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3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82) 캐나다연합교회 예방과 그 후유증 - 지방순회

지방순회

총회 후에 총회 재정부와 수츄워드부 합작으로 중ㆍ서부의 각 대회(Conference)를 방문하게 됐다. 총회 재정과 선교비 모금이 그 목적이었다. 나도 같이 가야한다고 한다. 동행했다. Field Secretary(지방연락총무)가 “선구자” 구실을 했다.

그들은 간 데마다 나에게 한국 사정 소개와 “메시지”를 말하라 한다. 시간은 10분 이내란다.

나는 캐나다 선교사들이 한국과 한국 교회에 남긴 선교의 업적을 찬하하고 금후에도 계속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호소했다.

내 성미에 맞는 얘기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나의 “휴양”을 위한 비용 전체를 담당해준 캐나다 총회니만큼 그 정도의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간 데마다 꼭 같은 얘기를 기계처럼 반복했다.

“리쟈이나”에서 지방연락 총무를 만나 뱅쿠버까지 동행했다. 뱅쿠버가 이번 순강의 종착점이다.

뱅쿠버 지방의 모임에는 선교열심당이라는 늙은 여자선교부원들이 자기들 그룹모임에 나를 ‘스피커’로 청한다.

그들이 움직여야 “돈”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 할머니들을 움직이는 비결은 그들을 칭찬하고 구차스럽고 빌붙는 태도로 그들에게 애소(哀訴)[1]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태도와는 달리, 내 본성을 드러냈다. 여기가 내 순강의 마감 기회다. 우물쭈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말했다.

“당신들이 돈을 내서 당신들이 불쌍하게 보는 고장에 선교사를 보내고 ‘그는 우리 선교사다’, ‘우리가 돌봐야 한다…’ 하는 자랑을 만족시키려는 그런 선교 시대는 지났습니다. 당신들은 예수의 선교 명령에 따라, 하느님의 제단에 헌금하는 것뿐입니다. 그 후의 일은 하느님 자신이 그의 좋으신 뜻대로 맡아 처리할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행위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지방연락 총무는,

“네가 오늘 진짜 바른말을 해 줬다.” 하고 시원스런 표정을 보였다. 그러나 늙은 할머니들은 유쾌하지 않았다.

순회를 끝내고 다시 토론토에 왔다. YMCA 숙소가 내 낯익은 ‘장막’이다. 머리 둘 곳이 있으니 예수님보다는 ‘행운아’다.



[각주]
1. 애소(哀訴) - 슬프게 호소함

[범용기 제2권] (81) 캐나다연합교회 예방과 그 후유증 -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에서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에서

1958년 9월 하순에 캐나다연합교회 총회가 캐나다 수도 오타와에서 열렸다.

나는 그 총회에 친선 사절(Fraternal Delegate)로 왔으니 으레 가야한다.

사실, 내 성미로서는 승방수도(僧房修道) 같은 데는 적응되기 쉬워도, 어떤 ‘무대인’(舞台人)으로서의 연출 같은 데는 의욕도, 흥미도 재능도 타고난 것이 없다.

우선 수집어서[1] 말이 수월하게 솟구치지 않는다. 마개 막힌 ‘병’이랄까 –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고 입에까지 치솟질 않는다. 제스츄어도 싫고 목소리도 우렁차지 못하다.

‘플로어’ 연단 가까이 왼켠 옆에 내 자리도 정해 있었다.

내가 내 자리를 비운 일은 없었다.

부처님 같이 앉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 없는 것은 아니다. ‘정중동’(靜中動)[2]이랄까, 무던히 동양적이다.

날고 뛰는 자기네들 대표가 자기네들 교회 일을 의논하는데,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하는 딴 나라 사람이 참견할 계제[3]도 아니라고 느꼈다. 영어도 어림없고 유머도 없다.

‘플로어’에서 ‘가이드라인’이 서고 분과토의가 여기저기서 열린다.

나는 ‘교회와 사회’ 분과위원회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다.

‘플로어’에서의 주요 의제는 ‘GI’[4]에게서 태어난 혼혈아들을 데리고 오는 부모들과 함께, 그 애도 캐나다 시민으로 허락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플로어에서는 양론이 있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대로 분과위원회에 넘겼다. 분과위원회에서도 찬성론과 신중론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래서 내 의견이 필요했던 것이란다.

사실, 총회 측에서는 ‘입양’(入養)을 추진시킬 방침이었다. 그러나 ‘신중론’도 만만치 않았기에, 더 연구하라는 뜻으로 ‘분과위’에 넘긴 것이다.

나는 우선 신중론자의 주장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말한다.

“그 아이들이 캐나다에 입양되는 경우에 그들의 성장과정에서 자기들 ‘주체의식’(Self-Identity)의 불투명이 생기는 ‘컴플렉스’ 그리고 사회생활에서의 숨은 차별에서 생기는 불안과 불평등 등을 고려할 때, 오히려 한국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그애들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말했다.

① 그 애들의 주체의식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은 ‘호모지니어스’[5]한 단일민족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그 애들의 주체의식에 대한 도전은 더 심각할 것이다.

② 그 애들이 사회적 발전에 있어서는 캐나다 같은 일종의 ‘합중국’ 켠이 훨씬 나을 것이다. ‘자유개방사회’니만큼 각자의 능력대로 발전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교육받을 기회, 기술 습득과 취직 등등에 있어서 여기가 훨씬 유리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입양’ 추진에 찬성한다…….

그들은 납득하는 것 같았다.

결국 그렇게 가결됐다.

그리고 총회 폐회 직전의 전체회의에서 회장은 나에게 인사 겸 10분간의 연설을 하라고 했다.

나는 연설문을 우리말로 썼다. 그것을 한국 갔던 선교사들이 영역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교회는 선교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선교’의 시대가 지났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다만 선교의 개념과 방법에 창의적인 재정리와 재고가 요청되는 것 뿐이다.

한국 교회 자체도 선교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선교할 ‘고장’은 반드시 외국이어야 할 필요는 없겠다. 그 비용과 부담이 너무 벅차기 때문이다.

한국 안에도 복음이 증거 되지 않은 고장이 많다.

전라도, 경상도 해안에 흩어진 크고 작은 섬들, 강원도 산골 – 거기 버림받은 못사는 백성, 도시 변두리 빈민촌 – 우리 바로 이웃에도 우리의 선교지구는 수두룩하다….

그리고 38도선은 미래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할 적격자를 뽑는 ‘시험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기독교와 공산주의와의 대결이다. 그러므로 세계적 공동체로서 기독교회는 총 연합하여 책임적인 관심을 거기에 집중시켜야 한다. 38도선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 특히 미래 세계의 문제다….”

낭독조의 영어여서 자유스러운 ‘연설’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실수는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단상에서 총회장은, “영어를 그렇게 잘하면서 왜 활용하지 않았느냐?”하며 뜨겁게 악수했다. 그리고서 “나도 한국에 가보고 싶으니 초청해 달라”고 한다.

그런 때에 ‘제스츄어’로서라도 “나는 총회장 ○○박사가 한국 방문하시는 영광을 약속받고 싶습니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여 지금 초청합니다” 했어야 할 것이었는데, 너무 비외교적이었다는 것을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어쨌든, 모두들 열심히 박수해 줬고 “참 좋았소!” 하고 격려하는 사람들도 무던이[6] 많았다. 한국 갔던 젊은 선교사들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는 그런 찬사는 여기 사람들의 ‘에티켓’이라는 생각에서 가벼운 감사로 대꾸했다.

총회가 끝나고 전원이 관광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쬬지앤 베이가 대서양에 합류하는 고장에 건설된 유명한 발전소였다. 기차로 가는데, 기차에는 ‘세면소’가 없었다. 어쩌다 정거장에 머물면 승객이 거의 전부가 뛰어내려 모두 ‘소방호수’ 든 ‘소방대원’이 된다.

나는, 일부러 나 만나기 위해 ‘오타와’까지 왔던 김익선과 반가운 친교를 나누었다.

그는 그때 ‘파인힐 신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각주]
1. 수집다 – 수줍다(남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어려워하는 태도가 있다)
2. 정중동(靜中動) - 조용한 가운데 어떠한 움직임이 있음
3. 계제 –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적당한 형편이나 기회
4. GI - (미국) 군인, 미군
5. 호모지니어스(homogeneous) - 균질, 균일이라는 뜻이다. 다른 물질의 기체나 액체끼리 섞여있을 때 전체가 균일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범용기 제2권] (80) 캐나다연합교회 예방과 그 후유증 - 짠ㆍ리와 함께 수터 목사를 찾아

짠ㆍ리와 함께 수터 목사를 찾아

짠ㆍ리는 내게서 ‘수터’ 얘기를 듣고 그 인물에 흥미를 느끼게 됐다.

기회를 만들어 자주 만나기도 했다. 그의 교회에도 가끔 나간다. 나는 수터를 예방할 의무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수터’는 어느 시골의 미조직 교회에 임시 목사로 있었다. 짠ㆍ리와 나는 짠ㆍ리의 헌 차를 타고 그리로 가게 됐다. 마침내 그의 사택에 도착했다.

며칠 유할 뱃장이었다. 그의 사택은 지붕 밑 방까지 치면 3층이 되는 큰 집이었다. 그 대신 교회당은 큰 집 마루방 정도였다. 그러나 교회당으로서의 품위와 장치는 있을 대로 다 있었다.

‘수터’는 선원(船員) 출신으로서 체격이 장대하고 성격이 정직하면서도 거칠고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목소리는 ‘도라’(銅鐘)[1]나 ‘징’ 울리듯 찌렁찌렁한다. 그는 성직자로 부름받았다. 목사 될 결심으로 임마누엘 신학교에 들어갔다. 마침 김정준이 임마누엘 재학 중이어서 ‘동지’가 됐다. 그래서 해방 직후 새 선교사의 상(像)을 한국 교회에 심는다는 결심으로 부인과 함께 한국에 왔다. ‘어윙’과 동시에 부임했다. 그는 낡은 선교사들의 ‘틀’에 판박히지 않으려고 애썼다. 부서지다 남은, 난방장치도 없는 ‘한신’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떨기도 했다. 그는 캐나다 선교사회의 회계였지만 급하게 도와줘야 할 일이 생기면 결재 없이 우선 써놓고 본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의 ‘인기’는 그가 독점하다시피 됐다. 간 데마다 ‘수터’ 얘기였다.

한국 선교사로 한국에서 평생을 지낸 다른 캐나다 선교사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수터’는 선교사 간의 친교를 파괴한다.”

“선교비를 부당, 불법하게 썼다.”

“선교사의 위신과 체면을 손상시킨다.”

“호모섹스 상습자다” 등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어느 젊은 여선교사는 내 집에 찾아와서 울면서 원망조로 호소한다.

“우리도 평생을 한국 교회에 바쳤는데 갓 온 ‘수터’는 그렇게 위해 주고 우리는 소외시키니 억울하고 슬프다”는 넋두리도 곁들인다.

나는, “어느 누구를 의식적으로 소외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 후의 새 선교사상을 모색하는 가운데서 ‘새 인간상’, ‘새 역사 창조’ 등등의 세계적 변혁의 물결에 동조하는 불가피한 현상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선교사의 업적 평가나 ‘소환’ 결정 등등은 김정준이나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래잖아 열릴 기장 총회에 제의하고 거기서 건설적 비판적인 보고와 의견을 공개하십시오.”

그러나 이 조치가 있기 전에 캐나다연합교회 본부에서 사무 타합[2]상 필요한 일이 있으니 잠시 귀국하라는 전달이 왔다. 수터 부부는 급히 귀국했다.

기장 총회에서는 캐나다 선교사 대표의 준비되고 세련된 긴 연서를 경청했다. 그리고 캐나다 선교사 전체에게, 그들의 업적을 찬하하고, 그들의 건설적인 협력에 감사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에는 ‘수터’를 다시 보내줄 것을 청원했다. 그러나 ‘수터’는 그 길로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넌 것이었다.

그런 인연도 있고 해서 짠ㆍ리와 나는 시골의 그의 교회에 찾아가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말한다.

“그때 기장 총회에서 캐나다 선교사 전체와 자기와를 놓고 ‘양자택일’할 경우에 캐나다 선교사 전체를 제쳐놓고 자기 한 사람을 택할 줄로 믿었고 또 그러기를 바랐었소” 했다.

“그건 자기에 대한 과대망상이다. 개인으로서는 그런 선택이 가능하다. 그러나 ‘총회’라는 ‘집단 인격’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하고 나는 달랬다. 그는 지금 ‘뉴 마켓’에서 매주 천명 이상 모이는 큰 교회를 혼자서 목회하고 있다. 하여튼, 그는 호걸풍의 인간이다.

언젠가는 다시 한국에 나갈 생각이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그 후에도 짠ㆍ리는 연방 YMCA 숙소에 나를 찾아온다. 그랬는데 어찌된 셈인지 달포[3]가 지나도 ‘인사절’(人事絶)[4]이다. 전화를 걸어도 좀처럼 받아지지 않는다. 하루는 그가 ‘입원중’이라길래 겸사겸사, 좋은 기회라고 나는 문병하러 갔다. 그는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병원 경리과 여직원 자리가 그의 사무실 곁에 있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나도 자주 봤지만, 그녀는 애버리지[5] 이하의 아름다움이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운다는 말이 옳다고 나는 혼자 생각하곤 했다. 그녀의 부모는 정통 유대교인으로서 히틀러의 유대교 탄압 때에 도망하여 여기저기 굴러, 캐나다에 정착했단다. 그렇게 심한 히틀러 치하에서도 그녀는 히브리 말을 배웠고 유대인 소학교와 고등소학을 졸업하고 유대교 명절을 어김없이 지켜온 처녀였다.

그래서 그는 할례 받고 유대교 귀의자[6]임을 고백했다. 그래서 약혼이 허락됐다. 하루는 그녀의 부모가 나를 디너에 초청했다. 유월절이었다. 디너는 누룩 없는 빈대떡과 쓴 쑥과 팔레스티나에서 보내온 포도주였다.

내가 “쉠마 이즈라엘 야웨 엘로히누 야웨에 하드…”라는 신명기 6장 4절을 히브리어로 뇌였더니[7] 깜짝 놀란다.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솨마임 웨에트 하아레쯔”라는 창세기 1장 1절도 외웠다. 그들은 기분이 누그러진다. 이방인으로서는 기특하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결국, 짠ㆍ리는 그녀와 약혼했다. 나는 어느 날 고급 중국반점에 그들을 초대했다. 약혼 축하라는 명목에서다. 그리고 축복했다. 그들은 달콤한 첫 사랑에 잠겼다. 물론 YMCA에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귀국한 다음에도 편지 왕래가 있었고 그녀와의 신접살림 사진도 보내 왔었다.

그럭저럭 전충림 가정과도 통하게 됐다. 지금 피아노 연주자로 유명한 그의 막내 딸 ‘인선’이 다섯 살 때였다. 선단(仙檀)은 첫 잎에서부터 향기롭다는 속담과 같이, 다섯 살에 벌써 미국 NBC 피아노 방송프로에 뽑혀 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못 만났다.

황대연이란 의사분이 ‘스네익 리버’라는 먼 고장에서 개업하고 있다고 했다.[8] 그도 동족이 그리웠던지, 나에게 원거리 전화로 반갑다는 인사를 했었다.

그 밖에 시청에 근무하는 한국인이 한분 있다고 들었다. 우리 민족의 해외 발전이 그렇게까지 낙후됐다는 사실을 개탄했다.

일본인 교회 부인회에서는 회장이라는 중년 여자가 극성스레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그녀의 초청으로 어느 날 밤 그 그룹에 가서 설교했다.

꽤 성대하게 ‘파아티’도 열어준다. 그 또래의 부인이 약 15명 모였었다.

‘후까미’란 이름이던가 한 일인 목사는 맨 마감에 잠깐 낯을 선보인 것 뿐인데 ‘되게’ 오만해 보였다. 헌칠하게[9] 큰 키에 새까만 콧수염을 달고 있었다. 부인회장의 남편은 Baker로서 Bakery에 취직해 있었다. 꽤 늦게사 집에 돌아왔다. 내게 인사하고 집 구경도 시켜준다.

꽤 큰 집인데 일본 막부시대의 ‘마끼에’(卷絵) 따위로 벽을 메꿨던 것 같다.

YMCA에 유숙하는 동안, 나는 주로 카아튼 교회에 출석했다.

그 교회 목사는 ‘호호야’(好好爺)[10] 타입의 호인(好人)이었다. 나를 소개하기 위한 ‘친교파티’도 열어 주었다. 회중은 수십 명 밖에 안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화이트 크리스마스 날 밤에는 그 교회당 위아래가 배불러 터지도록 모였다. 나다닐 기력이 없어 집안에 유폐돼 있는 노인들, 입원 중의 회원들, 양로원, 불구자, 불구아동 등의 사회사업기관, 해외선교기관과 선교사들 등등에 보낼 선물 예산에 충당할 헌금이 이날 밤에 나오는 것이었다. 진짜 크리스마스 날에는 예배 보는 교회도 거의 없었다.

거리에는 술 먹고 떠들며 공연히 으스대는 10대 소년(?)들 행렬이 난잡했다. 이 폐풍을 막기 위해 시내 목사들은 성탄날에 금식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역사의 전환기(Turning Point)에서 그런 정도의 미봉책[11]이 얼마나 효과적이겠나 싶었다.

헌 옷을 새 천으로 꿰매는 식이 되지 않을까. 역사 전체에 도전하는 큼직한 싸움이 벌어져야 한다. 교회가 그것을 못하면 공산혁명가들이 해 치울 것이다. 그리하면 ‘세계’라는 의복은 아주 찢어져서 아예 두 조각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



[각주]
1. 동종(銅鐘) - 구리로 만든 범종
2. 타합(打合) - 두 편이 서로 양보하여 합의함
3. 달포 – 한 달 조금 넘는 동안
4. 인사절(人事絶) - 세상살이, 세상 사람들의 일과는 거리를 두고 간여하지 않는 것
5. 애버리지(average) - 평균
6. 귀의(歸依) -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교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다
7. 뇌이다 - ‘뇌다’(조그만 소리로 거듭해서 말하다)의 방언.
8. 황대연(1914~1999) - 의사. 함경남도 안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플로렌스 머레이(Florence Murray)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후 1947년 앨버타 주 라먼트 병원에서 인턴수련을 마쳤다. 1950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4년간 체류한 후 1955년 다시 캐나다에 돌아와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 1957년부터 온타리오 주 블라인드 리버에 정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25년간 주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활동하였으며 지역주민들은 그를 매우 존경하여 아예 한 거리의 이름을 왕 스트릿(Wang Street)으로 명명하였을 정도였다. 본격적인 한인이민사는 1947년 10월에 의사 황대연 선생이 앨버타주 애드먼턴에 도착하여 라멘트 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한 것을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1977년 토론토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9. 헌칠하다 – 썩 보기 좋을 정도로 적당히 크다
10. 호호야(好好爺) - 인품이 아주 좋은 늙은이
11. 미봉책(彌縫策) - 어떤 일을 임시변통으로 해결하는 방책

[범용기 제2권] (79) 캐나다연합교회 예방과 그 후유증 - “짠 리”(John Lee)라는 젊은 친구

“짠 리”(John Lee)라는 젊은 친구

그 당시 토론토에는 한국 교포가 없었다. 있다면 전충림[1] 가정이었을 것인데 나는 그를 몰랐고 그도 내가 있는 줄 몰랐다.

YMCA 가까이에 유대인 경영 종합병원인 Mount Sinai Hospital이 있다. 거기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John Lee가 유일한 한국 청년이었다.

그는 대구 출신으로서 ‘아버님’도 의사여서 넉넉한 가정의 출신이다. 싹싹하고 곱상스런 ‘미남’이었다. 그도 동족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어쩌다가 YMCA 숙고에 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얘기 꽃을 피운다. 그는 거의 매일 찾아온다. 내가 그의 처소로 가는 일도 잦았다. 차로 교외에 같이 나가기도 했다.



[각주]
1. 전충림(1923~1995) - 중국 용정 출신, 해방 이후 1962년에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토론토에서 ‘한인연합교회’를 시작하였고, 1973년부터 ‘뉴코리아타임스’(The New Korea Times)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해외에 흩어진 동포들에게 조국의 소식을 전했다. 1979년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해외언론인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교회 내에서 의견이 분분했을 때, 김재준 목사는 “누군가가 먼저 가야 한다. 그래야 문이 열리지 않겠는가. 공개적으로 정정당당히 가라. 내 나라 내 고향이 아닌가!”라고 격려했다. 평양 방문 이후 교회에 폐를 끼칠까봐 장로직을 내놓았으며, 캐나다에서 선우학원 박사, 김재준 목사, 이승만 목사 등과 상의해서 ‘해외이산가족찾기’를 꾸린다.

2026년 3월 2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78) 캐나다연합교회 예방과 그 후유증 - 토론토에서

토론토에서

토론토 정거장에 내렸다. 그게 아마 ‘유니온 스테이션’이었을 것이다.

연합교회 본부에서 마중 나와 토론토 카아튼 스츄릿의 YMCA 본부 숙소에 안내한다. 꼭대기 독방이다. 식사는 부속 식당에 내려가 마음대로 먹는다.

‘갈리하’ 총무가 약속한 대로의 ‘휴양’ 코오스다. 식비, 방세 이외에 잡비라고 한 달에 백 불씩 준다. 양복도 한 벌 맞춰 준다. 나는 백 불 갖고 책을 산다.

할 일이 없으니 드러누워 책을 읽는다. 한 달쯤 지나니 뚱뚱 살이 찐다. 몇 달 후에는 꿀돼지 모습이다.

책은 가장 좋은 ‘이웃’의 하나라고 느꼈다.

[범용기 제2권] (77) 캐나다연합교회 예방과 그 후유증 - 캐나다에의 行程

캐나다에의 行程[1]

비행기는 동경 – 앵커리지 – 뱅쿠버의 노선을 난다. 뱅쿠버에서는 ‘킹’ 목사라는 늙은 분이 나를 안내하기로 돼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킹’ 목사가 누군지도 몰랐고 그가 안내 책임을 졌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러니까 미리 통지할 수도 없었다. 비행기는 새벽 한시에 뱅쿠버 공항에 착륙했다. 거기가 종점이다. 내리는 손님은 세 사람 정도였다. 내리자마자 불이나게[2] 제 갈 데로 가버리고 나만은 어디로 갈지 몰라서 대합실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었다. 두루 살피노라니 저쪽 구석에 마감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 불러서 탔다. “어디든 하룻밤 지낼 호텔에 데려다 주소!” 했다.

내가 한국 서울에서 왔다니까, 무척 반가와 한다.

“나도 한국전쟁에 나가 싸운 ‘베터랜’[3]”이라면서 여기저기 3류 호텔을 찾아 돌아다닌다. 새벽 세시쯤이니 들여놓는 호텔이 없다.

그는 “우리 집에 갑시다. 변변치는 못합니다만 주무실 데도 있고 잡수실 음식도 있습니다” 한다. “좀 더 호텔을 찾아봅시다” 하고 나는 부탁했다. 또 돌아다닌다.

덕분에 현관 불이 켜지고 출입문이 열려 있는 2층 호텔이 발견됐다. 3류 호텔이라지만, 한국에 있다면 1류 여관일 것이다.

그는 내가 숙박계를 써낼 때까지 내 곁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방 배정 받는 것을 보고서야 떠난다. 택시 값도 조금밖에 받지 않는다.

고마왔다.

“당신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오” 하고 나는 감사했다.

“Good Samaritan이 무슨 뜻이냐”고 반문한다. 자기는 처음 듣는 말이라는 것이다.

신약성경 누가복음에 있는 유명한, 예수의 비유 말씀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서 그런 것 모릅니다” 한다.

이 비유를 입버릇처럼 외이고 가르치는 교인과 목사는 강도나 제사장이나 레위인 밖에 안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비유를 모르는 불신자는 이것을 “살고” 있구나! 나는 감개했다.

이튿날 아침, ‘매니저’에게 사연을 말했더니 전화번호를 찾아 킹 목사에게 연락한다. 한 30분 후에 ‘킹’ 목사가 와서 자기 집에 Pick-Up해줬다. 사모님은 ‘곱새’[4]였다. 이틀인가 그 댁에서 숙식했다.

사모님은 유난히 친절했다. 자기가 ‘병신’이라는 의식은 손톱만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토론토까지의 대륙횡단 기차표를 사준다. 캐빈[5] 독방이었다. 더블침대는 들어 밀면 저쪽 구석 천정에 붙어버린다. 작은 ‘데스크’에 팔 의자가 있고 문방구도 갖추어 있다. 변기는 뚜껑을 덮으면 등받이 없는 의자가 된다. 온도, 공기 등을 조절하는 버튼이 나란히 있고 심부름꾼 부르는 버튼도 있다. 버튼만 누르면 ‘웨이터’가 일분 안에 ‘대령’한다. 창문은 내다볼 수는 있어도 열지는 못한다.

어쨌든, 시골뜨기로서는 놀라운 ‘호강’이다.

말동무 없는 것이 탈이다. 인간은 혼자 살진 못하도록 돼 있다. ‘이웃’은 ‘나’의 분신(分身)이다. 아담은 ‘자연’ 안에서 ‘자연’ 속에 섞여 살면서도 ‘외로웠다’. 하느님께서는 깊이 잠든 아담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잘라내어 ‘여인’을 만들어 아담의 ‘이웃’이 되게 했단다.

“이것은 내 뼈의 뼈요, 살의 살이다” 하고 아담은 기뻐했다. ‘이웃’이 생긴 것이다. 아내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서로 서로의 ‘Better Half’다. 말하자면 ‘분신’이다.

감옥에서도 독방살이가 제일 괴롭다고 한다. ‘수도승’이라도 별 수 없다. 아씨시 성 프랜시스는 “오! 축복된 고독이여!” 하며 혼자 살았다. 그러나 그의 고독은 다채로운 복수형 ‘고독’이었다. 그는 해와 달과 별, 나무와 풀과 꽃, 새와 물고기와 짐승 – 늑대까지도 사랑 안에서 이웃을 삼았다. 그는 자연을 Personify[6]해서 이웃으로 대화한다.

그에게는 ‘작은 형제’라는 제자들이 있어서 그의 생활양식대로 같이 생활한다.

그에게는 ‘크라라’라는 본래부터의 ‘애인’이 있다. 크라라는 그를 잊지 못한다. 그도 크라라를 잊지 못한다. 크라라는 그의 수도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장에 여자수도원을 창설하고 그와 같은 양식의 생활을 한다.

그는 그녀를 가끔식 찾아가서 식사도 같이하고 대화도 즐긴다. 그러니까, ‘고독’이면서도 ‘축복’을 영탄[7]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청빈’(淸貧)과 ‘순애’(純愛)[8]로 이웃 관계를 ‘정화’(淨化)한 것이 그를 ‘성자’로 만든 것뿐이다. 물질생활에서 ‘탐욕’을 걸러내고 정신생활에서 ‘정욕’을 순화한 것이 ‘속인’보다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높은 차원에서의 ‘이웃’, 넓은 범위에서의 이웃을 갖고 산 것이다.

쓰다보니 너무 설교조로 미끄러져서 미안하다. 본래의 얘기 줄거리로 돌아간다.

기타 안 3등 객차 안에 인도인 한 분이 있었다. 그도 ‘외토리’[9]였다. 그는 상당한 지성인이고 인도의 새로운 Nation Building[10]에 헌신한 중년 신사였다. 나는 그 동안에 ‘인도’에 대한 저서들을 얼마 읽었기에 대화가 되는 것 같았다. 심심찮게 시간을 보낸다. 내가 ‘힌두이즘’의 여러 가지 습화(習化)된 종교적 미신에 대하여 말하면 그는 머리를 흔든다. “그건 옛날 얘기고 지금은 다 없어졌습니다” 하고 잡아뗀다. 인도는 벌써 모든 면에서 후진성을 탈피했다고 주장한다. 나는 말했다.

“사실, 라빈도라나드 타골[11]이나 간디[12]나 네루[13] 등등을 통하여 인도를 본다면 나도 동감이오. 그러나 바닥에 깔린 제4계급 Untouchable[14]의 눈을 통하여 본다면 그렇게 쉽사리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니 말이요.”

기차는 록키를 넘는다. 흰 눈을 쓰고, 하늘을 꿰뚫은 봉우리들, 아우성치며 곤두박질하는 계곡의 급류, 우거진 송백(松柏)의 밀림, 허리에 흰 옷 두른 자작나무(白構) 숲 – 그 가운데를 신나게 달리는 화룡(火龍) - 옛 어른들이 ‘기차’를 ‘화룡’ 즉 불을 뿜으며 뱀처럼 꾸불대며 달리는 ‘용’이라고 불렀었다. 그건 웅대하달까, 스케일이 크달까, 생각마저 높아지고 넓어지는 것 같았다. 더 넓게 사면을 한 눈에 넣으려면 기차 꼭대기 ‘전망대’에 앉으면 된다. 그러나 얼마 안돼서 눈에 피곤이 온다. 도루 캐빈에 들어가 쉰다.

기차는 록키 올라가는데 하룻밤 – 내려가는데 하루 걸린다.

다 내려오면 평야다. 첫날은 바둑판 같이 설계된 농경지대다. 다음은 산림과 소택(沼沢)[15]지대다. 나흘 만에 토론토에 내렸다.



[각주]
1. 행정(行程) - 멀리 가는 길
2. 불이나게 – 부리나케(몹시 서두르며 매우 급하게)
3. 베테랑(vétéran) - 한 분야의 일을 오랫동안 하여 그 일에 관한 지식이나 기능이 뛰어난 사람
4. 곱새 - ‘곱사등이’의 방언
5. 캐빈(cabin) - 사람이 겨우 거처할 정도로 작게 만든 집
6. Personify : 의인화하다
7. 영탄(詠嘆) - 마음 깊이 감동하여 탄복함
8. 순애(純愛) - 순수한 사랑
9. 외토리 - ‘외톨이’(의지할 데가 없고 매인 데가 없는 홀몸)의 비표준어
10. Nation Building : 국가건설
11.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 - 인도의 시인 겸 철학자. 1913년 아시아에서는 처음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간디에게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2.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 - 인도의 정신적ㆍ정치적 지도자. 영국으로부터의 인도 독립 운동을 지도하였다.
13.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 - 인도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인도 독립 이후 1947년부터 1964년까지 초대 인도 총리를 역임하였다.
14. Untouchable : (과거 인도 계급제도에서) 불가촉천민
15. 소택(沼沢) - 못

[범용기 제2권] (76) 인철ㆍ혜원 결혼 - 나의 캐나다 방문

나의 캐나다 방문

1958년 이른 가을 이미 예정된 캐나다 방문의 길에 올랐다. 9월 하순에 있을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에 ‘친선 사절’(Fraternal Delegate)로 초청됐기 때문이라지만, 사실인즉 휴식을 위한 ‘전지요양’[1]이었다.

해방 후 첫 해외여행이다. ‘꼴불견’의 시골뜨기 모습이었을 것이다.

떠나기 전에 두 가지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① 인철ㆍ혜원 결혼식을 치르는 일이다.

1958년 7월 12일에 경동교회에서 강원룡 목사 주례로 인철ㆍ혜원 결혼식을 올렸다. 두 집이 꼭 같이 씻은 듯 가난했다. 좋게 말해서 ‘청빈’(淸貧)이다. 인철 어머니 혼자 진주에서 올라왔다. 그래서 신랑 켠 가족석을 빛냈다.

인철은 자기 힘으로 백금 결혼반지를 마련했다. 그때 신학교 교수들도 모두 무료봉사나 다름없었기에 내 주머니도 비고 맑았다. 마침 예수교서회에서 ‘어드맨’의 출애굽기 주석 번역을 부탁해 왔다. 나는 그것을 한주일 안에 마감했다.[2] 그 원고료가 결혼비용에 쓰여졌다. 장롱과 침대도 그런대로 준비됐다. 피로연은 경동교회 여신우회에서 차렸고, 회원 총동원으로 접대한다.

하객은 이삼백 명, 교회당이 완전 만원이었다. 퇴장할 때 신랑은 거의 달음질하다시피 걷는다. 따라가노라고 더 잽싸게 걷는다. 백영렵[3] 목사가 농담한다. “무던히도 급해 맞았네, 식을 벌써 올려주지 않고……” 하면서 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찌른다.

신혼여행도 없다. 자동차로 시내를 한 바퀴 돌고서 수유리 학장 사택에 왔다. 이층 침실이 ‘신방’이다.

혜원은 ‘이대’에서 도서관학과 속성과를 졸업했고 도서관 직원 자격증도 받았다. ‘한신’ 도서관에 직원으로 취직했다.

그래서, 남아돌아가던 교수ㆍ직원 사택의 하나에 입주했다.

② 또 하나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경동교회를 강원룡에게 위임하는 일이다.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를 거쳐서 경기노회에 위임 청원서를 냈다. 무난히 접수됐다. 위임식은 노회에 부탁하고 나는 캐나다에로 뛰었다.



[각주]
1. 전지요양(轉地療養) - 기후가 좋고 공기가 깨끗한 곳으로 거주지를 옮겨 질병을 치료함
2. 촬스 어디맨 저, 김재준 역, 『출애굽기 강해』, 대한기독교서회, 1956.
3. 백영엽(白永燁, 1892~1973) - 1908년 6월 의주 양실중학교를 거쳐 1913년에 북경 광문대학 4학년을 수료하였으며 1921년 남경 금릉신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중화교회 목사로 시무하였고, 1922년 만주 하르빈 한인기독교회 목사로 재직중 평남 안주교회의 청빙을 받아 가던 길에 안병철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5만원을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는 혐의로 검속되었으며 평양감옥에서 1년 6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1927년 안창호가 길림에서 체포되자 장작림과 교섭하여 그 석방에 성공하였다. 1933년 8월 선천북교회 목사로 전임되었고, 1937년 동우회 흥사단 사건으로 체포, 종로경찰서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 구류되었다가 무죄로 출옥하였으나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목사직을 박탈당하였으며,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선천군민위원장 및 평북도민위원장 등을 역임하던 중 1946년 이를 사임하고 월남하였다. 1947년 1월 남조선과도정부 강원도 인사처장에 부임하였고 같은해 12월 대광중학교 교장(1952년까지)으로 전임하였으며 평안북도민회 회장(1948-55), 이북 오도 평안북도지사(1947-70) 등을 역임하였다. 동생 지엽은 영락교회 장로로 봉직했고 유족으로는 부인 조영화와의 사이에 3녀가 있다.

[범용기 제2권] (82) 캐나다연합교회 예방과 그 후유증 - 지방순회

지방순회 총회 후에 총회 재정부와 수츄워드부 합작으로 중ㆍ서부의 각 대회(Conference)를 방문하게 됐다. 총회 재정과 선교비 모금이 그 목적이었다. 나도 같이 가야한다고 한다. 동행했다. Field Secretary(지방연락총무)가 “선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