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8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42) 미국 3년 - 태평양 열 나흘

태평양 열 나흘

태평양 건널 여비가 됐으니 다음은 또 그 때 볼 셈치고 곧 떠나 동경서 Y의 최승만[1] 총무를 만나고 『요꼬하마』에서 미국 『딸라기선회사』 『프레지던트 맥킨레』호를 탔다. 『요꼬하마』 부두에는 최승만 한 분이 나오셨다. 악대가 울리고 배가 움직인다. 가는 손, 보내는 손에 쥐었던 인연의 오색 『테프』가 끊어지고 낯들도 아물아물[2] 보이지 않는다. 아까 하직한 『언덕』은 바다 저켠에 숨는다. 『인생』 일막극이다. 죽어 떠나는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과의 영결 같기도 했다. 푸른 바다 - 대야의 물같이 동그란 바다 - 열흘 동안 그 밖에 볼 것 없는 단조의 원색, 제비 떼같이 날다가 떨어지는 『비어』(飛魚)의 집단 그러나 대양의 한 점 『육지』(배)에서도 인간 비극은 끈덕지다. 집단 징집(?) 돼 가는 필리핀 노동자들께 전염성 뇌염이 퍼졌다. 하루에도 몇 사람씩 『미지의 세계로』 『이민』 간다. 배 고동이 울리고 『엔진』이 멈춰지고 서장과 신부가 갑판 뒷꽁무니에 나섰다. 인부가 거적대기로 덮은 시체를 가져온다. 신부의 간단한 주문, 그리고 시체는 바다에 던져진다. 배 고동이 울리고 배는 간다. 그 시간이 길어야 3분(?) 무던히 짧은 장례식이다. 아마도 이 『수장』(水葬)은 순식간에 『어복장』(魚腹葬)으로 될 것이다.

열흘 만에 『하와이』에 닿았다. 태평양은 진짜 『태평』의 바다였다. 열흘이 하루같이 조용만 했다. 한국 사람은 나 하나뿐. 선실 책임자는 한 사람을 위해 『코레앤』 캐빈을 따로 낼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면 어쩌라는 거냐고 물었더니 필리피노실, 차이니스실, 째패니스실 셋 중에 하나 골라 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서 다시, 참고로 말한다면서, 필리피노는 떠들고 차이니스는 마짱노름 때문에 잘 수가 없으니 아마도 째패니스실이 나을 것 같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다. 일본인은 약 50명 있었다. 선창 밑바닥에 짐처럼 실려 있다. 모두 일시 귀국했다가 재입국하는 노동자였다. 내가 프린스톤 가는 학생이라니까 모두 놀라는 모양, 『에라이 데스나!』(훌륭하십니다), 『이분은 장차 프로페서 될 분이시다!』 하기도 한다. 말이 통하니 심심찮았다. 모두 전엣 직장에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직장 주인에게 영어로 부탁편지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프로페서』 별명까지 얻어 놓고서 그만한 편지도 못 쓴달 수 없고 그래서 엉터리 영어편지를 부탁대로 다 써주었다. 그들은 『하와이』에서 모두 일시 상륙이 허락됐다. 그러나 나는 상륙 못한다는 것이다. Y총무라고 들은 민○○ 씨에게 미리 연락했었는데 딴 분이 배에 찾아왔다. 한국 학생을 찾기에 만났다. 『왜 연락을 안했느냐?』고 나무람 쪼다. 민○○ 씨에게 연락했다니까 갑자기 불쾌한 안색, 『그런 사람에게 연락했으니 될게 뭐냐?』는 것이었다. 나는 『하하 무슨 파벌 싱갱이[3]구나!』 생각하여 더 말하지 않았다. 그도 선장을 찾아 나의 일시 상륙을 교섭했지만 잘 안된다고 했다. 얼마 이야기하다 내려갔다. 상항[4]에 있는 백일규[5] 씨에게 연락했다.

일시 상륙했던 일본 노동자들이 시간맞춰 다시 배에 올랐다. 혼자 내려서 미안하다면서 바나나, 망고, 파인에플 등등을 제각기 사들고 와서 나를 위로한다.

하와이를 떠나 나흘 만에 상항에 닿았다. 백일규 선생이 배에 올라 기다리고 계셨다. 프린스톤까지 갈 여비를 갖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50불정도 남았습니다』고 했다. 『무모한 일을 했군!』 하시고서 『그 돈을 내게 주고 이민관이 묻거든 『얼백』에게 내줬다고만 하시오』 한다. 그리했다. 나는 상륙하는 줄 알았었는데 똑딱선에 태워 『천사도』라는 고도에 실어간다.



[각주]
1. 최승만(崔承萬, 1897~1984) - 기독교인 민족운동가, 청년운동가, 교육가. 호는 극웅(極熊). 1897년 11월 6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에서 최문현의 장남으로 출생.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912년 서울 장훈학교, 1915년 보성중학교, 1916년 중앙 YMCA 영어과를 각각 졸업하였으며 1917년 일본 토오쿄오 관립외국어학교(노어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최팔용, 김도연, 백관수 등 토오쿄오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학우회에 참여하여 1918년 5월부터는 최팔용을 도와 학우회 기관잡지인 <학지광>의 편집위원이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역시 유학생 문예잡지인 <창조>(創造)의 동인이 되어 민족 및 문학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 유학생 단체는 점차 민족독립운동에로 방향을 잡아갔으며 그는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1919년 1월 학교를 중퇴하고 2ㆍ8독립선언에 적극 가담하였다. 2월 8일 토오쿄오 한국 YMCA회관에서 1차 독립선언서 낭독 및 만세시위가 있은 후 1차로 주모자 최팔용, 김도연, 백광수 등 9명이 체포된 후 제2차 운동의 책임을 맡게 된 그는 YMCA 2층 자신의 방에서 4-5일 후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전 유학생대회를 열고 항일연설회를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즉석에서 변희용, 장인환, 강완섭, 최재형 등과 함께 반일선언문에 서명하고 준비하던 중 이 사실을 밀고되어 그를 비롯한 서명자들이 체포되었다. 40일만에 풀려나기는 했으나 일경의 삼엄한 감시에 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고국에서 들려오는 만세시위 소식을 상해 및 미국에 전달하는 임무를 은밀히 수행하였다. 1922년 5월 토오쿄요 조선기독교청년회 기관지인 <현대>(現代)의 편집 주간이 되면서 문필활동을 재개하였고 1923년 토오데이(東洋)대학 인도논리철학과를 졸업하였다. 그해 토오쿄오 조선기독교청년회 총무로 피선되어 1934년까지 봉직했다. 그동안 193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대학을 졸업하였고 그해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기관지인 <청년>(靑年)의 편집 주간이 되었다. 1934년 귀국하여 동아일보사 잡지부장에 임명되어 <신동아>(新東亞) 편집주간으로 봉직하다가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해방전까지는 만주 봉천에 있는 삼창교피공창 및 경성중앙상공주식회사, 경성방직주식회사에서 근무하였다. 해방후 미군정청 문교부 교화국장을 역임하였고 1948년 9월 연희대학교 교수로 취임, 1952년까지 봉직하였다. 6ㆍ25사변 중 제주도에 피난하여 사회부 제주도분실장에 취임하여 피난민구제사업을 지휘하였고 1951년 8월에 제주도 지사가 되었으며 1952년 8월 제주대학 초대학장이 되었다. 1953년 제주도지사 및 제주대학 학장직을 사임하고 서울에 올라와 1954년 2월 이화학당 이사장이 되었으며 그해 4월 연희대학교 강사, 10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겸 부총장에 취임하였다. 1956년 인하공과대학 학장에 취임하여 1961년 5ㆍ16혁명이 일어나기까지 봉직했다. 1962년 대한소년단 부총재, 중앙여자중ㆍ고등학교 이사, 1963년 성균관대학교 감사를 역임하였고 1966-67년 재일본 한국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2. 아물아물 - 작은 것이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자꾸 조금씩 움직이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3. 싱갱이 - ‘승강이’(서로 자기주장을 고집하여 옥신각신하며 다툼)의 북한어
4. 상항(桑港) - ‘샌프란시스코’의 음역어
5. 백일규(白一圭, 1880~1962) -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언론인. 호는 약산. 1905년 하와이로 이민 그 다음해 미국 본토로 가서 공부하였다. 1908년 전명운ㆍ장인환 의사의 후원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범용기 제1권] (41) 미국 3년 - 여비는?

여비는?

이제 남은 문제는 여비다. 우선 집에 가 본다고 함경선을 탔다. 아오지까지 직행이다. 아버지와 형님과 여권을 보여드리고 여비 마련을 의논했다. 형님은 『미루』 밭을 팔아 보태자고 했다. 아버님은 반대였다. 형님은 그 밭을 저당하고 아오지 금융조합에서 오십 원을 꺼내왔다. 교회 측에서는 냉담했다. 선교사 추천생도 아니고 정식 장학생도 아닌 개인행동인데 교회에서 알게 뭐냐는 쪼였다.

장마철이라 간 데마다 홍수였다. 나는 가는 길에 주을 온천에 들렸다. 함북노회 수양회가 거기 모여 있었다. 김준성[1] 씨가 강사였다. 나는 온천 욕탕에서 피로를 풀고 여관 구석방에서 잤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같이 떠났다. 떠날 때 잘가라는 인사도 받은 기억이 없다.

함흥 김동명 씨 집에 들러 며칠 유숙했다. 수백 평 넓은 정원에 나무와 꽃이 『에덴』같이 꾸며져 있었다. 시인의 미학(美學)이 생동한다. 나는 그의 큼직한 『숫케이스』를 빼뜨리다시피 얻어갔고 떠났다.

서울에 왔다. 윤치호[2] 선생을 찾아갔다. 그 분이 미국 유학생에게 태평양을 건네주신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특권은 과학연구와 신학연구에 국한돼 있었다. 나는 신학이라 신청권은 있다고 믿었다. 나는 사연을 여쭙고 면회를 청했다. 견지동 고가(古家)에 계셨다.

좁은 사닥다리를 올라 사람 셋이 앉으면 배꾹 찰 정도의 작은 공간에 안내되었다. 조금 후에 윤 선생이 나오셨다. 그는 언제나 한복이었고 성긴 턱수염이 길게 나부끼는 청초한 풍모였다. 태도가 소탈하고 평민적이었다.

『무슨 공부할 건가?』

『신학입니다.』

『어느 신학교?』

『프린스톤에 입학돼 있습니다.』

『그럼 가서 공부 잘하게!』

『감사합니다. 무슨 일러주실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잠시 후에 그는 말씀하셨다.

『미국 한인사회란 좀 복잡하고 갈래도 많은데 서로 자기편에 끌려고 할 걸세. 내 생각으로는 아무 그룹에도 들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으네!』 하셨다.

『잘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일어서며 같이 나가자고 하신다. 따라 나섰다. 그는 한일은행이던가, 하여튼 은행에 친히 가셔서 돈을 찾아 백 원을 내 손에 넘겨주셨다. 태평양 건널 여비다.[3]



[각주]
1. 김준성(金俊星, 1898~1978) - 장로교ㆍ목사ㆍ교육가ㆍ사회운동가. 함남 단천에서 출생. 10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대학에 재학중 1926년 재일한국 YMCA 부총무로 활약했다. 귀국 후 28년 원산 YMCA 총무로 임명되는 동시에 3년제 남자중학교를 설립했다. 이것이 곧 「원산기독교청년회학관」인데 가난한 기독교가정 청소년들과 그리고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들을 모아 교육을 했으며, 덴마크식 협동조합도 설치하여 농민들의 권익향상에도 힘썼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원산에서는 기독교청년회학관 학생들이 선두지휘를 했으며, 1931년 함흥 영생중학교의 교사겸 학생감으로 부임하여 학생운동을 크게 전개시켰다. 그후 북간도의 용정 은진(恩眞)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했으나 더 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어서 1935년 캐나다로 출국, 거기서 신학을 전공했다. 그뒤 목사안수를 받고 John Star Kim이란 이름으로 미국 뉴욕 등지에서 문서선교에 힘쓰다가 귀국하지 못한 채 1978년 9월 28일 뉴욕에서 별세하였다.
2. 윤치호(尹致昊, 1866~1945) -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관료.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인 윤보선(尹潽善)의 5촌 당숙이다.
3. 김재준이 도미할 당시 『신한민보』(1928년 10월 4일)에 기사로 실렸다. 고지수, 『김재준과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기원』, 도서출판선인, 2016, 76쪽.

[범용기 제1권] (40) 미국 3년 - 미국행 여권 나오고

미국행 여권 나오고

송창근 형은 미국가 있었다. 그는 나더러 졸업하거든 곧장 미국 오라고 했다. 그때 그는 프린스턴에 있으면서 내게 입학허가증과 일년 200불 스칼라쉽 허락서를 보내왔다. 이것으로 여권수속을 진행시키라는 것이었다. 나는 수속을 위해 동경을 떠나 서울로 갔다.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님 사택 객실에 유숙했다.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에게 서류를 보이고 여권절차를 물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서류의 미비된 부분을 고치고 다시 쓰고 했다. 그리고 여비와 학비 보증인 두 분의 보증서와 그들의 납세증명서를 첨부하라 했다.

납세액은 재산 정도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승동교회 김대현[1] 장로님과 이재향[2] 목사님의 재정보증서와 여타 수속을 갖추어 제출했다. 그래서 여권신청은 무난히 접수됐다.

이제 신분조사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서울만이 아니라 본적지 경찰의 신분조서가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 종로경찰서 조선인 형사가 와서 죄인심문 하듯이 별걸 다 물었다. 『권위』 과시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한 달쯤 지났다. 그때 나는 승동교회 목사관에서 피어선 성경학교[3] 기숙사로 숙소를 옮긴 무렵이었다. 어느 날 밤, 그 형사가 내 방에 찾아왔다. 다짜고짜로 『당신 미국은 다 갔소. 주소를 옮기고서 보고도 안하는 무성의한 사람이 미국엘 가요?』 하며 투덜댄다. 그러다가 『어쨌든, 내일 들어오시오!』 하고 나갔다.

이튿날 나는 고등계에 갔다. 일본인 주임이 무척 반갑게 맞이한다. 그 형사도 저쪽 아랫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임은 그 형사에게 『조서를 잘 써 오라!』고 명령조로 부탁한다. 본적지 경찰에서 조서가 왔다면서 보여준다. 『겉으로는 온순한 척 하면서 속은 다소 음험하다……』고 쓰여 있었다. 그 녀석이 보긴 잘 봤다고 생각했다. 고등계 주임은 곧 여권이 나올테니 통지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통털어 두 달 만에 여권이 나왔다. 일본 총리대신 겸 외무대신 『다나까』(田中義一卽) 이름으로 발급된 것이었다.



[각주]
1. 김대현(金大鉉, 1873~1940) - 장로. 교육자. 1873년 5월 7일 경북 영일군 흥해(興海)면에서 출생. 유교가정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흥해 지역의 교육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후에 서울로 이주하여 동대문구의 창신교회에 출석하다가 승동교회에 적을 두게 되었으며 1923년 장로로 장립되었다. 그후 1939년 3월, 조선신학교설립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 거액의 재산을 기부하기로 약속하여, 그 일을 가능케 했다. 그는 부동산 소개업을 통하여 얻은 수입의 십일조를 별도로 저축하고, 그 통장의 저축인 이름을 김필헌(金必獻)이라고 명명했다. 그 이유는 그 저금통장의 돈은 반드시 하나님께 바친다는 약속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전에도 이미 여러 개척교회들의 전도비를 헌금으로 보조하기도 했는데 그가 조선신학교 설립재단과 운영비를 위하여 바친 액수는 그 당시 일화로 30만엔(미화 25만불)이었다. 당시 교회 내적으로는 조선신학원 설립이 외래 선교사들에 대한 반역이며, 심지어는 신앙적 배교행위라고까지 생각하는 목사들의 반발이 있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조선신학원 폐쇄를 희망한 일부 교계지도자들의 요청을 들어 일본관헌은 김대현 장로에게 강요하여 조선신학원 경영에서 손을 떼도록 압력을 가했고, 해마다 갱신해야 하는 경기도지사의 인가를 받지 못하게 방해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억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그가 숙환으로 1940년 9월 15일 별세할 때까지 신학원을 지켰다. 바로 이 무렵 서울시 일대에 걸쳐 교계인사들을 일경이 연행해 가던 때였는데 김대현 장로 사택에 일경이 수색하러 왔다가 그가 별세한 것을 알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함태영ㆍ송창근ㆍ김재준 등의 신학교육사업의 이상에 적극 호응하여 그의 재산을 희사하고 그리고 친히 신학원을 경영하였다. 그의 이러한 의지와 행동은 비록 평신도였지만 한국교회 신학교육의 새로운 발전에 대한 강한 신념의 표현이었다.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선산에 모셨으나, 한신대학교 측이 서울캠퍼스 교정에 모시겠다고 요청하여 2003년 4월 29일 서울캠퍼스 교정으로 이장하고 추모예배를 드렸다.
2. 김재준 목사는 ‘이재향’이라고 언급했지만, ‘이재형’이 맞다. 이재형(李載馨, 1871~1949) - 장로교 목사. 초명은 재남(再南). 1871년 12월 16일 출생. 생부(生父)는 이필웅(李必雄)이었으나 14세 때 경평군(慶平君) 이세보(李世輔)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선조(宣祖)의 3남 의안군의 9대손인 경평군은 벼슬이 정1품 현록대부에 이르렀고 안동김씨 세도에 밀려 전라도 신지도에서 3년(1960-63)동안 유배 생활을 겪은 학자이자 시조시인이었다. 이같이 왕가를 배경으로 출생하여 궁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26세 때에는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의 관직은 세마직과 풍기군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을사보호조약(1905) 이후 일정한 직업없이 방황하던 중에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다. 1907년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이해는 평양대부흥이 일어난 해이고 서울에서는 이상재, 이원긍, 박승봉, 김정식, 유성준, 윤치호 등 소위 양반계층이 일거 기독교에 입신하던 그 무렵이었다. 이들 양반들의 기독교 입신이 그의 기독교 입신에도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그는 이로써 승동교회 교인이 되었고 1914년에는 승동교회 장로가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14년에는 조사가 되어 경기도 지방 교역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11회) 하였다. 졸업한 후에 경충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양평읍, 고읍, 상심리, 묘곡 등 4처교회 목사로 부임하였으며 그해 12월 경충노회 노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장로들과의 관계가 원활치 못해 고심하던 중 1921년 사임하고 말았다. 1922년 하교교회에 부임하였고 1924년에는 승동교회에 부임하여 김영구 목사와 동사목사로 시무하였다. 그러나 김영구 목사가 1928년 별세하고 후임으로 박용희 목사가 동사목사로 부임하여 시무하면서부터 이재형 목사와의 사이가 껄끄러워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노회와 총회 정치문제로까지 비화하여 1933년 11월 경성노회는 이재형, 박용희 양인을 “성경에 위반됨과 덕을 세움에 부족함”으로 1년간 목사 시무정지를 명하였다. 이로써 이재형은 일선 목회를 떠나 인사동 집에 칩거하였다. 그러나 1949년 8월 9일 별세하기 직전 박용희 목사를 불러 화해를 청하고 자신의 장례식 주례를 부탁하였다. 비록 목회자로는 성공하지 목했으나 왕손으로 기독교 목사가 되어 사회의 주목을 받았으며 평생을 무보수로 목회하였고 어려운 형편에 처한 학생들을 후원하는데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덕흥 목사가 그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하였고 김재준 목사도 미국 유학할 때 재정보증인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는 “快莫快於與人 憫莫憫於乞人”(남에게 주면서 사는 것처럼 통쾌한 일이 어디 있으며 남에게 받으며 사는 것처럼 불쌍한 일이 어디 있으랴?)의 정신으로 평생을 살았다.
3. 피어선신학교(皮漁善神學校, The Pierson Theological College) - 1912년 10월 15일 서울에서 개교하여 설립된 초교파 신학교육기관. 학생 모집은 1911년 9월부터 시작되었으나 정식 학교로서의 개교는 1912년에 이루어졌다. 이 학교가 설립되기에는 미국의 저명한 신앙운동가 2명의 공이 컸다. 한 사람은 학교 명칭의 근원이 된 피어슨(A. T. Pierson)이며 다른 한 사람은 학교 설립의 계획과 실무를 전담한 화이트(W. W. White)이다. 피어슨은 1910년 12월 중국을 거쳐 내한하여 선교상황을 돌아보았으며 이듬해 일본을 거쳐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그해(1911년) 6월 3일 사망하였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재산을 한국의 성서학원 설립에 기증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유족은 그의 재산을 처분하여 교사 대지 및 건축기금으로 보냈으며 이에 따라 1913년부터 그의 이름을 따서 「피어선기념성경학원」(Pierson Memorial Bible School)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피어슨 유족들은 학교 발전에 관심을 두고 수차에 걸쳐 헌금을 보내왔다. 1912년 10월 15일 정식 개교될 때엔 3개 과정에 240명이 등록되었다. 1913년 정식으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으로 명칭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연합성경학원」(Union Bible Institute 혹은 Bible Teacher’s Training School)으로 불렸다.

[범용기 제1권] (39) 동경 3년 - 김영구 목사 가시다

김영구 목사 가시다

김영구 목사님도 선교사들의 추천으로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 가시도록 돼 있었지만 건강진단 관계로 여권발급이 여의치 않았다. 십이지장충 구제(驅除)가 힘들어 세 번이나 구충약을 자시고 설사를 하고 하셨는데도 검사에 다시 걸리곤 하셨다.

어느 수요일 밤, 나는 승동 예배당에 갔다. 김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다. 본문은 요한복음 14:1~3이었다.[1]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배하러 간다….』 그는 해석설교를 하시면서 『나는 가족이나 자녀나 여러분에게 아무 유산도 남기지 못합니다. 예수만 믿으시면 그이가 여러분의 유산이고, 내 유산입니다. 나는 내 자녀에게도 이 그리스도 신앙 밖에 남길 것이 없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뭔가 유언 같은 설교라고 느꼈다. 문간에서 일일히 인사하며 내 손도 잡고 반겨 주셨다. 얼굴이 몹시 창백해 보였다. 그는 원래 빈혈이었는데 십이지장충 때문에 더 쇠약해 진 것이다.

나는 피어선 기숙사로 가고 그는 사택으로 드셨다.

이튿날 아침 식당에 앉자마자 『김영구 목사님 세상 떠나셨다』는 부음이 왔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갔다. 어젯밤 사택 객실에서 혼자 주무셨는데 아침 늦게도 소식이 없어 사모님이 문을 여셨는데 그는 주무시는 그대로 가셨더라는 것이다. 빈혈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영구 목사님은 경기 출신으로 젊었을 때에는 탁지부 주사로 계시다가 한말 애국지사들, 특히 이동휘[2] 선생의 영향으로 북만주에 가셨다.[3] 이동휘 선생이 시베리아로 넘어가실 때 김영구 씨도 같이 가려고 따라섰었지만 이동휘 선생은 허락하지 않았단다.

『너는 신학 공부하고 목사가 되라.』

그래서 그는 귀국의 길을 걸었다. 남만주로 나와 남만 철도로 서울에 간다. 그는 먼 후일에 이런 말을 내게 했다. 『기차 안에서 내 일생의 환상을 봤는데 그대로 돼 가고 있다.』

『그 환상을 저희들에게도 공개하실 수 없을까요?』 하고 나는 어린애가 옛말 조르듯이 살짝 졸랐다.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야!』 하고 그는 입을 열지 않으셨다.

그는 그후 일본의 신호(神戶)신학교를 졸업하고 고창고보에서 교편을 잡으시다가 서울 승동교회 초청으로 서울 목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젊은 학생에게 참신하고 건실한 신앙을 자라게 해 줬다. 그러나 목회는 몹시 괴로우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신비경험을 진주같이 간직한 지성인이었다. 생활은 청빈하여 세상 떠난 날, 사모님은 무일푼의 절량(絶糧)을 숨기고 계셨다고 한다.

그는 나에게 특별한 기대를 걸고 계셨다.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실 때에는 반드시 내게 추고(推稿)를 부탁하셨다.

그 때 큰 따님이 십육 세 정도가 아니었던가 싶다. 언제가 그는 『자네 내 사위될 생각 없나?』 하고 느닷없이 물으셨다. 『저는 벌써 결혼 했는걸요!』 하자 그는 『허허 어른이신데 실례했군!』하고 파안대소(破顔大笑)하셨다. 나는 그를 평생 존경하는 선배로 모신다.

그의 큰 아드님이 그 때 다섯 살쯤 됐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후 사모님 고생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큰 따님의 남편 되시는 분이 무던해서 사모님과 식구들을 정성껏 돌봤고 과수원도 마련하고 했단다. 큰 아드님도 효성이 지극하다. 그는 대성중고등학교 경리과에서 일하노라면서 이십여 년 후에 느닷없이 내 집에까지 찾아와서 자기를 소개했다.

내가 김영구 목사님의 부음을 듣고서 그때 『진생』이던가 하는 월간지에 『고 김영구 목사님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글을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큰 아드님은 어디서 그 묵은 잡지를 찾았는지 그걸 『가보』처럼 간직하고 있노라 했다.

큰 아드님은 아버님 묘소를 연희공동묘지에서 자기 집 과수원 가운데 모시고 비석도 세우고 살아계신 아버님 모시듯 하노라고 한다. 나도 한 번 성묘하러 간다면서 끝내 못 간대로 해외에 옮겨왔다.



[각주]
1. 장공은 이 날을 수요일로 기억하고 있지만, 승동교회의 기록에는 김영구 목사가 1928년 5월 20일 주일 밤 예배 설교를 마친(주일) 후에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다.
2. 이동휘(李東輝, 1873~1935) - 일제강점기 신민회 간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호는 성재(誠齋).
3. 『토박이 신앙산맥 2』에 김영구 목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1910년 경 규암 김약연 선생(후에 평양신학교를 수학하고 1929년 목사가 됨)이 설립한 명동학교의 법률교사로 김철(金喆)이라는 선생이 부임하였는데, 그의 본명이 김영구(金永耈)로 고베 중앙신학교를 거쳐 승동교회 목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의 결혼식 때 축사를 했다고 한다. 전택부, 『토박이 신앙산맥 2』,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69-70쪽.

[범용기 제1권] (38) 동경 3년 - 한국 학생들

한국 학생들

박원혁 씨는 이미 언급한대로 연통제 사건에 걸려 육개월 징역한 분으로서 언행이 청백(淸白) 그것이었으나 몸은 완강한 축이 아니었고 졸업 후에 함흥 영생 여학교[1]에서 교사 겸 교목으로 있다가 T.B.[2]로 40대에 세상을 떠났다.

시인 김동명[3] 씨와 나와는 동기 동창이어서 삼년을 같이 있었다. 그는 신학에는 흥미도 관심도 없었다. 학비는 3ㆍ1운동 때, 학생대표로 주동자였던 덕원의 강기덕[4] 씨가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조건이 『신학공부』에 국한돼 있었기에 『억지춘향』을 연출한 것뿐이다.

그는 야간부 일본대학 철학과에 등록하고 거기에는 열심이었다. 구변이 좋아서 변론에는 한정이 없었고 『시인』이라 자기를 속이지는 못하는 성정이었다.

그 때에도 『시인』으로서는 이미 알려져 있었고 시가 창작되면 내 앞에서 낭송하고 평을 청하곤 했다. 은근히 칭찬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졸업까지 하고 얼마 전도사일도 봤지만 함흥 영생중학교 교사로 오래 있었다. 일제 말에는 붓을 꺾고 시작(詩作)을 폐했다. 해방이 되자 막혔던 폭포같이 시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새 시집이 꼬리 물고 나온다. 동아일보에 정치 사회평론이 연재되어 장안의 종이 값을 올렸다. 서울서 참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마감역에는 이화대학 교수로 있다가 작고했다. 약한 몸에 술이 과했던 것이다.

그는 이북에서 단신으로 어렵게 탈출했다. 시고(詩稿)는 후에 월남한 부인이 몰래 몸에 갖고 나와서 햇빛을 본 것이다. 월남해서는 우리 집 객실에 유숙하면서 한국신학에서 한국문학 강의도 했다.

최석주 씨는 『일본 자유감리교신학』에서 공부하다가 내 2학년 때 청산학원 3학년에 전입 일년 만에 졸업했다. 서울 태생의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어느 학생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는 청산의 자유를 감사한다. 역시 학원은 자유여야 한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자유에서 창조작업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졸업하고 그 당시 학장대리였던 『아이글하트』 박사 댁에서 Fare well Party가 있었다. 졸업 후 포부를 피력할 때 나는 『어쩌면 금년 내로 태평양을 건널지 모르겠다』고 했다. 계획된 것도 진행된 것도 아닌 엉터리 예언이었지만 그게 그대로 됐다는 게 내게는 『기적』 같은 선물이었다.



[각주]
1. 영생학교(永生學校) - 1903년 함남 함흥에 설립된 장로교계 영생여학교와 1907년 역시 동(同) 지역에 설립된 남자 영생학교의 통칭. 이들 학교는 관북지방 최초의 신교육기관으로 창설자는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사 맥레(D. M. MacRae)의 부인인 서더랜드(E. F. Sutherland ; 馬義大)와 여선교사 매컬리(L. H. McCully) 등이다. 두 학교는 같은 캐나다 출신 두 사람의 여선교사에 의해 비롯되어 여학교는 1910년 1월 2일, 남학교는 1910년 8월 13일 각각 대한제국 학부대신 명의의 정식인가를 취득하였다. 이를 학교는 처음에 한 학교 남녀공학으로 개교하려 하였으나 당시의 인습상 많은 어려움이 수반되므로 각기 별개의 학교가 되었다.
2. 결핵(Tuberculosis)
3. 김동명(金東鳴, 1900~1968) - 기독교인. 시인. 정치평론가. 강원도 명주군 사천면에서 출생. 9세때 일가가 원산으로 이주하여 원산에서 소학교를 마쳤다. 이어 1920년 함흥 영생중학을 졸업하고 흥남과 강서 등지에서 소학교 교원을 지냈다. 1922년부터 문학에 뜻을 두게 되었고 개벽지에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 <나는 보고 섰노라>, <애닮은 기억> 등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1925년 유학차 일본에 건너갔고 이듬해 지정덕(池貞德)과 결혼하였다. 또한 어릴 때부터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으며 1928년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를 졸업했다. 1930년에 처녀시집 <<나의 거문고>>, 1938년에 제2시집 <<파초>>(芭蕉)를 출간했ek. 1937년에 아내를 잃었고, 1940년부터 상업계로 나서 미곡ㆍ목재ㆍ시탄(柴炭) 등의 장사에 손을 대었다. 1942년 이복순(李福順)과 재혼한 그는 해방될 때까지 절필했으며 해방 후에는 흥남시 자치위원회 위원장, 흥남중학교장 등을 역임했고 정치에 관여하여 조선민주당 함남도당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공산치하를 피해 1947년 월남하여 이화여자대학교에 출강하는 한편 1960년 참의원을 지냈다. 월남 이후 그의 시는 정치와 사회에 대한 현실적 관심을 진하게 반영하였고 이에 따라 순수문학 작품보다는 비평이나 평론쪽에 집중적인 저술활동의 중심을 이루었다. 6ㆍ25사변 당시 부산 피난시절에는 김도연 등과 함께 소(小)평론지 <자유평론>을 발간하였고 이때부터 주로 정치 평론에 주력하여 예리한 평론가로 알려졌으며, 그후 그의 시사적 평론은 대부분 동아일보를 통해 발표되었다. 한편 기독교에의 관심과 교회활동도 계속하여 해방 후에는 경동교회 교인이 되었다. 특히 김재준 박사와 교분이 두터워 경동교회에 처남 지갑섭(池甲燮)과 함께 출석했다. 그는 신학을 수학했으며, 남다른 신앙의 내면을 통해 그의 문학과 사회적 윤리 가치관이 형성되고 유지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4. 강기덕(康基德, 1886~?) - 독립운동가, 함남 덕원(德源)출신. 3ㆍ1운동 당시 보성전문학교 학생으로 보성전문학생 대표 김문진(金文珍)을 통하여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선언문 1,500장을 받아 각 학교에 배부하고 만세 시위 군중을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3ㆍ1운동이 일어나기 전 1919년 1월 28일에 YMCA 간사 박희도(朴熙度),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金元壁) 등과 경성 대관원(大觀園)에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을 모의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월남하여 초대 함경남도지사 건국대학교 초대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6ㆍ25때 납북되었다.

2026년 2월 17일 화요일

[범용기 제1권] (37) 동경 3년 - 청산의 학풍

청산의 학풍

청산학원이라면 『자유』가 연상된다. 학생이고 선생이고 간에 개인 자유, 학원 자유, 학문 자유, 사상 자유, - 모두가 자유분위기다. 물 속의 고기 같이 자유 속에 살았던 것이다.

신학사상에 있어서는 그 당시 『뉴욕 유니온』 그대로였던 것 같다. 신약 교수 『마쯔모도』(松本卓夫)는 뉴욕 유니온에서 신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왔다. 구약 교수 『와다나베』(渡邊善太)는 독일 튜빙겐 박사였다. 그러니 『자유』를 넘어 『과격』(Radical)에 가깝다 하겠다. 다만 조직신학만은 『베리』 박사 담당이어서 비교적 『보수』였으나 근본주의는 물론 아니었다.

[범용기 제1권] (36) 동경 3년 - 졸업

졸업

졸업논문을 내야 한다기에 조직신학 부문에서 『바르트의 초월론』이랄까? 그 비슷한 것을 썼다. 자유신학에 대한 도전이란 데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바르트』는 『일본신학사』 『다까구라』가 소개하기 시작했을 뿐 아직 초보적인 재료 밖에 없었다.[1] 그러니 내 『논문』이 어떠했을 건 짐작이 갈거다. 그러나 베리 교수는 논문을 받아주었다. 졸업시험 치르고 졸업날짜도 통고됐다.

내가 정식 졸업생 명단에 드는 지 안드는 지 나도 몰랐다. 원래 『방청생』이었고 그 후에 정규학생으로 등록된 일도 없는데다가 한 학기를 빼먹은 셈이니 수업시간도 한 학기 부족이다. 학기금, 학우회비, 기숙사비 등도 한 푼 낸 일이 없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교무과에 묻기도 안됐고 해서 가만있었다.

결국 졸업생 명단이 나붙고 나도 졸업장을 타 가라고 공고됐다. 그 때에는 졸업식이란 것이 따로 없고 개별적으로 교무실에 들려 자기 졸업장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졸업』하고 『아오야마』를 하직했다.



[각주]
1. 칼 바르트(Karl Barth)는 186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에서 출생한 20세기 대표적인 개신교 조직신학자로 19세기 인간 이성 중심의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주창하였다. 이 신학을 일컬어 ‘신정통주의 신학’ 또는 ‘말씀의 신학’, ‘변증법적 신학’, ‘위기 신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범용기 제1권] (42) 미국 3년 - 태평양 열 나흘

태평양 열 나흘 태평양 건널 여비가 됐으니 다음은 또 그 때 볼 셈치고 곧 떠나 동경서 Y의 최승만 [1] 총무를 만나고 『요꼬하마』에서 미국 『딸라기선회사』 『프레지던트 맥킨레』호를 탔다. 『요꼬하마』 부두에는 최승만 한 분이 나오셨다. 악대가 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