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3일 금요일

[범용기 제4권] (10) 상한 갈대 - 몰두

몰두

1956년에던가 미국 선교사단 총무인 아담스가 나와 김정준[1]을 디너에 초청했다. 식후에 그는 나와 단독으로 말하고 싶다했다.

“당신만 그만두면 한국교회는 평온무사할 텐데 사면하실 수 없을까요?”

“한신 이사회에 말해 보시구려! 이사회에서 그만두라면 그만두지요!” 했다.

“그러면 틀렸지요!” 한다. 단념한다는 뜻이었다 … 사실, “한신대”는 총회 직속 신학교였기에 이사는 각 노회에서 선출된 사람들로 구성돼 있었다. 노회에도 보수와 개혁 두 세력이 진영을 달리하고 있었지만 선출된 이사로 보면 언제나 개혁파 인사가 우세였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나를 몰아내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각 지방 교회에서도 두 갈래의 논쟁이 벌어졌다. 그래서 나는 신학적 계몽 때문에 순강에 바뻤고 논쟁의 대열에서는 이쪽이 언제나 우세였다. 신학 논쟁에서의 열세는 그들로 하여금 교권주의로서의 우세를 전략화하게 했다. 그들은 소위 정통교리라는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의 절대화와 아울러 교리 옹호를 위한 “무한전술”을 노골화 했다. 정통 교회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거짓증거든 부정부패든 정당화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구에서 제36회 총회가 모였을 때, 이북 피란 교회를 정회원으로 들였다. 해방 이전에는 교회 수의 3분의 2가 황ㆍ평 두 도에 있었으므로 총회 대표수도 전 총회원의 2/3가 황평 대표였다. 그러나 이남에 피란한 목사 장로들은 본적 지역의 지교회를 상실했고, 지교회 없는 노회도 될 수 없으니만큼 본적지 노회로서의 총회대표 선출도 불가능한 처지였다. 그들이 총회대표가 되려면 이남 노회 소속으로 이남 노회에서 선출되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남 보수파 인사들과 미국 선교사들은 “선자리 없는 이북 교회 목사, 장로들을 이남 총회의 정회원으로 등록하여” 당장에 총회원의 2/3 해당 수를 확보했다. 그들은 “은혜갚음”으로서라도 “한신대” 토벌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었다. 개혁파 총회원들은 논쟁의 불꽃을 튕겼고 그때 경기노회 총대의 하나였던 강원용은 당당 2시간에 걸친 사상변론의 웅변을 폈다. 장내는 숙연했다 한다. 그러나 총회에서는 기정방침대로 K의 목사직 박탈, 한신대 인정 취소, 한신대 졸업생의 교회위임 거부, 이미 목회 중인 한신 졸업 목사의 노회로서의 재심사 등등을 의결했다. 방청석에서는 “빌라도의 법정이다” 하고 함성을 올렸다. 장내가 소란하자 총회장은 “고토”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러나 “한신”은 죽지 않았다. 더 큰 생명으로 무덤에서 부활했다.

그 후, 나는 루터[2]나 된 것같이 분투했다. 언제 봄이 왔다 갔는지, 남산에 진달래가 언제 피었다가 졌는지, 어느새 해변가에 여름이 왔다 갔는지, 어느 때 눈이 쌓였다가 녹았는지도 모르고 새로 탄생한 개혁 교회 보육에 몰두, 10년을 논쟁과 순방으로 지냈다. 진짜 여념없는 “몰아의 골돌”이었다. 조그마한 한국교회의 개혁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재와 싸워 자유한국을 쟁취한다는 일은 몇십 년의 씨름일지도 모른다. “통일”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좌절이나 포기 따위를 염두에 얼신거리게 해서는 안된다. 총력전, 장기전을 최후 승리에까지 밀고 나가자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각주]
1. 김정준(金正俊, 1914~1981) - 해방 이후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초대 회장, 한국신학대학 학장 등을 역임한 목사, 신학자. 호는 만수(晩穗). 부산 출신.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를 거쳐, 캐나다의 임마누엘 신학교,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고,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9년 한국신학대학 구약학 교수, 1961년 한국신학대학 학장, 1963년에는 연세대학교 교목실장 겸 구약학 교수, 1964년에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장, 1970년에는 한국신학대학 학장을 다시 역임하였다. WCC 세계신학교육기금(TEF) 한국대표, 대한기독교서회 편집위원장과 이사,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교회 신학과 교육 발전,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는 ‘관에서 나온 사나이’라는 별명처럼 폐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고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으며, 1981년 2월 지병으로 소천했다.
2. 독일의 신학자(1483~1546). 1517년에 당시 교회의 부패에 대해 비판한 95개 조항의 논제를 발표하여 종교 개혁을 촉진시켰으며, 신약 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2026년 4월 2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9) 상한 갈대 - 難産(난산)

難産(난산)

☞ 이글은 캐나다에서 발행된 『범용기』 제4권에서는 한페이지가 삭제되어 있지만, 『장공전집』(제15권)에 있는 내용으로 추가했다.

1945년 8ㆍ15 해방은 우리나라에 새 역사 창조의 계기를 마련했다. 강대국들의 “도마” 위에 놓인 “고기덩어리”라는 실감도 없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만이라는 민족은 살아 있었다. 이 숱한 인간집단을 산채로 “도마”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우리나라가 강대국들의 도마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마저 모르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자유하는 민족 독립국가가 주어진 것으로만 믿고 열광했다.

군정 3년 지냈고 반토막이나마 독립국가라는 명패가 붙었다. 이제는 “우리나라”로서의 역사 창조 작업에 떳떳한 “명분”까지 주어진 셈이다.

나는 이 새 역사 속에서 누룩이 되고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사명이 한국 크리스챤에게 주어졌다고 믿었기에, 새로운 크리스챤 지도자 양성을 위한 새로운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방향으로 뛰다보니 그게 내게 맡겨진 임무로 되어 버렸다.

그 때까지의 한국 교회는 선교사 시대의 교회였고 신학교도 선교사 경영의 신학교였다. 그러나 지금부터의 교회는 한국 교회요, 신학교도 한국 신학교여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이차대전 말기 선교사들이 철거한 2년 후인 1940년 4월에 조선신학원이 서울에서 개강됐고, 그것이 1945년 8ㆍ15 해방과 함께 대학령에 의한 “한국신학대학”으로 발전했다. 이 신학교는 어떤 정권이나 금전에도 종속될 수 없는 오직 “임마누엘”의 “영광” 머무는 “장막”이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제부터의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임과 동시에 당당한 세계 교회의 일원이어야 하며 우리 나라는 어떤 경우에도 물질적 또는 정신적으로 “식민지” 노릇을 해서는 안된다고 맘먹었다.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문제로 철거했던 미국 선교사들이 6ㆍ25 부산피란과 이북군 후퇴를 계기로 무더기로 입국했다. 백만 단위의 이북 피란 크리스챤들이 돌아온 미국 선교사들을 구세주인양 안고 돌았다.

다소 서먹서먹해 하던 선교사들은 용기 백배, 선교사 시대의 연장에 몰두했다. 박형룡 박사를 둥굴려서 서울 남산 신궁터에 평양신학교를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여러 가지 이해관계의 일치로 해서 이북 피란 신자들과 미국 선교사단은 한덩어리가 됐다. 거기에 이남 교회의 보수 세력이 합세했다. 그 “수”로 본다면 우리와 그들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었다. 한 소년의 돌팔매가 중무장한 거인의 머리를 부수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요는 하느님이 어느 켠에 서 주시느냐가 남은 문제일 것이다. 다윗의 배후에 수많은 이스라엘 군대가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하느님이 다윗 켠이라는 증거를 볼 때까지는 비겁한 패잔 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범용기 제4권] (8) 상한 갈대 - 될 뻔하다 안 된 것도 “은혜”

될 뻔하다 안 된 것도 “은혜”

내가 바로 20대를 넘어선 때, 함북 경성도청 서기로 있는 내 이질(姨姪)[1]로부터 나진항 토지구매 교섭이 왔다. 어떤 “만철”(南滿鉄道会社)[2] 이사가 나진 개발 설계도를 비밀 입수한 것을 계기로 한 몫 보자는 욕심이 생겼던 모양이었다. 그는 함북도청에 근무하는 내 이질에게 나진 토지매수를 위임했고 내 이질은 웅기에 있는 내게 부탁했다. 나는 유능한 젊은 나진 친구를 내세워 몇 주일 안에 5, 6십 만평 해변가 억새밭[3]을 헐값에 샀다. 이동증명까지 깔끔하게 마치고 거간료[4]도 톡톡히 받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뭐냐? 팔자에도 없는 토지 거간이나 한 건 해주고 나딩굴어버리느냐? “바보같이!”

그래서 어느 날 그 거간 동료 청년과 상의했다. “나진 뒷산, 널평한 완경사 초장이 ‘유휴 국유지’로 버려져 있다는데 그걸 우리 두 사람 이름으로 임대차 계약을 해두며 어떠냐?” 했다. 수속은 그 청년이 맡아서 동장, 구장, 면장 등 관계관서에 벌찐 돌아다녔다. 그래서 계획대로 다 만들어 왔다. 후일에 “불하”[5]할 경우에는 임대계약자에게 우선권이 있을 뿐 아니라, 그 불하료도 싸게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이미 받은 합법적인 거간료를 밑천으로 급행열차처럼 서울 향해 달렸다. 때가 3ㆍ1운동 다음해[6]라, 그 조수가 나를 밀어냈다고도 하겠다.

나는 여름 방학에 돌아왔다. 그 때, 내게는 “돈” 같은 게 문제될 수 없을 정도로 “고매(?)”했다. “돈”은 “금”이 아니고 “똥”이다 하는 식이었다.

나는 귀향하여 경흥읍교회[7]를 예방했다. 위에 언급한 “나진” 청년은 그때 경흥 군청에 취직해 있었다. 그 땅 임대차 명의인을 자기 이름 단독으로 하는데 동의해 달라고 한다. 말하자면 Co-Siginer[8]로서의 내 이름을 빼고 자기 혼자 이름만으로 임대차 계약을 갱신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의 임대료도 자기가 단독으로 납입해왔고 그 액수도 적잖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만한 내 몫을 단번에 추불할 능력도 없었다. “옛따, 먹어라”하고 도장 찍었다. 그날 밤, 그는 푸짐한 술좌석을 마련하고 나를 초대했다. 나는 거절했다.

그 무렵 백두산 목재 관계로 일약 함북의 재벌 반열에 끼어든 청진의 김기덕[9]이 나진 땅을 매점하기 시작했다. 약삭빠른 이 나진 청년은 그 땅 임대차 권리를 상당한 고가(高価)로 그에게 넘겨줬다. 이 청년은 앉은 대로 “돈벼락”을 맞은 셈이다. 그 결과로는 주색잡기에 패가망신이란 패가 붙고 말았다.

오랜 후일에 나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일할 나이다. 잠시 “창꼴집”에 들렸다. 아버님께서 물으신다.

“너 뭣 하려느냐?”

“교육사업 하렵니다.”

“일본놈 교육 말이냐?”

“내 나름대로의 교육 말입니다.”

“너 그 때, 계약했다던 나진 땅은 어떻게 됐니?”

“그건 자진 포기했습니다.”

“일 하겠다면서 굴러온 돈을 쫓아버렸단 말이냐? 세상 물정을 알아야 일 할 수도 있을 게 아니냐?”

그리고서는 일체 말씀이 없으셨다.

허기야,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자마자 거액의 “애카운트”가 무조건 내 이름으로 입금된다! 아버님 말씀대로 “행운아”임에 틀림없겠다. 그러나 그 “행복”이 “축복”일지는 의문이다. 십상팔구는 나를 빠지게 할 “함정”이었을 것이다. “은혜”란 빈 마음에 돌입하는 하나님의 사랑일 것이다. 고생하며 일하는데 “은혜”가 있다.

[1981. 5. 4.]



[각주]
1. 이질(姨姪) - 아내의 자매의 아들딸. 자매간의 아들딸
2. 만철(滿鐵) -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South Manchuria Railways Co.)는 러일전쟁 후인 1906년 설립되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때까지 중국의 동북지역, 즉 만주에 존재했던 반관반민(半官半民)의 특수 일본회사이다. ‘만철(滿鐵)’ 혹은 ‘남만철도(南滿鐵道)’로도 불린다. 만철은 만주지역에서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근 40년 활동하는 가운데 많은 식민통치의 유산을 남겼다.
3. 억새밭 – 억새(볏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가 저절로 나서 우거진 땅
4. 거간료 – 거간비(居間費).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 사이에서 흥정을 붙인 데 대한 품삯
5. 불하(拂下) - 국가나 공공 단체의 재산을 민간에 팔아 넘김
6. 1920년
7. 경흥읍교회 - 1910년 함북 경흥에 설립된 장로교회. 김계언(金桂彦)이 이주하여 전도한 결과 흥명(興明)학교 교장 김태훈(金泰勳)과 교사 김문협(金文協) 등 17인이 믿게 되어 흥명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1915년 선교사 스코트(W. Scott ; 徐高道), 목사 이두섭(李斗燮)ㆍ이정화(李正華)가 와서 사경회를 개최하였고, 1918년 채필근 목사가 부임하면서 부흥하였다. 그후 김관식(金觀植; 1921년 부임), 김유직(金有稷; 1922년 부임), 정기헌(鄭耆憲; 1923년 부임) 목사 등이 시무하였고 22년에는 포은동(浦恩洞) 교회를 개척하였다. 1940년 현재 장로로 안기진(安基珍; 1924년 장립), 김천현(金薦鉉; 1929년 장립), 김기정(金基楨; 1933년 장립), 김하진(金河珍; 1933년 장립) 등이 시무하였다. 이후 미상.
8. cosinger – 연서인, 어음의 공동 서명인
9. 함경도 부령(富寧)의 한미한 농가에서 태어난 김기덕은 청진으로 이사하여 조선과 러시아, 만주를 잇는 국제무역에 뛰어들어 기반을 닦았다. 청진 동일상회 두취(대표이사)였던 그는 오지이지만 석탄과 목재와 해산물이 풍부한 북관의 미래를 낙관하고 상공업의 요지가 될 만한 부동산을 미리 사서 파는 수법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는 나진과 웅기를 주목해서 웅기에 300만평, 나진에 150만 평의 토지를 샀다. 나진항을 감싸는 천혜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대초도(大草島) 80만평과 소초도(小草島) 40만평도 몽땅 사들였다.

[범용기 제4권] (7) 상한 갈대 - 空(공)

空(공)

내 “호”를 장공(長空)이라고 자타 없이 부르는 것 때문에 그 뜻이 뭐냐고 묻는 분이 적지 않다. 사실, 내게 있어서 “호”란 것은 일종의 “펜네임”[1]이고 별 거창한 뜻이 바다 밑 신비처럼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나 자신이 생각해 낸 이름이 아니라, 내 선배친구 한 분이 나에 대한 “인상”의 부서진 조각들 틈에서 줏어낸 선물이었으니 나는 고맙게 받은 것뿐이다.

내가 20대, 이상과 공상이 뒤섞여, 무지개 타고 하늘에 오르는 동화의 세계가 생각의 테두리에 맴돌고 목가적인 낭만이 자연과 인간 사이에 감미로울 무렵에 그리스도가 찾아 오셨고 아씨시 성 프란체스코가 손잡아 주었다. 두 분 다 “인간사랑” 때문에 “철부지” 소년을 불러 주신 것이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물이었지만 정신 연령으로 따진다면 “소년” 이하였을 것이다.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는 부요한 상인의 아들로서 “기사”(Knight)로 출세할 작정이었고 아버지도 그걸 원했었다. 그러나 “기사”로 아씨시 성주를 위해 출전했다가 “상이군인”[2]이 되어 돌아온 “프랜시스”는 허무했다. 어느 이른 봄날 그는 아씨시 성 밑에서 고독을 되새기며 파랗게 싹트는 작은 풀을 만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자기 모습대로의 돈 욕심과 이름 욕심에 묶어 “마몬”의 제단에 바치려 든다. 나는 탈출해야 하겠다. 아주 벗은 몸만으로 도망쳐야 한다. 그래서 그는 집을 나왔다. “아비를 거역한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네게는 한 푼의 유산도 주지 않는다” 하고 아버지는 그를 재판소에 데리고 가서 금치산자[3]로 신고했다. 프랜시스는 거기서, 입은 옷들을 홀랑 벗어 팽개치고 “이제부터 내 아버지는 하느님만이다” 외치며 나왔다. 그는 거지 틈에 끼어 거지 옷을 걸치고 평생 “무소유”의 “방랑성자”로 지냈다. “아버지”의 사랑을 단념한 그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작은 형제들의 사랑, 새와 이리와 물고기와 벌레들의 사랑 속에 살았다. “형제 태양이여”, “자매인 달이여!” 하고 하늘을 우러러 사랑의 찬가를 영탄한다.

“무소유”의 빈 마음(空) 속에 몰려드는 사랑의 회리바람에 쌓여 엘리야처럼 하늘에 올랐다. 그의 무소유는 사랑을 위한 공간이었다.

내가 “장공”이란 “호”를 쓰게 되자, 내 형님은 “네가 중이냐? 무슨 호가 그래!” 하고 언짢아했다. 불교에서는 “공즉실”, “실즉공”이어서 空(공)에 実(실)이 있고 実(실)에 空(공)이 있다니까 불교적이랄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인이 본다면 구만리 장공이란 펼쳐진 하늘이기도 할 것이다. 이태백이 “푸른 하늘 한 장 종이에 내 뱃속 시를 적으련다”(靑天一張紙, 写我腹中詩) 했다는 것도 “장공”과 통한다 할까. 그래서 아마 “만우” 형이 나에게 “장공”이란 “호”를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후일에 나는 서폭에 이런 글을 써 벽에 걸어 둔 일이 있다. “万里長空(만리장공)에 片雲(편운)이 浮動(부동)터니 晩雨一過後(만우일과후)에 秋陽(추양)이 可愛(哀, 가애)로다.” 백영렵[4] 목사가 보구서 재미있는 교우록이라고 했다. “片雲(편운)”은 채필근[5], “晩雨”(만우)는 송창근[6], “秋陽”(추양)은 한경직[7]이다. 모두 같은 시절의 선후배다. 그들 삶의 모습이 요약돼 비친다. 그러나 더 쓰지 않으련다.



[각주]
1. 펜네임(pen name) - 글을 쓸 때, 본명 대신 사용하는 이름
2. 상이군인(傷痍軍人) - 전투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몸에 상처를 입은 군인
3. 금치산자(禁治産者) - 자기 행위의 결과를 판단할 능력이 없어서 일정한 자의 청구에 의해 가정 법원으로부터 자기 재산을 관리하고, 처분할 수 없도록 법률적으로 선고를 받은 자.
4. 백영엽(白永燁, 1892-1973) - 평북 의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만주 금릉대학 신학부졸업(1921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지원하였다. 1922년 입국 도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만주 봉천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평양으로 돌아와 수양동우회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함.
5. 채필근(蔡弼近, 1885-1973) - 호는 片雲(편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했다. 숭실전문학교와 조선신학교 교수를 역임한 교육자. 해방 후 친일 행위로 투옥되기도 하였음.
6. 송창근(宋昌根, 1898~1951경) - 1898년 함경북도 경흥 출생. 호는 만우(晩雨). 경흥의 북일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간도로 건너가 명동중학교와 광성중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동휘의 권유로 1916년 피어선신학교에 입학, 1919년 졸업했다. 이후 3ㆍ1운동에 관련되어 함태영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그의 후임으로 남대문교회의 조사가 되었다. 이때 독립운동 관련 창가를 유통시킨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후 1922년 일본 도요(東洋)대학 문화학과에 입학, 1923년 아오야마(靑山)대학 신학부에 편입, 1926년 졸업했다. 같은해 9월 미국에 유학,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7년 프린스턴신학교로 편입, 1928년 웨스턴신학교로 편입하여 졸업하고, 1930년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31년 아일리프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1년 흥사단에 가입했으나, 이듬해인 1932년 귀국해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36년 산정현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성빈학사를 설립, 운영했다. 1937년 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38년 가석방된 후 사상전향을 했다고 한다. 1938년 조선신학원설립위원회를 조직하다 김천으로 내려가 황금정교회를 담임했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 교장이 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가, 1951년 7월경 대동군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7. 한경직(韓景職, 1902~2000) - 장로교 목사, 교육가, 육영사업가. 1902년 12월 29일(음) 평남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한도풍의 장남으로 출생. 1912년 향리의 자작교회에서 설립한 진광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과 기독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는데, 어린시절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는 6촌간이며 초기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생이었던 한병직 목사, 진광학교 교사인 홍기두 선생(평양 대성학교 출신), 교회 전도사 우용진 등이 있었다. 1914년 진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김찬빈(1899-1974)과 결혼하였다. 1917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하면서 이승훈, 조만식 등에게서 민족주의적 교육을 받았으며 1922년 숭실대학에 진학하여 자연과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숭실대학 재학중 블레어(W. Blair, 邦偉良) 선교사의 비서로 일하면서 공부하였는데 1924년 여름 블레어와 함께 황해도 구미포 해변가에 갔다가 목회자로 헌신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블레어와 윤치호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캔자스주에 있는 엠포리아대학에서 1년간 인문과학을 수학하였다. 1926년 뉴저지주의 프린스턴신학교로 진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았는데 그가 프린스턴에 갔을 때 박형룡, 최윤관, 백낙준이 졸업하였고 그는 최윤관, 김성락, 보켈(H. Voelkel), 윤하영, 이규옹, 김재준, 송창근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는 프린스턴 재학중 신학노선의 차이로 신학교가 분열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1929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예일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계속하려 했으나 폐결핵이 발병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뉴멕시코주의 알버커크 요양소에서 2년간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그후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다시 6개월간 요양한 후 1932년 귀국했다. 귀국직후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성경 교사로 부임했으며 숭실대학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하였고 이듬해 의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5년 건평 360평 2층 벽돌건물로 교회당을 건축하였으며 1939년에는 백지엽, 김응락 등의 도움을 얻어 「보린원」을 개설하여 고아들을 수용하였고 후에는 양로원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인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미국에 유학하였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교회에서 추방당하였으며 이후 해방되기가지 보린원 원장으로 고아와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았다. 해방이 되자 그는 윤하영, 이유필 등과 함께 평북지역 치안책임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1945년 9월에는 윤하영과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다. 월남직후 미군정청 통역으로 있으면서 김재준, 송창근 등이 하는 조선신학교에 나가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서울 영락동에 있던 천리교 경성분소 건물을 접수하여 1945년 12월 2일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서울 영락교회가 되었다(1946년 11월에 교회명칭을 바꾸었다).

[범용기 제4권] (6) 서장 - 원형(Prototype)

원형(Prototype)

(1) 인간의 원형

“인간이 타락했다”, “크리스챤이 타락했다” 등등의 말을 듣는다. 타락했다는 것은 타락이 이전의 “원형”을 전제로 하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 “원형”이란 것은 이미 타락한 것들 중에서 비교적 나은 타입의 사람을 골라잡는다는 과정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중국에서 요[1], 순[2], 우[3], 탕[4] 등 과거의 성군(聖君)들을 이상화하여 그 과거에 황금 옷을 입히는 일이라든지, 서양 사람들이 미래에 유토피아[5]를 그리면서 그 꿈의 화려한 옷자락 속에 감싸여 감미로운 영탄[6]에 젖는다든지 하는 방향에서 발굴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정도의 차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타락태(態)는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원형”은 진짜 원초, 즉 타락 이전에서 찾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놀랍게도 우리는 그것을 창세기 1장에서 발견한다. 하느님이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감에 사람을 만드셨다. “자 이제 우리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를 천지만물의 관리자로 삼자” 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이다. 하느님 자신은 아니지만 그의 “이미지”다. 이것이 인간의 “원형”이다. 하느님을 닮은 존재다. 하느님은 범죄자가 아니다. 인간도 “죄인”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죽지 않으신다. 인간도 죽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인간도 영의 질서에 속해 있다. 하느님은 계시의 필요에 따라 몸으로 나타나신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 공간의 제약에 예속된 몸이 아니다. 그것은 영의 몸이다. 인간의 몸도 그 원형에 있어서 “영의 몸”이다. 역사 안에서 살다가도 어느 기간 지나면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늘”의 질서에 승화하는 몸이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되기 위한 원초적인 조건인 “자유”를 자기의 육적 동물적인 “자연” 질서에 바쳤다. 그래서 그는 영의 질서에서 자연 질서의 “신진대사” 법칙에로 떨어졌다. 이것을 성서에서 “타락”(Fall)이라 했다.

원형에서 추락됐다는 말이다.

[1980. 4. 23.]

(2) 크리스챤의 원형

크리스챤이 타락했다고들 한다. 그것 역시 크리스챤으로서의 “원형”에서 미끄러져 추락했다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 크리스챤이 “크리스챤격”을 회복한다는 것은 그 원형을 되찾고 터전삼아 삶을 재건해 가는 것을 말함일 것이다.

그 원형이 어떤 것이냐? 원래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은 초대 교회(사도 시대) 때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붙은 별명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때 거기 교인들이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디서 어느 누구에게나 만날 때 인사말부터 그리스도의 평안을 묻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했기 때문에 “저것들은 그리스도쟁이다” 하고 놀려댔던 것이 신자들의 자랑스런 이름으로 정립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예수가 메시아 즉 그리스도”란 것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즉 “크리스챤”이다. 따라서 크리스챤이란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이 된다. 그들의 제일차 충성 대상은 그리스도다. 우리의 삶이란 엄숙한 결단과 선택의 연속인데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크리스챤의 결단이어야 한단 말이다. 크리스챤이 세상에서 대접받을 때에는 결단 이전에 벌써 이 “별명”을 자랑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챤이 푸대접 받고 숨잖으면 생존마저 약속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문제가 아주 달라진다. 이때에는 목숨 걸고 결단하며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크리스챤의 “탄생고”라 하겠다. 수에 있어서 “다수”를 기대할 수도 물론 없다. 영원한 “마이너리티”가 그들의 운명이며 동시에 사명이다. 가령 우리의 현존사회 구조 속에서 획득욕, 지배욕, 명예욕 등등을 비웃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의 옳으심을 증언하기 위해서 가정의 보금자리 대신에 감옥을 택하고 자유여행 대신에 “연행”을 택하고 “고관”[7] 대신에 “죄수”됨을 택한다면 그것은 초대 로마교인들이 “카타콤”[8]을 택한 것보다 더 어려운 선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형(形)인 경우, 그 “원형”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심판할 것이다.

[1980. 5.]

(3) KOREA의 원형

일전 어떤 모임에서 Korea를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대하여 논의가 구구하였다. “민족명”에 있어서도 일치를 보기가 어려웠다. Korea를 한국, 조선, 고려 등등으로 불러봐도 각기 제 나름대로의 표딱지가 붙어서 개운치가 않다.

민족 이름으로서도 한국민족, 조선민족, 고려민족, 백의민족, 단군겨레, 배달민족 등등이 난립되어 얼른 골라잡기 어려웠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지만 외세에 붙어 심부름 한 기록이 너무 역력하기 때문에 께름한[9] 뒷맛이 가시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는 그보다 훨씬 깔끔한 통일왕국이었기에 우리는 통일된 나라의 국호를 “고려”로 해도 좋다는 생각들도 있었다. Korea란 말도 “고려”란 데서 나온 것이기에 Korea를 고려로 번역하면 자연스러운 “뉘앙스”기도 하다. 그러나 Korea의 “원형”으로 좌정하기에는 너무 조무래기 판도다. 함경북도에도 손이 안 미쳤으니 말이다. 우리는 Greater Korea를 판도의 원형으로 금그려야 한다. 그래서 고구려 전성시대의 판도를 원형으로 제시하는 분도 있었다. 그것은 한반도와 만주와 연해주를 포함하는 우리 국토였기 때문이다. 민족 이름으로서는 “배달민족”이 제일 무난하다는 결론이었다.

어쨌든 우리가 손바닥만한 남한 또는 북한에 갇혀서 조무래기 민족으로 오그러질 수는 없다. 실현성이야 있던 없던, Greater Korea를 우리 마음의 판도 안에 간직하고 그것을 염원한다는 것은 우리의 외향성을 자래우는[10] 데 영양소가 될 것이다.

뿐만아니라, 우리는 북미주를 비롯하여 중남미, 중동, 동남아, 시베리아, 아프리카, 아라비아, 남양군도 – 세계 어디에나 못갈 데 없고, 못 살 데 없다는 뱃장으로 세계사 창조에 동참하는 세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계적이고 그 정신이 세계 역사 조성의 “혼”이 되고 활력소가 되고 빛, 누룩, 소금이 됐다는 사실을 건등으로 봐 넘기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Korea는 Korea의 타락형이다.

[1980. 5. 5.]



[각주]
1. 요(堯) - BC 24세기경에 활동한 중국 신화에 나오는 전설적인 제왕. 정식 이름은 당제요(唐帝堯). 고대 황금기를 다스렸으며, 공자에 의해 덕·정의(正義) 및 이타적인 희생의 영원한 본보기로 찬양되었다. 그와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람으로 순(舜)이 있는데, 그는 요의 후계자로서 요의 두 딸과 결혼했다.
2. 순(舜) - 중국 신화에 나오는 전설상의 성왕. 정식 이름은 우제순(虞帝舜). BC 23세기경에 고대 황금시대의 제왕으로서, 공자는 그를 완전함과 찬연히 빛나는 덕의 상징으로 칭송했다. 요는 자기의 아들을 제쳐놓고 순을 새로운 통치자로 선택했다. 또한 그에게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주어 결혼시켰다.
3. 우(禹) -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인 하나라의 시조라고 전해지는 전설상의 인물. 홍수를 다스려 나라를 구했다고 한다. 그의 탄생에 관한 많은 전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순 임금이 곤에게 홍수를 다스리게 하자, 곤은 둑을 쌓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식양이라는 요술 흙을 한 줌 훔쳤는데 이에 노한 상제가 그를 처형했다. 3년 후에 그동안 썩지 않았던 그의 몸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우라는 것이다. 우는 용의 도움으로 몇 년 간 열심히 일한 끝에 바다로 물길을 내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공으로 순에게 왕위를 물려받아 국호를 ‘하’라 정하고, 중국 전역을 9주로 나누어 공부를 정했다.
4. 탕(湯) - BC 18세기경에 활동한 중국의 황제. 성탕ㆍ태을이라고도 한다.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상, 즉 은(BC 18~12세기)나라를 세웠다. 역사상 실제 인물인 탕은 신분이 높은 가문의 후예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신화적 인물인 황제의 후예라고 한다.
5. 유토피아(Utopia) - 이상으로 그리는 가장 완벽하고 평화로운 사회
6. 영탄(詠嘆) - 마음 깊이 감동하여 탄복함
7. 고관(高官) - 직위가 높은 관리
8. 카타콤(catacomb) - 초기 그리스도교 교도의 비밀 지하 공동묘지. 교인들의 매장 장소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피해 예배를 보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9. 께름하다 – 무언가 석연치 않아 언짢은 데가 있다.
10. 북한에서는 ‘기르다’나 ‘키우다’에 못지않게 ‘자래우다’를 문화어로 널리 사용한다. ‘자래우다’는 ‘자라다’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자래우다’는 ‘자라게 하다’를 말한다.

2026년 4월 1일 수요일

[십자군 제1권 제3호] 정사와 기원 : 그가 다시 살으섯나니 - 장공

靜思[정사]와 祈願[기원] 

長空[장공]

  •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31.
  •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1권, 114.
  • 『낙수』, 1940년 - [바로가기]

『그가 다시 살으섯나니』[1]

『어찌 산 者[자]를 죽은 者[자] 가운데서 찾느냐?』(누가 24:5) 골고다 骸骨山[해골산]에 올으신 主[주]님은 骸骨[해골]에 삼킨바 되려함이 아니라 骸骨[해골]을 征服[정복]하려 하심이였다. 시내山[산]의 聖[성] 가다린 寺院[사원]을 보고 온 사람의 글을 읽건대 그 寺院[사원]의 地下層[지하층]에는 數百年來[수백년래] 거긔서[2] 죽은 修道僧[수도승]들의 骸骨[해골]을 貯藏[저장]해 두었는데 頭骨[두골] 따루 다리뼈 따루 팔뼈 따루 마치 장잭이[3] 묵그듯이[4] 여긔[5] 한 무덕이 저기 한 무덕이 가려 놓았다 한다. 진실로 骸骨山[해골산]이다. 近年[근년]에 와서는 그래도 監督[감독]의 頭骨[두골]만 따루 무더놓았다[6] 한다. 로마 天主敎[천주교]에서는 너무나 十字架上[십자가상]의 예수를 凝視[응시]하는 나마지에 復活[부활]하신 榮光[영광]의 主[주]를 보지 못하는 弊[폐]가 많다. 骸骨[해골]아, 네 이김이 어듸 인느냐[7]. 죽엄아 네 存在[존재]가 어듸 있느냐!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것을 닙는[8] 靈[영]의 勝利[승리]를 좀더 徹底[철저]하게 깨닫자! 이 믿음이 確實[확실]치 못한 者[자]에게 殉敎者的[순교자적] 熱情[열정]과 覺悟[각오]를 求[구]하는 것은 마른나무에서 꽃피기를[9] 바라는 세음이다. 主[주]여 우리로 하여곰[10] 참말 生命[생명]에 부다치고[11] 主[주]의 復活[부활]을 體驗[체험]하게 합소서.



[각주]
1. 『낙수』에는 ‘그가 다시 살으셨나니’
2. 『낙수』에는 ‘거기서’
3. 『낙수』에는 ‘장작을’
4. 『낙수』에는 ‘묶으듯이’
5. 『낙수』에는 ‘여기’
6. 『낙수』에는 ‘무뎌놓았다’
7. 『낙수』에는 ‘있느냐’
8. 『낙수』에는 ‘입은’
9. 『낙수』에는 ‘꽃이 피기를’
10. 『낙수』에는 ‘하여금’
11. 『낙수』에는 ‘부듸치고’

[십자군 제1권 제3호] 정사와 기원 : 뷘들에 때저므니 - 장공

靜思[정사]와 祈願[기원] 

長空[장공]

  •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30.
  •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1권, 113.
  • 『낙수』, 1940년 - [바로가기]

『뷘들에 때저므니』[1]

『이곳은 뷘들이오 때도 저물었사오니 무리들을 보내여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 말슴하시기를 갈 것 없다. 너이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4-21) 主[주]여 다른 나라에 比[비]하면 우리는 曠野[광야]에 모인 烏合之衆[오합지중]이외다. 이곳은 진실로 뷘들이외다. 그러고 또 때는 이미 末世[말세]를 기대리는 黃昏[황혼]이외다.[2] 그러면 어찌하오리까? 우리의 굶은 창자를 움켜쥐고 各其[각기] 主[주]님을 떠나 저의 집, 저의 마을로 돌아가오리까? 이제 우리는 배곱흐다고 主[주]님을 떠나 世俗[세속]의 마을로 돌아가리까? 먹고서 다시 主[주]님을 찾아오리까? 옳습니다. 돈 벌어 가지고 主[주]님께 다시 오면 그만이 아닙니까? 그러나 主[주]여 당신은 이것을 願[원]하지 안습니다.[3] 主[주]께서는 우리를 배곱흔채 그대로 보내시는 主[주]님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主[주]님은 道[도] 自身[자신]이시오니 「道不可須曳離[도불가수예리]」라. 우리가 어찌 暫時[잠시]인들 主[주]를 떠나오리까 主[주]께서는 永生[영생]이시오니 우리가 주를 떠나 어듸로[4] 가오리까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物質生活[물질생활]에 있어서도 主[주]를 믿고 나가게 합소서. 그리고 우리의 적은 所有[소유]라도 主[주]님께 바치며[5] 主[주]께서 祝福[축복]하사 奇蹟[기적]을 보여 주실 것이오니 主[주]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있는 것을 主[주]께 바치게 하옵시며 主[주]의 祝福[축복]이 우리를 通[통]하야 大衆[대중]에 미치게 하옵소서. 아-멘.



[각주]
1. 1940년 발행한 『낙수』의 목차는 “뷘들에 해져무니”로 표기되어 있지만 해당 글의 제목은 “뷘들에 때저므니”로 되어 있다.
2. 『낙수』에는 “그리고 또 때는 黃昏[황혼]이외다”로 표기되었다.
3. 『낙수』에는 ‘않습니다’
4. 『낙수』에는 ‘어디로’
5. 『낙수』에는 ‘바치면’

[범용기 제4권] (10) 상한 갈대 - 몰두

몰두 1956년에던가 미국 선교사단 총무인 아담스가 나와 김정준 [1] 을 디너에 초청했다. 식후에 그는 나와 단독으로 말하고 싶다했다. “당신만 그만두면 한국교회는 평온무사할 텐데 사면하실 수 없을까요?” “한신 이사회에 말해 보시구려! 이사회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