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30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252)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보쿰에서

보쿰에서

12월 14일(금) - 조반 후에 산중호 여관을 떠나 장 목사 내외분 동승 “보쿠움”에 갔다. 보쿠움 중국음식점에서 국과 채를 먹었다.

토론토에 가서 성탄선물로 나눠줄 자자부레한[1] 선물들을 샀다.

보쿠움 병원 우리 간호원들과 부근의 우리 교포들이 보쿠움 병원 우리 간호원 기숙사 한 방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예배 순서와 사회는 거기 모이는 간호원 아가씨들의 자치에 맡겨져 있었다.

장 목사는 설교만 한단다. 오늘은 내가 설교했다.

부근에 있는 강대인 군이 와서 예배에 동참했다. 대인군 아파트에 가서 늦게까지 얘기했다. 부인이 덕스럽고 첫딸애 윤애는 영리하고 귀여웠다.

본국에서는 계엄령은 선포되고 군인끼리 분열되어 총격전까지 있었다고 한다.

대인군 Apt.의 한 방에서 유숙했다. 윤애는 두 살백인데 한국말 독일말을 곧잘 한다.

“나는 할아버지가 셋이다. 강 할아버지, 김 할아버지, 이 할아버지!”

점심 먹고 떠날 때에는 할아버지 간다고 마구 운다. 수유리 명은애 같이 귀엽다.

6PM에 이삼열 박사 부부의 Apt.에 옮겨 거기서 유숙했다. 전기담요 속이 따뜻해서 온천장의 하룻밤을 연상시켰다.

12월 16일(일) - 오후 2시에 보쿠움 교회에 갔다. 이삼열 박사가 사회했다. 내가 설교 “인간의 시대”라고 제목을 붙였다.

점심식사는 교회에서 밥과 국과 김치를 준비했다. 질의문답 시간에는 “질의”보다는 걸고드는 반론이 많았고 “대답”을 기다린다는 것 보다도 자기 주장을 연설하는 사람이 많았다.

12월 17일(월) - 12시쯤에 장 목사 부부와 함께 듀이스벅 비행장에 나가 2시 30분발 “부리티쉬에야”[2]기로 서백림[3]에 날았다.

3:30PM에 서백림에 내렸다. 정하은 박사가 기다리고 있다. 그의 Apt.에 갔다.

오랫동안 쌓였던 정담과 그의 사하라 사막 여행담 등등이 새로 한시 반까지 계속됐다. Mrs. 정이 인절미를 꿀에 잰 중참을 들여왔다. 별미였다.

12월 18일(화) - 오전은 정 박사 댁에서 지내고 오후 6시에는 한독협회가 주최한 “한국의 날” 모임에 참석했다.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 백인들이 출석의 3분의 2를 점령했다.

말하자면 독일인에 대한 한국문화선전의 날이었다. 한국무용, 탈춤, 한국노래 등등이 연출됐다. 김문환씨가 지도감독한 것이란다.

김문환은 자기가 창작안무한 “고민”이란 무용을 자기 혼자 몸으로 연출했다. 괴로움 몸부림이 지금의 한국이란 뜻일 것이다.

정 박사 댁에서 유숙했다.

12월 19일(수) - 정 박사 집을 9PM에 떠나 푸랭크풀트에 날았다.

정 박사와 路上作別(노상작별)은 서운했다. 再會(재회)의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푸랭크풀트 공항에는 손규태 부부가 기대린다.[4]

곧장 토론토행 Luthansa기에 갈아탔다. 북극권을 넘어 몬트리얼에서 한 시간 쉬고 토론토에 난다. 이 목사가 공항에서 맞이해 준다.

이 목사 집에서 그 동안의 정보를 교환하고 10시 반에 자리에 누웠다.



[각주]
1. 자자부레하다 - ‘자질구레하다’의 방언(평북, 함북)
2. British Air(영국 항공)
3. 서백림(西伯林) - 서베를린은 미국, 프랑스, 영국을 점령하던 지역을 통합하여 형성되었는데 옛 소련군의 점령지역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동베를린을 비롯한 독일민주공화국(동독) 내에 있는 자본주의 진영의 도시였다.
4. 기대리다 - ‘기다리다’의 방언


[범용기 제3권] (251)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西獨[서독]에

西獨[서독]에

79년 12월 5일(수) - 6:45PM Luthansa기로 출발, 6시간 직항하여 서독의 Frankfurt에 내렸다. 손규태 부부가 마중 나왔다.

손규태 집에서 아침 먹고 끝없이 쌓인 얘기 하노라 피곤을 잊는다. 한참 잤더니 몸이 풀린다. 교회 분들이 시내의 회전전망대에서 간단한 식사를 대접한다.

12월 9일(토) - 오전 11시 비행기로 함부르크 박명철 목사 교회에 갔다. 오후 4시에 예배가 있었다. 내가 설교했다.

박명철 내외분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부인은 간호원 베터랜[1]인데 오랜 삶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로 부군의 목회를 돕고 있었다.

박 목사의 좋은 상담역이고 동역자였다.

12월 10일(월) - 시내 중앙의 호숫가를 산책했다. 일기가 음산하고 춥다. 산책 기분은 동결(凍結)이다. 돌아와 쉬었다.

저녁에는 토론토에 이주했다가 다시 서독에 돌아온 이응천 씨 가정에 초대되었다. 회원 몇 사람 동석해서 시국담, 신앙담, 교회생활에서의 의문점 등등의 질의문답이 있었다. 12시에 박 목사 집에 돌아와 잤다.

12월 11일(화) - 겨울비가 내린다. 오전에는 집에서 쉬었다.

오후 한 시 반 비행기로 듀이스벅에 날았다. 약 30분 걸렸다. Ticket은 함부르크 교회에서 제공했다.

장성환 목사 내외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 목사 차로 장 목사의 선교지인 “루르” 탄광지대 그의 사택에 갔다. 사택 1층 객실이 내 침실이자 교회의 객실이다.

12월 12일(수) - 장 목사 댁에서 조반과 오찬을 대접받고 관광 Drive로 나가자고 한다. 두 후보지를 제시한다.

라인 강가 호텔에 유하면서 라인 강을 배로 오르내리겠느냐, 아니면 Saunesland Mohnesee 산중의 대호(大湖)를 차로 돌아다니다 오겠느냐였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전에 라인 강변 길은 왼종일 차로 달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변 가파로운 언덕이 모두 포도원이었고 거기 포도는 더 유명해서 값이 비싸다는 것도 그때 들었다. 그래서 다시 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구경한 山中湖(산중호)는 듀이스벅 동북방 120km지점의 고산지대에 있다. 관광호텔에 들었다. 제11호 독방에 짐을 풀었다. 전망이 좋은 방이었다.

장 목사 부부는 12호실에 든다. 바로 옆방이다. 밤 4시까지 그 동안에 장 목사가 겪은 시련의 고충담을 들었다.

12월 13일(수) - 조반은 호텔에서 제공한다. 점심으로는 장 목사 사모님이 준비해 온 도시락을 맛나게 먹었다. 얘기가 무궁무진이다.

오후에 다시 호반에 나갔다. 나는 호반의 落照(낙조)를 찍었다.



[각주]
1. 베테랑[vétéran] - 한 분야의 일을 오랫동안 하여 그 일에 관한 지식이나 기능이 뛰어난 사람


2026년 3월 29일 일요일

[범용기 제3권] (250)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전두환 등장

전두환 등장

79. 12. 12.에 전선사령관인 전두환은 소위 “숙군[1]쿠테타”를 일으켰다. “군인”인 박정희가 “군인”인 김재규에게 살해됐다는 것은 군율이 문란해졌기 때문이라는 구실로 우선 “숙군쿠테타”부터 착수했다.

그는 “박정희대통령살해사건” 수사를 지휘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의 직위에 앉았다.

“군”의 제1인자라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체포하고 자기 패거리인 “이희성 중장”을 대장으로 승격시켜 그 자리에 앉혔다.

동시에 “숙군쿠데타”에 동참한 수도경비사령관, 특전단 사령관을 등용하여 수비를 강화했다.

어떤 최고권력자가 급작스레 살해됐을 경우, 그 범인을 신속 체포하여 처형하는 것이 자신의 권력찬탈 행위를 정당화하는 가장 좋은 전략이란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그래서 박정희를 살해한 KCIA부장을 사형에 처함과 아울러 정승화 총장에게도 중형을 가하고 자기 자신이 KCIA부장직을 겸임하여 KCIA를 완전히 장악했다.

전두환은 이에 성공함으로써 박정희의 후계자란 면목을 세웠다. 그리고서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반체제의 제일인자인 김대중을 비롯하여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등 박정희 직계 실력자들도 체포해 버렸다.

그리고 이미 구상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자리에 취임함으로 해서 박정희를 계승한 권력의 제1인자가 됐다.

이 음모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육참총장 관저 부근과 국방성 주위에서 대규모의 총격전이 벌어져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 사상자 실수는 후일의 역사가가 밝혀줄 것이다.

지방으로서는 전라도가 눈에 가시같이 찔른다. 전라도는 야당 제1인자 김대중의 고향이니만큼 전두환에게 심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5ㆍ17 쿠데타 직후에 광주사변을 일으켰다.

일어났달 수도 있고 일으켰단 수도 있어 그 내막도 알숭달숭이다.

전두환은 “종주국”(?)인 미국 “인지”(認知)를 받아야 했다. 특히 군대는 미8군사령관의 지휘권 아래 있다. 전두환은 체제확립의 보장을 신임 미국대통령 “리건”에게 제청했다.

“리건”도 자기 정권의 “안보”를 위해서는 한국의 안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리건은 전두환의 요청에 따라 “전”을 와싱톤에 불렀다. 그래서 자기의 “매파”(鷹)로서의 외교자세를 과시했다.

“한국 정권이 안보만 제대로 해 준다면 인권탄압 등 다른 사태는 ‘내정불간섭이란’ 간판 아래 봐준다”는 식이었다. 말하자면 “민주”고 윤리고 없는 것이고 다만 집권욕만이 돋보이는 것이다.

그 후의 “미”와 “일”의 다국적 기업체는 “한국”이란 경제식민“의 옥토를 매점한 셈이 됐다.

어쨌든, 광주에서 천명 단위의 동족을 학살했다. 죽은 자가 280(?)이라지만, 병신된 자도 “죽은 자”를 부러워할 정도로 “삶”을 “죽음”으로 뒤틀고 있는 것이다.

“법” 없이 죽였으니 죽인 자는 “살인자”다. 국민이 가만 있을 수 없고 세계여론이 잠잠할 수 없다. 그러면 전두환은 무슨 소득을 노리고 그런 살인극을 저질렀을까?

추측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두 가지를 지적할 수는 있을 것 같다.

(1) 이 반체제 궐기 사건을 정적인 김대중과 관련시킴으로 김대중을 사형에 처하자는 것. 다시 말해서 자금출처, 지령 등을 조작하여 “김”을 국가반란죄로 처형하자는 것이겠고,

(2)는 “경상도 정권”(?)을 하나의 “왕조”로 존속시키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그 등용인물의 연고지와 근대화 시설의 경상도 집중 등의 실태를 보아 “억측” 이상임을 드러낸다고 보겠다.

이상하게도 “삼국시대”가 재현한 것 같게 됐다.

나는 그동안 “서독” 순방 중이었다.



[각주]
1. 숙군(肅軍) - 기강이 서 있지 않은 군대나 부정을 저지른 군인들을 엄하게 다스려 바로잡음


[범용기 제3권] (249)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공백 속 회리바람

공백 속 회리바람[1]

79. 10. 26. 박정희 암살은 그것 자체가 군사독재의 Period고 “민정”의 회복이라고 속단했었다.

그것은 국내나 해외를 막론하고 대다수 민주인사들의 관측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망적”인 관측이었다.

어쨌든, 국내에서는 김대중, 김영삼 등의 집권 경쟁이 암류[2]했단다. 국민운동이 정권운동으로 변모했다. 무기도, 군대도, 돈도, 지위도 없는 한사람 “야인”이, “권력 맛” 본 60만 군대를 어떻게 Nothing으로 취급할 수 있겠는가?

박정희에게 밀려난 대통령의 “서열”로 본다면 윤보선 씨가 제1번이다. 그이도 무시못할 존재다. 그에게는 적어도 돈과 지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에게는 국민이 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강력한 조직안에서의 “국민”이 아닌 한, 그것은 “오합지졸”이다.

그 동안에 비교적 영리하게 정계를 헴치던 김영삼에게 과도정권을 맡기고 김대중은 국민운동에 정진했어야 할 것이 아니었을까?

두 분에게 다 국가재건의 구체적인 청사진은 준비돼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군인” 경력이 없는 김대중에게는 60만 군대 통솔이 가장 큰 문제일 것이었다.

군대에는 38선이라는 “단절선”이 그들의 직접 책임 아래 그어져 있다. 그건 “평화선”이 아니라, “휴전선”이다.

“냉전”은 언제든지 “열전”으로 변모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6ㆍ25 동란으로 엄청나게 비대해진 국군은 군인 경험 없는 김대중을 “대원수”로 모시기에 불안을 느낀다.

다시 말해서 언제든지 쉽사리 쿠데타를 반복할 우려가 짙다는 말이다. “장면”이 “장도영”을 구슬릴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군”은 버릇이 나빠졌다. 거기다가 “미국”을 납득시켜야 한다. 경제파탄을 꿰매려면 “미”와 “일”의 자본을 얻어야 한다.

차관에는 그만큼 “이권”이 제공돼야 한다. 수월한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고언은 이른바 “주마가편”이고 결코 “평가절하”가 아니다.

김대중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심볼이고 자유 한국의 소망이고 그 신념과 양심 때문에 두 세 번 “죽음의 선”을 넘은 “베테랑”이다 그에게는 적어도 “변절”이 없었다.

그의 연설은 민중의 심장에 진실을 인친다. 박정희가 “제 갈 데로 간 다음의 공백기간 중에 그의 서울에서의 연설은 언제나 수만 명의 군중을 열광시켰다.

사실, 여야가 각기 단독 후보로 대결하던 선거전에서 그는 박정희를 훨씬 능가하는 득표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전대미문의 부정투표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은 지금도 그를 자기들이 선출한 대통령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박정희와의 대결은 자신의 기득권 주장에 불과한 것이오 “반란”이 아닌 것이다.

위에서 “청사진” 얘기가 났었지만, 1974년 3월초, 캐나다에 옮겨오기 몇 일 전에 “장공”은 자택감금 중의 그를 방문한 바 있었다. 그는 깊은 종교적 신념을 고백했다.

“하느님이 지금까지 몇 번이고 기적적으로 살려 주셨으니, 장차 무슨 심부름을 시키시려는 경륜이 있으신가 싶어 그 심부름에 충실하려고 밤낮 ‘청사진’을 그려보고 있습니다.

정부 조직부터 말단 동장, 반장에 이르기까지 조직망을 만들어 봅니다. 진짜 민주국가를 세워 보렵니다.

단계적인 남북통일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꿈을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된다면 그것도 하느님 뜻이고 하느님의 더 높고 깊은 경륜이라 믿고 아무 미련없이 순종하렵니다….”

나는 당신 몸은 민족의 몸이고 나라의 몸이니 부디 자중하라고 격려하고 나왔다. 그 때에 “군경”이 주위와 통로 변두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양일동”이 “민주통일당”인가 하는 정당을 만든 무렵이어서 “김대중” 집의 뜨락은 그 관계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마감 면회였다. 나는 해외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김대중은 반드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불의와 불법으로 “나라”를 찬탈한 전두환은 김대중을 죽여야 자기가 산다고 생각한다. 김대중은 자기 권좌(權座) 밑에 깔린 “바늘방석”이었다. 그래서 김대중 사형, 광주학살극을 연출한 것이리라.

지금 세계는 김대중 편이다. 김대중은 이제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살려야 할 의무가 있다.



[각주]
1. 회리바람 – 나선 모양으로 갑자기 빙빙 도는 바람
2. 암류(暗流) -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물의 흐름, 일이나 형편이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고 은근히 변하여 나아가는 기운


[범용기 제3권] (248)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이복규 목사 가다

이복규 목사 가다

11월 19일(월) - 한신졸업생 이복규 목사가 위독하다고 한다. 그는 임마누엘 한인연합교회 위임목사다.

간장염경화증으로 10년내 앓으면서도 목회했다. 모오닝싸이드 종합병원에 갔다. 완전 혼수상태였다.

79년 11월 21일(수) - 이복규 목사 세상 떠났다.

11월 23일(금) - 김익선 목사와 함께 이복규 목사 “빈소”에 갔다. 그 교회로서의 영결예배에 참석했다.

11월 24일(토) - 이복규 목사 장례식날이다. 9PM에 인철ㆍ혜원과 함께 Leaside United Church에 갔다. 거기서 노회로서의 이복규 목사 장례식이 거행된다기에 동참한 것이다.

그가 목회하던 백인교회원들이 진심으로 섭섭해 한다. 아이언부릿지교회원들, 로템암교회원들, 그리고 불루어스트릿한인연합교회원들과 본교회인 임마누엘교회원들로 조객이 초만원이었다.

장례식에서 노회를 대표하는 백인 목사가 영어로 설교했고 내가 나대로 한국말 설교를 했다.

이복규 목사는 백인교인들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선한 목자”였음에 틀림없겠다.

스카보르 장지에까지 가서 하관식에도 참석했다.

부인에게는 “강하고 담대하게 살라”고 격려했다.



[범용기 제3권] (247)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토론토에

토론토에

79년 11월 8일(수) - 최우길 집을 떠나 라과디아에서 11시 30분발, 12시 30분에 토론토에 내렸다. 이 목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이 목사 집에 왔다.

밤에 경용이 와서 “할머니”와 나를 자기 집에 모셔간다.

최인호 기자가 쓴 “맨발의 세계일주”를 읽었다. 어딘지 사람을 깔보는 신문기자다운 기행문이다. 눈치 안 보는 솔직한 패기가 풍겨있다.



[범용기 제3권] (246)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N.Y.에

N.Y.에

1979년 11월 3일인가 상철과 나는 N.Y.로 갔다. UM 주최 대(大) 시국강연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UM 사무국장 김정순 동지가 만반 준비를 진행시킨 것이었다.

11월 4일(일) - 만하탄 교회에서 예배하고 오후 5시부터는 UM 주최 대시국강연회가 Flushing 소학교 강당에서 모였다.

연사는 함석헌, 김상돈, 나, 그리고 김중태였다.

함석헌은 여기서도 “쾌이커”의 내적광명(Inner Light) 을 설명하고 있었다. 두 시간 이상 얘기한다. 늙은이가 원고도 없이 강연이라고 하노라니 얘기가 쳇바퀴를 돈다.

다음이 내 차례인데 내게 배당된 시간은 다 지나간지 오래다.

슬그머니 부화가 난다. 나는 민중민주주의를 내용으로 준비했는데 아주 요약해서 10분 동안에 마쳤다.

“인테리”가 민중 속에 들어가 “인테리민중”이 되고, 민중이 인테리와 한몸되어 “민중인테리”가 되야 한다. 학생층도 “인테리”다. 인테리의 첨단일지 모른다. 그런데 학생운동에 자신들을 국한시키려는 것 같다.

“우리는 기성세대를 불신한다…”는 4ㆍ19전통을 자랑한다. 노동자 계층과도 제휴하려 하지 않는다.

“일반시민은 가겠거든 가라, 우리는 학생기(旗)를 지킨다.” 6ㆍ3 사태 때도 그러했다. 그때 함석헌과 나는 투석전에서 “상이학생”으로 입원한 서울대학 학생들을 방문했었는데 냉담한 표정이었다.

문간에 집결해 대기하는 학생부대를 찾아 “우리 늙은 세대가 일을 잘못해서 학생들에게 누(累)를 끼치게 됐으니 미안하오. 잘들 해주시오!” 해도 학생들은 무표정, 무인사였다.

감옥에 갇혀있는 학생들을 방문했을 때에는 제법 인사성있게 대했다.

“우리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기쁩니다. 우리 걱정은 마시고 계속 민주운동을 지도해 주십시오. 저희도 나가면 또 하겠습니다….”

함석헌과 나는 학생들 돌팔매에 맞아 머리, 가슴 다리 등에 상처를 입고 입원 중인 경관들을 방문했다. 그들을 방문하는 시민들은 모르긴하지만 없는 것 같았다. 직계가족이 간호하고 있었다.

“얼마나 괴로우시오. 참으로 안됐습니다…” 하고 문병한다.

“감사합니다. 저흰들 학생들 심정을 몰라서 그러겠습니까? 어찌못해 그러는 것입지요! 용서하십시오!” 한다.

그는 치안국경감인가 되는 꽤 높은 직위의 사람이라 했다.

며칠 안되어 서울대 법과대학 학생들과 극소수의 고대생들이 놓여 나왔다. 학생회 주최로 석방 축하 Party가 종로회관에선가 열렸다. 노장측으로서는 함석헌, 이병린, 나, 장준하, 지학순, 계훈제, 송원영 등등이 초대됐던 것 같다.

석방환영 Party는 인상적이었다. 감옥안에서의 생활상 같은 것도 아주 신사적으로 보고된다. 석방될 때의 서약을 지킨다는 심사에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정수일”이 사회했다.

기독학생들은 달랐다. 그들은 신앙양심에서 우러난 “고백”에 따라 주체적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그들의 본영(本營)은 교회다. 그 무렵만해도 경찰에서 교회 내부에까지 손대지는 못했기에 기독학생들의 전략, 또는 작전참모상 교회당은 유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반학생들도 급하면 교회당에 몰려들었다. 신앙에서가 아님은 물론이다. “방공호”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모두 총력전이 아니면 개별격파의 위험선상에 서 있는 것이다. 학생 운동의 민중화는 반드시 이루워져야 한다.

“총력전”을 벌여야 한다.

이건 69년 때 얘기니까 10년 전 일이다. 그러나 지금에도 돋보이게 달라진 데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79년 11월 4일 N.Y.에서 열린, “박정희 제거 이후”의 첫 강연회에서 나는 “인테리의 민중화”를 다시 강조한 것이었다.

어쨌든, 강연회는 성공적이라고 UM사무국 관계자들은 자랑스레 말하고 있었다.

11월 5일(일) - 2PM에 교회본부에서 7인위원회원과 다른 동지들이 합석하여 광범위한 “뉴스”와 토의사항을 검토하고 대책을 강구했다. 마치고서 나는 악수 작별 – 최우길 장로 집에 갔다.

11월 5일(월) - 5PM에 N.Y. 지구 한신동창들이 최우길 집에 모였다. N.Y. 지구 한신동창회가 결성되고 신성국 목사가 회장으로 수고하게 됐다.

총무는 김영호 목사다. 첫 사업으로 장공기념도서관에 신간 서적들을 사 보내기로 했다. 장학금도 보낸단다.

11월 7일(수) - 최우길 집에서 혼자 쉬었다.

7PM에 김홍준 부부, 임순만 부부, 김정순 부부가 나를 중심으로 한식점에서 만찬을 나누면서 “뉴스”와 의견교환을 했다.

금후의 본국정세가 어떻게 변천되든간에 “박”의 총살은 우리에게 울분발산의 기회가 된다.



[범용기 제3권] (252)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보쿰에서

보쿰에서 12월 14일(금) - 조반 후에 산중호 여관을 떠나 장 목사 내외분 동승 “보쿠움”에 갔다. 보쿠움 중국음식점에서 국과 채를 먹었다. 토론토에 가서 성탄선물로 나눠줄 자자부레한 [1] 선물들을 샀다. 보쿠움 병원 우리 간호원들과 부근의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