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영향권 밖
1982년 7월 11일 / 로마서 6장 5-11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를 지배하는 사탄의 힘이 엄존하고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선행을 하지 못하는 것은 나를 죄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덤을 만듦으로써 죄의 영향권 밖에 있게 되었다. 이것을 확인하자.
[슬라이드]
[설교 전문]
지난 주일부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죽음, 나의 무덤, 우리의 무덤을 만드는 것이라 말했다. 과거의 나를 장사지냈던 확실한 경험과 기억이 있어야 한다. 극적인 계기가 없었다 하더라도 오늘의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나’ 혹은 5, 10년 전의 ‘내’가 분명히 아니다라는 자기 고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무덤이 있는 신앙’, 무덤을 만들어야 한다 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절망과 환희가 동시적이다. 죄의 뉘우침, 즉 고뇌와 구원과 감사, 즉 기쁨이 동시에 있다. 금방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고백하는가 하면 동시에 구원의 확신이 있다. 그 사이는 엄청난 간격이다. 심판과 구원은 헤아릴 수 없는 거리다. 부산에서 신의주만큼의 거리라기보다 도저히 연결될 수 없는 무한대의 한 끝점과 반대쪽 무한대의 다른 끝점만큼이나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동시에’ 양 끝점의 경험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일까? 그것은 그 사이에 ‘무덤’이 있어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무덤’은 고뇌를 기쁨으로 이어준다. ‘무덤’은 심판을 구원으로 바꾸어준다. 우리에게 있어서 ‘무덤’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있도록 해야 한다.
바울은 지난 주일 택한 본문에 이어진 오늘 본문에서도 “죽어서”, “죽어버리고”, “죽었으니”라는 표현을 반복하여 쓰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우리를 무덤에 묻어 버렸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죽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무덤이 있게 된 것의 결과를 말하려 한다. 그 결과는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6절)이고, “죄에서 해방된 것”(7절)이라고 한다. “죄의 권세를 벗어났다”(11절)고 썼다. 총을 쏘아서 맞는 거리가 있다. 사정거리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그 죽은 우리를 무덤에 묻어버린 사람은 죄의 사정거리 밖에 있게 된다는 뜻이다. 또는 치외법권자와 같다는 뜻이기도 하다. 법이 있더라도 그 법이 다스릴 수 없는 자가 있다. 치외법권자다. 예를 들자면 서울에 있는 외국 공관들이 그렇다. 장면 총리가 5ㆍ16이 터지자 미국 외교관들이 사는 집으로 피신하려다 실패했었다. 같은 서울이지만 거기는 5ㆍ16의 총뿌리가 미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죽어서” 무덤에 묻히어 이제는 죄의 사정거리 밖에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죄가 우리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요 고백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은 자칫 추상적이요 정신적으로 들리게 되기 쉽다. 그러나 죄의 권세 밖에 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구체적인 표현이다. 누구나 사탄이 하라는 대로 한다. 누구나 그 권세, 세력권 내에 있다. 죄의 권세에 굴복한다거나 죄의 세력권 내에 있다는 것은 12절에서 밝힌 대로 말한다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여 사는 것을 뜻한다. “영”은 고귀하고 “육”은 죄된 것이라는 이원론적 사고가 아니다. 생활언어요 삶의 이야기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육체의 욕망”을 음행, 더러운 것,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가 되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그와 비슷한 것이라 설명한다. 에베소서 5장 3절 이하에서는 음행, 더러운 행위, 탐욕 따위를 말하는 것, 추잡한 말과 어리석은 이야기, 점잖치 못한 농담 등으로 설명한다. 이런 것들은 결국은 죄의 사주를 받아서 하게 되는 행위라는 말이다. 죄, 사탄이 하라는 대로 하는 생활이 우리의 생활일 수밖에 없다.
바울의 표현대로 종살이하듯 죄의 포로가 되어 전혀 내 선한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종살이요 포로다. 육체라고 하는 것은 자기충족적이다. 육체는 이성이 없고 자제가 없다. 육체는 언제나 절대적인 것으로 군림한다. 배고픈 사람에게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못할 짓이 없게 만드는 것이 육체의 욕정이다. 미움이 싹터 이 육체에 뿌리를 내리면 스스로 겉잡지 못한다. 더러운 짓을 한 번 하기로 들면 좀처럼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어느 단체에서든지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분열과 당파심을 일으키는 사람은 언제나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것을 보게 된다. 육체는 저만 생각하게 한다. 자기 충족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그 밖의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다. 이런 상태가 종살이의 상태요 노예의 상태다.
그래서 바울은 7장 18절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19절에서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드디어 24절에 가서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입니까?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라고 부르짖고 있다. 이 부르짖음은 바울 개인의 부르짖음만은 아니다. 그만의 내적 경험이 아니다. 세계 안에 있는 인간 모두의 부르짖음이요 비명이다. 사람은 이러한 노예의 상태, 죄의 권세에 붙들려 고통하고 있다.
바로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도 죄의 노예가 되어 있다. 사탄이 하라는 대로 나를 내어놓고 있다. 우리 자신이 죄의 종살이를 한다. 음행하고 더러운 것, 방탕한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우상을 섬긴다. 원수가 되어 있고 싸우고 시기한다. 분노하고 당파심과 질투의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술주정하고 돈푼이나 있으면 흥청댄다. 우리 입에는 더러운 말, 추잡한 말이 가득 담겨 있다. 우리 자신을 내적으로 성찰한다면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선을 원하지만 하는 짓을 보면 악에 동참하고 있는 자신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놀람이 있는 대로 역시 악에서 산다. 노예다. 죄의 종이다. 죄의 권세, 영향권 안에 있다.
그런데 무덤이 있는 사람은 우리를 코 꿰어 끌고 다니던 죄가 이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탄이 마음대로 음행하고 싸움하고 이기심에 살라고 충동질하더라도 무덤이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사정권 밖으로 나와 버렸다는 말이다. 무덤이 있는 사람은 육체의 욕망대로 살지 않게 된다. 음행하지 않게 된다. 더러운 짓을 하지 않게 된다. 진리를 떠나 방탕하지 않게 된다. 권력, 명예, 돈에 대한 욕심과 또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싸움을 하지 않게 되고 분열과 당파심, 질투의 사탄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홍청대던 우리가 이제는 존절히 산다. 추잡한 말, 어리석은 이야기, 점잖치 못한 농담을 하지 않는다. 곧 죄의 영향권 밖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죄의 권세를 벗어났다 하고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다.
우리는 개인 윤리에 대하여 말수를 줄여왔다. 그것은 큰 원리가 세워지면 다른 것은 자연히 해소가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운 여름날 머리 위에 찬물을 쏟으면 발은 자연히 시원해질 것이라는 원리다. 하나님에 대하여, 선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사랑과 정의에 대하여 진지한 사람은 머리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이기심, 음행, 더러운 짓, 추잡하고 더러운 말 등 더운 다리는 부수적으로 극복될 수 있으리라 믿어 왔다.
그러나 머리 위로부터 찬물을 쏟아 부으면 발까지 시원해지기도 하겠지만 발을 얼음 같은 계곡의 물에 담그는 일을 통해 더운 머리를 식히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이 둘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권세, 사탄은 우리를 방탕하게 하고 질투심을 갖게 하고 시기하게 하는 이런 일을 통하여 결국 하나님의 뜻을 준행한다는 것이 허구요 위선이 되게 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높은 뜻과 신앙의 논리가 하찮은 죄의 공격에 쉽게 무너진다. 진리와 정의도 더러운 마음을 일으키는 사탄의 사격에 여지없이 허구가 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무덤이 있다. 무덤이 있는 신앙인에게는 죄의 권세가 미치지 못한다. 죄의 영향권 밖에 있다. 여러분은 죄의 영향권 밖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말하여 왔다. 사랑과 정의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해왔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오늘 우리가 청년들을 농촌에 보내는 것도 정의에 대한 관심이요 사랑을 위한 신앙 훈련의 일환이다. 가서 우리 시대의 아픔을 함께 경험하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신앙을 진작시키기 위해 농촌으로 저들을 보낸다. 그런데 그것만은 아니다. 땀 흘리고 고생하면서 우리 속에 있는 이기심, 방탕, 음행, 싸움, 분열, 당파심 등 온갖 죄를 극복하는 일이기도 해야 한다. 무덤을 만들고 급기야 죽음의 영향권 밖으로 나아가는 계기이기도 하다.
무덤이 있는 우리, 머리에 찬물을 쏟아 부으면서 동시에 계곡의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자. 위에서 내려오고 아래에서 올라가는 여기에 예수와 하나되는 좁은 길이 있다. 우리는 죄의 영향권 밖에 있는가? 죄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기 위해 기도하기 바란다.
[회상 노트] 예수와 하나되는 신앙
바뀌지 않는구나. 전혀 달라지지 않는구나. 그저 언제나 그렇구나. 내게는 대선배가 되는 어떤 목회자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한 적이 있다. 목회란 콩나물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을 부으면 몽땅 밑으로 쏟아져 내리고 만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얼마를 지나고 보면 콩나물은 다 자라서 식탁에 오르기에 충분하게 된다. 목회에 조바심은 금물이다.
내가 목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들려준 말씀이었다. 그 때 벌써 나에게서 조바심 같은 걸 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콩나물은 자라지 않느냐? 자랐지 않느냐? 어느새 이 교회에서 10년이나 설교를 하고 목회를 했지만 콩나물처럼 밥상에 오를 만큼 자랐다고 할 수 없다. 조바심이라고 나무라는 것은 옳지 않다. 자라지 않으면 조바심을 내야 한다.
왜 그럴까? 혁명적 사건을 일상적이고 예사스런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례’다. 세례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혁명적 사건이 아닌가!
최근의 어떤 책에 장로고시 면접시험에 대한 글이 실려 있는 것을 읽었다. 필자는 피고시자에게 술, 담배를 하느냐고 기습적으로 물었다는 것이다. 단호하게 안 한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당황하는 빛을 띄다가 안 한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한다. 아마 그도 그날 이후 술, 담배를 끊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술, 담배를 좋다 할 생각도 없고 그것 자체에 대해 논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장로가 되겠다는 사람에게 그것을 물었다니 안타깝다. 말하자면 금주, 금연을 혁명적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술, 담배류의 금욕을 하고 그런 데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 것이 안타깝다.
나는 우리 기독교인이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고 그럼으로써 가치관에 혁명을 이루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콩나물 자라듯 하는 신앙은 예수의 죽음에의 참여가 아니다. 그것은 혁명이 아닌가! 개인적, 사적 관심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에 사회의 온갖 불의와 부정의는 제 세상을 만들고 만다.
기독교인의 경건, 기독교인의 자유는 훨씬 깊고 근본적이 아닌가! 어떻게 우리가 그리 될 수 있을까? “무덤”, “죽음의 영향권 밖”은 결국 “정의의 도구”이기 위해서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