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3:10-13] 기뻐 울음 터뜨리는 날 – 1992년 1월 9일, 김상근 목사

기뻐 울음 터뜨리는 날

에스라 3장 10-13절 / 1992년 1월 9일 /두야교회


[회상 노트]


두야교회는 충남 태안군에 있는 농촌 교회다. 예나 지금이나 농촌의 교회가 교회당을 건축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헌당예배 설교를 부탁받았다.

당시 그 교회 담임목사님은 김동설 목사였다. 농촌 교회 목사였지만 서울에서 열리는 인권ㆍ민주화 집회에 거의 참석했다. 무슨 큰 역할을 맡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조용히 그러나 열성적으로 참가했다. 나는 항상 고마운 마음과 동지애를 가지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유난히도 학생들의 죽음과 죽임이 많았다. 분신한 김기설 군의 유서를 대필했다 하여 강기훈 군이 기소당했다. 그때 우리는 당국의 억지요 민주화운동을 하는 학생들의 부도덕성과 반인륜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음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회는 끝모를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악의 세력이 오히려 힘을 더해 가는 실정이었다.

이런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하는 교회는 교회당을 높이높이 짓고 있었다. 교회당 건축을 아니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당연히 신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세상 복판에 교회당을 번듯하게 짓는 이유, 지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가늠해야 하는 것 아닐까? 최소한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농촌 교회에서도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교인들의 신앙이 사회의식과 연계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은 어디서나 건강하고 바른 것이어야 한다.

나는 그러나 신앙의 사회성을 에둘러 말했다. 농촌 교회라 하더라도 교회가 거기 있게 된 역사성, 사회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오히려 신앙의 감격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날이 가면 갈수록 농촌의 살림은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회당을 지어 오늘 하나님께 헌당하시니 여러분의 정성과 수고를 참으로 크게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의 정성을 인정하셔서 이 성전을 기쁘게 받아주실 것을 기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게 정복당해 나라를 잃고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고, 끌려가지 않은 사람들은 식민지 백성으로 살게 되었다. 50여 년이 지나서야 해방이 되었고,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은 자기 나라로 되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그 50여 년 동안 남의 나라에서 갖은 박해와 수모를 당했고, 그로 인해 그들의 신앙이 크게 흔들렸다. 그들 바빌론 나라는 마르둑이라는 신을 섬겼는데, 야훼 하나님을 믿는 자기들보다 마르둑을 섬기는 이방 나라 바빌론이 더 강하고 컸기 때문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 거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없어져 버렸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크고 강하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몰두하게 되었다.

야훼 하나님 신앙이 흔들리기는 본국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크고 강한 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들이 사는 것을 배우고 그들을 닮아 갔다. 그들을 닮는 것을 자랑으로 삼게 되었다. 우리도 일본의 식민지로 산 경험이 있다. 그때 우리의 꼴과 비슷했다. 일본말을 유창하게 하고 일본인들 사는 식으로 살고 그들을 닮으면 유지가 되고 떵떵거리지 않았던가.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구별하기 어렵게까지 되어 버리지 않았던가.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어버린 상황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다.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옛 자기 집을 되찾고 서둘러 수리했다. 좋게 가꾸어 자기들의 삶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때 두 부류의 예언자들이 나타나 외친다. 학개, 제3이사야, 스가랴, 말라기 등이 그들이다. 예언자 학개가 일어나 성전을 재건하라고 외친다.

“이 백성은 아직 주의 성전을 지을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 너희는 어찌하여 성전이 무너졌는데도 아랑곳없이 벽을 널빤지로 꾸민 집에서 사느냐?”(학 1:24)

성전은 아니 짓고 제 집 수리하고 가꾸기에 여념이 없어 하는 것을 꾸짖는 것이다. 어서 성전부터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제3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한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머물러 쉴 곳을 어디에다 마련하겠다는 말이냐? 모두 내가 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다 나의 것이 아니냐?”(사 60:1-2)

이것은 학개의 예언과 다르다. 너희가 무슨 성전을 지어 바친다는 것이냐, 고만 집어치우라는 말이다. 앞의 예언자는 왜 너희 집은 잘 수리하면서 무너진 성전은 아랑곳하지 않느냐는 것인데 다른 예언자는 너희들이 만든 성전에서 하나님이 쉬실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는 투다.

같은 시대, 같은 상황인데 왜 이렇게 서로 다른 가르침이 있게 된 것인가? 성전을 재건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이 집이 없으셔서, 쉴 곳이 없으셔서 성전을 짓고 재건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다, 땅이 하나님의 발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집 같은 것은 사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성전을 지으라 한 것인가? 자신들의 신앙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전을 세워 생활과 신앙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3이사야는 앞서의 ‘내가 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성전을 짓는다는 생각은 버리라.’는 말씀에 이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다”(사 66:2b).

제3이사야와 같은 부류의 예언자 가운데 스가랴가 있다. 그도 물론 성전 재건을 외친다. 그러나 그는 왜 성전을 재건해야 하는가를 상세히 가르친다. 성전은 너희 신앙을 바르게 세우는 교육장이요 너희들의 세계를 바르게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 거기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사실대로 공정한 재판을 하여라. 동족끼리 서로 신의를 지키며 열렬히 사랑하여라. 과부와 고아, 더부살이와 영세민을 억누르지 말고 동족끼리 해칠 마음을 품지 말아라:(슥 7:8-10).

하나님이 집이 없어 성전을 재건하라 하신 것이 아니다. 쉴 곳이 없으셔서 성전을 지어 달라 하신 것이 아니다. 성전에서 신앙을 키우고 성숙시켜서 하나님이 굽어보는 사람, 억눌린 사람, 마음이 찢긴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받는 사람을 돌아보게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신다는 것이다. 성전이 있어 공의가 있고 정의가 있게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신다는 것이다. 성전을 통해 하나님 신앙이 돈독해지고 그럼으로써 신의와 사랑이 있게 되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게 되는 세상을 만들게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전을 짓는 날, 그 날을 이스라엘이 새롭게 시작하는 날로 삼게 하려 하신 것이다. 민족의 중심을 잡는 날, 중심을 세우는 날로 삼게 하려 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봉독한 에스라서를 보면 성전 기초를 놓던 날, 온 백성은 환성을 올리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너무 좋아서 목을 놓아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고 썼다. 아, 이제 우리가 신앙의 중심을 세우게 되는구나! 이제 민족의 중심을 세우게 되는구나! 50년이나 피폐되고 황폐되었던 우리 민족, 우리들의 가슴에 신앙을 바로 세우게 되는구나! 그래서 그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기쁨의 울음을 터트렸다.

오늘 우리는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헌당을 하게 된다. 왜 지었는가? 하나님이 집이 없으실 것 같아서 하나님께 지어 드리려 한 것인가? 하나님이 쉴 곳이 없으실 것 같아서 돈들을 내어 이 집을 지었는가?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다. 땅이 하나님의 발판이다. 집도, 쉴 곳도 따로 필요하지 않으신 신이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서산 지역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는 교회를 필요로 하신다. 신의가 있는 세상을 만드는 교회를 필요로 하신다. 내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교회, 공의를 세우고 정의를 있게 하는 교회를 필요로 하신다.

우리는 성전을 왜 지었나?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바로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 이 성전을 지은 것이다. 이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이 성전에 모여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뜻이다. 저희가 이 성전에 모여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억눌린 사람, 마음이 찢긴 사람, 과부와 고아와 영세민을 돌보겠다는 뜻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두야교회도 비록 편안하게 지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여기서 기도하고 결단하여 이 사회, 이 나라에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교회가 되겠다는 뜻이 이 봉헌에 담겨 있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이 지역의 중심을 세운 것, 이 민족의 중심을 세운 것이다. 자손만대에 주고 또 줄 거룩한 신앙의 유산을 이룩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전을 짓고 봉헌하는 이것은 우리들만의 기쁨으로 그치게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 서산 온 동리가 기뻐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 머지않은 장래에 서산의 모든 사람, 사랑에 서고 의에 서려는 모든 사람, 아픈 가슴을 안고 있는 모든 사람의 기쁨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게 해야 한다.

성전을 봉헌하는 이 날, 우리 교회가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이런 교회가 될 것이라는 소망 때문에 에스라서에 기록된 것처럼 오늘 우리는 환성을 질러 하나님을 찬양하자.

너무 감격하여 목을 놓아 울음을 터트릴 사람은 감격의 눈물을 흘려라.

좋아라 소리를 질러라. 멀리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저 교회가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갈피를 못 잡아도 좋다.

이 날은 우리 교회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날이다. 성전 봉헌은 바로 그것을 선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