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8일 토요일

[범용기 제3권] (228)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Toronto에서

Toronto에서

6월 17일(일) - 오후 2시 연합교회에서 김익선 목사 위임식이 있었다.

노회에서 주재한다. 내가 설교했다. 제목은 “목자상(像)”이다.

79. 6. 19(화) - 서독의 이영빈[1] 부부가 토론토에 왔다. 친척 방문이란다. 이 목사와 나는 그들을 “코레아 하우스”에 초대했다.

이영빈 목사는 내가 N.Y. 대표자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처음에 교섭하던 것과는 온전히 다른 성질의 모임인데 내 이름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내가 내 양심대로 해야 할 일도 태산같은데 이용당하는 줄 알면서까지 내 이름을 내 놓아야 할 까닭은 없지 않겠오?”

옆에 앉는 이영빈 목사 부인은 “이용당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지요!” 했다.

어쨌든, 그 모임도 “태산명동 서일필”이었다.

6월 25일(월) - 선우학원 박사로부터 평양의 내 막내조카 남용의 편지와 사진이 전해졌다.

남용은 모스크바 대학을 마치고 지금 평양에서 중직에 있다는 것이다.

아들이 넷이라고 했다. 내가 평양에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오지 고향에도 가 보고, 할아버지, 할머니 성묘도 했다고 한다.

비석도 세웠단다. 비엔나 이북대사관이 하는 일이니까 신빙성은 할인할 밖에 없겠다.

나는 회답을 보내지 않았다.

7월 4일(수) - 서울 교회 신계동에 우거하는 강기철 씨가, 단권에 요약된 A. Toynbee의 “Study of History”를 자역, 자비 출판한 것을 한권 보내왔다. 호화판 장정이다.

79. 7. 7.(토) - 최홍희 장군 부부가 Korea House에서 곰탕에 정종 한 도꾸리 대접한다. 별 대답도 없었다.



[각주]
1. 이영빈 목사 – 초대 감리교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풍운 목사의 아들로 광복후 감리교신학교 첫 졸업생(1948년)이다. 그는 1955년 서독으로 건너갔으며 1958년 독일에서 동독 교회의 주선으로 이북에 계신 부친의 소식을 접하게 되어 1960년 부친이 사망할 때까지 서신 교환을 하였다. 1964년 괴팅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하려던 그는 한국인 광부와 간호원이 있는 루르 지방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다. 1974년 음악가 윤이상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1981년 6월 이화선 목사와 아내 김순환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였다. 당시 <로동신문>은 “통일하자고 해외 그리스도인이 찾아왔다!”고 대서특필하였다. 2018년 향년 92세로 소천하였다.

[범용기 제3권] (227)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N.Y.에서

N.Y.에서

79. 6. 4(월) - 기차로 N.Y.에 간다. 일행은 선우박사 부부, 김난원 양, 그리고 장공이다.

푸름이 눈에 끝없는 “선”(線)을 긋는다. 푸름은 생명의 빛이다.

네시간 반을 달려 N.Y.의 Union Station에 내렸다. Taxi Church Center에 갔다.

임순만 박사가 중국음식점에서 만찬에 초대한다. 그 길로 임순만 박사 Apt.에 갔다.

밤 새로[1] 2시까지 근황에 대한 보도, 분석, 토의가 계속됐다.

김홍준 장로 댁에서 유숙했다.

79. 6. 5(화) - 김홍준 장로 댁에서 쉬었다.

구름이 낮고 비가 주춤거린다. 집안에서 하루의 공백을 숨쉬었다.

79. 6. 6(수) - 김홍준 장로 차로 신성국 목사 댁에 갔다.

애찬을 나누고, 이 목사 부부와 함께 포오체스타의 김마태 집에 옮겨 거기서 유숙했다.

이 목사 부부는 토론토에로 떠나고 나는 수일 더 쉬기로 했다.

이 무렵에 예의 한국민주운동 대표자 세계대회가 뉴욕에서 모인다고 했다.

최홍희, 최덕신 등이 주동이었고 일본 동경 “민통”을 최고 의장으로 추대한다는 복안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원래의 추진과정에서는 아무 기성단체에도 관련없는, 온전한 새 출발이라고 선전했었다. 그러나 그 배후 세력이 드러나자, 서독의 럿셀협회 그룹, 민련의 고원 박사 등이 반발했다.

선우학원도 물론 초청되었었다. 그런데 UM의 임순만 박사, 이승만, 김정순, 김홍준 등 간부 그룹들 모임에서는 선우박사의 “대표자 대회” 참가를 반대했고 “선우”도 “불참”을 언명했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선우”는 참가하여 중요 프로까지 맡았다.

그래서 동료들의 불신을 샀다고 들었다.

최홍희는 “사면초가”였다. 탈출구를 뚫기 위해 “장공”을 백방으로 찾는다.

수사원까지 냈다고 들었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접수를 거부했다고 한다. 가족도 아니면서 웬 열심이냐는 것이었단다.

여러 가지 난조로 회의는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전한다. 서독의 이화선 박사가 의장으로 선정되었다고 들었다.

79. 7. 9(토) - 임순만 박사 내외분이 차로 나를 시외 김홍준 장로 댁에 옮겨준다.

저녁 후에 N.Y. 민주그룹 – 임순만, 이승만, 김정순, 김윤철, 선우학원 등이 모두 부부동반으로 김홍준 댁에 모여왔다.

이승만 박사의 이북방문 보고와 수백장 슬라이드를 영사했다.

밤 새로 2시까지 담화했다. 이승만 박사 부부만 N.Y.로 돌아가고 다른 분들은 유숙했다.

79. 7. 10 – 김홍준 장로 생일이다.

임순만 목사 사회로 주일예배 겸 생일축하 예배를 드렸다. 내가 설화했다.

79. 7. 11(월) - 김홍준 장로 차로 교회본부에 갔다.

구춘회, 김상호, 이승만, 손명걸 등을 만났고 西獨의 Fritze와도 만나 한 시간 간담했다.

79. 6. 13(수) - 토론토에 날았다.

토론토 공항에는 Joy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목사 집에 와서 쉬었다.



[각주]
1. 새로 – 12시를 넘긴 시각 앞에 쓰여, 시각이 다시 시작됨을 이르는 말


2026년 3월 27일 금요일

[범용기 제3권] (226)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Boston 기독학자회에

Boston 기독학자회에

79. 5. 30(수) - 3PM에 이상철 목사와 신자, 문재린 목사님과 장공, 그리고 김정근이 이 목사 차로 Boston에 간다.

기독학자회 연차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쉴새없이 달렸다.

그래도 오늘로 Boston까지 갈 수는 없었다. 밤 10시에 시라큐스 어느 모텔에서 숙박했다.

신록이 앳된 林木地帶(임목지대), 林間路(임간로)를 달린다.

79. 5. 31(목) - 제13회 기독학자회는 열렸다.

주제는 “한국인 이민사회 문제들”이었다.

오늘부터 6월 2일 오전까지 쉴새 없는 회의와 강연, 토론이다.

나의 임무는 Opening Speech다.

79. 6. 2(토) - 오후에는 Boston시내 견학.

밤에는 로오드 아일랜드의 박요수아 장로 댁에서 박 장로 손주 첫돌 잔치에 초대 받았다.

밤 김장호 박사 댁에서 유숙했다.

79. 6. 3(일) - 2PM. 홍근수 박사 교회에서 설교했다.

설교 후에 청년 그룹과의 좌담회가 있었다. 진지하고 활발했다.

홍근수 목사가 오찬을 냈다.

밤에는 유성국 목사 댁에서 동지들과 만찬을 나누고 밤중까지 담화와 의견교환에 열중했다.

김장호 박사 댁에서 유숙했다.

[범용기 제3권] (225)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Wm Scott 방문

Wm Scott 방문

1979. 5. 17(일) - 예배 후에 이 목사 차로 Brampton의 Scott 박사를 예방했다.

Miss Bumwick과 Miss Popee와 신자가 동행했다.

83세지만 정정했다. 지하실에서 Shaple ball도 같이 했다.

8:30 PM에 집에 왔다.

[범용기 제3권] (224)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一日(일일) 수양회

一日(일일) 수양회

1979. 5. 21(일) - Victoria Day.

오전 9시에 미시소가 연합교회 정동석 목사가 왔다.

오늘 미시소가 근처 “할리데이 인” 집회실에서 미시소가 교회 일일 수양회 강사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주제는 “교회생활의 실제”라고 한다.

청하는 대로 갔다. 약 20명 모였다.

여러 가지 토의, 문답, 상담 등이 종일 계속됐다. 중국음식점에서 만찬을 나누면서 질의문답을 계속했다.

밤 10시 10분에 정 목사 차로 이 목사 집에 왔다.

1979. 5. 25(금) - Finch에 있는 제7일 안식교회에서 설교했다.

많이들 모였다.

5월 26일 – 밤에 연합교회에서 이상철 목사 방송설교집 “땅끝까지 이르러” 출판기념과 학위수령 찬하회와를 겸행했다.

친교실에서 노도윤 장로 사회로 진행됐다.

회중 약 200명. 나도 참석했다.

[범용기 제3권] (223)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이상철 목사 D.D. 학위 받고

이상철 목사 D.D. 학위 받고

형식이겠지만, 모모한 이의 추천서가 있어야 한다기에 정대위 박사와 장공과가 연서해서 추천했다.

추천서 내용은 정대위가 영문으로 이미 작성했었다.

장공이 1958년 U.B.C.의 Union Colloege에서 D.D. 받을 때에도 그 당시 캐나다연합교회 총무로 시무하던 갈리하 박사가 추천했었다.

5월 10일(목) - 8PM에 토론토 대학에서 학위수여식이 있었다.

N.Y. 민주동지들이 김상호 박사를 축하사절로 보내와서 동참했다.

Brampton에서 Wm Scott 박사님이 둘째 아드님(치과의사)의 부축을 받으며 오셨다.

바로 내 곁에 앉으신다. 평생 뼈와 가죽만의 몸이시라 딱딱한 의자에 오래 앉을 수가 없었다.

“딱딱한 의자에 세 시간 앉아 있으려니 박사되는 것만큼이나 고역이오!” 하며 농담이 여전했다.

[범용기 제3권] (222)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문재린 목사의 심경

문재린 목사의 심경

4월 25일(수) - 오전 중에 교회 이 목사 사무실에서 문재린 목사님과 이 목사와 나 셋이 만나기로 했다.

시간이 닿아 갔다. 문 목사님은 벌써 와 계셨다.

문 목사님은 합방 때에 “민영환”처럼 자결(自決)할 생각을 갖고 계신다. 전에도 여러 번 그런 심정을 말씀하셨다.

이 목사도 나도 반대했다.

“그때와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 그런 사건은 하나의 Psycho Case로 일소(一笑)에 부쳐버리고 만다. 하루 신문기사에 오를지 몰라도 그 이상 기억에 남기려하지 않는다”고 만류했다.

그보다도 성과야 있든 없든, 끝까지 한 가지, 즉 자유민주의 크리스찬 한국의 건설을 위해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못 이루고 가시더라도 다음 세대에 그 씨앗을 남겨 심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해 드렸다.

사실, 문재린 목사님이 곁엣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고민을 안고 계실 것이다.

익환과 동환 두 아드님이 감옥에 있다. 그들은 “닭의 입은 될지언정, 소엉덩짝[1]은 안되련다”고 무지한 군인독재 정권에 항거한다.

그들은 죽으며 살고 죽어서 살고 죽어야 산다는 철학의 토양에 뿌리를 내렸다. 문 목사님은 아들들과 같이 죽고 싶었던 것이었다.

1979. 4. 29(일) - 토론토 한인연합교회 창립 12주년, 이상철 목사 근속 10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했다.

박재훈 박사의 지휘로 음악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각주]
1. 엉덩짝 - ‘엉덩이’를 속되게 이르는 말


[범용기 제3권] (228) 北美留記 第六年 1979 - Toronto에서

Toronto에서 6월 17일(일) - 오후 2시 연합교회에서 김익선 목사 위임식이 있었다. 노회에서 주재한다. 내가 설교했다. 제목은 “목자상(像)”이다. 79. 6. 19(화) - 서독의 이영빈 [1] 부부가 토론토에 왔다. 친척 방문이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