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7일 화요일

[범용기 제1권] (21) 서울 3년 - 김영구의 죽음

김영구의 죽음

내가 쫓겨난 하숙집에 경흥읍교회[1] 장학생으로 서울 유학 온 김영구(金永九) 군이 한 방에 같이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아래였지만 믿음과 인품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런데 겨울방학이라 그는 고향으로 가고 나 혼자 있다가 이 봉변을 당한 것이다.

방학이 끝나고 그는 돌아왔다. 그 동안에 내가 당한 일을 알고 그가 갖고 온 학비를 몽땅 털어 주인집에 내고 내 이부자리를 도루 찾았다. 그리고 종로 3가의 하숙으로 같이 옮겼다. 일종의 속량(贖良)이었다.

나는 여비 생기는 대로 일본 간다고 맘먹었다. 『장도빈 선생이 한 달 치 20원만 주셨어도 「고베」쯤까지는 갈 수 있을 텐데!』 하고 혼자 궁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장 선생에게서 돈 나올 가망은 없었다.

새 하숙집에서는 제각기 독상 받는 팔자였으니 배고픈 신세는 면한 셈이었다. 김영구 군이 미열이 나며 시름시름 앓는다. 감기겠지 하며 학교에는 억지로 나간다. 갔다 와서는 와들와들 떨면서 앓는다. 나는 그때, 사람이 아프면 얼마나 아픈지, 또 얼마나 아프면 죽는 건지 도무지 철부지였다. 『감기』라니 감긴가 싶어 패독산 몇 첩 지어다 먹인 정도다. 그는 점점 더 앓는다. 열이 펄펄 타는데도 춥다고 온 몸을 사시나무처럼 떤다. 잠깐 들렀던 한의도 다음에는 오지 않는다. 진맥도 화제도 거부한다. 『의전』병원 무료진단실에 갔다. 『모르못도』처럼 학생들 실습용으로 실컷 시달리다가 『의전』교수 겸 내과과장인 일본인 의사의 강평시간까지 견디어냈다. 『장질부사인데 너무 늦었다!』, 『전염병이니 하숙집에 도루 보낼 수가 없고 돈이 없으며는 순화병원에 보내겠다』고 선고한다.

그 당시 순화병원은 『사망대기소』란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딱 잡아뗐다. 『이 병원 안 전염병실에 입원시켜 달라, 입원료는 문제없다』고 장담했다. 그래서 전염병동 제8호에 들어갔다. 고향 유학생 친구들에게서 있는 대로 거둬 입원료는 너끈히 물었다. 무시로 심부름 할 중년 일본 부인도 고용했다. 나는 식사 때 하숙에 들릴 뿐, 낮과 밤을 병상 옆에서 지냈다. 내 딴에는 성경 읽고 기도하고 믿음으로 위로하노라고 밤낮 아흐랫동안 그리했다. 하루에 두세 번 의사가 다녀간다. 주사하고 약 주고서는 별 말이 없다. 양력 세말이 왔다. 모두 설 쇤다고 의사가 안 온다. 병은 갑작스레 더 한다. 『긴급』이라고 떼를 썼더니 저녁 켠에사 의사 한 사람 들렸다. 그는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부른다. 『극상[2]했자 사흘 넘기기 어려울테니 본집에 전보하여 가족이 오게 하는 게 좋겠소!』, 『장이 여러 군데 구멍이 나서 복막염도 심하고……』, 『어쩌면 오늘 밤에라도……』 했다.

나는 나와 같이 있는 오촌 조카에게 말하고 고향 친구들과 그가 다니던 학교 당국과 그의 같은 반 학우들에게 급보를 전했다. 밤늦게 고향 친구들이 십여 명 모였다. 『영구』는 혼수상태에서 담이 오르고, 숨을 몰아쉬며 최후의 순간을 싸우고 있었다. 그와 우리와의 사이는 이미 단절되었다. 나는 둘러 선 친구들에게 『우리 최후의 기도를 올립시다!』 했다. 믿는 친구, 안 믿는 친구, 모두 숙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구가 눈을 뜨고 정신차려 또박또박 말을 하는 것이었다.

『왜들 이렇게 모였소?』

『기도드리려는 참이오!』

『아직 기도할 시간이 덜 됐는데 …… 어쨌든, 그럼 기도합시다.』 하고서 그는 기도를 시작한다. 나는 지금도 그 기도를 잊을 수 없다.

『주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무 살 될 때까지 주님이 길러 주셨는데 아무 한 일도 없이 주님 앞에 가기가 죄송합니다. 제가 떠난 후에도 주님, 경흥 본 교회를 축복하시고 가족들을 지켜 주시고 모든 친구들 인도하옵소서. 제가 다니던 학교 선생님들 학생들 축복하시고 여기 둘러선 사랑하는 친구들 위로 하옵소서. 저를 치료해 주시던 의사님, 간호원, 심부름 들어주던 일본부인 모두 주님께서 친히 복 내려 주옵소서……』 했다. 그리고서 『저는 이제 갑니다. 주님 용서하고 불러 줍소서.』 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구원은 주님 공로로 받는 것이고 일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오. 주님만 믿고 딴 생각 마시오』, 『남긴 일들은 내가 대신 최선을 다해 볼테니 상심 말으오』 하기도 했다. 그런 말이 얼마나 무서운 책임일 것을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하두 딱해서 어껼에 나온 말일 뿐이다. 그는 헛소리처럼, 『이렇게 자꾸 올라가면 어떻게요! 예! 반가와요』 하며 웃음이 활짝 피는 것이었다. 그것이 혼수상태에서 하는 소리였음은 물론이다. 어쨌든 그 동안 약 오분 – 그리고 마감 숨을 내쉬었다. 이것이 자정 바로 넘어서였다. 나는 이것을 아름다운 내세의 진입(進入)이라고 느꼈다.

승동교회[3] 김영구(金永耈)[4] 목사님이 시체실 앞뜰에서 간단한 영결예배를 보아주셨다. 『나는 부활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는 귀절을 본문으로 하여 영원한 생명을 말씀해 주셨다.

전염병은 『매장불허』란다. 『홍제동』에서 한 가닭 연기로 갔다. 이튿날 나는 작은 합에 든 유골을 안고 왔다. 얼마 안 되는 뼈 조각이 재에 섞여 있었다. 두려움도 위신도 품긴데 없는 한 줌 재, 놋화로의 나무 탄 재 이상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다.

뒤늦게 온 그의 형님이 그 한 줌 재를 안고 돌아갔다. 경흥읍 교회에서의 장례식은 성대했단다. 무덤도 덩그렇게 크다고 한다. 오랜 후일에 나는 무덤 앞에 낙엽송 두 그루를 심었다. 듣는 대로는 아름들이 거목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스무 살 되는 설날에 돌아갔다.

김영구 군의 최후는 나를 타계적인 신앙에로 휩쓸었다. 세상이란 이렇게 허무하다. 죽음 앞에 무엇이 남느냐? 한줌 재 아니면 흙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믿느냐? 그것은 죽음의 저쪽에 약속된, 영원한 천상세계를 얻기 위함이다. 『그 약속만 확실하다면 그것으로 만사는 해결이다』 하는 심경이었다. 종로 네거리 가고 오는 인간들이 『산송장』의 꿈틀거림처럼 보였다.

위에서 잠깐 비췄지만 그때 내 오촌조카 희용(熙鎔, 백부님 손자)도 나와 같은 하숙에 있었기에 이 일을 같이 당했다. 그러나 화장터에서 같이 돌아온 그는 하숙집 문에 들어서자 울었다. 『불쌍한 영구 스무 살 꽃 시절에 떨어져 타 버렸다니!』 하고 넉두리[5]까지 섞어가며 목 놓아 운다. 『하늘 영광에 참여했는데……』 하는 내 말은 그에게 전혀 Real하지 않은 모양이어서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각주]
1. 경흥읍교회 - 1910년 함북 경흥에 설립된 장로교회. 김계언(金桂彦)이 이주하여 전도한 결과 흥명(興明)학교 교장 김태훈(金泰勳)과 교사 김문협(金文協) 등 17인이 믿게 되어 흥명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1915년 선교사 스코트(W. Scott ; 徐高道), 목사 이두섭(李斗燮)ㆍ이정화(李正華)가 와서 사경회를 개최하였고, 1918년 채필근 목사가 부임하면서 부흥하였다. 그후 김관식(金觀植; 1921년 부임), 김유직(金有稷; 1922년 부임), 정기헌(鄭耆憲; 1923년 부임) 목사 등이 시무하였고 22년에는 포은동(浦恩洞) 교회를 개척하였다. 1940년 현재 장로로 안기진(安基珍; 1924년 장립), 김천현(金薦鉉; 1929년 장립), 김기정(金基楨; 1933년 장립), 김하진(金河珍; 1933년 장립) 등이 시무하였다. 이후 미상.
2. 극상 - 더할 수 없이 위이거나 제일 좋음
3. 승동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교회. 승동교회의 설립 역사는 공단골(현 롯데호텔 자리)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3년 북장로회 선교사 무어(Samuel F. Moore)에 의해 16명의 교인으로 시작되었고 일년 내에 교인 수가 43명으로 증가하였다. 그후 1901년 교회위치를 구리개(동천 : 현 을지로 2가 부근) 제중원(세브란스 병원 전신) 옆으로 옮겼고 교역자는 남장로회 선교사 레이놀즈(W.D. Reynolds ; 李訥瑞)와 북장로회 선교사 클라크(C.A. Clark ; 郭安連)가 시무하였다. 한편 설립자인 무어 선교사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낮은 신분이었던 백정들에 대한 인권회복과 선교활동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많은 백정들이 교회에 출석하여 양반들과 함께 예배를 보는 등 기독교정신에 의한 계급타파와 인권 평등의 회복으로 기독교윤리의 구현을 선봉적으로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도 하였다. 교회가 현재의 위치인 인사동으로 옮겨 오기 전 홍문수골교회와 합하였다. 홍문수골교회는 본래 독립교회로서 1900년부터 현 을지로 6가 자리에 소재했었다. 그것을 처분하여 새문안ㆍ승동(공단골)ㆍ연동 세 교회에 나누어 분배한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인적 물적기능을 공단골교회와 합하여 현재의 인사동 위치로 1905년 8월 1일 옮겨 승동교회가 된 것이다. 한편 당시 선교회의 교회설립정책이 한 지역에 여러 교회를 설립지원하는 것보다는 한 지역 내의 중심교회를 정하여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는데 경기도 일대에서는 승동교회가 중심교회로 지정되었다. 한편 승동교회는 항일 민족운동의 본거지로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승동교회가 거사의 진원지인 파고다공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던 때문에 거사를 진행함에 크게 용이한 점도 있었겠으나 승동교회 학생ㆍ청년 교인들의 투철한 민족정신이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9년에는 승동교회 하층에 경성성경학원을 개원하였으며 곧 조선신학교를 시작하였다. 그후 1959년부터 소용돌이친 장로교 교단분열의 수난을 가장 크게 입은 교회가 되었다. 제44회 총회의 속회장소로 승동교회가 제공되므로 반대측에 의해 승동파라는 명칭이 생겼고 곧 합동층 교단의 모체가 되었다. 그후 1960년 고신측과의 합동과 재분열의 홍역을 겪었고 마침내 교회건물과 대지를 둘러싼 법정소송까지 비화되었다. 교회문제가 법정계류중인 1968년 11월 이대영 목사가 별세하여 교회는 더욱 큰 혼란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1968년 2월 박일웅 목사가 부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969년 6월 위임목사가 되었고 그해 11월 건물관계 판결에 승소하고 1971년 5월에는 교회부지가 선교부로부터 완전 기증되므로 모든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4. 김영구(金永耈, 1887~1928) - 장로교 목사. 서울에서 출생. 일찍이 부모를 잃고 전도사인 외숙 신정균의 집에서 자라면서 신앙을 지니게 되었다. 1895년 한문의숙(義塾)을 거쳐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고 일어학교ㆍ영어학교ㆍ법률학교를 졸업하였다. 1908년 대한제국 탁지부 주임관으로 임명을 받았으며,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동직을 사임하고 북만주로 탈출하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이동령을 만나 같이 활동하다가(명동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함) 이동령으로부터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하라는 권고를 받고 귀국하였다. 잠시 법관과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14년 전북 김제와 고창(高敞)에서 한국인을 위해서 헌신봉사하던 일본인 장로 마스도미 야스자이몽(枡富安左衛門)의 도움으로 양태승ㆍ윤치병과 함께 일본 코오베신학교에 유학을 하였다. 1919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마스도미 장로가 세웠던 고창군 부안면 오산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921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6개월간 수학을 하고 서울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 조사로 활동하다가 1922년 승동교회 제5대 위임목사가 되었다. 서울에서는, 피어선성서학원과 연희전문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1925년 안식년을 맞아 일본으로 건너가 토오코오신학사(東京神學社, 현 東京神學大學)와 코오베신학교에서 연구하였다. 192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대표로 함태영 목사와 같이 종교법안을 반대키 위해 일본기독교 및 각 종교단체와 연합으로 활동하였으며 일본국회와 또 일본 문부대신을 만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기독신보>의 논설위원으로 문필활동을 통한 복음전도에도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1928년 미국에 유학하기 위해 준비하다가 과로로 인해 41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다. 아들 종수(宗洙)는 연희전문학교를 마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된 후 서울 영세교회를 설립하여 부친의 대를 이었고 그의 손자 충열도 다시 목회에 종사하여 3대 교역자의 대를 잇고 있다. 『토박이 신앙산맥 2』에 김영구 목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1910년 경 규암 김약연 선생(후에 평양신학교를 수학하고 1929년 목사가 됨)이 설립한 명동학교의 법률교사로 김철(金喆)이라는 선생이 부임하였는데, 그의 본명이 김영구(金永耈)로 고베 중앙신학교를 거쳐 승동교회 목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의 결혼식 때 축사를 했다고 한다.
5. 넉두리 - ‘넋두리’(억울하거나 불만스러운 일 따위가 마음 속에 있을 때 하소연하듯 길게 늘어놓는 말)의 비표준어

[범용기 제1권] (20) 서울 3년 - 하숙에서 쫓겨나

하숙에서 쫓겨나

나는 하숙집 밥값이 밀려 이부자리를 떼우고 그 추운 겨울 거리에 쫓겨났다. 그러나 내 심경은 오히려 드높았다.

그 무렵에 나는 『톨스토이 십이강』이란 책과 그의 저작집도 더러 읽었다. 부요한 귀족으로 자기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농민들과 노동을 같이 하면서도 오히려 부족하여, 어느 낯모르는 동네에 천한 머슴살이로 종신하고 싶어 팔십 노옹으로 몰래 집을 나와 야스나야 폴리아나 시골 작은 정거장 대합실에서 급성 폐렴으로 세상 떠난, 그 영원한 불꽃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나는 아씨시 성 프란시스의 전기를 탐독했다.[1] 그의 출가(出家) 광경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무일푼의 『탁발승』으로 평생을 걸식 방랑한 『공』(空)의 기록, 『공』에 회리바람처럼 몰려드는 하나님의 사랑 – 그것이 퍼져가는 인간과 자연에의 사랑 – 이런 것이 나를 매혹시켰다.

나는 하천풍언[2]의 『고베』 빈민촌 생활을 동경하며 『일등원』 그룹의 무소유 생활도 그려봤다. 그런 데로 가서 그런 그룹에 동참하고 싶었다.

어느 날 중년 거지 한 분이 다 떨어진 홋바지 저고리로 검푸른 살을 와들와들 떨며 내게 뭔가 달라고 했다. 나는 집에서 보내 온 새 솜바지 저고리를 몽땅 그에게 주고서 혼자 좋아 하기도 했다.

하숙에서 쫓겨난 날 밤에는 함박눈이 밤새껏 퍼부었다. 장안은 온통 『은세계』다. 나는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하얀 첫 눈길에 내 발자국을 인치며 하염없이 걸었다. 그때 하숙집은 종로5가 동대문 바로 곁이었기에 나는 종로 네거리, 황금정, 훈련원, 장충동 그리고 수구문[3]에서 지금의 신설동, 동소문까지 걸었다. 걸으면서 다시 생각했다.

『돈과 어떻게 대결하느냐?』 ① 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벌어서 남 못잖게 살자. ② 우선 돈을 벌어서 좋은 사업에 쓰자. ③ 애당초부터 돈을 멸시하고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청빈(淸貧)을 살자.

그 중에서 나는 제3을 택했다. 그것은 이미 위에서 말한 대로 톨스토이, 아씨시 프란시스, 그 밖에도 비슷한 분들의 영향이랄 수 있을 것 같다.

『돈과 하나님은 함께 섬기지 못한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기뜨릴 곳이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하나님 아들의 무소유 생활이 『태양』이었고 다른 분들은 그 『반사광』이었다고 생각된다.

『돈아, 네 권세가 어디 있느냐?』 하고 호통치며 살고 싶었다.

밤새껏 눈길을 거니고서 나는 배고팠다. 배고픈 게 영광이라 느끼면서도 먹기는 먹어야 했다. 나는 그때 동소문 안 지금 혜화동, 앵두밭 주인집에 하숙하고 있는 내 외조카 채관석 군을 찾았다. 그는 학비문제 없이 공부하는 행운아여서 이런 경험에는 생소했다. 마침 그에게 아침상이 들어왔다. 그는 밥 한 그릇 더 청해서 같이 먹었다.



[각주]
1. 김재준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전기를 탐독한 후 그의 전기를 동경의 송창근에게 보낸다. 이 시기 동양대학 문화학과에 재학 중이던 송창근과 편지 왕래가 잦았는데, 김재준의 원고를 받은 송창근은 성 프란체스코의 시 ‘태양의 노래’에서 ‘장공(長空’을 따와 김재준에게 호로 선사했다. 장공김재준목사기념사업회, 『장공김재준의 삶과 신학』, 한신대학교출판부, 2014, 40쪽.
2.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 - 일본의 종교가, 사회운동가, 저술가. 코오베(神戶)시에서 출생. 원로원 서기관의 아들. 만 4세 때 부모를 잃고, 토쿠시마(德島)에 있는 양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토쿠시마 소학교를 마친 후, 만 11세에 호적을 위조하여 토쿠시마 중학에 입학 재학중(1903) 메이어즈 박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1905년 동교를 졸업했다. 메이지 학원 신학부 예과를 거쳐(05-07), 코오베 쥬오신학교에 입학했으나(07), 그해 폐결핵으로 코오베위생병원 및 아카이시미나도(明石港) 병원에 입원, 체험기 <<사선을 넘어서>>를 쓰기 시작했다. 09년 코오베시 니이가와(新川)의 빈민굴에 이주, 빈민굴 구제사업에 착수하였다. 10년 학교를 마치고, 13년 시바하루꼬(藝春子)와 결혼, 14-16년 도미하여 프린스턴 대학에서 신학ㆍ생물학을 배우고, 귀국하여(17) 니이가와 빈민굴에 살면서 전도에 전력했다. 그는 일본의 빈민 운동을 비롯해 노동운동, 농민운동, 탁아운동, 그리고 그가 가장 열정적으로 정력을 쏟은 소비자 생활협동조합과 의료 생활협동조합을 탄생시킨 사회 운동가였다. 1940년 반전(反戰)사상으로 체포된 바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사회당 결성을 도왔고, ‘신일본건설 그리스도운동’을 벌였다.
3. 광희문(光熙門)

[범용기 제1권] (19) 서울 3년 - 장도빈 선생과의 인연

장도빈 선생과의 인연

3ㆍ1 독립운동에서의 「피」의 댓가로 위선[1] 『제등총독』의 『문화정치』가 선언되었다. 그것이 사탕발림의 회유정책이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사회』에서는 『민족주의』가 어였하게 외쳐지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한국말 일간신문이 발간되고 『개벽』 잡지가 나오고 공개강연, 학생토론회 같은 것도 비교적 자유롭게 열리게 되었다.

그때 백부님은 할빈에서 서울에 돌아와 한성도서주식회사를 경영하시면서 각종 도서 출판과 아울러 『서울』, 『학생계』 두 월간지도 내셨다. 『서울』은 장도빈 선생이 주간으로 계셨다.

장도빈 선생은 한말 지사로서 『국사』 전공이시고 한말의 언론인으로 저명하신 분이었으나 현실과 꿈이 맞지 않았으며 맞게 할 만큼 사무적인 분도 아니었다.

『서울』이 재정난과 당국의 간섭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장 선생은 『조선지광』(조선의 빛)이라는 단독잡지를 창간하였다.

그는 나더러 심부름을 하라 하셨다. 한 달에 20원씩 주마하신다. 그때 하숙비가 16원이었으니 밥은 굶잖을 것 같아서 그러기로 했다.

『조선지광』[2]은 꽤 부피있는 월간 잡지로써 글솜씨가 아무리 좋아도 혼자서 다 메꾸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장 선생은 여기저기 『글 부탁』을 하신다. 장 선생의 청탁 편지와 함께 내가 뛰기 마련이다. 덕분에 『허헌』[3] 씨 댁에도 몇 번 갔었다. 몇 자 안되는 원고였지만 약속기일에 되는 일은 없었다.

장 선생 댁에 몇 번 찾아가 봤지만 추위가 한창인데 방 안에 불기는 체온 이하라, 밖앝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장 선생님은 재만 소복한 놋화로에 콩알만한 불씨를 심어놓고 언 손을 비비고 계셨다. 간혹 바늘 같은 윗수염에 손이 가기도 했다. 원고지도 없어서 소학교에 다니는 따님의 도화지 뒷등에 연필로 쓰다가 신문지 귀등[4]에 적기도 하셨다. 그야말로 서발 장대를 마구 휘둘러도 거칠데 없는[5] 선비집이었다. 그러니 내게 약속한 이십 원 월급이 나올 까닭은 없겠고 따라서 매달 십륙 원씩의 하숙집 밥값도 밀릴때로 밀린다.

내복도 외투도 없는 단벌 학생복에 눈길 눈보라와 맞서 도보로 아현고개를 넘고, 애기능 언덕을 오르내려 『연희전문』에 간다. 백낙준[6] 박사의 약속한 원고를 가지러 가는 것이다.

그때 백 박사는 미국서 갓 돌아온 이글이글 타는 청춘이었다. 연전 문과에서 강의하시는 모양인데 원고기일 같은 것은 기억에도 없으신 모양이었다. 나는 세 번 네 번 허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원고수집, 편집, 인쇄에 넘기는 것, 교정(마감교정은 장 선생님이 손수 보셨지만), 서점배본, 월말 『수금』 등등 모두 나 혼자서의 독무대였다.

결국 『페지』 수를 줄이면서 3호까진가 내다 말았다.[7] 한 달에 20원씩 주신다던 것도 그럭저럭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각주]
1. 위선 - 다른 것에 앞서서
2. 『조선지광』 - 1922년 조선지광사에서 장도빈이 신문지법에 의하여 창간한 사회주의 성향의 잡지. 통권 100호로 1930년 11월 종간되었다. 편집인 겸 발행인은 처음 장도빈(張道斌)이었다가 뒤에는 김동혁(金東爀)으로 바뀌었다.
3. 허헌(許憲, 1884~1951) - 일제강점기 노동자, 빈민층을 위한 재판에 변호사로 활동한 법조인. 1945년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여 부위원장이 되어 여운형과 활동함. 1947년경 월북하여 김일성 대학 총장을 거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의원회 의장이 된다. 북한에서 여성정치가로 활약한 허정숙(許貞淑)이 그의 딸이다.
4. 귀등 - ‘귓등’의 북한어
5. “서발 장대(막대) 거칠 것 없다” - 서발이나 되는 긴 막대를 휘둘러도 아무것도 거치거나 걸릴 것이 없다는 뜻, 가난한 집안이라 세간이 아무 것도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6. 백낙준(白樂濬, 1895~1985) - 1985년 평북 정주군 관주면 출생으로, 장로교 목사이며 역사학자로 호는 용재(庸齋)이다. 1913년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신성학교 교장인 매큔(G. S. McCune)의 도움으로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1916년 9월). 매큔의 모교인 미주리 주 파아크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하고(1922년 6월), 미국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에 들어가 1925년 9월 졸업하였다. 바로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대학원에 입학해 종교사학을 전공하여 1927년 「조선개신교사」로 예일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 교장, 연희대 총장, 연세대 총장,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문교부장관에 취임 후 교육행정가로 활동하였다. 1960년 4ㆍ19 의거 이후 참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8월 초대 참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6년 9월 민중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고사하였고, 1967년 민중당과 신한당 양당의 합당추진을 지지하면서도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1980년 2월 국정자문회의 위원, 1983년 2월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였다. 1985년 1월 13일 사망하여,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7. 장도빈이 시작한 <조선지광>은 1924년 5월 이후에 김동혁이 발행인이 되어 통권 100호로 1930년 11월에 종간되었다. 김재준 목사가 언급한 ‘3호까지’가 장도빈 선생이 발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범용기 제1권] (18) 서울 3년 - 인쇄된 첫 글

인쇄된 첫 글

당시 백부님은 서울 견지동에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취체역[1] 겸 전무로 출판사업에 전념하셨다. 「서울」이란 월간 종합잡지, 「학생계」란 학생을 위한 월간지도 내셨다. 「학생계」 편집은 그 때 새파란 청년인 오천석[2] 씨가 맡았고, 「서울」은 주로 장도빈[3] 선생이 지도 편집하시던 것으로 생각된다. 장도빈 선생은 조선역사 전공이어서 한문으로 된 조선역사 문서를 한글로 번역하고 계셨다. 나는 그것을 정서하는 조수로 얼마 일했다. 하루는 양반세도 가문들로 조직(?)된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란 이름의 발기 취지문이 장도빈 선생에게 전달됐다. 장도빈 선생은 『아예 「大凍死蚊會」(대동사문회)라고 하지!』 하며 못마땅해 하셨다. 음은 같지만 뜻은 『크게 얼어죽은 모기들 모임』이란 것이다. 신날한 풍자라고 느꼈다. 그 당시 「학생계」에 학생 현상 문예란이 특설되었다. 나는 『이혼하려는 젊은이들에게』란 제목의 논문을 써 보냈다. 아마도 내 마음 심층에 누적된 숙제를 풀어보자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 당시 중학생들은 거의 전부가 조혼의 희생자여서 연애결혼에의 동경은 더욱 절실했다. 그런데 이혼의 관문은 굳데 닫혀 열리지 않았다. 무리한 이혼이냐 억지 화해냐의 중간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앓기만 하는 것이엇다.

가문 중심의 구식 결혼관은 어떤 개인이 다른 개인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문에서 다른 가문의 사람을 자기 가문의 성원(Member)으로 데려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결혼」은 두 인격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자웅(雌雄)의 동서(同棲)와 번식에 해당된다. 19세기 낭만주의에 영향된 학생으로서 이런 당면한 사태에 고민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학생의 아내된 여자의 세계는 다르다. 그들은 「결혼」과 함께 그 운명은 숙명으로 굳어져 출구가 없어진다. 그녀는 그의 사람이요, 그 가문의 사람이다. 그이와 그 가문에서 버림받는 순간 그녀의 삶은 무(無)가 된다. 「이혼」이란 관문의 빗장을 붙잡고 몸부림치는 젊은이의 처지는 비극이다. 그러나 이혼당한 「아내」란 여인의 경우는 더 큰 비극이다. 그녀는 무너진 하늘 밑, 버림받은 무덤 속에 산다. 그녀의 푸른 원한이 모든 삶에 서리를 끼어 얹는다. 그렇다면 위대한 미래를 꿈꾸는 학생으로서 자기를 하늘같이 믿고 목숨같이 아끼는 한 「인간」을 짓밟고 내쫓고서 민족이나 국가를 말할 수 있겠는가? 그건 진짜 「철면피」가 아닐 수 없다. 「이혼」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서 민족과 나를 말하지 말라!

대략 이런 내용의 글을 써 보냈다. 이것이 그 다음호 「학생계」에 이등 당선작으로 발표되어 인쇄물에 실린 내 글의 「호시」가 됐다.[4]

글을 써 낸다는 것은 쓴 사람이 그만큼 스스로의 삶에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 경우에도 그러했다고 본다. 아무리 철없이 쓴 글이라도 그것이 무시로 나를 고발한다.

내가 결혼식 때 「초례」에서 받은 엄숙한 인상과 아울러 공개된 이 글이 「운명」같이 내 삶을 묶는다.

지금, 나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와 평등을, 모든 문화유산의 꼬리표가 붙기 전 인간, 즉 인간이라는 그것 때문에 인정해야 하는 「인간」에게 무조건 부여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입장에서 볼 때 나는 내 아내의 인간적 존엄, 자유, 평등을 침범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운명을 사명으로 변질시키려는 은혜의 질서에서 주님의 연민을 구할 뿐이다. 그럭저럭 다 살은 인생이지만 이런 넋두리감은 아직도 남아 있다.



[각주]
1. 주식회사의 이사(理事)
2. 오천석(吳天錫, 1901~1987) - 감리교 오기선 목사의 장남으로 1919년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등부를 졸업하고 귀국, 1920년 7월에 월간지 <학생계> 주필로 활약. 도미하여 코넬대학(1925), 노스웨스턴대학(1927), 콜럼비아대학(1931)에서 교육학으로 학사, 석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광복 이후 미군정청 문교부차장ㆍ부장(1945~1948), 1960년 제2공화국 문교부장관(제8대) 역임.
3. 장도빈(張道斌, 1888~1963) - 독립운동가, 국학자, 언론인으로 평남 중화 출신이다. 1908년 은사 박은식의 소개로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가 되어 신채호와 논설을 교대로 쓸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채호, 홍범도, 이동휘, 이상설 등과 교류하였다. 1916~1918년 병고의 몸으로 귀국하였고 요양후 1919년에 ‘한성도서주식회사’를 허가내어 1926년까지 잡지 <서울>, <학생계>, <조선지광> 등을 발간하였다. 광복 직후 월남하여 『민중일보』를 창간하여 공산언론과 대항하였다(1949년 『민중일보』가 화재를 만나 재건이 어렵게 되자 윤보선에게 판권을 무상으로 양도하였다.). 단국대학교 설립자인 장형(張炯, 1889~1964)의 6촌 형으로 단국대학교 재단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4. 1921년 2월, 『학생계』 제6호.

[범용기 제1권] (17) 서울 3년 - 중앙YMCA

중앙YMCA

『만세』 이후 3ㆍ1운동 33인과 주요 관계자들이 감옥에 가고 그 뒤에 남아 학생들과 민중과 청년들에게 이 운동을 『의식화』시킨 본산이 서울 중앙 YMCA였다고 하겠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민족의식을 키우고 민족문화를 발굴하고 종교의 사회참여를 실천했던 것이다.

이상재, 윤치호 그리고 총무 신흥우 세 분이 어울려 네 일, 내 일 없이 날마다 뭔가 하고 계셨다. 간혹 미국서 명사가 오면 강연 한번 안 할 수 없었고 그 통역은 신흥우 씨 아니면 윤치호 선생이 담당하였다. 매 주일 오후 두시에는 빠짐없이 『일요강좌』가 있었다. 종교적 민족적 교양 강좌였다.

이상재 영감은 무던히 익살이셨던 모양이어서 많은 일화를 남기셨다. 한번은 일본 국회의원들이 민정을 살핀다고 한국에 왔었단다. 그들은 민간 원로 이상재 영감을 만나잖을 수 없었다. 그 일행의 대변인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중 하나가 이상재 영감 앞에서 『내선일체』를 논하고 『일본과 조선은 결혼한 한 가정』이라고 했단다. 이상재 영감은 당장에 『그게 강간이지 결혼인가?』 했다고 한다. 3ㆍ1운동 때, 이상재 영감은 그 축에 들지 않았지만 뭔가 몰래하고 있는 것 같아서, 경찰은 늘 불안해했다.

한번은 종로 경찰서장이 영감을 모셔다 놓고 『영감 누구하고 독립운동을 하는 거요?』 했단다. 이상재 영감은 『독립이란 혼자 선단 말인데 혼자서 하는 거지 누구는 무슨 누구야』 했단다. 성급한 일인이라 손이 뺨에 날라올려는 순간 영감은 『너희 왜놈들은 아비도 하래비도 없단 말이냐? 후레자식 같은 놈!』하고 호통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때 시인 변영노 씨는 한창 『청년』이라 Y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상재 영감은 그를 극진히 사랑하셨단다.

하루는 변영노 씨가 무심코 종로를 거니는데 뒤에서 이상재 선생이 변영로 씨 부친 함자를 부르며 『변○○씨 야!』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 돌아서면서 『왜 저더러 부친 함짜를 부르십니까?』 했다.

『이놈 너 변○○ 「씨」 아니야?』 하고 깔깔 웃으시더라는 것이다. 『씨』는 『종자』니까 『아들』에 해당한단 말이다.

송창근 형이 첨 서울 왔을 때 아니 이십이 되나 마나였는데 YMCA에서 이상재 영감을 처음 뵜단다. 「영감」께서 『바나나』 한 가닭 주시면서 먹으라고 하시더란다. 송 형은 처음 보는 과일이 뭔지도, 어떻게 먹는지도 몰라 어리둥절했다. 영감은 자기 손에 바나나를 껍질 채 한입 뜯어 자시는 체 했다. 송 형도 그렇게 했다. 『영감』은 깔깔 웃으시며 『저 촌놈 바나나 먹는 꼴 봐라!』 하고 놀리더라는 것이다.

어느 땐가 일요강좌에서 강연을 하시면서 『여러분도 정치를 할 줄 알아야 돼! 민족이니 나라니, 하면서 정치를 모르면 뭐가 되나. 정치라는 것은 저쪽에서 『장훈』하면 이쪽에서 『멍훈』할 줄 알아야 한단 말이지……』[1] 하시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종로경찰서 고등계에는 영감을 전담한 형사가 있었다. 그는 일본인이지만 영감을 존경하고 아버지같이 모시고 싶어도 했다. 영감께서 임종하실 때 그는 진정 마감 큰절이라도 드리고 싶어 달려갔다. 영감께서는 『조선 놈은 죽을 때에도 일경 입회 아래서 죽어야 하나?』 하시더란다.

그는 너무 억울해서 그 자리에서 통곡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Y는 겨울에 스팀이 돌아, 들어만 서면 훈훈한 것이 좋았다. 추운 『방랑 소년』인 나는 거의 매일 잡지실에 앉는다. 『개조』니 『중앙공론』이니, 그 밖에도 많은 일본 잡지들이 있어서 심심찮게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소년부나 청년부 회원도 아니고 사실 아무 닿는 데가 없었지만 누구냐 묻는 사람도 없고, 나가라 들어가라 건드리는 사람도 없었다.

『아다찌가와』(芥川龍之介)의 자살 직전 작품에 아찔한 깊이를 느낀 일이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자살했다는 기사가 났다. 『역시 그랬었구나!』 하고 나는 슬픈 독백을 뇌까리기도 했다.

나는 YMCA 영어 전수과 삼학년에 한 일년 다녔다. 정경옥[2] 군도 같은 반이었고 홍병덕 씨가 교무 책임자였다. 졸업시험도 다 같이 쳤는데 발표가 없었다. 홍병덕 씨에게 따져 봤다. 성적은 첫째지만 일년내내 수업료를 안냈으니 『학생』이랄 수 없잖느냐는 것이었다.

Y에는 강당 입구 옆에 김은호 화백의 『승천하는 예수』가 걸려 섬세한 아름다움을 품기고 있었다.

어쨌든, YMCA는 무일푼의 젊은 낭인을 괄시하지 않는다.



[각주]
1. 장기 용어로 북측에서는 ‘장군’을 ‘장훈’이라고 하고, ‘멍군’을 ‘멍훈’이라고 함
2. 정경옥(鄭景玉, 1903~1945) - 감리교 목사, 조직신학자. 1903년 5월 24일 전남 진도군 진도면 교동리에서 출생했다. 진도소학교를 거쳐 서울에 있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서울 YMCA영어반을 수료하고 일본유학에 올랐다. 도시샤(同志社)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하다가 1923년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게 되자 귀국하였고 곧 서울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7년 3월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에 미국유학에 올라 일리노이주 에반스턴에 있는 개럿(Garrett)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곳에서 당시 미국계에 대표적 신학자였던 롤(F. H. Roll)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그리스도 중심의 자유주의 신학에 심취하였다. 그는 그의 스승인 롤 박사의 미국적 경험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또 현대신학의 시조인 독일의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경험을 일단 긍정하고 리츨(A. Ritchle)의 기독교 도덕성을 함께 수용하였다. 1929년 9월에 그는 다시 노오드웨스턴대학의 대학원에 입학하고 2년 후 문학석사(M.A.)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계속 박사과정을 밟으려고 하였으나 그의 모교가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귀국하여 1931년부터 1937년까지 감리교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신학세계>의 주간도 맡으면서 재직기간 중 무려 60여편의 무게있는 신학논문을 발표하였고 저서로는 한국감리교의 교리적 선언을 신학적으로 해설한 <<기독교의 원리>>(1934년 간행)를 저술하였다. 특히 그는 1932년에 <위기의 신학>을 발표하여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바르트(Karl Barth)을 소개하였고 신학 이후로 계속 현대신학의 안테나 역할을 하여 젊은이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어 유능한 청년들을 신학도로 불러 훈련시켰다. 이런 그의 정력적인 교수생활과 저술활동은 그의 건강을 해치게 되어 1937년 3월부터 1939년 3월까지 2년간 그는 그의 고향 진도로 내려가서 요양생활을 하였다. 1939년 4월부터 그는 1년간 만주로 건너가 사평가(四平街)신학교 교장직을 맡았다. 1941년에 다시 고향 진도로 내려와 요양하던 중 일본의 태평양전쟁 도발 이후 친미파 인물로 지목되어 예비검속에 걸려 약 8개월간 재판도 받지 못하고 진도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는 석방되면서 1943년 2월부터 2년간 전남 광주교회(현 광주중앙교회)의 담임목사로 목회에 전념하면서도 청년들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토일요일 제외) 새벽 4-6시에 자기 방에서 10명 남짓한 남녀 청년들을 거의 3년간 심혈을 기울여서 가르쳤다. 그는 1945년 3월부터 복막염 수술을 두 차례나 했으나 별효과가 없었다.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의 총 3,500g에 달하는 수혈도 보람없이 조국 광복 4개월을 앞두고 1945년 4월 1일 “곧 날이 밝는다”라는 확신에 찬 말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의 천재적 소질을 마음껏 발휘하지도 못하고 요절하고 말았다.

[범용기 제1권] (16) 서울 3년 - 1920년대의 서울풍경

1920년대의 서울풍경

예정대로 서울에 닿았다. 여름철이라 사람들은 모두 풀먹여 빳빳하게 대림질한 하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다닌다. 고이적삼까지도 구김새 없는 모시로 입었다. 말쑥하게 땟벗이 한 문화족속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어딘지 매끄럽고 약해 보였다. 여인들은 아직도 장옷 속에서 눈만 깜박이는 모습이어서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 길이 없었다. 집들은 모두 납작하게 땅에 붙은 기와집인데 굴둑은 없고 길바닥 벽밑 구멍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와 보드러운 안개같이 퍼진다. 식전에 남산 잠두[1]에 올라가 보며는 온 장안이 연기에 잠겨 호수로 변모한다. 그래도 장작이 아니면 솔잎 연기여서 대기는 향긋하다. 이층집이라곤 한일은행, 식산은행[2] 등 몇이 있을 뿐이다.

나는 첫날밤을 여관에서 자고, 이튿날 다방골 백부님 댁을 찾아갔다.

『제가 왔습니다.』 하고 넙신[3] 절을 했다.

『언제 왔니?』

『어제 왔습니다.』

『어디서 잤니?』

『여관에서요.』

『이놈! 오는 길로 이리 와야지, 여관이 다 뭐니!』 하시며 백부님은 꾸중하셨다. 그리고서는 곧 미소를 띄우시며

『여기 사랑방에 거처해라!』 하신다.

서울 와서 맨 처음 듣기 어색한 건 손님마다 대문간에서 『이리 오너라!』 하는 호통소리였다. 집집마다 자기 몸종이나 둔 것 같이 오만하다.

또 하나는 쌀 사러 가면서 쌀 팔러 간다는 말씨였다. 가난한 양반의 얕은 허세를 연상시킨다. 자식 공부시키는 북청 물지게군이 훨씬 떳떳해 보였다.

그때 서울은 네 대문 안에 국한된 인구 15만의 소도시였다. 왕십리는 미나리 밭이었고 동대문 밖은 주로 초가집 시골동네였고 혜화동은 앵두밭이고 신당동은 논밭이었다. 창의문 밖은 능금밭이고, 수구문 밖은 무덤 위에 무덤인 공동묘지였다. 성북동 골짜기에는 송림 속을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흘렀고, 남대문 밖에는 작은 늪이 고이고 서울역까지에 초가집들이 다닥다닥 땅에 붙어 있었다. 세부란스 병원이 유난스레 서양식이었고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이 유일한 우리 모임터였다. 그리고 용산 일대는 일본 군대 주둔지어서 철저한 『외촌』이다.

남대문 옆에서는 성밖 서민들이 각쟁이[4]로 긁어모인 커다란 솔잎덩어리를 황소 잔등에 걸쳐 싣고 왼종일 사갈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는 생선장수, 두부장수, 콩나물장수 등등 지게꾼 행상이 독특한 창(唱)이 골목마다 메아리친다. 밤에는 『고학생 갈돕회』[5] 학생들의 『찐빵』 사라는 소리가 구슲었다.

남산 잠두는 아직 『신궁』으로 더럽혀지지 않았기에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그 때의 서울은 상수도 시설도, 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에 용감할 정도로 위생이 무시돼 있었다. 이질, 폐결핵, 장질부사 등속이 제 세상이라 뽐내는 판이었다.

공부한다고 서울에 왔는데 안할 수도 없고, 하자니 나이 스물 넘어 중학 첫 학년부터 시작하기도 멋적고[6],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한 학기에 한 학년씩 떼는 속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로서는 중동학교가 제일급으로 손꼽힌다고 했다. 나는 그 학교 고등과에 등록했다. 최규동 선생의 대수강의, 안일영 선생의 기하 강의는 하두[7] 유명해서 최댓수, 안기하로 통했고, 그 강의를 듣고서도 모르겠다는 학생은 삼등이나 등외인간일 거라고들 했다. 의전이나 『법전』 응시생은 거의가 여기서 마무리 작업을 받는데 입학률이 월등하게 좋다는 것이었다. 나도 성적이 나뿐측은 아니었으니까 제대로 밀고 나갔더라면 의전쯤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안될 말이다. 하숙비, 학비, 실험비 등등 톡톡한 밑천이 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내 성미에 맞지 않는 분야인 것 같았다.

하기방학이 됐다. 백부님이 잠시 귀향하신대서 나도 따라 나섰다. 부모 형제 한 집에 살았고 아내도 거기 있으니 『우리집』이자 『내집』이기도 했다.

가을학기 시작될 무렵에 백부님은 나를 데리고 다시 서울길을 떠났다. 내 어머니는 막내아들 보내기가 역겨워 십리나 따라 오시다가 큰 개울가에서 멈추셨다.

웅기항에 나오자 서울에는 호열자(Cholera)가 한창이라고 신문마다 떠들썩한다. 일제시대라 별란 기사거리도 없는 터에 이런 거라도 떠벌려 보자는 기자 근성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러고 보면 서울은 온통 코레라 『풀』(Pool)인 것 같이 느끼어진다. 백부님도 무작정 나를 데리고 떠나기가 안되어서 아버님께 편지로 문의한 모양이었다. 아버님의 회신이 『걸작』이다. 『人間萬事 塞翁之馬 安如非禍安如非福(인간만사 새옹지마 안여비화안여비복) 이리이까』 하는 것이었다. 뜻을 푸리한다면 아래와 같다.

『옛날 중국의 북쪽 국경 부락에 한 늙은이가 명마(名馬)를 기르고 있었다. 하루는 그 아들이 그 말을 타고 달리다가 떨어져 다리를 상했다. 늙은이는 절름바리 아들을 볼 때마다 『불행하다! 화로다!』 하며 슬퍼했다. 그런데 그 무렵에 전쟁이 터져서 성한 사람은 모두 징병에 뽑혀 전쟁에서 죽은 사람도 수두룩했다. 그러나 그 늙은이 아들은 병신이란 이유로 뽑혀가지 않았다. 늙은이는 잃을 뻔한 아들을 집에 두고 날마다 『즐겁다! 복이로다!』 했다. 그러니 어느 게 『화』고, 어느 게 『복』이라고 속단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은근하게 만류하는 말씀이다. 백부님은 나를 데리고 도루 큰집에 오셨다.

초가을이 지나고 아침저녁 서리발이 잡힐 때 서울의 『호열자』도 동결됐다. 이제는 간다고 다시 떠났다. 나는 서울에 내려 학교에 가봤다. 그 동안에 거의 한 학년과정이 나를 앞질렀다. 수학은 미분, 적분대로 뛰었고 물리, 화학도 방정식이 까다로워 『소귀에 경 읽기』였다. 나는 탈락자랄까 낙오자랄까 무어라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그 무렵, 서울 시내 장로교회 연합사경회가 승동예배당에서 열렸는데 강사는 유명한 김익두[8] 목사님이었다. 그는 원래 장돌뱅이 깡패두목이었는데 목사가 돼서 주로 부흥집회를 맡는다고 했다.[9]

서울에는 첫 『데뷰』다. 언어가 서민적이고 표현도 『속인』(俗人) 그대로였다. 거기에 또 병고치는 데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샀다. 예배당 안은 부인들로 찼고 남자들은 밖앝 뜨락과 담장 위에까지 앉았다. 설교는 예배당 이층 밖앝 현관에서 했다. 사람이 하두 많기에 나도 왼가싶어 가 봤다. 말씨가 구수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마감 날이었다. 그는 창세기 1장 1절을 갖고 설교했다. 『닭이 달걀에서 나오고 달걀이 닭에서 나오고』 이렇게 암만 따져도 해결은 없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이것은 사람의 이론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포다. 『그럼 하나님은 누가 말들었는가?[10] 누가 만들어서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건 만물 중의 하나요, 창조주 하나님은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믿음으로 아는 것이고 사람의 이치 따짐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자! 여러분! 믿으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당신 하나님으로 당신 생명 속에 말씀하실 것이오!』 그때부터 여러분은 『새 사람』으로 『새 세계』, 『새 빛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 백성』이 될 것이오!』 등등 나는 『옳다! 나도 믿겠다!』 하고 결단했다. 그 순간, 정말 이상했다. 가슴이 뜨겁고 성령의 기쁨이 거룩한 정열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성경말씀이 꿀송이 같고 기도에 욕심쟁이가 됐다. 교실에서 탈락한 자연인이 교회에서 위로부터 난 영의 사람이 됐다.

『새옹지마』(塞翁之馬)는 하늘의 복을 내게 심는 길닦이가 된 셈이었다.



[각주]
1. 잠두 - 누에의 머리 모양으로 솟은 산꼭대기
2. 식산은행 -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조서에서 신용 기구를 통한 착취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든 은행.
3. 넙신 - 머리나 몸을 크고 빠르게 구부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4. 각쟁이 - ‘갈퀴’, ‘쇠스랑’의 방언
5. 갈돕회 - 일제 강점기에 장택상 등이 가담하여 만든 고학생 자조 단체
6. 멋적다 - ‘멋쩍다’(하는 짓이나 모양이 격에 어울리지 않다)의 비표준어
7. 하두 - ‘하도’의 방언
8. 김익두(金益斗, 1874~1950) - 장로교 목사. 부흥사. 1874년 1월 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坪村)리에서 부친 김응선, 모친 전익선(田益善)의 독자로 출생했다.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하고 13세에 부친을 여의고 상업에 종사하다가 20세 이후 청년시절 술과 기생에 잠시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27세 되던 1900년 안악교회에서 서양선교사 스왈른(W. L. Swallon ; 蘇安論)의 「영생」이란 설교를 듣고 감동되어 그해 1월에 신앙을 고백하고 입교를 하였다. 그해 7월에 스왈른에게 세례를 받았고 1901년 재령읍(載寧邑)교회의 전도사로 첫 교역의 발을 들여 놓았다. 그해 10월 스왈른의 권유로 신천(信川)으로 옮겨 전도하게 되었고, 신천교회를 세웠다. 1906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4년후 졸업(3회)하였다. 그의 부흥회를 통한 활동은 192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의 설교에는 예수의 십자가와 그의 보혈, 회계와 천국, 부활의 복음이 신비로운 힘에 의하여 전파되었고 아울러 죄사함의 격렬한 경험이 현상화하면서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후 1920년 예수교장로회 제9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된 이후 서울 승동교회에서 가진 서울시 7교회의 연합부흥회에 1만여명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와서 김익두는 부흥회에 별로 나가지 않았으며, 1940년 신의주제일교회 부흥회에 갔다가 일경에 붙들려 교인들과 함께 신사참배한 사실이 있었다. 이 때문에 해방 후 채정민(蔡廷敏) 목사가 그의 실절(失節)을 꾸짖은 일이 있었다. 해방 이후에 김익두는 다시 북한공산당의 강요 때문에 1946년 11월 기독교도 연맹에 가입하였고, 1949년 기독교도연맹 총회의 총회장을 맡게 되었다. 김일성의 외조부격인 전 목사 강양욱(康良煜)의 감언이설 때문이었으나 김익두 자신의 허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1950년 10월 14일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하여 교회당 안에서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9. 1920년 가을 서울의 7개 교회가 연합하여 황해도의 김익두(金益斗) 목사를 초청하여 10월 10~26일까지 승동교회에서 도사경회를 개최하였다. 승동교회110년사편찬위원회, 『승동교회11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승동교회, 2004, 182쪽.
10. ‘만들었는가?’의 오기인 듯

[범용기 제1권] (15) 웅기서 서울로 - 웅기서 서울로

웅기서 서울로

때는 3ㆍ1운동 다음해 - 나는 그때 웅기 금융조합에 서기로 있었다. 나이는 스무 살.

웅기서 한 오리 떨어진 해변에 웅상이란 동네가 있다. 일찍부터 기독교촌이었다. 거기 출신인 송창근[1] 씨가 서울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3ㆍ1운동 다음 해에 독립의 노래를 작사하여 퍼뜨렸다는 것 때문에 「박」이라는 청년과 「정」이라는 소년과 함께 잡혀서 육개월 징역을 치루고 고향에 근친하러 왔다. 교회에서는 사흘동안 특별 강연회를 연다고 광고가 나붙었다. 나는 교회 집회에는 냉담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하숙방에 그이가 일부러 찾아왔다.[2] 말끔하게 세련된 서울식 미남자였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위였지만 나 같은 풋내기를 먼저 찾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 이튿날 길에서 그를 만났는데 무척 반기면서 『지금 3ㆍ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은 되살아났습니다. 이제부터 새 시대가 옵니다. 김 선생 같은 청년을 요구합니다. 웅기 구석에서 금융조합 서기나 하면 무엇합니까? 서울 올라와 공부하십시요! 서울에는 유명하신 백부님이 계시잖습니까? 하루 속히 단행하십시요……』 했다. 그 언어가 정답고 진실했다. 나는 대답을 못했지만 속으로는 들떴다.

그때 나는 꽤 많은 돈을 갖고 있었다. 남만철도 어느 일본인 간부가 비밀서류인 나진(羅津) 개발 설계도를 입수한 것을 계기로 벼락부자 꿈이 부풀었던 것 같다. 그는 소문없이 나진 땅을 사둘 작전이었다. 그 임무를 함북도청 서기 김희영에게 부탁했다. 김희영은 웅기 있는 나에게 부탁했다. 『나진』은 웅기서 남쪽 이십 리, 언덕 넘어에 있다. 그러니까 이 일은 내가 맡는 게 편리하다는 결론이었다. 나진은 항구 됨됨이 웅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아직은 항구 구실을 못한다. 질퍽한 벌판이 넓고, 밋밋한 완경사 언덕도 광막[3]하지만 곡식이 안되니 땅값은 갯값이다. 한 평에 이십 전이면 얼마든지 산다. 나는 나진가서 약빠른 거간군을 내세워 대번에 사십만 평인가 사서 이동등기까지 해 보냈다. 덕분에 거간료가 톡톡하게 생겼다. 그 중 얼마를 거간군에게 할양하고 김희영에게도 후하게 사례하고 나머지는 내 이름으로 저금했다.

때가 때니만큼 독립투사들이 웅기에 몰려 콩무역 하청인으로 되어 두만강을 넘어 만주와 시베리아로 망명한다. 나도 그들에게서 받은 인상이 컸다. 이만큼 돈이 생겼으니 서울에 공부하러 간다! 이렇게 맘먹고 가슴이 부푼다. 당장 금융조합에 사직서를 내고 아내에게도 알리잖고 부랴부랴 배를 탔다. 그때 아내는 웅기서 팔십 리 떨어진 창꼴집에서 시집살이로 있었다.



[각주]
1. 송창근(宋昌根, 1898~1950) - 장로교 목사, 신학자, 교육가, 수난자. 호는 만우(晩雨). 1898년 10월 5일 함북 경흥군 웅기면 웅상동에서 송시택(宋始澤)의 장남으로 출생. 그는 일찍 개화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종숙 송시명(宋始明)은 그의 고장에서 최초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향리에 북일(北一)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송창근은 이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그는 다시 종숙의 권고로 15세의 나이에 간도로 건너가 이동휘가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세운 명동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이 시절 그는 이동휘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귀국하여 목사가 되라는 이동휘의 권고에 따라 귀국하여 1915년 서울의 피어선선경학교에 입학하여 1920년 3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남대문교회 조사로 발탁되어 3ㆍ1 운동으로 투옥된 그 교회 장로 겸 조사인 함태영의 후임자가 되었다. 이때 그는 남대문교회가 뚝섬에 세운 전도서에 나가 전도하고 있었는데 교인들에게 독립운동 노래를 유포시켰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고역을 치렀다. 
1920년 8월 휴양할겸 고향에 들른 그는 함북지역 교회들을 돌면서 강연회를 열어 많은 청년들에게 감명을 주었는데 이 무렵 김재준과의 교분이 싹트기 시작했다. 서울로 돌아왔을 땐 강우규 의사가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이 일어나 이 사건의 혐의자로 또 다시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그는 이때 받은 고문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출옥 후 계속 남대문교회 조사일을 보다가 일본 유학을 계획하여 1922년 도일, 처음엔 토오요오(東洋)대학 문화학과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 2학년에 편입하여 1926년 졸업하였다. 졸업후 미국으로 건너 가(이때 여비가 없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이용도 목사가 외투를 팔아 도와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샌프란시스코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고 그해 9월엔 프린스턴신학교로 옮겼다. 이미 그곳엔 1년 전에 온 한경직이 있었고 1년 후엔 김재준도 건너와 3명의 한국인 학생이 함께 생활하였다. 송창근은 1928년 9월 펜실베니아의 웨스턴신학교로 옮겨 1930년 졸업하였고 1931년 덴버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1년 그는 귀국하여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취임하고 그 이듬해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하였다. 이 교회는 조만식, 김동원 등 장로와 교인들 가운데 유력한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그는 원리원칙을 살려 담대하게 목회하였으며 특히 교인들의 신앙과 기강을 엄하게 훈련하였다. 그후 교회 건축문제를 놓고 교회 당회와의 갈등이 생겨, 그는 1936년 봄 산정현교회를 사면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성빈학사를 세웠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가난한 학생을 도왔다. 특히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지도를 하였다. 그는 <성빈>이라는 잡지를 김정준(당시 숭실전문 학생)에게 편집을 맡겨 발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회에서 그가 가르친 성서공부는 부산의 교계에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937년 10월 그는 흥사단회원들의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서 4년간의 선고를 받고 또 다시 투옥되었다가 1939년 봄에 가석방으로 출옥하였다. 1939년 3월, 서울에서 조선 예수교장로회 대표자들로 구성된 조선신학교 설립위원회가 조직되도록 추진시킨 사람이 바로 그였다. 평양신학교가 무기 휴교하여 교역자의 양성과 공급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그는 장로회 안에 이전부터 있던 신학교육에 관한 새로운 이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다. 조선교회가 본토민교회 교역자를 자기 손과 힘으로 양성하자는 신학교육 이상은 외래선교사로부터 신학교육 권리를 이양받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 관헌의 방해로 그는 그 일을 김재준ㆍ윤인구들에게 맡기고 김천으로 내려가 8ㆍ15 해방때까지 김천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45년 해방직후 그는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초청되었고, 서울 동자동에 있는 군정으로부터 적산재단(천리교)를 얻어내어서 학교 발전의 터전을 만들었으며 신학교 구내에 바울교회(오늘의 성남교회)를 설립, 목회하였다. 1948년에는 신학교를 한국의 최초 정규대학으로 승격시켰으나 이 신학교 교과내용을 중심으로 한국교계는 보수ㆍ자유 양 진영의 신학논쟁이 와중에 휩싸이게 되었다. 게다가 송창근의 일제말기 행위에 대한 구설수가 끊임없이 나돌아 그는 결국 주위의 권유로 1949년 2월 미국 여행길에 올라 1년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1950년 4월 대구에서 개최된 장로교 총회에서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신학교가 「신신학파」로 정죄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교계인사들을 만나고 신학교 살림을 꾸려나가는 힘든 업무를 계속하여야만 했다. 이러한 와중에 6ㆍ25사변이 발발하였고 그는 주위의 피난 권유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신학교를 지키기 위해 서울에 남아있다가 결국 8월경 공산군에 의해 납치되어 이북으로 끌려 갔다. 이후의 생사에 대해선 분명한 자료가 없으나 다만 1962년 내외문제연구소가 밝힌 남북 종교인사들의 북한 생활기인 「죽음의 세월」(동아일보 1962.3.29.-6.14 연재)에서 그가 1951년 7월경 대동군 문성리에서 쓸쓸하게 별세하였다고 증언할 따름이다.
2. 천사무엘은 김재준의 백부(김주병)가 서울에서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서울』, 『학생계』 등의 잡지와 여러 계몽도서들을 출판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향인 송창근이 백부와 알고 지내면서 인사 차 김재준을 찾아온 것으로 설명하였다. 천사무엘,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살림, 2003, 37쪽.
3. 광막하다 - 끊없이 아득하게 넓다

[범용기 제1권] (21) 서울 3년 - 김영구의 죽음

김영구의 죽음 내가 쫓겨난 하숙집에 경흥읍교회 [1] 장학생으로 서울 유학 온 김영구(金永九) 군이 한 방에 같이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아래였지만 믿음과 인품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런데 겨울방학이라 그는 고향으로 가고 나 혼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