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
제10회 한국기독학자회 연차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시카고행이다.
76년 4월 8일(목) - 10:00A.M.에 이상철 목사와 함께 토론토 공항에 나가 11:25A.M. 비행기로 Chicago에 향했다.
약 한 시간 날아 목적지에 착륙, Midland Hotel 906호실에 여장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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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한국기독학자회 연차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시카고행이다.
76년 4월 8일(목) - 10:00A.M.에 이상철 목사와 함께 토론토 공항에 나가 11:25A.M. 비행기로 Chicago에 향했다.
약 한 시간 날아 목적지에 착륙, Midland Hotel 906호실에 여장을 풀었다.
3월 25일(목) - North America Coalition의 Steering committee에 참석하기 위해 N.Y.로 간다.
이상철 목사는 이 “회”의 부의장이니까 의례 출석해야 한다.
이 목사와 나는 7A.M.에 토론토 공항을 떠나 한 시간 후에 “라과디아” 공항에 내렸다. Taxi로 교회본부에 달렸다.
회의는 곧 열린다.
Executive Chairperson인 Peggy Billings의 명사회로 4:30P.M.까지에 숱한 안건들을 거침없이 결재해 버렸다.
중간 시간에 우리 졸업생인 구춘회, 채위, 김계숙 등과도 친교를 새롭게 했다.
“상철”도 자리를 같이 했다.
상철은 토론토로 떠나고 나는 신성국 목사 가정에 유숙했다.
3월 27일(토) - 신성국 목사 댁에서 조반을 마치고 한진관 목사가 목회하는 Queens 한인교회에 가서 거기 모인 한신동창들을 반갑게 만났다.
3:00P.M.부터는 정식으로 한신동창회가 개회된다. 모두 같이 늙은 처지지만 한 옛날의 “선생님”을 환영한다는 성의로 축하 Cake을 나누며 9:00P.M.까지 죄없는 회고담에 “기”가 부풀었다.
사제(師弟)의 “정(情)”이란, 늙으면서 깊어가는 것이 아닐까.
밤 9시 55분 Toronto로 떠날 때 동창회원 모두가 공항까지 배웅하고 작별을 아쉬워 했다. 새로[1] 1시에 은용집에 가서 유숙했다.
3월 19일(금) - 어제(3월 18일) 연합교회 사무실에서 Dallas의 동원모 박사를 만났다.
이 목사와 동 박사와 나는 같이 이 목사 집에 가서 밤 12시반까지 담화했다. 모두 이 목사 집에서 잤다.
3월 20일 8A.M.에 셋이 Royal York Hotel의 회의실에 갔다.
동 박사는 오늘 이 학회에서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날이라고 했다.
우리는 우선 Hotel식당에서 동 박사를 식사에 초대했다.
학회가 시작되자 이 목사와 나도 잠시 방청했지만 우리 분야가 아니라서 “흥”이 안난다.
3월 20일(토) - 학자회 유지들 가운데서 특히 한국에 관심있는 분들이 따로 그룹을 만들었단다.
“Concerned Scholars of Asian Studies”다.
오늘 점심시간에 “성 안드류스교회당”에서 한국경제에 대한 특강이 있다해서 이 목사와 나는 기대를 갖고 참석했다.
Penal[1]이다.
통계, 분석, 평가, 전망 등 학자다운 강연 내용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현상대로 간다면 1, 2년 안에 한국경제는 총파산이다.
나는 몇해 전부터 “파산”이란 얘기를 귀아프게 들어왔다. 그래도 어찌어찌 꿰메는 모양이어서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한국민족은 고추선[2] 진동나무 그루를 작디작은 손톱으로 거머잡고 그루에 붙어 온몸을 비꼬와 돌며 자라는 “등넝쿨”이나 머루, 들쭉 특히 담장넝쿨 생활태를 갖고 있다.
지금도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기업체로서는 파산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민족자본 전체로 본다면 결코 파탄상태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주먹구구”다.
다국적기업체의 “빚놀이 도박”이 마감숨결을 달래고 있는 것인가!
3월 21일(일) - 예배 후에 토론토 연합교회 친교실에서 서대숙, 조요한 등의 경제문제, 통일문제 연구 Presentation[3]이 있었다.
요새 박 정권에서 자가선전하는 “국민소득” 몇 퍼센트 상승 운운하는 것은 실속없는 “귀속임”이라고 지탄한다.
가령 여기에 백만장자가 있고 그 옆에 날삯[4] 노무자[5]가 있는데 그 두 집의 재산을 합쳐서 둘로 평균화 한다면 그 노무자의 소위 “넷푸로핏”은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그 날삯 노무자에게 단 한푼인들 더 돌아가느냐?
정부에서 국민소득의 상승이 곧 빈농과 빈민의 정비례적인 소득 향상인 것 같이 선전한다. 속임수다.
나는 통일문제에 대하여 내 나름대로 생각하며 듣는다.
“통일문제”도 그렇다. 38선은 “경계선”이 아니라, “단절선”이 됐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시대에는 두만강 가에 사는 사람들이 강 건너를 향하여 소변을 봐도 “도강죄”로 잡혀갔다고 한다. 지금 38선은 소위 중립지대를 끼고 남과 북이 밤낮 총부리를 겨누고 투계(鬪鷄)[6]처럼 눈동자를 맞대고 노린다.
인간교류가 단절돼 있다.
“논리”는 이미 “소박” 당한지 오래다. 해외에서의 통일문제연구가들은 이런 현실에 몸으로 대결할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남과 북을 공정하게 비판하고 다루는 점에서는 해외학자들의 공헌에 기대는 바 적지 않다고 인정한다…….
남과 북이 모두 독재정권이어서 “통일”은 그들 권력구조에 어떤 동요나 위기가 생길 때마다 써 먹는 “만병수”라 하겠다.
개인 자유를 기본으로 하는 “인간주의”만이 남과 북을 섞을 수 있다…. 내 생각이다.
이런 높은 차원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통일 방안은 갈라져도 싸우고 합하고도 싸운다.
기독교 사명이 크다…….
정치학회 학자들의 Conference가 토론토 Royal York Hotel 회의실에서 열린다.
내일이 개회하는 날이다.
Dallas 대학의 정치학교수 동원모 박사도 왔다.
그는 이 학회에서 연구논문을 발표하기로 되 있었다. 그는 학자일뿐 아니라, 한국민주화운동에서 직접 전선에 나선 투사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그와의 인연이 깊게 맺어진 것이었다.
1976년 3월 17일(수) - 그 길로 프레이저 의원 청문회에서 방청했다.
“미국내 KCIA활동실태”를 파헤치는 데 집중되 있었다.
증언자는 “그레고리ㆍ헨더손”, 전국무성한국부장 “레이나드”, 그리고 신한민보사장 “김운하”였고, L.A.한인회장이라는 김정일도 증언자의 한사람이었다.[1]
김정일[2]은 법철학박사로서 L.A.한인회 회장이란다.
경력으로 보더라도 그만한 문답에서 실수할 까닭은 없을 것이었다.
“프레이저”의 질문은 간단했다.
“L.A.한인교포사회에도 KCIA의 비밀 또는 노골적인 활동의 사실이 있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횡설수설, 동문서답으로 방청석을 웃겼다.
결국 그는 L.A. 한국영사관에서 주입한 각본 연출 때문에 스스로 혼란을 일으킨 것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래도 모임이 끝나자 그는 내게 와서 정중하게 인사한다.
1929년 내가 도미수속 중 “피어선성경학교”에서 한 달 동안 가르친 일이 있었는데 그때 학생이던 김은석의 아들이란다. 나는 덮어놓고 반가웠다.
김은석은 목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했다.
그레고리ㆍ헨더손과 도날드ㆍ레이나드의 Documentary하고 웅변적인 진술은 통쾌했다. 그리고 김운하 사장의 진술도 하나하나 재료를 제공하며 침착하게 진행됐다.
밤에 “민통” 주최로 “차이나인”에서 증언자를 위로 격려하는 만찬회가 있었다.
내가 인사말하고 증언자들이 한마디씩 소신을 말했다. 모두 “의기상통”(意氣相通)하는 “지우”(志友)로서의 친교였다.
“김정일”[3]은 물론 보이지 않았다. 나는 끝내고 토론토에 날았다.
3월 17일(수) - 우리 민주인들은 12시 A,M에 대법원 층계 앞에 모였다. 점심시간이어서 “데모” 인원이 부쩍 늘었다.
대법원 층계가 초만원이다. 거기서 이번 “반독재 민주데모”는 종막을 꾸민다.
“식순”은 이근팔 – 사회, 안병국 – 민주구국선언 낭독, 김대식과 왕 신부 – 기도, 정기영 – 민통성명서 낭독, 김대식 – 영문성명서 낭독, “장공” - 축사와 격려, 김응수 장군 – 만세삼창, 그리고 산회했다.
간결하고 인상 깊은 모임이었다.
3월 14일(일) - 안병국 목사와 그 가족이 나가는 와싱턴 침례교회에서 예배했다. 예배자 약 2백 명이다. 내가 설교했다. “교회와 세계”라는 제목이다.
예배를 마치고 승규 차로 윤규 박사 집에 갔다. 승규 집 바로 옆 집이었다.
6:30PM 안병국 목사 집에서 만찬에 초대한다. 목사 8명과 성공회 왕 신부란 분이 자리를 같이 했다.
그들은 한국 민주운동의 기독교적 의미를 납득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나는 내 재주껏 목사님들에게 설명하고 지금도 젊은 목사들이 예언자적 사명에 부름받아 고난 중에 자유와 정의를 씨뿌리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의식 가진 분은 있는 것 같지 않다. 까놓고 질문하는 분도 없었다. 자기들도 숨은 동지라면서 찬사를 올린다.
그러나 길 바닥에 떨어진 씨앗이랄까 열매 맺혔다는 소식은 없다.
3월 16일(화) - 3:30PM 와싱톤 지방 장로교노회가 모인다.
김응창 장로도 노회원이기에 그의 주선으로 노회 경건회에서 내가 5분간 설교하도록 순서가 짜여 있었다.
나는 히틀러 독재 때의 독일교회 얘기에 한국교회 실정을 덧붙여서 신앙 자유를 위해 세계교회 공동전선이 형성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아무 반응도 없는 것 같았다.
그 노회에서 사회에 관심과 책임을 느끼는 회원이 얼마 있다고는 하지만 거의 전부가 “교회주의”에 농성한[1] 보수적인 “부자”들인 것 같았다.
나는 내 얘기를 마치는 대로 나와 버렸다. 후에 김응창 장로의 노력으로 한국교회를 돕는 무슨 위원회가 됐다는 소문도 들은 것 같으나 내게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3월 16일 – 나는 어젯밤을 “윤규” 집에서 지내고 새벽녘에 일어나 승규 출근차에 동승, 국회도서관에 갔다.
그는 한국부장이다.
승규는 나에게 국회의사당 매점에서 육중한 손가방 하나를 선물로 사준다. 그것이 10년내 나의 민주운동 행각(行脚)[2]에 “괴나리 봇짐” 노릇을 한다.
국회도서관 식당에서 전규홍 박사, 송승규와 나 셋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곧 국회의사당 정면 층계 앞에 갔다.
시카고에 제10회 한국기독학자회 연차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시카고행이다. 76년 4월 8일(목) - 10:00A.M.에 이상철 목사와 함께 토론토 공항에 나가 11:25A.M. 비행기로 Chicago에 향했다. 약 한 시간 날아 목적지에 착륙, M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