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9일 목요일

[범용기 제1권] (53) 미국 3년 - 경제공황

경제공황

때는 1932년, 미국은 갑작스런 경제공황으로 하루 아침에 실업자 이백만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판이었다. 대주주(大柱主)들이 손 털고 나서고 어떤 사람은 자살도 했다. 피츠버그에서도 하루에 여섯 은행이 문 닫고 재주 몇 사람이 자살했다고 보도되었다. 아침, 공원을 거니노라면 공원 벤취에서 밤 새운 실업자들이 『컵 오브 커피 플리이스』하고 손을 내민다.

교회와 급식소 앞에는 『브레드라인』이 장사진을 친다.

학교들도 파산상태에 접근했다. 기금이 모두 산업기관에 투자돼 있었기 때문이다. 고학이란 불가능했다. 장학금 기금은 통째로 없어졌고, 직장을 얻을 수도 없었다.

사태가 이러하니 -

대통령 『후버』의 인기는 『제로』 이하로 떨어졌다. 나는 민주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의기양양한 입후보 연설을 들으면서 무언가 새 사람이 나와서 새 출발을 해야 할 거라고 느꼈다.

[범용기 제1권] (52) 미국 3년 - 나도 졸업

나도 졸업

나도 졸업이라고 했다. 예정대로 수사(修士)와 석사(碩士)를 겸해 받았다. 학업성적은 나쁜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우리 반에는 예일 대학을 『탑』으로 졸업한 『물러』 군을 위시하여 Park College를 우등으로 졸업한 학생, 그 밖에 삼사명의 특출한 학생들이 있었다. 졸업식 때 교장이 본교 백여 년 역사에, 드문 『스칼라쉽』이 한 반에 모였다고 칭찬했다. 그 중에 나도 끼었는지 모른다고 자부해 봤다. 아닌 게 아니라 성적표는 각 과목 모두 A었고(B+가 하나 있었을 뿐) 히브리어 특별상도 타고 했으니 그리 주제넘은 자찬이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만우 형은 「아일리프」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귀국을 서두르고 있었다.[1] 「한경직」도 요양원에서 나와 이미 귀국 도상에 있었다.

나도 이제 웨스턴에 있기도 안됐기에 귀국이라도 하잖을 수 없다고 느꼈다.



[각주]
1. 당시 산정현교회 당회원은 조만식, 김동원, 오윤선, 변홍삼, 박정익, 최정서, 김찬두 등 7인의 장로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송창근이 미국에서 귀국하기 이전인 1931년 당회에서 이미 송창근의 부임을 확정해 놓았다. 고지수, 『김재준과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기원』, 도서출판선인, 2016, 78쪽.

[범용기 제1권] (51) 미국 3년 - 교수들 기억

교수들 기억

그 당시 조직신학 교수가 스코틀랜드에서 새로 부임했다. 『도날드 매캔지』란 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직신학을 『마이너』로 하고 그의 강의를 많이 택했다. 그는 월요일 오후에 시내 목사들을 위한 특강도 했었는데 거기에도 출석했다.

그는 걸핏하면 「페퍼」를 써 내란다. 내 「페퍼」가 특선되어 프린트물로 같은 청강자에게 나누어진 일도 한두 번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자기 서재에서 자기 저서에 서명하여 『상』이라고 『클래스』에서 내게 주던 일도 기억된다. 그는 내 졸업반 때 프린스톤에서의 초청에 응했었으나 웨스턴 학생들의 강력한 만류로 단념했고 내 졸업한 해 구월인가 종시 프린스톤으로 옮겨 거기서 종신했다.

교장인 『겔소』 박사도 구약전공이고 컬리 박사도 구약인데 모두 Postgraduate Work은 튜빙겐이었다고 한다.

겔소 교장은 그 아버님이 선교부에 설치되기 전, 인도 선교사였던 관계로 어머니는 인도인이었다. 겔소 교장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신약 교수인 『밴스』 박사도 내게 특별한 친절을 보이셨다. 자주 가정에 초청해 주셨고 목사가 교인 보살피듯 해 주셨다.

『컬리』 교수는 나의 주임교수였으니만큼 더 자주 접촉했다. 내향적이고 몹시 차분한 분이었다. 겔소 교장과 컬리 교수 모두 구약이었다. 컬리 박사는 주로 Semitic Language 부분을 담당했다.

[범용기 제1권] (50) 미국 3년 - 강의환의 급서(急逝)

강의환의 급서(急逝)

그런데 하루는 월요일 밤 늦게 와 보니 내 룸메이트 강의환 군이 안절부절 딩구는[1] 것이었다. 『웬일이냐?』 했더니 식중독인 것 같다면서 당장 오랜지 쥬스와 설사약을 사다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의예과 사년을 마친 사람이란 『크레딧』 때문에 두말없이 그대로 했다. 그는 점점 더했다. 계속 토하고 딩군다. 새로 한 시였지만 나는 학교에 『비상사태』를 알리고 곧 의사를 청했다. 그는 끝까지 의사 청하는 걸 반대했다. 의사가 뭘 아느냐는 것이었다. 어쨌든, 학교에서도 나오고 의사도 왔다.

의사는 급성맹장염인데 너무 늦어서 터진지 오래고 복막염도 심하게 됐다고 한다. 당장 입원 수술해야 한대서 그리했다. 가는 즉시 수술했다. 중태지만 간혹 낫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그는 아프지 않다고 좋아했다. 의사도 경과가 생각보다 순조롭다고 했다. 그 날 밤에 이상한 말을 한다.

『내일은 온전히 나아 퇴원할테니 갈아입을 내복과 『와이셔츠』와 빨아 대려 놓은 양복 위 아래와를 아침에 갖고 와 달라』는 것이었다. 의복들이 『단스』[2] 속에 차근차근 정돈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의복을 갖고 갔다. 그는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병원 대합실에 나 보러 왔다는 사람이 수십 명인데 병원에서 들여놓지 않아 내게로 오지 못하고 있다』면서 『웬 사람이 저렇게 많은가』고 한다. 나는 헛소린줄 알고, 적당히 대답했다.

의사 간호원 사오 명이 종종걸음으로 강군 병상에 둘러싼다. 나도 같이 서 있었다. 강군을 피가 전부 곤두솟아서 귀, 눈, 입, 코 할 것 없이 구멍마다 샘처럼 콸콸 내 뿜는다. 의사 간호원 모두 피투성이 된다. 그래도 까딱없이 그 피를 받아내고 씻어내며 엄숙하게 최후를 지켜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너무 끔찍스러울 거라』고 나를 나가라고 했다. 내가 물러난 지 삼분 쯤 되어서 『Passed away』라고 전했다.

유해는 장의사에게 건사[3]했고 장례식 일체는 학교에서 맡았다. 『켈소』 교장 주례로 학교 『채플』에서 영결식이 있었다. 학생, 졸업생, 목사 등 약 이백 명이 모여 애도해 주었다. 묘소에서도 교장이 하관식을 인도했다. 장지까지 자동차 사십여 대가 따랐다. 외국학생의 애처로운 불행을 더 많이 위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건 후일담이지만 그후 만 30년이 지난 1963년에 피츠버그에 들러 성묘했다. 작은 비석이 아직도 그를 지키고 있다.

한 주일 지나 졸업식이 있었다. 피츠버그 제일장로교회에서 거행됐다. 『뺑큇』[4]이니 『프로셋션』[5]이니 상당히 거창했다.

강의환 군도 졸업생 명단에 있었다. 그의 졸업 논문은 내가 책으로 제본하여 학교에 제출했기 때문에 심사를 거쳐 그의 생전에 졸업이 결정된 것이었다.

임자 없는 졸업장이 졸업장함에 하나 남았다. 식이 끝난 다음 내가 찾아다가 그의 아버님인 『강두화』[6] 목사님께 보내드렸다.



[각주]
1. 딩굴다 - ‘뒹굴다’(누워서 몸을 이리저리 구르다)의 비표준어
2. 단스 - ‘장롱’을 속되게 이르는 말
3. 건사 - 물건을 잘 거두어 보호함
4. 연회, 축하연(banquet)
5. 행렬, 행진, 진행(procession)
6. 강두화(姜斗和, 1874~?) - 장로교 목사, 교육자. 함남 정평(定平) 출생. 강두송(姜斗松) 목사의 형. 1907년 정평 3ㆍ1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성진(城津) 보수(普修)학교 학감을 거쳐 20년 4월 용정(龍井) 영신(永新)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17년에 장로안수를 받았으며 1919년에는 함북노회 교역자 생활비 증가를 위한 임시위원이 되어 각 교회 박봉교역자를 위해 수고하였다. 1919년에 신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간도(間道)ㆍ토성포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후 용정ㆍ주을(朱乙)교회, 나진항(羅津巷)교회 등에서 시무하였고, 1940년 당시 대동(大同)군 장현(長峴)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이후 미상.

2026년 2월 18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95) 간도 3년 - 식구들은 다시 『창꼴집』에

식구들은 다시 『창꼴집』에

내가 서울로 떠난 다음에 아내는 얼마 동안 용정에 머물렀지만 용정집을 팔아야 서울서 거처를 마련할 수 있겠기에 용정 친구들에게 그렇게 부탁했다. 그때 돈 1500원인가 받고 팔았다. 아내는 식구들을 데리고 다시 『창꼴집』으로 갔다.

더군다나 그 동안에 혜원이 몹시 아팠단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지냈다. 그런데 나는 성경용어로 『비몽사몽간』이랄까 어느 날 잊을 수 없는 『비전』을 보았다. 나는 어떤 큰 개천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그 다리 중간이 끊어져 있었다. 저쪽 켠에서 혜원이 『아버지』 하며 아버지만 보면서 뛰어온다. 아차! 하는 순간에 끊어진 틈바구니에 빠진다. 나는 덥석 머리칼을 잡아 올렸다. 그래서 내 품에 안겼다. 나는 그 꿈 때문에 불안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였다. 아내도 다른 식구들도 혜원이 아프다는 건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목숨이 걱정될 정도로 아팠던 것만은 사실이다. 어떤 결혼식에서 꽃 뿌리는 소녀 역할을 하고 추운 겨울에 잔치상 음식을 먹고서 식상[1]이 된데 이질[2]이 겹쳐 어린 몸이 아주 위독해졌다는 것이다. 동산병원에 곧장 입원시켰더라면 좋았을 텐데 수일동안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결국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서두르고 특별간호로 몇 밤을 새워 계우[3] 생명은 건졌다고 한다.

그런 일도 있고 해서 아내는 부랴부랴 식구들 끌고 큰 집으로 갔다는 것이다. 큰집에서는 할아버지, 큰아버지, 큰엄마 모두 극진히 사랑해 주어서 아이들이 모두 기승해졌다.



[각주]
1. 식상(食傷) - 소화불량으로 복통이나 토사 등이 일어나는 병
2. 이질(痢疾) - 변에 곱이 섞여 나오며 뒤가 잦은 증상을 보이는 법정 전염병
3. 계우 - ‘겨우’의 방언

[범용기 제1권] (49) 미국 3년 - 웨스턴의 제3년

웨스턴의 제3년

피츠버그에는 한국 사람이라곤 『스쿼랠힐』[1] 어느 치벽한[2] 거리에 찹쉬집 하나 있을 뿐이다. 그 주인은 컬럼비아 대학 정치과를 정규로 졸업한 김쇠울(본명은 아닌 것 같다) - 『쇠울』이란 쇠로 만든 울타리란 뜻일 것이다. 그는 부산이 고향이었다는데 애기 때 부모가 시킨 결혼자가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는 맘에 없는 결혼생활이기에는 너무 정직했다. 그리고 귀국했자 일제 아래 꼴사납기만 할 것이기에 여기서 『찹쉬하우스』를 경영하며 독신으로 때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란다.

나는 주말에는 Squirrel Hill의 이 음식점에서 주말 수지결산서를 만들어 주고 거기서 자고 주일은 그 근방에서 예배하고 월요일에는 영화, 극 같은 걸 보고 늦게사 기숙사에 돌아오곤 했었다.



[각주]
1. Squirrel Hill
2. 치벽하다 – 외진 곳에 치우쳐서 구석지다

[범용기 제1권] (48) 미국 3년 - 웨스턴의 둘째 해

웨스턴의 둘째 해

나는 구약을 전공한다는 생각이었기에 히브리어 시간은 모조리 택했다. 따라서 셈언어(Semitic Language) 주임교수인 컬러 박사 교실에 치우 드나들게 됐다. 구약개론, 구약원전 강독도 그 분이 맡았었고 교장인 켈소 박사도 구약전공이어서 말하자면 웨스턴은 구약이 세다는 평이었다.

『만우』는 오월에 Master 칭호를 받아 덴버 대학의 『아일리프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닦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 『강의환』 씨가 전입하여 나의 『룸메이트』가 됐다. 그는 한국서 숭전 수학물리학과를 마치고 미국 와서 펜실베니아 대학교 의과 대학 예과 4년을 마친 재사였다. 그러나 T.B.로 요양소에서 일년 있고서도 건강이 시원치 않아, 미국정부에서는 송환하기로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신학까지 마치고서야 간다고 고집했다. 내가 웨스턴에 갔던 해 봄에 그는 신학교 2학년에 등록해 놓고서 요양원에 들어가 있는 중이었다. 요양원에서도 귀국을 권했고 웨스턴 교장도 간곡히 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학업을 마치기 전에는 죽어도 안 간다고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하두 몸조심이 영악스러워 약한대로 T.B.는 극복됐다. 그는 웨스턴 2학년에 복교했다. 그래서 내 룸메이트가 된 것이다.

그는 성격이 몹시 내향적이었다. 나도 내향적이지만 나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글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했다. 그래서 작은 책상을 침실에 옮기고 밤낮 침실문을 닫고 그 속에서 공부했다. 공용서재는 내가 독점한 셈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반이고 같은 석사 과정 겸수였지만, 부문은 조직신학이었고 논문 제목은 『우주적 그리스도』였다. 그는 『진즈』니 『에딩톤』이니 하는 이론물리학자들 저서를 파고들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와도 싸우고 있었다. 이 방면에서 그는 『데아데 쇨 단』[1]의 선배였을지도 모른다.



[각주]
1. ‘떼이야르 드 샤르뎅’을 가리키는 듯

[범용기 제1권] (53) 미국 3년 - 경제공황

경제공황 때는 1932년, 미국은 갑작스런 경제공황으로 하루 아침에 실업자 이백만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판이었다. 대주주(大柱主)들이 손 털고 나서고 어떤 사람은 자살도 했다. 피츠버그에서도 하루에 여섯 은행이 문 닫고 재주 몇 사람이 자살했다고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