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1일 수요일

[범용기 제3권] (32) 北美留記 第一年 1974 - 자택감금 강화와 완화

자택감금 강화와 완화

1월 11일(금) - 형사가 집에서 철거하지는 않았지만 들락 날락한다. 헌병대, 치안국, 보위부, 정보부 등 바깥을 지키던 차들은 우리 집 옆 길건너 모새기[1]에 있는 다방 2층에로 이사갔다. 거기서 내려다보면 우리집 뜨락[2]이 환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각주]
1. 아마도 ‘모퉁이’인 듯
2. 뜨락 – 뜰(집안에 있는 평평한 빈터. 주로 화초나 나무 등을 가꾼다)

[범용기 제3권] (31) 北美留記 第一年 1974 - “종교”에 대한 책 하나

“종교”에 대한 책 하나

마침 교학사라는 출판회사에서 “종교”에 대한 책하나 낸다고 내게 원고를 부탁해 왔다. 1월 중순께 탈고해 달라는 것이다. 마라톤 경주라도 분수가 있지, 명색이 “저서”라면서 두 주일 안에 다 쓴다는 것은 언어 도단이다. 그러나 집 안에 감금 되있으니 밤낮 이 한가지 일에만 전력할 수는 있었다.

1월 20일(일) - 교학사 원고 760매를 탈고하여 정리했다. 졸작인 줄 알면서도 정성스레 퇴고할 시간과 정력은 없었다. 이 고료가 “장공”의 캐나다 가는 여비에 보탬이 됐다.

2026년 3월 10일 화요일

[범용기 제3권] (30) 北美留記 第一年 1974 - 교계인사 신년인사 교환

교계인사 신년인사 교환

1월 7일(월) - 중앙 YMCA 대강당에서 교계 인사들의 “신년 인사교환” 모임이 있었다. KNCC 주최다. 나도 참여했다.

나더러 한 마디 신년 메시지를 말하라 한다. 나는 “십자가를 각오해야 할 올해”라고 예언 비슷한 얘기를 남겼다.

ㆍ비상사태 선언

1월 8일(화) - 5:00PM 비상사태 선언이 선포됐다. 이것은 “준 계엄령”이라지만, 대통령이 계엄사령관까지 겸한 “계엄령”이라 하겠다. “독재”의 선언이다.

ㆍ자택 감금(제4차)

1월 9일(수) - 자택감금의 첫날이다. 소관 경찰서에서 4년 내내 나를 맡은 “신 형사”는 매일 24시간 내 옆에 있고 밖에는 치안국 차, KCIA, 정치보위부 차, 헌병대 차, 넷이 밤새도록 지킨다. 엄동설한이라 그들에게는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모두 새까만 짚차다. Heat System이 있기는 했지만 별 도움이 안됐을 것이다.

나는 볼 일로 시내에 자주 나간다. Taxi를 탄다. 그들은 내가 탄 Taxi를 놓칠세라 뒤따른다. 동대문시장 앞쯤에서 그들은 내가 탄 Taxi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헤메며 찾아 다닌다.

나도 될 수 있는 대로 집에 있기로 했다.

[범용기 제3권] (29) 北美留記 第一年 1974 - 서울에서의 석달

서울에서의 석달

1974년~서울에서

1974년 3월 12일에 서울을 떠났으니 설은 서울서 지냈다. 크리스마스 카아드가 잊지 않고 있노라는 표가 된다면 “설”날 세배는 “몸”으로의 친애를 말하는 언어라 하겠다.

1월 1일(화) - 이른 아침부터 세배 손님이 붐빈다. 제1진 – 신학교 김정준 학장과 교수님들, 제2진 – 기장총회 사무처 직원, 임원들, 제3진 – 민주수호 청년들, 3선개헌 반대 투위 때 청년들, 그리고 – 장준하, 김두수 목사, 노준영 사장, 경동교회 부인회원들과 찬양대원들, 성북교회 목사 부부, 집안 친척으로 – 금호동 식구들과 신촌 식구들 – 그 밖에도 채 기록 못한 “방명”들이 수두룩하다. 작은 서재방과 마루방이 앉을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다. 연방 들어오는 손님들 때문에 먼저 온 손님들은 쫓기듯 나간다.

두 살짜리 손녀 “명은”은 때때옷을 갖춰 입고 손님들께 절하고 세배돈 받는 재미에 무턱대고 절한다. 마감 쯤에는 진력이 났는지 절도 안하고 돈만 달란다. 모두들 귀여워했다.

1월 2일(수) - “수원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3:00PM에 선린형제단[1] 모임이 있었다.

개회 예배에서 설교하고 거기서 잤다.

선린형제단도 세대교체와 함께 규약 갱신 작업이 있어야 하겠다는 중론에 따라 준비위원이 선정됐다. 창설기의 대학생회 “신인회”들이 중견인물로 등장할 계제였다. 나는 장준하의 삼선개헌 반대 100만인 서명운동에 적극 협력하라고 신인회원들에게 전했다.

Dr. Kang은 몹시 비위가 상한 모양이어서 시종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필하고 Dr. Kang차로 집에 왔다.

1월 5일(토) - 정동 “Italiano 수도원” 별관에서 Amnesty[2] 신년 축하연이 있어 참석했다. 내게 “한국 엠네스티 위원장”이라는 직함이 붙어 있었으니 “의무적”이기도 했다.

6:00PM에는 수유리에 이사해 온 고대교수 박재봉 씨의 Open House Dinner에 초대됐다. 이문영[3] 박사와 “오걸”[4] 선교사가 초대돼 있었다.

박재봉 교수의 전문분야는 자연과학이다. 그는 “제3일” 동인으로 끝까지 수고를 같이 했다.

1월 6일(일) - 성암교회에서 설교했다.



[각주]
1. 선린형제단은 김재준 목사와 강원용 목사 등이 세운 전도조직이었으나 해방전후 시기에 중국 간도 용정 및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도중 공산당의 압박으로 월남하여 경동교회 자리에 터를 잡았다. 선린형제단의 별칭으로 ‘야고보전도관’이라고 하였는데, 성경의 인물로 신앙의 실천을 강조한 야고보와 같이 행동으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이다. 창립당시 이 모임은 초교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지도자 격인 김재준 목사가 장로교 목사인 이유로 장로교 교단에 속하게 된다.
2. 앰네스티(Amnesty) - 국가 권력에 의하여 투옥, 구금되어 있는 각국의 정치범의 구제를 위한 조직. 민간 유지(有志)에 의한 국제적 구원 조직으로, 1961년에 설립되었으며 본부는 영국 런던에 있다.
3. 이문영(李文永, 1927~2014) - 호는 소정(小丁). 서울 출생. 1970-80년대 민주화운동과정에서 3ㆍ1 민주구국선언, YH사건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고려대 교수직을 세 번 해직당했으며 모두 4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2008년 자서전에서, ‘유진오 총장에 대한 평가에서 일제 학병 출정을 독려한 친일파보다 전두환의 국정을 자문한 사람이기에 더 나쁘다’고 회고했다.
4. 조지 오글(George E. Ogle, 1929~2020) - 미연합감리교회 한국 선교사. 미국 필라델피아 출생. 메리빌리대학과 듀크신학대학 졸업후 1955년 내한하여 1957년까지 선교사 인턴쉽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위스컨신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60년 다시 내한하여 인천 도시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한국 근로자의 지위향상과 복지를 위해 활동하였다. 1973년 인혁당 사건을 세간에 폭로하고 목요기도회를 주도하다가 1974년 12월 강제 추방을 당했다. 미국에 간 이후에도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였고 미 의회 청문회에서도 증언하였다.

[범용기 제3권] (28) 1974. 1. 8 긴급조치 - 정체불명의 손님

정체불명의 손님

하루는 교회관계를 맡았노라는 치안국 요원이 찾아와서 “교회사찰을 맡으래서 나왔습니다만, 저는 교회가 뭔지 전혀 모릅니다. 어떻허면 좋을지 좀 가르쳐 주세요” 한다.

“교회를 ‘사찰’하노라고 애쓰지 말고 교회는 교회대로 가만 두는 게 제일 좋은 정책이겠지. 사찰이니 간섭이니 통제니 하는 쓸데없는 일을 왜 만들어 갖고 고생하는 거요” 했다.

“교회가 정부를 이러니 저러니 비판하니까 못 본체 할 수가 없잖아요?” 한다.

“교회가 정부시책을 비판하는 것은 교회의 본직에 속하는 한 부분이니까 않할 수 없지요. 정부에서는 그 비판을 듣고 자기를 반성하고 좋은 충고는 받아들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정부 입장을 솔직하게 해명해서 양해를 구하고 하면 되지 않겠소?” 했다.

그는 또 말했다.

“교회 기관에는 총회, 노회, 지교회 등이 제도화해 있긴 한 것 같은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통하는 지시나 명령 계통이 확립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업신여겨서랄까, 어느 말단 목사에게라도 손을 대면, 전체 교회가 벌떼처럼 일어납니다. 그래서 암만해도 모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글세, 그러니까 괜히 벌집을 쑤시지 말란 말이 아니오?” 해서 돌려보낸 일이 있다.

하루는 나갔다 들어오니 마루방 모새기[1]에 어떤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들어오자 그는 일어서 최경례[2]를 하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존함은 오래전부터 들어모시고 있습니다.”

“저는 박 정권 타도를 위한 방대한 비밀조직체 사람입니다”, “말을 암만 했자 소용있습니까?”, “죽여버려야지요”, “그래서 김 박사님에게도 비밀로 알려드리고 격려를 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나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런 조직이 있고 그런 계획이 있다면 그런 일을 생면부지의 나 같은 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어디 있겠오!”

“무얼하든 그것은 당신들 자유니까, 나는 옳다 그르다 말하지 않겠오. 그러나 나는 나대로 내 길을 갈테니까 내 걱정은 마시오. 나는 그런 폭력 행동에는 흥미도 없고, 해결도 없다고 생각하오. 위정자가 잘못하면 충고하고 잘하면 칭찬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서 정부가 국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실천해 준다면 협력도 할 생각이오. 내게 있어서 정부전복 같은 음모는 당치도 않은 얘기오!”

그는 일어서며 혼잣말같이 한마디 한다.

“김 박사님 보기와는 다른데요. 순진한 것 같은데 걸려들진 않는구려!”



[각주]
1. 아마도 ‘모서리’인 듯
2. 최경례(最敬禮) - 가장 공경하는 뜻으로 정중하게 경례함

[범용기 제3권] (27) 1974. 1. 8 긴급조치 - 삭발로 항거

삭발로 항거

1973년 11월 17일 한국신학대학생들이 단식투쟁에 들어갔을 때 일이다. 문교부에서는 총학장을 못견디게 굴었다. 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을 단속할 책임이 총학장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소위 “사립학교법안”이란 데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총학장이 학생들을 제지하려 들면 학생들에게 놀림감으로 경멸된다. CIA 끄나풀 취급을 당하기 마련인 경우가 많다. 한신대 교수들에게도 문교부 지시가 엄달[1]됐다. 그러나 한신대에서는 학생과 교수와 학장이 일체가 되어 있었기에 교수들과 학생들이 다같이 삭발(削髮) - 머리칼을 면도로 밀어버리는 것으로 데모에 대신했다. 마침 그 날에 함석헌이 한신대에 딴 일로 갔다가 그 광경에 감격해서 돌아오는 길에 고려대에 들러 총장실 구석에선가 고대 전속 이발사를 불러 삭발하고 그 풍채좋은 수염도 깎아 버렸다. 인상적인 항거였다.

어느 날 길에서 그를 만났다.

“김 목사도 머리를 깎으오!”

나는 농담삼아 말했다.

“당신은 깎는 것으로 항거를 표시했지만, 나는 기르는 것으로 항거할 거요.”

그때부터 나는 머리도 수염도 깎지 않았다. 대뜸 자란다.

몇 오래기 안되는 수염이 입술 위 아래에서 한들거린다. 손이 제절로 그걸 훔치적거리게 된다. 그런 모습으로 캐나다에 온 것이었다.



[각주]
1. 엄달(嚴達) - 명령이나 지시 따위를 엄중히 전달함

[범용기 제3권] (26) 1974. 1. 8 긴급조치 - 민주수호 청년협의회

민주수호 청년협의회

- 재판 방청 -

이렇게 약 40일을 지냈다. 신 형사 드나드는 것도 뜸해졌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유난스레 따라다니는 것 같지 않았다.

1974년 2월 15일, 민청사건 재판에 있대서 함석헌, 천관우, 정수일 등이 방청하러 갔다. 검사 논고란 것이 참말 우스웠다.

“○○의 집에는 백남운[1]의 ‘조선경제사’[2]가 책꽂이에 있었습니다. ○○에게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있었습니다.”

‘서적수입상’하는 젊은이도 같이 잡혀 있었다. “왜 불온서적을 수입 유포했나?” 하고 검사던가 판사던가가 묻는다.

“저는 불법으로 수입한 일이 없습니다. 구입하려는 서적 List를 심사위원회에 제출해서 허가된 것만을 다시 문교부에 신청해 허가되면 그 List대로 주문합니다. 그래서 책이 도착하면 그 책 내용을 검사하는 검열관에게 가져갑니다. 검열관이 통과시킨 책만을 서점에서 팝니다. 통과 안된 것은 그 자리에서 검열관이 압수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도매금으로 “빨갱이”, “이북간첩”이 되는 것이었다.

그날에는 심문만으로는 끝났다.

나오는 길에 어느 다방에서 함 선생과 천관우와 나 셋이서 차를 마셨다. 그것이 그 그룹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나는 국내의 질식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국외에서 포위작전을 해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각주]
1. 백남운(白南雲, 1895~1979) - 전라북도 고창 출생. 일제강점 하에서 한국의 원시ㆍ고대ㆍ중세의 사회경제에 관한 경제사적 연구에 몰두하여 큰 업적을 남김으로써 한국의 경제사학 발전에 선구자적 구실을 하였다. 1947년 5월에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창설하여 부위원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월북하였다. 월북 후 19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교육상, 과학원 원장(1952년)을 역임하고 1961년에 최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1969년에 최고인민회의 의장, 1974년에는 조국전선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2.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1937)을 말하는 듯

[범용기 제3권] (32) 北美留記 第一年 1974 - 자택감금 강화와 완화

자택감금 강화와 완화 1월 11일(금) - 형사가 집에서 철거하지는 않았지만 들락 날락한다. 헌병대, 치안국, 보위부, 정보부 등 바깥을 지키던 차들은 우리 집 옆 길건너 모새기 [1] 에 있는 다방 2층에로 이사갔다. 거기서 내려다보면 우리집 뜨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