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8일 수요일

[범용기 제3권] (115)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와싱톤에

와싱톤에

3월 11일(목) - 오후 6PM에 이상철 목사와 함께 토론토 공항에 나갔다. 나는 7:30분AM에 출발하는 A.A.기로 와싱톤에 직행하여 9:15AM에 National Airport에 내렸다.

이근팔 사무국장이 공항에 나와 있다. 그길로 민통 사무실에 갔다.

3PM에 프레이저 의원을 만나기로 되 있었다. 면담시간은 3분간으로 되 있다. 프레이저 의원은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국회 대합실 식당에서 우리를 만나준다.

내가 주로 얘기했기 때문에 내 서툴은[1] 영어가 시간을 먹어버렸다. 30분 걸렸다. 그래도 프레이저 의원은 열심히 듣는다.

이튿날 국회의사록에 프레이저 의원의 발제연설이 붙은, 영역 구국선언문이 발표되 있었다.

지금까지에는 우리의 민주운동이 아무리 열렬하고 종일 데모로 거리를 누벼도 그것이 어느 일간신문에 보도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N.Y.Times에서는 사설과 기사로 취급했고, 와싱톤포스트와, 그밖에 여러 보도기관에서 모두 크게 다뤘다.

윤보선 증경대통령까지 구속했다는 것은, 무슨 일이든 해치운다는 폭력제일주의 통고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박 정권에 대한 미국여론은 180도로 전환 악화되었다. 박 정권을 두둔했다가는 발 붙일데가 없게끔 됐다. 미 국무성에서는 “We are well aware of the Korea situation”[2]이라는 막연한 대답밖에 하지 않는다.

3월 12일(금) - 강영채 박사 차로 “민통” 사무실에 갔다. 어제 국회의사록에 난 민주구국선언 영역본과 프레이저 의원의 서론적인 콤멘트와 “뉴욕타임즈”에 난 사설과 기사, 그리고 “와싱톤 포스트”에 난 기사와 콤멘트 등 문서를 일괄 편집하여 “민통” 발행 Open-Letter에 fact sheets[3]로 널리 반포하기로 했다.

3:00PM에 이근팔, 전규홍, 이성호 등과 함께 국무성 Korea Desk에 찾아갔다. 차석(次席)[4]이 있었다. 내가 약 10분 얘기하고 전규홍 박사가 한 5분 얘기했다.

그는 전형적인 관료였다. “We are well aware of the Korea situation”이라는 국무성 공식 발표 이외에 다른 할 말이 없다고 한다.

전규홍 박사는 “그럴게다.” 하고 더 말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준비된, 키신저에게 보내는 서한을 그에게 내주며 전달을 부탁했다.

“꼭 전하겠습니다!”하고 받아 간수한다.

3월 13일(토) - 저녁에는 와싱턴 한인 각 기관 대표들이 중국식당에 모였다.

나는 거기서 간단히 연설하고, 4.19날까지 윤번으로 매일 1인데모를 계속할 것과 “싸인”을 모아 국무성에 낼 것 등의 회원 제의를 가결했다. 모두 협조적이었다.

안 목사 댁에서 유숙했다.



[각주]
1. 서툴다 – 익숙하거나 능숙하지 못하다
2. “우리는 한국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
3. fact sheet – 간단한 보고서
4. 차석(次席) - 직위에서 수석 다음가는 위치

[범용기 제3권] (114)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민주구국선언과 국내외 민주운동

민주구국선언과 국내외 민주운동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연합으로 3.1절 기념식을 명동성당에서 거행했는데 “우정”이 3.1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했기 때문이란다. 함석헌, 문익환, 문동환 등도 구속 연행됐다는 보고가 왔다.

3월 4일(목)의 소식에 의하면 윤보선, 함석헌, 정일형, 김대중 등이 모두 검거됐다고 한다. 김관석 목사도 일시 연행됐단다.

3월 5일(금) - N.Y.의 이승만, L.A.의 김상돈, Toronto의 이상철과 김재준.

네 사람의 Telephone Conference가 4PM에 있었다. 의제는 3.1구국선언에 대한 해외동지로서의 할 일과 하는 방법에 대한 긴급토의였다.

1) 당장 해외민주단체로서의 성명서를 내야 한다. 그것은 오늘 저녁으로 長空이 초하여 N.Y. 구춘회에게 전화로 읽어 필기하도록 한다. 전화에 자동 레코드를 붙여 놓는다.

2) 한국에서는 윤보선 증경대통령까지도 구금됐다. 그런 폭도적인 무례를 규탄하는 여론을 일으킨다.

3) 국무성, 펜타곤, 미국 하원과 상원 친한 의원들을 방문 건의한다.

4) 3.1. 구국선언문은 오늘로 영역되었다. 우리 민주단체들의 성명서가 영역되면 둘을 동시에 공포한다. etc.[1]

3월 8일(월) -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 민주구국선언과 그 후의 경과가 보도되었다.

3월 9일(화) - 와싱톤 “민통”에 전화했다. 강영채 박사는 외출 중이고 이근팔 사무국장이 전화를 받는다.

“3.1. 구국선언에 대한 와싱톤에서의 운동개황을 들었다. 선언서는 이미 영역되어 국회 청문회에 발표됐고 국회의사록에도 인쇄 기록됐다. ‘DEMO’는 두 번 했고 맹렬한 Lobby를 추진하는 중이다.”

나는 토론토 “희망의 소리” 요청에 따라, 민주구국선언 지지를 호소했다. 5분간 Speech로서 녹음이 되어 있다.

10:30분 PM에 이 목사와 함께 집에 오면서 차 안에서 라디오로 들었다.

3월 10일(수) - 와싱톤에서 강영채 박사와 안병국 목사가 긴급 전화를 걸어왔다. 한국정부에서는 – 이번 민주구국선언 사건 때문에 구속된 분들을 “‘정부전복죄’로 다룬다”고 미국무성에서 알려왔다는 것이다.

긴급구출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내일 곧 와싱톤에 와 달라는 요청이다.



[각주]
1. etc. - 등 (어원, 라틴어 et cetera - 등등, 기타)

2026년 3월 17일 화요일

[범용기 제3권] (113)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3.1. 구국선언

3.1. 구국선언

3월 3일(수) - 서울서는 3.1절 집회에서 “민주구국선언서”를 발표했다 한다.

3월 1일(월) - 이우정 여사가 KCIA에 연행됐다는 전화가 N.Y. 본부에서 왔다.

[범용기 제3권] (112)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일본인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야”

“일본인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야”

- TORONTO 일본인교회에서 -

일본인교회 남녀신도회에서 강연을 청하기에 가서 일어로 “Good Samaritan”에 대해 얘기했다.

한국은 강도 당해 길가에 쓰러진 사람같이 됐다.

일본이 “강도”의 하나로 되느냐,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하나가 되느냐, 그렇잖으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느냐가 한일 두 민족의 미래를 결정할 거라고 했다.

간담회가 11시까지 계속됐다.

“호리꼬시”라는 담임목사는 무던히 오만해 보였다. 키는 훤칠하게 큰데 새까만 콧수염을 다듬은 전형적인 일본인 얼굴이었다.

[1976년 2월 20일]

[범용기 제3권] (111)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民統”안 변조-란 풍문

-“民統”안 변조-란 풍문

1월 10일(토) - 민통 시카고 지방위원회에서는 달라스 대학의 동원모 박사가 학술교환을 위하여 서울에 갔다온 것을 “변절”인 것 같이 비판하며 회신(回信)을 돌리기까지 했다. 최명상 부의장과 시카고지방위원장에게 편지했다.

“우리 민주동지는 무엇보다도 서로 믿어야 한다. 동원모는 민주운동 처음부터 우리의 동지요, ‘민통’의 중진이다. 우리가 그를 의심한다면 누구와 어울릴 수 있겠는가? 지금은 말하지 말고 그를 만나 둘이서 면담하여 진상을 밝히고 허위선전이나 무근한 ‘까십’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나도 친구로서 그 실정을 직접 밝혀 보겠다.”

다음에는 동원모가 최명상을 가만두지 않는다고 반발한다. 나는 “속히 맺힌 매듭을 풀고 악수하고 술 한잔 나누라”고 했다. 그럭저럭 둘 다 풀어졌다. 바울은 “분을 품었어도 그날 해지기 전까지 다시 친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남을 미워하면 미워하는 사람이 미움받는 사람보다 더 괴롭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범용기 제3권] (110)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민통”의 성장고

“민통”의 성장고

76년 2월 9일(월) - 와싱톤 강영채 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와싱톤 근황 보고와 “민통”의 경과보고가 중심과제였다.

2월 1일(목) - 와싱톤 민통본부 사업비를 위한 모금운동이 전개됐다. 강영채 박사는 나에게 취지서와 호소문 초안을 부탁한다. 곧 써 보내면서 100불을 동봉했다.

[범용기 제3권] (109)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스웨덴에 입양한 우리 애기들

스웨덴에 입양한 우리 애기들

1976년 1월 3일(토) - 제1선 민주운동 동지인 신필균[1] 양이 점심때쯤에 토론토의 내 사무실에 찾아왔다.

신필균은 이화대학을 졸업하고 스웨덴(서전)에 유학중이다. 이화대학 재학 중에도 민주운동의 선봉을 섰었다. 스웨덴은 한국 민주화에 열렬한 지원자로 나선 나라다. 스웨덴 정부에서 장학금을 설정하고 신필균을 스웨덴 정부 장학생으로 선정해서 지금 유학중이다. 와싱톤에서 가정생활하는 언니 만나러 왔던 길에 Toronto 내 사무실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의 말 -

“스웨덴 사람들은 한국 애기들을 ‘양자’로 Adapt[2]하는 일이 많은데 한국의 어떤 중개업자들은 부양능력 없는 딱한 한국 부모들을 설득하여 ‘친권’을 포기하게 하고 그 어린이를 스웨덴의 양부모에게 내어주는 모든 절차를 맡아 해주는 것이다. 스웨덴의 양부모들은 한국에 와서 애기를 타간다. 조막[3]만한 생명을 비니루 봉지에 넣어 들고 간다. 그 중에는 제법 큰 아이들도 있다. 7, 8세로 10대 소년까지 섞인다. 스웨덴 공항에 내리자 아이들은 각기 낯선 ‘양코백이’들에게 끌려간다. 제각기 혼자다. 철든 아이들도 그때에사 자기들이 팔려가는 것을 알게 된다. 마구 통곡하기 시작한다. 안 가겠다고 자기 부모들을 부르며 길바닥에 딩군다. 기진맥진하여 앉은채로 잔다. 서서 울던 아이들은 선대로 꾸벅꾸벅 존다.”

신필균 여사의 마음에는 ‘차마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인상밖에 남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입양한 한국 아이들 인구가 8천에서 1만명 선에 이르고 있단다. 오랜 후일에 어떤 역사가 형성될른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 후예에서 스웨덴의 “요셉”이 태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하느님은 고난을 통하여 영화(榮華)를 빚어낸다. 그러나 심판이 앞선다는 두려움이 있다.



[각주]
1. 신필균 – 1947년 경기 남양주 출생. 1971년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 사회학 석사를 마쳤다(1973년). 스웨덴 사회보험청 책임연구원(1988~1995) 등을 역임하였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크리스찬아카데미 사회교육원 원장(1996~1999), 김대중 정부 대통령 비서실 시민사회비서관(1999~2002), 2006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에 선임되었다.
2. 문맥상 adopt(채택하다, 입양하다)
3. 조막 – 주먹보다 작은 물건의 덩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범용기 제3권] (115)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와싱톤에

와싱톤에 3월 11일(목) - 오후 6PM에 이상철 목사와 함께 토론토 공항에 나갔다. 나는 7:30분AM에 출발하는 A.A.기로 와싱톤에 직행하여 9:15AM에 National Airport에 내렸다. 이근팔 사무국장이 공항에 나와 있다. 그길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