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언제나 자신 없는것
- “나의 설교 분석”, 「세계와 선교」 제141호(1993.12) -
1. 설교 – 언제나 자신 없는 것
내 설교를 나더러 분석하란다. 제 설교를 제가 분석하는 작업이란 도대체 어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구태여 이렇다, 저렇다 분석한다 해도 그것이 어디 객관성이 있을까? 또 제 깐에는 자기 설교가 괜찮다고, 혹은 최상의 수준이라 자평하고 있다 한들 그렇게 말할 수도 없다. 그 반대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 설교가 참으로 형편없다고 스스로 심각하게 평가한다면 그것은 목사 생명을 끝내야 하겠기 때문이다. 또 그렇다하여 설교자로서의 혀를 잘라 버릴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의 선배나 후배들 중에는 내 설교를 묶어 책으로 펴내 보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제의가 있다는 것은, 솔직하게 말한다면, 내 설교가 그런 대로 괜찮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래 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라도 가져본 적이 없다. 책은 무슨 책이냐? 말로는 넘어갈 수 있지만 문자화하여 부끄러운 몰골을 두고두고 드러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자제한다. 그렇게 많이 설교하고도, 또 설교할 자리를 사양하지 않고 선뜻 선뜻 나서면서도 언제나 자신이 없는 것이 설교다.
이런 말이, 설교집을 펴내는 것을 매도하는 의도로 들려지지 않아야 한다. 말로 하는 설교가 설교인 것처럼 글로 하는 설교도 설교다. 따라서 설교집을 내는 것도 설교의 한 형태다. 그러나 말로 하는 설교는 지나가 버릴 수 있지만 글로 하는 설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나는 자신이 없다는 설명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여간 나는 내 설교에 대해서 항상 부족감을 느끼고 있다. 오래 지난 원고를 들여다보면 부끄러워지기만 한다.
2. 초기 설교자평
1) 한 주간 걸린 준비
그러니까 교인들을 상대로 설교하기 시작한 것이 1970년이었다. 설교는, 한 주제로 묶어서 3-4회 계속했다. 연속 설교다. 나의 앞 설교자이셨던 문동환 목사님이 만드신 틀이다. 수도교회는 지금도 그런 식으로 설교하고 있다.
어떤 주제를 설정할 것이냐 하는 것을 고민하고 정하면 한 달 정도의 방향이 잡히게 된다. 방향이 잡혔으니 편안할 수 있을 것인데도, 주일이 지나면 서둘러 곧바로 월요일부터 다음 설교 준비를 시작했다. 초기에는 그랬다. 월요일에 시작한 준비는, 주일 새벽에 비로소 미완성 원고로 끝내지곤 했다. 일주일 내내 매달린 것이다. 한참 익숙해진 후에는 목요일 아침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금요일이 되면 쓰기 시작한다. 토요일에도 계속 쓴다. 주일 새벽 1시쯤까지 쓴다. 잠깐 자고 5시나 6시에 일어나 또 쓴다. 개작을 하는 것이다. 마음은 급하지만 잘 안된다. 이제는 더 고치고 말고 할 시간이 없어서 그만둔다. 원고지 2백 쪽쯤 쓴 것인가? 물론 아니다. 고작 사십 쪽을 쓰는 데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다.
왜 그랬을까? 우선, 문동환 목사님이 설교하셨던 그 자리와 그 대상을 그대로 물려받은 중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 목사님보다 더 훌륭한 설교를 할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들어줄 만한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내게 큰 보약이었다. 그러나 힘들었다. 굉장히 힘들었다. 전도사로, 부목사로 목사님을 보필할 때,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 적도 없지는 않았다. 설교하고 싶은 충동 속에 빠진 적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상 강단을 맡고 보니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어렵고 또 어려웠다.
2) 자신이 일차 대상
앞서 말한 것처럼 1970년 초에 설교를 시작했다. 군사 독재가 본격화될 때였고 경제 제일주의 정책으로 인한 인권 문제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설교의 대상은 수도교회 교인들이었다. 물론 이런 저런 특별한 기도회, 이른바 시국 기도회의 설교도 간간이 맡았다.
그때, 나의 설교는 그 시대를 사는 젊은 성직자의 진솔한 신앙고백들이었다. 교인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설교의 원리 따위는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마구 쏟아 놓았다. 그랬다. 마구였다. 놀라거나 말거나, 당황하거나 말거나 기독교는 이것이라고 마구 쏟아 뱉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회중을 향한,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나를 향한 것이었다. 내게 하는 설교였다. 내 손에 예수의 수갑을 채우는 것이었다. 내 발에 예수의 족쇄를 채우는 것이었다. 내 가슴을 예수의 불 인두로 지져대는 것이었다. 설교할 때 자주 손에 쥐가 나곤 했다.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도 느끼곤 했다. 그만큼 설교에 온 열정을 쏟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 설교를 들어준 교인들이 고맙고 훌륭하다.
설교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설교자였다. 이것을 굳이 잘못되었다고 평가하고 싶지 않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교자에게 설교할 때 회중들은 은혜를 받는다. 설교자의 진실과 만나기 때문일 것이다.
3. 요새 설교 자평
1) 긴 기도 짧은 작업
나도, 이제 4반세기 동안 설교를 하여 왔기에 초기와는 퍽 다른 모양의 설교자로 변했다. 실제 쓰는 시간은 약 3시간 정도다. 목, 금, 토, 주일 새벽까지 쓰던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도가 튼 것인가?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생각하는 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줄어들지 않았다. 오래 생각한다. 길을 걸을 때나 차를 타고 이동할 때나 누구와 대화할 때나 맡은 설교를 생각하고 연관시킨다.
어떤 영상이 떠오르면, 어디서나 즉시 간단하게 메모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성서 본문이 정해지면 일단 주석서들을 훑어본다. 빗나가는 해석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른 참고서들도 뒤적여 본다. 이 모든 것이 설교를 위한 기도다. 3시간 정도면 설교 한 편을 쓴다 하지만 실제로는 34일 걸리는 것이다. 다만 쓰는 시간이 줄어든 것일 뿐이다. 그만큼 사전 정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른바 큰 집회의 설교는 1개월 이상 걸려 준비하기도 한다. 설교를 위한 기도(=준비)는 길게 하고 쓰는 작업은 될수록 시간을 줄인다.
2) 상황에서 성서로
나는 언제나 상황에서 출발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재해석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성서에서 출발하여 성서로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있다. 이른바 텍스트(text)에서 컨텍스트(context)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컨텍스트를 먼저 파악한다. 설교를 듣고자 하는, 듣게 되어 있는 저들의 상황과 조건과 실존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통찰한다. 한 교회면 그것이 교회의 현재 상황이 될 것이다. 역사적 상황을 생각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교인들의 비교적 공통적인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설교를 듣게 될 저들의 진실된 기도가 무엇일까 하는 것을 먼저 간파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파악해 내는 것이 설교자의 기도다. 그들을 내 가슴속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저들의 문제가 내 문제로 되어야 한다. 저들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의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다. 설교를 듣게 될 저들의 자리에서 성서 본문을 택한다. 비로소 텍스트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거나 신약성서의 서신이거나 구약성서의 어떤 성서이거나 거의 특수한 컨텍스트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닌가? 그 삶의 상황으로 가야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러한 상황에 주신 말씀이 들리게 된다는 뜻이다. 컨텍스트를 무시한 설교 본문의 선택은 교리 강해나 일반적 교훈을 말하는 수준에 머문다. 결국 부딪침이 없는 설교가 되고 말 것이다. 예수의 설교는 교리 강해가 아니다. 보편적이고 무색무취한 것이 아니다. 거기, 바로 거기에서 불꽃을 튀기는 가르침이다. 컨텍스트와의 충돌이요 증진이다. 그런데도 영원성을 지닌다. 설교 본문은 상황—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요 가르침이다.
3) 상황적 출발의 위험과 극복
컨텍스트에 주시는 말씀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 성서에 대한 광범한 지식과 바른 인식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성서 66권을 꿰차기 위해서 노력한다. 나는 물론, 성서를 여러 번 독파했다. 지금은 마치 독경하듯이 고지식하게 읽어 내려가지 않는다. 눈으로 속독한다.
그래도 회상이 가능하다. 걸리는 부분은 정독한다. 이 일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물론 바른 인식을 위해서 신학적 노력도 계속하고 있다. 신간 서적을 읽기도 하고 학자들의 강의를 듣기도 한다.
여기에 문제가 없지 않다. 성서 본문이 편향적으로 선택되기 때문이다. 하다 보면 복음서를 선호하고 있다든지 예언서를 자주 택하게 된다. 반면에 잠언서 같은 성서를 택하게 되지 않는다. 디도서, 빌레몬서, 유다서 등도 여간해서 내 설교 본문이 되지 않는다. 구태여 상황을 고려할 수 없는 평범한 설교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될 수 있는 대로 잠언서 등을 택한다. 그러나 꾸준하게 내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편식이 강요된다. 어떻게 해야 성서 66권을 고르게 설교 본문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큰 과제다. 고르게 선택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성서일과에 준거한 설교를 하자는 경향에 상충한다. 성서 일과를 따르는 설교는 큰 의의를 갖는다. 긍정적인 면이 크다. 그러나 상황에서 성서로 가는 경우 성서일과를 좇지 못한다. 상황에서 성서로 가되 성서일과와 발맞추는 설교의 일치를 이루어낼 수 없을까? 내게 숙제다. 설교의 상당한 수준에 이르면 성서일과에 준하면서도 컨텍스트와의 대화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이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
4. 설교 작성 실제상의 몇 가지 유의
1) 우선 쓴다.
준비가 다 되었거나 훨씬 부족하거나 쓰기 시작해야 할 시점에 이르면 우선 쓴다. 더 많은 자료를 찾다가 결국에는 시간에 쫓겨 준비해 놓은 자료조차 사용하지 못했던 경험을 여러 번 했기 때문이다. 우선 쓴다. 쓰는 동안, 시작할 때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영감이 온다. 완성하고 보면 시작할 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설교가 창작되는 것을 경험한다. 머뭇거리고 무엇을 찾고 메모하고 그러다가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시간이 되면 나는 우선 쓰고 본다.
2) 욕심을 버리고 초점을 좁힌다.
초벌 원고는 언제나 길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찾은 메시지도 여러 개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한 설교에서 다해야 훌륭한 설교를 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 것을 다 듣지 못한다는 진리를 내게 몇 번이고 다진다.
줄이자. 더 줄이자. 흔히 사용하는 첫째, 둘째, 셋째도 많다. 하나의 테마면 족하다. 하나도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하면서 둘, 셋까지 가려는 유혹을 억제하곤 한다.
돌이켜 보면, 나의 초기 설교는 제법 방대했다. 그 본문에 담긴 모든 메시지를 다 캐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설교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다음 날 또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한 설교에 한 초점만 잡는다. 가능하면 그렇게 한다. 초점을 좁히려고 노력한다. 아쉽지만 그렇게 한다.
3) 예화는 피한다.
설교를 쉽게 하는 길은 예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본문의 메시지나 그 상황에 대한 설교로서의 적절한 예화란 흔할 수 없다. 주관적이고 허구적인 것이 더 많다. 성서의 말씀이 흔히 사용되는 예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내 소신이다. 그래서 나는 예화를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적절한 예화를 찾느라고 노력한다. 소설이나 수기를 틈나는 대로 읽는다. 이 부분은 내 아내의 도움에 많이 의존한다. 이야기로 듣고 무언가 잡히면 직접 읽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앞뒤는 듣고 연결되는 바로 그 대목만 직접 읽는다. 딱 들어맞는 예화는 어김없이 동원한다. 역시 은혜가 된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고 예화를 남발하지는 않는다.
4) 혼을 담는다.
논리를 전개해야 편안하다. 그래서 무슨 논문 쓰듯 하게 된다. 그래야 논리가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를 듣고자 하는 것이지 학술 강연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주석의 과정, 본문 비평을 그대로 설교에서 말하는 것은 제 만족을 위한 것일 뿐 회중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본문의 혼을 찾아서 그것을 설교에 어떻게 담아 내느냐 하는 것을 고민한다. 원고를 읽어보고 또 읽어보면서 혼이 있는가를 점검한다. 아니, 제게 혼으로 부딪혀 와야 한다. 솜털이 일어나고 머리칼이 쭈뼛이 서는가를 확인한다.
5) 짧은 문장을 쓴다.
물론 설교의 시작 부분이나 본론 부분은 설명식이 아니 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설교를 그렇게 쓰지는 않는다. 설명식이라 하더라도 이야기식으로 진행시킨다. 웅변조로 하는 것이나 선교사의 짧은 한국말 투를 흉내내는 것은 구역질이 난다. 자연스러운 이야기식 분위기를 선호한다. 그것도 장황하게 긴 것을 피한다. 될 수 있는 대로 단문, 짧은 문장으로 쓴다. 그것이 힘이 있기 때문이다.
가슴에 꽂아야 하는 부분은 물론 결론 부분이다. 나는 언제나 결론 부분은 단문으로 처리한다. 단문은 예리하다. 파고드는 힘이 있다. 가슴을 움직이게 한다. 단문—단문—단문…으로 결론 부분을 손질한다.
6) 회중의 입장에서 마지막 손질을 한다.
어쨌거나 설교 원고가 다 되었다. 마지막 손질을, 이 설교를 듣게 될 회중의 입장에서 한다. 회중의 반응은 어떠할 것이며 그것은 적절하고 필요한 반응일까? 이 부분은 회중을 위해 쓴 것인가 아니면 내 양에 차지 않아 보탠 것인가? 회중의 상황, 기도, 조건에 다시 맞춘다. 회중의 가슴에 감격이 일어날 것인가를 가늠해 본다. ‘아멘!’ 이 울려질 것인가를 예측해 본다. 회중의 영혼 속에 일어나야 할 갈등을 일으킬 수 있을까를 점검한다.
설교자의 일차적인 대상이 설교자 자신이어야 한다면서도, 설교는 역시 회중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