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31일 화요일

[범용기 제4권] (3) 서장 - 短章이라는 것

短章이라는 것

한국에서는 글을 쓸 때, 集(집), 篇(편), 章(장), 節(절) 등으로 정리한다. 그것은 문장이 그 문장을 쓴 인간과의 Integrity[1]를 읽고, “파편”으로 딩굴지[2] 않게 하기 위해서다. 실에 꿰매는 작업일 것이다.

短章(단장)[3]이란 것은 그 때, 그 때에 “먹구름”을 뚫고 “반짝” 섬광을 던지고서 사라지는 순간의 생각을 낚은 글이라 하겠다.

그것은 “논문”이 아니기에 “체계”를 무시한다. “시상”은 담겨 있어도 “시” 자체는 아니기에 “型”(형)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목적행위”로 행동하는 “인간의 삶”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

“단장”은 삶을 찔르는 “바늘”(針)이다. 그것이 병 고치는 주사바늘일 수도 있다.



[각주]
1. Integrity – 진실성, 도덕성, 위상, 고결함, 온전함
2. 딩굴다 - ‘뒹굴다’(누워서 몸을 이리저리 구르다)의 비표준어
3. 단장(短章) - 짧은 문장이나 시가

2026년 3월 30일 월요일

[범용기 제4권] (2) 서장 -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해방 후 얼마 안되어 『친일문학』이란 책이 출판되었다. 크기와 부피가 “웹스터 떡슈내리”[1]만큼이나 한, 거대한 몸집이다. 거기에 일제시대에 친일한 분들의 행동기록, 단체, 주동자, 개인으로서의 회원명단 등등이 적혀 있는가 하면, 이름난 문인들의 친일작품까지 샅샅이 폭로된다. 그것은 쓰여진 그대로였고 이미 공개된 것이니만큼 어느 누구도 항의할 여지가 없었던 것 같다. 사실은 사실이지만 왜 이제 와서 그런 것을 들먹이느냐고 속으로 불평하는 ‘명사’[2]들도 없지 않았다지만, 명예훼손죄로 고소한 분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어느 문호(?)의 “천황찬가”란 일문 시는 드물게 보는 명작이었다.

국내 민족운동의 거물로는 이상재[3] 영감, 윤치호[4] 선생, 최린[5] 등등이 꼽히는 것이었다. 이상재 영감은 “지사”다운 마감맺히를 남겼지만 윤치호 선생은 비극을 남겼다. 국민복[6] 차림으로 남산신궁[7]에 오르내리시고 귀족원[8] 의원으로 일본국회에 드나드셨다. 그러다가 급작스레 “해방”되어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입국하고 보니 그 옛 친구들을 만나려니 부끄럽고 안만나려니 어색하고 양심은 끊임없이 불안하고 – 그래서 결국에는 개성에서 자결하셨다는 풍문이었다. 그 밖에도 그 동안에 변질된 분들이 수두룩했다. 그런 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만은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나 다름없는 마감날을 물려 주셨으니 두고두고 민족의 선생이심에 틀림없겠다.

강요된 행동, 입만으로의 “쎄리프”도 문제에 오르거든 하물며 제 손으로 쓰고 인쇄물로 공개된 글이 숨겨질 리가 있겠는가. “숨겨진 것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고 작은 것이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莫現乎隱莫顯乎微)[9]는 옛 어른의 말씀이 돋보인다.

우리가 이제와서 구태여 이완용[10]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의 후예는 얼마든지 있다. 실종된 “지사”들, 카멜레온의 얼굴들이 거릿바닥에 전시품처럼 너더분하다.[11]

나도 글을 써냈다는 축에 들지 못하지만, 따지고 보면 “빽넘버”와 함께 휴지통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도 많을 것 같으니 그런 “글”은 글이랄 수 없겠다. 그러면서도 고스란히 도서관 구석에 남아 천년만년 나를 대변하거나 나를 나무랄 것도 사실이다. 그 경우에 내 “글”을 속량[12]할 장본인은 “글” 보다도 나 자신의 삶과 죽음이 아니겠는가?



[각주]
1. 웹스터 사전(Webster Dictionary) - 19세기 초 노아 웹스터에 의해 편집된 사전들, 혹은 노아 웹스터의 참여와 관계없이 웹스터의 이름을 채택한 수많은 사전들을 말한다. “웹스터”는 미국에서 영어 사전의 상표가 되었었고 영어 사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2. 명사(名士) -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
3. 이상재(李商在, 1851~1927) -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호(季皜), 호는 월남(月南). 충청남도 서천 출신. 아버지는 이희택(李羲宅)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1967년 과거에 낙방한 후, 1880년까지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의 집에서 개인 비서일을 보았다.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신사유람단에 합류하여 일본에 가서 개화된 일본을 보고 돌아왔다. 이후 1896년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고 만민공동회 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초야에 묻혔다가 1902년 6월 국체개혁을 음모하였다는 개혁당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가 1904년에 2월 석방되었다(이 당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국권이 빼앗긴 이후 YMCA 총무에 취임하여 사멸 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였다. 1919년 3ㆍ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1922년 신흥우 등 YMCA대표단을 인솔하여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에 참석하여 한국YMCA 창설에 기여하였다. 1922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 1925년 제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 한국 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7년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이 연합하여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4. 윤치호(尹致昊, 1866~1945) -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관료.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인 윤보선(尹潽善)의 5촌 당숙이다.
5. 최린(崔麟, 1878~1958) - 1878년 함경도 함흥 출생.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고우(故友), 도호(道號)는 여암(如庵). 일제강점기에 3ㆍ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었으며, 보성학교 교장(1911년), 천도교 도령(1929년), 중추원 참의(1934~1938, 1941~1945년), 매일신보사 사장(1938~1941년) 등을 지냈다. 1936년 ‘조선인 징병제 요망운동’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조선에 징병제 실시를 촉구했다. 해방 후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세 차례 공판을 받았고 그해 4월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1958년 12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6. 국민복 – 1940년 11월 2일, 일본 제국 정부에서 쇼와 천황의 칙령 형식을 빌려 공포한 “국민복령”(쇼와 15년 칙령 제725호)에 따라 정해진 일본 제국 내 남성을 위한 표준 제복이었다. “국민복령”은 전시의 물자 통제령 하에 있던 국민의 의복 생활을 간소ㆍ획일화하여 효율성을 도모하기 위해 육군성의 주도로 만드러졌다.
7.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朝鮮神宮)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부의 남산에 세워졌던 신토의 신사이다. 1925년 당시에는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가까운 43만 제곱미터의 대지 위에 15개의 건물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에 일본인들은 스스로 하늘로 돌려보냄을 의미하는 승신식을 연 뒤 해체작업을 벌였고, 10월 7일에 남은 시설을 소각하였다. 이후 조선신궁 자리에는 남산공원이 조성되었고 안중근을 기념하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다.
8. 귀족원(貴族院) - 일본제국 헌법에 따라 설치되어 중의원과 함께 입법부(제국의회)를 구성한 기관. 귀족원령(1889년 칙령 11호)이 정하는 바에 따라 왕족ㆍ화족(작위를 갖고 있는 사람과 그 가족)ㆍ칙임(덴노의 명으로 임명)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1947년에 폐지되었다.
9. 『중용』 제1장에 나오는 말.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愼其獨也니라”(숨겨진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며, 작은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이다).
10. 이완용(李完用, 1858~1926) -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 1958년 경기도 광주에서 가난한 선비 이호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세 때 판중추부사 이호준에게 입양되었고, 13세 때 명문가문인 조병익의 딸과 혼인하였다. 25세 때 증광별시에 급제하여 관계로 진출하였다. 민비의 총애를 입고 수구파의 한 사람으로 개화파를 정적으로 삼았다. 구한말 미국과의 교류가 긴요해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1887년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비롯한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1887년 알렌의 인도로 미국으로 건너가 1년간 체류하였다. 귀국 이후 대미외교의 1인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5년 친미 친러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박정양 내각이 성립되자 학부대신으로 임명되어 알렌의 이권 획득 요구에 적극 협조하였다. 1896년 알렌의 후원하에 이범진 등 친러파와 공모하여 ‘아관파천’을 성공시키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896년 7월부터 1898년 초반까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으나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진 책임으로 제명처분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승리하자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하였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기 위해 조약 체결을 강요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을사5적’ 가운데 한 명으로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한 스승’으로 떠받들었다.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정미7적’ 가운데 한명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다. 1909년 12월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서 이재명의 피습을 받아 치명상을 입었으나 운좋게 살아났다. 1910년 8월 3대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 체결 협상을 벌이고, 동년 8월 22일 어전회의에서 순종 황제를 압박하여 합병조칙을 받아내면서 ‘경술9적’ 중 1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합병에 관한 공로로 백작의 작위를 받았고, 1920년 후작으로 올라갔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게재하여 만세운동을 ‘망동’이라 비난하고 저항운동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1926년 이재명 의사의 칼에 폐를 다친 후유증으로 앓던 해수병이 악화하여 사망하여 전라북도 익산에 묻혔으며, 정치행적과는 달리 당대의 명필로 알려져있다.
11. 너더분하다 –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어수선하다. 듣기 싫고 번거롭게 길다.
12. 속량 – 몸값을 받고 종을 놓아주어 양민이 되게 함. 남의 근심과 고난을 대신하여 받음

[범용기 제4권] (1) 頌壽(송수) 六聠句(육병구)

頌壽(송수)[1] 六聠句(육병구)


엘리야를 부르신 하나님이

長空 先生을 일찍이 부르셨어라.

한밝[2] 겨레를 이끌고

카르멜[3]로 치달리도록

그래서 이세벨[4]과 바알[5]의 무리를

무찌르도록 하셨어라.


한밝 겨레의 엘리야도

이윽고 광야로 쫓겼어라.

하늘 나는 까마귀가 없었더라면

그인들 어이 견디었으랴.

어즈버[6] 이 기나긴 밤이

언제 새려 하는고야.


제3일이 동틀무렵인데

땅은 해를 머금고 토하려 않는고야.

뭍들과 바다들도

짐승들과 새들도

아직은 깊은 잠 졸려

깨려하지 않는고야.


그는 아직도 기다려라

영광스런 그 약속의 날을

못내 기대려라[7]


발돋아 기다려라.

東녘이 마침내 활짝이

꽃망울로 터지기를


그의 헤어진 옷은

누가 물려 받을 건가[8]

그 가슴에 타는 불은

누가 받아 피울 건가

昇天(승천)의 그 기약엔

타고 가실 불수레[9]


태양아 어서 떠오르라

대지야 어서 꽃피어라

골짝마다 살울림[10]

決士(결사)엔 흥타령

長天(장천)[11]에 비낄

서광[12]의 아침이여


一九八一年(1981년) 十一月(11월)

오타와에서

鄭大爲(정대위)[13]ㆍ李朱善(이주선)



[각주]
1. 송수(頌壽) - 80세를 일컬음. 아마도 1981년 장공 김재준의 80세 생신을 맞이해서 헌사한 시
2. 한 – 하나, 시(始)ㆍ원(元), 정(正), 영(永)ㆍ장(長), 광(廣), 중(衆)ㆍ다(多)ㆍ제(諸), 동일(同一)의 뜻으로 쓰임. 밝 – 본디 광명을 뜻함인데, 그것이 태양신의 대명사로 쓰였다. ‘한밝사상’은 대일광명을 뜻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종교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3. 카르멜(carmel) - 이스라엘의 지명. ‘갈멜’이라고 함. 아셀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지로서(수 19:26), 길게 뻗어 있는 이스라엘의 해안 평야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와 바알 제사장들이 누가 참 신을 예배하고 있는지에 대해 겨룬 산이다.
4. 이세벨 – 페니키아의 해안도시 티레와 시돈의 군주였던 제사장 겸 왕인 에드바알의 딸이었다. 이세벨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BC 874~853경 재위)와 혼인한 뒤 아합을 설득하여 티레(두로)의 자연신 바알 멜카르트를 숭배하게 했다. 강한 정열을 가진 이세벨은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으므로 야훼의 예언자들 대부분이 이세벨의 명령으로 죽음을 당했다. 그녀는 결국 엘리야의 예언처럼 창문 밖으로 떨어져 개에게 먹혔다(BC 843년경).
5. 바알(Baal) - 고대 중동 지역에서 풍요의 신으로 알려졌던 고대의 신. 원래 셈족 언어로 ‘주인’이나 ‘소유자’라는 뜻의 보통명사였으나 BC 1400년경부터 풍요의 신이라는 의미로 숭배되기 시작했다. 유일신인 야훼를 믿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배교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후일에는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의 신으로 변천하게 되었다.
6. 어즈버 - ‘아’의 옛말
7. 기대리다 - ‘기다리다’의 방언
8. 열왕기하 2장에서는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할 때 목격한 엘리사가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웠다고 기록되었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13~14절)
9. 열왕기하 2장에서는, 엘리사와 함께 있던 엘리야가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왕하 2:11)
10. 원문에는 ‘살울림’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상 ‘산울림’인 듯
11. 장천(長天) - 멀고 넓은 하늘
12. 서광(曙光) - 새벽에 동이 틀 때의 빛
13. 정대위(鄭大爲, 1917~2003) - 목사·교육자. 독립운동가 정재면의 아들로, 1917년 만주 용정에서 태어나 1935년 평양숭실학교를 거쳐 1941년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문학부 신학과를 졸업했다. 그후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959년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5~47년 조선신학교 전임강사, 1946~56년 한국신학대학(지금의 한신대학교) 교수 및 서울 초동교회 목사, 1953~56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한국위원회 사무국장, 1959~61년 건국대학교 문리대학장, 1961~68년 건국대학교 총장, 1968년 독일 함부르크대학교 초청교수, 1968~69년 캐나다 토론토 한인연합교회 목사, 1969~83년 캐나다 오칼턴대학 교수, 1983~87년 한신대학교 학장을 역임했다. 이후 캐나다로 돌아가 강연활동으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 〈기독교와 역사〉(1949)ㆍ〈그리스도교와 동양인의 세계〉(1986) 등이 있다.

[범용기 제3권](각주해설판) - 목차

〖 범용기 제3권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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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목사의 자서전 『범용기』(각주해설판)을 발행하며

머리말


序章 : 1970년대 초기의 다양한 변화(1970~1973)


관용ㆍ정희 결혼하고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정계의 파노라마와 남북공동성명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때

 

캐나다에 갔다 오고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1974. 1. 8 긴급조치

 

北美留記 第一年 1974

 

한국인의 캐나다 이주와 상철

 

北美留記 第二年 1975

 

北美留記 第三年 1976

 

野花園 餘錄

 

北美留記 第四年 1977

 

野花園餘錄

 

北美留記 第五年 1978

 

野花園餘錄

 

北美留記 第六年 1979

 

범용기 제3권을 엮고서


부록 :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및 휘호



[범용기 제3권] (255) 범용기 제3권을 엮고서

범용기 제3권을 엮고서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논할 것 없이 “기록”이 없으면 역사도 없다. 중국이 동양에서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건들어지지지 않는 아무도 멸시할 수 없는 거대한 나라로 지축에 뿌리 박은 것은 6천년 때, “기록”을 갖고 있는 나라기 때문이다. 그 기록이 왕조사(王朝史)만이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친 깊은 바다 같은 풍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四庫全書”(사고전서)[1]만 겉으로 볼 기회도 가져보지 못했지만, 그 문헌의 목록만 훑어보는 것 만으로도 한 사람의 평생을 요할 것이라고 한다. 놀라운 “건조물”을 남긴 민족도 있다. 그러나 “기록”이 수반하지 않은 건조물은 역사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아메리카 인디안의 “잉카문명”이란 것이 “신비”로 남아 있지만, 기록이 없으니 자랑도 없다.

우리나라 역사도 그렇다. 단군 千年(천년), 기자 천년이라지만 우리로서의 기록이 없다. 적어도 2천년은 “공백”이다. Black다. 위만 조선도 제대로의 기록이랄 수 없다.

삼국시대의 중 “일연”[2]이 비로소 우리 민족 국가로서의 기록을 쓰기 시작했고[3], 김부식[4]이 “친중국”적인 기록을 썼다고 한다.

기록은 반드시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도 좋다. 위인전기 아닌 한 범인[5]의 삶의 기록이라도 무방하다. “위인”의 기록은 얼마 쓰여져 있지만, 그것도 공적인 영웅적인 사건 기록에 국한된 것이 거의 전부라 하겠다.

그러나 그런 공적인 사건보다도 그 사건 뒤에 움직인 Personal한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그리고 그 Personal한 것 뒤에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더 두려운 역사를 그린다.

김구 선생은 “白凡逸志”를 남겼기 때문에 우리는 그이를 좀 더 진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서재필 박사는 자신의 자서전을 남겼기에 더 친근하게 모실 수 있게 된다.

“長空”의 “범용기”는 첫권 머리말에서 고백한대로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초라한 삶”을 “기록”한 것 뿐이다. 영웅적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기록이다. 한 가지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를 나 되게 한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싶다”고 할 수는 있겠다.

“제3권”도 그런 각도에서 용납해 주면 고맙겠다. 대를 이어 건투하는 한국민주화 운동에 전진하는 동지들에게 축복있기를 빈다.

1982년 除後 長空



[각주]
1. 사고전서(四庫全書) - 중국 청나라 건륭 황제의 명으로 편집된 중국 최대의 총서. 1772(건륭 37)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1782(건륭 47)년에 완성되었으며 궁중에서 소장하고 있던 서적 외에 전국의 민간에 소장된 서적을 전국에서 골라 모아서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네 부문으로 나누었다. 모두 3,503종 7만 9,337권을 수록했다. 7부(部)를 작성하여 여러 서고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2. 일연(一然, 1206~1289) - 고려 충렬왕 때 <삼국유사>를 편찬한 고려의 승려. 경주의 속현이던 장산군(章山郡,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아버지 김언필(金彦弼)과 어머니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견명, 자는 회연, 호는 무극, 목암으로 최씨 무인정권과 밀접한 유대를 가지고 있던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 정림사에 머물면서 남해분사에서의 작업에 참가하게 됐다. 원종 2년 명에 따라 선월사에 머물면서 지눌의 법맥을 계승했다. 중앙정계와 관련을 맺은 후 이를 배경으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썼다. 충렬왕 3년 명에 따라 운문사에 머무르면서 <<삼국유사>>의 집필에 착수했다. 특정 신앙이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불교신앙을 표방하는 저술을 찬술했으며, 선과 교를 막론하고 많은 불교 서적을 편수했다
3. 일연이 삼국시대의 스님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삼국시대에 대한 저술을 의미한다.
4. 김부식(金富軾, 1075-1151) - 신라왕실의 후예로 증조부 위영이 신라가 망할 무렵 고려 태조에게 귀의,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이 되었다. 그의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은 아버지 좌간의대부 근 때부터였다. 그는 고려 중기 정계에서 활약한 부필ㆍ부일의 동생이며, 부의의 형이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했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입지, 호는 뇌천. 고려 문종 때 서경 천도를 주장한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의 문신. 자는 입지, 호는 뇌천으로 인종 4년 이자겸이 제거된 뒤 경주세력의 대표로서 여러 직위에 올랐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경주계통 문신귀족의 역사적 정통성 확보를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이외에도 20여 권의 문집이 있다고 전해지나 존재하지는 않는다. 늙어서는 개성 주위에 관란사를 원찰로 세워 불교를 수행하기도 했다.
5. 범인(凡人) - 평범한 사람


[범용기 제3권] (254)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1979년 除夜回錄(제야회록)

1979년 除夜回錄(제야회록)

79년 나에게 액운의 해였고 시련의 해였다. 그리고 노망(老妄)스런 해기도 했다.

가정적으로 맏딸 정자를 지난 연말에 먼저 보내고 금년에는 조카며느리 정옥을 저 세상에 앞세우고 줄곳 병석에서 신음하고 내 몸도 이런 병 저런 병으로 쇠잔한 생명을 먹고 있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읽는다.

“今是而昨非”(금시이작비)[1]가 “주홍글씨”처럼 내 살에 파고 든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님 은혜는 내 허물보다 컸다.

論語子張篇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子貢曰君子之過也如日月之食 焉過也人皆見之更也人皆仰之

(군자의 과오는 일식이나 월식과 같다. 과오가 있으면 사람들이 다 이를 보아 알고 그것을 고치면 사람들이 다 우러러 본다.)

“군자”란 것은 “도덕적인 지성인”을 말한다. 나 같은 인간이 “군자”축에 들겠는지, “소인”배에 들것인지 모르긴 하지만,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전자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아직도 “소인”의 테두리를 방황한다.

“전 우주와 만물, 전 인간과 역사”를 “신”의 사랑 안에서 포옹하는 그날이 오면 그 밝은 속량의 찬가가 그 검은 배경 때문에 더욱 돋보일 것이 아닐까.

시편 제1편을 읽으며 제야의 종을 울려보낸다. (끝)



[각주]
1. 今是而昨非(금시이작비) - 오늘은 옳고 어제는 그르다


[범용기 제3권] (253)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토론토에서는

토론토에서는

12월 25일(화) - 성탄날이다. “할머니”는 어제부터 열이 높아 효순의 주선으로 스카보로 종합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11AM에 나는 연합교회 성탄예배를 참석했다.

12월 26일(수) - 아침 8시반에 경용은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갔다. 전문의가 진단한 결과는 “폐렴”이란다. 입원수속을 끝냈다.

병실은 W.479실이다. 2PM에 나는 경용집에 돌아와 할머니 대신 꼬마 손주들을 돌봤다.

점심식사에는 효순이 준비한 빈대떡을 먹었다. 돼지고기 김치 등속[1]을 섞은 녹두지짐[2]이다. 별미였다.

전화로 “어머니” 입원한 소식을 이 목사와 혜원에게 알렸다. 은용에게는 전화가 통하지 않았다.

12월 28일(금) - 입원한 처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은 병원에 오지 말라는 것이다. 효순이 출근 중에 정성껏 돌봐줘서 맘 든든하고 많이 나았다고 했다.

민중신문사에서 신년휘호를 부탁하기에 나는 “陰風霧散 陽光遍照”(음풍무산 양광편조)라고 써 보냈다.

새해에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12월 29일(토) - 집에서 쉬었다. 교회 여러 분회에서 여러 가지 선물을 갖다준다. 정화가 병원에 와서 “할머니” 문병했고, 이 목사 부부, 은용 부부와 하륜, 남희도 왔다.

은용 부부와 아이들은 마캄의 경용 집에 들어 밤늦게까지 놀았다. 하령ㆍ하륜 등 사촌끼리가 그렇게 친할 수 없었다.

효순은 병원에서 근무한다. 효순은 정화네와 나를 병원식당에서 치킨디너에 초청했다.

밤 경용 집에 유숙했다.

12월 31일(월) - 1979년 마감날이다. 효순은 집안을 청소하고 오후 세시에 병원에 출근했다.

나는 서독 친구들에게서 부탁받은 신년휘호를 썼다.



[각주]
1. 등속(等屬) - 두 개 이상의 사물을 벌여 말할 때, 그 마지막 명사 뒤에 쓰여, 그 명사들과 비슷한 부류의 것들을 묶어서 나타내는 말
2. 녹두지짐 – 껍질을 벗겨 물에 불린 녹두를 갈아서 나물이나 고기 따위를 섞어서 번철에 부친 전


[범용기 제4권] (3) 서장 - 短章이라는 것

短章이라는 것 한국에서는 글을 쓸 때, 集(집), 篇(편), 章(장), 節(절) 등으로 정리한다. 그것은 문장이 그 문장을 쓴 인간과의 Integrity [1] 를 읽고, “파편”으로 딩굴지 [2] 않게 하기 위해서다. 실에 꿰매는 작업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