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나드는 교회
사도행전 10장 9-16, 47-48절 / 향린교회
[회상 노트]
한국 교회의 노인화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노인들이 교회를 완전히 점령한 상태다. 엄격히 말하면 노인 문화와 노인 정서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문화적 획일주의가 교회의 왕이 되고 있다. 젊은이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없다. 이리되면 교회의 역사관이나 사회의식은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머지않아 한국 교회는 보수주의 집단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 회상 노트를 쓰고 있는 지금 어느새 그리되었다. 꼭 10년이 지났을 뿐인데 한국 개신교는 보수의 둥지가 되고 말았다.
유대인들의 그 보수의 경계를 성령은 무너뜨리셨다. 당시의 제자들은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그리했다. 오늘, 우리는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다. 도무지 경계를 넘나들지 않으려는 옹고집이 마치 정통 신앙인 것으로 착각하는 우리 때문이다.
경계를 넘나들자는 것은 어디 문화뿐일까? 나는 그즈음, 교회가 노쇠하고 있다는 사실을 꽤나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문화적 폐쇄성이 큰 이유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사실은 삶의 현실에서 사랑도, 정의도 세우려하지 않고, 스스로 친 울타리 안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 더 문제라고 진단했다. 아니, 교회당에 모일 때만 유효한 신앙, 교회당을 나가는 순간 무위한 것이 되고마는 신앙이 더 문제라고 생각했다. “생활신앙”을 일구어내야 한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우리 교회가 소속해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53년 6월 10일에 새로운 교단으로 새 출발을 했다. 그 날을 기념하여 매년 6월 둘째 주일을 ‘총회 선교주일’로 지키고 있다.
사실 우리 평신도에게는 교파 의식이 없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래야 한다. 다른 교파보다 우리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교파 의식은 금물이다. 그것은 분열주의요 일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시느냐 하는 것을 확인하고, 그 일에 견고하게 서고자 하는 점에서 ‘우리’를 강조한다면 그것은 창조적인 교파 의식일 것이다. 분열주의적 교파 의식은 배척할 일이지만 창조적 교파 의식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결과적 자평이지만, 우리 기장 교회가 한국 교회 내에서 이렇게 따로 있음으로 해서 한국 교회와 한국 역사에 커다란 공헌을 한 것 아닌가? 1960-70년대의 인권 문제, 1970-80년대의 민주화 문제, 1980-90년대의 통일 문제에서 기장은 전위적 역할을 잘 감당했다.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 회복이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는 관건이라는 신학적 명제를 일반화하는 데도 그 향도적 역할을 훌륭히 해 왔다. 향린교회도 마찬가지다.
아직은 그 어떤 과제도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고 있지 못하다. 올해 우리 총회의 주제인 “막힌 담을 헐고 화해하는 공동체”는 여전히 바로 이 연장선 위에 있는 주제다. ‘막힌 담’은 우리 가운데 얼마든지, 여기 저기에 있다. 남과 북, 동과 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남자와 여자, 농어촌과 도시 등 이런 것들 사이에 있는 막힌 담에 대해서는 우리가 오래도록 들어 왔다. 그리고 기도해 왔다. 특히 향린교회의 강단에 이런 것들과 관련하여 더 보탤 것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나는 오늘 신세대와 구세대, 세대 간에 막힌 담을 헐자는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신세대’는 누구인가? 어떤 것이 연상되는가? 배꼽을 내놓고 거리를 활보한다. 브리지-머리카락을 탈색한다. 칼라코팅-머리카락에 빨강, 파랑 물을 들인다. 멀쩡한 바지를 찢어 속살을 살짝 내보인다. 청바지는 허리가 아닌 엉덩이에 걸쳐 입는다.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인데 어느새 귀를 뚫고 귀고리를 한다. 노래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몸짓으로 괴성을 지르며 불러댄다. 저게 무슨 노랜가 싶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저런 놈들에게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의 장래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미친 놈들!’ 이것이 저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아니겠는가 “목욕탕집 남자들”이란 TV드라마에서 그 집 막내딸 수경이와 약혼남인 민기가 노는 꼴을 보라. 감당할 수 없다. 저런 며느리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남의 일 같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차별한다. 우리 공동체에 용납하지 않는다. 브리지까지는 용납이 될지 모르겠으나 코팅한 신세대는 교회에 올 수가 없다. 우리가 강력하게 사절하기 때문이다. 배꼽티 입은 신세대가 교회에 들어서면 안내하는 장로님, 집사님, 어떻게 하시겠나? 막지는 못할지 모르겠지만 수군수군하고 뒤로 야단법석이 날 것이다. 만약 그가 장로님 댁 딸이라면, 그 장로님은 큰 망신을 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막고 있고, 그들은 교회 공동체에 도대체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20, 3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단일 문화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문화 시대다. 10대의 문화, 20대의 문화, 30대의 문화가 따로 있다. 그 문화가 혼재해 있는 시대다. 그런데 교회의 문화는 50, 60대가 독점해 버렸다. 50, 60대 문화가 교회 문화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2세들이 줄어들고 있다. 어느 교회를 들여다보아도 청년이 적다. 중고등 학생이 되면 교회를 떠난다. 어린이 교회학교는 문을 닫지 못해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가 수두룩하다. 이것은 교회의 위기다. 그 물리적 수명이 다해 가고 있는 현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아무리 훌륭한 고백과 행동을 가졌다 해도, 그것을 확산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이어갈 후손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손이 끊어진 집안과 같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장 근본적 이유 중의 하나는 50, 60대의 문화제국주의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를 독점하고, 스스로 손(孫)을 끊는 50, 60대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처럼 옷 입고, 머리를 우리처럼 단장하고, 말투도 우리와 같은 것이 50, 60대 문화다. 이 문화는 사실 백인 문화, 백색 문화다. 백색 문화 제국주의가 교회의 손(孫)을 끊어 놓고 있는 것이다. 다른 문화의 소유자는 들어올 수가 없다.
1부 예배 후에 안 일이지만, 우리 교회 박 장로님 아들이 신세대 가수란다. 지난 장로 임직식 때 그가 노래를 불렀던 모양인데 위장을 했다. 제법 수트를 입고 넥타이를 맸다. 위장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여기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할까?
본문 말씀은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을 거부함으로 생긴 ‘막힌 담’을 하나님께서 헐어내시고 화해를 이루신 사건 기록이다.
처음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그 토대 위에 예수 신앙을 일으켜 가고 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대인들의 관습과 문화가 처음 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비유대인들 중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있게 된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비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과 생활 관습이 같지 않다. 구약 종교, 유대교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할례도 받지 않았다. 음식도 가려 먹지 않는다. 유대인의 문화와는 영 다른 문화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펄펄 뛴다. 그들에게 예수를 전한 바울을 죽여버리려고까지 했다(행 9:29).
베드로도 물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한 환상을 본다. 하늘에서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온다. 그 안에는 유대인들이 수천년 동안 부정하다고 여겨 왔던 짐승들이 있었다. 어디선가 음성이 들린다. 그것들을 잡아먹으라 한다. 베드로는 거부한다.
“절대로 안 됩니다, 주님. 저는 일찍이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입에 대어 본 적이 없습니다”(행 10:14).
또 먹으라 한다. 역시 거부한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행 10:15).
그러더니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 하늘로 들려 올라간 것은 큰 사건이다. 부정한 것이 거룩의 표상인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비유대인 둘이 너를 찾아와 어디를 가자고 하면 머뭇거리지 말고 따라가라’고 한다.
이 환상 직후에 베드로는 고넬료라는 비유대인으로부터 초청을 받는다. 베드로는 다른 유대인 몇 명과 함께 고넬료의 집에 간다. 그러나 그는 내심 갈등했던 것 같다. 우리 선민이 이방인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러던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보고 또 다른 것을 깨닫는다. 아, 그렇구나! 우리는 외모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그래서 누구는 용납하고, 또 누구는 멀리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외모를 가리지 않으신다’는 깨달음을 갖는다.
베드로는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고, 예수 신앙으로 살기를 권한다. 그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한다. 할례도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한다. 이것을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보게 된다.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그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행 10:47)
베드로는 비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이로써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비유대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막힌 담이 헐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수는 온 인류의 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우리 50, 60대는 ‘쉰 세대’다. ‘쉰 세대’가 ‘신세대’를 막고 있는 것이다. 나이와 관계없이 쉰 세대와 같은 정서, 문화를 가졌다면 모조리 쉰세대다. 물론 옷 입는 데도 가치관이 작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 하여 신세대를 죄인시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죄이기보다 문화다. 그것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관습의 문제다. 이것으로 스스로 손(孫)을 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쉰세대의 죄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문화를 죄라 하시지 않는다.
기장 교회, 기장 교회 중에서도 기장 교회인 향린교회는 신세대에게 세례를 주라. 문을 열라.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듯이 향린교회, 기장 교회는 신세대에게 가야 한다. 이것은 성령의 지시다. 이것이 세대간의 화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세대를 이어 하나님의 구원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손을 잇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