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 국민 운동
박정희가 아직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였다.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였던지 “재건 국민 운동”[1]이란 것을 만들었다. 의장은 이관구로 이미 발표됐다. 그러나 부의장 자리와 중앙위원 등은 아직 선정되지 않았었다.
하루는 홍종인이 기어코 신문회관까지 같이 가자고 조른다.
같이 갔다. 사람들이 배꾹 차 있었다.
‘재건 국민 운동 발기총회’란다.
이관구가 사회하고 있었다. 홍종인은 “김재준 박사님을 부위원장으로 추대합시다” 하고 발언한다. 두말없이 박수 환영이다.
나는 ‘국민 재건 운동’에 완전무식자니까 할 수 없다고 재삼 거절해 봤으나 통하지 않았다. 홍종인이 내 등을 밀어 맨 앞에 내세운다. 나는 퇴장하기도 안됐고 해서 나갔다. 취임사를 한마디 하라는 것이다.
나는 말했다.
“지금 ‘정부로부터 국민에게’ - 라는 ‘상의하달’(上意下達)은 거의 기계적으로 되지만 ‘국민으로부터 정부에’의 ‘하의상달’(下意上達)은 거의 단절됐다. 일방통행은 민주적일 수가 없다. 이런 마당에서 이 국민운동이 국민의 의사와 소원을 정부에 전달시키는 ‘하의상달’의 구실을 할 수 있다면 그런 조건에서 취임을 승낙한다. 그것이 안 되면 언제든지 물러난다”고 했다.
그후 무언가 모임이 잦았다. 시민회관에서 무슨 시국강연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나도 연사로 몇 번 ‘데뷰’했다.
중앙위원회가 모였다. 국민의 소리를 정부에 전달하려면 우선 국민의 소리가 어떤 것인가를 기탄없이 직접 들어야 한다. 위원들이 총동원하여 둘씩 둘씩 짝지어 전국 각 지방을 뜯어 맡고, 직접 현지에서 그 지방국민들과 면담해봐야 한다는 제안이 가결됐다. 순회할 지방과 날짜까지 결정되어 사무국에서 그대로 진행시켰다.
순회한 위원들의 보고회가 열렸다. 그들이 발굴한 것은 모두 일상생활에 직결된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거의 90%가 현실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었다고 한다. 가능한 최선의 개선안도 구체적으로 제시된 데가 많았다. 우리는 그것을 정리하여 “이런 것이 ‘민의’였습니다” 하고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고하고 요청하기로 했다.
다 준비된 어느 날 우리는 전원이 최고회의 의장을 그의 사무실에 방문했다.
약 30분 후에 박 의장이 나타나 일일이 악수한다. 무던히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였다.
대변인이 준비한 문서에 따라 국민실정과 소원사항을 보고하고 선처를 바란다고 했다. 박 의장은 우리의 노고를 감사한다면서 성의껏 하겠노라 했다.
그리고 “이런 국민사상, 국민도의, 국민의례 등등의 개선은 여러분이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저희들도 적극 협력하렵니다….” 했다.
그리고서 자리를 떠난다.
그러나 그 후에는 아무 소식도 없다. 얼마 후에 우리 사무국장이 현직 고급장교 누군가로 대체됐다. ‘재건국민운동’은 온전히 군대화 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 운동 어느 회합에도 나가지 않았다. 얼마 더 있다가 이관구가 나가고 유달영[2]이 의장이 됐노라면서 수유리 우리 집에까지 찾아왔다. 간곡하게 협력을 청한다.[3]
그러나 나는 끝까지 거절했다.
그 후에 ‘국민의례준칙 작성위원’으로 기독교적인 각도에서 간결화한 내 초안을 내놓은 일도 있었지만, 결국 유교 전통이 채택됐다는 것을 책이 나온 다음에사 알았다.[4] 국민이 거의 전부가 유교 의례(儀禮)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 사실인 한, 그럴 것이라고 이해했다. 어쨌든 간소화한 것은 사실이어서 결혼식 같은 것도 5분이면 거뜬이 끝나도록 돼 있었다.
상ㆍ제(喪祭) 의례도 상상이상으로 간소해졌다. 일반사회에서는 많이 실천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도루묵이 됐다. 좋든 궂든 민속(民俗)을 고친다는 것은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이 아니라고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