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16] 원칙을 따라 앞으로 – 1988년 2월 21일, 김상근 목사

원칙을 따라 앞으로

빌립보서 3장 16절 / 1988년 2월 21일 / 한빛교회


[회상 노트]

한빛교회 창립기념일 설교다.

한빛교회는 그 시대에 대단히 특별한 교회였다. 물론 지금도 특별한 교회다. 문재린 - 문익환 - 이해동 - 유원규 목사로 담임목사가 이어지고 있다. 갈릴리교회가 거기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목요기도회도 기도회 장소를 얻을 수 없었을 때 거기서 기도회를 가졌다. 양심수가 석방되면 우선 그 교회당을 찾아갔다. 거기 가면 많은 동지와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석방 환영회가 예외 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보원, 기관원들이 언제나 주변을 서성거렸다. 이 교회에 여느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찾아올 리 없다. 나는 한빛교회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빛교회 교인들이라고 해서 남다를 리가 없다. 한국 교회 교인들이 가지는 통속적인 축복 기대 같은 것을 똑같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빛교회는 그것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한빛교회 목사도 남다를 리가 없다. 목사라면 누구나 가지는 대 교회 꿈, 대 교회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지간히 큰 교회가 되는 욕망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빛교회 목사는 그 욕구를 철저하게 절제당한다. 아니, 스스로 절제한다. 교인도, 목사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러나 한빛교회가 오늘 교회가 가야 할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 시대의 교회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딘가에 한국 교회의 지성소가 있어야 한국 교회가 살 수 있다. 어디에도 지성소가 없다면 교회는 송장일 뿐이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2년 전 교회 창립 31주년 기념 예배 때도 여러분의 초청을 받고 설교를 했다. 그때 나는 두 본문, 신약성서 빌립보서 3장 16절과 구약성서 사사기 7장 1-3절을 택했다. 오늘 나는 그중 빌립보서 3장 16절을 다시 본문으로 택했다.

31주년 기념 예배 때, 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렸다. 한빛교회는 어차피 특별한 신앙고백을 갖도록 되어 있고 그것이 30년 한빛이 걸어온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커지고 끼리끼리 모여 지내는 편안한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는 버리자. 물론 그런 기대가 반드시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으나 한빛은 이미 그렇게 되기는 그른 것이고, 또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드온의 군대 32,000명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은 그중 300명을 추려내신다. 그 300명이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다.

한빛은 기드온 군대 300명이다. 한빛은 기독교의 본연성, 교회는 이래야 된다는 본래의 성격을 그대로 지켜 나가고, 그래서 전체 한국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하는 특별한 사명을 가졌다. 한빛은 한국 교회에 꺼져 가는 본연성을 회복할 사명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이것이 여러분이 지금까지 걸어온 원칙이요 앞으로도 그 원칙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자고 했다.

나는 오늘 33주년 기념 예배에 다시 초청을 받고 2년 전에 말씀드렸던 그 당부를 다시 당부하고자 한다. 어쨌든 여러분은 지금까지 걸어온 원칙을 따라 앞으로 나아갑시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원칙을 따라 앞으로 나아갑시다.’라는 말에서 ‘앞’은 무엇을 말하는가? 무엇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그것이 믿음이 자라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을 말하는가? 이 말은 이런 말로 시작되는 문단의 끝말이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공동 번역).

“나는 이 희망을”의 ‘희망’과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이라는 말,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도 이것”이라는 말은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무엇인가? 달음질쳐 붙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드신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을 희망으로 삼고 또 신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게 이런 것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이다.’ 소박한 신앙은 이렇다. 그것이 물질일 수 있고, 무슨 출세 같은 것일 수 있다.

물론 예수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한다. 이것은 보이는 것이요 잡히는 것이다. 양식이 없는 바로 그 사람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구하여야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이런 구체적인 것을 삭제하면 관념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함께 구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라고도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새로운 용기와 힘과 감격을 가지고 다시 삶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야 한다. 교회가 짐 진 자 위에 또 하나의 짐을 지게 하여서는 아니된다. 편히 쉬게 되는 것은 세상 삶과 관계가 된다. 찌든 생활, 실패를 거듭하는 생활을 극복하는 것, 도덕과 양심이 새로움을 받는 것, 이런 것도 기독교의 복음이다.

그러나 내게 일용할 양식이 있는데도, 아니 우리 주변에는 일용할 양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한데도 나에게만 더 쌓이기를 바란다. 이런 것이 ‘신앙의 희망’일 수 있는가? 세상 삶에서도 편안한 사람이 교회에서조차 편안한 말만 듣고자, 내 귀에 솔깃한 말만 듣고자 하는 것이 신앙의 희망일 수 있는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 주를 위하여 모욕을 당하는 것,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을 받는 것, 이런 것은 아예 우리의 주변에 얼씬거리지 않게 되는 것이 신앙의 희망이라는 것인가?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라고 말할 때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 것인가?

세상이야 어떻든지 나만이라도 편안하게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희망일 수 있는가? 달음질쳐 붙잡고자 하는 것이 그런 것을 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드신 목적도 우리가 편안하게만 되게 하려는 것인가? 우리는 그래도 교회에 와서는 온갖 걱정과 시름을 잊고자 한다. 모든 것 다 잊고 환각 속에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희망일 수 있는가? 달음질쳐 붙잡고자 하는 것이 환각적인 삶일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잡으신 목적이 환각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인가?

교회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무엇인가? 커지는 것인가? 교회가 어떻게 하든지 커지는 것이 우리의 희망일 수 있는가? 우리가 달음질쳐 붙잡고자 하는 것이 큰 교회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드신 목적은 큰 교회가 되게 하려는 것인가? 혹은 우리 교회도 예산을 1억 원 이상으로 끌어올려 파이프 오르간 갖다 놓고 호사스럽게 집을 짓는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요, 달음질쳐 붙잡고자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붙드신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마 여러분은 ‘그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희망일 수 없다. 우리 한빛의 희망일 수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라고 할 때의 “희망”은 무엇인가? “앞으로 나아갑시다.”라고 할 때의 “앞”은 무엇인가? 빌립보서 3장 11절과 12절 사이에 제목을 달아서 두 문단이 떨어져 있다. 이 10, 11, 12절을 이어 읽으면 그것이 분명해진다.

“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여 그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어”(10절)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이르려는 것입니다”(11절)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12절)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바울이 말한 희망은 무슨 크고 작은 것, 많고 적은, 그런 것이 아니다. 크기와 양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희망, 달음질쳐 붙잡고자 하는 것,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붙드신 목적이란 ‘예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그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는 것이다.

이런 것이 희망이라니 세상은 결코 우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답답한 일이다. 세속의 기준과 판단을 갖는다면 우리도 이것을 희망이라 하지 않는다. 희망이라면 뭔가 번쩍번쩍 하는 것, 내로라 하고 자랑할 수 있는 것, 1억 원짜리 집과 진급 등 그런 것이 희망 아닌가?

그러나 바울은 희망을 우리가 달음질쳐 붙잡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 하고, 예수가 죽으신 모양대로 지금 죽는 것이라 한다.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려면 예수의 고난이 지금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그것을 파악해 알아야 한다. 예수는 지금 민중들이 당하는 고난을 함께 당하고 있으며, 불쌍한 우리 민족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 계신다. 한민족의 고난의 자리에 예수가 있다.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민중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며 한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의 생은 화려하지 않았다. 그의 죽으신 모양은 비극이었다. 철저하게 자기를 주는 죽음이 었다. 그 죽음 가운데 ‘자기’라고 하는 것은 없었다. 자기의 이익, 자기의 체면 등 일체의 자기라고 하는 것은 흔적도 없었다. 이것이 예수가 죽으신 모양이다. 우리도 이렇게 죽자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자기의 ‘희망’이라 한다.

과연 이것이 희망일 수 있는가? 희망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고 예수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는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이르려는 것입니다.”라고 말을 끝냈기 때문이다. 고난과 죽음만이 아니다. 그것을 붙잡으려고 달려가서 결국은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르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울의 희망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 화려한 환경에서 이 말을 하고 있지 않다. 감옥에서다. 그것도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로서였다. 바울은 기어코 죽임을 당했다. 예수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었다. 바울은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를 통하여 증거된 기독교, 그가 고집한 교회의 상은 지금 온 세계 교회의 표본이 되고 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수많은 교회가, 아니 불신자까지 바울의 삶을 이어 받고자 기도하고 있다. 이것으로 사실 교회의 맥이 이어져 가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곧 죽은 자의 부활이다. 바울은 죽은 자가 되어서 부활했다. 죽음으로써 부활에 이른 것이다. 오늘 세계의 교회는 바울의 부활의 열매다.

사실 한빛은 지난 30여 년 동안 예수의 고난의 자리, 죽음의 자리를 좇아다녔다. 한빛은 지금 감옥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형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빛은 고난과 죽음의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실속도 없이 그런 삶을 살아오고 있다. 우리의 꼴을 보면 죽어가는 꼴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피곤할지도 모르겠다. 세속의 가치 기준에서 본다면 무언가가 잘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 꼴이 무엇이냐고 개탄하고 좌절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그 어려운 길을 벗어 던졌더라면 큰 교회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우리도 목요예배니, 갈릴리교회의 구속자 석방 환영 예배니, 그런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좀더 그럴 듯한 교회를 이루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설교 시간마다 인권이니 민주화니 통일이니 하는 따위의 설교를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도 내로라 하는 교회를 만들 수 있었고, 또 얼마나 편안했겠는가 하고 아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예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요, 그것이 곧 예수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는 것이다. 아니, 우리의 걸음은 차라리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이르려는 경건한 신앙의 걸음이다. 고난받는 한빛은 결국 예수가 모양도 없이 빛도 없이 죽으신 것처럼 죽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수많은 열매로 부활했듯이 한빛도 결국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르게 될 것이다. 고난받고 죽어가는 한빛이 있어서 참 교회가 맥을 잇는 것이다. 교회가 참 교회다운 교회를 지향해 나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지는 못하지만 그 삶을 이어받고자 기도하는 것처럼 수많은 교회에 참교회의 모습을 던져 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한빛이 걸어온 원칙이다. 이 원칙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 바란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원칙을 따라 앞으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축복이 한빛 위에 넘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