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친히 죽음으로 오셨다
빌립보서 2장 9-11절 / 1983년 4월 3일, 부활주일 / 수도교회
[말씀을 향한 물음]
나는 금번 고난주간에 두 번의 증언을 통하여 위로 올라만 가려 하는 우리의 신앙을 회개하자는 말씀을 드렸다.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욕망에 잘 어울리는 예수로 그를 수술하고 성형하여 버린 우리의 죄를 회개하자고 했다. 만약 우리가 성서를 진실되게 대하고 십자가 앞에 맑은 마음, 정직한 마음으로 선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열에 서지 않을 수 없다는 증언을 드렸다.
특히 지난 성 금요일 예배에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내려가시기만 하는 한 인간 예수에게서 신을 경험했다는 말씀을 드렸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우리는 무엇인가 잘 되는 때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것은 잘 되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간섭하신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잘되는 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차가 뒤집어졌는데 아무 다친 데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하나님이 거기 계셨다는 의미다. 만사형통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순조롭게 살아 왔구나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가운데 함께하셨음을 경험한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경우는 대개 이렇다. 우리는 번영과 축복, 만사형통 속에서 신을 만난다. 그런 사람을 참으로 신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을 나는 신이 주신 복이 아니라고 굳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려가기만한 한 사람 예수에게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더 중요하다는 말을 드리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체인데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지 않고 사람으로 자신을 내려놓은 한 사람, 또 사람 중에서도 종으로 내려앉은 한 사람, 종도 그냥 종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어간 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의 자리에서 가장 수치스런 십자가 처형의 자리에까지 내려왔는데도, 그가 패가망신했다고 하지 않고 저주받았다고 하지 않고, 지지리도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속된 말로 병신이라고 하지 않고, 그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오늘, 여러분은 이 진리를 받아들이시기 바란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로 내려오신다. 사람이 되어 여러분 곁에 계신다. 종 된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이 종이 되어 당신에게로 와 계신다. 비참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비참 가운데로 이미 와 계신다. 좌절 가운데 있는 자가 있는가? 하나님이 좌절하여 몸부림치는 당신과 이미 같이 계신다. 죽음의 공포로 말미암아 진리에 살지 못하고 위축되어 있는 자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친히 죽음으로 오셨다. 사망 권세는 깨지고 말았다. 십자가를 지고 있는 자, 십자가를 피하고 있는 자, 이미 주님께서 치욕의 십자가를 지셨다. 당신과 함께 계신다. 부활절 아침, 이 진리를 받아들이시기 바란다.
가장 영광된 자리에서 가장 멸시받는 자리로 내려오신 것이다. 이것은 축복일 수 없다. 가장 존귀한 존재가 가장 천한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은 축복일 수 없다. 가장 높은 신이 가장 비극적인 범법자로 처형된 것이다. 이것은 축복일 수는 없다.
그런데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과정에서 신을 경험했다는 놀라운 증언을 하고 있다. 내려앉고 또 내려앉은 한 사람에게서 신을 경험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려앉았다는 말은 실감을 일으키지 못한다. 쫄딱 망했다는 표현이 더 좋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으니 쫄딱 망한 것이다. 사람이지만 종이니 또 쫄딱 망한 것이다. 종으로만 있어도 좋을 것인데 또 무슨 흉악범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니 그것 또한 쫄딱 망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저 분이야말로 신이시구나!”라고 고백하게 되었다니 그것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이 같은 신 경험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여기 8절에 주목하자. 이러이러하다가 종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라고 했다. 내려가고 또 내려간 것을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라고 보고 있다. 십자가에 죽으심, 그것은 그저 쫄딱 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다. 밀리고 밀려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어서, 종이 될 수 밖에 없어서, 조롱과 치욕으로 죽을 수밖에 없어서가 아니다.
이것은 기득권을 계속하여 포기하고, 비기득권자의 자리로 가고 또 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다. 그리고 비기득권자의 자리, 사람에게로 오신다. 사람이 되어서도 기득권을 다시 버린다. 비기득권자의 자리, 종으로 내려간다. 종이 갖는 작은 기득권을 다시 버린다. 가장 비기득권자의 자리인 십자가로까지 내려간다. 기득권의 계속적인 포기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진정한 평화와 일치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평화와 일치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권세를 깨트릴 수 없겠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만 있게 하려고 한다. 사람이 되는 길을 막아 선다. 죄는 사람을 사람으로만 있게 한다. 종과의 일치를 막아 선다. 종은 종으로만 있게 한다. 죽음의 권세가 십자가에 달리는 숱한 사람을 외면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어이 거기까지 가셨다고 성서는 쓰고 있다.
그렇기에 이 같은 복종, 내려감은 쫄딱 망하는 것이 아니다. 신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신 경험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대단히 중요한 성찰이다. 복종으로 내려감에서 신 경험이 발생한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으로 내려가는 거기에서 거룩함을 경험한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으로 멸시와 수치의 자리로 내려가는 거기에서 신의 모습을 보았다. 말하자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을 사람이 자기의 기득권의 자리에서 내려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다.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불편한 자의 자리로 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다. 부한 자가 혼자 부 속에 있지 않고 가난한 자의 자리로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다. 권력 있는 자가 권력에 도취되어 있지 않고 약한 자에게로 나아가 그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기득권의 포기요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다. 신적인 사건이다. 거기서 신 경험이 일어난다.
십자가 밑에서 영광을 구하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수치의 절정에서 어떻게 영광이 나올 수 있겠는가? 망신의 바닥에서 어떻게 번영이 약속될 수 있겠는가? 예수가 쫄딱 망해 버린 그 십자가에서, 자기 어머니조차 제자에게 부탁해야 할 그 형세에서 잘 되기를 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의 죽으심은 목숨 없는 자에게로 나아가는 목숨의 포기다. 그는 자신이 죽음으로, 죽은 자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에게 간 것이다. 죽으심과 복종의 자리는 결코 쉽지 않다. 고투의 자리요 고난의 자리다. 그야말로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고난의 길이다. 쉽지 않다. 기독교의 길은 여기에 있다.
그런데 9절 첫머리를 보자. “그러므로”이다. 그렇게 복종하여 죽는 자리에까지 갔으니 “그러므로”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올리시고, 그 이름을 뛰어나게 하시고, 하늘에 있는 자나 땅 위에 있는 자나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을 예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이심을 고백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부활의 영광이다.
여기서 나는 복종과 죽음이 없는 부활은 기독교의 부활이 아니라고 감히 말한다. “그러므로”가 증발해 버린 축복과 영광의 일직선은 기독교적 삶이 아니라고 감히 말한다. “부활” 앞에는 “그러므로”가 있다. “그러므로” 앞에는 “복종과 죽음”이 있다.
고난은 예수께서 혼자 다 받으셔서 우리의 것까지 선불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공짜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그러므로”가 없다. 아니, 있다. 예수가 죽으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이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붙힌 “그러므로”다. 성서대로의 “그러므로”가 없다면 “부활”도 없다. 복종도, 죽음도, 십자가도 없이 부활을 믿는 것은 헛수고다. 복종과 죽음을 지금 사는 자에게 오늘은 더 없는 기쁨의 날이다. 어렵게 어렵게 내려간 그 자리가 “그러므로”에 이어진다는 것이 확인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서 내려가는 것이 못난 것 같고 팔푼이 같으나, 그것을 견디기가 어렵지만,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그러므로”를 이어주신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여기 부활 예배의 자리다.
여러분, 권세가 있는가? 권세 없는 자에게 내려가라!
부한가? 가난한 자에게 내려가라!
편안한가? 불편한 자에게 내려가라!
만족한 생인가? 한이 있는 자에게 내려가라!
모든 것이 순조로운가? 고통이 있는 자에게 내려가라!
십자가를 질 수 있겠는가? 주님과 함께 지금 이 민족의 십자가를 져라!
이 역사 가운데서, 평화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십자가를 져라!
안일의 자리를 뒤에 두고, 평안한 자리를 던져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내려가라!
하나님께서 “그러므로”를 이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 복종하여 내려가신 예수를 “그러므로” 부활하게 해주신 하나님께서 내려감으로 복종한 우리에게 “그러므로” 부활을 약속해 주신다!
여러분, 내려가신 예수의 삶을 받아들이는가? 이미 여러분은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었다. 감격과 기쁨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자!
감격과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열에 참가하자!
[회상 노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교단 총무로 일하게 되었지만 아직 수도교회가 후임 목사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일예배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 주일마다 강단에 설 수는 없었다. 이곳저곳 교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수도교회에서 종려주일과 성 금요일, 그리고 부활주일 설교를 이어하게 되었다.
현대의 기독교인은 고난을 생각하지 않는다. “승리하십시오.”라는 인사가 유행되고 있다. 승리만을 생각한다. 고난은 예수가 내 몫까지 이미 다 치러버렸다고 믿으려 한다. 사실 소시민적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종교적 의미의 고난을 말하는 것은 무리다. 또 지금은 지난 시대에 비해 고난이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에도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노동자들의 삶에 다가가는 대학생들이 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삶에서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봤다. 그들의 삶은 어떤 것인가? 고난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예수처럼 내려간다. 그들의 신앙은 구체적이다. 추상적이지 않다. 기복적이 아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불행한 것일까?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산 예수, 그를 죽음에서 살려내셨다는 것 아닌가! 그를 우리의 주가 되시게 하셨다는 것 아닌가! 이것이 기독교의 부활신앙이리라!
소위 운동권 학생들의 설 자리가 매우 좁아졌다. 당국의 압박이 그들의 공간을 빠르게 좁혀 왔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는 어떤 모임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간에 사용해 왔던 모임 장소도 어느새 모두 드러났다. 이른바 MT 장소는 이미 완전하게 노출되고 말았다.
학생들은 교회로 몸을 피하고, 교회에서 모임 장소를 얻고자 했다. 어찌 보면 교회가 최후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안고 가려는 교회는 많지 않았다. 서울에는 불과 몇 교회밖에 없었다. 내가 목회하던 수도교회는 몇 안 되는 교회 중의 하나였다. 나는 그들이 신앙을 가지고자 하여 교회로 찾아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받아들이고 뒷바라지를 했다. 그들이 옳고 가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내려갔다. 대학생이라는 신분, 그것도 소위 일류 대학의 학생이라는 특권, 이미 담보된 장래를 버린다. 나는 그들에게서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한 교인보다 더 그리스도인다움을 발견했다. 외형으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그들은 이미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예수를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기대를 가졌었다.
그들은 툭하면 구속되고 재판을 받았다. 이런 일은 차라리 일상적이 되어버렸다. 목사인 나는 고통스러웠다. 아니,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교인들 중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는 것이었다. 신앙 성향이나 정치적 입장이 달라서 그리 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업하는 교인들 중에는 불이익을 당할까 봐서 그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회는 신앙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지 데모나 하고 투쟁이나 하는 데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신앙고백이 먼저라는 주장은 옳다. 목사의 지도가 과격하여 그런 성향의 학생들이 모이고 또 그들이 툭하면 구속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었다. 사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목사의 지도에 의해 이러고저러고 할 단계를 이미 넘어서 있었다. 그들의 생각과 안목과 철학은 목사의 그것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내려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예수의 삶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을 배웠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후원자요 보호자를 자임했었다.
나는 교단의 총무로서 교단의 교회들을 두루 살폈다. 불행하게도, ‘많은 교회가 학생들과 비교해 훨씬 교회답지 못하다. 교회는 과연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교회다운 교회로 거듭날 수 있게 할 것인가? 나는 그리할 수 있는 교단이 되도록 하는 책임에서 비켜설 수 없었다. 기장 교단을 어떻게든지 교회다운 교회가 되게 해야 했다. 그즈음 나의 설교는 여기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제는 ‘교회!’다. ‘예수를 따르는 신도!’다. 그것은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교회가, 신도들이 옳음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려는 신앙을 가질 때에만 교회는 교회 되고, 신도는 신도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