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0일 화요일

[범용기 제3권] (28) 1974. 1. 8 긴급조치 - 정체불명의 손님

정체불명의 손님

하루는 교회관계를 맡았노라는 치안국 요원이 찾아와서 “교회사찰을 맡으래서 나왔습니다만, 저는 교회가 뭔지 전혀 모릅니다. 어떻허면 좋을지 좀 가르쳐 주세요” 한다.

“교회를 ‘사찰’하노라고 애쓰지 말고 교회는 교회대로 가만 두는 게 제일 좋은 정책이겠지. 사찰이니 간섭이니 통제니 하는 쓸데없는 일을 왜 만들어 갖고 고생하는 거요” 했다.

“교회가 정부를 이러니 저러니 비판하니까 못 본체 할 수가 없잖아요?” 한다.

“교회가 정부시책을 비판하는 것은 교회의 본직에 속하는 한 부분이니까 않할 수 없지요. 정부에서는 그 비판을 듣고 자기를 반성하고 좋은 충고는 받아들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정부 입장을 솔직하게 해명해서 양해를 구하고 하면 되지 않겠소?” 했다.

그는 또 말했다.

“교회 기관에는 총회, 노회, 지교회 등이 제도화해 있긴 한 것 같은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통하는 지시나 명령 계통이 확립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업신여겨서랄까, 어느 말단 목사에게라도 손을 대면, 전체 교회가 벌떼처럼 일어납니다. 그래서 암만해도 모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글세, 그러니까 괜히 벌집을 쑤시지 말란 말이 아니오?” 해서 돌려보낸 일이 있다.

하루는 나갔다 들어오니 마루방 모새기[1]에 어떤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들어오자 그는 일어서 최경례[2]를 하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존함은 오래전부터 들어모시고 있습니다.”

“저는 박 정권 타도를 위한 방대한 비밀조직체 사람입니다”, “말을 암만 했자 소용있습니까?”, “죽여버려야지요”, “그래서 김 박사님에게도 비밀로 알려드리고 격려를 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나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런 조직이 있고 그런 계획이 있다면 그런 일을 생면부지의 나 같은 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어디 있겠오!”

“무얼하든 그것은 당신들 자유니까, 나는 옳다 그르다 말하지 않겠오. 그러나 나는 나대로 내 길을 갈테니까 내 걱정은 마시오. 나는 그런 폭력 행동에는 흥미도 없고, 해결도 없다고 생각하오. 위정자가 잘못하면 충고하고 잘하면 칭찬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서 정부가 국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실천해 준다면 협력도 할 생각이오. 내게 있어서 정부전복 같은 음모는 당치도 않은 얘기오!”

그는 일어서며 혼잣말같이 한마디 한다.

“김 박사님 보기와는 다른데요. 순진한 것 같은데 걸려들진 않는구려!”



[각주]
1. 아마도 ‘모서리’인 듯
2. 최경례(最敬禮) - 가장 공경하는 뜻으로 정중하게 경례함

[범용기 제3권] (27) 1974. 1. 8 긴급조치 - 삭발로 항거

삭발로 항거

1973년 11월 17일 한국신학대학생들이 단식투쟁에 들어갔을 때 일이다. 문교부에서는 총학장을 못견디게 굴었다. 학생들의 반정부운동을 단속할 책임이 총학장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소위 “사립학교법안”이란 데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총학장이 학생들을 제지하려 들면 학생들에게 놀림감으로 경멸된다. CIA 끄나풀 취급을 당하기 마련인 경우가 많다. 한신대 교수들에게도 문교부 지시가 엄달[1]됐다. 그러나 한신대에서는 학생과 교수와 학장이 일체가 되어 있었기에 교수들과 학생들이 다같이 삭발(削髮) - 머리칼을 면도로 밀어버리는 것으로 데모에 대신했다. 마침 그 날에 함석헌이 한신대에 딴 일로 갔다가 그 광경에 감격해서 돌아오는 길에 고려대에 들러 총장실 구석에선가 고대 전속 이발사를 불러 삭발하고 그 풍채좋은 수염도 깎아 버렸다. 인상적인 항거였다.

어느 날 길에서 그를 만났다.

“김 목사도 머리를 깎으오!”

나는 농담삼아 말했다.

“당신은 깎는 것으로 항거를 표시했지만, 나는 기르는 것으로 항거할 거요.”

그때부터 나는 머리도 수염도 깎지 않았다. 대뜸 자란다.

몇 오래기 안되는 수염이 입술 위 아래에서 한들거린다. 손이 제절로 그걸 훔치적거리게 된다. 그런 모습으로 캐나다에 온 것이었다.



[각주]
1. 엄달(嚴達) - 명령이나 지시 따위를 엄중히 전달함

[범용기 제3권] (26) 1974. 1. 8 긴급조치 - 민주수호 청년협의회

민주수호 청년협의회

- 재판 방청 -

이렇게 약 40일을 지냈다. 신 형사 드나드는 것도 뜸해졌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유난스레 따라다니는 것 같지 않았다.

1974년 2월 15일, 민청사건 재판에 있대서 함석헌, 천관우, 정수일 등이 방청하러 갔다. 검사 논고란 것이 참말 우스웠다.

“○○의 집에는 백남운[1]의 ‘조선경제사’[2]가 책꽂이에 있었습니다. ○○에게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있었습니다.”

‘서적수입상’하는 젊은이도 같이 잡혀 있었다. “왜 불온서적을 수입 유포했나?” 하고 검사던가 판사던가가 묻는다.

“저는 불법으로 수입한 일이 없습니다. 구입하려는 서적 List를 심사위원회에 제출해서 허가된 것만을 다시 문교부에 신청해 허가되면 그 List대로 주문합니다. 그래서 책이 도착하면 그 책 내용을 검사하는 검열관에게 가져갑니다. 검열관이 통과시킨 책만을 서점에서 팝니다. 통과 안된 것은 그 자리에서 검열관이 압수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도매금으로 “빨갱이”, “이북간첩”이 되는 것이었다.

그날에는 심문만으로는 끝났다.

나오는 길에 어느 다방에서 함 선생과 천관우와 나 셋이서 차를 마셨다. 그것이 그 그룹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나는 국내의 질식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국외에서 포위작전을 해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각주]
1. 백남운(白南雲, 1895~1979) - 전라북도 고창 출생. 일제강점 하에서 한국의 원시ㆍ고대ㆍ중세의 사회경제에 관한 경제사적 연구에 몰두하여 큰 업적을 남김으로써 한국의 경제사학 발전에 선구자적 구실을 하였다. 1947년 5월에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창설하여 부위원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월북하였다. 월북 후 19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교육상, 과학원 원장(1952년)을 역임하고 1961년에 최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1969년에 최고인민회의 의장, 1974년에는 조국전선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2.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1937)을 말하는 듯

[범용기 제3권] (25) 1974. 1. 8 긴급조치 - 세 번째 자택 연금

세 번째 자택 연금

1973년 12월 19일 재야원로 15인이 서명한 민주개헌 건의와 박정희와의 직접 면담 요청은 아무 회답 없는 대로 해가 저물었다. 우리는 미처 몰랐었지만 결국 1.8 긴급조치[1]란 것이 그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체제 불가촉(타부)”이라는 절대주의가 폭력적인 강권발동으로 나타난다는 예고였다. 김종필이 말한 대로였다. 긴급조치령이란 것은 “계엄령”의 별명인데 “계엄사령관”까지 대통령이 겸임한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 것 뿐이다. 3권[2]이 박정희 한 사람에 쥐어진다. 재판은 군법회의에서 군사재판으로 한다.

장준하, 백기완 등과 종교인 학생들이 아무 영장도 없이 체포 연행되어 변호사도 있으나마나로서 징역 10-15년의 중형에 처해진다. 김지하에게는 사형이 언도됐었다.

어떤 횡포에도 국민은 말을 못한다. “부비판 절대복종”만이 생존의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김지하”는 15인 선언 때, 장준하는 백만인 서명운동 때 마감으로 만남 셈이다. 김지하는 “구리 이순신”[3]을 등사판으로 긁어 몇 부를 내게 갖고 왔었다. 아마도 수유리 내 서재 어느 구석에 박혀 있을지도 모른다.

1974년 1월 9일 새벽에 신 형사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24시간 꼭 모시고 있으래서 왔습니다.” 진짜, 그는 밤에도 안가고 내 옆에서 잘 모양이었다. 집에 아이들이 작은 사잇방에 이부자리를 펴주고 불도 때어주고 해서 잘 자고 아침에 나갔다. 그러나 그에게 나를 ‘모시는’ 일 이외에 딴 업무가 주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안에는 성북서 신 형사가 와 있었지만, 밖에도 검정차가 둘이나 지키고 있었다. CIA와 CID라고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는 없어졌다. 길옆 2층 다방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외출할 때면 짚차도 따라나선다. 내가 주로 택시를 이용했기 때문에 뒤따르기가 편했던 것이다.

나는 아침에 부근 공동목욕탕에서 아침 목욕을 즐기는 버릇이 있다. 좀 더럽긴 하지만, 거품처럼 뜬 남의 때를 조리[4]로 후려내면 꽤 깨끗해 보인다.

뜨거운 물에 목까지 담그고 땀 날 때까지 몸을 녹인다. 온 몸이 거듭난 것 같이 가볍고 개운해진다.

하루는 밖에서 나를 지키는 헌병사령부 사람이 책임상 자기도 목욕집까지 같이 가야겠다고 했다. 자기는 탈의실에서 기대리겠다는[5] 것이었다. 그러라고 했다.

나는 그런 건 아랑곳 없이 몸녹이는 재미를 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 그도 욕탕에 들어왔다.

“왠 일이오?” 했더니 “암만해도 욕탕에서 누구와 밀담하는 것 같아서 따라들어왔습니다” 한다.

내가 손녀 “명은”을 안고 이른 아침 산책을 하노라면 중간쯤에서 그가 나타나 같이 걷는다. “어떻게 여기서 만나게 됐는고?” 하면 “박사님 신변을 보호해 드려야 하잖습니까!” 한다.

사람이 늘 바뀐다. 이번에는 좀 험상궂은 얼굴이다. 그러나 맘성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저인들 좋아서 이러겠습니까? 박사님 죄송합니다. 애새끼들 먹여 살릴려니 이런 죄스러운 일을 하게 됩니다….”



[각주]
1. 긴급조치(緊急措置) - 1972년 개헌된 대한민국의 유신 헌법 53조에 규정되어 있던,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를 말한다.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이 조치를 발동함으로써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제1호를 시작으로 총 9차례 공포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1980년 10월 27일 헌법이 개정되면서 폐지되었다.
2. 삼권(三權) -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아울러 이르는 말
3. 1970년대 초 김지하가 쓴 희곡
4. 조리(笊籬) - 쌀을 이는 데 쓰는 기구
5. 기대리다 - ‘기다리다’의 방언

[범용기 제3권] (24)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대화의 광장?

대화의 광장?

국무총리 김종필은 기독교협의회 김관석[1] 총무를 통해서 기독교회 중진들과 대화의 광장을 가져보자고 자주 교섭해 온다고 했다. 나는 박 정권 일방통행인데 대화는 무어고 광장은 무어냐고 일소에 붙였다. 그러나 몇 달을 두고 하도 그래샀는다니 그럼 어디 만나보자고 김 총무가 말을 건넨다. 그럼 만나기로 하되 총리관저 아닌, 어느 중간 장소에서 우리가 선정한 몇 분과만 만나자고 했더니 좋다고 했단다. 그래서 1973년 12월 11일엔가 만나 보기로 했다.

김관석, 박형규, 김정준[2]과 김재준 네 사람이고 저쪽에서는 김종필 단독이었다.

김종필이 귀빈 만나는, 삼청동의 궁궐 같은 한옥 객실에서 모였다. 김종필은 그 머리말에서 “무슨 비판이든지 맘대로 하되 체제만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우리는 “그럼 우리는 별로 할 말이 있을 것 같지 않소”, “모든 문제가 체제 때문에 생기고, 체제 속에서 나오는데 체제를 건드리지 않고서 무슨 문제발굴이나 해결책이 있겠소!”

김관석과 박형규는 신상관계로 별로 발언하지 않았으나 김정준과 나는 노골적으로 말해버렸다. 박과 김도 공감이란 표정을 보였다. 김종필은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이렇게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제발 체제는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건드렸다가는 참혹한 유혈극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 때문입니다….”

“기독교회인으로서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것이 ‘신앙고백’인데 형편에 따라 신앙고백을 달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정치 문제 이전에 신앙문제입니다….”

김종필은 서로 ‘핀트’가 맞잖는 ‘대화’를 더 오래 끄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마감쯤 되어 CIA 무어라는 무표정하고 뚱뚱한 인물이 김종필 옆에 나와 앉는다.

김종필은 그가 정보부 무슨 책임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듣기만 했고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공갈”[3]용인 것 같았다.

헤어질 때 김종필은 섬돌[4] 아래까지 내려와 작별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그의 비서에게 - “목사님들은 아주 강경한데! 더 어쩔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하더라는 것이다.



[각주]
1. 김관석(金觀錫, 1922~2002) - 함경남도 함흥 출생. 함흥제이보통학교를 거쳐 능인학원이라는 불교 사찰의 부속 학원에서 불교의 교리와 염불 암송하는 법을 배웠다. 이후 캐나다 선교부가 운영하는 함흥영생중학교(교장 김관식 목사)에서 수학하였다. 세례를 받고 신학 공부를 결심하고 김형숙 목사의 추천으로 일본 오사카에 있는 중앙신학교에 응시하였으나, 목회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낙방하였고 1년 후 도쿄에 있는 일본신학교에 진학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해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해방 후에 귀국하였다. 함흥남부교회에서 활동하다가 1947년 월남하였다. 1947년 조선신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한 후 송창근 박사의 권유로 조선신학교 여자신학부를 맡아 육성하였다. 1948년 승동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동경에서 함께 공부하던 유관우, 장하구,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지동식, 전경연, 전택부, 박봉랑, 한철하 등과 함께 복음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김재준, 박봉랑, 김정준, 정대위 목사와 함께 조선신학교 재건에 힘썼다. 그때 기독교서회 총무인 김춘배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서회에서 일했으며 미국 시라큐스 대학, 유니온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1966년). 196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1968~1980)로 선출되면서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기독교방송 사장(1980~1989), 새누리신문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2. 김정준(金正俊, 1914~1981) - 해방 이후 전국신학대학협의회 초대 회장, 한국신학대학 학장 등을 역임한 목사, 신학자. 호는 만수(晩穗). 부산 출신.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를 거쳐, 캐나다의 임마누엘 신학교,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고,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9년 한국신학대학 구약학 교수, 1961년 한국신학대학 학장, 1963년에는 연세대학교 교목실장 겸 구약학교수, 1964년에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장, 1970년에는 한국신학대학 학장을 다시 역임하였다. WCC 세계신학교육기금(TEF) 한국대표, 대한기독교서회 편집위원장과 이사,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교회 신학과 교육 발전,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는 ‘관에서 나온 사나이’라는 별명처럼 폐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고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으며, 1981년 2월 지병으로 소천했다.
3. 공갈(恐喝) - 공포를 느끼도록 윽박지르고 을러댐
4. 섬돌 – 집채와 뜰을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든 돌층계

[범용기 제3권] (23)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장준하의 100만인 서명운동

장준하의 100만인 서명운동

이 모임 명단에서도 장준하 이름은 빠졌다. 역시 민주통일당 최고위원 중 한 사람이란 것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함석헌, 계훈제 등도 장준하 이름을 명단에 넣으려고 제의했었으나 천관우가 적극 반대여서 퇴장소동에까지 격화되었었다.

장준하가 고요히 물러나갔다.

장준하가 민주개헌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기했다. 이것은 원로회의 직후 장준하가 개인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천관우가 자기 집에서 함석헌과 나를 만찬에 초대했을 때 장준하가 먼저 천관우 집에 와서 백만인 서명운동에 서명해 달라고 했다. 우리는 물론 이의 없이 서명했다.

그런데 그 서명운동이 어느 정도까지만 진전하다가 현저하게 좌절되었다. 그것은 장준하 개인의 정치 수단에 이용될 우려가 있다는 여론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취지서에 보면 발안자는 민주통일당 최고위원 장준하로 되어 있고 발기인 명단도 아무 것도 없었다. 발안자의 제의에 찬동한 서명자 명단이 무순으로 발표된 것 뿐이었다.

서명운동이 진척되지 않자 장준하는 우리 집에 찾아와서 사연을 말하고 상담했다. 그래서 그 취지서 문구를 얼마 고치고 장준하 이름을 맨 먼저 쓰되 “타이틀”은 빼고, 그 아래 열거되는 서명자들 중에서 약 30명을 발기인으로 하고 그들과 합석한 가운데서 기자회견을 하라고 해 뒀다. 그 30명 중에는 물론 함석헌, 김재준, 천관우 등의 이름이 들어있다.

그는 그렇게 했고 기자회견도 했지만, 그 자리에 나는 나가지 않았다. 기자들과의 문답에서 “왜 윤보선[1] 씨 이름이 빠졌느냐”는 질문이 있었던 모양인데 장준하는 “그이는 전직 대통령이신데 원로로서의 위신상 박정희에게 ‘청원’하는 글에 서명을 청하기는 죄송스러워서 그랬다”는 뜻으로 대답했던 것이라 한다.

그런데 신문기자는 윤보선 씨를 고의로 제외한 것 같은 “뉴앙스”로 기사화했던 것이란다. 그것이 윤보선 씨의 노여움을 샀다고 들었다. 사전에 윤보선 씨와 상의하지 않은 것은 장준하의 실수였다고 본다.

윤보선 씨는 말했다.

“그랬든 저랬든, 그런 중대한 국민운동을 전개하면서 내게도 알려야 할 것이 아닌가. 한 번 알리지도 않고서 기자들에게는 마치 내가 박정희 눈치보며 살기나 하는 사람인 것 같은 인상을 퍼뜨렸으니 그런 고이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전직 대통령이라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민주 개헌운동에 서명해야 할 것이 아니냐?” 했다고 들었다.

장준하는 외국기자들에게도 발표하고 그 자신의 선언문을 일본에 잠입시켜 일본에서 대대적으로 발표하게 했다고 한다.

어쨌든, 장준하의 백만인 서명운동은 다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대로 둔다면 한 달 안에 백만 명을 돌파할 기세였다. 학원과 교회에서 전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은 장준하와 백기완[2]을 구속했다.

바로 일주일 전에 발족한 민주원로회의에서는 장준하를 사무국장으로 선임했고 금후의 모든 재량권을 사무국장에게 맡긴다는 보장까지도 붙여 주었던 것이다.

장준하가 백만인 서명운동을 원로들에게 제의했더라면 으레 찬성을 받았을 것이고 원로들의 결의대로 사무국장이 집행하는 형식을 취했더라면 혼자서 액운을 떠멜 필요도 없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15인 민주선언 때에 의식적으로 자기 이름을 뺐었다는 데 대한 심리적인 유감도 있었을 것이고 해서 이번에는 단독행위로 나선 것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했다.



[각주]
1. 윤보선(尹潽善, 1897~1990) - 호는 해위((海葦). 충남 아산에서 윤치소(안동교회 장로)와 이범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촌형으로는 윤치호가 있다. 1915년 18세 때 민영환의 6촌이었던 민영철의 달과 결혼하였고, 1917년 상해로 건너가 신규식을 만난다(신규식이 윤보선에게 ‘바다갈대’라는 의미의 해위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미래 지도자의 양성 차원에서 신규식, 신익희 등의 권유로 1921년 영국으로 건너가 우드부룩 칼리지, 옥스퍼드대학, 에든버러 대학 등에서 공부하였다. 해방 이후 한민당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민중일보를 인수해 사장이 되었고, 이승만을 적극 도왔다. 정부 수립 이후에 제2대 서울시장에 발탁되었을 때, 여성신학자 공덕귀와 재혼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이승만과 결별하여 야당으로 활동하게 된다. 1960년 4ㆍ19 혁명 이후에 민주당의 구파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던 윤보선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신파인 장면을 총리로 지명하였다. 5ㆍ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와 대결한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15만여표 차이로 패배하였고, 그 이후 본격적인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1967년, 제6대 재통령 선거에서 다시 박정희와 맞붙었지만 115만여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윤보선은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의 단일화를 주선하였으나 실패하고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였다. 이후 1980년 이후 제5공화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고, 1987년에 노태우 후보를 지지해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2. 백기완(白基琓, 1932-2021) 1932년 황해도 은률군 출생. 1946년 황해도 일도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해방 이후 월남했다. 정규교육과정은 거치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공부했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여했고,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고 민주화운동에도 뛰어들었다. 1973년 유신헌법 개정 청원 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1975년에는 양일동, 김동길과 장준하 장례식을 주관하고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후보로 출마하여 김영삼, 김대중의 후보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하였다. 정치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통일운동과 진보적 노동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범용기 제3권] (22)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재야 민주원로들 모임

재야 민주원로들 모임

1973년 12월 13일 YWCA 알로하홀에서 모인 ‘민주원로회의’도 사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간부들이 주최한 것이었다. 이 모임이 실현되기까지에는 장준하가 무던히 수고했다.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도 나왔다. 신교측에서는 한경직을 나오게 할 작정으로 그 임무를 내가 맡았다. 두어번 찾아갔었고 모이는 당일 오는 길에 들러서 데리고 나왔다. 이분들이 정계의 원로라지만 과거의 경력으로 볼 때에는 정적(適)이던 쓰린 기억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계로 치더라도 가톨릭과 신교, 유교, 천도교, 불교 등등의 다른 충성대상을 갖고 있는 분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다는 그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훈제가 사회하고 천관우가 취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내가 인사말씀이라고 했다. ‘말씀’이래야 간단한 것이었다. “민주한국이 독재에로 급전직하[1]하는 위기에 있어서 민주정치의 원로되시는 분이 한자리에 모일 기회라도 마련되기를 바라왔습니다. 그 우리의 숙원이 이루어져서 오늘 이렇게 모실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여러 어른들을 한자리에 모시게 되는 순간, 우리 임무는 끝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모임입니다. 말씀들 하십시오.” 했다. 한참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어느 분인가가 말을 꺼냈다.

“이렇게 모일 기회란 좀처럼 만들기 어려운 건데 주최하신 분들의 수고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왕 모였으니 우리 서로 기탄없이 얘기해 봅시다” 한다.

그리고 “회 진행을 위해서 좌장을 한 분 모시기로 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는 백낙준 박사가 최연장자신데 백 박사님 사회하시지요.”

만장일치였다.

결의된 중요사항은 -

① 자유민주한국을 회복하려는 우리의 목표는 더 토론할 것도 없는 명제로 채택하고

② 우리 낫살[2]이나 먹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또 성명서나 내고 헤어진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니 박 ‘대통령’에게 직접 면담을 요청하자.

③ 그러나 면담이 허락된 때에도 이쪽에서 말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 대비하여 우리의 말하려는 내용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동시에 제출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등등이었다.

제3항의 얘기는 김수환[3] 추기경이 자기 경험에서 하는 말이었다. 김 추기경은 세 번 박정희와 만났는데 세 번 다 ‘박’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한다. 한 번은 진해에서, 두 번은 청와대에서였는데 세 번 다 식사를 같이하자는 것이었다. 교회로서의 반정부운동이 표면화한 무렵이었는데 진해별장에서 일부러 초청이 왔었다.

식사시간에 식탁에서 만나도록 짜여 있는 ‘프로’였다 한다.

식탁에 앉아마자, 박정희 씨는 자기 얘기를 끄집어낸다. 시국담에서 시정방침에서, 얘기는 그칠 새 없다. 손님은 말 끄어낼 짬이 없게 군다. 그래서 듣기만 하다가 ‘박’의 얘기 끝날 무렵이면 비서장인가가 들어와서 “각하! ○○ 가실 시간입니다” 한다. ‘박’은 “오, 그래?” 하고서 자리를 뜬다. 그 밖에도 두 번 청와대 초청에 응했었는데, “이번에는…” 하고 말할 항목을 외이다싶이 해 갖고 들어간다. 그러나 여전하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면담’했다는 실속없는 선전재료에 이용되지 않기 위해서 미리 서면진술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말했다.

“신문사에서는 그때마다 김 추기경이 박 대통령과 직접 면담했다. 박 대통령은 추기경을 만찬에 초청하여 단독회담했다… 등등으로 보도된다. 그래서 가톨릭은 ‘친여’로 변질된 것 같이 보이고, ‘박’은 기독교에 관대하다는 인상을 받고… 이래저래 ‘나’만 손해보고 이용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그럴듯해서 문서기초위원과 면담위원을 선출했다. 기초위원으로서는 천관우, 김재준, 유진오[4]가 선출되고 면담위원으로서는 유진오, 함석헌, 이인[5], 백낙준[6], 김수환 등이 선출되었다.

초안은 곧 작성되었다. 천관우가 기초하고 김재준, 유진오가 수삼차 검토하고 마감으로 면담위원들과 최종검토를 했다. 유진오 씨는 법률가니만큼 무척 신중하고 단어 선택에 정확을 기하는 것이었다. 수정에 수정을 가했지만, 자구와 용어 문제였고 내용이 고쳐진 것은 아니었다.

마감으로 면담위원들과 검토할 때에는 유진오가 축조 낭독하며 검토를 받는 책임을 졌다. 그때에는 주로 ‘이인’ 씨가 비판을 했다. 그분도 법률전공이라 허술한 데가 없었다. 주목되는 것은 우선

① “탄원서”라는 용어가 제거됐고,

② “박대통령 각하에게”라는 구절도 제거되었다.

“각하”가 다 뭐냐는 것이다.

“건강을 빕니다…”도 빼버렸다. 마감에 붙이는 인사 “하나님의 축복을 빕니다…” 등도 물론 제거됐다.

글 이름은 진정도 탄원도 아닌 “건의서”로 되었고, 우리의 건의내용 이외의 다른 아무 군소리도 섞이지 않았다.

이것을 장지에 활자로 인쇄하여 15인 연서로 청와대에 갖고 가기로 했다.

면담신청은 절차대로 제출됐지만 아무 화답도 없었다. 그래서 1973년 12월 19일에 이미 준비된 건의서를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직접 수교했다.



[각주]
1. 급전직하(急轉直下) - 사태나 형세가 갑자기 바뀌어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진행됨
2. 낫살 – 지긋한 나이를 낮잡아 이르는 말
3. 김수환(金壽煥, 1922~2009) - 본관은 광산(光山). 1922년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다. 조부 김보현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는 김영석, 어머니는 서중하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졸업, 1947년부터 1951년까지 가톨릭대 신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66년 주교, 1968년 대주교,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4. 유진오(兪鎭午, 1906~1987) - 호는 현민(玄民).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 1926년 4월 동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였다. 1929년 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33년부터 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 1937년에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중일전쟁 이후에 친일활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문인의 길을 접고, 교육자, 법학자,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기초위원으로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였고, 1953년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다. 1966년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는데, 1967년 1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에서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하고 자신은 총재로 취임했으며, 7대 국회의원에 종로구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5. 이인(李仁, 1896~1979) - 호는 애산(愛山). 일제강점기 의열단 사건, 광주학생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안창호 사건 등을 맡은 법조인. 초대 법무장관이 되었으나 이승만과 뜻이 맞지 않자 물러났다.
6. 백낙준(白樂濬, 1895~1985) - 1985년 평북 정주군 관주면 출생으로, 장로교 목사이며 역사학자로 호는 용재(庸齋)이다. 1913년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신성학교 교장인 매큔(G. S. McCune)의 도움으로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1916년 9월). 매큔의 모교인 미주리 주 파아크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하고(1922년 6월), 미국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에 들어가 1925년 9월 졸업하였다. 바로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대학원에 입학해 종교사학을 전공하여 1927년 「조선개신교사」로 예일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 교장, 연희대 총장, 연세대 총장,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문교부장관에 취임 후 교육행정가로 활동하였다. 1960년 4ㆍ19 의거 이후 참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8월 초대 참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6년 9월 민중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고사하였고, 1967년 민중당과 신한당 양당의 합당추진을 지지하면서도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1980년 2월 국정자문회의 위원, 1983년 2월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였다. 1985년 1월 13일 사망하여,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범용기 제3권] (28) 1974. 1. 8 긴급조치 - 정체불명의 손님

정체불명의 손님 하루는 교회관계를 맡았노라는 치안국 요원이 찾아와서 “교회사찰을 맡으래서 나왔습니다만, 저는 교회가 뭔지 전혀 모릅니다. 어떻허면 좋을지 좀 가르쳐 주세요” 한다. “교회를 ‘사찰’하노라고 애쓰지 말고 교회는 교회대로 가만 두는 게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