 힘을 얻고 주며 용기를 얻고 주는 그럼으로써 더 높고 깊은 삶으로 나아가게 되어야 한다. 공동체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분열과 맞섬은 평화를 창조하는 첫발이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평화에의 첫 걸음, 그것이 아픈 걸음일지라도 걸어야 하는 걸음이라면 걷고 끝끝내 평화에로 나아가기 바란다.

[고린도전서 12:12-13, 26-27] 교회의 공동체성 – 1993년 7월 15일, 김상근 목사

9월 13, 2026

교회의 공동체성

고린도전서 12장 12-13, 26~27절 / 낙산교회

[회상 노트]

기득권자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지치고, 피 흘리고, 팍팍한 걸음을 비틀거리는 사람들에겐 위로가 필요하다. 격려가 있어야 한다. 군부의 오랜 철권 통치에 시달린 사람들, 자식을 빼앗긴 사람들… 그들이다. 그들은 격려를 목말라 한다. 위로를 찾는다. 혀로 하는 위로와 격려가 아니다. 거짓으로 속이는 격려와 위로가 아니다. 가슴에서 떠낸 위로, 뜨거운 눈물을 섞어 안겨주는 격려를 찾는 것이다.

그들은 참다운 위로와 격려를 얻을 수 있는 공동체를 갈망한다. 예수는 그걸 만들려 하셨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거기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아픈 판단이다. 지금 교회는, 끼리끼리 교회거나 모래알같은 교회가 성공한다. 한 몸! 유기체! 이런 것을 지향하는 교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에게 오늘의 교회가 희망이 될 수 없다.

낙산교회는 지식인들의 교회다. 이제 만들어 가는 교회이니 그런 교회를 만들어 보자고 호소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낙산교회가 이렇게 모인 지 어느새 여러 해가 지났다. 모이신 면면을 보면 한국 사회 각 분야에서 최고의 수준에 계신 분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누구로부터 들은 이야기인지 잘 기억할 수는 없는데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 낙산교회는 교인은 늘지 않고 박사만 는다.” 이것은 최고의 분들만 모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말이다. 이런 분들만 모였으니 아무나 설교할 수가 없다. 김관석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셨던 것으로 안다. 그러다가 김이곤, 박종화, 김성재 목사로 주일 목사를 바꾸어 왔다. 모두가 우리나라에서는 최고의 학문을 닦은 분들이고 최고의 학술적 설교를 하시는 분들이다.

강문규 선생께서 저의 낙산교회 설교에 대해서 불만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설교하라고 하면 낙산교회 좋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하고 꼭 꼬집기만 한다는 불만이셨다. 사실 좋은 말은 그 말에 상대가 속아 줄 때 빛이 나는 법이다. 속지 않는데 좋은 말을 하면 제 속을 보일 뿐이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픈 점을 잘 아는데, 칭찬한다고 속을 까닭이 없다. 차라리 쿡 쑤시고 도망가는 편이 낫다. 강 선생님한테서 그 말을 들은 후 낙산교회 설교 안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서게 되었다. 하고 싶은 말, 꼬집을 말이 있어서였다. 다시 안 시켜도 좋다. 더운 여름날 스페어 목사 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낙산교회 교인 여러분, 교회 안할 거냐?” 이것이 오늘 꼬집고 싶은 말이다. ‘아니,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하면서 교회 안할 거냐는 말은 무슨 얼빠진 소리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성을 갖는다. 비록 나의 관찰이 피상적이지만, 아무리 보아도 낙산교회에 공동체성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런 분들끼리 모여서 그런 목사를 모셔다 설교를 들으니 그런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이 교회는 비슷한 분들끼리 모이게 되어 있다.

강남의 대형 교회를 보고 그게 교회냐고 들이대는 말들을 한다. 무슨 뜻인가? 그 교회는 그런 사람들끼리 모인 교회라는 뜻이다. 신문에 소개된 어떤 논문에 의하면, 강북의 교회는 성령 운동의 영향이나 오랜 역사 때문에 큰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남의 큰 교회를 보면 소위 문화의 동류 군집성이 큰 교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비슷한 사람이 모이는 곳을 찾아 모이다 보니 큰 교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그런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의 교회는 결국 대형 교회가 된다는 분석이다. 그런 것 같다.

목사에게 무슨 노하우가 있다든지, 설교를 잘한다든지, 성경 공부를 기가 막히게 시킨다든지 하는 것보다 문화, 생활 수준, 생활 스타일 등의 동류성이 대형 교회를 이루는 더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대형 교회는 목사가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동류 군집성에 의한다는 것이다.

지난 주일에는 최근 4억 원을 들여 파이프 오르간을 들여놓았다는 교회에 갔다. 설교 맡은 교회도 없고 해서, 솔직히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듣고 싶어 갔다. 1부 예배였는데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예배 시작 시간보다 한참 일찍 갔는데 15분 전쯤 되니까 절반쯤 찬다. 10분 전에 2/3쯤 찬다. 제법 일찍들 온다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예배 시작 10분 전에 한 차례 연주가 있었는데 그것을 들으려고 일찍 온 것이다. 예배가 끝났는데 다시 자리에 모두 앉는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엉거주춤 나도 앉았다. 다시 10여 분 길이의 곡을 연주한다. 연주가 끝나니까 몇 사람은 박수를 친다. 마치 음악회에 간 것 같았다. 교인도 예전보다 훨씬 많았다. 배쯤 늘어난 것 같았다. 파이프 오르간에, 잘 준비된 상당 수준의 성가대에 추위를 느낄 정도의 냉방이 이런 것에 익숙한 사람들을 끌어모은 것 같았다. 조건과 분위기가 그러니 역시 모인 사람들이 비슷했다. 외형, 외모로 보아 고만고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교회라는 것은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어야 한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부자, 가난한 자, 박사, 무식자, 노소, 남녀, 큰 사람, 작은 사람 등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야 교회가 될 수 있다.

오늘 봉독한 성서 구절은 고린도교회에 주신 바울 사도의 편지다. 고린도교회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부자와 가난한 자, 능력이 있는 자와 모자라는 자, 남녀 등 상당히 다양하다.

요새는 체육인 교회, 예술인 교회, 연극인 교회 등 교회도 전문업소화 하는 경향이 있다. 동류 군집성 교회들이다. 물론 배우나 탤런트 얼굴보러 가는 교인도 있을 테니까 반드시 동류 군집성 교회라 할 수는 없겠으나 교회 설립자들의 의식은 분명히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야 한다. 왜 그런가? 인간 사회는 동류 군집성의 전쟁터다. 끼리끼리 모이고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들 계급 계층에 이익을 극대화하는 사회로 만든다. 여기에는 조화와 어우러짐, 말하자면 ‘공동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누르고 억압하고 착취한다. 이것이 죄 된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죄 된 사회다. 하나님의 구속사란, 이러한 사회에 조화되고 어우러지는 ‘공동체성’을 회복해 내는 것이다. 회복이라 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그랬다는 뜻을 담기 위한 표현이다.

오늘 읽은 성서에는 교회를 무어라 했나?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 그런데 그 몸은 단출한 지체가 모인 몸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많은 지체를 가진 한 몸과 같습니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눈, 귀, 코, 손, 발 등 다양한 지체를 가진 몸이라는 뜻이다. 한 종류의 지체만 많이 모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동류 군집이 아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야 한다. 박사도 있고 무식한 사람도 있어야 한다. 부자가 있는가 하면 가난한 자가 있어야 한다. 노동자가 있는가 하면 기업주도 있어야 한다. 늙은이도 젊은이도 있어야 한다. 남자도 여자도 있어야 한다.

‘우리 낙산교회 교회 안 할 거냐?’고 꼬집은 것은 낙산교회도 동류 군집성 교회라는 판단 때문이다. 교회를 개방하라. 누가 닫고 있느냐 하겠지만 닫고 있다. 증거는 다양한 사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가 증거다.

어떻게 하면 개방하게 되는 것일까? 개방해서 다양한 사람이 모이면 교회인가? 다양한 사람이 모였다 하여 그것이 이상적인 교회는 아니다. 그 지체들이 서로 연결하게 될 때 그것이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연결된다는 것은 유기체가 되는 것이다. 서로 피가 통하고 감각이 전달되는 데까지 가야 그것이 교회다. 어떻게 하면 유기체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말은 도대체 무식한 말로 들릴지 모르겠다. ‘반 속박성, 익명성, 자기 폐쇄성’ 같은 현대인의 특징을 모르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다. 강남의 어느 대형 교회는 교회에서 서로 아는 체하지 말라고 한단다. 아는 체하면 곧바로 들어왔다가 곧바로 나간단다. 그것도 그에게 부담이 간다는 것이다. 두리번거릴 것도 없다. 목사, 장로가 예배 후 출구에 서서 악수하고 인사도 않는다. 문을 10여 개 만들어 놓고서 목사가 어디는 서고 어디는 안 설 수 없으니 아예 서지 않는 것이다. 서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유방임제다. 교인들은 가벼워하고 좋아한단다. 현대인은 그런 것을 선호하는데, 유기체가 되자는 따위는 뭘 모르는 소리인가!

실제는 그렇지 않다.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강남 대형 교회의 열성 집사다. 갑자기 중병에 걸렸다. 병원에서 중대한 수술을 하는데 당회장 추천서를 가져오란다. 그러나 교회는 성의를 안 보인다. 추천서 하나 만드는 것도 절차가 복잡하다. 누구 하나 와 굽어보는 사람이 없다. 건강하고 아무 아쉬움이 없을 때는 그렇게도 좋은 교회였다. 그러나 초조하고 안타깝고 공허할 때도 있는 법 아닌가? 낙산교회 교인들이라고 이런 갈구가 없을까?

교회는 유기체가 될 때 이루어진다. 공동체성이 생명이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같이 즐거워합니다.”

이것이다. 고통도 오고 간다. 영광도 오고 간다. 즐거움도 오고 간다. 이것이 교회다. 낙산교회에 이것이 있는가? 거추장스럽다 하는가? 고통도 영광도 다 저 알아서 하는 것이라 하는가? 개체완결주의인가? 그렇다면 아직 교회가 덜 되었다는 말이다. 오고 가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막힌 혈관을 뚫어야 한다. 경혈을 뚫어야 한다. 잔뜩 쌓아올린 자기의 울타리를 허물어야 한다. 내 손에 흙도 구정물도 묻혀야 한다.

지금 세상 어디도 이렇게 하려는 곳이 없다. 교회는 훈련장이다. 함께 사는 훈련을 하는 곳이다. 자기 울타리를 헐어내는 연습을 하는 곳이다. 그러다가 급기야 피가 통하게 되는 곳이다. 유기체가 되는 곳이다.

그러면 낙산교회는 비로소 개방된다. 공동체성을 갖게 된다. 이것은 그저 주일 10시 30분에서 12시까지의 예배와 커피 한 잔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설교 들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목사가 목회를 하고 교육을 하고 심방을 하고 … 이런 교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를 깎는 노력을 하자고 낙산교회를 세운 것 아닌가?

낙산교회 여러분, 교회 안 할 거냐?

교회로 가자고 권한다. 이렇게 쉬운 것은 교회로 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낙산교회는 교회다. 교회로 가야 한다.

[마태복음 4:1-11 예수의 영성생활 목표 – 1993년 6월 14일, 김상근 목사

9월 12, 2026

예수의 영성생활 목표

마태복음 4장 1-11절 /도시빈민 목회자 교육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 사화(史話)는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에 모두 보도하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세 가지 시험의 내용이 생략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의 마지막 시험이 누가복음에서는 두 번째 시험으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사탄 또는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것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였다. 예수의 시험은 그가 하나님 나라 운동,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그의 사역의 이념을 점검받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사역의 원칙이 올바로 확립되어 있는가를 시험받는 것이라는 말이다. 적어도 이 시험을 통과해야 그는 그의 사역을 올바로 수행할 자격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가 시험을 받았느냐?’ 하는 역사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 하겠다. 문제는 예수께서 이 시험을 어떻게 극복했는가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시험을 받기 위해 성령의 인도로 빈들로 가셨다. 이것은 신명기 8장 2절을 연상시키는데,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계명을 지킬 것인가를 광야에서 40년간 시험하셨다고 보도하고 있다. 광야에서 40년의 유랑 기간 동안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신실성을 시험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함으로써 죄를 범하였다.

그런데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시험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마가복음에서는 40일 동안 내내 사탄에게 시험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40일이라는 상징적인 숫자에 관한 수많은 사례들이 성서의 전통 속에 나타나 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금식하면서 주님과 함께 사십 주야를 지냈다(출 34:28).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르는 빈들에서 사십 주야 동안 천사들의 음식 시중을 받으면서 방황하였다(왕상 19:1-8). 이스라엘 민족은 사십 년 동안 하나님에게 이끌리어 빈들에서 편력하였다(신 8:2).

예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셨다는 보도는 그가 일생 동안 영성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집약적으로 보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영성생활을 철저히 수행하셨다는 말이다. 악마에게 시험받는다는 사상은 구약성서에도 이미 나타난다(삼하 24:1). 악마는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적대자다. 예수는 그의 메시아적 직무를 수행하기 전에 그의 직무에 관하여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셨다. 악마는 바로 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하려고 했다. 예수께서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홀로 기도하셨다. 그의 제자들을 선택하기 전에 예수는 산에 들어가 철야 기도를 하셨다(눅 6:12).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셨다(막 14:32-42). 기도야말로 예수가 시험을 이기고 그의 직무를 수행할 능력을 얻는 비결이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 귀신들린 아이를 치료하지 못하고 당황해 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부류는 기도로 내쫓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내쫓을 수 없다”(막 9:29)고 가르치셨다. 우리에게 영성 훈련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는 교훈이라 하겠다.

예수께서 40일을 금식하고 나서 배고픔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에 악마의 첫 번째 시험이 제기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착취 정책으로 인하여 구조적인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대는 로마에게 매년 600달란트나 되는 거액을 상납해야 했고 각종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산헤드린 최고 의회는 로마 세력을 등에 업고 사복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특히 갈릴리 농민들은 소작농이나 소농으로 전락하여 유대 지방의 부재 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있었다.

‘경제’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활이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젤롯당 운동이 로마에게 납세를 거부하면서 궐기하고 예루살렘에 쳐들어갔을 때, 채무 장부를 불 지르고 사제 귀족들과 지주들을 숙청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스스로 메시아라 일컫는 메시아 참칭자들은 경제문제의 해결을 약속하면서 여기저기서 출현하여 백성들을 선동하였다. 굶주린 민중이 기다린 것은 경제 문제의 해결사로서 메시아였다.

사탄은 예수에게 그런 ‘경제적 메시아’가 되어 보라고 시험하였다. 그것은 물신숭배, 즉 경제제일주의를 선택하라는 도전이다. 그것은 돈만 벌면 된다는 사고이고, 착취를 통해서라도 소유를 늘리면 된다는 유혹이다. 정의와 나눔은 외면할 수밖에 없다. 이웃은 착취의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주의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는 신명기 8장 3절의 인용 말씀이었다. 예수께서는 물론 경제 문제의 중요성을 모르시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삶에서 경제의 필요성을 인정하신 발언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똑같은 차원에서 창조하시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할 수 있는 존엄한 파트너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잘 아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완성은 먹고사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수준에까지 성장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만이 하나님과 ‘나와 너’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에 응수하셨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이 경우에 서로 나누라는 것이다. 나눔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가진 것의 공유와 나눔의 실천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악마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시험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시 91:11-13).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한가를 시험해 보라는 것이 악마의 요구였다. 예수의 성서 인용으로 패배한 악마 자신도 성서를 인용하여 예수를 시험하였다. 예수더러 쇼를 위한 기적을 행하는 마술사의 능력을 현시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마술사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단연 거부하였다. 그는 ‘기적’을 행하여 메시아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쫓았고 자연 기적을 행하였으나, 그 모든 기적 행사들은 병사에 사로잡혀 있는 병자들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 12:39)라고 대답함으로써 그가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메시아가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십자가에 달려 있는 순간에도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마 27:42)라고 조롱하였을 때에도 무력하게 죽음을 감수하였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교회성장주의 병에 걸려 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교인만 많이 모이게 하면 된다는 성장제일주의 병이 만연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가 자본주의적 경쟁주의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

교회 성장이 교회의 목표가 될 수는 결코 없다. 올바른 교회 성장은 교회가 그 선교적 목표를 올바르게 수행하는 과정에서 오는 결과여야 할 것이다.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두 번째 시험에 대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신 6:16)고 반박하였다.

마지막으로, 악마는 매우 높은 산으로 예수를 이끌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이며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제안한다.

사탄은 이 세 번째 시험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대결해 온다. 악마에게 예배하기만 하면 그 모든 권력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사실 악마는 이 시험에서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을 자기에게 달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권력욕’을 이용한 악마의 간교한 책략이다. 예수에게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어 보라고 유혹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악마에게 예배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권력을 차지해 보라는 세속적인 도전장이라 하겠다.

권력제일주의는 이웃을 억압할 수밖에 없다. 힘의 논리는 약자가 강자를 섬겨야 한다는 이념이다. 여기서 약자는 강자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어떻게든지 자기만 권력을 잡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권력의 노예가 된다.

교회가 권력 지향적이 될 때 그 교회는 부패하기 마련이다. 총회장 선거에 수억의 돈을 뿌린다는 교단도 있다고 하니 개탄할 노릇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교회마저 이용하려는 자들이 늘어 가고 있다.

평생을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이 그것도 교회의 장로라는 사람이 대권을 잡기 위해 여당으로 백기를 들고 들어가서 급기야 대권을 잡았다. 그가 신한국 건설을 위해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뜻있는 사람들은 회의를 하고 있다. 이념 없는 개혁은 내용 없는 개혁, 형식적인 개혁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 악마에게 예배하는 그런 속된 메시아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세 번째 시험에 대하여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 6:13) 하고 악마를 꾸짖어 물리치셨다.

사랑하는 도시빈민교회 목회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버렸다. 무엇이 되고자 함을 버렸다. 그러나 여러분의 가슴속에 버림에서 온 쓸쓸함이 있는가? 아쉬움이 있는가?

단호한 말로 물리치라. 공유와 나눔이라고.

단호한 말로 물리치라. 큰 교회가 아니다, 작은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교회를 지향한다고.

단호한 말로 물리치라. 권력의 힘을 빌지 않는다, 오직 예수의 영성으로 우리의 목회 현장에 설 것이라고.


[회상 노트]

사회의식이 강한 신앙인은 자칫 방종적으로 산다는 지적을 받는다. 자기에게 철저하지 않다는 비판을 내내 받는다.

목회자들은 자기의 목회 현장에서 강한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억눌려 있기 마련이다. 그 현장을 떠나면 ‘자유’를 누려보려는 강한 욕망에 압도당한다. 교육원이 그 ‘자유’ 실현의 장으로 가끔 둔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회선교를 하는 우리에게 영성(靈性)이 없다면 우리는 참다운 개혁의 힘을 가질 수 없다. 교육원은 해방을 경험하게 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참 자유를 경험하는 장소가 되기도 해야 한다.

도시빈민 목회를 하는 동역자들을 나는 한없이 존경한다. 자기를 버리는 결단이 없이는 그 목회의 길에 들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민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살겠다는 그 거룩함에도 악마는 여지없이 침투한다. 그들의 목회를 단순한 경제운동으로 오도한다. 그걸 통하여 자기가 무엇인가가 되고자 함으로 유혹한다. 아니, 스스로 오도당한다. 스스로 유혹당한다. 우리의 죄성(罪性)이다.

영성이 없는 사회운동은 성공할 수 없다. 영성이 없는 빈민목회도 성공할 수 없다. 성공은 자기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자기를 버리는 것이 성공일 것이다. 그것이 영성이다. 이를 강조하고자 했다.

[이사야 31:1-3, 30:9-11] 하나님과 군마, 희망은 무엇인가? - 1994년 6월 12일, 김상근 목사

하나님과 군마, 희망은 무엇인가? 이사야 31장 1-3절, 30장 9-11절 / 향린교회 [회상 노트] 기장이 ‘새 역사’를 시작한 날을 기념하는 총회 선교주일에 다시 향린교회 예배 설교를 맡았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는 처음 대북 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