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記[기]에 나타난 靈魂不滅觀[영혼불멸관]
「落穩[낙수]」
1930년 10월 25일[1]
[텍스트 출처]
- 『신학지남』 1933년 1월호, 31-36쪽
- 『낙수(1940년)』, 1-12쪽
-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1971년)』 제1권, 15-20쪽
- 『김재준전집(1992년)』 제1권, 4-12쪽
[텍스트 요약]
이 글은 욥기 19장 25절에서 27절의 구절 해석을 중심으로 욥의 영혼불멸 신앙 여부를 고찰한 글이다. 학자들은 히브리어 전치사 ‘민’을 ‘남은 육체로’ 해석할지 ‘육체를 떠나’로 해석할지에 따라 욥의 내세관에 대한 결론을 달리한다. 욥은 전통적인 신앙에 따라 사후 세계인 ‘쉐올’을 빛이 끊어지고 소망이 없는 어두운 세계로 인식했다. 그는 생명의 실재성을 철저히 현세의 삶에만 두었기에 사후의 영혼불멸에 대해 교리적으로 명확하게 단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욥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결백한 양심과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욥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이 살아서든 죽어서든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나타나 결백함이 변호되는 것이었다. 현세에서 온전히 충족되지 못한 욥의 강렬한 정의감은 결국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리라는 굳건한 확신으로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의와 욥의 결백한 양심이라는 굳건한 터전이 영혼불멸이라는 위대한 신앙의 작은 싹을 틔우게 한 바탕이 되었다.
[텍스트 전문 소개]
욥記[기]에 靈塊不滅[영혼불멸]의 信仰[신앙]이 明白[명백]히 나타나 있는가 없는가 하는 問題[문제]는 전적으로[2] 욥記[기] 19장 25절로 27절까지에 있는 文句[문구]를 어떻게 解釋[해석]할 것인가 하는데 달려 있다. 아직까지도 學者間[학자간]에 많은 異見[이견]이 있어서 確言[확언]하기 어려우니만치 斯界學徒[사계학도]의 마음을 끄는 題目[문제]의 하나가 되어 있다. 이제 히브리 原文[원문] 옮기는 것은 略[략]하고 最近[최근]에 된 英譯[영역]들을 찾아 보면
맥파딘 (Mcfadyen) 譯[역]
“I know that there liveth a champion, /Who will one day stand over my dust;/Yea, Another shall rise as my witness, /And as sponsor, /Shall behold god;”
마팯 (Moffat) 譯[역]
“Still, I know one to Champion me at last, to stand up for me upon earth, This body may break up, but even then my life shall have a sight of God;”
그레이, 드라이버 (Gray and Driver) 共譯[공역]
“But I know that my vindicator liveth, /And hereafter he will stand up upon the dust, And … /And away from my flesh I shall behold God. /Whom I shall behold on my side, / And mine eyes shall see unestranged.”
데이빗슨 (Davidson) 譯[역]
“And after my skin which is distroyed. This here, even without my flesh shall I see.
God : Whom I shall see
And my own eyes behold, and not another’s;“
朝蘇語譯[조선어역][3]
「내가 알거니와 나의 구주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땅위에 서시리로다. 나의 이 가죽이 썩은 후에 내가 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을 보리로다.」
맥파딘은 키텔(Kittel)의 原本[원본]에 실린 附錄[부록]을 그대로 採用[채용]하여 極度[극도]의 自由譯[자유역]을 試[시]한 것이오 그레이와 드라이버는 26절의 上半節[상반절]은 번역 不能[불능]이라고 아무 번역도 하지 않았고 마팯은 自己[자기]의 解釋[해석]에 基[기]한 意譯[의역]을 試[시]하였고 데이빗슨은 될 수 있는데 까지는 直譯[직역]을 試[시]하였는데 「미부사리」(From or without my flesh)를 「오리」(my skin)의 結句[결구](Apodosis)로 取扱[취급]하였다. 그러나 다른 學者[학자]들 中[중]에는 이것을 對照句[대조구](Antithesis)로 取扱[취급]한 이도 많고 또 어떤 이는 이 두 文句[문구]가 共[공]히 「肉體[육체]」라는 것의 概意的[개의적] 表現[표현]으로 使用[사용]되었다고도 主張[주장]한다. 이것도 輕率[경솔]히 判斷[판단]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 보다도 더 微妙[미묘]한 것은 여기 있는 前置詞[전치사] 「민」을 어떻게 번역할까 하는 것이다. 이 前置詞[전치사]는 英語[영어]로 「로, 으로」(From) 等[등]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떠나」(Away from)로도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前者[전자]를 取[취]한다면 욥의 말하고져 한 것은 「내 가죽(皮)이 비록 썩어 없어진다 할지라도 그 남은 肉體[육체]로 하나님을 目賭[목도]하겠다」는 것이 될 것이니 다시 말하면 現世[현세]에 살아 있는 동안 기어코 하나님을 뵙겠다는 것임에 靈塊不滅[영혼불멸]의 信仰[신앙]과 關係[관계]될 것이 別[별]로 없을 것이며 만일 後者[후자]를 取[취]하여 「肉[육]을 떠나」라고 번역한다면 그 反對[반대]의 事實[사실]을 意味[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데이빗슨은 後者[후자]가 文章構成法[문장구성법]에 비추어 보아[4] 前者[전자]보다 自然[자연]스럽다는 것을 力說[역설]하였고 그 외에도[5] 그린, 췌인(Cheyne) 드라이버 等[등]이 그 後者[후자] 卽[즉] 「肉[육]을 떠나」 하나님을 보리라는 譯[역]을 하였다.
그린(Green)은 自己[자기]가 그렇게 번역한 內面的[내면적] 理由[이유] 두 가지를 들어 말하기를 「(1) 욥은 처음부터 끝까지 自己[자기]는 무덤가에서 彷徨[방황]하는 者[자]로 自處[자처]하여 現世[현세]에서의 온갖 希望[희망]은 아주 없어진 것을 말하였으며 (2) 또 만일 욥이 自己[자기]의 信心[신심]에 對[대]한 報應[보응]을 반드시 現世[현세]에서 받아야만 된다는 것을 主張[주장]하였다면 그는 自己[자기]의 中軸[중축]되는 思想[사상]을 내어버리고 自己[자기]를 못견디게 구는 「親舊[친구]들」의 思想[사상]을 따른 것이 된다고 했다」(Cheyne: “Job and Solomon” 34. Green: “Argument of Job”204-5) 라고 말했다.
이런 것이 重要[중요]한 理由[이유]가 아닌 것은 아니나 그래도 아주 首肯[수긍]할 수 없는 點[점]이 아직도 남아 있다. 于先[우선]은[6] 原文[원문]에 意義[의의]가 依然[의연]히 不分明[불분명]한[7] 까닭에 누구나 다 前後[전자]의 文脈[문맥]을 보아 좋도록 解釋[해석]한 것임에 各自[각자]의 臆說[억설]에 따라 그 結論[결론]을 달리한 것이며, (2) 데이빗슨의 熟鍊[숙련]한 論文[논문]을 읽은 후에도 우리의 마음 속에서 疑惑[의혹]의 念[념]이 이주 사라지지 않는 것은 욥이 만일 이 句節[구절]에서 適確[적확]한 靈塊不滅[영혼불멸]의 來世觀[내세관]을 告白[고백]하려고 한 것이었다면 왜 그가 가장 分明[분명]하고도 普通[보통] 쓰는 말 「肉[육]」과 「靈[영]」을 對立[대립]시켜서 「내 肉[육]이 없어진 後[후]에도 내 塊[혼]으로 하나님을 뵙겠다」고 하지 않고 그렇게 語塞[어색]한 말 「皮[피]」와 「肉[육]」을 對立[대립]시켜서 「내 가죽(皮)이 없어진 後[후]에 내 肉[육]으로(或[혹]은 肉[육]을 떠나) 하나님을 뵙겠다」고 하는 不分明[불분명]한[8] 表現[표현]을 했을까. 그도 亦是[역시] 傳統的[전통적] 信仰[신앙]인 黃泉說[황천설] 때문에 (Doctrine of Sheol) 明確[명확]한 靈塊不滅[영혼불멸]의 來世觀[내세관]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기는 所以[소이]이다.
勿論[물론] 욥은 現世[현세]에서 더 오래 살기를 期待[기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덮이는 때 그는 極度[극도]의 不平[불평]과 落膽[낙담]을 表示[표시]하였으니 이는 그의 思惟[사유] 가운데 있는 「生[생]」이라는 觀念[관념]은 純然[순연]히 現世[현세]의 生[생]을 意味[의미]한 것이었던 까닭이다.
「베틀에 북(梵[범])[9] 같은 나의 날(日[일])들은
所望[소망]없이 끝막아 버립니다.
오, 생각하소서 나의 生[생]은 입김같아서
다시 좋은날 뵈올 길 없소이다.
…………
사라져 없어지는 구름같사오매
陰府[음부]에 내려갔다 올라올 길 없소이다.」
라 한 것은 그가 生[생]의 하염없음을 슬퍼한 나머지 「生[생]은 헛된 입김,쓰러지는 구름」 같아서 소망도 없으며 다시 찾을 곳도 없다고 괴로운 탄식을 아끼지 않은 것이며
「여인에게서 난 사람이란
사는 날은 짧고 괴로움은 많사외다.
꽃같이 났다가 또 시들어지며
그림자처럼 움직여 定[정]함이 없사외다.」
「사람이 죽어 늙어지어
그의 마지막 숨결을 내쉰때
그는 어디 있나이까.
(그는) 물 없어진 바다
말라 붙은 골짜기이외다.[10]」
이밖에도 그는 같은 意味[의미]의 괴로운 탄식을 많이 말하였으니 10장 9~13절 까지에는 人生[인생]이란 거룩한 土器[토기]장이의 손으로 빚어만든 한 조그마한 흙덩이에 숨과 생각과 靈[영]을 넣어 놓은 것으로 結局[결국]은 다시 無意味[무의미]한 티끌가루로 돌아갈 밖에 없는 것을 원망스럽게 말했으며, 13장 28절에는 그의 生命[생명]이 날로 썩어져서 좀먹은 의복같이 떨어져가는 것을 괴로워 하였으니 다 明確[명확]한 靈魂不滅[영혼불멸]의 來世觀[내세관]을 찾지 못한데서 생긴 괴로운 告白[고백]인가 한다.
그러면 욥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 줄 믿었는가? 3장 1~22절에 그는 自己[자기]의 난 날을 咀呪[저주]한 後[후]에 죽은 者[자]의 平和[평화]로운 靜寂[정적]과 安息[안식]을 부러워서 이렇게 노래했다.
「왜[11] 무릎에[12] 나를 받들었으며
왜 가슴이 나를 젖먹였던고
그러지 않았던들 지금의 나는
고요히 누워 平安[평안]히 잠잘 것을
…………
强者[강자]가 掠奪[약탈]을 그치고
弱者[약자]가 마음놓고 있는곳!
捕虜[포로]가 다함께 고요히 누워
看役軍[간역군]의 (毒[독]한) 소리를[13] 듣지 않는곳!
큰 者[자]와 작은 者[자] 分間[분간]이 없고
奴隸[노예]가 主人[주인]에게서 놓임받은 곳!
오, 하나님 왜 受難者[수난자]에게
빛을 주시나이까?
왜 쓰린 落望[낙망]에 있는 人生[인생]에게
삶을 주시나이까?」
여기에서 우리는 욥의 괴로운 「死[사]의 讚美[찬미]」를 듣는다. 이 靜寂[정적]과 安息[안식]으로 表現[표현]된 死者[사자]의 世界[세계]는 陰酸[음산]한 쉐올(Sheol)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데이빗슨이 「舊約神學[구약신학]」 479頁[혈]에서 말한 바와 같이 「墓所[묘소]의 景[경]과[14] 死者[사자]의 肉體的[육체적] 狀態[상태]를 想像[상상]」하여 詩的[시적]으로 着色[착색]한 것임이 分明[분명]하매 구태어 敎理的[교리적] 問題[문제]에까지[15] 올릴 必要[필요]는 없는줄 안다. 이밖에 다른 곳에서는 始終一實[시종일관]하게 죽으면 陰府[음부](Sheol)로 내려 간다는 것은 再言[재언]은 要[요]하지 않는 定理[정리][16] 같이 말하였다. 이 쉐올은 「暗黑[암흑]의 世界[세계], 陰酸[음산]과 混濁[혼탁]의 世界[세계], 거기에 비취이는 빛이란 끊어지고(14:21) 거기서 나올 所望[소망]도 없는(10:21)」[17]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우리는 욥의 來世觀[내세관]이 대개[18] 어떠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即[즉] 그에게 있어서는 生[생]의 唯一[유일]한 實在性[실재성]은 오직 現世[현세]의 「삶」에 있는 것이요, 死後[사후]에는 暗黑[암흑]과 混濁[혼탁][19] 그 자체인[20] 쉐올에서 「삶」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너무나 희미한 끊임없이 늘어진 半意識[반의식]의 「存在[존재]」를 繼續[계속]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14장 13~15절에 그는 이 쉐올에서 벗어날 때가 있을 것을 말하였으나 그 다음절 16, 22, 特[특]히 19절로 22절에서 卽時[즉시] 그런 希望[희망]이 不可能[불가능]한 것을 스스로[21] 言明[언명]해 버렸다.
그러면 이런 思想的背景[사상적배경]을 가진 욥에게서 明確[명확]한 靈魂不滅[영혼불멸]의 來世觀[내세관]을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없다는 理論[이론]이 優越[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나 거기에도 相當[상당]한 무게가 있음을 認定[인정] 안할 수 없는 줄 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욥의 來世觀[내세관]을 正當[정당]히 把握[파악]하려면 그의 思想[사상]을 全體的[전체적]으로[22] 보아 그 곡절있는 움직임을 살펴야 할 것이다. 욥은 人生[인생]의 巡禮者[순례자]다.
그의 記錄[기록]은 冊床[책상]위에서 三段論法[삼단논법]으로 쌓아올린 論理[이론]의 殿堂[전당]은 아니었다. 차라리 人生[인생]의 曠野[광야]에서 갈찾아 헤메이는 눈물겨운 苦憫[고민]의 告白[고백]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變遷[변천]이 많고 矛盾[모순]과 自家撞着[자가당착]도 많은 것이다.
死者[사자]의 고요한 安息[안식]을 부러워하던(3:14~19) 그가 死者[사자]의 世界[세계]인 쉐올의 暗黑[암흑]을 생각하고서는 몸부림치며 원망하였으며(10:21, 22) 쉐올에서 다시 나오기는 絶對不可能[절대불가능]하다고 宣言[선언]하다시피한 그가(7:7~9) 하나님이 자기를 쉐올에서 불러낼 때를 기다리겠노라고(14:13~14)도 하였으며, 하나님은 苛酷[가혹]한 無道德[무도덕]한 이라고 원망하던 그가(9:22~24) 自己[자기]를 辯護[변호]해 주실 이는 오직 하나님 뿐이시라고 그의 앞에 머리를 숙이기도 하였다(19:24~25).
이렇게 그는 安定[안정]없는 마음으로 이곳저곳 더듬어 헤매었다. 그러나 그의 품안에는 한 작은 羅針盤[나침반]이 있어서 그의 나아갈 方向[방향]을 멀리 가리키고 있었으니 그 바늘의 한쪽 끝은 하나님의 의(義[의])를 가리키고 또 한쪽 끝은 그의 良心[양심]-潔白[결백]한 良心[양심]-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길을 찾아 헤메이는 동안에도 이 바늘만은 항상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 하나님은 義[의]로우시다. 그리고 내 良心[양심]은 潔白[결백]하다. 그런고로 이 現在[현재]의 慘狀[참상]에 對[대]하여 무슨 說明[설명]이 있어야 할것이다 하는 것이 그의 속임없는 心情[심정]이었다.
「이제[23] 그가 나를 죽이시리다. 내게는 소망이 없소이다. 그래도 나는 그의 앞에서 내 길을 변호하오리니 敬虔[경건]치 못한 者[자]가 그의 앞에 올 길이 없사오매 이것이 나에게 救援[구원]의 表[표]가 됨이외다.」
「만일 하나님이 義[의]로우시다면 潔白[결백]한 사람을 無故[무고]히 埋葬[매장]해버릴 理由[이유]는[24] 없을 것이다」 하는 것이 그가 붙잡고 놓지 않은 가장 큰 眞理[진리]였다. 이 信念[신념]이 그에게 暫間[잠간]이나마 쉐올에서 復活[부활]할 希望[희망]도 보게 하였으며(14:13, 14) 아벨의 피가 땅을 적셨을 때 하늘에 계신 證人[증인]이 이를 변호해준 이야기를 聯想[연상]케 하기도 하였으며(16:18, 19) 甚至於[심지어] 옛이야기를 싣고 고요히 서 있는 碑石[비석]에 呼訴[호소]할 생각도 나게 한 것이었다(19:23, 24).
이렇게도[25] 受難者[수난자]의 倫理的[논리적] 先後策[선후책]을 생각하고 있는 反面[반면]에 그보다 더 큰 問題[문제]가 그를 괴롭게 하였으니 卽[즉] 大體[대체] 義人[의인]이 因苦[인고]할 「까닭」이 무엇인가, 無辜[무고]한 피가 땅을 적실 理由[이유]가 어디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의 理性[이성]은 이것을 判斷[판단]하기에는 너무나 局限[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과 直接[직접] 問議[문의]하기를 要求[요구]한 것이다.
「나는 오직 全能[전능]한 이에게만 말씀드리렵니다.」
나는 하나님과 변론하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의 問議[문의]와 懇願[간원], 그의 探求[탐구]와 祈禱[기도]는 마침내 그를 피스가의 높은 峰[봉]위에까지 인도하였고 거기서 그의 오랜 懇求[간구]에 對[대]한 確證[확증]의 世界[세계]를 展望[전망]하게 하였으니 곧 이번 硏究[연구]의 本題[본제]가 되어 있는 19장 25~27절에 있는 말씀이다. 거기에서 그는 (1) 하나님이 반드시 그의 潔白[결백]한 것을 辯護[변호]해 주시리라 (2) 그가 틀림없이 그의 눈으로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 하는 두가지 偉大[위대]한 信仰[신앙]의 世界[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느때 어떻게 이것이 成就[성취]될 것인가 하는 것은 그에게 그다지 重要[중요]한 問題[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의 그의 生前[생전]에 成就[성취]되든 死後[사후]에 되든 또는 그가 普通肉眼[보통육안]으로 하나님을 뵙든, 가죽이[26] 다 벗겨진 고깃덩이 몸으로 그를 뵙든, 復活[부활]한, 새로 지음받은 몸으로 그를 뵙든, 아주 肉[육]에서 떠난 靈[영]으로 뵙든, 이런 것은 그가 그다지 크게 關心[관심]한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참으로 나타내려고 한 것은 - 그야 살던지 죽던지 「땅위에서의 하나님의 義[의]」와 「聖徒[성도]에 對[대]한 하나님의 啓示[계시]」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며 또 반드시 있을 것이리는 確信[확신]이었다.
스트란(Strahan)이 스멘드(Smend)의 册[책]을 引用[인용]하여 말하기를 「死後[사후]의 永遠[영원]한 生命[생명]에 對[대]하여 욥은 言明[언명]한 바가 없다. 그가 생각한 生命[생명]의 回復[회복]이란 것은 그의 正義感[정의감]의 體現[체현]에 不過[불과]하다. 卽[즉] 現世[현세]에서 滿足[만족]을 얻지 못한 그의 正義感[정의감]이 그의 믿음의 目標[목표]가 되어 다시 나타난 것 뿐이다」라고 하였다.
事實[사실] 욥은 事後[사후]의 靈魂不滅[영혼불멸]에 對[대]하여 똑똑하게 끊어 말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傳統的[전통적] 信仰[신앙]인 陰酸[음산]한 쉐올을 그는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强烈[강렬]한 正義感[정의감]은 이에서 滿足[만족]을 느끼지 못하였다.[27] 이에 靈魂不滅[영혼불멸]의 偉大[위대]한 信仰[신앙]은 「하나님의 義[의]」라는 터전에 뿌리를 박고 「욥의 潔白[결백]한 良心[양심]에」 그 작은 싹을 돋게 하였다.[28] 마치 작은 상수리 나무 열매가 偉大[위대]한 將來[장래]의 可能性[가능성]을 품고 가시덤불 속에서 그 조그마한 싹을 돋힌 것[29] 같이.
[핵심 키워드]
- 욥기 19장 25-27절(Job 19:25-27): 욥기 내에서 영혼불멸 신앙의 존재 여부를 가늠하는 가장 핵심적인 구절이다.
- 영혼불멸(Immortality of the Soul): 욥기에서 명확한 내세관으로 확립되었는지에 대해 학자들 간에 해석이 엇갈리는 논쟁적 주제다.
- 히브리어 전치사 ‘민’(Hebrew preposition ‘min’): 문맥상 ‘육체로’ 혹은 ‘육체를 떠나’로 달리 번역될 수 있어 욥의 내세관을 판단하는 중요한 쟁점이다.
- 데이빗슨(Davidson): 전치사 ‘민’을 ‘육체를 떠나’로 해석하는 것이 문장 구성법에 비추어 더 자연스럽다고 주장한 영역(英譯) 학자다.
- 쉐올(Sheol): 욥이 인식했던 전통적인 사후 세계로, 빛이 끊어지고 소망이 없는 암흑과 혼탁의 공간이다.
- 현세의 삶(Earthly Life): 욥이 생각한 생명의 유일한 실재성이며, 사후에는 쉐올에서 희미한 반의식 상태만 남는다고 여겼다.
- 사자의 안식(Rest of the Dead): 강자의 약탈이 그치고 고단한 약자와 포로가 고요히 누워 평안을 누리는 죽음 이후의 정적이다.
- 하나님의 의(Justice of God): 의롭고 결백한 자를 무고히 매장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욥의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신념이다.
- 결백한 양심(Innocent Conscience):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욥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게 만든 내면의 기준이다.
- 신앙의 나침반(Compass of Faith): 욥이 인생의 광야에서 방황할 때도 항상 하나님의 의와 자신의 결백을 향해 있던 방향성이다.
- 부활의 희망(Hope of Resurrection): 욥이 잠시나마 쉐올의 암흑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했던 찰나의 신념이다.
- 하늘의 증인(Heavenly Witness): 무고한 피를 흘린 자를 위해 하늘에서 그 결백을 변호해 줄 존재에 대한 은유적 소망이다.
- 정의감(Sense of Justice): 현세에서 충족되지 못해 끝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리라는 믿음으로 승화된 욥의 강렬한 갈망이다.
- 피와 육(Skin and Flesh): 욥이 육신이 파괴된 후에도 하나님을 보겠다고 표현할 때 영(靈) 대신 대립시켜 사용한 독특한 어휘다.
- 인생의 순례자(Pilgrim of Life): 욥의 기록이 단순한 탁상공론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는 눈물겨운 고민의 과정임을 뜻한다.
- 하나님과의 변론(Argument with God): 의인이 고통받는 현실을 자신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어 하나님께 직접 묻고자 한 욥의 요구다.
- 확증의 세계(World of Assurance): 욥이 오랜 간구 끝에 마침내 자신의 결백이 입증되고 하나님의 섭리를 뵐 것을 확신하게 된 영적 전망이다.
- 자유역과 직역(Free & Literal Translation): 맥파딘, 데이빗슨 등 여러 학자가 욥기 원문의 난해함을 극복하고 의미를 도출하기 위해 시도한 번역의 형태들이다.
- 신학지남(Shinhak Jinam): 김재준 목사의 해당 글이 1933년 1월호에 수록되었던 신학 잡지의 명칭이다.
- 상수리나무 열매(Acorn): 욥의 결백한 양심이라는 터전 위에서 싹튼 영혼불멸 신앙의 위대한 가능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단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