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속의 예수
마가복음 6장 34-44절 / 1990년 4월 29일 / 돌샘교회
[회상 노트]
진짜 교회, 만들어 보려고 애쓰는 후배들이 있다. 민중교회를 목회하는 이들이다. 돌샘교회 이대수 목사도 그런 후배 중 한 사람이다. 마침 교회당을 이전하고 첫 예배에 설교를 해 달라 한다. 민중이 모이는 민중교회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힘이 있을 리 없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꼭 그럴까? 오병이어 기사가 우리를 엉뚱하게 만든다. 오병이어,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기에는 어림도 없는 적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예수께 드렸을 때 거기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교회가 제 설자리를 바로 잡고 서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인가? 작은 것, 가난한 것은 결정적 문제가 아닌 것일까?
[슬라이드]
[설교전문]
본문은 물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고자한 대목이다.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의 선 자리, 예수의 심정, 지향했던 그의 이상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예수의 선 자리에 서야 하며 예수의 심장을 가져야 하고 그가 지향했던 이상을 우리의 이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의 선 자리가 어딘가? 예수는 민중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예수도 부자나 권세 있는 사람들과도 사귀었을 것이다. 성서 여기 저기에서 그런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예수의 주변인들에게 특별한 일로 보이지 않았다. 예수처럼 ‘랍비’, ‘선생’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은 의례히 소위 상류 인사와의 교류가 있기 마련이다. 반대로 그런 사람들은 하류인과 교분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가시는 곳에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불쌍한 민중들이 모여 오곤 했다는 사실, 혹은 예수가 우선 그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을 찾아가곤 했다는 사실이 주변인들에게 특징적으로 보였다. 아니, 민중 가운데 있는 예수가 아니라면 구태여 그에 대하여 어떤 기록을 남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민중 가운데 있었기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그 이유를 민중을 항한 예수의 심정 때문이라고 간파하고 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큰 무리를 보시니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아서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라는 기록자의 해석이 그것이다. 이것은 기록자의 관찰이다. 예수가 거기 오실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미리 몰려와 있었다. 그들을 보시자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아서 불쌍하여 견딜 수 없어 하시는 예수를 기록자는 보아냈던 것이다.
왜 불쌍한가? 예수를 믿지 않아 구원을 받지 못한 영혼들이기 때문인가?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 지 않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인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인가? 여기에는 그 같은 간파가 없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들의 처지다. 배고프고 지치고 천대받는 그들이 불쌍했고 나아가 그들을 도와주고 돌봐주며 싸안아 줄 목자가 없는 것이다.
저녁때가 되었다. 살림을 맡은 제자들은 걱정이 생겼다. 더 저물기 전에 헤쳐 보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저마다 무엇을 사 먹도록 하십시다.”라고 예수께 진언했다. 저마다 사 먹도록 하라고 했지만 사실은 사먹든지 말든지 헤쳐 보내고 나면 그것은 이제 우리 소관이 아니라는뜻이다. 우리가 데리고 있다가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엄청난 경비를 구태여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문맥으로 보면 이백 데나리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돈이 없다’가 아니라 ‘우리가 가서 그 많은 떡을 사다가 먹이라는 것이냐’ 라는 반문이었다. 우리가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러자면 그것은 엄청난 일이라는 반론이었고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것이 었다.
그런데 예수는 이백 데나리온어치 떡을 사오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다.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하여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아니하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다.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오병이어를 내놓지 않는다. 그렇다. 일만 명이나 되는 군중들에게 오병이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 내놓으면 모두가 배고프다. 차라리 우리만이 먹어서 우리만이라도 배를 채우는 것이 현실에 맞다고 생각했음직 하다.
그러나 예수는 너희에게 지금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것을 내놓고 함께 나누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오병이어를 축사하여 일만 명에게 나누어 준다. 모두가 배불리 먹는 기적이 일어난다.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난다.
예수의 이상을 우리는 여기서 본다. 여기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 과학적으로 도대체 불가능한 일 아니냐 하는 따위의 논의는 필요없다. 중요한 것은 자기들이 가진 것을 내놓고 함께 살고자 했더니 턱없이 모자랄 것만 같았는데 오히려 남는다는 교훈이 중요할 뿐이다. 오늘 돌샘교회가 여기로 이전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물론 우리가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할 일이 많다. 또 돌샘교회가 교회당 자리를 잡을 때 노리는 바도 있을 것이다. 전세값이 하도 올라가니 그 압박에서 벗어나 보자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고 어디 교인들을 좀 대폭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목이 없나 하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그물이 찢어지도록 교인이 쏟아져 들어왔으면 하는 생각도 해보았을 것이다. 이 목사님이 어젯밤에 여기 와서 교인이 날로 수십 명씩 늘어나서 수백 명 모이는 예배에서 설교하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의 바람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 돌샘교회가 오늘 꼭 생각해야 할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민중 가운데 있는가 하는 문제다. 어차피 우리는 민중을 떠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좀 잘살게 되면 그들을 떠나고 그들과 구별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 돌샘교회는 민중이 오든지 아니면 우리가 찾아가는 교회이어야 한다. 민중을 떠나면 돌샘교회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독선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 교회라는 큰 몸이 몽땅 민중 가운데 있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가 민중 가운데 있음으로 한국 교회가, 기장 교단이 민중 가운데 있게 하는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 옳다. 돌샘교회는 끝내 민중 가운데 있어야 한다. 또 우리 기장 교단이나 한국 교회는 우리의 어떤 지체가 그런 역할을 맡아야 하고 또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으며 그것이 곧 한국 교회가 민중 가운데 현존하는 것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완전을 향하여 서로 보완해 가야 한다.
민중을 향한 예수의 심정이 우리에게 있는가? 민중 가운데 있자는 말은 그런대로 목이 좋고 앞으로 전망이 괜찮으니 여기 있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처지를 볼 때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큰 무리를 보시니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아서 불쌍히 여기신” 예수의 심정이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한다. 예수의 이 심정이 우리 돌샘교회의 목회자와 핵심 교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민중에의 사랑이 없다면 자칫 우리는 사회 운동으로 전락한다. 예수의 심정, 민중에의 사랑이 이대수 목사와 창립 교인들에게 있기를 기도한다. 그 사랑, 그 심정 때문에 견딜수 없는 종교적 깊이와 경건이 있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병이어를 바치겠다는 결의와 바치는 행위가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린들 왜 계산을 안 하겠는가? 무슨 일을 하자 해도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을 생각하면 도무지 막연하기만 할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오천 명 이상을 먹일 떡을 구입할 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을 몽땅 그렇게 써야 하느냐 하는 이론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돈이 없다.
우리가 여기로 이사를 오면서도 저들 문제는 저들이 해결하게 버려둘 수밖에 우리에게는 역부족이라는 패배주의적 심정이 혹 있지 않을까 염려된다. 문제는 이백 데나리온이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오병이어나마 예수께 바치겠다는 결의와 바치는 행위다. 주님께서는 오병이어를 바치면 오천 명 이상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을 수 있게 하신다.
돌샘교회는 가난하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오병이어는 무엇인가를 찾아서 그것을 바쳐라. 오병이어를 내놓는 것이 지금 무엇이냐?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오병이어를 내놓는 것인가를 연구해야 한다. 돌샘교회는 그러자고 세운 것 아닌가? 하나님의 바라심이 또 그것 아니겠는가? 돌샘교회에 오는 민중이 여기서 오병이어를 나누어 먹고 열두 광주리를 주워 담는 기적을 보게 되기 바란다. 그뿐 아니라 오지 않는 이 주변의 모든 민중들을 향해서도 예수의 심장,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그들과도 같은 기적을 일으키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