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12-13, 26-27] 교회의 공동체성 – 1993년 7월 15일, 김상근 목사

9월 13, 2026

교회의 공동체성

고린도전서 12장 12-13, 26~27절 / 낙산교회

[회상 노트]

기득권자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지치고, 피 흘리고, 팍팍한 걸음을 비틀거리는 사람들에겐 위로가 필요하다. 격려가 있어야 한다. 군부의 오랜 철권 통치에 시달린 사람들, 자식을 빼앗긴 사람들… 그들이다. 그들은 격려를 목말라 한다. 위로를 찾는다. 혀로 하는 위로와 격려가 아니다. 거짓으로 속이는 격려와 위로가 아니다. 가슴에서 떠낸 위로, 뜨거운 눈물을 섞어 안겨주는 격려를 찾는 것이다.

그들은 참다운 위로와 격려를 얻을 수 있는 공동체를 갈망한다. 예수는 그걸 만들려 하셨다. 그러나 지금 교회는, 거기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아픈 판단이다. 지금 교회는, 끼리끼리 교회거나 모래알같은 교회가 성공한다. 한 몸! 유기체! 이런 것을 지향하는 교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에게 오늘의 교회가 희망이 될 수 없다.

낙산교회는 지식인들의 교회다. 이제 만들어 가는 교회이니 그런 교회를 만들어 보자고 호소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낙산교회가 이렇게 모인 지 어느새 여러 해가 지났다. 모이신 면면을 보면 한국 사회 각 분야에서 최고의 수준에 계신 분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누구로부터 들은 이야기인지 잘 기억할 수는 없는데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 낙산교회는 교인은 늘지 않고 박사만 는다.” 이것은 최고의 분들만 모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말이다. 이런 분들만 모였으니 아무나 설교할 수가 없다. 김관석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셨던 것으로 안다. 그러다가 김이곤, 박종화, 김성재 목사로 주일 목사를 바꾸어 왔다. 모두가 우리나라에서는 최고의 학문을 닦은 분들이고 최고의 학술적 설교를 하시는 분들이다.

강문규 선생께서 저의 낙산교회 설교에 대해서 불만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설교하라고 하면 낙산교회 좋다는 말은 한 번도 안 하고 꼭 꼬집기만 한다는 불만이셨다. 사실 좋은 말은 그 말에 상대가 속아 줄 때 빛이 나는 법이다. 속지 않는데 좋은 말을 하면 제 속을 보일 뿐이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픈 점을 잘 아는데, 칭찬한다고 속을 까닭이 없다. 차라리 쿡 쑤시고 도망가는 편이 낫다. 강 선생님한테서 그 말을 들은 후 낙산교회 설교 안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서게 되었다. 하고 싶은 말, 꼬집을 말이 있어서였다. 다시 안 시켜도 좋다. 더운 여름날 스페어 목사 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낙산교회 교인 여러분, 교회 안할 거냐?” 이것이 오늘 꼬집고 싶은 말이다. ‘아니,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하면서 교회 안할 거냐는 말은 무슨 얼빠진 소리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성을 갖는다. 비록 나의 관찰이 피상적이지만, 아무리 보아도 낙산교회에 공동체성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런 분들끼리 모여서 그런 목사를 모셔다 설교를 들으니 그런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이 교회는 비슷한 분들끼리 모이게 되어 있다.

강남의 대형 교회를 보고 그게 교회냐고 들이대는 말들을 한다. 무슨 뜻인가? 그 교회는 그런 사람들끼리 모인 교회라는 뜻이다. 신문에 소개된 어떤 논문에 의하면, 강북의 교회는 성령 운동의 영향이나 오랜 역사 때문에 큰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남의 큰 교회를 보면 소위 문화의 동류 군집성이 큰 교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비슷한 사람이 모이는 곳을 찾아 모이다 보니 큰 교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그런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의 교회는 결국 대형 교회가 된다는 분석이다. 그런 것 같다.

목사에게 무슨 노하우가 있다든지, 설교를 잘한다든지, 성경 공부를 기가 막히게 시킨다든지 하는 것보다 문화, 생활 수준, 생활 스타일 등의 동류성이 대형 교회를 이루는 더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대형 교회는 목사가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동류 군집성에 의한다는 것이다.

지난 주일에는 최근 4억 원을 들여 파이프 오르간을 들여놓았다는 교회에 갔다. 설교 맡은 교회도 없고 해서, 솔직히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듣고 싶어 갔다. 1부 예배였는데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예배 시작 시간보다 한참 일찍 갔는데 15분 전쯤 되니까 절반쯤 찬다. 10분 전에 2/3쯤 찬다. 제법 일찍들 온다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예배 시작 10분 전에 한 차례 연주가 있었는데 그것을 들으려고 일찍 온 것이다. 예배가 끝났는데 다시 자리에 모두 앉는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엉거주춤 나도 앉았다. 다시 10여 분 길이의 곡을 연주한다. 연주가 끝나니까 몇 사람은 박수를 친다. 마치 음악회에 간 것 같았다. 교인도 예전보다 훨씬 많았다. 배쯤 늘어난 것 같았다. 파이프 오르간에, 잘 준비된 상당 수준의 성가대에 추위를 느낄 정도의 냉방이 이런 것에 익숙한 사람들을 끌어모은 것 같았다. 조건과 분위기가 그러니 역시 모인 사람들이 비슷했다. 외형, 외모로 보아 고만고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교회라는 것은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어야 한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부자, 가난한 자, 박사, 무식자, 노소, 남녀, 큰 사람, 작은 사람 등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야 교회가 될 수 있다.

오늘 봉독한 성서 구절은 고린도교회에 주신 바울 사도의 편지다. 고린도교회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부자와 가난한 자, 능력이 있는 자와 모자라는 자, 남녀 등 상당히 다양하다.

요새는 체육인 교회, 예술인 교회, 연극인 교회 등 교회도 전문업소화 하는 경향이 있다. 동류 군집성 교회들이다. 물론 배우나 탤런트 얼굴보러 가는 교인도 있을 테니까 반드시 동류 군집성 교회라 할 수는 없겠으나 교회 설립자들의 의식은 분명히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야 한다. 왜 그런가? 인간 사회는 동류 군집성의 전쟁터다. 끼리끼리 모이고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들 계급 계층에 이익을 극대화하는 사회로 만든다. 여기에는 조화와 어우러짐, 말하자면 ‘공동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누르고 억압하고 착취한다. 이것이 죄 된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죄 된 사회다. 하나님의 구속사란, 이러한 사회에 조화되고 어우러지는 ‘공동체성’을 회복해 내는 것이다. 회복이라 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그랬다는 뜻을 담기 위한 표현이다.

오늘 읽은 성서에는 교회를 무어라 했나?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 그런데 그 몸은 단출한 지체가 모인 몸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많은 지체를 가진 한 몸과 같습니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눈, 귀, 코, 손, 발 등 다양한 지체를 가진 몸이라는 뜻이다. 한 종류의 지체만 많이 모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동류 군집이 아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야 한다. 박사도 있고 무식한 사람도 있어야 한다. 부자가 있는가 하면 가난한 자가 있어야 한다. 노동자가 있는가 하면 기업주도 있어야 한다. 늙은이도 젊은이도 있어야 한다. 남자도 여자도 있어야 한다.

‘우리 낙산교회 교회 안 할 거냐?’고 꼬집은 것은 낙산교회도 동류 군집성 교회라는 판단 때문이다. 교회를 개방하라. 누가 닫고 있느냐 하겠지만 닫고 있다. 증거는 다양한 사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가 증거다.

어떻게 하면 개방하게 되는 것일까? 개방해서 다양한 사람이 모이면 교회인가? 다양한 사람이 모였다 하여 그것이 이상적인 교회는 아니다. 그 지체들이 서로 연결하게 될 때 그것이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연결된다는 것은 유기체가 되는 것이다. 서로 피가 통하고 감각이 전달되는 데까지 가야 그것이 교회다. 어떻게 하면 유기체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말은 도대체 무식한 말로 들릴지 모르겠다. ‘반 속박성, 익명성, 자기 폐쇄성’ 같은 현대인의 특징을 모르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다. 강남의 어느 대형 교회는 교회에서 서로 아는 체하지 말라고 한단다. 아는 체하면 곧바로 들어왔다가 곧바로 나간단다. 그것도 그에게 부담이 간다는 것이다. 두리번거릴 것도 없다. 목사, 장로가 예배 후 출구에 서서 악수하고 인사도 않는다. 문을 10여 개 만들어 놓고서 목사가 어디는 서고 어디는 안 설 수 없으니 아예 서지 않는 것이다. 서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유방임제다. 교인들은 가벼워하고 좋아한단다. 현대인은 그런 것을 선호하는데, 유기체가 되자는 따위는 뭘 모르는 소리인가!

실제는 그렇지 않다.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강남 대형 교회의 열성 집사다. 갑자기 중병에 걸렸다. 병원에서 중대한 수술을 하는데 당회장 추천서를 가져오란다. 그러나 교회는 성의를 안 보인다. 추천서 하나 만드는 것도 절차가 복잡하다. 누구 하나 와 굽어보는 사람이 없다. 건강하고 아무 아쉬움이 없을 때는 그렇게도 좋은 교회였다. 그러나 초조하고 안타깝고 공허할 때도 있는 법 아닌가? 낙산교회 교인들이라고 이런 갈구가 없을까?

교회는 유기체가 될 때 이루어진다. 공동체성이 생명이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같이 즐거워합니다.”

이것이다. 고통도 오고 간다. 영광도 오고 간다. 즐거움도 오고 간다. 이것이 교회다. 낙산교회에 이것이 있는가? 거추장스럽다 하는가? 고통도 영광도 다 저 알아서 하는 것이라 하는가? 개체완결주의인가? 그렇다면 아직 교회가 덜 되었다는 말이다. 오고 가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막힌 혈관을 뚫어야 한다. 경혈을 뚫어야 한다. 잔뜩 쌓아올린 자기의 울타리를 허물어야 한다. 내 손에 흙도 구정물도 묻혀야 한다.

지금 세상 어디도 이렇게 하려는 곳이 없다. 교회는 훈련장이다. 함께 사는 훈련을 하는 곳이다. 자기 울타리를 헐어내는 연습을 하는 곳이다. 그러다가 급기야 피가 통하게 되는 곳이다. 유기체가 되는 곳이다.

그러면 낙산교회는 비로소 개방된다. 공동체성을 갖게 된다. 이것은 그저 주일 10시 30분에서 12시까지의 예배와 커피 한 잔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설교 들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목사가 목회를 하고 교육을 하고 심방을 하고 … 이런 교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를 깎는 노력을 하자고 낙산교회를 세운 것 아닌가?

낙산교회 여러분, 교회 안 할 거냐?

교회로 가자고 권한다. 이렇게 쉬운 것은 교회로 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낙산교회는 교회다. 교회로 가야 한다.

[마태복음 4:1-11 예수의 영성생활 목표 – 1993년 6월 14일, 김상근 목사

9월 12, 2026

예수의 영성생활 목표

마태복음 4장 1-11절 /도시빈민 목회자 교육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 사화(史話)는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에 모두 보도하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세 가지 시험의 내용이 생략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의 마지막 시험이 누가복음에서는 두 번째 시험으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사탄 또는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것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였다. 예수의 시험은 그가 하나님 나라 운동,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그의 사역의 이념을 점검받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사역의 원칙이 올바로 확립되어 있는가를 시험받는 것이라는 말이다. 적어도 이 시험을 통과해야 그는 그의 사역을 올바로 수행할 자격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가 시험을 받았느냐?’ 하는 역사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 하겠다. 문제는 예수께서 이 시험을 어떻게 극복했는가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시험을 받기 위해 성령의 인도로 빈들로 가셨다. 이것은 신명기 8장 2절을 연상시키는데,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계명을 지킬 것인가를 광야에서 40년간 시험하셨다고 보도하고 있다. 광야에서 40년의 유랑 기간 동안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신실성을 시험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함으로써 죄를 범하였다.

그런데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시험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마가복음에서는 40일 동안 내내 사탄에게 시험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40일이라는 상징적인 숫자에 관한 수많은 사례들이 성서의 전통 속에 나타나 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금식하면서 주님과 함께 사십 주야를 지냈다(출 34:28).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르는 빈들에서 사십 주야 동안 천사들의 음식 시중을 받으면서 방황하였다(왕상 19:1-8). 이스라엘 민족은 사십 년 동안 하나님에게 이끌리어 빈들에서 편력하였다(신 8:2).

예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셨다는 보도는 그가 일생 동안 영성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집약적으로 보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영성생활을 철저히 수행하셨다는 말이다. 악마에게 시험받는다는 사상은 구약성서에도 이미 나타난다(삼하 24:1). 악마는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적대자다. 예수는 그의 메시아적 직무를 수행하기 전에 그의 직무에 관하여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셨다. 악마는 바로 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하려고 했다. 예수께서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홀로 기도하셨다. 그의 제자들을 선택하기 전에 예수는 산에 들어가 철야 기도를 하셨다(눅 6:12).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셨다(막 14:32-42). 기도야말로 예수가 시험을 이기고 그의 직무를 수행할 능력을 얻는 비결이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 귀신들린 아이를 치료하지 못하고 당황해 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부류는 기도로 내쫓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내쫓을 수 없다”(막 9:29)고 가르치셨다. 우리에게 영성 훈련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는 교훈이라 하겠다.

예수께서 40일을 금식하고 나서 배고픔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에 악마의 첫 번째 시험이 제기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착취 정책으로 인하여 구조적인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대는 로마에게 매년 600달란트나 되는 거액을 상납해야 했고 각종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산헤드린 최고 의회는 로마 세력을 등에 업고 사복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특히 갈릴리 농민들은 소작농이나 소농으로 전락하여 유대 지방의 부재 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있었다.

‘경제’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활이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젤롯당 운동이 로마에게 납세를 거부하면서 궐기하고 예루살렘에 쳐들어갔을 때, 채무 장부를 불 지르고 사제 귀족들과 지주들을 숙청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스스로 메시아라 일컫는 메시아 참칭자들은 경제문제의 해결을 약속하면서 여기저기서 출현하여 백성들을 선동하였다. 굶주린 민중이 기다린 것은 경제 문제의 해결사로서 메시아였다.

사탄은 예수에게 그런 ‘경제적 메시아’가 되어 보라고 시험하였다. 그것은 물신숭배, 즉 경제제일주의를 선택하라는 도전이다. 그것은 돈만 벌면 된다는 사고이고, 착취를 통해서라도 소유를 늘리면 된다는 유혹이다. 정의와 나눔은 외면할 수밖에 없다. 이웃은 착취의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주의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는 신명기 8장 3절의 인용 말씀이었다. 예수께서는 물론 경제 문제의 중요성을 모르시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삶에서 경제의 필요성을 인정하신 발언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똑같은 차원에서 창조하시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할 수 있는 존엄한 파트너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잘 아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완성은 먹고사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수준에까지 성장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만이 하나님과 ‘나와 너’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에 응수하셨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이 경우에 서로 나누라는 것이다. 나눔을 실천하라는 말씀이다. 가진 것의 공유와 나눔의 실천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악마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시험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시 91:11-13).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한가를 시험해 보라는 것이 악마의 요구였다. 예수의 성서 인용으로 패배한 악마 자신도 성서를 인용하여 예수를 시험하였다. 예수더러 쇼를 위한 기적을 행하는 마술사의 능력을 현시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마술사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단연 거부하였다. 그는 ‘기적’을 행하여 메시아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쫓았고 자연 기적을 행하였으나, 그 모든 기적 행사들은 병사에 사로잡혀 있는 병자들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 12:39)라고 대답함으로써 그가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메시아가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십자가에 달려 있는 순간에도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마 27:42)라고 조롱하였을 때에도 무력하게 죽음을 감수하였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교회성장주의 병에 걸려 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교인만 많이 모이게 하면 된다는 성장제일주의 병이 만연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가 자본주의적 경쟁주의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

교회 성장이 교회의 목표가 될 수는 결코 없다. 올바른 교회 성장은 교회가 그 선교적 목표를 올바르게 수행하는 과정에서 오는 결과여야 할 것이다.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두 번째 시험에 대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신 6:16)고 반박하였다.

마지막으로, 악마는 매우 높은 산으로 예수를 이끌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이며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제안한다.

사탄은 이 세 번째 시험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대결해 온다. 악마에게 예배하기만 하면 그 모든 권력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사실 악마는 이 시험에서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을 자기에게 달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권력욕’을 이용한 악마의 간교한 책략이다. 예수에게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어 보라고 유혹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악마에게 예배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권력을 차지해 보라는 세속적인 도전장이라 하겠다.

권력제일주의는 이웃을 억압할 수밖에 없다. 힘의 논리는 약자가 강자를 섬겨야 한다는 이념이다. 여기서 약자는 강자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어떻게든지 자기만 권력을 잡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권력의 노예가 된다.

교회가 권력 지향적이 될 때 그 교회는 부패하기 마련이다. 총회장 선거에 수억의 돈을 뿌린다는 교단도 있다고 하니 개탄할 노릇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교회마저 이용하려는 자들이 늘어 가고 있다.

평생을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이 그것도 교회의 장로라는 사람이 대권을 잡기 위해 여당으로 백기를 들고 들어가서 급기야 대권을 잡았다. 그가 신한국 건설을 위해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뜻있는 사람들은 회의를 하고 있다. 이념 없는 개혁은 내용 없는 개혁, 형식적인 개혁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 악마에게 예배하는 그런 속된 메시아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세 번째 시험에 대하여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 6:13) 하고 악마를 꾸짖어 물리치셨다.

사랑하는 도시빈민교회 목회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버렸다. 무엇이 되고자 함을 버렸다. 그러나 여러분의 가슴속에 버림에서 온 쓸쓸함이 있는가? 아쉬움이 있는가?

단호한 말로 물리치라. 공유와 나눔이라고.

단호한 말로 물리치라. 큰 교회가 아니다, 작은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교회를 지향한다고.

단호한 말로 물리치라. 권력의 힘을 빌지 않는다, 오직 예수의 영성으로 우리의 목회 현장에 설 것이라고.


[회상 노트]

사회의식이 강한 신앙인은 자칫 방종적으로 산다는 지적을 받는다. 자기에게 철저하지 않다는 비판을 내내 받는다.

목회자들은 자기의 목회 현장에서 강한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억눌려 있기 마련이다. 그 현장을 떠나면 ‘자유’를 누려보려는 강한 욕망에 압도당한다. 교육원이 그 ‘자유’ 실현의 장으로 가끔 둔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회선교를 하는 우리에게 영성(靈性)이 없다면 우리는 참다운 개혁의 힘을 가질 수 없다. 교육원은 해방을 경험하게 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참 자유를 경험하는 장소가 되기도 해야 한다.

도시빈민 목회를 하는 동역자들을 나는 한없이 존경한다. 자기를 버리는 결단이 없이는 그 목회의 길에 들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민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살겠다는 그 거룩함에도 악마는 여지없이 침투한다. 그들의 목회를 단순한 경제운동으로 오도한다. 그걸 통하여 자기가 무엇인가가 되고자 함으로 유혹한다. 아니, 스스로 오도당한다. 스스로 유혹당한다. 우리의 죄성(罪性)이다.

영성이 없는 사회운동은 성공할 수 없다. 영성이 없는 빈민목회도 성공할 수 없다. 성공은 자기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자기를 버리는 것이 성공일 것이다. 그것이 영성이다. 이를 강조하고자 했다.

[고린도전서 10:23-33] 자유와 자제 - 1993년 6월 6일, 김상근 목사

9월 12, 2026

자유와 자제

고린도전서 10장 23-33절 / 총회 교육원

[슬라이드]












오늘 우리는 1993년 전반기 12주의 교육을 끝내게 된다.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있겠지만 여러 가지 우리의 현실을 종합하여 연 24주의 교육 기간을 갖고 있다. 따라서 지금 이후 9월 6일 후반기 12주를 시작할 때까지를 방학이라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선교 현장에서 일하는 중 12주를 교육에 쪼개어 썼고, 이제 다시 선교 현장에 전념하는 기간으로 들어간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지난 12주를 여러분은 열심히 노력했다. 물론 강의에 자주 빠지고 또 빠지지는 않았더라도 성의를 다하지 못한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유감으로 생각한다.

오늘 이른바 종강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 나는 고린도전서 10장 23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여러분께 드리기로 작정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가르침이다. 참 자유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아니할 수 있는 영성이다. 참 자유는 나의 이로움과 다른 많은 사람의 이로움이 충돌할 때 후자를 택할 수 있는 영적 힘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제약이 있을 수 없다. 무엇이나 할 수 있다. 이제까지 관습으로 금해 왔던 것이라 하더라도 큰 신앙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여기 본문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음식을 가려 먹는 일과 제사에 올렸던 음식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까지 혹 금기해 왔던 음식이라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 신앙 때문에 금해야 할 음식이란 없는 것이다. 제사에 올렸던 음식이라 하더라도 문제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사실 제사에 놓았던 음식을 먹었다 해도 그것이 곧 그 신과 결합하는 것도 아니고, 그 신에게 삼킴을 받을 만큼 약한 신앙도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면 그까짓 것 정도야 넘어설 수 있고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 무엇이든 음식이라면 먹을 수 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막을 수 없다. 어떤 것에 의해서도 자유를 제약받지 않을 만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크고 강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다.

그러나 나는 아무 구애도 받지 않기에 아무것이나 먹을 수 있지만, 내가 아무것이나 먹는 것 때문에 놀라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제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더 큰 자유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유익만 구한다면 그 사람은 자유한 신앙인이 아니라 남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고 가르친다.

음식을 가린다거나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아옹다옹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근본적인 데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지엽 말단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의 문제에는 접근해 가지 않으면서 작고 주변적인 문제를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할 문제인 것처럼 다루는 것은 옳지 않다.

신앙의 자유는 한없이 넓다. 그 자유를 제약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자제할 수 있는 자유야말로 참 자유다. 자제할 것은 능력이 없는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니다. 자유와 방종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엇이나 할 수 있으나 경우에 따라 자제할 힘을 가진 자유가 자유다. 무엇이나 할 수 있지만 자제하는 힘을 수반하지 못한 자유는 방종인 것이다.

우리는 어쨌거나 교회의 지도자들이요, 신자들은 물론이고 불신자 사이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다. 기독교 신앙으로, 금기하여 왔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렇지만 우리의 행위로 인하여 갈등을 갖고 감당하지 못해 하는 사람이 있게 될 것 같으면 자제하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것이 경건이고 그것이 영성이다. “나 스스로의 이로움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이로움을 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는 바울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삼복 더위라고 하여 팬티 하나만 걸치고 서대문을 오고가는 나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내 편함만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풍양속이라는 보편적 감각에 크게 벗어나는 짓이다. 그것도 내 자유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당연히 자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시간, 우리는 12주의 과정을 마치면서 지난 12주 동안 나는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자유를 살았던가를 돌이켜보기 바란다. 자제를 강조하려 하지 않는다. 진짜 자유, 참 자유를 가지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자제할 수도 있는 자유가 참 자유다. 걸림돌이 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혁파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이로움을 구하는 성숙함을 가져라.

“누구나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해서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이익을 도모해야 합니다”(고전 10:23-23).

우리 교육원은 생활과 유리된 신학만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목회와 관계없는 신학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세상 한복판에서 활용되고 살아지는 신학을 우리는 몸에 익히려 하는 것 아닌가?

[누가복음 12:49-53]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1997년 2월 13일, 김상근 목사

9월 12, 2026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누가복음 12장 49~53절 / 대전 NCC / 1997년 2월 13일


[회상 노트]

김영삼 대통령은 그 정권 초기에 ‘하나회’를 해체하고, 안기부법을 개정하는 등 제법 민주적인 조치들을 단행했다.

그러나 정권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퇴행을 거듭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김영삼 장로에게 지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다분히 지역 감정이 작용하는 것이라 판단할 때 답답함은 절정에 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어떤 행사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대전 기독교교회협의회(NCC)가 나를 청하여 개회 설교를 해 달라 했던 것 같다. 나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오늘의 역사를 좀 거시적인 안목으로 볼 수 있게 되기를 갈망했다. 거꾸로 가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신 주님의 심정을 이해하고 거기 서게 되기를 간구했다.

결국 국민이다. 국민을 바로 이끌 책임이 우리 교회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 머리 속에는 그 해 말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대한 구상이 가득했었다.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 여와 야가 바뀌는 거사에 반드시 힘을 보태고 싶었다. 그리되어야 민주주의가 비로소 뿌리 내리고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여러분께서 오늘 집회를 준비할 때는 작년 성탄절 바로 다음날 새벽에 국회에서 여당 단독 날치기로 통과된 안기부법과 노동법의 무효화를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정경 유착 대형 사건이 터져서 온 나라가 뒤죽박죽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꼴이다.

우리 주님은 물론 평화의 왕이시다. 저 유명한 성 프랜시스의 기도처럼 온갖 갈등과 불화가 있는 곳에 평화를 일구시는 주이시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주면서라도 평화를 만들라고 하셨다.

그러나 바로 그 주님께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상을 둘러엎기도 하셨고, 채찍을 들어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리치기도 하셨다. 방금 봉독해 드린 말씀은 우리를 크게 당황하게 한다.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더 있겠느냐? …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불을 지르러 왔다”느니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느니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나는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또다시 그렇게 말씀하시리라고 믿어 마지않는다. 주님은 그런 분이시다. 평화를 일구기도 하시고, 불을 지르기도 하시고, 분열을 일으키기도 하신다. 오늘 이 나라의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오히려 불을 지르실 것이다. 그분의 정의가, 그분의 공의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할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우리의 현실은 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가 무효화되어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1990년의 3당 합당은 민주 질서의 파괴였다. 국민은 분명히 야당 국회의원을 선출하였고, 국회는 여당보다 야당 의석을 더 많게 만들었다. 여당에게는 과반수에 훨씬 못 미치는 의석만을 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야당 의원이 여당 의원이 된다. 국회는 여당 다수 국회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선거라는 민주제도의 기본을 무너뜨린 것이다. 총칼 없는 쿠데타였다. 이것이 현 정권의 태생적 한계요 원리다.

1995년 총선거에서 국민은 집권 여당에 과반수 의석을 주지 않았다. 이것이 국민의 결정이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야당과 무소속 의원들을 선거법 위반으로 걸어 협박하거나 혹은 매수하여 하나 둘 여당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과반수를 훌쩍 넘는 여당 다수 국회를 만들고 말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쿠데타다.

오늘의 여당은 상습 쿠데타 집단이다. 현 정부를 문민 정부라 하고 대통령을 문민 대통령이 라 하는 것은 너무 잘못된 규정이다. 고 박정희 씨도 쿠데타를 한 번밖에 못했다. 전두환 씨도 쿠데타를 한 번밖에 못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쿠데타를 두 번이나 저지른 상습범이다. 김대통령은 국민의 선거를 두 번이나 무효화시킨 범법을 자행했다.

이것은 선거 부정이다. 야당을 찍은 표를 훔쳐 여당 후보가 당선되게 했다면 그것이 범법이 아닌가? 그런데 표를 몇 장 훔쳐간 것이 아니다. 당선한 야당 의원을 통째로 업어 갔다. 그것은 범법이 아니란 말인가? 법에 규정된 도둑질이 아니니 범법이 아니라할 것인가? 민주 대의정치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될 정치 범죄요 국민 주권 절도다.

왜 이따위 짓을 한 것인가? 안기부법, 노동법을 힘으로 숫자로 밀어붙이려 했던 것 아닌가? 숫자를 확보하고도 성탄절 직후 이른 새벽에 슬금슬금 국회로 잠입하여 저희들끼리 단 7분 만에 날치기로 통과시킨 것 아닌가? 구룡은 무슨 구룡인가?

이 나라는 내일을 건강하게 만들어 갈 기회를 포기하고 오로지 집권 연장에만 급급하는 행태다. 날치기한 안기부법은 바로 3년 전에 개정했던 부분을 다시 복원한 것이었다. 북한을 고무 찬양하거나 간첩을 신고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수사권을 안기부가 다시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느냐 하는 설명은 국가 안보가 위태롭다는 것이었다. 교수라는 신분으로 활동한 간첩 깐수 사건과 북한 잠수함 침투를 예로 들었다. 국가의 안보 상황이 위급한데 안기부의 수사권이 없어서 능률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을 개정했던 것은 3년 전이고 깐수는 10여 년 전부터 간첩 활동을 했지만 잡지 못했다. 고무찬양 처벌법 조항이 없어서, 불고지 처벌 조항이 없어서 못 잡은 것은 아니다. 잠수함 침투는 더더구나 불고지와 고무 찬양과도 관계가 없다. 국방 태세와 관계가 있다. 그것들은 간첩 체포와는 무관하다. 북한을 고무 찬양하고 다닐 간첩이 어디 있겠는가? 불고지죄는 잡힌 간첩에 누구누구를 만났다고 자백할 때 드러나는 것이다. 체포를 위해서는 아무 용도가 없다.

아니, 정말 이 나라에 용공 분자가 그렇게도 많아서 고무 찬양과 불고지자를 잡아넣는 법을 아니 만들고는 아니 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정말 그런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것 아닌가? 아니, 정말 이런 법을 날치기라도 해서 통과시키지 아니하면 안 될 만큼 국가 안보가 흔들리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것 아닌가?

차라리 지금 남과 북을 어떻게 통합해 내야 할 것인가를 궁리하고 법을 제정해야 한다. 남과 북의 교류, 이산 가족 상봉, 이질화된 문화의 접근, 적대 의식의 해소, 북의 식량 위기 해소, 남북 기본합의서 이행 등 50년의 갈등을 극복하고 이 민족과 이 나라를 건강하게 통합해 갈 법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할 기회도 왔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 정권은 그럴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오로지 승부사처럼 덤빈다. 북에 대해서도 국민에 대해서도 그렇다. 큰 정치가 없다. 모두 죽이고 나 혼자 남는 승리감만을 추구한다. 북은 섬멸의 대상이 아니라 이제는 통일의 짝이다. 통일의 주체는 국민이다. 국민의 마음을 좁히고 생각을 막고 행동을 제약하려는 것은 도대체 나라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일 뿐이다. 이 같은 현실에 주님께서는 불을 지르지 않으시겠는가!

현 정권은 정치철학이 없는 집단이다. 대통령은 현 세계를 세계화 시대라 규정한다. 그리고 무한 경쟁 시대라 말한다. 마치 자기가 세계화를 주창한 것처럼 말한다. 무한 경쟁이 마치 구원의 비결이나 되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인다.

세계화는 20세기의 강대국들이 또 다른 지배 구조를 만들기 위해 내놓은 세계 지배 전략이다. 과거에는 무력으로, 이데올로기로 세계를 지배해 왔지만 앞으로는 경계 없는 시장을 통하여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것이다. 경계 없는 시장은 경쟁에 제한이 없다.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경쟁하는 것이 무한 경쟁이다. 이것에 맞추어 가려면 노동법을 이렇게 만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골자는 정리 해고제, 변형 근로제, 대체 근로제다.

오고 있는 ‘무한 경쟁’ 시대에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고, 생산성을 강화하고, 경영합리화를 기하고, 신기술 도입에 따라 불필요하게 된 인력을 줄이기 위하여 기업 구성원 중 일부를 해고하겠다는 것이 정리 해고제의 내용이다. 이런 이유라면 기업주의 판단에 따라 식구 중 일부를 쫓아내더라도 좋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사고다. 무한 경쟁, 적자생존, 약육강식 따위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세계는 이런 방향으로 강제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철학이 21세기 인류를 이끌어갈 수 있는 철학인가? 이런 철학으로 인류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과연 이런 것인가? 이 나라, 50년 이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부대껴 온 이 나라에서 나오는 철학이 고작 자본주의 서구 국가들의 세계 지배 정책에 맹종하는 것인가?

성서는 온 피조세계는 한 몸과 같다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인간은 모두가 한 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인류는 물론이고, 자연과도 더불어 거대한 한 몸을 이루어 나가자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기업이 왜 있으며 재화가 왜 있는 것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지향해 가야 할 바다. 기업을 키워서 뭐 하자는 것인가? 기업도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있는 것이다. 사람이 기업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 아닌가!

오늘 날치기 노동법에 담긴 철학은 천박하기 짝이 없다. 또한 오늘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한보가 망하고, 나라 전체가 그 여진 속에 매몰되는 것은 정리해고제가 없었기 때문인가? 거대한 불의의 구조 때문이다. 기업이 거대한 불의의 구조 속에 있고 그 위에 놓여 있다. 어느 노동자가 몇 조 원씩 먹어 치울 수 있는가? 주님께서 지금 불을 지르지 않으시겠는가!

천주교에서 눈이 번쩍하는 구호를 내걸었다. 명동 성당에 가면 “우리가 대통령을 잘못 뽑은 것입니다.”라는 대형 현수막을 볼 수 있었다. 김추기경과 대통령이 만난 이후 그 현수막은 걷어졌다고 하지만, 그렇다. 우리의 잘못이다. 3당 합당을 해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파괴해 버렸는데, 그 장본인을 대통령으로 뽑아 주었다. 우리가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니 최근 야당, 무소속 의원을 또 빼간 것이다. 이렇게 해야 이길 수 있다는 철학이 생긴 것이다. 일종의 경험이다. 우리가 그런 틈을 준 것이다. 결국 악법을 감히 날치기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국민이 무시당할 일, 얕보일 일을 했다. 날치기 후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 태도가 오만하고 방자했다.

흔히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옳은 신앙 태도라고 오해를 가지기 쉽다. 노동자도 문제고 기업인도 문제다. 정치 인도 문제고 국민도 문제다. 여당도 나쁘고 야당도 나쁘다는 식의 양비론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서로 조금씩 양보하라는 점잖은 입장을 가진다. 그러나 이런 태도, 관념적인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기득권자들, 역사의 반동 세력에 협조하는 것이더라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했다. 자신들은 중도를 걷는 척하지만 그것은 위선이요 거짓이다. 그것은 기득권자와 불의의 구조에 편드는 것이다.

5, 6조 원을 투자하여 철강 상품을 생산해도 경쟁력이 있다는 계획이 어떻게 가능했던가? 그따위 계획을 정부가 어떻게 승인할 수 있는가? 또 5, 6조 원을 턱턱 꾸어 주는 은행이 있는가? 이 구조가 문제다. 이 구조를 캐야 한다. 실제 비용은 얼마고 그것을 빙자하여 조성한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은 얼마고 누구에게 공급되었는가를 종합적으로 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하다. 수서 사건 때 노태우 정치 자금이 드러났을 터지만 검찰과 현 정권은 덮었다. 가볍게 풀려났다. 노태우 정치 자금조사 때 오늘의 한보 부정이 수사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덮었다. 그때 척결했으면 몇 조 원은 축내지 않을 수 있었다. 검찰 현 정권을 믿을 수 없다.

주님 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가 평화를 주러 온줄로 생각하느냐? …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불을 지르러 왔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신다. 정체되고 주저앉아 있는, 거짓 평화의 상태에 불을 지르신다. 분열을 일으키신다. 놀라 일어나고 바른 편에 서라는 것이다.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바른 편에 서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때,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생각하느냐? …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외치신다.

주님의 뜻, 주님의 심정, 주님의 아픈 가슴을 우리의 것으로 감히 받아들이자. 오늘 교회가 잘못된 이 사회에 불을 지르자. 차라리 분열을 일으키자.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의를 세우자. 민족에게 희망을 일으키자. 살아 있는, 생동하는 사회를 만들자.

문제는 국민이다. 국민을 깨우치는 교회, 바르게 인도하는 교회가 되자.

[고린도전서 12:12-13, 26-27] 교회의 공동체성 – 1993년 7월 15일, 김상근 목사

교회의 공동체성 고린도전서 12장 12-13, 26~27절 / 낙산교회 [회상 노트] 기득권자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지치고, 피 흘리고, 팍팍한 걸음을 비틀거리는 사람들에겐 위로가 필요하다. 격려가 있어야 한다. 군부의 오랜 철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