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9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16)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때 - 두 번째 연금

두 번째 연금

1972년 10월 27일, 유신헌법 발표 때에도 나는 자택연금을 당했다.

성북서에서 4년째 나를 맡고 있다는 신 형사가 와서 - “김 박사님을 모시고 있으래서 이렇게 왔습니다.” 그러나 밤에는 유심스레 따라다니는 것 같지 않았다. 따라다녔자 괴로울 건 없지만.

그는 낮에 어디로 나갈 때면 - “치안국에서 전화 오거든 잠깐 식사하러 나갔다고 해 주세요” 하고 부탁한다. 밤에는 오질 않았다. 하루에 한 번씩 들러 상황보고 재료를 얻어가는 것 뿐이었다.

[범용기 제3권] (15)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때 -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때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때

어쨌든, 1972년 11월 25일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대의원 선거법이 공포되고 같은 해 12월 15일에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선거는 완전공영제(公營制)[1]여서 입후보자는 단 한 번 ‘합동연설회’를 열 수 있은 것뿐, 일체의 정치활동은 금지되고 입후보자의 선정, 선거관리 등은 중앙정보부의 지휘 아래서 실행되었다. 유신체제에 이의를 가지는 자는 입후보도 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유권자 1580만 2435명 중에서 1028만 315명이 투표에 참가(70.4%)했다고 발표됐지만 기권자 수도 431만 9302명이라고 했다. 1972년 12월 23일에 관제선거로 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곽상훈[2]을 의장으로 제1차 회의를 열고 제8대 대통령을 선거했다. 예정대로 참가대의원 2359명 중 2357명(무효 2표)의 찬성으로 단일후보인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고 1972년 12월 27일에 대통령으로 취임, 같은 날에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1972년 12월 30일에 정당활동과 선거운동을 극도로 제한한 정당법과 국회의원선거법을 새로 공포했다.

1973년 2월 27일에 유신헌법에 의한 국회의원선거 실시가 공포되어서 박정희 체면세우는 가면극이 진행되었다.



[각주]
1. 공영제(公營制) - 어떤 일을 공적인 기관에서 경영하고 관리하는 제도
2. 곽상훈(郭尙勳, 1896~1980) - 부산 동래 출신. 호는 삼연(三然). 1919년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 재학 중 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고향인 동래로 내려가 3ㆍ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후반 항일단체인 신간회에 들어가 검찰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는 한국인 희생자의 명단을 입수하고, 한국인 학살사건의 진상기록을 수집하였으며, 그로 인해 상해로 망명생활을 하였다. 귀국 후 일본의 예비검속에 걸려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 대 후보공천에 탈락하여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로 당선되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제정되자 검찰차장에 임명되어 친일분자 색출에 힘썼다. 초반에는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였으나, 제3대 국회에서는 반독재ㆍ민주수호에 앞장섰다. 4ㆍ19 혁명 이후 허정(許政) 과도정부에서 잠깐동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직무를 맡았다. 이후 민주당의 신파인 장면을 지지하기도 하였는데, 5ㆍ16 군사정변 이후 민주당을 탈당하여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면서 동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973년 유신헌정의 출범과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들어가 그 운영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범용기 제3권] (14) 정계의 파노라마와 남북공동성명 - 노처(老妻) 혼자 캐나다에

노처(老妻) 혼자 캐나다에

1972년 8월, 내가 아직도 누우며 앉으며 쇠약이 풀리지 않은 어느 날, 아내는 캐나다로 떠났다. 무턱대고 혼자 갔다. 그러나 비행기 안에서 한국청년을 만나서 아무 걱정없이 토론토 공항에까지 같이 갔단다.

아내는 장이 복막[1] 사이에 밀려나와 두들어지는 것 때문에 기분이 졶지 않았었다. 캐나다 둘째 며늘애가 스카보로 종합병원 간호원이기에 속히 와서 수술받도록 한 것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떠난 것이다.



[각주]
1. 복막(腹膜) - 복벽의 안쪽과 복부 내장의 표면을 덮고 있는 장막

[범용기 제3권] (13) 정계의 파노라마와 남북공동성명 - 수술

수술

성서공회 총회에서 이용설[1] 박사와 김명선[2] 박사를 만났다.

김명선은 언제나 농담이다. “젊은이, 얼굴이 왜 그래?”

나는 대략 병상을 얘기했다. 소변이 마치 비 새는 천정에서 물방울 떨어지듯 한다고 했다. 이용설 박사는 웃으면서 “그것 ‘전립선’ 비대증 때문인데 당장 떼 버리라구!”, “수술 안하구 치료하는 법도 있긴 하지만, 거저 떼 버리는 게 빠르고 시원해!”, “속히 하라구!”

그래도 나는 수술을 단행하지 못한대로 성서공회에서 진행중인 “새번역” 신약성서 최종 교열과 자주 열리는 성서공회 이사회, 성서공회 빌딩건축위원장,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위원 등등으로 거의 매일 시내에 드나들었다. 아직 대한일보 논설위원으로도 그런대로 붙어 있었다. 시내로 오가는 데는 주로 버스를 타는데 버스 타기란 한바탕 “전쟁”이다. 아니면 목숨 걸고 덤비는 피란민 ‘떼거리’[3]랄까?

그래도 수유리는 ‘종점’이었기에 비교적 수월했다. 미아리쯤 가면 진짜 싸움이다. 문깐에 선 어린 차장은 가엽다.[4] 들어오려는데 안 들여놓는다고 욕지거리, 어디 자리 있다고 또 들여놓느냐고 욕설 – 말하자면 욕설쌘드위치가 된다. 그러니까 몸 불편한 나의 시내 왕래는 더 피곤해진다.

결국은 수술하고야 말았다.

수술기록은 1972년 7월 발행 “제3일” 제22호에 실린 병상일록이란 일기문에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러나 따로 들추기도 시끄러울 것이기에 대략 적어둔다.

1972년 6월 어느 날엔가 남대문 거리를 걷다가 느닷없이 울릉도의 이일선[5] 목사를 만났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는 으레 듣는 인사말이다. 나는 “그리 안녕하지도 않다”면서 병상을 얘기했다. 그는 곧 “그거 전립선(소파선) 비대증[6] 때문인데 수술을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한다.

그 이튿날인 6월 9일 – 이일선은 부인 이길화와 함께 수유리 우리 집에 찾아왔다. 안암동 자기 집에서 저녁을 같이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리로 갔다.

두어 시간 앉아 있는 동안에 네댓[7] 번 화장실로 드나드는 것을 눈치챈 이 목사 부부는 당장 수술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즉석에서 우선 입원수속비로 10만원을 내놓는다. “늦추다가 방광염, 신장염 등등이 발병하면 큰일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병원은 한양대 부속병원이 좋을 거라고 한다.

그래서 1972년 6월 12일에 한양대학교 김연준[8] 총장에게 말했다.

그는 당장 특별실 독방에 입원시켜 준다. 자그마한 냉장고, 화장실, 욕실, 옷장, 전기스토브, 간호인 침대 등등이 다 있는 910호 특별실이다.

며칠 굶고 철저하게 관장하고 예비검사를 마치고 결국에는 수술대에 올랐다.

“들것에 눕히고 낯에까지 홋이불을 덮어씌우고 흰옷 입은 남자 둘이서던가 메고 나가는 꼴”은 영락없이 ‘시체’ 운반 광경이었다. 수술실에서 수술대에 눕기까지는 기억되지만 그 다음은 모른다. 전립선이 굉장히 자라서 요도를 눌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병실에 돌아온 첫날은 어리벙벙한 아픔이 둔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다음날은 진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마려운 오줌이 나가지 않을 때의 고통이란 유난했다. 나는 체면없이 엉엉거렸다. 부르짖음은 고통의 발산 방법이었다.

배꼽 아래 중간쯤 좌우에 방광에까지 구멍 하나씩 뚫어 고무관을 꼽았다. 왼켠 줄은 물을 방광에 부어넣는 것이고 오른켠 것은 물이 방광에서 나오는 줄이다.

피는 요도를 통하여 방광으로 들어갔다가 물에 섞여 오른켠 줄로 나온다. 한 주일을 줄곳 피섞인 물이 나온다.

영양은 혈관에 꼽은 링겔병 줄을 통해 수송된다.

셋째 날부터는 그리 날카로운 진통이 아니었다. 처와 이우정 선생이 늘 옆에 있어줬다. 정희도 갓난애기를 업고 자주 들렀다. 병원공기란 병균천지라서 애기에게 좋잖을 거라 생각되서 오지 말라고 했다.

의사들은 친절했다. 과장이 직접 들리기도 했다. 김대중 씨를 비롯하여 정계 거물들의 이름 붙은 화분이 무지스레[9] 많이 왔다. 조처할 고장이 없어서 간호원들 방에 나누어 주기도 했다.

경과는 청년 표준의 회복기간과 꼭 같은 날짜로 계산됐다고 한다. 의사는 놀라와한다. 여의사 한 분은 “당뇨증세도 있었기에 슬그머니 염려했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순서대로 나아가는지 모르겠어요.”

“목사님이라 기적인 것 같은데요!” 하기도 했다.

열흘만엔가 퇴원해도 된다면서 앰뷸런스에 실어 왱왱거리면서 거리를 달려 수유리에 왔다. 여전히 누워있기는 했지만 병자는 아니었다. ‘소변이 쏴 하고 시원스레 나가는 쾌감!’ 그건 경험 없이 실감하긴 어려울 것이다.



[각주]
1. 이용설(李容卨, 1895~1993) - 평양부 희천군(북한 자강도 희천시)에서 이재후와 채재신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숭실중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의과대학원 석사 및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1924년 안창호를 만나 흥사단에 입단하였고,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친일로 전향하였다(일본명 미야모토 조세쓰 宮本容卨). 광복 후 미군정 보선후생부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의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등을 지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하였다.
2. 김명선(金鳴善, 1897~1982) - 호는 해사(海沙). 황해도 장연 출신. 아버지는 김병규(金秉奎)이다.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수물과를 수료하고, 1925년에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 1961년 9월까지 모교에서 교수ㆍ학장ㆍ부총장ㆍ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1932년부터 노스웨스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35년 일본 교토부립의과대학 의학박사, 1963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3. 떼거리 - ‘떼’(여럿이 함께 모여 있는 무리)를 얕잡거나 낮잡아 이르는 말
4. 가엽다 – 딱하고 불쌍하다
5. 이일선(李一善, 1922~1995) - 1945년 약수동 신일교회를 개척하였다(신일교회는 1954년 교단 분열 당시에 어느 쪽으로도 가담을 거부해 무소속교회로 이어지다가 1981년 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신학교를 졸업(1949년)하고 의료선교를 위해 서울대 의대에 진학해 피부과 전문의가 되었으며(이 당시에 아프리카의 슈바이처를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 1961년 교인 천여명에 달하는 신일교회를 사임하고 울릉도로 건너가 의료선교를 하였다. 이일선 목사가 신학교 졸업반 시절 『이상촌』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는데, 거기에 김재준 목사가 추천사를 써 주었고, 이것을 문제삼으면서 이노수(李魯秀) 장로 등이 신앙동지회를 결성하여 조선신학교 문제를 총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6. 전립선비대증(前立腺肥大症) - 전립선이 병적으로 비대해져서 빈뇨(頻尿), 배뇨 곤란, 식욕 부진 따위의 증상이 나타나는 질환. 고령인 남자에게 많이 발병한다.
7. 네댓 – 대강 어림쳐서 넷이나 다섯쯤
8. 김연준(金連俊, 1914~2008) - 해방 이후 한양대학교 총장과 이사장을 역임한 교육자, 작곡가.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1939년 연희전문을 졸업한 뒤 한양대의 전신인 동아공과학원을 설립했다. 대한일보와 기독교신문을 창간하였다. 1959년부터 1973년까지 15년간 한양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이후 2007년까지 한양학원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장공 김재준의 인격과 지조와 문필능력을 존경하고 어려운 난세에 김재준이라는 선비를 보호하고 돕는데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9. 무지스레 – 슬기롭지 못하고 크고 둔한 데가 있게

[범용기 제3권] (12) 정계의 파노라마와 남북공동성명 - 박창암이란 사나이

박창암이란 사나이

그 동안에 박정희에게 소외당한, 게릴라 전술의 전문가라는 박창암[1]이 자주 우리집에 오곤 했었다. 김종필[2]과는 견원지간(犬猿之間)[3]이었지만 그만큼 그는 강직한 군인이었다.

군사 ‘혁명’ 때 그는 같이 도강[4]한 주류였지만 자유당 때의 ‘정치범’을 심판하는 특검 책임자라는 미움받는 자리밖에 차례지지[5] 않았었다.

어쨌든 그는 일사천리고 그 검부러기[6]를 처치해 버렸다. 최인규[7]에게 사형언도한 것도 그가 한 일이었다.

그 후에 그는 오래 무료(無聊)하게 지내다가 남북회담이 된다는 소문에 들떠서 차제에 잡지라도 하나 해 본다고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잡지 이름은 “자유”[8]였다.

그는 나에게 7ㆍ4 공동성명에 대한 논평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상당히 긴 글을 써 줬다.

거기서 나는 “이념과 사상과 제도를 초월하여……”란 전제가 너무 추상적이라고 지적했다. “제도”에서 온전히 자유하는 사람도 찾기 어렵겠지만, 인간이 현실로서의 인간인 한, 이념이나 사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공상이다. 이념도 사상도 없이 어떻게 대화가 되느냐?

“허공만 때리는 권투선수”가 되란 말이냐 등등.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공산체제와 자유민주체제 등을 대좌시키고 또박또박 따지면서 동시에 제3의 통일된, 또는 통일될 한국의 원칙적인 설 자리를 허심탄회하게 찾아봐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단일민족”이란 것도 이념과 사상이 반대되는 경우에는 “적”으로 대립된다는 것이 6ㆍ25 때의 시민경험에서 뼈저리게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고 대화 자체를 단념하란 말은 물론 아니다. 대화를 하되 진실하고 솔직하게,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면서 합일점을 위하여 피차 양보할 줄 아는 민족적인 기반 위에서 성실과 인내로 꾸준하게 진행시켜야 할 것이라고 해 두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단일민족”이란 전제는 진짜 무의미한 것이냐? 그렇지 않다.

만일 이북이 일본족(族)이나 러시아족이라면 아예 이런 말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끼리니 같은 혈육으로서의 “사랑”이 통할 수 있지 않겠느냐? 6ㆍ25 때 인민군 “열성분자”라는 사람이 이남의 형제자매를 찾아 인사를 나누던 경험을 나는 기억한다. 그 순간 그들은 형제요 자매요, 친척인 것 이외로, 또는 이상으로, “인민군”인 것이 아니었다. “만나니 반가운 것” 뿐이었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 사랑이 “민족사랑”에로 발전한다면 “이념과 사상과 제도를 초월한” 하나로 남북을 통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족애”라는 활력소가 “단일민족”을 성숙시킨다.

박창암 씨가 내던 “자유”지는 내용이 괜찮고 부피도 있고 했지만, 출판비, 고료 등에 쓰여지는 재정 내막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박창암에게 서울시장을 하라는 둥, 공화당 국회의원이 되라는 둥, 여러 가지로 회유해 오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게 와서 의논했다. 내가 보기에는 강직한 것이 그의 인격적 생명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시장’으로서 대통령 지시를 거부한다면 관료질서를 범한 죄로 처벌되고 할 말이 없을 것이고, 공화당 국회의원이 되도 ‘거수기’[9] 노릇밖에 못 할 것인데 그런 걸 각오하고 하겠거든 하시오. 했다.

그는 둘 다 거부하고 야인으로 머물면서 ‘육사’에서 시간강사로 게릴라 전술을 강의한다고 들었다. 지금의 소식은 모른다.

남북공동성명의 반응은 국제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1973년 11월 21일 제28회 UN 총회 정치위원회에서는 남북한의 대립된 두 제안을 둘 다 채택하고 타결의 기회를 모색하기로 했다 한다. 그날 정치위원회 의장의 성명 내용을 보면 UN은

① 1972년 7ㆍ4 남북공동성명에 있는 통일 3원칙을 인정한다.

② 남북간의 대화를 추진시켜 남북간의 다면적 교류협력이 실현되도록 희망한다.

③ 국련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해체한다.

등등이었다.

그 후 얼마 동안은 이남의 대이북 방송에서 상대방을 모욕하는 욕설이 없어졌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며칠만이었고 또 다시 험악하고 거친 말투가 쏟아져 나왔다. 박정희는 “국제정세의 급변과 이북의 남침준비”라는 것을 구실로 “비상”을 걸고 독재 합법화를 진행시키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각주]
1. 박창암(朴蒼巖, 1923~2003) - 함경남도 북청 출생. 만주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간도의 조양천 초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1943년 만주국 군대인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해방 이후 평양에서 협신공업학교 교사를 하다가 서울로 옮겨 1949년 육군 중위로 임관해 한국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1961년 5ㆍ16 군사정변에 참여하였으나 1963년 김재춘의 중앙정보부는 그가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법정에 선 박창암은 “혁명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므로 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참신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맹비난했다. 징역 13년이 선고되었으나 1년후에 형 면제처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사재를 털어 월간 『자유』지를 창간해 2002년까지 발행인으로 일했다. 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하던 이유립이 『환단고기』의 내용을 『자유』지에 도배하였다.
2. 김종필(金鐘必, 1926~2018) -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킬 당시 예비역 육군 중령으로 쿠데타에 참여했다. 박정희의 형(박상희)의 장녀 박영옥과 결혼하였다. 초대 중앙정보부장, 9선 국회의원, 국무총리(박정희 정권, 김대중 정부)를 역임하였다. 1965년에 조인된 한일굴욕협정을 위해 일본의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회동(1962년)하기도 하였다.
3. 견원지간(犬猿之間) - 개와 원숭이 사이라는 뜻으로, 사이가 몹시 좋지 않은 관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4. 도강(渡江) - 강을 건넘
5. 차례지다 – 일정한 차례나 기준에 따라 몫으로 분배되다
6. 검부러기 – 마른 풀이나 낙엽 따위의 부스러기
7. 최인규(崔仁圭, 1919~1961) - 경기도 광주 출생. 1933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1941년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1949년 뉴욕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58년 민의원 당선, 교통부 장관, 1959년 내무부장관에 기용되어 3ㆍ15 부정선거를 총지휘하였다. 1960년 4ㆍ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5월 3일에 구속되었다. 조사결과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61년 혁명재판부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12월 서울교도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8. 『자유』 - 박창암이 반공정신을 함양하고 민족사관을 확립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창간한 월간지.
9. 거수기(擧手機) - 손을 드는 기계라는 뜻으로, 회의에서 가부를 결정할 때 자신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남이 시키는 대로 손을 드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

[범용기 제3권] (11) 정계의 파노라마와 남북공동성명 - 7ㆍ4 공동성명

7ㆍ4 공동성명

1972년 7월 4일에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을 때 나는 수유리 우리 집에 있었다. 이후락[1]이 이남을 대표하여 조인했다고 한다. 그는 “대화 있는 대결”을 기자회견에서 강조했다고 한다.

이것은 무력이나 외세에 의하지 않고 이념과 사상과 제도를 초월한 단일민족으로서의 자주 평화통일을 실현한다는 데 남북이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닉슨’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긴장완화의 물결이 세계적으로 펴지는 여파였다고 하겠다. 1971년 9월 21일에 남북적십자 회담이 열려서 끊겼던 혈맥이 약간 통할 것 같던 참이었기에 더욱 희망적이었던 것이다.



[각주]
1. 이후락(李厚洛, 1924~2009) - 1924년 경남 울산군 웅촌면 출생으로, 1943년 울산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항공기정비학교에 입교해 하사관 과정을 이수해 1944년 12월 일본 육군 하사로 전역했다. 해방이후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이듬해 1946년 3월에 졸업하여 대위로 임관했다.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시절 주로 정보기관에서 활동했으며, 1972년 북한에서 김일성과 회담을 가진 후 7ㆍ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유신헌법 선포 이후에 박정희 후계자로 부상했으나 이로 인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견제가 심해졌고 1973년 심장병 치유를 이유로 영국령 바하마 제도로 출국했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회유로 다시 귀국하였다. 10ㆍ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된 후,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려났지만 사망할 때까지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범용기 제3권] (10) 정계의 파노라마와 남북공동성명 - 정계의 파노라마

정계의 파노라마

그 동안에 나라들은 종잡을 새 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중국의 UN 복귀, 닉슨[1]의 중국 방문, 남북간의 대화진전 등등은 긴장완화의 무드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1971년 10월 15일에 서울 일대에 위수령[2]을 선포하고 군대를 풀어 학원을 점령하고 데모학생들을 마구 체포했다. 1971년 12월 6일에는 “국제정세의 급변, 북한의 남침준비” 등을 구실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가안보 최우선, 사회불안 요소 배제, 자유의 일부유보” 등을 선포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 27일에는 국가보위에 대한 특별조치법을 공포하고 위에 말한 비상사태선언을 추인(追認)[3]하게 한 다음에 정치, 외교, 경제, 국방의 비상대권을 한 손에 걸머쥐고 집회, 데모, 언론 등에 극도의 규제를 가했다. 데모한 학생은 15년에서 무기징역 등등과 같은 언어도단의 “법령”이었다. 그리고 인적자원의 동원,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임금의 규제 등등도 “박”이 독점 조장한다고 했다.

1972년 7월 4일에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조인대표자는 이후락이었다.

1972년 7월 7일 박정희는 국무회의에서 남북공동성명에 지레 낙관하지 말고 반공교육을 더욱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국무총리 김종필은 이북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고 “주한국련군은 외세가 아니라는 것과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등으로 국가질서를 강력히 유지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1972년 8월 3일에 박 정권은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동하여 모든 기업의 사채(私債)[4]를 동결시키고 경제통제를 강화했다.

1972년 10월 17일에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의하여 국회는 해산되고 정당ㆍ정치활동은 중지되고 옥내의 집회금지, 언론ㆍ출판ㆍ보도의 사전검열, 대학의 휴교, 군법회의 설치 등을 강행했다.

그 이유로서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남북대화에 대처하기 위함”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웠다. 말하자면 정당도 국회도 없어지고 중앙정보부와 계엄사령부만이 거의 절대권력을 행사하도록 된 것이었다. 국무회의는 “비상국무회의”라는 이름으로 입법권과 행정권을 독차지했다.

따라서 야당 활동은 온전히 봉쇄되고 개인독재권 수립의 기반이 굳게 됐다. 1972년 10월 27일, 박정희 주재하의 비상국무회의에서 소위 “유신헌법안”이 의결됐다. 이 헌법안은 박정희의 뜻을 따라 한태연, 갈봉근, 박일경 등이 기초한 것이라 한다.

“유신헌법”에서 주목되는 것은

① 대통령을 의장으로 하고 대의원 2천에서 5천으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민의 주권적 수임기관이 되어 대통령의 선출과 통일정책의 심의를 맡는다는 것, 그리고 국회의원의 ⅓은 대통령이 선출하고 나머지 ⅓은 공화당에서, 그리고 ⅓은 “야당”(친여)에서 뽑는다는 것이다.

② 대통령 임기는 6년이지만 그 이상의 아무 제한도 없다는 것

③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국회의원을 일괄 추천하는 권리를 가진다.

④ 대통령은 내정, 외교, 국방, 경제, 재정, 사법 등 국정 전반에 긴급조치령을 발동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시킬 수 있다.

⑤ 국회는 직접 선거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한 의원으로 구성되는데 입법권은 대통령에 의하여 제약된다. 등등이다. 철저한 개인 독재의 합법화임에 틀림없다.

이 소위 헌법안은 1972년 11월 21일에 계엄령 아래서, 반대이론 불허라는 함구장치 가운데 명색만인 국민투표에 부쳤고 투표날에는 행정말단기관, 중앙정보부, 경찰 등등의 주민강제동원에 의해 “투표”라고 했으며 투표와 개표장에는 야당참관인도 참가할 수 없었고 계표[5]와 발표도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때 전주남문교회 은명기[6] 목사가 계엄령 아래서 반대 변론도 못하게 하고서 무슨 ‘투표’냐고 공개 항거했기 때문에 포고령[7] 위반으로 자택에 감금되었다가 후에 구속 송청[8]됐다.



[각주]
1. 리처드 닉슨(Richard Milhous Nixon, 1913~1994) - 미국의 제36대 부통령(1953~1961), 제37대 미국 대통령(1969~1974)을 역임하였다. 1960년 민주당의 존 F. 케네디에게 패하였으나, 1968년 대선에서는 민주당 휴버트 험프리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대통령 재직 중에 베트남 전쟁을 종결짓고, 아폴로 11로의 달착륙을 성공시켰으며,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하였다.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될 위기에 처하자 대통령을 사임하였다.
2. 위수령(衛戍令) - 육군 부대가 계속 한 지역에 주둔하며 그 지역의 경비와 질서 유지, 군기와 감시와 군에 딸린 건축물이나 시설물 따위를 보호할 것을 규정한 대통령령. 1970년에 제정되었다.
3. 추인(追認) - 일단 행하여진 불완전한 법률 행위를 뒤에 보충하여 완전하게 하는 일방적 의사 표시
4. 문맥상 사채(社債) - 주식회사가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일반 대중으로부터 비교적 장기의 자금을 집단적, 대량적으로 모집하는 채무
5. 계표(計票) - 표를 모아 수를 헤아림
6. 은명기(殷命基, 1921~1996) - 정읍 고부 출생으로 1947년 한국신학대학을 입학하였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단행했을 때 전주남문교회 목사로 재직하던 중, 유신 선포 반대 투쟁을 벌이다 구속되었으며, 1980년 5ㆍ18 당시에는 광주 양림교회 목사로 재직하며 수습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수배되기도 하였다. 1975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60회 총회 총회장을 역임.
7. 포고령(布告令) -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명령이나 법령
8. 송청(送廳) - 경찰청에서 조사한 피의자를 사건 서류와 함께 검찰청으로 넘김

[범용기 제3권] (16)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때 - 두 번째 연금

두 번째 연금 1972년 10월 27일, 유신헌법 발표 때에도 나는 자택연금을 당했다. 성북서에서 4년째 나를 맡고 있다는 신 형사가 와서 - “김 박사님을 모시고 있으래서 이렇게 왔습니다.” 그러나 밤에는 유심스레 따라다니는 것 같지 않았다. 따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