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8일 토요일

[범용기 제2권] (46) 忙中閑(망중한) - 통영 앞바다 섬에서 하루

통영 앞바다 섬에서 하루

여름이었다. 한얼학교도 하기방학 동안이었다. 조향록, 주태익은 통영 앞바다 다도해를 누벼 거제도, 지신도[1]의 명승을 탐방할 계획으로 나를 동반했다.

속셈으로는 주태익의 실연(?) 고민을 발산시키기 위한 행각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이승만 박사는 3선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으며 부통령 선정에 갈팡질팡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는 고려신학교 측과 그보다도 더 보수파라는 송상석[2] 목사 등이 W.C.C.를 용공단체로 몰고 W.C.C.에 동조하는 나와 한국신학과를 ‘용공’으로 규정하는 팜플렛을 써 냈었고 그것을 증빙서류로 하여 교회 교란, 국가반역 등 죄목으로 처단해 달라는 청원서를 어떤 국회의원을 통하여 국회에 제출한 일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위로하려는 호의도 겸한 것이었다고 짐작된다.

우리는 지신도[3]인가 하는 아름다운 섬 백사장에서 여름빛을 몸으로 먹으며 즐겼다. 파출소가 있었다. 그 문 앞에는 간판이 서 있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범석”이라 쓰여 있었다. 돌아올 때에는 이름이 바뀌었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함태영”으로 됐다.

도민들은 이범석[4]이 누군지, 함태영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투표하는 거요?”

“투표가 무슨 투표예요! 파출소에서 다해 주는데!”

“누가 무어되든, 우리게 무슨 상관입니꺼!”

우리가 거제도를 거쳐 부산에 돌아왔을 때 함태영은 ‘부통령’이었다.

이조말, 독립협회 사건으로 이승만 이상재[5] 등등이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함태영은 평리원[6] 판사였다.

그는 민 씨 가문의 거의 절대적인 압력을 무시하고 아주 가벼운 형벌을 선고한 후 곧 석방했다.

이 박사는 그 은공을 갚는다는 의도에서 ‘함’ 옹을 등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함태영 부통령은 정치적 실권자가 아니었다.

이 박사 ‘독재’의 ‘장식품’이랄까.

그래도 그에게는 품위가 있었다.

강성갑의 한얼학교에도 자주 찾아와서 격려했다. 아무 통고없이 나타난다.

지방경찰에서는 허둥지둥 달려와 경호의 책임을 진다. 지방순경과 부통령! 그것은 하늘과 땅의 사이었달까 그들은 아찔하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부통령의 소탈한 방문 때문에 ‘피난부대 교사진’의 위치도 드높아진다. 그래서 지방경찰이나 관청이나 시민들이 감히 ‘토백이’ 텃세를 부리지 못하게도 했다.



[각주]
1. 지심도 – 경상남도 일운명 지세포리에서 동쪽으로 1.5킬로미터 해상에 위치한 지심도는 면적이 0.338㎢, 해안선 길이는 3.5㎞의 작은 섬으로 장승포항에서 도선으로 약 15분 거리에 있다.
2. 송상석(1896~1980) - 193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34년 졸업하였다(제29회). 고신측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기여와 역할을 했던 인물로 한상동 목사와 쌍벽을 이루었다. 이후 한상동 목사와의 교권대립이 극에 달하였고, 1974년에 교단에서 면직되었다(34년만인 2008년에 사면되었다).
3. ‘지심도’를 가리킴
4. 이범석(李範奭, 1900~1972) -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교관, 고려혁명군 기병대장, 광복군 참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1910년 사립 장훈학교에 들어갔으며, 1913년 이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서 경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1916년 항저우체육학교에서 6개월간 수학하였으며, 원난강무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교관, 1920년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대첩에서 제2제대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1923년에는 김규식 등과 고려혁명군을 창설하여 기병대장을 맡았다. 1925년 소련혁명전에 참가하였으며 중국군에서도 활약하였다. 1940년 광복군 제2지대장으로 미국군과 함동작전에 참가하였고, 1945년에는 광복군의 참모장(중장)이 되었다. 1945년 8월 18일에는 광복군 정진대의 일원으로 장준하, 노능서 등과 함께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으나 일본군의 입국 거부로 다음날 중국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으며, 1946년 6월 정식으로 환국하였다. 1946년 10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였으나 주위로부터 국수주의적 극우단체라는 비난을 받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1948년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하였고, 1950년에는 주중국대사, 내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51년 12월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했으며 1952년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53년 이승만의 족청계 숙청으로 자유당에서 제명되었다. 1956년에는 무소속으로 부통령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 자유연맹을 바탕으로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63년에는 ‘국민의 당’ 결성에 참여하여 최고의원이 되었고, 1967년 1월에는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과 함께 4자회담을 성사시켜 통합야당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하였다. 1972년 5월 11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5. 이상재(李商在, 1851~1927) - 일제강점기 YMCA 전국연합회 회장, 신간회 창립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가, 민권운동가, 청년운동가. 1867년 과거에 낙방한 후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하였으나 박정양의 집에서 개인 비서일을 보았다.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 일본의 신흥문물을 접하고 돌아와 개화운동에 눈을 떴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가, 다시 박정양의 추천으로 관직에 등용되었고, 독립협회의 활동에 동참하였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된 이후 유신회의 공격으로 사멸직전인 청년회를 사수하였으며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를 조직하여 한국YMCA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6. 평리원(平理院) - 1899년 5월부터 1907년 12월까지 존치되었던 최고법원.

[범용기 제2권] (45) 忙中閑(망중한) - 진영의 강성갑 목사와 피란 교사들

진영의 강성갑 목사와 피란 교사들

신영희와 정자는 진영읍으로 갔다.

거기서 보건진료소를 차리고 시민들의 건강을 보살피고 상담한다. 전쟁 중에도 ‘후방요원’으로 인정된다. 한얼학교[1]에 몰려간 조향록, 이상철 등이 주선했다.

진영읍에는 강성갑[2]이란 이름의 비범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연세대 졸업생으로서 교육의 혁명적인 갱신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고 헌신했다.

“교육기관은 자주, 자립, 자치의 공동체라야 한다.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떤 부자의 기업체나 독재자의 ‘사동’(使童)[3]이 아니다.”

“교육은 바르고 깨끗하고 용감한 ‘혼’의 형성과 보육을 그 사명으로 한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정신을 학교의 정신으로 선양했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흙을 사랑하자’라는 삼애정신을 교훈으로 삼았다.

교육은 민주, 민권, 민족의 3각형적인 상호관계 안에서, 훈련과 실천과 성숙을 통하여, 그 주어진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따라서 교육기관은 성격 도야(陶冶)[4], 인간 건축(사람만들기)의 ‘대장간’이고 교사들은 ‘대장장이’다 등.

학교 이름을 ‘한얼’이라 불렀다.

‘얼’은 ‘혼’을 의미한 것이고 ‘한’은 ‘크다’는 뜻도 있고, ‘한국’이란 뜻도 있고, ‘하나’란 의미도 있다.

그는 진영읍 복판을 가로지은 철길 옆에 학교 터를 마련하고 거기에 천막을 쳤다. 혼자 천막을 지내며 ‘니하까’로 진흙을 실어다가 흙벽돌을 만든다.

짚을 썰어 섞었기 때문에 마르면 꽤 단단하다. 그것으로 교실을 짓는다. 한 교실에 한반씩 수용할 작은 교실들이다. 6ㆍ25 때까지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인가된 의젓한 ‘학원’이 됐다.

강성갑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 장학생으로 유학할 길이 열려 여권까지 받았으나 불우한 농촌 청소년들은 내버리고 갈 수 없다고 느껴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학교 건설에 전념했다. 그는 6ㆍ25 동란 중 지방 관리들과 경찰서 직원들의 모함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모병왔던 현역 장교에 의해 낙동강가에서 재판도 없이 총살당했다. 그때 상철이가 피난하여 거기 있었단다. 강성갑의 동지 최 씨가 함께 총살당했는데 그는 수영의 명수여서 총을 맞고 물속을 거슬러 탈출 생존했다.[5] 그가 후에 법원에 사건을 고발해서 모함자들이 재판받고 사형, 무기 등 언도 받았다. 그후 한얼학교 이사회가 상철에게 학교 재건을 호소해왔다.

그런 인연으로 서울서 온 ‘피난부대’가 한얼에 집결됐다.

주태익[6], 김영규, 이상철[7], 김두식 등등이 진영읍 한얼학교에 모였다.



[각주]
1. 강성갑 목사가 1946년 복음중등공민학교를 설립ㆍ운영하면서자신의 교육이념을 정립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한얼중학교’라는 정식학교를 설립했다(1948년). 학교 명칭은 ‘한얼’로 정하고, 교육이념은 덴마크 그룬트비의 교육이념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흙을 사랑하자’는 삼애정신으로 삼았다.
2. 강성갑(姜成甲, 1912~1950) - 1930년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서울연희전문학교를 수학하였다. 1943년 일본 동지사대할 신학과를 졸업하여 귀국 후 목사가 되었다. 부산대학교를 설립, 교수로 지내다가 농촌사회 개혁을 위해서 진영읍으로 옮겨서 1948년 한얼중학교(김해 최초의 중학교)를 설립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진영 지서장이 한얼중학교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소집하려고 하였을 때 학도병 대상이 고등학생이라며 거부하였다. 이에 진영 지서장이 낙동강 수산교 아래에서 그를 사살하였다.
3. 사동(使童) - 관청이나 회사, 학교, 영업처 등의 사무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
4. 도야(陶冶) -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몸과 마음을 다스려서 바르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도기를 만드는 일과 쇠를 주조하는 일
5. 당시 한얼중학교 이사장이었던 최갑시는 이때 간신히 목숨을 구해 당시 강성갑의 마지막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이 겨레를 가난과 재앙에서 건져주소서 한얼을 축복해 주소서. 이 죄인 주의 뜻을 받들어 당신의 품에 육신과 혼을 맡깁니다.”
6. 주태익(朱泰益, 1918~1976) - 평남 대동 출신. 1940년 평양신학교 예과를 수료한 뒤, 1942년 백합보육원을 경영하였다. 1947년 『흥국시보』를 비롯하여 기독교잡지의 편집을 맡아보다가 1948년부터 희곡과 방송극 집필을 시작하였다. 1964년 방송작가협회 부회장, 1968년 크리스천문학가협회 회장, 1971년에는 방송윤리위원을 지냈다.
7. 이상철(1924~2017) - 목사. 동양계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캐나다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 회장을 역임. 192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 7살 때 부모를 따라 만주 용정으로 이주했다. 이후 캐나다 연합교회가 세운 은진중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시인 윤동주, 크리스찬아카데미 강원룡 목사,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 오리 전택부 선생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때 장인이 된 김재준 목사와 사제의 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1947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61년 캐나다 밴쿠버 유니언신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캐나다로 이주했다. 1969년부터 1988년까지 캐나다 토론토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캐나다연합교회 토론토연회에서 인권과 정의 구현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던 이상철 목사는 1985년 연회장에 당선됐다. 1988년에는 임기가 2년인 캐나다연합교회 회장에 당선됐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이상철 목사가 재임하던 기간에 다양한 사회 이슈와 맞닥뜨렸다고 전했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이상철 목사가 재임하던 1988년 동성애자 목사 안수를 허용했다. 당시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이 목사는 교단 소속 교인들에게 "함께 살고, 함께 투쟁하고, 함께 성장하자"며 설득했다. 캐나다 이민 1세대였던 이상철 목사는 한국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도 싸웠다. 한국 인권 상황과 북한 공산주의 인권 탄압을 비판했다. 남한 군부독재 시대에는 캐나다에서 조국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독재자들의 탄압을 피해 캐나다로 망명한 이들의 그늘이 됐다. 한국 정부는 그의 업적을 인정해 2007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범용기 제2권] (44) 부산 피란 3년 - “한국신학대학”으로

“한국신학대학”으로

미군정 때에 이미 대학령에 의한 인가를 받았고 학사, 석사 칭호도 수여할 수 있었지만 이름만은 ‘조선신학교’로 불렀다.

다른 신학교들과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승만 박사의 피난정부도 부산에 있다.

백낙준 박사가 문교부장관이고 박창해[1] 씨가 비서실장이었기에 접촉하기가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학교 명칭 변경서를 냈다. 며칠도 안 가서 허락됐다. 이제부터는 ‘한국신학대학’이라 부른다.

학칙에 따라서 학장을 선출해야 한다. 선출된 학장도 문교부 인허를 맡아야 한다. 문교부에서는 나에게 ‘학장서리’를 부탁한다. 지금까지의 직위가 ‘교장’이었으니 당연한 처사라 하겠다.

그 당시 함태영 목사님은 심계원[2]장 재직 중이었다. ‘심계원장’은 일체 다른 공직을 맡지 못하는 것이 ‘법’으로 규정돼 있었다. 그것이 민주주의 나라들의 통용 원칙이다.

그러나 함태영 옹은 자기가 이미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 취임한 것 같이 생각되었는지 백낙준 박사에게 취임 인사까지 했다고 들었다. 백낙준 문교장관은 난처해졌다. 그래서 ‘궁여지책’[3]으로 지혜를 짜낸 것이 ‘명예학장’ 체제였다. 그것은 내게만 알린 비밀이었고 함태영 옹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함태영 옹은 내게 말했다. “속히 날짜를 정해서 학장 취임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도록 하시오.”

“그리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명사’란 이들이 모두 부산에 몰려와 있기 때문에 초청장을 수백 장 발송했다.

문교부에만은 알리지 않았다.

정대위 목사가 8군에서 얻어온 나무궤짝들은 못을 뽑아 널조각으로 변형시켰다. 베여버린 통나무 토막들도 ‘미군’에서 얻어왔다. 그것으로 마루바닥 ‘푸레임’[4]을 짰다. 그 위에 널빤지 붙일 못은 원래 궤짝에 박혔던 것으로 넉넉했다. 학생, 직원, 교수 총동원으로 하루 사이에 미끈한 마루가 깔렸다. 강단도 넓직하게[5] 짰다.

학장 취임식은 미상불[6] ‘성대’했다.

이사회로서는 ‘함’ 옹이 심계원장을 사퇴하기 전에는 ‘학장’ 실무를 맡을 수 없을 테니 노인의 ‘명예’를 구태여 긁어내리는 것보다는 노인의 소원대로 해 드리고 하회[7]를 기다려보자는데 합의했단다.

‘북진통일’을 염원하는 이승만 박사는 ‘휴전’에 반대였다. 그러나 미국이 하는 일이니 이 박사의 권한 밖의 일이었다.

1951년 6월부터 포로교환 협정이 토의되고 있었다. 포로수용소가 거제도에 있다. 담당 군목은 한신졸업생 강신정[8] 목사였다. 그때 나는 거제도에 자주 드나들었다. 강신정 군목의 증언을 들었다.

“미군은 인민군 포로의 사상적 성분을 묻지 않았다. 통틀어 적군 포로로 인정하고 수용소에 넣는다. 민주 포로와 공산 포로를 한 반에 같이 수용한다.

공산 포로는 악착같이 원수 노릇을 계속한다. 민주 포로가 변소에 앉았을 때 돌멩이로 머리를 까서 죽인다. 시체는 변소통에 밀어 넣는다. 자는 동안에 목을 눌러 죽인다. ‘민주인민군’은 그렇게 잔인하지 못한다. 몇 천 명의 공산 포로가 공동작전으로 그 짓을 하니 민주 포로는 다 죽고 말 것 같았다. 미군 책임자는 ‘너희 동족끼리 그러는 걸 우리가 상관할 것 무어냐?’ 한다. ‘다 같은 인민군이 아니었더냐?’ 한다.

‘살려면 집단탈출’을 해야 한다. 그래서 돌격대를 편성했다. 새벽녘에 문을 박차고 ‘와아’ 고함치며 밀고 나간다. 미군 감시원의 총에 몇 사람 희생됐으나 대체로는 성공적이었다….”

이것이 이 박사의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할 계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박사는 포로교환협정을 무시하고 ‘반공 포로’ 2만 7천명을 자의로 석방해 버렸다.

나는 USIS 도서실에서 그 후의 각국 여론들을 주워 읽었다. 영국에서는 “그 Old Devil이 누구를 믿고 그런 방자한 짓을 했느냐”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미국 여론은 일정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역사상 드물게 보는 big guts[9]다”, “장개석은 그에게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8군 장성들도 이 박사 앞에서는 쩔쩔맨다.” 등등으로 추켜올리는 기사도 실려 있었다.

미군 군목이 자주 우리 신학교에 찾아온다. 하루는 누구던가가 그에게 “원자탄 한두 개면 알아볼텐데 그건 뒀다 뭘하려는 거요!” 하고 대들었다.

미 군목은 대답했다.

“참으로 용감하십니다. 지금 성능의 원자탄 한 개면 한반도는 없어집니다. 남이고 북이고, 인민군이고 국군이고 없습니다. 온전한 무인광야(無人曠野)가 됩니다. 그래도 원자탄을 써 달라니 참으로 ‘용감’합니다….”



[각주]
1. 박창해(1916~2010) - ‘철수와 바둑이’가 등장하는 초창기 국어교과서를 집필한 원로 국어학자. 1916년 만주 지린성 룽징(龍井)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문과에 입학해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서 국어학을 배웠다. 45년 광복 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사로 근무하며 서구의 언어학 이론을 도입, '철수와 영희, 바둑이'가 나오는 대한민국의 첫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를 집필했다. 1952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76년 미국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88년 귀국하였다. 정대위 한신대 학장과 소학교 동기이다.
2. 심계원(審計院) - 국가의 결산을 검토하던 헌법기관. 감사원(監査院)의 전신이다. 1962년 제5차 개헌 때 폐지되었다.
3. 궁여지책(窮餘之策) - 매우 궁한 나머지 내는 꾀
4. 프레임(frame) - 자동차나 자전거, 건조물 등의 뼈대
5. 넓찍하다 - ‘널찍하다’(꽤 넓다)의 비표준어
6. 미상불(未嘗不) -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게
7. 하회(下回) - 다음 차례, 어떤 일이 있고 난 후에 벌어지는 일의 형태나 결과
8. 강신정 – 1945년 조선신학교 제5회 졸업. 1980년 제65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53년 아버지(강병주 목사)와 형(강신명 목사)을 두고 한국기독교장로회 편에 섰다.
9. guts : 용기 기력, 배짱, 인내력

[범용기 제2권] (43) 부산 피란 3년 - 교수와 직원의 숙소도

교수와 직원의 숙소도

정대위 목사는 8군에서 작은 천막들을 대여섯 채 얻어왔다. 물론 쓰다 버린 폐품이다. 쇠그물에 세루로이드[1]를 입힌 반투명한 대용유리도 얻어왔다. 그것은 천막 들창용이다. 한 천막에 마룻방 하나와 작은 부엌이 달렸다. 소꼽작난 같지만 우리에게는 대궐보다 더 요긴했다. 바로 가까운 동네에 구회영 장로가 살고 있어서 학생들에게 때때로 별식도 제공하고 교수와 직원을 자택에 초대하기도 하고 아주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도 주고 했다. 큰 위로가 됐다.

정대위 목사 어머니는 심한 당뇨병으로 누워 계셨다. 인슈링[2] 주사로 연명한다.

결국 세상 떠나셨다. 장례식은 신학교에서, 그리고 뒷산 봉우리에 안장했다. 비석을 세웠는데 ‘어머니’라고만 쓰여 있었다. 정대위는 시인이기도 했다. 후일에 ‘수성암’이란 부부합작 시집도 나왔다.[3]

국련군의 38선 돌파, 전면 반격의 성공 등 “뉴스”는 피난민의 사기도 고무했다.

일본에 피신했다가 부산에 돌아온 캐나다 선교사 스캍과 프레이저는, 원산, 함흥, 간도 등지에서 피난 온 옛 친구들을 모아놓고 “이제부터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요청할 사항이 무언지 말해 달라”고 했다.

내게 꼬집어 묻길래 나는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 양성”이라고 말하고 캐나다 유학의 길을 넓게 열라고 요청했다. 그때 ‘장학회’라는 위원회가 있었다. 유학생 추천과 신청자의 심사를 선교사들과 함께 협의 결정하는 직책이었고 신애균[4], 정대위도 위원이었다. ‘이우정’이 선정되었고 다음으로 강원룡도 허락되었다. 강원룡은 캐나다 위니펙에 있는 신학교로 가게 됐다. 이우정에게는 신약원어인 ‘그릭’ 전공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우정은 토론토 대학에 적을 두게 됐다. Full Scholarship 이어서 왕복여비, 식비, 학비, 잡비, 서적비 등이 스칼라쉽에 포함되고 방학 동안에도 같은 액수의 장학금이 주어지기 때문에 ‘짭’[5] 얻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공부만 하라는 것이었다. 2년동안이지만 4년의 실력이 붙을만한 ‘우대’였다.

강원룡은 2년 후에 N.Y. 유니온에 옮겼다. 원래 수재인데다가 타고난 말솜씨와 지도력이 그를 돋보이게 했다.



[각주]
1. celluloid : 셀룰로이드
2. ‘인슐린’(insulin) - 동물의 이자에서 분비되어 포도당을 글리코겐으로 바꾸어 주는 호르면. 당뇨병이나 정신병 등의 치료에 쓰인다.
3. 이주선ㆍ정대위, 『수성암』, 삼화출판사, 1973년
4. 기독교 사회운동가로서 한평생을 살다 간 신애균은 함흥 고등여학교 1회 졸업생으로서 모교재건위원회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신애균은 재학시절부터 동급생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치자”고 맹세, 매일 밤 12시 기도회를 갖는 등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 함흥 영생여고보를 졸업한 후, 1915년부터 여전도 운동에 헌신하였으며 함경북도를 중심으로 비밀결사대를 조직, 대한애국부인회의 지하운동을 주도해 3년 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여전도회 회장을 지내고 YWCA에서 활동했으며 자서전 <할머니 이야기>를 남겼다. 민중신학자 현영학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5. Job : 직업

2026년 2월 27일 금요일

[범용기 제2권] (42) 부산 피란 3년 - 피란 한신의 고장(Locus)

피란 한신의 고장(Locus)

전쟁은 언제 끝날지 요량[1]이 안 간다. 나는 피난지서 ‘한신’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김길창 목사 교회당에서 개강했다. 그러나 그 교회에는 교실로 쓸 작은 방들이 없다.

권남선 목사 말에 의하면 남부민동 권 목사 사택 길가 낭떠러지에 까마득한 높이의 석축을 위아래로 쌓아올리고 그 밑에는 공지 약 200평을 평평하게 고른 고장이 있다고 한다. 일인들이 설계한 것인데 지금은 적산이요 임대차 계약도 돼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근처 아낙네들이 인분을 더덕더덕 붓고 채소를 심어먹는 고장이란다. 시청과는 상관도 없는 무허가 경작이다.

우리는 그 고장을 신학교 기지로 쓰기 위해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고 임대료도 선납했다. 허가서가 나왔다. 우리 선생과 학생은 동네에서 삽, 곡괭이, 호미, 가래[2]들을 빌려 인분을 흙으로 덮기 시작했다. 아낙네들은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방해한다. 우리는 아무 대꾸도 안하고 말없이 작업을 계속한다. 아낙네들의 욕지거리가 하두[3] 심하기에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법대로 시청에 땅세 내고 이 땅을 빌렸으니 당신들이 불평이 있거든 시청에 말하시오.”

암만해도 잇발이 들 것 같지 않으니까, 아낙네들은 하나 둘 흩어진다. 그 후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신학교 기지 아래켠 해변 가까이에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이라나하는 김종원[4] 대령이 자기 집을 지었다. 그럴싸한 주택이다. 그에게는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그는 명령쪼로 말한다.

“신학교 사람들이 남의 주택 안뜨락[5]까지 볼 수 있게 됐으니, 학교를 딴 데로 옮기시오.”

“신학교 기지는 법 절차대로 허락된 것이니 이제 옮긴 수는 없소마는, 댁의 안 뜨락은 보이지 않게 널빤지로 북쪽 ‘가생이’[6]를 둘러 막을테니 염려 마시오.”

그럭저럭 막지도 않고 그대로 지냈지만 별소리 없었다. 그의 권세도 ‘추상낙일’(秋霜落日)이라 오래가지 못했다. 거창사건[7] 따위가 이엄이엄[8]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신학교에서는 정대위 목사가 학감[9]이고 박한진 목사가 경리과장으로 일했다.

정대위 목사는 외국어에 천재적 소질을 갖고 있었다. 우리말 이외에 일어, 중국어,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불란서어 등등 아홉 나라 말에 능숙하다고 했다.

그는 미8군 군수품 책임자를 찾아가서 내버린 탄환 Box를 신학교에 무료로 넘겨달라고 했다. 허락됐다. 츄럭으로 남부민동 언덕밑까지 실어온다. 신학교까지는 오솔길 밖에 없기 때문에 학생, 선생이 총동원하여 개미떼가 ‘메뚜기’ 끌어가듯 한다. 정대위는 낡은 군용천막(Tent)도 십여 개 얻어왔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

남부민동 신학교 기지는 제일 큰 천막 하나로 메꿨다. 천막에는 칸막이 천이 붙어 있었다. 여학생 숙소, 남학생 숙소, 교무실, 사감실 등등이 칸막이로 구분된다. 출입구 옆이 교무실이다. 사감은 차보은 선생이었다. 이우정[10], 김영희 등 학부 여학생은 차보은 사감과 기거를 같이 했다.



[각주]
1. 요량(料量) - 되질하여 용량을 헤아린다는 뜻으로, 잘 헤아려 생각함을 이르는 말
2. 가래 – 흙을 파서 갈아엎거나 퍼내는 데 쓰는 기구
3. 하두 – ‘하도’의 방언
4. 김종원(金宗元, 1922~1964) - 일제강점기 군인이자 해방후 대한민국 군인. 1948년 여순사건 발생 당시 진압에 나섰다. 1951년 ‘거창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한 조사를 방해한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후, 경찰로 이직했다. 치안국장 재직 시절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1956년 9월 28일)의 배후로 밝혀져 파면 뒤 구속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당뇨병으로 병보석(1961년) 된 후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5. 뜨락 - 뜰
6. 가생이 - ‘가장자리’의 방언
7.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국군이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비무장 민간인 719명을 학살한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을 말함. 3월 29일 국회에서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었고, 3월 30일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었다. 4월 7일 합동조사단이 신원면으로 오던 중, 김종원 대령이 부하들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합동조사단의 접근을 방해하였다. 이로 인해서 김종원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뒤 경찰로 이직했다.
8. 이엄이엄 –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가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9. 학감(學監) - 이전에, 학교에서 교육에 관한 사무와 학생들에 대한 감독을 맡아 하는 직책이나 그 직책의 사람을 이르던 말
10. 이우정(李愚貞, 1923~2002) - 조선 16대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후손. 1940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조선신학원에 입학하였다. 1951년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로 유학하여 토론토 대학교 내 임마누엘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53년 귀국고 동시에 한신대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여성운동가, 기독교 페미니스트, 인권운동가로 활약하였다. 1970년 한신대 학원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가 해직되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통일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3ㆍ1 민주구국선언문’을 직접 낭독하기도 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제14대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장공김재준목사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2002년)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범용기 제2권] (41) 부산 피란 3년 - 남부민동에

남부민동에

동대신동 집주인이 방을 비워달란다.

청산학원 일 년 선배인 권남선 목사가, 나와 우리 식구를 남부민동 자기 교회당 목사 사택에 옮겨준다. ‘마루’지만, 이부자리 덕분에 떨지는 않는다. 우리 식구뿐이니까 조용하고 안정된 분위기다.

음료수가 문제다. 원래가 높은 산 중턱에 억지로 매달린 동네라서 ‘수도’관은 한두 군데 밖에 박혀 있지 않다. 피난민으로서 수돗물 먹기란 하늘에 별따기다. 공동우물이 하나 있다. 수질은 맑고 차서 좋다. 그러나 물동이 행렬이 장사진을 쳤으니 우물물이 물동이에 담길 때까지는 한나절 걸린다.

뒷산 꼭대기에 약수터가 있다. 신자와 아내는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올라 물통이나 동이에 약수를 퍼 넣는다. 그 작업은 쉽기도 하고 시간도 덜 걸린다. 그러나 넘치는 물동이를 정수리에 이고 가파른 오솔길을 더듬어 내려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공동우물에 나가 ‘토백이’[1] 부인들로부터 욕먹는 것보다는 맘 편하다고 한다.



[각주]
1. 토백이 - ‘토박이’(대대로 그 땅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사람)의 방언

[범용기 제2권] (40) 부산 피란 3년 - 프린스톤 학생들의 모금

프린스톤 학생들의 모금

1ㆍ4 후퇴 때 미국 선교사들이 부산과 대구에 모여 왔다. 선교사회가 조직되었다. ‘아담스’가 총무, ‘킹슬러’[1]가 회계였던 것 같다. 본부는 대구에 있다.

킹슬러가 부산에 와서 나를 보자고 했다. 만났다. 킹슬러는, 프린스톤 신학교 학생회에서, 한국의 신학생들에게 보내는 구호금이라면서 금일봉을 내게 수교한다. 아무 꼬리표도 붙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이 ‘한신’ 개강을 희망적으로 추진시킨 동력의 하나가 됐다. 학생들의 숙식을 마련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킹슬러는 엉큼하게 자기 나름대로의 조건을 붙여보려고 한다.

“김 목사도 이제부터는 한국 교회의 화평을 위해서 우리와 의좋게 합해봅시다….”

“당신은 프린스톤 신학생들의 뜻을 따라 ‘무조건’으로 그 금액을 우리 신학생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사명을 완수한 것이 아니겠소! 다음 얘기는 한국 교회 전체에 얼키고 설킨 복잡한 문제니 두고두고 풀어봅시다….”

킹슬러는 내가 프린스톤 있을 때 졸업반 학생이었고 한국 선교사 후보였기 때문에 내게는 무던히 친절했던 사람이다.

그의 신학은 Ulter-Fundamentalism이었다.



[각주]
1. 킨슬러(Francis Kinsler, 1904~1992 권세열) - 1928년 프린스턴 신학교 졸업하고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선교부 소속으로 숭실전문학교에서 강의.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가 1948년 재내한하여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신약 신학을 강의하고 1952년 장로회신학교 교장 대리직 수행. 한국전쟁 당시 군목제도 창설과 운영에 공헌함.

[범용기 제2권] (46) 忙中閑(망중한) - 통영 앞바다 섬에서 하루

통영 앞바다 섬에서 하루 여름이었다. 한얼학교도 하기방학 동안이었다. 조향록, 주태익은 통영 앞바다 다도해를 누벼 거제도, 지신도 [1] 의 명승을 탐방할 계획으로 나를 동반했다. 속셈으로는 주태익의 실연(?) 고민을 발산시키기 위한 행각이었던 것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