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23] 해방 동기와 십자가 동기 - 1984년 8월 5일, 김상근 목사

해방 동기와 십자가 동기

누가복음 9장 23절 / 1984년 8월 5일 / 수도교회


[회상 노트]

1984년 내내 내 마음은 무거운 돌에 짓눌려 있었다. 1월 9일이었던가? 수도교회 청년으로 구속되어 있던 지태홍 군의 어머니가 자신의 연립주택에서 투신하여 자살하셨다. 아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한 행동이었다. 슬펐다. 이 현실이 무엇인가?

오늘의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자문의 주체나 성서의 소리를 듣는 객체, 모두가 나 자신이다. 내가 묻고, 내가 듣는 것을 오늘을 함께 살고 있는 교인, 적어도 수도교회 교인이나 기장 교인이 함께 듣고, 그래서 이 어려운 길을 함께 갈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럴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기독교 신앙으로 자기가 진 짐을 내려놓게 된다고만 설교한다. 그렇다. 기독교 신앙으로 온갖 짐을 벗게 되는 해방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신앙으로 성숙해 가야 한다. 그리하자면 자기 신앙에 지성소 같은 경건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편안한 일상에 자신을 묻어 버린다면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 신앙 때문에 감히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 교인이라 해서 흔히 가지게 되는 고리타분함에서는 자유로우나 그 내면에 진지한 경건함이 있는 삶, 지금 널브러져 있는 민중의 아픔을 애써 함께 할 수 있는 삶을 살아내야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설교는 사실 내 이야기였다.


[말씀을 향한 물음]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이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날마다, 어제는 무엇을 했고 오늘은 무엇을 하려는가? 내가 그리스도인인 표적은 무엇인가? 가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이다. 무엇에 근거하여 나는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쉬운 대답이 있을 수 있다. 주일날 교회 예배에 나가고 있다, 헌금을 한다, 식사 시간에 기도를 한다는 것 등 그리스도인의 표적을 쉽게 내놓을 수 있다. 물음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적인가이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9장 23절 이하는 공관복음서에 똑같은 평행구를 가지고 있다. 마태나 누가는 모두 마가의 편집 순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한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 → 예수의 고난 예고 → 베드로의 만류 → 그리고 오늘의 본문인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명령의 순서다. 이 순서에도 우리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가장 원형적인 마가와 비교하여 마태나 누가에 차이점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몇 가지의 차이점이 있으나 오늘은 한두 가지만 유의해 보기로 한다.

오늘의 본문인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느냐?’는 점에서 차이가 생긴다. 마가는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썼다. 무리와 제자가 대상이었다. 이것은 예수를 찾아온 사람들, 무리와 예수를 따라 나선 특수한 사람인 제자들로 제한되어 있다. 하여튼 이미 예수와 어떤 의미에서나 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제자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교인들과 목사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고 쓴 것과 같다. 그러나 마태는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16:24)라고 썼다. 마가에는 “무리와 제자들”이 대상이었으나 마태는 “제자들”로 국한시켰다. 그런가 하면 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씀으로써 오히려 대상을 크게 넓혀 놓고 있다.

마태는 예수의 명령이 특수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만큼 예수의 명령이 어렵고 힘든 것이었고, 예수의 분부를 특수화시키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곤란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누가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원형인 마가가 예수와 어떤 형태든지 관련을 가진 자를 명령의 대상으로 삼았으나, 누가는 “모든 사람”이라고 하여 명령의 대상을 일반화시킨다. 이것은 예수의 명령을 특수한 대상에게 국한시키려는 경향에 대한 한 반대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경향은 어떤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우리에게는 계율이 없어졌다. 계율 따위는 목사나 성직자들이나 갖는 것이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모두 가지고 있다. 멀리 서서 구경하는 식의 그리스도인이 많다. 마태와 마가의 말씀은 “제자들에게”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이러한 경향에서 “아니다. 모든 사람이다.”라고 한다. 바로 우리다.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쐐기를 박는다. 오늘 본문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라는 입장에 서야한다는 말이다. 나는 예외고 당신에게 한 소리라는 도피구가 없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는 두 가지 동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해방 동기’며 다른 하나는 ‘십자가 동기’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겠다”(마 11:28).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우리의 근심과 걱정을 벗게 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길을 기독교에서 찾는다는 것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일 수 없다.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에게는 쉼이 필요하다. 무거운 짐에 눌려 있는 사람에게 그 짐에서 벗어나는 것은 절대로 중요하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는 동기가 우리에게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근심과 걱정, 불평과 공포 속에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의당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해방 동기’다. 자신은 벗어나야 할 아무것도 없는 양하는 것도 일종의 교만이다.

그러나 진정한 해방은 언제 얻게 되는가? 예수를 따를 때 얻는다. 언제 무거운 짐이, 근심과 걱정이 극복되는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 내가 너희에게 주는 멍에는 메기 편하고 내가 너희에게 지우는 짐은 가볍다”(마 11:28-30).

짐과 멍에를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로 말미암는 짐을 짐으로써 해방을 얻는다는 것이 성서의 입장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를 따름으로 해방이 충족된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첫째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자신을 거부하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거부한다는 것은 행동과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누구에게 있어서나 절대 선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자선을 하는 데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자선을 베푸는 선한 일에조차도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어떤 이익을 구하는 동기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주장을 할 때는 그 주장의 바탕에는 자기의 이익이 있다. 옛날에는 안 하는 척하면서 했는데 요새는 노골적으로 ‘내가 이렇게 하노라.’고 확성기로 선전하면서 한다. 더 솔직해진 것이 아니다.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 당위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어떻게 예수를 따르나?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자기의 욕심, 자기의 명예욕을 버린다. 자기의 공명심, 자기의 이익을 버린다. 우리에게 있어서 자기를 버리는 그리스도인의 경건이 회복되어야 하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적이다. 이 경건이 있을 때 그리스도인임을 비로소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이다. “십자가를 지고”라는 것은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가는 것과 같은 삶을 말한다. 이 세계 속에서 이미 자신의 삶이 끝장난 것과 같은 상태를 말한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하니까 속썩이는 자식이 내 십자가인데 그 자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로 해석해 버린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형장으로 가는 사람들의 삶이란 무엇일까?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솔직한 순간이다. 자기의 지저분한 욕심 따위에 급급하지 않고 가장 중요한 것만을 생각하는 순간이 된다.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말만을 하는 순간이다. “날마다”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마가의 말을 수정하여 쓴 누가의 두 번째 대목은 바로 여기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 앞에 “날마다”라는 말을 첨가했다. 십자가를 한 번 지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매일 져야한다. 매일 최후의 순간을 사는 사람처럼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혹심한 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용기가 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으면서 삽니다.”라고 했고, 로마서 8장 36절에서 “우리는 종일 당신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라고 고발한다. 자신이 죽어서 사는 것, 하나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따름의 본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삶을 잊어버린 지가 오래되지 않았는가? 무엇을 죽이고 있는가? 무엇을 죽여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나는 이런 자세로 오늘을 살겠다는 결의 같은 것이 있는가? 천년 만년 살기만 할 사람들마냥 속된 욕망 속에서 매일을 사는 것 아닌가? 오늘 우리의 신앙은 탈색되어 버린 무색의 신앙이 되었고, 맛을 잃은 음식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는 가장 경건한 신앙을 회복시켜 보자.

끝으로 “따르라” 한다. 따르라는 것은 복종한다는 뜻도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자적으로 예수가 가는 곳에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앞의 두 전제가 없이는 따라갈 수 없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제 십자가를 지는 삶이 없이는 예수를 따라갈 수 없다. 예수가 가는 곳이 어디인가? 예수가 가는 곳이, 예수가 하는 일이 대부분 내 이해와 상충하고 내 욕심과 충돌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을 나는 기독교 신앙의 ‘십자가 동기’라고 명명해 본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이 고난당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만류했을 때 베드로를 크게 나무라시고 하신 말씀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만나 안일과 평안을 추구했던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따위의 일, 고난을 당하는 경우 같은 것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기도해야 할 베드로다. 베드로는 ‘해방 동기’에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사로잡혀 있다. 무언가를 벗어나서 편안하게 쉬고 안일하게 살려는 해방의 동기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을 그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누구든지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는 십자가 동기가 있어야 함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는 십자가 동기와 해방 동기가 우리 속에서 갈등해야 하는데 그것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서 평안과 평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는 그 신앙적 삶에서, 예수를 따라 사는 십자가 동기에서 해방의 동기가 충족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그래야 생명을 얻는다. 이 길 외에 생명을 얻는 다른 길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해방의 동기만을 추구할 뿐 십자가 동기에 관심하지 않는다. 주일예배에 나오는 것, 헌금하는 것, 모두가 해방의 수단으로 한다. 나를 버리기 위하여, 날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그럼으로써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특수한 사람들에게 주신 교훈이 아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이다. “누구든지”다. 여기 여러분 중에 예외가 없다.

우리는 벗어 버리고자 하는 해방과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 동기가 우리 속에서 정직하게 갈등하기를 바란다. 만약 십자가 동기만이라면 우리에게 몰아쳐 오는 것은 피곤함뿐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해방 동기만이라면 그것은 우리를 공허하게 만들 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게 하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인가? 속박과 굴레, 불안과 두려움, 증오심과 갈등에서 해방되기 위함이다. 동시에 자기를 버리는 경건을 찾자.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는 바로 그 마음으로 살자. 예수가 가는 곳 어디나 가자. 그럼으로써 우리는 예수를 따라갈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