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밖에 계신 주님에게로 나아가자
히브리서 13장 12절 / 1991년 5월 10일 / 고 강경대 군 빈소
김상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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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설교 전문]
나는 지난 1987년 이전의 젊은 죽음들을 빠짐 없이 찾아갔다. 가서 애도를 표하고 부모님들을 위로했다. 그런데 이번 경대의 죽음을 찾아올 수가 없었다. 아니, 여기 오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기보다 올 수가 없었다고 해야 정직한 표현이 될 것 같다. 부끄러워서다. 그 앞에 가서 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쳐 가는 공권력의 고삐를 그냥 방치한 채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가 이런 멀쩡한 희생이 나니까 가서 조문이나 한다는 것이 가증스럽게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은 어디 나뿐이겠는가? 여기 모인 우리 모두의 심정이 그랬을 것이다. 미친 공권력을 막지 못한 우리가 경대를 이 모양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끝내 오지 않는 것 또한 비 겁한 도피라고 여겨지기에 부끄러운 얼굴로라도 다시 경대의 죽음 앞에 나온 것 아닌가? 우리를 한 번 더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미친 공권력을 퇴치하는 일에 미력이라도 바치겠노라고 스스로 결단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시 젊은이의 죽음 앞에 선 것이다.
왜 오지 않겠다 했는가? 부모님들 얼굴 뵐 낯이 없기 때문 아니었는가? 경대는 그 부모님들만의 자식이 아니다. 미친 공권력 앞에 선 젊은이들은 그들을 낳은 부모들만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우리 모두의 자녀들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지키지 못했다.
우리들이, 오늘을 사는 성직자들이 바르게 살고 있다면 경대의 죽음은 이렇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영균이, 세웅이, 기설이 그리고 박창수 씨의 죽음도, 승희의 고통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경대와 영균이와 세웅이와 기설이와 박창수 씨의, 그리고 승희의 부모님들을 뵐 낯이 없어 이렇게 구차스러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뵐 낯이 없다고 오지 않는 것 또한 우리들의 도피이기에 낯없는 낯으로 여기 부모님 앞에 왔다. 비록 메마른 위로의 소리로 들리실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드리는 위로의 말씀을 받아 주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위로가 있으시기 바란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도 공권력에 타살되신 것이다. 함부로 휘두르던 공권력이 죄 없는 우리 주님을 십자가 형틀에 못을 박아 매달았다. 공권력은 망치로 대못을 예수님의 손과 발에 내리박았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절명케 했다.
경대의 죽음은 마치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죽음의 모양과 비슷하다. 예수님을 못 박은 망치는 오늘 쇠파이프가 되어 경대를 친 것이다. 옆구리를 찌른 창은 오늘 쇠파이프가 되어 경대의 가슴을 친 것이다. 이게 어인 일인가? 예수님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나? 예수께서 죄가 있어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다. 죄 없는 사람의 죽음이기에 그 죽음은 백성을 구하는 죽음이요 그의 고난은 온 인류를 살리는 고난이라고 성서는 적고 있다.
오늘 경대에게 이렇게 죽임을 당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경대가 이런 죽임을 당해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습으로 죽어 있다. 참으로 억울하다. 이 억울함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서의 증언 정신에 따르면, 그러기에 경대의 죽음은 이 백성을 공권력으로부터 구해내는 죽음이 될 것이다. 폭력의 악신들을 몰아내는 죽음이 될 것이다. 기어코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죽음이 될 것이다. 기어코 민주를 가져오는 죽음이 될 것이다. 기어코 통일을 가져오는 죽음이 될 것이다.
죽음이란 본래 외로운 것이다. 우리 주님은 외롭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시어 오늘 온 인류의 가슴과 삶 속에 살아 계시다. 경대도 홀로 외롭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경대는 어느새 수천수만으로 부활되고 있다.
나는 어제 오후 무거운 걸음으로 거리에 나섰다. 학생들이 걱정되어 그리고 격려하기 위해 거리에 나갔다. 종로에서도 을지로에서도 퇴계로에서도 수천 명씩 떼를 이룬 젊은 시위 학생들을 만났다. 당당하게 노래를 부르며 시청을 향하고 있었다. 다가가 그들을 격려했다.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기 쇠파이프가 있는데, 직격탄이 있는데, 그래도 너희는 또 나서는구나!
그래, 경대는 어느새 부활하였다. 그래서 악한 공권력과 당당히 싸우는구나! 이 나라는 희망이 있다. 너희가 있어 희망이 있다.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저들을 보호해 주소서. 저들의 저 맑은 투쟁으로 이 나라를 건져 주소서. 더 이상 경대의 비극이 없게 도와주소서. 더 이상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몸부림 치는 부모가 있지 않게 하소서.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이 같은 고통과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서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에 귀를 모으자.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영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갑시다”(히 13:12).
경대는 죽음의 수치를 걸머지고 먼저 고난받으신 주님에게로 나아간 것이다. 주님은 그의 고난과 죽음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도 주님이 당하신, 경대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영문 밖에 계신 주님에게로 나아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