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1982년 1월 10일 / 요한1서 3장 19-24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지난 주일 새해를 시작하는 첫 예배를 드렸고 그 예배의 증언을 통하여 아무리 어둡고 캄캄한 밤이라도 그것이 영원한 밤이 아니라 태양이 떠 있는 밤임을 믿는 믿음으로 새해를 시작하자고 했다. ‘태양이 떠 있는 밤’이라 함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신을 갖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을 가지고 시작하자고 했는데 이 ‘믿음’이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있게 되는 것인가?
첫째로, 믿음이 있다고 하는 인식 가운데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인식이 있다.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인가라고 의심하면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나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믿음에 대한 인식이 이처럼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경우에는 자칫 믿음을 ‘믿는 마음’이라든가 ‘막연하게 믿는 것처럼 느끼고 있는 상태’, 혹은 ‘나는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선언하고 그 선언을 또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며칠 전 어떤 신앙수련회에서 강연을 마치고 내려 왔는데 한 젊은이가 찾아와 나의 강연이 못마땅하다는 말을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목사가 강연을 할 때는 성서 말씀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인데 성서를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믿음이 있어야지 무슨 한국 역사니 선교에 참여한다느니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성서를 믿는 것이며 또 하나님을 믿는 것, 예수를 믿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 성서를 믿는 것이란 무엇이며 하나님을 믿는 것, 예수를 믿는 것이란 무엇이냐 했더니 구원받은 것을 믿는 것이라 했다. 요컨대 여기서도 ‘믿는다’는 것이 퍽 막연하다.
두 번째로, 믿음이 있다고 하는 인식은 신비스러운 그 무엇이라는 인식이다. 믿음이 있다 하면, 어쨌든 이상한 경험을 하고 하나님이 언제나 나만 지켜 주시고 나만 축복해 주신다는 신비주의적 경험을 갖는 것을 ‘믿음 가운데 있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이 선언에 대한 믿음 - ‘과연 그렇다’고 하는 확신은 그저 믿는다고 하여 되는 것도 아니며 신비한 경지의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무분별한 축복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비록 밤이라 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아무에게나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렇게나 사는 자에게 ‘고난과 고통이 온다 해도 너희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고 하나님의 보장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확신, 이 믿음이란 어떻게 생길 수 있는 것일까? 19절에서 “우리는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라 했는데 어떻게 진리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가? 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떳떳하다” 했는데 어떻게 떳떳해질 수 있는가? 여기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납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확신 가운데 살 수 있는 상태가 진리에 속해 있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것이다. 진리에 속하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상태를 우리는 ‘믿음 가운데 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때 진리에 속해 있는가를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되는가? “우리가 진실하게 사랑함으로”이다. 19절 첫머리의 말씀이다.
“그의 계명은 이것입니다.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23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 두 개의 계명을 말하면서 “그의 계명은”이라고 하여 “계명”이란 단수를 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믿음”, 곧 “신앙”과 “사랑”은 나누어져 있을 수 없는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믿음’이 없고 ‘믿지 않는 사랑’도 있을 수 없다. 믿는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반드시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앙과 사랑의 삶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그 사람 안에 계신다”(24절)고 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참 사랑이 가능하게 되고 이와 같은 상황에 있게 되는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확신 가운데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용기를 가지고 살자는 말이 빈말, 공허한 말, 그저 해보는 말 정도로 들려지고 또는 삶을 떠난 신비스런 말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한 증거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 같은 오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냐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가 됩니다. 내가 예언의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모든 신비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리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 내가 비록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 주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내 몸을 내주어 불사르게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새번역).
‘사랑’은 행동이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도 행동이다. 믿음이란 공허한 것이거나 공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저 마음으로 믿는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아니다. 신비스러운 것도 아니다. 적어도 요한의 신학에서는 ‘믿음이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구체적이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관념적으로만 마음으로 아파하고 기뻐할 수만은 없다. ‘사랑’은 구체적 표현이 있어야 한다. 표현이 없는 사랑이란 없다. 서로 관심하며 전화 한 번 걸어 주는 것, 찾아가 만나는 것으로부터 사랑은 출발한다. 나도 이런 일을 잘하지 못한다. 우리 교인들도 그렇다. 우리 교인들로부터 내가 배운 것인지 나한테서 우리 교인이 배운 것인지, 하여튼 원인이 어디에 있거나 올해는 이런 태도를 모두 버리고 전화 한 번이라도 거는 행동을 해보자.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범위가 좁게는 우리 교인들 혹은 일가친척, 가정일 수 있을 것이고 넓게는 이 사회의 모든 계층간의 사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 전화라도 걸게 되는 이 사랑의 심정은 더 발전하여 우리 주변에서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자에게로 나아가게 된다. 가난한 자가 부한 자를, 부한 자가 가난한 자를, 못 배운 자가 배운 자를, 배운 자가 못 배운 자를 사랑하는 계층간의 사랑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오늘 인근 지역사회 조사서를 한 가정에 한 부씩 나누어 드렸다. 이것을 꼭 읽자. 이것 역시 사랑의 눈을 트자고 나누어 드린 것이다. 이것으로 인근 지역을 보고 나아가 이 세상, 우리가 사랑하며 살아야 할 이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는 누군가? 밤 같은 무서운 상황, 고통스러운 현실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확신이 생겨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자는 누군가? 밤이지만 태양이 있음을, 지금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을 수 있는 자는 누군가? 사랑하는 자이다. 요한1서 3장 19절을 다시 보자.
“우리가 진실하게 사랑함으로 우리는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한 ……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떳떳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새번역).
물론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이 곧 내가 의로워진다거나 무죄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그 형제 사랑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19절 중간에 “비록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한다 하더라도”라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 우리 스스로를 책하게 되는 경우라도 형제 사랑만 하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는 말이 아니다. “책한다 하더라도”는 가상이 아니라 사람의 현실이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 완전할 수 없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거나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그것이 바로 내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 믿음 가운데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사랑해야 하겠다 한다면 또 사랑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증거요 진리에 속한 증거요 믿음이 있다는 증거요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의 첫 출발로 가보자. 요한1서의 수신인들도 탈진해 있었다. 세상이 두려워 움츠러들고 이기적이 되어 버렸다. 소위 소시민이 되어 나만이라도 안전하게 지내자고 한다. 해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다고 패배주의, 냉소주의에 떨어진다. 우리들도 지금 탈진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두렵고 무서운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런 때일수록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르겠다. 소시민적인 생리가 발동하여 그저 세 끼 밥 먹고 우리 식구 편안히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형편인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잘해 보겠다고 몸부림쳐 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으니 그저 대세에 따라 사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정치권력에 대한 두려움, 가난에 떨어질까 하는 두려움, 안일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내가 풍비박산이 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 이 두려움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는 것이 요한1서의 교훈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서로 사랑하자. 작은 사랑도 큰 사랑도 - 어쨌든 사랑하자. 하나님께서 어려운 앞날을 도와 주실 것이다.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하여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태양이 있다. 서로 사랑하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다. 저 태양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회상 노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 때, 개선될 가능성이 예견되지 않는 때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1982년 새해 첫 설교를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아직도 여전히 캄캄한 밤인데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교인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텐데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공허한 축복소리만을 전할 수는 없다. 예수를 잘 믿으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힘 안 드는 공수표를 남발하는 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
믿음이다! 믿음을 말하려 했던 것 같다. 믿음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교하고자 했다.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 것처럼 믿음은 구체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자 했다.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고자 하고 사랑한다면 믿음 가운데 있는 것이리라.
당신들은 고달파졌지만 행동해 왔고 또 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성령의 특별한 도우심이다. 우리의 성정(性情)으로 어떻게 소외자를 사랑하고 정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일반화된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어떻게 거슬러 갈 수 있겠는가?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라고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과연 그것이 힘이 될 수 있었겠는가? 적어도 나는 그 힘으로 살았다. 그 힘으로 버텼다.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존재의 근거였다. 그것을 떠나 내가 존재할 수 없었다. 사랑이다! 실천이다! 행동이다! 그랬길래 잡혀 다니면서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열어 제낀 문, 그 문은 닫을 수 없는 문이다. 닫아서는 안 된다. 이 해도 가던 길을 가자. 수도교회 교인들도 나와 같은 믿음에 서기를 기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