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 김재준의 『낙수』(落穗)
學窓餘祿(학창여록)
實在(실재)의 探求(탐구) - 傳道書讀後感(전도서독후감)
斷想(단상)과 祈願(기원)
다양한 지식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實在(실재)의 探求(탐구) - 傳道書讀後感(전도서독후감)
- 본 내용은 김경재 교수가 집필한 『김재준 평전』(2001)에 수록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함북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꼴마을에서 김호병 씨와 채성녀 씨의 2남 4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남
서당 훈장이셨던 부친으로부터 『천자문』, 『통감』,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을 읽고 몸에 익히면서 가풍을 따라 유교의 세계에서 소년 시기를 자람
9살 때 경원 향동소학교 3학년에 편입, 고건원보통학교를 마치고, 회령 간이농업학교를 졸업(13~16세)
회령군청 간접세과 고원으로 취업
18세 때 장석연 씨의 맏딸 장분여와 결혼. 이후 일생을 해로하면서 3남 3녀를 낳고 기름
회령군청에서 웅기 금융조합 직원으로 전직. 웅기에서 만주, 시베리아로 망명하는 애국 지사들을 수시로 보며 가냘픈 민족 의식이 싹트기 시작
웅상 출신 청년 전도사로 서울 남대문교회 송창근 전도사의 방문을 받고, 나라와 교회를 생각하고 뜻을 품음. 웅기금융조합 사직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남
중동학교 고등과에 편입. 서울 YMCA 영어 전수과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이상재ㆍ윤치호ㆍ신흥우 등의 강연을 듣고 신문화 흡수에 전력함. 톨스토이와 성 프란시스 전기 등을 탐독하고 청빈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음
승동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연합 사경부흥회 때,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믿기로 결심하고 회심을 경험함. 믿은 지 3년 후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함북 경흥에 귀향하여 용현소학교, 귀낙동소학교 신아산소학교에서 교사로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침
일본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에서 고학하면서 자유로운 학풍에서 신학 공부. 1928년 아오야마 신학부 졸업. 기독교 사상과 신앙을 주축으로 한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칠 것을 설계함. 졸업반 때 귀향하여 두만강 유역 교회를 순방 강연함
미국에 유학함. 1928년 9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업하고, 1929년 9월 미국 웨스턴 신학교에 편입학. 같은 학교에서 1932년 5월 신학사(S.T.B), 1932년 5월 신학석사(S.T.M) 학위를 받음. 미국 경제 공황에 직면하여 귀국함. 미국 유학 시절 송창근, 한경직과 특별한 신앙 동지로서의 우의를 굳건히 함
귀국 후 평양에서 3년을 지냄. 1933년 4월 숭인상업학교 교유에 취임하고, 평양 산정현교회 집사직으로 봉사하다가 1933년 8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講道師) 인허를 받음. 1936년 4월 신사 참배 문제와 민족 교육 금지 문제로 숭인상업학교 교유직을 사임함. 이 무렵 순교자 열전 연구에 몰두함. 평양 3년 머무는 기간 동안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등 젊은 소장 학자들은 평양신학교 신학 연구지 『신학지남』에 기고자로 관계를 맺게 되고, 유형기 박사의 『단권 성경 주석』 번역자로서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세 사람 연서로 성명서를 냄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에 봉직하면서 3년을 간도에서 청년 교육에 힘씀. 1936년 8월, 은진중학교 교유에 취임. 1937년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받음. 1937년 5월부터 1938년 2월까지 월간 『십자군』을 발간함
조선예수교장로회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평양신학교가 폐쇄됨
서울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의 재정을 기반으로, 조선신학원 설립 기성회가 발족(김대현, 송창근, 김영주, 차재명 중심) 설립 사무 실무 책임자로 김재준 목사가 간도 은진중학을 사임하고 설립 사무를 전담하여 추진
조선신학원이 경기도 도지사 인가로서 승동교회에서 개교. 설립자 겸 원장에 김대현 장로, 이사장에 함태영 목사, 교수로서 윤인구, 김재준 임명
일제 말기 조선신학원 끝까지 지킴. 일제에 의한 관제 『조선 혁신 교단』 시절(1942)과 조선신학원과 감신의 『합동 강의』 기간 동안에도 조선신학교 교장으로서(1943~46) 학교를 지킴
해방의 기쁨과 함께 8월에 「기독교 건국 이념」 집필 발표. 9월에 천리교 본부 건물을 미군정청으로부터 인수 불하받아 동자동 교사 시대 교수로 일함. 12월에 경동교회를 설립함
송창근 박사가 제4대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고, 김재준은 한경직과 함께 교수가 됨. 6월 장로교 남부 총회에 의해 총회 직영 신학교로 지정
『십자군』을 속간하여 1951년 8월까지 속간 30호 발간함
6ㆍ25 동란으로 같은 해 8월 송창근 학장 북으로 피랍. 1951년 3월 부산 피난 전시 대학 개강. 부산 항서교회당 및 남부민동 임시 천막 교사에서 수업.
학교명을 한국신학대학으로 변경, 김재준 목사 학장 서리에 취임
장로교가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분열. 장로회 37회 대구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직 파면 선언, 한국신학대학 총회 인준 취소, 한신 출신 교회 취임 거부, 이미 위임된 한신 출신 목사들의 노회 재심 등을 불법적으로 결의. 대구 37차 총회의 불법성에 저항하여, 같은 해 6월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장로회 38회 호헌총회를 개최. 기독교장로회 탄생
서울 환도 후 동자동 교사에서 학장 서리 겸 교수로서 봉직
1957년 12월,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새 캠퍼스로 입주. 김재준 목사 제6대 학장으로 취임. 캐나다 연합교회 초청으로 순회 답방(1958.8~1959.9)
밴쿠버에 소재한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립대학교 유니온 칼리지에서 명예신학박사 수여받음
5ㆍ16 군사정변으로 군사 정권에 의해 60세 정년제 강행으로 동년 9월 한국신학대학 학장직 및 교수직에서 강제 퇴임. 쌍문동 국민주택으로 이주함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이 됨
한국신학대학 명예학장으로 추대됨. 9월에 기독교장로회 총회 총회장으로 추대됨. 한신학원 제7대 이사장으로 피선(1966.9~1970.9)
한ㆍ일 굴욕 외교 반대 국민 운동을 한경직 목사와 주도하여 영락교회에서 대중 강연, 교회의 대사회 참여 운동 시작
월간지 『제3일』 창간. 박형규, 현영학, 서광선, 이문영,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등이 동인으로 참여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장이 됨. 12월에 유신헌법이 발포됨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장으로 추대됨.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김재준, 함석헌, 천관우, 지학순, 이병린)
캐나다로 출국. 11월에 북미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직 수임(2회 연임)
캐나다에서 『제3일』 속간. 1981년 6월호까지 속간 60호 발간
북미주한국인권수호협의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됨
귀국
전국 국토 순례. 『재야 원로 모임』에 참여하여 민주화 운동과 평화 통일 운동을 지속함
고문으로 살해당한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발기인이 됨.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유언으로 남김
서울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에서 87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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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40~45.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1권, 125~131. (여기에는 旅記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十二月(12월) 十七日(17일), 싸늘한 바닷바람에 옷삭 떨며 釜山驛(부산역)에 나리니 어떤 늙은 할머니 한분이 따라 나렸으나 어디 갈줄 몰라 망사리고 있기에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주머니 끈을 풀고 封套(봉투)조각을 끄집어낸다.
「凡一町(범일정) 三八四番地(384번지)」
나도 처음이라 지향을 몰르는 터이므로 驛派出所(역파출소)에 물으니 向(향)하여 右便(우편)으로 가는 電車(전차)를 타고 終點(종점)에 가서 나리라는 것이였다. 終點(종점)에서 나려서 또 派出所(파출소)에 들어 가니 踏切(답체)[2]를 건너 한참 가다가 또 派出所(파출소)가 있으니 거기서 물어보라 한다. 무던히 오래 걸어 겨우 그 派出所(파출소)를 찾었더니 바로 저기가 凡一町(범일정) 三八四番地(384번지)이지만 그 番地(번지) 안에 집이 六十戶(60호) 以上(이상)된다고 한다. 벌서 해는 저물어 컴컴한데 이 올랑졸랑[3] 널조각으로 무어지는 개천가 오막사리를 一一(일일)히 뒤질수도 없고해서 그 中(중) 古參者(고참자)라는 집에 들어가 이름을 대이여 어디쯤 되는가 물었다. 개천가로 다섯 번채 집에 가 보란다.
『여기가 三百八十四番地(3백8십4번지) 아모네 집인가요?』
젊은 婦人(부인)이 나오며 『여기는 三百八十四番地(3백8십4번지)가 아니야요』 『그럼 몇 番地(번지)인가요』 『三八四(384) 番地(번지)요』 하고 말시가 當當(당당)하다. 『그렇습니까』 하고 도로나왔다. 番地(번지)는 何如間(하여간) 그집에는 우리가 찾는 사람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었다 할수없이 그 老婆(노파)를 다시 古參者(고참자)라는 광주릿집 主人(주인)한테 마끼고 나는 도로 내길을 걸었다.
집떠난 孫子(손자)를 찾노라고 그렇게 어이없는 길을 떠난 것이였다.
『아이고 나 때문에 이렇게 手苦(수고)하시고 이 恩功(은공)을 무어로 갚으리까. 아이고 고마운게요 고마운게요!』
하며 진심으로 치사를 한다. 古參者(고참자)라는 그 사람은 침대 광주리를 틀어파는 사람인 모양인데 素性(소성)이 어떤 친구인지도 몰르고 그 어쩔줄 몰르는 老婆(노파)를 마낀 것을 나는 그윽히 不安(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차라리 派出所(파출소)에 맛겼더면 하고 아주 멀리까지 와서야 생각나서 도로 갈가하다가 그만두었다.
내가 가려는데는 佐用町(좌용정) 七九六(796) 宋兄(송형)이 寓居(우거)하는 聖貧庵(성빈암)이다. 山(산)등상이에 있다는데 어두운 첫길이라 알길이 漠然(막연)하였다. 또 派出所(파출소)에 들어갔다. 한참 調査(조사)를 받었다.
마침 그 派出所(파출소) 給仕(급사)[4] 노릇하는 열 살쯤 된 少年(소년)이 내가 案內(안내)해 주마고 自請(자청)한다. 나는 懷中傳燈(회중전등)을 하나 사가지고 그 少年(소년)을 딸어 섰다.
『나두 예배당 당겼어요, 주일학교도 잘 다니고. 그랬는데 二年前(2년전) 이 派出所(파출소) 給仕(급사)로 들어온 다음부터는 이럭저럭 못나가게 되어서 인저 하나님 은혜를 작구 잊어 버려요』 하고 이 少年(소년)은 아주 어른답게 이야기를 부친다. 찾는 내가 牧師(목사)요 찾어가는 宋兄(송형)이 또한 牧師(목사)라니까 마음 그윽히 이전 생각이 나서 아마 自願手苦(자원수고)하는 모양이었다.
山(산)등상이에 올라가서 이집 저집 傳燈(전등)을 빗최가며 門(문)패를 조사하다가 마침 目的(목적)한 宋兄(송형)의 庵子(암자)을 發見(발견)하자 그 少年(소년)은 어느틈에 벌서 쏜살같이 달어나 어둠 속에 사라지고 말었다. 나는 고맙다고 치사할 틈도 없었다. 그는 가장 純粹(순수)한 好誼(호의)에서 나온 그의 奉仕(봉사)에 어떤 傷處(상처)를 받을가 두려워한 것이였다.
나는 그 少年(소년)이 무척 귀엽고 고맙게 생각되였다.
十二月(12월) 十九日(19일). 宋兄(송형)과 함께 釜山(부산) 복판을 걸어 龍頭山(용두산)에 올라가 우아래를 바라보았다. 스탄리 쭌스의 有名(유명)한 말 『不可避(불가피)를 福音化(복음화)하라』한 그길 밖에 남은 거 없다. 肉身(육신)으로 가난한 者(자)에게 靈(영)으로 富(부)하게 하는 그것이다. 一簞食(일단사), 一瓢飮(일표음)[5]으로 在陋巷(재누항)[6]이라도 不改其樂(불개기락)[7]하는 道心(도심)이 있으면 그는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者(자)일 것이다.[8] 이것이 돌아 右(우)편 앞으로 하여 落伍者(낙오자)가 前頭(전두)에 서는 奇蹟(기적)이다.[9]
사람들은 잠간 서서 自己(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를 좀더 깊히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저 분주히 달음질 친다. 그런 것은 한가한 선비들께 맡겨두자. 우리는 돈을 追求(추구)한다. 우리는 勢力(세력)을 獲得(획득)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집은 높아지고 그들의 밭은 넓어지고 그들의 돈지갑은 퉁퉁해진다. 그러나 그러므로 그들은 富(부)한가? 그들은 有力(유명)한가? 그들의 內面生活(내면생활)은 食慾(음식) 以外(이외)에 다른 것이 없고 교만이 마음의 王座(왕좌)를 占據(점거)하였으니 無慈悲(무자비)가 그 찬바람을 뽑고 있을 뿐이다. 天下(천하)를 차지한다 한들 그의 內面生活(내면생활)이 空虛(공허)하면 무엇이 有益(유익)하랴. 그는 모든 것을 가졌으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者(자)이다.
宋兄(송형)의 말을 듣건대 그가 兩年(양년)[10]동안 이곳 저곳에다가 託兒所(탁아소), 幼稚園(유치원), 無産兒童學院(무산아동학원), 施療所(시료소) 等(등)을 設置(설치)여 아이들을 건사하기 始作(시작)했는데 그 아이들은 勿論(물론), 그 아이들 부모에게까지 福音(복음)의 손은 至極容易(지극용이)하게 닿을 수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 事業設置(사업설치)했던 곳마다 지금은 敎會(교회)가 新設(신설)되어 當當(당당)히 自立(자립)한 곳도 數個所(수개소) 있다 한다.
『兄弟(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世上(세상)의 가난한 者(자)를 擇(택)하여 믿음에 豊盛(풍성)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者(자)에게 허락하신 나라의 後嗣(후사)가 되게 하시지 않으셨느냐』(야고보 2:5)한 聖句(성구)가 생각난다.
우리에게 傳道(전도)의 熱誠(열성)이 없으며 도 傳道(전도)의 方法(방법)에 拙(졸)하여[11] 그들의 心情(심정)에 미치지 못한 恨(한)은 있을망정 그들 自身(자신)은 그리 막힌 사람들이 아니다.
茶(차)를 마시고 다리를 건너 絶影島(절영도)의 그늘을 밟았다. 날은 따스하고 바닷물은 푸르다. 뱃사공들의 그물 걷는 노래가 기운차게 울려온다. 고요한 牧場(목장) 위에 봄구름처럼 흘러가는 牧歌(목가)도 좋지만 여기여차 저어가는 波浪(파랑)[12]위의 漁歌(어가)도 굳센 情趣(정취)가 버리기 어렵다.
한참 가노라니 온통 술집과 私娼(사창)들만 사는 거리가 展開(전개)된다. 보기에 지긋지긋한 野俗(야속)[13]스럽게 肉感的(육감적)인 젊은 女子(여자)들이 길모퉁이에 서 있다. 우리는 조그마한 구멍가게 모양으로 된 藥房(약방) 비슷한 집에 들어갔다. 그 가게 主人(주인)은 C라는 中年(중년) 傳道師(전도사)라고 宋兄(송형)이 紹介(소개)하였다. 그는 미쳐 人事(인사)도 하기 전에 옷을 주워 입고 나서 우리를 三中井(삼중정) 食堂(식당)으로 인도하였다. 미상불[14] 맘성 좋은 친구로구나 하는 인상을 주는 친구였다. 그는 醫生(의생)으로서 相當(상당)한 經驗(경험)이 있기 때문에 收入(수입)은 어느 醫師(의사)에 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돈벌이 하는 醫生(의생)이라는 이보다도 그 동리 술집 아가씨네의 아버지라는 데에 그의 本職(본직)이 있다 한다. 그는 그곳 警察署長(경찰서장)에게 交涉(교섭)하여 抱主(포주)와 女子(여자)들과의 契約(계약)을 更正(경정)[15]하며 또 機會(기회)있는대로 그 女子(여자)들을 贖(속)하여 새 살림을 차리게 하는 일과 病(병)에 걸리면 내 딸처럼 돌보아 주는 일 等(등)에 그의 收入(수입)의 거의 全部(전부)를 써버린다 한다. 그리하여 그 거리 遊女(유녀)[16]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를 따른다는 것이다. 그는 宋兄(송형)의 聖貧學社(성빈학사) 事業(사업)에도 全力(전력)을 기울여 도왔으며 敎會經理(교회경리)에도 있는 힘을 다 쓴다. 그는 하나님만 알고 돈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생기는 돈을 그날 그날로 다 흩어버리고 그 自身(자신)은 家族(가족)과 함께 如前(여전)히 이 구멍가게의 뒷골방에 不變(불변)의 貧者(빈자)로 지낸다. 다니며 보노라면 아니꼬운 친구도 있지만 이렇게 갸륵한 친구도 많은 것을 감사 안할 수 없었다.
宋兄(송형) 同行(동행). 버스로 海雲臺(해운대)에 向(향)하였다. 똥장구 달구지를 지나고 지나 흰실같이 늘어진 新作路(신작로)에 먼지를 날리며 달아나는 버스여행도 무던히 愉快(유쾌)하였다. 大和室(대화실)이란 旅館(여관)에 들었다. 溫泉(온천) 푸-르에 잠겨 반나절이나 지냈다. 旅館(여관)에도 溫泉休憩室(온천휴게실)에도 20左右(좌우)의 꽃다운 處女(처녀)들이 눈으로 웃음으로 노래로 이야기로 가고 오는 나그네의 피곤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나는 休憩室(휴게실) 煖爐(난로)옆에 가로누어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靑春(청춘)의 感激(감격)을 더듬어 보았다.
靑春(청춘)! 그들의 눈에는 꿈이 서리어 있다. 그들의 가슴엔 詩(시), 그들의 입에는 노래가 있다. 그들의 靈(영)은 부드럽다. 그들은 嫩(눈)[17]한 靈(영)의 觸手(촉수)로 무엇을 붙잡으려고 憧憬(동경)한다.
『妾(첩) 御正月(어정월)[18]を 迎へるのが こわくて ならないのよ』[19]하고 安子(안자)란 키적고 몹시 상냥스럽게 생긴 處女(처녀)가 말한다.
『몇살이냐?』 하고 물었더니
『싫어요!』 하고 목을 움츠리며 돌아 앉다가
『스물하나』 하고 대답한다. 설새기 싫을 것도 事實(사실)이다.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20]이라. 靑春(청춘)은 그리 오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 오래지 않아 시들어질 꽃봉오리를 가슴에 안고 未知(미지)의 世界(세계)의 門(문)앞에 서서 待望(대망)하며 떨고 있다. 人間(인간)으로서 다시 없는 가장 尊嚴(존엄)하고도 안타까운 情調(정조)다.
나는 내 靈魂(영혼)이 벌써 硬化病(경화병)[21]에 걸려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施律(시율)에 맞추어 울리기에는 나의 心琴(심금)은 너무나 굳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永遠(영원)히 靑春(청춘)을 保有(보유)하고 싶다.
『아, 靑春(청춘)의 幸福(행복)이여』 하고 나는 아무 로맨스도 없는 나의 過去(과거)를 돌아보며 쓰린 웃음을 던지었다.
아니다. 나에게도 로맨스도 많았다. 그것은 主(주)님을 向(향)한 로맨스였다. 나는 나의 있는 情熱(정열)을 다 바쳐 主(주)님을 仰慕(앙모)하였다.
앗시시, 푸랜시스의 心情(심정)이 곧 나의 그때 心情(심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近者(근자)에 와서 거의 非人間的(비인간적)이라고 하리만큼 感情(감정)의 痲痺(마비)에 걸리어 있다.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다. 났다, 죽었다, 앓는다, 괴롭다하는 온갖 人間生活(인간생활)의 斷面(단면)이 나에게는 거의 뜬 구름같이 보인다. 좋게하자면 「達觀(달관)」이랄지 모르지만 언찮게 생각하면 아주 鈍物(둔물)[22]이 되고만 셈이다. 이렇게 人間生活(인간생활)의 實感(실감)을 잃고서야 文學(문학)도 宗敎(종교)도 結局(결국) 한 개의 化石(화석)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나의 感激(감격)을 도로 찾아야 하겠다.
12月(월) 20日(일)
宋兄(송형)을 自動車(자동차)로 釜山(부산)에 보내고 나는 停車場(정거장)에 가서 京城行(경성행) 車票(차표)를 샀다. 車票(차표)에 「釜山鎭經由(부산진경유)」라고 했길래 나는 慶州經由(경주경유)로 가야 할텐데 잘못됐다니까 出札係員(출찰계원) 몹시 깔보며 나무람 하였다. 『나는 여기서 京城票(경성표) 달라면 의례 慶州經由(경주경유)로만 되는 줄 알았습니다그려. 몰라 그렇게 했으니 未安(미안)합니다』 하고 紳士的(신사적)으로 될려고 무던히 애써 말씀을 사뢰였다.
그는 더 한층 輕蔑(경멸)히 여기는 모양이어서
『몰라서? 시!』 하고 한참 쳐다보더니 慶州經由(경주경유)로 票(표)를 바꾸어 써서 出札(출찰)밖으로 휙 팽게친다. 큰 大監(대감)이나 된 듯이 뽐내는 것도 꼴사납지만 旅客(여객)[23]에 對(대)하여 그렇게 失禮(실례), 不親切(불친절)한 驛員(역원)은 그대로 둘 수 없다고 골이 머리끝까지 치미는 것을 꿀꺽 참았다. 그러나 어느틈에 벌써 『敎養(교양)없는 건 할 수 없어!』 하고 毒(독)품은 辱(욕)을 중얼거려 버렸다.
『나는 아직도 나를 죽이지 못했어!』
『내가 좀더 큼직했다면 왜 이런데 다 憤(분)을 낼건가』 하고 時間(시간)도 아직 한 時間(시간) 남았길래 혼자 바닷가에 나갔다.
白砂(백사)[24]에 부서지는 고요한 물결, 56島(도) 스쳐가는 흰돛 좋기는 하련만 事實(사실)은 아무 感興(감흥)도 일지 않는다.
『앉으면 海月(해월)이오,
누우면 山月(산월)이라.
가만이 눈감으면
胸中(흉중)에도 明月(명월)있다.
五六島(오륙도) 스쳐가는 배도
明月(명월) 실고.』
한 春園(춘원)의 海雲臺(해운대) 紀行文(기행문)의 一節(일절)이 제절로 읽어진다. 그러나 어렸을 때 春園(춘원)의 紀行文(기행문)에서 읽던 想像(상상)의 海雲臺(해운대)는 아무리 더듬어도 찾을 수 없었다.
나의 눈에 비취는 바닷물, 모래언덕 솔밭, 그리고 논두렁 旅舘(여관)집, 그런 것들은 다만 그런 것들 以上(이상)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마음에 春園(춘원)의 詩(시)가 없으니 海雲臺(해운대)가 나에게 무슨 詩(시)를 주랴! 나는 모래위에 印(인)친 발자욱을 돌아보며 내 靈魂(영혼)의 가을, 꿈이 사라진 내 가슴의 憤怒(분노)을 슬퍼하면서 海雲臺(해운대)를 떠난다.
車(차)는 慶州(경주)를 向(향)하여 달음질 친다. 숨었다 보였다 하는 東海(동해)의 푸른 물결은 진실로 아름답다.
慶州(경주)! 생각만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곳은 나의 聖地(성지)다. 나는 敬虔(경건)한 巡禮者(순례자)다. 午後(오후) 3時(시) 車(차)는 慶州驛(경주역)에 닿았다.
爲先(위선) 安東旅舘(안동여관)에 가방을 들여다 놓고서는 자리에 앉아도 보지 않고 門(문)밖에 뛰어 나갔다.
선물파는 집에 들어가 「慶州(경주)의 史蹟(사적)과 傳說(전설)」이란 册(책)을 사들고 그 옆에 있는 鳳凰臺(봉황대)라는 古墳(고분)(무덤이라기보다 山(산)이라는 것이 더 實感的(실감적)이다)에 올라가 두루 내려다 보았다. 百萬生靈(백만생령)이 욱신북신 하던 古都(고도)인 만큼 그 範圍(범위)가 무던히 넓다.
보아야 할 古蹟(고적)은 五里(5리), 十里(10리), 十五里(15리) 이렇게 東西南北(동서남북)에 두루 널려 있어서 마치 누구의 庭園(정원)이나 漫步(만보)하듯이 아주 재미스럽게 걸어 다닐 줄로만 생각한 나의 幻像(환상)은 아주 깨뜨려지고 말았다. 나는 이틀동안 或(혹)은 自動車(자동차)로 或(혹)은 汽車(기차)로 或(혹)은 徒步(도보)로 巡禮(순례)할 수 있는 데까지 巡禮(순례)하였다. 鮑石亭(포석정)[25], 蘿井(나정)[26], 三體石佛(삼체석불)[27], 五陵(오릉)[28], 半月城(반월성)[29], 石氷庫(석빙고)[30], 始林(시림)[31], 瞻星臺(첨성대), 雁鴨池(안압지)[32], 皇龍寺址(황룡사지)[33] 芬皇寺址(분황사지)[34], 財買井(재매정)[35], 蚊川(문천)[36]가의 허물어진 다리터들, 皇南里(황남리)의 王陵(왕릉)과 祀堂(사당)들 그리고 佛國寺(불국사), 石窟庵(석굴암) 等(등)을 보았다. 이 모든 데에는 千年後(천년후) 王孫(왕손)의 가슴속에 눈물이 맺히게 할만한 由來(유래)와 傳說(전설)이 감돌고 있다. 나는 味鄒王陵(미추왕릉)에 절하고 財買井(재매정)의 물을 마시고 閼英井(알영정)[37]을 들여다보고 始林(시림)의 늙은 나무를 만지며 瞻星臺(첨성대) 돌에 뺨을 대어보았다. 千年前(천년전), 幽靈(유령)들이 이곳 저곳서 뛰쳐나와 나를 에워싸고 춤추는 것 같았다.
1940년 12월 「昭和(소화) 一五(15)」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39~40.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1권, 123~124.
벌써 1年前(년전) 처음 豆滿江(두만강)을 건너 滿洲(만주)에 이르다. 車內(차내)의 銃(총)잡은 兵丁(병정)이 朝鮮(조선)서는 못보던 現象(현상)이다. 그러나 처다 보아도 氣魄(기백)이 없어 무시무시한 感(감)을 주지 않는 것만은 多幸(다행)이랄까. 그 中(중)에는 고단한 몸에 마음조차 풀려서 꿈나라에 逍遙(소요)하는 이도 있다.
어허 저 兵丁(병사) 어인일고
銃(총)잡고 입벌리고 춤흘려 옷 적시네.
두어라 王道樂土(왕도락토)[1]니 맘놓은 들 어떠리.
여기가 龍井(용정)이래서 나려 驛門(역문)을 나오니 馬車(마차)를 타라고 자심히[2] 勸(권)한다. 캄캄한 밤거리를 달리는 幌馬車(황마차)[3]의 搖鈴(요령)[4]소리가 異國風情(이국풍정)을 자아내어 길손의 마음을 애처럽게 군다.
幌馬車(황마차) 지렁지렁 말굽소리 시산하이
캄캄한 밤거리를 마음없이 달리노라.
동무여 流浪人生(유랑인생)이어니 어듸간들 못살리.
어느덧 늦인 가을이 회리바람처럼 지나버리고 눈보래 치는 겨울이 닥처오다. 한번 나린 눈은 깔축[5]없이 왼 겨우내 땅우를 덮고 있다. 집들은 등을 꼬부리고 눈속에 파무치여 마치 큰 무덤을 보는 것 같다. 모도다 草(초)집인 까닭이다.
눈속에 一點黃色(일점황색) 무덤인가 하였더니
굴둑에 연기나니 집일세 分明(분명)하이
그래도 내결레[6] 저기 있다니 찾어보고 가리라.
봄에 꽃동산 여름에 綠陰(녹음)은 예나 제나 一般(일반)이다. 그러나 가을이 되여 沃野千理(옥야천리)[7]에 穀浪(곡랑)이 물결칠때면 『아 진실로 滿洲(만주)는 우리 살 땅이다』 하고 故土(고토)에 돌아온 기쁨을 느끼지 않는 이 없을 것이다.
萬頃(만경)[8] 곡식바다 한울가에 물결치니
물려주신 先塋基業(선영기업) 훌륭도 하옵건만
어찌타 다 팔아먹고 半島(반도)산골 기여든고.
땅이 기름진데 祖上(조상)네 살던 데라. 우리네의 再移住(재이주)란 반가운 일이지만 才勝德薄(재승덕박)[9]하여 欺瞞(기만)과 不敬虔(불경건)이 이땅을 더럽히니 이대로만 나간다면 罪(죄)와 死亡(사망)과 賤待(천대)가 또 다시 우리를 붙잡을 것이다. 嗚呼(오호)라 뜻있는 靑年(청년)은 지금에 힘과 정성을 기우려 그리스도와 그 救贖愛(구속애)를 傳(전)하지 않겠는가? 동리동리마다 祭壇(제단)을 쌓고 勞働(노동)과 禮拜(예배)로 平和(평화)의 동산을 가꾸지 않으려나?
기름진 이 땅 흙이 거륵도 하옵건만
피흘려 적신 것만 千秋(천추)에 恨(한)이온저
동무여 흰옷 흰마음에 손마자 희게 씻고
가는 곳곳마다 聖壇(성단)을 세우과저!
- 10月 20日
- 詩篇(시편) 第八十四(제84) -
『신학지남』 15권 6호, 1933. 11.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421~422.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7권, 280~282.
萬軍(만군)의 여호와여 당신의 게신곳은 참말로 情(정)답습니다.
내 靈魂(영혼)은 기막히게도 여호와의 殿堂(전당)을 思慕(사모)합니다.
내 마음과 내 몸은 歡呼(환호)의 노래를 기운껏 부르렵니다. 살어게신 하나님께!
참새조차 집을, 제비도 새끼 둘 둥이를
찾었오이다. 당신의 祭壇(제단)가에서
萬軍(만군)의 여호와 내 임군 내 하나님
오 당신 殿(전)에 居(거)하는 이의 幸福(행복)이여!
저들은 끊임없이 당신을 讚揚(찬양)하도소이다.
오 당신안에서 힘얻는 이의 幸福(행복)이여!
(시온가는) 큰 길이 저 마음에 있도소이다.
「바카」의 골자구니를 지나면서도 (註一)
샘솟는 곳을 맨들리이다 -
이른비가 祝福(축복)으로 감싸줄 것이외다.
가도록 새 힘을 얻어 저들은 가리이다.
시온에서 하나님을 뵈오리이다.
오 萬軍(만군)의 하나님이여 내 祈禱(기도)를 들어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우리소서.
오 하나님 우리의 방패(楯[순])를 보아주소서.
당신 기름부은이의 낯을 살펴 보소서.
당신 殿(전)의 하로는 千年(천년)보다 났도소이다.
惡人(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 집 門(문)간에 門(문)직이 되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日[일])요 또 방패(楯[순])외다.
은혜와 榮譽(영예)는 여호와가 주시나이다.
바른길 걷는 者(자)에게는 온갖 좋은 것 애끼지 않나이다.
오 萬軍(만군)의 여호와 당신을 믿는 이는 福(복)있는 者(자)이온지!
(註一) 「바카」가 「운다」의 動詞完了形(동사완료형)이지마는 여기서는 名詞(명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바카」의 分詞(분사)는 「보케」오 其外(기외)의 名詞形(명사형)에는 「베케」 「보키」 「바코트」 等(등)은 있으나 「바카」가 그대로 名詞(명사)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여기 「바카」는 「운다」 動詞(동사)와 關係(관계)지을 것이 아니라 「바카」라는 名詞(명사) 即(즉) 沙漠地方(사막지방)에서 자라는 「발삼」나무를 말함이다. 다시말하면 발삼나무 골자구니 即(즉) 沙漠地方(사막지방)을 지날때에도 이른비의 潤澤(윤택)이 가는 곳마다 샘솟는 오아시스를 맨들어 주리라고 노래한 것인줄 안다.
- 詩篇(시편) 第四十二(제42), 四十三(43) -
「신학지남」 제16권 제1호 (1934.1): 29-31.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419~420.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7권, 278~279.
사슴이 시내물을 渴求(갈구)하듯이
그렇게도 내 靈魂(영혼)은 당신을 渴求(갈구)합니다. 오 하나님!
내 靈魂(영혼)은 하나님을 向(향)하야 목말렀읍니다.
살어게신 하나님을 向(향)히야 -
언제나 나는 가서 하나님을 뵈오리까?
나는 밤낮 눈물로 음식 삼어 지냈읍니다.
「네 하나님이 어듸 있느냐?」고 끊임없이 나의게 빈정댈 때
내가 前(전)에 늘 群衆(군중) 가운데로 지나며
하나님의 聖殿(성전)까지 行列(행렬)을 引導(인도)하던 일!
歡呼(환호)와 讚頌(찬송) 속에서 聖節(성절)지키든 群衆(군중)!
오 이 일들을 나는 追憶(추억)합니다.
그러고 내 靈魂(영혼)을 憂愁(우수)에 잠급니다.
오 내 靈魂(영혼)아 웨 落望(낙망)하느냐?
웨 내 안에서 不安(불안)히 구느냐?
하나님을 기대리라 아직도 나는
그를 讚頌(찬송)하련다. 내 하나님의 救援(구원)을!
오 내 靈魂(영혼)은 落望(낙망)에 잠깁니다.
그러기에 나는 당신을 追憶(추억)합니다-
요단 땅에서 또 헬몬 山(산) 미찰의 언덕에서
당신의 波濤(파도)와 당신의 물결은 모도다 나를 휩쓸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仁慈(인자)를 말슴하시고
밤에는 그의 노래가 나와 함께 하시리이다.
내 生命(생명)의 하나님께 들이는 祝願(축원)의 노래가
내 磐石(반석)이신 하나님께 나는 呼訴(호소)합니다.
「웨 나를 잊으섰읍니까?」
「웨 나는 원수의 壓迫(압박) 때문에 슲어하며 가오리까?」고
내 원수는 나를 비방하며
내 뼈속에 뿌시는 칼을 품겨 줍니다 -
「네 하나님이 어듸 있느냐?」고 끊임없이 빈정대는 것으로
오 내 靈魂(영혼)아 웨 落望(낙망)하느냐?
웨 내 안에서 不安(불안)히 구느냐?
하나님을 기대리라. 아직도 나는
그를 讚頌(찬송)하련다. 내 하나님의 救援(구원)을!
나를 裁判(재판)하소서 오 하나님!
不敬虔(불경건)한 백성을 相對(상대)삼어 나를 변호합소서
거즛되고 悖逆(패역)한 사람에게서 나를 救援(구원)합소서
당신이야말로 내 피란처인 하나님이시온데
웨 나를 모르는체 하시나이까?
웨 나는 원수의 압박 때문에 슲어하며 다니리까?
오 당신의 빛과 당신의 信誼(신의)를 보내주소서
그리하야 나를 引導(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聖山(성산) 당신게신 곳에로 다려가게하소서
그리하야 하나님 祭壇(제단)에로 가게하소서
내 기쁨 내 즐거움인 하나님께로 가게 하소서
거문고로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하나님, 오 내 하나님이여!
오 내 靈魂(영혼)아 웨 落望(낙망)하느냐?
웨 내 안에서 不安(불안)히 구느냐?
하나님을 기대리라 아직도 나는
그를 讚頌(찬송)하련다. 내 하나님의 救援(구원)을!
『신학지남』 16권 2호, 1934. 1.
『장공김재준저작전집(전5권)』 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년, 제5권, 415~418.
『김재준전집(전18권)』 한신대학출판부, 1992년, 제7권, 271~277.
憂愁(우수)에 잠긴 宮殿(궁전)! 英帝國(영제국) 女王(여왕)의 남편되는 알버-트 公(공)은 그 榮譽(영예)의 마즈막 페-지를 다치려하는 때 끊어지는 숨결을 것잡아 입안으로 속삭인 것이 이
『萬世磐石(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이었다.
그린우드(Greenwood) 墓地(묘지)의 大理石(대리석)에 삭인 不朽(불후)의 두어줄 노래는 우리의 心情(심정)에 믿음의 表徵(표징)을 삭여주는 永遠(영원)한 記念塔(기념탑)이다.
“Nothing in my hand I bring [뷘손들고 앞에가]
Simply to Thy Cross I Cling” [十字架(십자가)만 부뜨네]
- 朝鮮譯(조선역) 찬송
一七五六年(1756년) 八月(8월) - 寡婦(과부)된 어머니를 모시고 英國(영국)을 떠나 구경삼아 愛蘭(애란)[1]의 農村(농촌)을 찾어간 十六歲(16세)의 少年(소년) 하나가 있었다. 그는 農村(농촌)의 길을 逍遙(소요)[2]하다가 뜻없이 한 곡간에를 찾어 들었다. 그 곡간 안에서는 마침 한 農夫(농부)꾼이 몇 사람의 다른 農夫(농부)꾼들을 앞에 놓고 熱心(열심)으로 說敎(설교)하는 中(중)이었다. 그 題目(제목)은 「前(전)에는 너의들이 멀리 떠나 있었으나 지금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가까히 오게 되었다」 하는 것이었다. 이때 이 少年(소년)의 靈魂(영혼)에는 다시 끄지 못할 異常(이상)한 불낄이 타올났다. 後(후)에 그는 이때 일을 回顧(회고)하고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一七五六年(1756년) 八月(8월) 하나님의 使者(사자) 모리스 氏(씨)로 말미암어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主(주)님 앞에 가까이 갔읍니다. 참으로 異常(이상)합니다. 내가 英國(영국)에서 그렇게 오래동안 恩惠(은혜)자리에 있으면서도 體驗(체험)하지 못한 信仰(신앙)을 愛蘭(애란)의 村(촌)구석 곡간속에서 제 이름 字(자)도 변변히 쓰지 못하는 한 農夫(농부)를 通(통)하야 얻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異常(이상)한 일입니다.』
이 無識(무식)한 農夫(농부)꾼의 純眞(순진)한 믿음은 世紀(세기)가 가면 갈사록 더욱 크게 왼 世上(세상) 구석구석마다 울려 지나니 이는 그의 믿음이 이 少年(소년)의 靈(영)에 뿌리 박혀서 「萬世磐石(만세반석)」이란 不朽(불후)의 信仰詩(신앙시)를 誕生(탄생)케 한 까닭이다. 이 少年(소년)의 이름은 어가스터스 탑래디(Augustus Montague Toplady)[3]이다.
이로부터 탑래디 少年(소년)의 믿음은 날로 달로 새로워 一七六八年(1786년) 그는 英國(영국) 뿌로-드 헨뻐리(Broad Henbury)에서 牧師職(목사직)에 나아갔다. 牧師(목사)로 說敎家(설교가)로서의 그는 역시 이 노래에 지지않는 깊은 印象(인상)을 聖徒(성도)의 마음마음속에 색이고 있었던 것이다. 記錄(기록)한 바에 依(의)하건대 탑래디 牧師(목사)의 音聲(음성)은 그대로가 깨끗한 音樂(음악)이었다 한다. 그러고 그 語調(어조)의 鄭重(정중)함, 그 態度(태도)의 快活(쾌활)함, 그 語法(어법)의 簡明(간명)함 모든 것이 聽衆(청중)으로 하여금 거룩한 感激(감격)에 눈물짓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한다.
그는 主(주)님의 빛나는 얼골빛 속에서 살고 움즈기는 것을 말없이 뭇사람에게 보이고 있었다. 『나는 世上(세상)에서 第一(제일) 幸福(행복)된 사람이외다』 하고 그는 말끝마다 感激(감격)에 넘치었었다.
이러한 믿음의 기쁨과 평화를 아무 꾸밈없이 노래한 것이 곧 이 「萬世磐石(만세반석)」의 詩(시)이니 이는 그가 愛蘭(애란)의 農村(농촌) 곡간 한모퉁이에서 回心(회심)의 經驗(경험)을 지낸 後(후) 二十年(12년)만인 一七七六年(1776년) 三月(3월)에 『世上(세상)에서 가장 거륵한 信徒(신도)들을 爲(위)한 삶과 죽엄의 祈禱(기도)』라는 題目(제목)으로 그가 主幹(주간)하는 雜誌(잡지) 『福音雜誌(복음잡지)』 誌上(지상)에 發表(발표)한 것이다.
이제 그 原文(원문)을 紹介(소개)한다면
Rock of Ages, Cleft for me, Let me hide meself in Thee;
Let the water and the blood, From Thy riven side which flowed,
Be of sin the double cure, Save me from its guilt and power.
Nor the labors of my hand, Can fulfill Thy law’s demands;
Could my zeal no respite know, Could my tears forever flow,
All for sin could not atone; Thou must save and Thou alone.
Nothing in my hand I bring; Simply to thy Cross I cling;
Naked, come to Thee for dress; Helpless, look to Thee for grace;
Foul; I to Thy fountain fly, Wash me Savior; or I die!
While I draw this fleeting hreath, When mine eye strings break in death,
When I soar to worlds unknown, See Thee on Thy judgment throne.
Rock of Ages, Cleft for me, Let me hide myself in Thee.
試譯(시역)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의지 합네다
鎗에傷한 옆으로 물과 피를 쏘친것[4]
내게 효험되어서 罪를 씨서 줍소서
내손으로 힘써도 律法成就 못하고
타오르는 熱情도 넘치는 눈물로도
罪贖할길 없으니 主여 救援합소서
뷘손으로 나아가 十字架만 붙잡네
벗은몸 입히소서 할수없는 罪人이
샘물 찾어가오니 主여 싳어줍소서
숨결있을 때에나 죽엄 오는때에나
딴世上에 가서나 審判자리 에서나
萬世磐石 열리니 내가 의지합네다
그는 肺病(폐병)에 걸리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자리에는 마치 저편나라로서의 榮光(영광) 빛이 넘처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내 靈魂(영혼)에 느껴지는 慰勞(위로)를 도모지 어떻다고 말할 수 없오, 말로 表現(표현)하기에는 너무 크오, 하나님의 慰勞(위로)가 어찌나 洽足(흡족)한지 나는 祈禱(기도)할 것이 없어졌오, 내 祈禱(기도)는 全部(전부) 讚頌(찬송)으로 化(화)해 버렸구려, 내 靈魂(영혼)은 벌써부터 天堂(천당)의 즐거움을 맛보고 있오』 하고 그는 빛나는 낯으로 말하였다.
그의 떠날 時刻(시각)이 漸漸(점점) 가까워오며 脈搏(맥박)이 刻一刻(각일각)으로 弱(약)해질 때 그는 『하 이것이 내 죽음이 가까워 오는 표로구려, 그러나 내 心臟(심장)은 날마다 날마다 더욱 세차게 榮光(영광)을 向(향)하야 뛰고 있네, 나를 이렇게 말할 수 있게한 하나님께 讚頌(찬송)을 들이라』 하고 그는 똑똑히 말하였다.
바로 숨이 지기 前(전) 그는 기뿐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갈 때가 멀지 않었다. 하나님이 내 靈魂(영혼)에 나타내신 榮光(영광)을 世上(세상)사람으로서야 能(능)히 堪當(감당)할 者(자) 어듸 있겠느냐』
이리하야 그는 三八歲(38세)를 一期(일기)로 저나라에 옴기였다.
『Mhcn. I soar to the world unknown
See Thee on Thy judgment throne,
Rock of Ages, cleft for me!
Let me hide. myself in Thee』
『未知(미지)의 世界(세계)에 높이 올라서
審判(심판)의 寶座(보좌)우에 主(주)를 뵈올제
萬世磐石(만세반석)이여 저爲(위)해 열리사
主(주)안에 이몸을 감추게 하옵소서』- 直譯(직역)
이리하야 作者(작자)는 갔으나 이 노래의 餘韻(여운)은 世紀(세기)가 갈사록 더 깊이 더 넓게 쓰린 靈魂(영혼)들을 껴안어 주고 있다. 그 두어가지 實話(실화)를 쓰고 붓을 놓으려한다.
英國(영국) 웨일즈의 한 牧師(목사)가 自己(자기)의 回心談(회심담)을 이야기한 一節(일절)이다.
『나는 그때 한 兵士(병사)였다. 濛濛(몽몽)[5]한 戰塵(전진)[6]이 아직도 해를 어둡게 하는 어느날 그리미아 戰爭(전쟁) 알마의 大接戰(대접전)을 지낸 다음이였다. 우리 兵士(병사)들의 흘린 피가 너무 많아서 그 附近(부근)에 물은 먹을수 없는 까닭에 나는 물을 얻을려고 멀리 언덕 밑으로 찾어갔었다. 내 願(원)한바를 다 일운 後(후)에 나는 다시 野營所(야영소)로 발을 돌리였다. 여기 저기 늘어진 數(수)없이 많은 屍體(시체)를 넘어 거름을 옴기는 때 내눈에는 아비 잃은 孤兒(고아), 남편잃은 寡婦(과부), 늙은 어머니, 젊은 愛人(애인)의 痛哭(통곡)하는 樣(양)이 서언하게 보이며 鉛(연)덩이같이 무거운 氣分(기분)이 내리눌음을 느끼였다. 忽然(홀연)히 이 피비린내나는 空氣(공기)속에 기름 펴지듯 노래 소리가 울려왔다. 나는 그 노래 소리를 따라갔다. 兵士(병사) 몇사람이 늙은 同僚(동료)들 가운데 놓고 熱心(열심)으로 노래 불르는 것이였다.
『萬世磐石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
『살어 생전 숨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저들이 이 마즈막節(절)을 노래한때 이 늙은 兵士(병사)는 눈을 들어 한울을 처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또 다시 불러주우」하였다. 저들의 다시불르는 노래가 채 끝나기 前(전)에 이 늙은 兵士(병사)는 흙으로 지은 허무러진 帳幕(장막)을 떠나 永遠(영원)한 本鄕(본향)으로 옴기여 갔다. 이 莊嚴(장엄)한 光景(광경)이 내 靈魂(영혼)에 다시 지우지 못할 그림을 남겨 놓아서 나는 救援(구원)의 길을 찾게되고 지금은 福音(복음)의 使者(사자)로 일하는 中(중)이다』
오래동안 放浪(방랑)과 無節制(무절제)로 人生(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젔던 한 親舊(친구)가 죽음이 눈 앞에 닥처오는때 어쩐지 本鄕(본향) 생각이 나서 故鄕(고향)의 옛 親舊(친구) 집으로 찾어 왔었다. 그의 옛 親舊(친구)는 있는 親切(친절)을 다하야 그를 欵待(관대)[7]하였다. 죽음이 오기 몇일前(전) 그리스도는 다시 이 蕩子(탕자)의 마음門(문)을 두르렸다. 主(주)는 이 거츨은 靈魂(영혼)의 터전에 座定(좌정)하섰다. 그가 죽기 數日前(수일전)에 그의 親舊(친구)가 『무엇에 所望(소망)을 붙이느냐』고 물은때 그는 讚頌歌(찬송가)를 달라고 손질하며 그 여위고 시달린 긴 손가락으로 讚頌歌(찬송가) 한 章(장)을 가르치며 『이것이 내 所望(소망)이오』 하였다. 그 찬송가는
『萬世磐石(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이였다.
이리하야 華麗(화려)한 宮殿(궁전)의 王者(왕자)의 입에서나 짓밟힐대로 짓밟힌 放浪兒(방랑아)의 입에서나 「萬世磐石(만세반석)」만이 讚頌(찬송)의 問題(문제)이였으니 이는 그이 만이 삶과 죽음을 通(통)하야 우리의 親舊(친구)가 되며 우리의 救援(구원)이 되는 까닭이다.
『우리 祖上(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그 구름과 바다에서 다 세례를 받고 모세에게 屬(속)하야 다 같은 신령한 량식을 먹고 다 같은 신령한 물을 마섰으니 이것은 저의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섰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니라』 - 고린도前書(전서) 11장 4절
장공 김재준의 『낙수』(落穗) 序(서) 學窓餘祿(학창여록) 욥記(기)에 나타난 靈魂不滅觀(영혼불멸관) 實在(실재)의 探求(탐구) - 傳道書讀後感(전도서독후감) 아모스의 生涯(생애)와 그 豫言(예언) 이사야의 임마누엘 豫言硏究(예언연구) 傳記的(전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