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2일 일요일

[범용기 제1권] (89) 간도 3년 - 장대인 영감

장대인 영감

은진학교에 중국어 선생이 한분 있었다. 장대인이라 불렀다. 오십대로서 나이로는 제일 선배였다. 충실한 교사로서 결근이나 지각이 있어본 적이 없다. 중국인 교회 장로로서 신앙은 보수적이었다. 언제 보아도 평화로운 표정이고 민족차이도 의식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한국인 젊은 선생들 가운데는 좀 까부는 분도 없지 않았지만 한 번도 그의 입에서 동역자를 평론하거나 비판하는 내색을 보인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세상을 모른다거나 시국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인생 철학은 간단했다. 『메유파즈』(할 수 없지), 그리고 『마만디』(늘게 잡고 기다린다)었다. 중국은 바다 같아서 되박으로 퍼내기 어렵다고 한다. 헴(水泳)[1]에 자신있는 사람 뛰어드는 걸 막지도 않고 헴치다 빠지는 걸 구원하지도 않는다. 화륜선 타고 항로 따라 다니는 걸 막지도 않지만 함부로 다니다가 암초에 부서져도 제 잘못이라는 것이다. 중원(中原)의 사슴 잡았다고 날뛰던 『사냥꾼』이 한둘이었느냐. 그래서 사슴 몇 마리 잡았다고 『중원』을 잡은 건 아니지 않느냐? 이런 것이 내가 그에게서 받은 인상이다.

그가 그렇게 온유한 군자(君子)로 보이는 것은 그만큼 깊은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중국인은 『중량감』을 주는 큰 국민이라고 느꼈다. 결국 일본은 『중국』이란 바다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속삭여 보기도 했다.



[각주]
1. 헴 – 물속에 몸을 뜨게 한 뒤 팔다리를 좌우 또는 상하로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거나 그 자리에서 머물러 있는 일

[범용기 제1권] (88) 간도 3년 - 순교자열전 『십자군』

순교자열전 『십자군』

용정에서는 신사참배가 강요되는 일이 없었다. 일본영사관에서는 비교적 점잖았다. 그래서 나는 평양서 쓴 『순교자 열전(列傳)』을 책으로 출간하려고 일본영사관을 찾았다. 그 사무 맡은 사람은 조선인이었다. 나는 양식대로의 출판 신청서를 써 가지고 그에게 갔다.

원고를 읽어보아야 하겠다기에 두고 왔다. 허가가 되든 안 되든 원고는 돌려준다고 그는 약속했다. 한 달쯤 지나 다시 들렸다. 자세하게 본 모양이어서 원고는 붉은 줄 투성이다.

『너무 잔인한 기록이어서 민심을 자극할 것 같고 신사참배 거부 소동이 야기될 우려도 있으니 출판은 중지하는 게 좋겠소』 한다.

『그럼 원고라도 도루 주시오』 했더니 좀더 의논해 볼테니 그대로 두라는 것이었다. 또 한달 지나 들렸을 때에는 『원고도 압수하기로 결재났소!』 하고 시치미를 뗀다. 결국 출판은커녕 원고까지 떼우고 말았다.

어쨌든 나는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무슨 『잡지』라도 내야 하겠다고 맘먹었다. 정기간행물은 납본제[1]여서 검열이 필요없다. 그래서 친구들에게서 한 달에 일원, 이원 의연[2]받아 『십자군』 첫 호를 냈다.

원고를 써서 서울에 있는 한성도서주식회사 인쇄소에 보내면 초교와 재교는 전영택[3] 목사님이 보아 주시고 삼교는 용정에서 내가 본다. 하루에 가고 하루에 오고 기차편이었기에 말 그대로의 『일일권』(一日圈)이다.

그 무렵에 『만우』 형은 부산서 『성빈』(聖貧)[4]이란 잡지를 내고 전영택 형은 서울서 『새 사람』[5]이란 본격적인 월간지를 내고 있었다. 외치고 메아리쳐 부산에서 서울에서 그리고 만주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각주]
1. 납본제(納本制) - 정기 간행물의 등록에 과한 법률과 출판사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에 따라, 발행한 출판물을관청이나 도서관에 정해진 수량을 보내는 제도
2. 의연(義捐) - 사회적 사업이나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금품을 냄
3. 전영택(田榮澤, 1894~1963) - 목사, 소설가, 호는 늘봄(그가 창조 창간호에 「장춘」(長春)이란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한 바 있는데 이것이 후에 「늘봄」이란 호로 쓰였다), 추호(秋湖), 불수레. 평양 사창골(社倉谷)에서 전석영의 3남으로 출생. 1910년 평양 대성중학교를 3년 수료한 뒤 진남포 삼숭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2년 도일하여 토오쿄오 아오야마(靑山)학원 고등부 문과를 거쳐 동대한 문학부에 입학, 1918년 동교를 졸업했다. 이어 그해 동대학 신학부에 편입하면서 김동인, 주요한, 김환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의 동인으로 참가했다. 이듬해 2월에 창간된 창간호에 처녀작 <혜선(惠善)의 사(死)>를 발표하였다. 그해 3ㆍ1운동이 일어나기 전 토오쿄오에서 먼저 진행된 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하였고 곧 귀국하여 채혜수(蔡惠秀)와 결혼하였다. 1921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 복교하여 이듬해 졸업하였고, 곧 서울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27년 아현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30년에는 미국에 유학을 하여 퍼시픽신학교에 입학했다. 미국에서 흥사단에 가입, 독립운동에도 헌신했으며 1932년 퍼시픽신학교를 수료, 귀국하였다. 곧 기독교 문서사업에 뜻을 두어 교계 잡지 <새사람>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용도ㆍ이호빈 목사 등의 예수교회 운동에도 크게 관여했고 그 기관지 <예수>의 편집, 발행을 돕기도 했다. 일제말기에는 평양근교에 은거하면서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1945년 조선민주자 문교부장, 1946년 미군정 문교부 편수관, 1947년 국립맹아학교장, 1948년 중앙신학교 교수, 1952년 토오쿄오 <한국복음신보> 주간, 1954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국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정계ㆍ관계ㆍ교육계ㆍ언론계ㆍ출판계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폈다. 1961년에 한국 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고 단편 「금붕어」로 서울시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했으며 1963년 대한민국 문화포상 대통령장을 수상했고 이후 기독교 계명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8년 1월 16일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4. 『성빈』 - The Holy Poverty. 1937월 4월 1일 부산의 성빈학사에서 발행한 월간 기독교 잡지. 편집 겸 발행인은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 선교사 매켄지(Z. N. Mackenzie; 梅見施)로 되어 있으나 실질적인 발행인은 성빈학사를 운영하던 송창근이었다. 성프란체스코의 청빈사상을 기반으로 사회사업을 추진하던 성빈학사의 문서사업으로 발행된 이 잡지의 편집 실무는 송창근의 제자인 김정준이었다. 4ㆍ6배판 12면 정도의 체제였고, 주요 필진으로는 송창근 자신과 김재준, 한경직, 김동명, 윤인구, 김상순, 한승제 등이 참여했는데, 이들은 거의 송창근과 개인적인 교분관계를 맺고 있어 일종의 동인지(同人誌) 형태를 이루었다. 논문, 설교, 문학 등이 조화된 신앙지로 널리 애독되었으나 송창근이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됨으로 1937년 6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5. 『새 사람』 - 전영택 목사에 의해 창간된 월간 신앙 문예 잡지. 발행소는 서울 염리동에 있던 「복음사」였으며 편집겸 발행인에 전영택이었다. 국판 국한문 혼용 내려쓰기로 50여면이었으며 1부 정가 50전이었다. 이미 일본 유학시절에 문예지 <창조>의 동인으로 신문학의 한국 유입에 뚜렷한 공을 남긴 전영택은 귀국후 <신생명>, <아희생활>, <기독신문> 주간 등을 거치면서 문학과 문서선교에 헌신하였는데 때늦게 가산을 정리해서 독자적으로 낸 것이 바로 <새사람>이다. “나는 다만 글을 써서 同胞에게 福音을 傳하겠다는 사명감에 끌리어 이 일을 합니다. 그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 아니할 수 없고 하고 싶어서 할 따름이외다”라고 창간호에서 밝히듯 문학과 신앙을 융화시키려는 뜨거운 열정에서 시작하였다. 전영택의 글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임종순, 채필근, 안창호, 조민형, 정경옥, 김극성, 이구조, 이경선, 이광수, 조신일, 김재준, 김화신, 송정률, 최봉록, 최인화, 이윤재, 박계주, 주기철, 김영희, 박학적, 김익두 등의 글도 실려 명실공히 기독교 종합잡지로 널리 애독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하던 시기라 7호까지 내고 1938년에 폐간되었다. 8ㆍ15 해방 후 전영택 목사는 <새사람>의 복간을 서둘러 조민영, 김재준, 김선량, 김정준, 홍현설, 김우현, 조경우 등 동지들의 협력으로 1946년 4월 1일 속간호인 제8호를 내기에 이르렀다. 서울 죽첨동에 새사람사를 차리고 국판 30면 정도로 축소하여 발행하였으나 재정 사정으로 6ㆍ25사변 전인 1950년 3월 통권 23호로 다시 폐간되고 말았다. 속간호에서는 동인 외에 박두진, 박화목, 주태익, 전명옥 등 기독교 문인들의 작품들이 자주 실렸으며 성서연구 및 신학논문도 많이 실렸다. 특히 김재준은 정통보주수의를 비판하며 신정통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실어서 교계에 신학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6ㆍ25사변으로 중단되었던 잡지 간행을 1955년 7월에 재복간해서 2호까지 냈으나 다시 재정문제로 통권 25호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1967년말 김재준ㆍ주태익 등과 교도소ㆍ공장을 상대로 한 <새사람 신문>을 발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전영택 목사의 급서로 빛을 보지는 못했다. 비록 통권 25호의 단명한 잡지였지만 교회와 사회의 어려운 시기에 창간되어 다양한 내용의 글을 수록하였고 특히 8ㆍ15 해방 후 정신적 혼란기에는 1) 매일 성경을 읽자, 2) 거짓말을 하지 말고 속이지 말자, 3) 깨끗하고 검소하게 살자 등 「새사람 생활강령」을 제창하며 새사람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범용기 제1권] (87) 간도 3년 - 집사고 다시 살림

집사고 다시 살림

나는 삼백 평짜리 대지를 널판장으로 돌려막은 작은 초가집 한 채를 사기로 했다. 지은 지 얼마 안되는 탄탄한 집이었다. 삼백 원 내라고 한다. 내게 그런 돈이 있을 리 없다. 『창꼴집』에 가서 교섭했지만 신통한 대답이 없다. 형님은 땅을 팔고 집을 팔더라도 그것만은 해야 한다고 거의 몸부림치듯 애달아한다.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아버님과 형님이 삼백 원을 보내주셨다. 여기저기 빗주었던 것도 회수하고 무척 애쓰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매도증서 부동산 이전등기 등 절차가 끝나고 내 이름의 문패가 문기둥에 붙었다.

은진학교 선생들이 총출동해서 새 벽지로 벽과 천정을 도배하고 장판까지 새로 발랐다. 모두 『자진 출역』이다.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땔 나무도 제재소에서 헐값으로 실어다 가려놓고 톱밥도 한두 마차 갖다 쌓았다.

나는 식구 데리러 『창꼴집』으로 갔다. 며칠 부모님 슬하에서 지내고 『이민』 같이 『고향』을 떠났다. 이제부터 용정 살림이다.

[범용기 제1권] (86) 간도 3년 - 어머님 가시다

어머님 가시다

1936년 여름, 어머니는 즐거우셨다. 헤어졌던 아들, 손자, 며누리[1], 옛집에 다시 모여 오손도손 옛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등불 심지 돋우며 밤 새워도 끝안나는 죄 없는 『까십』 보구[2]싶어 애타던 지나간 긴 세월도 이제는 꿈처럼 자취 없고 어린 것들 어리광 힘든 줄도 모르는 나날이었다. 더군다나 갓난 손자 품에 안고 또닥이는 할머니 막내 손녀 혜원이는 등 뒤에서 재재거리고 - 그러나 둘째 아들이 나타나 『제식구』라고 몽딱[3] 끌고 호지 땅 용정으로 가버린다. 등에 업히고 가슴에 안기고 밖에 나가면 손목잡고 아장아장 따라 걷던 어린 것들이 일시에 떠나버린다. 온몸이 허전하고 기(氣)가 증발되고 형해[4]만이 남은 것 같았을 것이다. 막내손녀 혜원을 업고 멀리까지 따라 오시다가 제어미에게 내주고 언덕 위에 오래오래 서 계신다. 아마 남몰래 우셨을 것이다.

용정 가서 짐을 풀자마자 전보가 왔다. 『모친 위독 속내 형』이었다.

나는 새벽차로 떠났다. 아내는 같이 가지 못했다. 갓난 애기 철부지 어린 것들 거기에 짐짝들이 뒤죽박죽 떠날 수가 없었다. 종착역인 아오지에 『희용』 조카가 나와 있었다. 전보칠 때 벌써 운명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우리 식구를 보내시고 들어오시자 졸도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아오지서 이십 리를 걸어 창꼴집에는 밤중에 닿았다.

어머니는 깊이 주무시는 것 같았다.

나는 감정이 동결된 상태였다. 어머니 머리맡에 꿇어 앉아 『제가 왔습니다』 인사를 드렸다. 도무지 세상 떠나신 것 같지 않았다. 소리 질러 한바탕 통곡이라도 해야 할텐데 무감각이다. 사르뜨르의 실존주의 소설[5]에 나오는 아들 - 어머니 세상 떠났대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아들이 그대로 『나』였다. 『죽음』이 철학적 신학적 『추상화』되어 어머니의 죽음도 『현실』 아닌 『개념』으로 파악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비인간』이 된 것이다.

부엌에서 바쁘게 일하던 형수님이 너무 딱해서였는지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들어와 한바탕 목놓아 통곡하셨다.

다음날에사 잃었던 감정이 약간 풀려서 눈물이 조금 흘렸다. 소리 없는 혼자 울음이다.

상례 절차는 아버님이 원하시는 대로 유교 상례를 따라 5일장으로 뒷동산에 모셨다.

나는 불효자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머님은 지금도 내 심장에 살아 계시다.

어머니 사랑은 무조건이다. 내 생각, 내 한 일, 하려는 일, 믿는 일, 저지른 잘잘못, 그런 딱지나 조건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그는 내 어머니였다. 그것은 영원히 그럴 것이다.

『사랑은 영원하다』(고린도전서 13:8)

어머님은

1862년(壬戌) 12월 1일에 나셔서

1936년(丙子) 8월 10일에 향년 75세로 별세하셨다.



[각주]
1. 며누리 - ‘며느리’의 방언
2. 보구 - ‘보다’의 방언
3. 몽딱 - ‘몽땅’
4. 형해(形骸) - ‘사람의 몸과 뼈’
5. 장 폴 사르트르의 『이방인』

2026년 2월 21일 토요일

[범용기 제1권] (85) 간도 3년 - 안병무 김기주 등도

안병무 김기주 등도

안병무도 같은 2학년이었지만 강원룡 그룹에는 들지 않았다. 그는 독자적으로 더 멀리 조양촌이란 한국인 마을에서 주일학교를 하고 있었다. 김기주, 신영희 등도 말없이 진실하게 딴 마을에서 봉사하는 학생이었다. 합성리에도 전에 학교하던 큼직한 기와집이 비어 있었다. 거기서도 주일학교와 교회예배를 시작했다. 나는 여기저기 다니며 돌보았다.

눈보라 치는 만주 벌 20리를 헤엄치듯 허우적거리면서 합성리에 갔다가 밤 자정 가까이 돌아오곤 한 나는 확실히 젊었었다.

[범용기 제1권] (84) 간도 3년 - 종교부 3인조와 용강동 주일학교

종교부 3인조와 용강동 주일학교

은진학교 종교부에서 강원룡, 김영규, 전은진 셋이 한 몸 같이 활약했다. 김영규가 제일 연장자고 최고학년이어서 어른 구실을 한다. 전은진은 그야말로 『숨은 보배』(隱珍)여서 남몰래 일을 꾸미고 섬긴다. 강원룡은 앞장서는 행동파다.

그들은 해란강 건너 용강동에 주일학교를 세웠다. 『용강동』은 전에 동흥중학교 자리여서 온통 좌익마을이었다. 일제의 소탕전에 많은 희생을 내고 지금은 그런 색깔의 젊은이가 다 없어졌다지만, 심층에 고인 의식은 아무도 모른다. 강원룡은 그런 고장에 주일학교가 있어 소년소녀 때부터 기독교적인 성격을 조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동리 『회관』을 빌려 열심히 선교했다. 밤낮없이 일해서 주일학교도 되고 청년회도 됐다. 3년째에는 교회로 승격했다.

[범용기 제1권] (83) 간도 3년 - 학생회와 강원룡

학생회와 강원룡

학생회 총회가 열렸다. 그때 강원룡[1] 군이 2학년생이었고 김영규, 전은진 등이 3학년에 있었다. 그런데 2학년의 강원룡이 전체 학생회를 영도하고 있었다. 종교부장도 그가 겸임했다. 각학교 연합웅변대회에 나가면 언제나 일등상을 타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지도력이 있다고 점찍었다. 머리도 비상해서 시험에는 언제나 최우등이었다.



[각주]
1. 강원용(姜元龍, 1917~2006) - 1917년 7월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태어났다. 1931년 개신교에 입교했고, 같은 해 차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만주 북간도 용정의 용정중학에 진학, 윤동주 문익환 등과 친분을 가졌으며, 브나로드 운동에 참가했다. 그후 북간도 은진중학교에 수학하면서 은사 김재준을 만났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메이지 학원 영문과에서 수학하고 1940년 일본 메이지 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뒤 만주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43년 일본 경찰을 피해 북간도에서 은거하다 1944년 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옥중에서 단식 끝에 결핵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해방 후 김재준 목사가 경동교회를 설립할 때 참여하였으며 한신대학교에 입학했다. 1946년 김규식과 인연으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947년 12월에는 민족자주연맹 기획담당 책임자로 참여하였다. 단선 실시 후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1948년 한신대학교를 졸업, 1949년 11월 김재준의 후임으로 경동교회 목사로 부임한다. 기독청년연합회 정치부장을 지내다 1953년 도미하여 캐나다로 유학, 1954년 캐나다 매니토바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1956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을 거쳐 1957년 미국 뉴스쿨대학교대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5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강의, 세미나, 학술대회 등을 주관하였다. 1961년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 및 중앙위원이 되었다. 1972년 박정희의 유신에 반대하여 1974년 김수환, 함석헌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가, 대표위원에 피선되었다. 1980년 8월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었고, 1981년 WCC 중앙위원회에 참석하였다. 1986년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협의외 대표회장에 피선되었다. 1986년 경동교회 목사직을 은퇴하고, 1986년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의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 회장 등을 역임했다.

[범용기 제1권] (89) 간도 3년 - 장대인 영감

장대인 영감 은진학교에 중국어 선생이 한분 있었다. 장대인이라 불렀다. 오십대로서 나이로는 제일 선배였다. 충실한 교사로서 결근이나 지각이 있어본 적이 없다. 중국인 교회 장로로서 신앙은 보수적이었다. 언제 보아도 평화로운 표정이고 민족차이도 의식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