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9-10, 47-48] 경계를 넘나드는 교회 – 1996년 6월 11일, 김상근 목사

9월 19, 2026

경계를 넘나드는 교회

사도행전 10장 9-16, 47-48절 / 향린교회


[회상 노트]

한국 교회의 노인화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노인들이 교회를 완전히 점령한 상태다. 엄격히 말하면 노인 문화와 노인 정서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문화적 획일주의가 교회의 왕이 되고 있다. 젊은이들이 교회에 들어올 수 없다. 이리되면 교회의 역사관이나 사회의식은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머지않아 한국 교회는 보수주의 집단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 회상 노트를 쓰고 있는 지금 어느새 그리되었다. 꼭 10년이 지났을 뿐인데 한국 개신교는 보수의 둥지가 되고 말았다.

유대인들의 그 보수의 경계를 성령은 무너뜨리셨다. 당시의 제자들은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그리했다. 오늘, 우리는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다. 도무지 경계를 넘나들지 않으려는 옹고집이 마치 정통 신앙인 것으로 착각하는 우리 때문이다.

경계를 넘나들자는 것은 어디 문화뿐일까? 나는 그즈음, 교회가 노쇠하고 있다는 사실을 꽤나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문화적 폐쇄성이 큰 이유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사실은 삶의 현실에서 사랑도, 정의도 세우려하지 않고, 스스로 친 울타리 안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 더 문제라고 진단했다. 아니, 교회당에 모일 때만 유효한 신앙, 교회당을 나가는 순간 무위한 것이 되고마는 신앙이 더 문제라고 생각했다. “생활신앙”을 일구어내야 한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우리 교회가 소속해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53년 6월 10일에 새로운 교단으로 새 출발을 했다. 그 날을 기념하여 매년 6월 둘째 주일을 ‘총회 선교주일’로 지키고 있다.

사실 우리 평신도에게는 교파 의식이 없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래야 한다. 다른 교파보다 우리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교파 의식은 금물이다. 그것은 분열주의요 일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시느냐 하는 것을 확인하고, 그 일에 견고하게 서고자 하는 점에서 ‘우리’를 강조한다면 그것은 창조적인 교파 의식일 것이다. 분열주의적 교파 의식은 배척할 일이지만 창조적 교파 의식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결과적 자평이지만, 우리 기장 교회가 한국 교회 내에서 이렇게 따로 있음으로 해서 한국 교회와 한국 역사에 커다란 공헌을 한 것 아닌가? 1960-70년대의 인권 문제, 1970-80년대의 민주화 문제, 1980-90년대의 통일 문제에서 기장은 전위적 역할을 잘 감당했다.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 회복이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는 관건이라는 신학적 명제를 일반화하는 데도 그 향도적 역할을 훌륭히 해 왔다. 향린교회도 마찬가지다.

아직은 그 어떤 과제도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고 있지 못하다. 올해 우리 총회의 주제인 “막힌 담을 헐고 화해하는 공동체”는 여전히 바로 이 연장선 위에 있는 주제다. ‘막힌 담’은 우리 가운데 얼마든지, 여기 저기에 있다. 남과 북, 동과 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남자와 여자, 농어촌과 도시 등 이런 것들 사이에 있는 막힌 담에 대해서는 우리가 오래도록 들어 왔다. 그리고 기도해 왔다. 특히 향린교회의 강단에 이런 것들과 관련하여 더 보탤 것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나는 오늘 신세대와 구세대, 세대 간에 막힌 담을 헐자는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신세대’는 누구인가? 어떤 것이 연상되는가? 배꼽을 내놓고 거리를 활보한다. 브리지-머리카락을 탈색한다. 칼라코팅-머리카락에 빨강, 파랑 물을 들인다. 멀쩡한 바지를 찢어 속살을 살짝 내보인다. 청바지는 허리가 아닌 엉덩이에 걸쳐 입는다.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인데 어느새 귀를 뚫고 귀고리를 한다. 노래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몸짓으로 괴성을 지르며 불러댄다. 저게 무슨 노랜가 싶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저런 놈들에게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리의 장래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미친 놈들!’ 이것이 저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아니겠는가 “목욕탕집 남자들”이란 TV드라마에서 그 집 막내딸 수경이와 약혼남인 민기가 노는 꼴을 보라. 감당할 수 없다. 저런 며느리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남의 일 같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차별한다. 우리 공동체에 용납하지 않는다. 브리지까지는 용납이 될지 모르겠으나 코팅한 신세대는 교회에 올 수가 없다. 우리가 강력하게 사절하기 때문이다. 배꼽티 입은 신세대가 교회에 들어서면 안내하는 장로님, 집사님, 어떻게 하시겠나? 막지는 못할지 모르겠지만 수군수군하고 뒤로 야단법석이 날 것이다. 만약 그가 장로님 댁 딸이라면, 그 장로님은 큰 망신을 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막고 있고, 그들은 교회 공동체에 도대체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20, 3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단일 문화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문화 시대다. 10대의 문화, 20대의 문화, 30대의 문화가 따로 있다. 그 문화가 혼재해 있는 시대다. 그런데 교회의 문화는 50, 60대가 독점해 버렸다. 50, 60대 문화가 교회 문화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2세들이 줄어들고 있다. 어느 교회를 들여다보아도 청년이 적다. 중고등 학생이 되면 교회를 떠난다. 어린이 교회학교는 문을 닫지 못해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가 수두룩하다. 이것은 교회의 위기다. 그 물리적 수명이 다해 가고 있는 현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아무리 훌륭한 고백과 행동을 가졌다 해도, 그것을 확산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이어갈 후손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손이 끊어진 집안과 같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장 근본적 이유 중의 하나는 50, 60대의 문화제국주의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를 독점하고, 스스로 손(孫)을 끊는 50, 60대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처럼 옷 입고, 머리를 우리처럼 단장하고, 말투도 우리와 같은 것이 50, 60대 문화다. 이 문화는 사실 백인 문화, 백색 문화다. 백색 문화 제국주의가 교회의 손(孫)을 끊어 놓고 있는 것이다. 다른 문화의 소유자는 들어올 수가 없다.

1부 예배 후에 안 일이지만, 우리 교회 박 장로님 아들이 신세대 가수란다. 지난 장로 임직식 때 그가 노래를 불렀던 모양인데 위장을 했다. 제법 수트를 입고 넥타이를 맸다. 위장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여기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할까? 

본문 말씀은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을 거부함으로 생긴 ‘막힌 담’을 하나님께서 헐어내시고 화해를 이루신 사건 기록이다.

처음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그 토대 위에 예수 신앙을 일으켜 가고 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대인들의 관습과 문화가 처음 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비유대인들 중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있게 된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비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과 생활 관습이 같지 않다. 구약 종교, 유대교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할례도 받지 않았다. 음식도 가려 먹지 않는다. 유대인의 문화와는 영 다른 문화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펄펄 뛴다. 그들에게 예수를 전한 바울을 죽여버리려고까지 했다(행 9:29).

베드로도 물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한 환상을 본다. 하늘에서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온다. 그 안에는 유대인들이 수천년 동안 부정하다고 여겨 왔던 짐승들이 있었다. 어디선가 음성이 들린다. 그것들을 잡아먹으라 한다. 베드로는 거부한다.

“절대로 안 됩니다, 주님. 저는 일찍이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입에 대어 본 적이 없습니다”(행 10:14).

또 먹으라 한다. 역시 거부한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행 10:15).

그러더니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 하늘로 들려 올라간 것은 큰 사건이다. 부정한 것이 거룩의 표상인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비유대인 둘이 너를 찾아와 어디를 가자고 하면 머뭇거리지 말고 따라가라’고 한다.

이 환상 직후에 베드로는 고넬료라는 비유대인으로부터 초청을 받는다. 베드로는 다른 유대인 몇 명과 함께 고넬료의 집에 간다. 그러나 그는 내심 갈등했던 것 같다. 우리 선민이 이방인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러던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보고 또 다른 것을 깨닫는다. 아, 그렇구나! 우리는 외모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그래서 누구는 용납하고, 또 누구는 멀리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외모를 가리지 않으신다’는 깨달음을 갖는다.

베드로는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고, 예수 신앙으로 살기를 권한다. 그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한다. 할례도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한다. 이것을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보게 된다.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그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행 10:47)

베드로는 비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이로써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비유대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막힌 담이 헐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수는 온 인류의 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우리 50, 60대는 ‘쉰 세대’다. ‘쉰 세대’가 ‘신세대’를 막고 있는 것이다. 나이와 관계없이 쉰 세대와 같은 정서, 문화를 가졌다면 모조리 쉰세대다. 물론 옷 입는 데도 가치관이 작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 하여 신세대를 죄인시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죄이기보다 문화다. 그것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관습의 문제다. 이것으로 스스로 손(孫)을 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쉰세대의 죄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문화를 죄라 하시지 않는다.

기장 교회, 기장 교회 중에서도 기장 교회인 향린교회는 신세대에게 세례를 주라. 문을 열라.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듯이 향린교회, 기장 교회는 신세대에게 가야 한다. 이것은 성령의 지시다. 이것이 세대간의 화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세대를 이어 하나님의 구원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손을 잇자.

[창세기 42:1-5, 24-25] 배고픔의 세계에 나눔을 – 1997년 4월 13일, 김상근 목사

9월 19, 2026

배고픔의 세계에 나눔을

창세기 42장 1-5, 24-25절 / 수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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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오늘 아침 식사를 잘 하고 나왔다. 우리 옆에 끼니를 거르는 식구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온 피조세계가 우주적 유기체로 회복되는 구원의 완성도 첫걸음으로 도달된다. 첫걸음은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는 것이다. 단순하고 명확하다. 오늘 우리는 이 단순하고 명확한 행동을 요청받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 말씀이 과연 그런가?


[설교 전문]


오늘은 저 이스라엘의 선조였던 야곱 가문의 이야기를 드리려고 한다. 성서의 이 대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던 뜻을 풀어 설명하는 대목이다. 세상 모든 민족에게 덕과 복을 베푸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뜻에 충실해야 할 책무를 이스라엘 민족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요셉을 형제들이 질투하여 이집트로 가는 대상들에게 팔아 넘겼다. 요셉은 형제들에 대한 원한을 가슴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에서 크게 성공하여 총리대신이 되었다. 정치를 잘하여 이집트에 태평성세를 가져왔다.

때마침 온 세계에 극심한 흉년이 몰아쳐 왔다. 온 세계가 기근에 허덕이고 있었지만 이집트만큼은 요셉의 선정의 덕으로 먹거리가 풍부했다. 야곱 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에서는 더 이상 식량을 구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집트에는 식량이 풍부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 즉 요셉의 형제들은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갔다.

급기야 형제들은 요셉 앞에 서게 되었고 요셉은 그들을 쉽게 알아보았으나 형제들은 그가 자기들이 죽이려다가 팔아넘긴 요셉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요셉은 그들 중에 자기와 어머니가 같은 형제인 베냐민이 없는 것을 보고 혹 자기 동생에게도 형제들이 자기에게 했던 것처럼 못된 짓을 하지나 않았나 와락 의심이 들었다. 요셉은 그들을 간첩으로 몰았다. 투옥하고 심문했다. 동생 베냐민은 가나안의 집에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진술을 받았으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요셉은 자기와 어머니가 같은 동생 베냐민에게도 못할 짓을 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짙어지게 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더더구나 형제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온 식구가 굶고 있다는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형들이 잘못했다 하여 그 식구들 모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옳은가? 결국, 우선 식량을 주고 베냐민이 살아 있는지는 후에 확인하기로 한다. 요셉은 식량을 충분하게 주고, 대금으로 받았던 돈도 식량 자루에 몰래 나누어 넣어 주었다. 그리고 가는 동안에 먹을거리도 주었다.

이야기는 더 계속되고 사건은 반복된다. 하여간 여기서 우리는 귀중한 하늘의 계시를 받게 된다. 요셉과 형들과의 관계는 원수라 할 만큼 나쁜 관계다. 요셉은 형들을 업수이 여겼고, 형들은 요셉을 질투했다. 급기야 죽여 없애려다가 멀리 이집트로 팔아 넘겨 버렸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그때마다 형들에 대한 증오가 새로웠다. 그러나 그 형들과 온 가족들이 굶는다는 사실을 안 이상 요셉은 식량을 이유 없이 주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것으로 수십 년 쌓여 온 야곱 가문의 내홍은 급기야 평정이 되었다.

원수 관계지만 그러나 형제인 형들에게 곡식을 선뜻 내주는 것, 그것이 선민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계시다. 식량은 나누어 먹는 공유 자원이다. 공유란 함께 가진다는 뜻 아닌가? 땅, 공기, 물, 햇빛, 식량은 공유 자원이다. 이것들은 사유할 수 없고, 사유해서도 안 된다. 개인의 관계에서도 이 원리는 유효하다. 갈등과 인간으로서의 윤리를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는 마땅히 모든 것을 받을 만한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햇빛, 물, 공기, 식량을 주신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면 신앙인이라 할 수 없다. 결코 받을만하지 못함에도 우리는 받고 있고, 하나님은 주시고 계시다.

남과 북은 지난 50년 동안 원수로 지내 왔다. 남은 북을 용납할 수가 없다. 북은 남을 용납하지 않는다. 전쟁을 했고 서로 죽였다. 하지만 북의 사정이 너무나 어렵다. 신문이나 방송을 자세히 보면 북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보도를 발견할 것이다.

음식은 나누어야 한다. 천하의 살인마에게도 밥을 주지 않는 법은 없다. 방금 전까지 서로 총을 쏘던 적을 포로로 잡았더라도 그에게 밥을 주지 않는 전쟁은 없는 것이다.

나는 35년 전에 겪은 충격적인 사건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 당시 내가 나가던 교회에 신학을 전공하던 청년들이 꽤 있었다. 4학년이나 졸업한 신학도에게 주일 밤 설교를 하게 해 달라고 청하여 가까스로 허락을 얻어냈다. 어느 주일 밤 예배였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신학도가 설교를 맡았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설교를 시작했다. “야, 이 개새끼들아, 너희들이 장로야? 너희들이 교인이야? 야, 이 개새끼들아!”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고는 강단에서 내려와 그냥 교회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눈 깜작할 순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다음날 그를 찾아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추궁했다. 사연이 있었다. 6ㆍ25 때 그 교회 교인들 상당수가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했고, 장로들 몇 가정은 거기서 같은 집에 각방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자기 집이 제일 가난했고, 너무 자주 굶었는데 같은 장로들은 먹을 것을 가지고도 나누지 않더라는 것이다. 끝내 자기 누이동생은 굶어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먹을 것을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날엔가 자기에게 설교할 날이 올 것이고 그러면 가슴에 품었던 욕을 쏟아 뱉으리라는 생각으로 그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내가 하려 했던 말을 했으니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다.

남과 북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민간 단체들이 나서고 있다. 오늘 주보에 작은 전단 한 장씩을 넣었다. 내가 상임 의장을 맡고 있는 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와 민주노총, 민주변호사회, 민족예술인 총연합, 민주교수협의회 등 종교, 재야 단체가 ‘겨레 사랑-북한동포돕기 범국민운동’을 결성했다. 한 달 기한으로 20억 원을 모아서 식량을 사 보낼 계획이다. 이 운동에 여러분께서 동참해 주시기를 바란다.

나도 그러고 있지만 특히 종교인들은 금요일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금식하고 아낀 돈을 2,500원으로 쳐서 한 달 치 10,000원을 내고 있다. 물론 그 이상을 내면 더 좋다. 10,000원이면 북한 동포는 15일을 먹을 수 있다. 6-10월까지 150일이 문제라 하지만 쌀 보리, 옥수수를 50:25:25로 섞으면 12,010원, 30:40:30으로 섞으면 9,738원이면 해결된다. 우리가 한 사람씩 책임질 수 있다. 북한 동포를 살리는 일은 우리 힘을 벗어난 엄청난 일이 아니다. 우리가 힘을 모으면 그들을 살릴 수 있고 화해도 이루어낼 수 있다.

‘화평’, 평화의 ‘화’(和)자는 벼 ‘화’(禾)변에 입 ‘구’(口)를 쓴다. 그리고 평평할 ‘평’(平) 자와 합해 평화, 화평이라는 개념을 만든다. 모두에게 골고루 음식을 나눌 때 화평도 평화도 이루어 진다. 요셉과 형들은 곡식을 나눔으로 화해를 이루었다. 이것 또한 성령께서 주시는 계시다. 음식을 나누어야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계시가 오늘 야곱의 이야기에서 빛나고 있다.

북의 식량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면 4천억 원이 든다고 한다. ‘겨우’ 4천억 원이다. 우리 정부와 국회가 나서면 거뜬히 해결할 수 있다. 민족의 문제는 부수적으로 해결된다. 우리가 먹고 남아서 버리는 음식 쓰레기를 값으로 치면 1년에 8조 원이다. 8조 원어치를 그냥 버리고 있다. 8조 원에 비하면 4천억 원은 ‘겨우’다. 경기도 파주, 문산 지역에 북과 같은 수해를 작년에 입었다. 정부의 복구 지원비가 8천억 원이었다. 그에 비하면 4천억 원은 ‘겨우’ 아닌가?

남북협력기금 340억 원, 평화의 댐 200억 원, 6ㆍ27 지자체 선거 때 이 기금으로 쌀을 보냈다. 그렇다고 정부에게만 미루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작은 것이라도 더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그로서 화해를 이루어 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수도교회의 비전을 다시 그려보아야 할 때에 이르렀다. 우리 교회의 비전은 무엇인가? 더불어 살자는 것이어야 한다. 갈라지고 찢긴 우리가 요셉처럼 음식을 나눔으로 ‘화’(和)를 이루어내기 위해 우리는 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 세계를 나눔의 세계로 바꾸기 위해 교회로 여기 있는 것이다. 수도교회를 행동하는 교회로 만들어 나가자.

신앙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이요 의식이요 그리고 행동이다. 생활이다. 실천이다. 관계의 정상화다. 증오를 넘어 화해로 가는 철학을 가지자. 의식을 새롭게 하자. 우리의 철학과 의식은 국가의 시책이 증오를 넘어 화해로 가도록 이끌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행동으로, 생활로, 실천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남과 북의 겨레가 음식을 나눔으로 화해를 이루어 가게 하는 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무다.

[마가복음 15;33-41] 예수 죽음의 목격자만이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 1996년 4월 7일, 김상근 목사

9월 19, 2026

예수 죽음의 목격자만이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마가복음 15장 33~41절, 16장 1-2절 / 천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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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이다. 이 예배에서, 우리는 죽임을 당하신 아들을 부활시키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자 한다. 이 예배에서 우리는 무덤에 갇히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주님 예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자 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 그러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부활 신앙으로 극복하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자 한다.

그렇다! 누구라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죽음 후의 사태에 대한 공포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님의 부활은 이러한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러한 두려움으로부터, 공포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부활 신앙이다.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인류는 비로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 놀라운 사건을 처음 발설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였다. 이 세 여자가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이다. 위대한 여자들이다. 이들은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실 때, 멀리서였지만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이었다. 예수 죽음을 지켜본 여자 셋이 예수 부활의 첫 세 증인이었다. 그들이 본 예수 죽음은 어떤 죽음이었나?

병사들이 예수를 모욕한다. 왕이 입는 홍포를 두르고 왕관 대신 가시관을 씌운다.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비아냥댄다. 머리를 친다. 침을 뱉는다. 그리고서는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린다. 실컷 희롱한다. 결국 자색 옷을 벗기고 누더기 같은 예수의 옷을 도로 입힌다. 십자가 형틀에 못을 박는다. 죄명은 “유대인의 왕”이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예수를 모욕한다. 온갖 말로 비아냥댄다.

세 여인은 견딜 수가 없다. ‘저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의롭다는 하나님은 무얼 하시는 건가? 하나님, 저분을 도와주십시오 당신은 의로우신 하나님 아니십니까? 하나님,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들은 기도한다. 예수께서는 더 버티시지 못한다. 급기야 큰소리로 부르짖으신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것은 외마디 소리다. 예수는 기어코 고개를 떨어뜨리신다. 숨을 거두신다.

여인의 가슴은 찢어질 것 같다. 우리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를 당당하게 살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애쓰시던 저분이 왜 저렇게 죽임을 당해야 하느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렇게도 당당하시던 저분이 저렇게 맥없이 죽임을 당하시다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저분조차 저렇게 죽어 간다면 누가 선하게 살 것입니까? 누가 의롭게 살 것입니까? 누가 우리 같은 천한 사람, 가진 것 없는 사람, 배운 것 없는 사람을 위해줄 것입니까? 누가 슬피 우는 사람을 위해 일할 것입니까? 누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줄 것입니까?’

세 여인은 사흘째 되던 날 새벽, 예수의 무덤을 찾는다. ‘오, 불쌍한 예수여! 하나님도 돌보시지 않으시지만, 하나님도 버리셨지만 우리는 당신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안쓰럽습니다. 너무나 불쌍합니다. 너무나 억울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삶이 옳고 바른 것을 압니다. 당신의 가슴에 가득한 사랑을 한껏 느낍니다.’ 여인들은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 같다. 무덤 속에서 세 여자는 웬 청년을 만난다. 그 청년에게서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것을 듣게 된다. 무덤에서 도망쳐 나온다. 무서운 마음이 든다. 벌벌 떨린다. 넋을 잃는다.

기쁨이나 감격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니다. “아멘, 할렐루야”라는 탄성이 나오지 않는다.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분부를 듣는 순간, 그들은 벌벌 떨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떨리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들이 해야 할 말 때문에 떨리는 것이다.

당신들과 우리가 죽인 예수가 살아났다는 것을 전하는 것은 무슨 뜻을 전하는 것인가? 사람들을 선동하고 정권을 뒤엎으려 한다고 하여 죽였다. 그래서 다른 처형도 아닌 십자가 처형을 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자고 했다. 서기관, 당신들도 그랬다. 제사장, 당신들도 그랬다. 빌라도, 당신도 그랬다. 그런데, 그 예수가 살아나셨다. 이미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더불어 사시던 갈릴리로 가셨다. 이렇게 외쳐야 한다. 벌벌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 복판에서 예수가 옳았다고, 너희가 죽여버린 예수가 옳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말만 하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살았기에 체포되고 모욕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된 바로 그 삶을 사는 것이리라. 그분이 사랑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분이 돌본 사람을 돌보고, 그렇게 하라는 것 아닌가! 가난한 사람, 슬피우는 사람, 굶주리는 사람, 누명을 쓴 사람, 그런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살라는 것 아닌가! 그렇게 살면 박해가 올 것이다! 고난이 올 것이다! 그 여인들은 무덤 밖으로 나와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그 세 여인이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이 된다.

예수가 왜 죽임을 당하셨는지, 예수의 죽음의 참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예수 부활의 참 증인이 될 수 있다. 오늘 아침, 우리 모두는 체포되시는 예수를 먼저 보시기 바란다. 모욕을 당하시는 예수를 먼저 보시기 바란다. 재판 받으시는 예수를 먼저 보시기 바란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시는 예수를 먼저 보시기 바란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지만,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버리시지만, 그러나 그 길을 끝까지 가시는 예수를 먼저 보시기 바란다.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바르게 보아내는 사람만이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죽임을 당하신 바로 그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으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그렇게 죽임을 당하신 바로 그 예수를 살리셨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가? 그러면 부활의 증인이 되라. 예수처럼 살라. 성령께서, 이 거룩한 날 아침,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바란다. 힘을 주시기 바란다. 용기를 주시기 바란다. 우리 모두를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시기 바란다. 그래서 이 땅에 정의가 서고, 사랑이 넘치게 되기를 바란다. 기쁨이 넘쳐나기를 바란다.

1997년 회상노트(4월 13일, 4월 20일, 5월 4일, 5월 18일) - 수도교회

9월 19, 2026

1997년 회상노트


  • 1997년 4월 13일 / 수도교회: “배고픔의 세계에 나눔을”
  • 1997년 4월 20일 / 수도교회: “차별의 세계에 통합을”
  • 1997년 5월 4일 / 수도교회: “죽임의 세계에 생명을”
  • 1997년 5월 18일 / 수도교회: “치욕 수용과 저항 인생”












수도교회의 비전을 찾고자 했다.

수도교회에 문제가 발생했고 담임목사가 설교를 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 나는 임시당회장을 맡게 되고 수도교회 예배의 설교를 다시 맡게 되었다. 나는 이때쯤 수도교회가 비전을 잃고 있다고 판단했다.

내가 목회할 때와는 사회 형편이 많이 달라졌다. 거기에 따른 비전을 찾고 그걸 구현해 나가는 교회가 된다면 교회 안에 분란 같은 것이 일어날 여유가 없었을 게다.

수도교회의 비전이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 수도교회, 아니, 모든 교회의 비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시!’ 유기체로 회복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표적 예로서 남과 북, 장애우와 비장애인을 들었다. 교회가 그리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설교했다.

그 전 해에 한반도에 큰 장마가 있었다. 피해가 극심했다. 특히 북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있었다. 힘겹게 헐떡이며 보릿고개를 감내하고 있었다. 돕자고 호소했다. 화해의 첫 발걸음이 음식을 나누는 것이다. 이 간단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마음이 퍽 슬펐다. 북의 저 배고픔을 돕자 하는 말과 캠페인을 통해 오히려 북을 공격하는 기회로 삼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수도교회를 목회할 때 수도교회는 나의 반정부 투쟁을 도왔다. 최소한 적극적으로 막진 않았다.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성문 밖에서 치욕을 당하심으로 끝내 의로 부활하신 주님의 삶을 받아들이고자 애썼다.

그러나 어느새 수도교회는 변하고 말았다. 5ㆍ18이 국가기념일이 되는 것을 보면서도 수도교회는 뒷걸음을 치고 있다는 판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침 새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절차를 밟고 있는 때여서 진심으로 권고했었다.

그러나 헛일이었던가. 2007년의 수도교회는 또 다시 분단에 휩싸이고 있다. 안타깝다.

나는 그즈음에 5ㆍ18 광주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전념했다. 드디어 정동년 등이 전두환ㆍ노태우 등 35명을 고소했다. 나는 2천여 명의 동의를 받아 그들을 고발했다. 서울중앙지검에 고발장을 직접 접수시켰다.


[마가복음 15:33-41]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1996년 4월 4일, 김상근 목사

9월 18, 202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마가복음 15장 33-41절 / 노수석 군 장례예배 / 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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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설교 전문]


지금은 공교롭게도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기독교의 고난주간이다. 이 고난주간에,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의로운 젊은이, 깨끗한 젊은이의 수난과 죽음을 위하여 여기에 섰다.

예수께서 타살되시던 그 시간은 대낮 12시였다. 그러나 어둠이 온 땅을 덮었다. 실제 그렇기도 했겠지만, 예수가 타살되는 바로 그 시간을, 그 시대를, 성서는 암흑의 시대라 기록한 것이다. 의인을 살해하는 시대는, 그것이 비록 대낮 12시라 할지라도 암흑의 시대다.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될 우리의 아들의 타살된 주검이 여기 있다. 우리의 친구의 타살된 주검이 여기 있다. 이 민족의 꿈이요 희망이 타살당한 주검으로 여기 있다. 이 시대는, 그것을 문민 시대라 하거나, 국민소득 1만 불 시대라 하거나, 어둠이 온 땅을 덮고 있는 암흑의 시간, 암흑의 시대다.

생때같은 시대의 아들, 그 가슴에 열정과 정의를 안은 시대의 아들을 타살하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것은 고사하고 사과 한 마디 없는 시대는 분명히 암흑의 시대다. 입이 없는 대통령, 국민을 사랑하는 가슴을 지니지 못한 대통령, 정직함이 없는 대통령, 그의 시대는 암흑의 시간이다. 우리는 암흑의 시간에 살고 있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신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예수의 투쟁은 참으로 외로운 투쟁이다. 누구의 도움도 얻을 수 없는 죽음의 자리다. 심지어 그가 그렇게 철석처럼 믿었던 하나님도 그를 버렸다는 처절함이 여기 있다. 혼자 그 모든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우리의 사랑하는 수석이도 그랬을 것이다. 쫓기고 몰린다. 사정없이 몰아대는 몰이꾼들의 작대기에 등을 맞고 다리를 맞으며 죽을 힘으로 도망가는 토끼처럼 몰린다. 심장이 사정없이 뛴다. 말이 나오지도 않는다. 숨이 넘어갈 것만 같다. 심장은 금방 터져 버릴 것 같다. 결국 수석이는 쓰러진다. 경련이 인다. 동료들이 그를 도우려 한다. 그러나 몰이꾼들은 기어코 거기 인쇄소 안까지 쫓아 들어온다. 도우려던 학우들을 낚아채 간다. 사람이 죽어간다고 호소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수석이는, 홀로, 죽음의 자리에 내팽개침을 당한 것이다.

아니, 하나님은 무얼 하고 계신 것인가! 하나님, 하나님, 당신도 나를 도울 수 없습니까? 지금 내 심장이 터지려 하지 않습니까? 지금 내 숨이 턱을 넘어 멈추려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를 버려두십니까? 수석이는 다급하여 이렇게 외친다. 그러다가 그는 숨지고 만다. 아무의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다. 예수께서 그랬듯이 수석이도 혼자, 홀로 그 모든 고통을 감당했다.

그렇게 처절하게, 외롭게, 슬프게 죽임을 당한 예수를 직시하던 한 사람 관원이 있었다. 그는 그가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라고 했다. 외롭게 죽임을 당했지만, 슬프게 죽임을 당했지만, 너무나 불쌍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바로 그렇게 죽임을 당하신 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영원한 희망이 되셨다. 정의의 힘이 되셨다. 평화가 되셨다. 이것이 예수의 부활이다.

그렇다. 한열이가 그렇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결코 쓸쓸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저 위대한 ‘6월 항쟁’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한열이의 부활이다. 한열이는 민주주의로 부활했던 것이다.

그렇다. 경대도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결코 슬픈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었다. 초유의 국회 청문회를 가져왔다. 이것이 경대의 부활이다. 경대는 민족 정기로 부활했던 것이다.

그렇다. 수석이는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 가엾고 쓸쓸하다. 아픈 마음을 달랠 수가 없다. 숨을 거둘 때 그가 어떠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복받치는 슬픔을 가눌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결코 가엾은 죽음, 외로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열이의 죽음이 민주주의로 부활했듯이, 경대의 죽음이 민족 정기로 부활했듯이, 수석이의 죽음도 의의 부활을 할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던 목격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예수의 증인들이다. 역사를 바꾸어 가는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는 수석이의 죽음의 목격자들이다. 청년, 학생, 애국 시민 여러분, 수석이의 죽음을 억울하다 하지 말라. 불쌍하다 하지 말라. 그가 죽었다 하지 말라. 그의 증인이 되라. 그가 남긴 삶을 살라. 그럴 때 그의 부활은 여러분의 가슴에서 터져 나올 것이다. 그의 죽음은 이 나라, 이 민족에게 영원한 빛을 줄 것이다. 오고 오는 우리의 후배들에게, 후손들에게 영원한 빛으로 살아갈 것이다.

오늘의 그의 죽음은 기어코 정의로, 평화로, 자주로, 민주로 이 나라를 바꿀 것이다. 수석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사도행전 10:9-10, 47-48] 경계를 넘나드는 교회 – 1996년 6월 11일, 김상근 목사

경계를 넘나드는 교회 사도행전 10장 9-16, 47-48절 / 향린교회 [회상 노트] 한국 교회의 노인화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노인들이 교회를 완전히 점령한 상태다. 엄격히 말하면 노인 문화와 노인 정서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문화적 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