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1일 토요일

[범용기 제1권] (77) 간도 3년 - 간도로

간도로

그때 아내는 만삭이었다.

하기 휴가도 끝날 무렵 하루는 숭전 교장으로 혼자 남아 있는 『마우리』[1] 선교사가 몸소 내 집에 찾아왔다. 『마우리』 박사는 한국 선교사 중에서 단 한 사람 웨스턴 출신 내 동창이었다. 그래서 좀 다른 데가 있었다. 선교사들이 다 귀국했는데도 혼자 끝까지 남아 있었다. 『숭전』이 그대로 있는 동안 자기는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취직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는다.

웬 영문이냐구 따졌더니 북간도 용정 은진중학교 교장에게서 교목 겸 성경교사 한 사람 취천해 달라는 편지가 왔다는 것이었다. 너를 취천[2]해도 좋으냐 한다. 『좋다』고 대답했더니 그럼 당장 떠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비는 자담이란다. 산정째교회에서 작별 정표라고 얼마 보내왔다. 부산 있는 『만우』 형에게 통지하고 약속한 날짜에 서울서 만나기로 했다. 경흥 『창꼴집』까지 갈 차표는 샀다. 서울서 여관에 들 돈은 없다. 그래서 남대문교회 김영주 목사에게 하룻밤 유숙을 청해 두었다. 그는 고향 친구로서 그가 스쿨톤 선교사 서기로 있을 때 순회강연도 같이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목사는 정거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여관갈 돈도 없고해서 덮어놓고 정거장 뒤 『합동』에 있는 그의 사택으로 갔다. 식모가 나와 코딱지만한 행랑방을 보이면서 여기서 여섯 식구 자라는 것이었다. 호떡 몇 개 사다가 아이들을 먹이고 끼어 앉아 밤을 새웠다. 김 목사는 그때 부흥회에 들떠 안채에서 통성기도로 철야하는 중이라 했다. 『은혜 위에 은혜를, 은혜 위에 은혜를』 이것이 밤새도록 반복하는 단 한마디 『쎄리프』였다.

김 목사는 종시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부인도 나오지 않는다. 『부흥도상인사절』(復興途上人事絶)이랄까. 아무튼 철저한 신령파가 된 것 같았다. 우리가 온 것을 『마귀 유혹』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밤 깊어서 식모가 밥을 한 상 차려내왔다. 우리는 이튿날 새벽같이 나왔다.



[각주]
1. 모우리(Mowry, Eil M. 1880~1971) -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교육가.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오하이오주 출생으로 우스터(1906), 웨스턴신학교(1909)를 졸업하였고, 부인(Lois Thomas)과 함께 한국 선교사로 1909년 10월 2일에 내한하였다. 평양을 중심으로 교육ㆍ전도사업에 헌신하게 되었는데, 숭실학교 교사와 평양의 숭인ㆍ숭덕 등 지방 14개 소학교 교장직을 역임하였고 26개 교회를 시찰하였다.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족 정신에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에는 만세시위를 주동하던 숭실학교의 제자들을 도와준 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당시 교사인 김영신(金永信), 숭실학교 학생 김태술(金泰述)ㆍ박기복(朴基福)ㆍ이인선(李仁善) 등이 모우리 집에 숨어있다가 발각되었는데, 그는 범인장닉죄(犯人藏匿罪)로 평양감옥에 구금되었고 징역 6개월에 구형되었다. 1심에서 징역 6월, 2심에서 1개월, 3심에서 벌금 50원을 물고 석방된 그는 이후 일경의 삼엄한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35년 평양에 있는 기독교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 문제가 일어나면서 매큔(尹山溫) 박사는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의 교장직에서 1936년 1월 모두 물러나게 되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에서는 3월 4일에 모우리 박사를 숭실전문학교 교장으로 그리고 숭실중학교 명예교장으로 하여 사태의 수습을 기하기로 하였다. 모우리 교장은 진통기의 학교를 이끌고 나가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결국 1937년 10월 29일 북장로회 선교회에서는 일대 용단을 내려 폐교하기로 결정을 내려 숭실전문학교ㆍ숭실중학교ㆍ숭의여학교 등 삼숭(三崇)의 폐교계를 제출하게 되어 1938년 3월 19일 폐교됨으로 그의 교장직도 이로써 끝났다. 이후 그는 평양에 계속 머물면서 교회를 돌보았는데 1940년 강제 추방되기 전까지 1주일에 2-3교회를 인도하는 활약을 보였다. 1949년 1월 한국 선교 40년의 생활을 마치고 은퇴하였다. 한국 정부는 그의 봉사와 공로를 기려 1950년(건국공로훈장 문화훈장)과 1968년(국민장)에 훈장을 수여하였다. 1967년 숭실대학 창립 70년을 맞아 잠시 한국에 나왔던 그는 1971년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김재준 목사를 은진중학교에 추천할 당시에는 숭실대학교 제5대 학장(1936.3-1938.3)으로 있을 때였다.
2. 취천 - ‘추천’의 방언

[범용기 제1권] (76) 평양 3년 - 동굴 속에서

동굴 속에서

그때 우리 식구는 여섯이었다. 『숭상』을 그만두는 순간 『절량가족』[1]으로 전락했다. 집 주인인 김은석 씨가 집세 없이 있으라 한다.

까마귀 물어다 주는 빵부스러기로 연명했다는 엘리야의 기적을 또 다시 되새겼다.

나는 아무에게도 구차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데도 편지 낸 일이 없다.

그런데 하루는 미국 피츠버그 옛 친구 『촬스 리 로이』에게서 편지가 왔다. 삼년 전에 내가 평양 있다는 걸 알리고서는 일체 통신이 없었다. 그건 내 쪽에서 회답을 줄곧 떼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와의 친교를 끊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교회에 바칠 십일조 헌금을 내게 보내려고 모아둔 것이라면서 매달 이십 불씩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십 불이면 그땠돈 사십 원이니까 식구 여섯이 입에 풀칠할 만은 했다.

나는 그때 일제(日帝)의 신사참배 강요는 초대교회 때 로마황제 예배 강요와 유(類)를 같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황제예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초대신자들의 모습을 사모했다.

나는 평양신학 도서실에서 『성자열전』(Story of the Saints) 오십여 권을 한 번에 두세 책씩 빌려다 읽었다. 그 중에서 우리와 비슷한 경우에 순교한 분들을 골라 『순교자열전』을 쓰기 시작했다. 원고지 살 돈도 없어서 잘못 쓴 데를 도배질 하면서 날마다 여념없이 써 갔다. 원고지 천매를 넘겼다.



[각주]
1. 절량(絶糧) - 양식이 다 떨어지는 것

[범용기 제1권] (75) 평양 3년 - 모란봉 기슭에 집얻고

모란봉 기슭에 집얻고

둘째 해부터 나는 청류벽 위 향교 옆에 살았다. 새로 지은 기억자(ㄱ) 한옥의 한쪽 날개에 기거했고 다른 한 쪽 날개에는 주인이 살았다. 부엌은 같이 쓰고 아궁이만 둘이다. 주인 이름은 김은석(金銀錫)이었는데 나와 비슷한 연배의 실업인이었다. 내외가 모두 맘성좋은 분이어서 평양 떠날 때까지만 2년을 제집같이 지냈다.

[범용기 제1권] (74) 평양 3년 - 『숭상』 퇴진

『숭상』 퇴진

한경직도 가고 송창근도 가고 나 혼자가 남았다.

『숭상』 김항복 교장은 하루 나더러 교장실에서 조용히 이야기하자고 했다. 나는 벌써 눈치 채고 있었다.

이야기 내용은 뻔한 것이었다.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지 말아달라는 것, 신사참배 때 행동을 같이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변명을 덧붙였다.

『난들 좋아서 이렇겠소? 학교를 해가려니 그러는 게 아니겠소? 싫으나 즐거우나 교직원이 행동을 같이 하잖고서 학교를 어떻게 해나갈 수 있겠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잘 알았소이다. 하고 나와서 곧 사표를 제출했다.

그것이 사월 초 입학시험이 바로 끝난 때였다.

나는 새 학년이 시작하기 전에 물러났다. 믿음으로 모험한 것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당장 그날부터 아이들 죽거리도 없다.

숭인상업학교 교유를 이임하며
숭인상업학교 교유를 이임하며


2026년 2월 20일 금요일

[범용기 제1권] (73) 평양 3년 - 『만우』 평양을 떠나고

『만우』 평양을 떠나고

그렇잖아도 송창근 형은 산정째를 떠나려던 무렵이었다.

산정째 당회는 그에게 너무 중량급(重量級)이었다. 조만식, 김동원, 오윤선 등 모두가 민족의 장로요 민족적 원로였다.

송창근 목사는 『비전』에 타는 젊은 재사였지만 그의 지레(lever)에 움직이기에는 장로님들이 너무 무거웠다.

『만우』는 고민했다. 그는 내게 이런 꿈 이야기를 했다.

예배당 출입문 바로 옆에 억년 묵은 포도넝쿨이 있었다. 팔뚝같이 굵은 줄기가 엉키고 설켜 주변에 뻐쳤다. 늙었지만 마른 것은 아니었다. 살아서 잎도 덮여 있다. 그러나 열매는 없었고 꽃도 피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이 꿈이 뜻있는 씸볼이라고 느꼈다. 이것이 산정째교회의 모습이다』 하고 만우는 시무룩해지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 포도나무를 베어버릴 수도 없고 가꾸어 열매 맺게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떠나기로 했다. …』

송창근 목사는 단연 사표를 냈다. 그리고 교인들의 울고불고 하는 만류를 마다하고 며칠 안으로 떠나버렸다. 그는 부산 빈민촌에서 호주선교부 후원으로 사회사업을 시작할 작정이었다.

[범용기 제1권] (72) 평양 3년 - 평양의 멋

평양의 멋

여름 한때 능라도 백사장은 어느 해수욕장 부럽지 않았다. 알몸으로 뒹굴다가 통닭국이자 찹쌀죽인 『어죽』 먹는 재미, 그 밖에도 삼삼오오 모란봉 송림 속에서 불고기 굽는 맛, 겨울밤 친구 집에서 꿩 냉면으로 중참 먹는 풍미, 평양은 『맛』의 도읍이었다. 어린 딸을 기생학교에 데리고 와 부디 사람 되게 해달라 부탁하는 부모, 이름난 명사들이 부자, 과부 들먹여 지어놓은 『백선행기념 공회당』 평양은 여성의 도시이기도 했다.

시장에 나가면 묵직한 체구의 아낙네들이 제각기 뭔가 물건을 앞에 놓고 판다. 아니꼬운 사내에겐 말집이 거세단다.

『이 쌍! 네래 와 그러누!』 하는 순간 들었던 머리태[1]가 날아온다고 한다. 괜한 소리겠지만 말은 그렇게 들었다. 어쨌든 평양 아낙네는 거센 일꾼이다.



[각주]
1. 머리태 - ‘머리채’의 비표준어

[범용기 제1권] (71) 평양 3년 - 『숭상』 시대 이야기 몇 가지

『숭상』 시대 이야기 몇 가지

『조선쥐』

조만식 선생이 어느 날 『채플』을 인도하시면서 학생들의 민족적 자각과 단결을 재미있는 예화로 일러 주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무기고(武器庫)에 조선 쥐 수천마리가 땅속을 뚫고 들어가 활줄들을 전부 쏠아 끊고 달아난 일이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본군이 당황하는 것을 안 한국군은 급습하여 그들을 전멸시킨 일이 있었다. 쥐도 『조선 쥐』 구실을 했고 쥐도 단결하면 왜군 때려눕히는 『지하대장군』이 된다. 암시가 담긴 말씀이었다.

조만식 장로는 제직회에서도 먼저 말씀하시는 일이 별로 없었다. 다들 이야기한 다음에 대다수의 의결을 듣고서 다수 편에 한 마디 던지면 그대로 되곤 했다.

그분이 『숭상』 이사시고 바로 전 교장이었기에 입학 때면 부탁이 대단했다. 그는 두 수첩에 적는다. 그리고서는 입학생 합격자 발표 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지낸다. 교사나 교장은 그가 부탁받은 학생이 누군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합격자 발표날에 와서 부탁 받은 학생들 중에 합격된 놈을 수첩에 표했다가 부탁한 학부형에게 통지한다고 들었다. 아마도 그 학부형들은 조 선생 덕분인줄 알는지 모른다. 어쨌든 지혜로운 분임에는 틀림없었다.

『와글 와글』

내가 중학생 가르쳐 보긴 난생 처음이다. 한 반에 칠십 명 이상 몰아넣고 한 책상에 셋 꼴로 앉았으니 떠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교단에 올라선다. 그리고 기립 경례를 받는다. 말을 끌어내기가 바쁘게 온 방이 와글와글한다. 워낙 낮은 목소리니 들을래야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준비된 교안을 펴놓고 그걸 보며 말한다. 간혹 학생들을 보긴 하지만 잠깐 건등으로 봐 넘기는 것이었다.

학생들 중에는 착실하게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교무주임에게 『비결』을 물어 보았다. 『학생들을 똑바로 보면서 강의하시오. 자기 눈동자가 선생의 눈동자와 딱 마주치는데도 떠들기만 하는 학생이란 거의 없는 법입니다』 한다.

나는 교단에 올라섰다. 여전히 『와글와글』이다. 나는 교탁을 한두 번 두들기고 버텨 섰다. 말없이 학생 전체를 똑바로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학생들은 눈이 동그래서 나를 쳐다본다. 잠잠하다. 나는 시종 그들과 눈동자을 맞추면서 강의했다. 딴 짓하는 놈은 즉각 지적한다. 교실 분위기는 그래서 일변했다.

그래도 설교나 강연에서는 제버릇이 그대로 남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개구쟁이 삼학년』

평양은 무연탄의 본고장이었지만 그건 주로 일본군대에서 무엇엔가 쓰는 모양이었고 민간에서는 돌탄을 땠었다. 돌탄이래야 기름이 잘잘타는 『검은 금강석』이다. 넣기가 무섭게 『확』 타올라 당장 난로가 빨갛게 단다.

제2년 겨울, 나는 3학년 담임선생이 됐다. 그런데 언제나 3학년이 말썽이라고 한다. 일이학년은 아직 어리고 사오학년은 점잖고 3학년이 개구쟁이 대표작이란다. 교실마다 굴뚝을 길게 뽑은 난로 하나씩 놓고 소사 영감이 돌아다니며 석탄을 넣어주는 것이었다. 소사가 석탄 넣으러 3학년 교실에 들어가면 학생놈들이 영감을 둘러싸고 작업을 방해한다. 영감이 골을 내면 재미있다고 모아 붙어 놀린다. 영감은 담임선생인 내게 와서 호소하는 것이었다. 나는 말했다.

『이제부터는 그 교실에 드나들지 말고 석탄도 넣지 마시오』 했다.

불이 꺼져도 영감은 보이지 않는다. 반장이 찾아와서 떨기만 한다고 하소연한다. 나는 조용하게 일렀다.

『너희를 위해 석탄 넣어주는 할아버지를 놀리고 못살게 굴었다는 건 석탄 넣지 말라는 행동이 아니냐? 그래서 너희 소원대로 했는데 무슨 잔소리냐?』

『그 대신 나도 너희와 같이 고생할테니 너희 교실로 가자!』 하고 같이 들어가 앉았다. 삼십분쯤, 싸늘한 교실 속에서 침묵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견디다 못해 반장이 일어나서 『제가 소사 영감께 사과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나갔다. 소사 영감이 들어왔다. 학생 전체가 일어서서 『영감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한다.

소사 영감은 빙그레 웃었다. 나도 흐뭇하게 웃었다. 귀엽고 기대되는 개구쟁이들!

[범용기 제1권] (77) 간도 3년 - 간도로

간도로 그때 아내는 만삭이었다. 하기 휴가도 끝날 무렵 하루는 숭전 교장으로 혼자 남아 있는 『마우리』 [1] 선교사가 몸소 내 집에 찾아왔다. 『마우리』 박사는 한국 선교사 중에서 단 한 사람 웨스턴 출신 내 동창이었다. 그래서 좀 다른 데가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