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9일 목요일

[범용기 제3권] (128)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TORONTO에

TORONTO에

4월 25일(일) - 오늘 토론토로 떠난다.

차상달 선생 댁에서 차 선생 사회로 퀘이커식 묵상과 기도의 모임이 있었다.

조용히 부른 한 장의 찬송, 그리고 나와 함께 한 한주일의 사귐과 사명에 대한 총평과 치사의 말씀이 있었다.

다음으로 약 10분간의 내 인사와 부탁말씀, 노의선[1] 목사의 감화(感話), 김상돈과 김성락[2]의 통곡섞인 기도……

Farewell Party로 차상달이 마련한 Coffee와 도너츠를 나누고 홍윤호 여사 “드라이브”로 공항에 갔다.

노의선, 김상돈, 최옥명 등이 비행장까지 나와 작별했다.

노의선 목사는 범상(凡常)을 탈출한 기인(奇人)이랄까? 그 생각이 비약(飛躍)하며 새롭다.

오전 9시반에 떠나 네 시간 날아 오후 5:38P.M.에 토론토에 내렸다.

상하(常夏)에서 설원(雪原)에로, 그러나 김운하 사장의 캘리포니아 과일상자가 남국의 향기를 품고 따라왔다.



[각주]
1. 노의선(盧義善) 목사는 평안북도 철산 출생으로 경기고등학교, 연희전문, 평양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79년 북한을 방문하였다.
2. 김성락(金聖樂, 1904~1989) - 장로교 목사. 교육가. 신학자. 평남 평양에서 김선두 목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1924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수료(21회)했다. 그동안 평양 숭의여자중학교 교원에 재직한 바 있는 그는 1927년 미국에 유학하여 미주리주 파크빌에 있는 파크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8년 뉴저지주의 프린스턴신학원을 수료했다. 이어 예일대학에서 수학하고 1930년에 텍사스의 달라스복음신학교에서 신학박사(Th.D.) 학위 그리고 1931년 켄터키주 루이스빌신학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귀국 후 평양신학교 교수, 평양 신암(新岩)교회 목사 그리고 숭실대학 교목과 교수로 봉직했다. 1937년에 다시 도미한 그는 로스앤젤레스교회(예장)에 부임하여 20여년간 담임하였다. 그동안 1944년 사우스 캐롤라이나대학교 강사와 1957년 미국주재 한국인교회연합회장직을 역임했으며 1958년 귀국하여 숭실대학장으로 봉직했다. 1981년과 1982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에게 북한에 교회를 세울 것을 권고하였다. 1980년대 김일성은 그의 아버지 김형직이 김성락 목사와 평양 숭실학교 동문이라는 점에서 그를 자주 초청했었다고 한다.

[범용기 제3권] (127)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친교와 탐승

친교와 탐승

4월 23일(금) - 오늘은 권의상ㆍ이영희 부부, 나행렬 부부를 만나 옛 친교를 새롭게 했다.

그 밖에도 여러분을 사귀었지만 내 기억이 혼미하다. 그분들에게 미안하다.

4월 24일(토) - 양 박사의 “어머니”(최옥명 권사)에 대한 효성은 나무랄데가 없다.

아들ㆍ며느리에 대한 최 권사의 훈계도 맹자의 어머니를 연상케 한다.

L.A.는 상록(常綠)의 나라다.

“낙원”이 따로 있을까 싶다.

변화가 없어 삶에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다는 분도 있으나 눈보라의 북극인은 상하(常夏)[1]의 나라를 부러워한다.

점심에는 박명필 전도사가 자택에서 냉면과 갈비구이로 환대했다.

1976년 4월 24일 밤에는 차상달 선생댁에서 “민주유지”들의 좌담회가 있었다.

명재휘 장로 사회, 손순렬 기도로 시작하여 11시까지 얘기를 이었다.

저녁식사는 일본식당에서 “덴뿌라 정식”을 나누고 다시 차상달 선생댁에서 L.A. 민주단체 인사들의 간부회의가 열렸다.

  1. 한국의 민주운동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므로 세계적인 Coalition[2]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2. Violence(폭력항쟁) 문제는 “현실”과의 상대성 관계에서 고려해야 한다.

“정의”와 “불의”의 대결에서 “폭력”이 교조적으로 배제될 수는 없다는 것도 양해사항으로 수립됐다.

차상달 선생은 “퀘이커”의 L.A. 총책임자였으니만큼 이것은 그에게 “추상적”인 과제가 아니었다.

4월 22일(목) - 장기형 목사 부부가 중국 음식점에서 애찬에 초대했다.

장 목사는 내 처남뻘도 되지만, 내 교사생활에서 맨 처음 발탁된 제자며 천재에 가까운 수재다.

미국 유학에는 고참자의 하나지만 그 동안의 생활은 다사다난했다.

일본의 대륙침략전쟁 시절과 미일전쟁 때에는 군사영화의 배우로도 유명했단다.

경제생활에서도 부(富)에서 빈(貧)에로 “빈”에서 “부”에로 몇 번을 오르내렸다.

지금은 Up and Down에서 후자의 위치에 있고 미국 “이세”인 부인이 생활을 꾸려간다.

그는 70을 넘었지만 신수는 좋고 고혈압 때문에 정양중이란다.

어쨌든, 다시 만난 기쁨과 언제 또 만날까 싶은 작별이 과객(過客)[3]의 심회[4]를 설레게 한다.

4월 24일(토) - 양준철 박사(이름난 외과의사)와 그의 어머니 최옥명 권사는 나를 디즈니랜드(유원지)에 안내했다.

아이들의 “Wonder Land”다. 그리고 파사데나의 양 박사 주택과 한에이커 반의 넓은 뒤뜰을 거닐기도 했다.

저녁은 그의 초대로 한국인 시가인 올림픽거리 “영빈관”에서 과분하게 대접받았다.



[각주]
1. 상하(常夏) - 늘 계속되는 더운 여름
2. Coalition – 연합, 합동
3. 과객(過客) - 지나가는 나그네
4. 심회(心懷) -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

[범용기 제3권] (126)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감옥에 김영민을 방문하고

감옥에 김영민을 방문하고

4월 21일(수) - 12:15A.M.에 홍동근 목사가 들렀다.

김상돈, 차상달, 홍동근, 나 네 사람이 홍동근 차로 약 2시간 달려 Chino감옥에 달려 갔다.

김영민을 면회하려는 것이다.

넷이 다 면회신청을 냈었는데 넷이 다 허락됐다.

면회실에서 약 1시간 기다렸다.

4:30P.M.에사 영민이 나타났다.

유리창 구멍으로 낯을 보며 얘기한다.

나, 김상돈, 차상달, 홍동근, 넷이 각기 30분 이상 얘기해도 그만두란 말이 없다.

영민군은 건강하고 명랑하고 사고(思考)나 판단이나 언어에 아무 지장도 없다.

지금 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하다 들어왔노라고 했다.

내가 먼저 면회를 했다.

나는 주로 본국 소식과 경동교회 소식을 전했다.

차상달은 이 기회를 낭비하지 말고 열심히 독서하고 사색하고 저술까지 하라고 권한다.

홍동근은 애굽에서의 “요셉” 같이 되라고 한다.

김상돈도 고난에 지지말고 용감하게 싸워 이기라고 격려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는 요셉과 같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것이다.

“영민”은, 경동교회 창설장로인, 김능근[1] 교수의 맏아들이다.

그는 경기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5 동란 때에 미군에 편입됐다.

미군이 휴가로 교체되어 귀국할 때, 그는 미국유학이란 특권으로 제대되어 도미했다.

미국서 대학에 다녀 봤으나 사정이 어려웠다.

그는 취직했고 예쁜 북구라파 처녀와 결혼하여 자녀를 기르며 행복했다.

그는 “산ㆍ바아바라”에 이주했고 부인은 국민학교 교사로 착실하게 가계를 꾸려나갔다.

“산ㆍ바아바라” 시에서 교육위원 선거가 공고됐다.

그는 이에 입후보했다.

원래 “산ㆍ바아바라”는 대서양을 처음 건너온 미 건국 당초[2]의 청교도들 촌이어서 ‘양반’자세가 대단했다.

그런 고장에서 김영민은 감연[3] 입후보 수속을 해치운 것이다.

득표수가 당선 line에까지는 못갔지만 수십명 입후보자 중에서 제16번에 해당하는 표를 얻었다.

젊은이들 표가 집중됐기 때문에 다음 번에는 소망을 걸어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양반님들은 분개하며 두려워했다.

“이 건국시조들의 반촌(班村)[4]에 노랑원숭이 녀석이 어느 한 구석에 숨어 살아도 영광일텐데 감히 교육위원 자리까지 노린단 말이냐? 고이한 놈 같으니라니……” 말하자면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 동리에도 경찰은 있다.

그러나 이 양반님들의 눈밖에 나면 붙어 있기도 어렵고 승급도 잘 안된다. 그래서 양반님들의 시위대 비슷하게 된다.

하루는 영민이 자동차를 몰고 간다.

아직 어둡잖으니까 “헤드라잇”을 켜지 않았다.

경찰은 차를 세우게 하고 문초를 한다.

영민은 “아직 해가 넘어가지도 않았는데 Head Light이 필요하냐”고 반문했다.

“경찰에게 반항한다”고 경찰은 영민을 끌어내린다.

영민은 구속영장을 보이라고 했다.

“구속영장이 필요없다”고 대든다.

영민은 키가 9척 같은 “거인”이다.

경관의 따귀를 갈겼단다.

잡혀서 경찰서에 갔다.

시말서를 쓰고 무사히 됐다는데 잘 모르겠다.

경찰은 “노랭이”에게 따귀를 맞았다는 것 때문에 앙심을 먹고 벼른다.

이 양반촌에, 해군제독으로 있던 늙은 부부가 자그마한 집을 갖고 은퇴해 산다.

이제는 너무 늙어서 노망기가 있다.

그 집에 드나드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런데 하루는 “노파”가 어떤 인도인에게 가택침입을 당했노라고 선전한다.

키가 유난히 크고 낯이 검고 인도인 복장을 한 중년남자였다는 것이었다.

현관에 들어와 무얼 사라고 권하길래 필요없다고 거절했더니 신발 신은 대로 마구 들어와 노인네를 구타했다는 “루머”였다.

이 말 들은 경찰은 다짜고짜로 “영민”을 구속 송청[5]했다.

그 시간에 영민은 거기 없었다는 “알리바이”가 성립되는데도 불구하고 영민은 내놓지 않는다.

양반님들이 모두 배심원이기 때문에 “억지공사”로 영민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했다.

L.A.에는 한국인이 10만이나 산다고 한다.

한인회에서 대회를 열고 “이것이야말로 인종차별이오 인권유린이다”고 대대적인 성토문을 산포하고 “영민”돕기 운동을 전개했다.[6]

그리고 이 사건을 고등법원에 상고하고 그 비용을 위해 모금운동을 일으켰다.

홍동근 목사가 주동했다고 들었다.

양반님들도 노랑원숭이들이 만만찮다고 보았는지,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심리감정(鑑定)을 지시했다.

의사는 “이상없다”를 선언한다. 그러나 좀더 안정과 정양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병감”에 옮겼다.

우리는 그 병감에 그를 방문한 것이었다.

부인인 스웨덴 여성은 문자 그대로 “현모양처” 타입이라고 한다.

소학교 교사로 봉직하며 남편의 옥고를 나눠진다고 했다.

나는 그 경험담을 책으로 엮어 출판하라고 권했다.

그도 “그러겠노라” 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각주]
1. 김능근 장로는 숭실대학교 한문학 교수이며, 1947년에 경동교회에서 장로로 임직하였다.
2. 당초(當初) - 일의 맨 처음
3. 감연(敢然)하다 – 과단성이 있고 용감하다
4. 반촌(班村) - 양반들이 모여 사는 마을
5. 송청(送廳) - 경찰청에서 조사한 피의자를 사건 서류와 함께 검찰청으로 넘김
6. “1975년 10월 20일, 산타바바라 김영민 사건 변호위원회 구성, 1976년 3월 29일 한인인권옹호위원회로 발전, 회장 레스터 김(김영창) 목사”

2026년 3월 18일 수요일

[범용기 제3권] (125)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L.A.에서의 남은 날들

L.A.에서의 남은 날들

4월 17일(토) - 4.19기념강연이 끝난 다음에 숱한 내 동문, 후배, 전 경동교회 교우들, 민주동지, 옛친구, 친척 등 수십 명이, 애기들까지 온 가족동반으로 인사하며 반긴다.

내 “강연” 듣기보다도 “나” 보러 나온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삶에 엉킨 인정, 사랑으로 맺어진 인간관계, 선후배, 사제(師弟)의 의리 등이 삶의 의미와 낭만을 아로새긴다.

4월 18일(일) - 오늘이 부활주일이란다. 홍동근 목사가 목회하는 할리우드 교회에서 설교했다.

예배 후에 예배당 앞뜰에서 부인회 주최 친교 Party가 있었다. 부인들이 손수 만든 시루떡을 나누며 옛날 얘기 요샛 얘기가 열심으로 오가고 있었다.

6P.M.에 “서울옥”에서 36명의 동지그룹이 나를 위해 Welcome Party를 열었다.

이용운 제독의 환영사, 사회자 김상돈의 인사소개, 그리고 기억에 안남는 알맹이 뺀 좌담, 영웅담 등이 속출한다.

최옥명 권사 댁에서 “유련”한다.

4월 19일(월) - 김상돈 댁에서 조반 초대.

김운하 사장, 이용운 제독, 김상돈 시장, 김신찬 장로 등이 합석했다.

모종의 정치적 비밀회담인 것 같기도 했다.

알고보니 지난 75.8.16~17에 열렸던 시카고 민통총회 때에 만장일치로 가결된 L.A. 지방위 분규 타결안이 그대로 실천될 가망이 없다는 현 사태에 대하여, 의장의 재고려를 원한다는 것을 타진하려는 것과, 따라서 총회에 제출한 자기들의 안건이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려는 것.

그리고 L.A. 지방위 문제가 시원스레 해결되지 않는 한, 지난 총회에서 결의된 대로 다음 총회를 L.A.에서 개최한다는 것은 지방분규를 격화시킬 우려가 있고 지방으로서의 면목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장인 나에게 양해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럴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난 총회 이전으로 돌아간 상태에서는 다시 총회를 자신들의 고장에 초치[1]할 면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총회에서의 타결안을 그대로 실시할 책임은 L.A. 지방위에서 지기로 약속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 사건 자체가 L.A. 지방위에서 자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4월 20일(화) - 김충국 목사와 사귀었다.

그의 안내로 일본서점에서 책 몇 권 샀다.

밤에는 차상달 선생 댁에서 L.A. 민주인사들의 간부회의 비슷한 모임에 참석했다.

서예가 운여(雲如) 김광업[2] 선생이 지필묵을 갖추셨다.

志友(지우)들이 많이 모였다.

민주동지들 중에서 나에게 “글씨”를 청하는 분이 많기에 1인 1폭의 규례로 간단하게 써 드렸다.

그는 나에게 서예용 인태(도장) 네 개를 준다.

벽옥(碧玉)에 친히 써서 손수 판 것이다.

그후 13일째 되는 5월 8일에 그는 고혈압으로 졸서(卒逝)[3]했다. 그때가 마감 만남이었다.

나는 그가 주신 “인태”(印)를 가보(家寶)의 하나로 간직한다.

그는 의사였다.

많은 자녀를 최고 수준에까지 교육시켜 분가(分家) 독립시키고 혼자 옛집에 남아 서도로 외롬을 달래고 있었다.

그는 자가류의 서도를 창안했다.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한 서체다. 그림에 추상화가 생기듯, 그는 추상서(抽像書)를 쓴다.

그는 온후[4] 겸손한 한국어른이다.

내가 가면 대선배나 높은 어른을 모시듯 한다. 민주동지로서의 “순정”(純情)이겠다.

그것은 일부러 꾸미는 “예절”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없으시다.



[각주]
1. 초치(招致) - 사람을 불러서 오게 함
2. 김광업(金廣業, 1906~1976) - 안과의사, 서예가. 평안남도 오청리 출생. 1920년 평양공립보통학교를 마친 후, 1927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54년 부산에서 대명안과를 개원하고 서예학원인 동명서화원을 개설하여 부산 서예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73년 미국 L.A.에 거주하는 아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도 흥사단 기금 마련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3. 졸서(卒逝) - 죽어서 멀리 감
4. 온후하다 – 부드럽고 후덕하다

[범용기 제3권] (124)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L.A.에

L.A.에

4.19기념 강연회

1976년 4월 17일(토) - Ottawa의 정대위 박사 부부가 한국 갔다 오는 길에 토론토 공항 근처 “할라데이인”에 유숙한다기에 이 목사와 나는 잠시 들러 본국 소식을 들었다.

그 길로 공항에 나가 12시 정각에 떠나는 “점보” 속에 삼켜졌다.

5시간 날아 L.A.시간으로 2:00P.M.에 목적지에 내렸다.

최옥명 할머니 댁에 짐을 풀고 한참 잤다.

3P.M.에 Convention Hall에서 열리는 4.19기념모임에 나갔다. 약 400명이 틈없이 공간을 채웠다.

김상돈 사회로 4.19기념강연회가 시작된다. 연사래야 나 하나 뿐이다.

“4.19정신의 회고와 전망”이란 평범한 제목으로 약 1시간 반 강연이라고 했다.

“4.19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는 끝없는 혁명이다.

군사독재, 공산독재, 독점권력 아래서 독버섯 같이 무성하는 부패와 부정, 미국과 일본의 경제식민, 미국의 군사기지, 무엇보다도 38선의 동강난 요부(腰部)[1] 이 모든 것과 싸우는 4.19정신은 휴식 없는 전투태세로 미래를 향하여 전진한다.

4.19기념은 과거의 자랑이 아니라 미래의 소망이다.……”

이것은 강연의 속기록이 아니다.

사실, 나는 4.19일지를 사실대로 소개한 것 뿐이니 내 강연이랄 수도 없겠다. 그래서 나는 상술한 말로 결론을 꾸민 것이었다.

김상돈이 석상에서 공개하는 보고에 의하면 한국대사관의 방해공작은 상상이상으로 집요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불범정’(邪不犯正)[2]이란 진리는 매장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겼다. 그리고 또 이길 것이다.”

“상돈”의 의기(義)는 높았다.



[각주]
1. 요부(腰部) - 허리 부분
2. 사불범정(邪不犯正) - 바르지 못한 것이 바른 것을 범하지 못함.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뜻

[범용기 제3권] (123)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기독학자회

기독학자회

3P.M.에 회비 $25내고 회원으로 등록했다.

학자회에는 매년 충실한 “개근생”이었기에 거의 다 구면 친구들이다.

7P.M.에 만찬을 나누고 그 자리에서 개회선언에 이어 경건회와 Reception Party가 있었다.

밤 1시까지 끝없는 환담이 샘물처럼 솟구친다. 나는 1시 30분에 잤다.

4월 9일(금) - 8:30A.M.에 조반, 9:30A.M.부터 경건회에 그리고 Presentation, 토의가 일사천리다.

연구논문 발표가 학자회의 주목적이다.

Banquet Speaker[1]로서는 Sinnott 신부였고 이어서 민혁당 사건 영화가 상영됐다.

그리고서는 Hall에서 칵텔 Party다.

4월 10일(토) - 회의 속개

Hotel에서 9A.M.에 조반 먹고 경건회 후에 본회의를 계속한다.

ㆍ임원 선거 결과는

  • 회장 – 선우학원
  • 부회장 – 이상철
  • 서기 겸 회계 – 김동수
  • 고문 – 김재준, 김성락

4:00P.M.에 맥코믹신학교 “포에딕” 교장 주도로 동교 강당에서 열린 Penal[2]에 잠시 방청객으로 앉아 봤다.

연사는 시노트 신부, 이승만, 문명자, 동원모 등이었다.

이 목사와 나는 중도에서 나와 고 김관식[3] 목사의 막내 따님 김유선 여사를 예방했다.

고 황광은[4] 목사 미망인이다. 자녀들을 건사하며 굳세게 자활하고 있었다.

시카고 출발 1시간 반 후에 토론토 공항에 착륙하여 Taxi로 이 목사 집에 안착했다.

나는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모임과 이 모임에서 인연이 다은 인상의 片影(편영)[5]들을 주워 “모자이크”를 만들어 본다.

  1. 학자들의 강연은 진지하고 알찬 학문의 열매들이다.
  2. 허풍을 치면 즉석에서 드러난다.
  3. 어느 정도 정치권력에서 Detach[6]되어 있다.
  4. 어용화는 학자를 오염시키는 독까스다. etc.

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이번에 김유선 여사를 만난 것이 나의 큰 기쁨이었다.

김유선은 고 김관식 목사의 막내 따님이다.

김관식 목사님은 내 본 고향인 두만강 가 경흥읍교회에서 3년 목회했다. 경기태생으로 영어가 능했기에 캐나다 유학생 제2회로 선발되어 토론토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프린스톤 신학교에 옮겨 대학원에 다니면서 프린스톤 대학 Semitic Language과 겸수하고[7] Master칭호를 받았다.

귀국하자마자 함흥 영생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해방 후에는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 구내 사택에 계셨다. “한신”에서 접수한 귀속재산의 하나다. 말하자면 천리교에서 쓰던 주택이다.

김관식 목사님은 사모님을 여의고 독신으로 계시다가 동자동에서 재취하여 새 살림을 시작했다.

재취한 새 사모님은 비교적 젊으신 40대 Lady였는데 김 목사님은 그해가 환갑년이었다. 신혼살림은 진실로 “사랑의 보금자리”였다. 깊은 연애 생활이었달까!

그는 언젠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새 젊은이들을 보면 연애는 젊은이들의 - ‘독점특권’인줄 아는 모양이야! 늙은이는 연애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어! 내 또래가 되야 연애의 깊은 맛을 알게 되는 거야….”

돌아가신 어머니를 핏줄닿는 “내” 어머니로 모시고 한동안도 그 사랑의 맥박을 잊어본 적이 없는 귀염둥이 막내딸 “유선”은 슬펐다.

그녀는 바로 그해였던가 다음해였던가 이화대학을 졸업했다. 졸업식에 부모님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오후 느지막해서 “유선”은 졸업생에게 주는 화려한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신학교에 나 만나러 왔다.

현관에서 꽃다발을 내게 안겨 주면서 눈물이 글썽했다.

나는 그 순간에야 “유선”의 심경을 약간 살필 수 있었다. ‘아무리 바빴어도 내가 졸업식장에 가 봤어야 하는 건데……’ 가슴이 아팠다.

유선은 우리 졸업생 황광은과 결혼했다.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배필이었다. 행복했다.

그러나 황광은은 봉사욕에서 오는 과로와 지병들이 겹쳐서 먼저 갔다.

유선은 그 동안에 주어진 자녀들을 거느리고 시카고에 옮겼다. 꽤 큰 Store를 경영하면서 힘찬 생활의 투사가 됐다.

이것이 내가 만난 때까지의 기록이다. 그 후의 일은 모른다. 어쨌든, 항해의 풍파는 극복돼야 하겠다.



[각주]
1. Banquet Speaker – 연회 연사
2. 문맥상 Panel
3. 김관식(金觀植, 1888~1948) - 1908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북간도로 향하는 도중에 함경남도 이원(利原)에 머물렀고, 이원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7년 경흥교회에서 장로로 피택, 1920년 함북노회에서 장로로 장립되었다.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캐나다 장로교회 전도부의 학비보조를 받아 캐나다 녹스신학교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구약을 전공했다. 귀국 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재직(1927~1938). 1938년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가 되었고, 교회탄압이 가중되자 다시 목회를 중단하고 평양 근방 농촌에 은거했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으로 1945년 7월 19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조직될 때에는 그 교단의 통리(統理)가 되었고, 한달도 못되어 8ㆍ15 해방을 맞게 되어 월남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교회연합운동을 벌였으며, 1948년 WCC 암스테르담 대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4. 황광은(黃光恩,1923∼1970) - 어린시절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의 소설 ‘사선(死線)을 넘어서’를 읽고 큰 감화를 받아 가난한 자의 벗이 되기로 결심한 그는 16세 되던 1939년 평북 용천에서 서울로 상경, 당시 삼각산 기슭에 있던 향린원(고아원)에서 8년간 고아들의 벗으로 일하면서 일제말 암울했던 시기를 보냈다. 해방과 함께 한국신학대학에 입학(1948년 졸업) 한 이후 청소년 운동의 개척자로, 기독교 문화운동의 기수로, 한 사람의 목회자로 교회와 사회에 봉사했다. 새문안교회 부목사, 대광중고 교목 등을 지냈으며, 1961년부터 영암교회에 시무하면서 전국적인 초교파 복음화운동에 나섰다. 1970년 심장질환으로 48세의 생애를 마감한 그는 그 흔한 ‘장’자리 하나 하지 않은채 가난하게 세상을 떠났다.
5. 편영(片影) - 조그마한 그림자
6. Detach – 분리하다, 떼다
7. 겸수(兼修)하다 – 함께 공부하다

[범용기 제3권] (122)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시카고에

시카고에

제10회 한국기독학자회 연차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시카고행이다.

76년 4월 8일(목) - 10:00A.M.에 이상철 목사와 함께 토론토 공항에 나가 11:25A.M. 비행기로 Chicago에 향했다.

약 한 시간 날아 목적지에 착륙, Midland Hotel 906호실에 여장을 풀었다.

[범용기 제3권] (128)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TORONTO에

TORONTO에 4월 25일(일) - 오늘 토론토로 떠난다. 차상달 선생 댁에서 차 선생 사회로 퀘이커식 묵상과 기도의 모임이 있었다. 조용히 부른 한 장의 찬송, 그리고 나와 함께 한 한주일의 사귐과 사명에 대한 총평과 치사의 말씀이 있었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