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7일 금요일

[범용기 제2권] (34) 부산 피란 3년 - 1ㆍ4 후퇴

1ㆍ4 후퇴

1950년 6월 27일에 미국 대통령 트루먼[1]이 ‘국련’ 결의를 거치지 않고 대만 해협에 미국 제7함대를 파견한데 대하여 많은 ‘국련’ 가맹국과 국제여론이 악화됐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사이에 어떤 예측 못한 중대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30일에 ‘주은래’[2]는 “미 제국주의 침략군이 북위 38도선을 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침범하는 경우에는 중국의 안전이 위협되는 사태가 되기 때문에 중국은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경고했다.

1950년 9월 30일에 인도 정부는 북경주재 인도 대사의 보고를 받고, 국련군이 38도선을 돌파 북상하는 경우에는 중국과의 전쟁을 유발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1950년 10월 1일에 국련 산하의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했다.

1950년 10월 30일에 ‘주은래’는 북경주재 인도 대사에게 “한국군 이외의 외국 군대가 38선을 넘어오는 경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키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한다”고 통고했다.

1950년 10월 8일에 국련군은 38선을 돌파하고 북상하여 같은 달 하순에 ‘초산’, ‘혜산’[3] 등 국경지대에 진출했다.

1950년 11월 11일 중화인민공화국은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은 중국 침략의 죄를 범했다. 조선에서의 미국의 조치는 중국의 안전보장을 위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은 침략자인 미국과 그 추종자가 그들의 침략 행위를 중지하고 그들의 침략군대를 철수하기를 단호히 요구한다. 침략이 중지되지 않는 한, 침략에 대한 반대 투쟁은 결코 중지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1950년 10월 25일에 중국 인민의용군은 조선전선에 출동했다.

1950년 11월 25일 공산군 총반격이 개시됐다.

1951년 1월 5일에 공산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남하했다.

1951년 1월 4일 서울 시민은 거의 전부가 ‘남’으로 후퇴했다.

이것이 이른바 1ㆍ4 후퇴다. 나는 그보다 앞질러 부산에 내려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서울 시민을 몽땅 대구, 부산 등지에 옮기고 서울을 맘대로 폭격하는 것이 미군의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각주]
1.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 전임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4선으로 취임한 지 한 달 만에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제34대 부통령(1945년)이 된지 82일 만에 제33대 대통령(1945~1953년)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았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았으며,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하라고 명령한 국가원수이다.
2. 주은래(周恩來, 저우언라이, 1898~1976) - 마오쩌뚱의 뒤를 이어 중화인민공화국 제2대 주석(1954~1976)이 됨.
3. 혜산(惠山) - 함경남도 북쪽 끝에 있는 군

[범용기 제2권] (33)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도농에서 서울에, 다시 부산에로

도농에서 서울에, 다시 부산에로

강원룡[1]과 그 식구도 도농에 피난해 있었는데 처음에 정거장 건너편 마을에 방을 얻고 살았다. 그러다가 마감판에 우리 동리에 왔다. 방공호 속에서 찬송하고 예배하며 몹시 초조해 했다.

도농이 해방되던 이튿날 나는 서울로 간다. 강원룡은 아직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면서 만류한다.

나는 떠났다. 길가에는 국군 헌병의 검문소가 5리에 하나쯤은 있는 것 같았다.

‘목사’라니까 신임하고 보낸다. 신양섭도 같이 간다. 머리를 박박 깎았기 때문에 인민군으로 의심받아 까다롭게 묻는다. 나는 우리와 고난을 같이하던 우리 집안 식구니 내가 책임진다고 다짐한다. 그는 해방을 위한 숨은 일꾼이었다고 했다. 무사하게 동대문 밖까지 왔다. “서울이 다 탄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구먼!”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걸었다.

동대문에 들어서자 서울은 없다. 오장동에 갔다. 재와 흙과 기와조각 벽돌부스러기로 된 벌판이었다. 맏딸애 집이 어느 쯤이었던지 짐작이 안 간다. 나와 아내는 여기쯤일 것이라고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맏딸 ‘정자’가 나타나 “우리 다 살아 있어요!” 한다.

얘기는 이러했다.

“병원은 이층집이었는데 동리 사람들과 함께 병원 지하실에 모여 있었다. 불 혀가 지하실 천정을 훑는다. 정자는 만삭이 지난 몸으로 지하실 들창을 부수고 기어올라, 꼬마 딸 혜림을 끄집어냈단다. 그리고 동쪽 신작로로 뛰다가 길가 패인데 빠진 대로 한참 있었다. 남편 신영희 의사는 부상하고 쓰러진 동민들의 응급치료에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자기 집이 타는 것을 보고 뛰어와서 불 속으로 마구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식구들을 건지려는 것이었다. 정자가 소리쳤다. ‘우리 다 나왔으니 이리오라’고.”

그래서 모두 살았다는 것이었다.

원래 ‘오장동’이란 데는 일제시대의 ‘하나마찌’(花町)[2]이어서 가난한 농촌 조선 아가씨들을 ‘인육장사’하는 일인들이 사다가 ‘우리’ 속에 가둬놓고 밖에는 휘황찬란한 전등으로 오색구름 같이 꾸민다. 젊은이들의 ‘울적’[3]을 발산시킬 고장이 거의 없었던 때라, 청년들은 공창가, 사창가를 산보삼아 거닌다. ‘화정’ 변두리에는 ‘색주가’[4]도 많다. ‘북청집’이니 ‘함흥집’이니 하는, ‘광목’[5] 조각에 쓴 가호(家號)가 너풀거린다. 거기서는 주로 막걸리, 소주, 돼지순대 따위를 판다.

그 옆에 있는 호화판 공창가를 지나가노라면 아가씨들이 달려나와 억지로 ‘납치’한다. 술상이 들어온다. 안주도 있다. 얼근[6]해지면 자리에 눕는다. ‘화대’(花代)는 꽤 비싸다. 못 내면 그 아가씨의 빚이 된다. 아가씨들은 오래 있을수록 빚이 는다. 그래서 계약기간이 연장된다. 어떤 넉넉한 젊은이가 정이 들어 ‘속량’해 내기 전에는 평생 풀릴 길이 없다.

‘오장동’이란 그런 고장이었다.

‘유엔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는 오장동 뒷산 넘어서 한강을 건너 곧장 오장동에 진입한다. 미군의 응원폭격이 거기에 집중됐다. 주로 소이탄[7]이었다. 삽시간에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불에 잿더미가 됐다. 한 채의 집도 없었다. 나는 다시 소돔ㆍ고모라 얘기를 연상했다.

어쨌든, 신 의사와 정자는 불타는 아궁이에서 끄집어낸 ‘타다 남은 부지깽이’같이 구원되었다. 만삭된 날짜보다 한달이나 늦게사 정자는 첫 아들을 낳았다. 지금 한양공대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는 ‘민섭’[8]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도중에 낫대서 내가 ‘민섭’이라 이름했다.

아내와 나는 동자동 우리 집에 찾아왔다.

다 부서지다가 부엌과 작은 안방과 6조짜리 거실과 옆에 붙은 길쭉하고 좁은 곳간방이 남았다. 8조 다다미방도 몰골은 남아 있었다. 변소 모새기 아름드리 살구나무는 허리가 부리진대로 죽지는 않았다. 정원의 덤부사리[9] 나무는 제멋대로 자라서 담장을 넘었다.

나는 그 살구나무 부러진 가지를 베여 도끼로 장작을 팬다. 장작가리[10]가 뒤뜰 담장 밑에서 날마다 자란다. 그것도 취미였다. 신자가 6조 다다미 방에서, 혜원은 옆 곳간방에서 잔다. 나머지 식구들은 작은 안방에 몰아 넣었다.

도농에 피난 갈 때 마루 밑에 감췄던 책들은 한 절반씩 썩다 남았다. 쓸모가 없었다.



[각주]
1. 강원용(姜元龍, 1917~2006) - 1917년 7월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태어났다. 1931년 개신교에 입교했고, 같은 해 차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만주 북간도 용정의 용정중학에 진학, 윤동주 문익환 등과 친분을 가졌으며, 브나로드 운동에 참가했다. 그후 북간도 은진중학교에 수학하면서 은사 김재준을 만났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메이지 학원 영문과에서 수학하고 1940년 일본 메이지 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뒤 만주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43년 일본 경찰을 피해 북간도에서 은거하다 1944년 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옥중에서 단식 끝에 결핵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해방 후 김재준 목사가 경동교회를 설립할 때 참여하였으며 한신대학교에 입학했다. 1946년 김규식과 인연으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947년 12월에는 민족자주연맹 기획담당 책임자로 참여하였다. 단선 실시 후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1948년 한신대학교를 졸업, 1949년 11월 김재준의 후임으로 경동교회 목사로 부임한다. 기독청년연합회 정치부장을 지내다 1953년 도미하여 캐나다로 유학, 1954년 캐나다 매니토바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1956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을 거쳐 1957년 미국 뉴스쿨대학교대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5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강의, 세미나, 학술대회 등을 주관하였다. 1961년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 및 중앙위원이 되었다. 1972년 박정희의 유신에 반대하여 1974년 김수환, 함석헌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가, 대표위원에 피선되었다. 1980년 8월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었고, 1981년 WCC 중앙위원회에 참석하였다. 1986년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협의외 대표회장에 피선되었다. 1986년 경동교회 목사직을 은퇴하고, 1986년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의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 회장 등을 역임했다.
2. 화류계, 유흥가, 유곽
3. 울적(鬱積) - 불평불만이 발산되지 않고 겹쳐 쌓임
4. 색주가(色酒家) - 젊은 여자를 두고 술과 몸을 파는 영업을 하는 집
5. 광목(廣木) - 무명 올로 당목처럼 폭이 넓게 짠 베
6. 얼근하다 – 술에 어지간히 취하여 어렴풋하다
7. 소이탄(燒夷彈) - 사람이나 건조물 등을 화염이나 고열로 불살라서 살상하거나 파괴하는 폭탄이나 포탄
8. 신민섭 - 신영희 장로의 아들, 2001년 성호교회 장로로 임직하였다.
9. 덤부사리 – 여러 개의 덤불이 어수선하게 엉켜있는 수풀. 충북지방의 방언이다.
10. 장작가리 – 장작을 한데 모아 수북하게 쌓아올린 큰 덩어리

[범용기 제2권] (32)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국련군의 서울 탈환

국련군의 서울 탈환

1950년 9월 2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기습상륙으로 인민군 대열은 허리가 끊어졌다. 패잔병이 되어 이북에로 도망친다. 그 도망부대에서 탈락된 인민군은 농군의 삼베옷을 얻어 입고 빌어먹으며 북향 길을 걷는다.

무기 없는 군인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9월 28일에 국련군은 서울을 탈환했다.

그날 밤, 보름달이 유난스레 밝았다.

나는 도농 언덕 능선에 업데서[1] 서울 쪽을 바라본다. 작은 산, 큰 산이 가로 세로 엉켜서 서울은 안 보인다. 그러나 서울 하늘은 보인다. 불빛에 하늘이 탄다(火光衝天)[2]는 표현 그대로였다. 온통 불바다였다. 그 타오르는 불바다에 내리꽂히는 불화살이 벼락을 친다. “우르쿵, 쿵쿵” 먼 우뢰 같이 둔하고 뭉쳐진 음향이다.

‘저 불 속에서 살아남을 인간이 하나라도 있을까’ 싶었다.

나는 소돔ㆍ고모라의 멸망의 날을 연상하며 아브라함의 하소연을 되새겼다.

거의 무감정 상태가 된다. 멍하게, 남의 일 보듯 한다. ‘물 건너 화재’ 구경이랄까, 큰딸 정자는 남편인 신영희 의사와 함께 오장동에서 산다. 정자는 만삭된 무거운 몸으로서 어떻게 지내나 싶었다.

도농역과 그 건너편 마을에도 미군폭격이 치열했다. 내가 사는 지금리는 역에서 걸어서 15분쯤 거리다. 지금리 주민들은 조금 치벽한[3] 도농 골짜기 빈 집에 옮겼다. 그 집 주인은 교회 집사였는데 피난가고 집이 비어 있었다. 농가에는 소먹이 마른풀이 집더미처럼 싸여 있다. 거기 몸을 파묻으면 추운 줄 모른다. 나는 마른풀데미[4] 위에 누워 미군폭격기 급강하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민들은 꽤 높은 도농 막츠기 언덕을 넘어 저쪽 골짜기에 일시 피신한다면서 나도 같이 가자고 한다. 춘우 아버님이 인솔자였다. 고개 마루에까지 올랐다. 목적지인 동리가 눈 아래 보인다. 춘우 아버님이 혼자 가서 정탐하고 온다.

그의 보고는 실망적이었다. ‘거기에는 진짜 빨갱이 집이 네 호나 있어서 위험천만’이란 것이었다. 우리는 도루[5] 오다가 어느 농가에서 밤을 샜다. 늦은 가을밤, 냉돌[6]이라 밤새도록 소금만 구웠다.

들리는 것은 기관총소리 뿐이다.

“저게 인민군 기관총일까, 국군 기관총일까?”

아침 일찍 나는 어린 식구들을 올망졸망[7] 데리고 춘우네 집으로 간다. 총탄이 하늘 공중을 제비처럼 날아간다.

춘우 삼촌과 춘우 두 분이서 깊숙하게 파놓은 방공호에 들어가서 밖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방공호는 출입구에도 덮개가 있고 안에는 기둥새우고 판자로 벽을 두르고 멍석도 깔고 두세 집 식구가 앉아도 그리 비좁지 않게 돼있었다. 밥은 숱불로 익힌다. 연기 나면 당장 표가 나기 때문이다.

춘우 삼촌은 딴 동네인 자기 집에 나갔다가 파편에 맞아 엉덩뼈가 부서졌다.

그 다음날에던가 도농도 해방됐다. 그동안 신양섭은 우리 집에 와 있었다.

정거장 옆 언덕 능선을 왔다갔다하는 병정이 보인다. 저게 국군일까 인민군일까. 신양섭은 “제가 가 보고 오겠습니다” 하고 논두렁을 타고 그리고 간다. 곧 돌아왔다.

“미군이었습니다. 어제 밤에 도농 인민군은 다 도망하고 국군이 점령했답니다. 밤새도록 나던 기관총 소리는 국군의 기관총이었답니다.”

도농에 진주한 국군은 곧장 도농 막치기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을 포격하여 그 동네는 전멸됐다고 한다. 우리가 피난 가려던 바로 그 고장이다.

결국 도농도 완전 해방됐다. ‘부역자[8] 처단’이란 새 문제가 등장한다.

나와 내 식구들에게 자기 집 문깐방을 제공하고 신변을 보호해 준 이학우 군은 ‘동책’으로, 이북시찰까지 갔다 온 청년이니, ‘부역자’란 딱지가 붙을만도 했다.

그는 안절부절 몸 둘 데를 몰라 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그를 보호해야 할 처지였다. 나는 우선 집에 숨어 있으라 했다. 마루 밑에 숨겼다. 며칠 지나 그는 몸부림친다.

“여기서 부역자로 죽을 바에는 차라리 이북 가서 ‘빨갱이’로 살겠다. 나는 간다”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선다.

나는 그를 부여잡고 늘어진다.

“이북에까지 갈 수도 없을 것이고 설사 간다셈 치더라도 남에 내려갔던 네 큰형 춘우와 지리산에 출전한 네 둘째 형 창우가 돌아온 다음에 의논해 할 것이다. 그때까지 참아라. 그리고 그때까지의 네 신변은 내가 책임진다….”

그래서 겨우 붙잡아 놓았다.

나는 동민들의 진술서랄까 증언이랄까를 초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학우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가난한 집 자식도 아니다. 맏형은 『리더스다이제스트』 한국판 책임자고 둘째 형은 지리산 토벌대장인 국군헌병 소령이다.

그런 가운데서 부모와 식구들과 가산을 지키려면 물샐틈없는 위장전술이 필요했다.

그는 동네에 위험한 일이 생길성 싶으면 미리 알려 대처하게 했다.

보라, 이백여 호 되는 큰 동네에 소나 돼지, 닭 한 마리, 쌀 한말인들 수탈된 일이 있었는가? 모두가 ‘학우’의 지혜로운 작전에서 거둔 열매다. 그는 애국자였고 부역자가 아니었다….

심사당국의 신중한 고려를 바란다.”

그 밑에 동민 전체가 서명날인하고 내가 증인으로 서명해서 파출소장에게 직접 제출했다.

파출소장은 “그러면 형들이 올 때까지 사건 처리를 연기한다”고 대답했다.

한 열흘 됐을까, 둘째 형인 헌병소령(?) 창우가 와서 찦차로 ‘학우’를 자기 병영 안에 옮겼다.



[각주]
1. ‘엎드려서’
2. 화광충천(火光衝天) - 불빛이 하늘이라도 찌를 듯이 그 형세가 맹렬함
3. 치벽하다 – 외진 곳에 치우쳐서 구석지다
4. 데미 - ‘더미’의 방언
5. 도루 - ‘도로’의 방언
6. 냉돌(冷堗) - 불기 없이 찬 온돌방
7. 올망졸망 – 작고 도드라진 것들이 고르지 않게 벌여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몸집이 작고 귀여운 아이들이 많이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8. 부역자(附逆者) - 국가에 반역하는 일에 가담하거나 편드는 사람

[범용기 제2권] (31)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도농에서

도농에서

‘학우’는 큰 형과 둘째 형이 모두 인민군의 숙청대상자에 해당되느니만큼, 집을 보존하고 부모와 동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철저한 변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충성을 보였다. 그래서 ‘동책’인가 됐다. 밤낮 지시가 온다. 동민을 자기 집 뜰 앞에 모여 놓고 ‘지시’사항을 결의시킨다. 미군 폭격 때문에 다리는 연방 부서진다. 그러면 동민은 새벽까지 수선해야 한다. 이북 군수품 수송로기 때문이다. ‘눈감고 아웅’ 하는 식의 ‘지시대로의 결의’, 당장 보내야 할 부역반(賦役班) 편성 등으로 새벽 세시쯤에야 헤어진다. 말하자면 들볶아서 딴 생각 못하게 하는 시책인 것 같았다.

동네에 소 몇 마린가 조사하러 나온다는 날에는 온 동네에 소를 숨기라고 미리 알린다.

나는 문간방[1]에 있길래 들창[2]너머로 그 광경을 목격한다. 그러나 어느 모임에는 나를 참여시키는 일은 없었다. 철저하게 숨겨주는 것이었다.

호구조사 나온다는 날이면, 나와 우리 식구에게 미리 통고한다. “멀찌감치 가서 어느 옥수수 밭에 숨어 계십시오…”

도농에 피란해 있는 우리 식구는 절량[3]상태에 들어간다.

아내는 서울 동자동 집에 차근차근 쌓아 놓는 장작을 시장에서 쌀로 바꿀 수 없을까 싶어 들어갔다. 신자가 같이 갔다.

장작으로 쌀을 바꾼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망상이었다. 아내는 혼자서 도농에 돌아왔다. “신자는 어디 있느냐”고 나는 물었다. 경기도 시골에 옷가지를 가지고 쌀 바꾸러 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새파랗게 질렸다.

“폭탄이 장마철에 비 오듯 하는 데 어쩌자고 아이를 혼자 보낸단 말이냐?”

“박봉랑 박사랑 ‘니하까’[4]를 끌고 그리로 간다길래 부탁해 보냈다”는 것이다.

며칠 후에 신자는 쌀 두 말을 이고 지고하면서 도농에 왔다. 그 얘기가 희안하다.[5]

쌀 실은 구루마[6]가 수백 대 줄지어 어느 언덕 신작로를 가는데 갑자기 미군기가 저공 기총소사[7]를 퍼붓더란다. 급히 언덕을 굴러 몸을 숨긴 곳을 콩밭이었단다. 요란하던 기총소사 소리도 멈칫한[8] 것 같아 정신을 차리고 언덕을 기어 올라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고 길가는 수라장[9]이었다 한다. 나무바퀴가 달린 장난감 같은 ‘니하까’는 이미 바퀴가 물러앉아 쓸 수가 없게 되어 거기서부터 도농까지 이고 지고 안고 하면서 쌀 두말을 가져왔노라는 것이다.

나는 다윗의 망명 때 얘기를 연상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블레셋 지방 동굴 속에 피신했을 때, 광야라 마실 물이 없었다.

“아 내 고향 맑은 샘물을 한 모금 마셔보고 싶구나!” 하고 탄식한다.

부하 한 사람이 몰래 듣고 블레셋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샘물 한 통 떠갖고 왔다.

다윗은 감격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이것은 물이 아니라 네 피다. 내가 어찌 네 피를 마시겠느냐?” 하고 여호와의 제단에 관제물로 부었다….

쌀 두말을 앞에 놓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은 ‘쌀’이 아니라 신자의 ‘살’이다. 내가 어찌 네 살을 먹겠느냐?”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나는 다윗 같은 영웅도 아니고 그런 ‘드라마’를 연출할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목숨 걸고 가져온 신자의 성의에도 찬바람을 불어넣는 것이 될 것이었다. 이럭저럭[10] 우리 식구는 그것으로 한 달 가까이 연명했다.

하루는 내 큰 조카 ‘이용’이 이북에서 서울에 출장 와서 우리 식구를 만나자고 기별해 왔다. 맏딸 정자네 위층에 오겠다고 했다. 아내와 나는 40리를 걸어 그리고 갔다. 그는 노동당의 노동부장 직책을 갖고 있노라 했다. 그는 중학 2년 때부터 좌경이었고 동경법정 대학 정경과 재학 중에는 사회주의 교수들의 강의를 치우 듣고 친교를 갖고 있었다.

일제 말기에는 철저한 변장으로 시종하여 하얼빈 금융 합작사 간부로 있었다. 그러나 이북이 공산화되자, 그는 내 세상이 왔다고 ‘데뷰’해서 노동당 노동국장까지 치솟았다. 그는 ‘연안파’[11]였다.

그를 만났을 때, 신 의사는 수원에 피신 중이었고 정자가 맏딸 혜림과 같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가족끼리 모이니 ‘창꼴집’에서 자랄 때의 그와 다른 티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역시 피가 물보다 진하단 말이 옳구나!’ 하고 혼자 생각했다.

그때 다섯 살 된 혜림에게 노래를 시킨다. 혜림은 어린이 찬송가를 불렀다.

조카는 손뼉을 치면서도 “무슨 그런 노래를 하니!” 하고 혼잣말 같이 뇌였다.[12] 신 의사가 인민군의 의사 징발을 피하여 수원에 숨었을 때다. 조카는 “이런 난리 속에 아내와 어린 자식을 두고 저만 피신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나무람[13]도 한다. “사내자식이 비겁하다”는 뜻일 것이다.

나더러는 “아재씨[14]도 이북 오시면 극진한 우대를 받게 됩니다….” 하고 은근히 월북을 권하기도 한다.

그는 내 조카들 중에서도 머리 좋고 센스가 빠르고 재치 있는 좌익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후에사 알았지만, 그는 연안파 숙청 때 희생된 것으로 듣고 있다.

아내와 나는 서울 갔다가 도농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왕천 다리 바로 못미처 길가 버드나무 밑에 앉아 쉬고 있었다.

대왕천은 꽤 큰 시내다. 다리 둘이 나란히 서 있다. 기차 다리와 인도교다. 철교도 터널 바로 입구에 있다.

미군기가 날아와서 터널 속에 폭탄을 쏴 넣는다. 그리고 철교 위에 까만 폭탄 알을 낳아 팽개친다. 폭격기 배때기[15]가 철교에 닿을락 말락 낮게 내려와 알은 낳는데도 하나도 바로 맞지 않는다. 인도교와 철교 사이 물속에 떨어져서 모래를 태산 같이 인도교 위에 퍼 올린다. 우리는 아름드리 버드나무에 등을 대고 구경한다. 파편이 여기저기 날아온다. 바로 우리 밭 앞 논두렁에도 날아온다. 그래도 우리는 무사했다.

그런 판국에 파편이 우리 살에는 박히지 말하는 법이 없다. 폭격기가 멀리 달아나자 우리는 인도교 젖은 모래 위를 걸어 도농 길에 나갔다.

나는 역시 “하느님이 보우하사…”를 되새기며 집에 왔다.



[각주]
1. 문간방(門間房) - 대문간의 바로 옆에 있는 방
2. 들창 – 벽의 위쪽에, 위로 들어올려 열도록 만든 작은 창문
3. 절량(絶糧) - 양식이 다 떨어지는 것
4. ‘리어카’
5. 희안하다 - ‘희한하다’(보기에 매우 드물거나 신기하다)의 비표준어
6. 구루마 - ‘수레’(사람이 타거나 짐을 실어나르는 용도로 바퀴를 달아 굴러가게 만든 운송수단)의 비표준어
7. 기총소사(機銃掃射) - 항공기에서 땅 위로 표적을 비로 쓸어 내듯이 기관총으로 쏨
8. 멈칫하다 – 하던 일이나 동작을 갑자기 멈추다
9. 수라장(修羅場) - 아수라왕(阿修羅王)이 제석천(帝釋天)과 싸운 마당, 싸움이나 기타의 이유로 혼란에 빠져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된 곳. 또는 그러한 상태
10. 이럭저럭 – 정한 바 없이 되어 가는 대로 이러저러하게, 알지 못하는 동안에 어느덧
11. 연안파 –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후 입북한 조선의용군 출신의 정치집단으로 김두봉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김일성의 빨치산파와 대립하다가 한국전쟁과 ‘8월 종파사건’으로 축출되었다.
12. 뇌다 – 조그만 소리로 거듭해서 말하다
13. 나무람 – 어떤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야단처 꾸중함
14. 아재씨 - ‘아저씨’의 방언
15. 배때기 - ‘배’를 속되게 이르는 말

2026년 2월 26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30)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만우”의 인격과 “에피소드”

“만우”의 인격과 “에피소드”

‘만우’는 함경북도 웅기항에서 서북쪽 언덕 너머의 ‘웅상’이란 마을에서 났다.

뒤에는 송진산맥[1]이 드높게 태평양과 나란히 하늘가를 가로질러 달렸다.

앞면은 아득한 수평선으로 그어진 태평양이 활짝 열렸다.

바닷가에는 대암반도까지 백사장이 완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 해수욕장은 일본인들이 침흘리며 욕심내던 고장이다.

남만철도회사[2]에서 만주를 삼키고 일본해[3]를 ‘호수’로 만든다고 장담할 때, 그들은 ‘웅상’을 전 만주국[4]의 피서지로 설계했었다.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북관[5]의 선진’이었다.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망명하는 애국지사들이 ‘굽도리[6] 배’로 웅기항[7]에 상륙하여 ‘웅상’을 거쳐 ‘서수라’[8]까지 걸어, 거기서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또는 만주로 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기독교와 개화운동이 거의 동의어 같이 되어 있었고, 민족주의와 교회공동체와도 일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유랑하는 애국지사들이 뿌린 복음의 씨가 일찌감치 ‘웅상’에도 뿌리를 내렸다. 따라서 ‘만우’도 소년시대부터 기독교신자로 자랐던 것이다.

‘만우’는 꿈이 많았다. 그는 열세 살 때 집을 나와 ‘간도’에 달아났다.

간도에서는 성재 이동휘[9] 선생에게 사사(師事)[10]했다. 귀여운 13세 소년이 큰 뜻을 품고 간도에 모험했다는 것이 기특하대서 ‘성재’ 선생은 ‘만우’를 어린 ‘제자’로 항상 곁에 두어 듣고 보고 증언하게 했다.

하루는 성재 선생을 따라, 강가 섬에 갔다. 성재 선생은 저쪽 큰 섬에 앉고 ‘만우’는 그 옆에 작은 바위 우에 있었다. 성재 선생은 섬에서 우뢰 같이 우렁찬 소리로 통곡했다. 주먹 같은 눈물이 펑펑 소꾸친다.[11]

“이 나라, 이 민족을 어찌 하려는고!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종으로 팔려도 제 욕심만 부리는구나!”

그는 사자가 고함치듯, 지렁지렁 산울림을 떨게 하며 한참 통곡했다 한다.

이것은 그가 북간도에서 경영하던, 독립군 장교양성소인, 군관학교가 경영난으로 폐문하게 된 때에 그 학교 경영비 조달을 위한 최후수단으로서의 ‘고육책’[12]이었다 한다.

“‘성재’가 마적에게 납치됐다. 보상금 ○○○원을 ○○날까지 ○○에 가져오라…. 그러지 않으면 ‘성재’는 죽는다….”

이 소문을 항간[13]에 돌아가게 하고서 돈 들어오기를 숨어 기다리는 것이었다 한다. 그 일을 위한 ‘사동’[14]으로 소년 ‘만우’를 데리고 간 것이라 했다.

그의 이런 고육책도 소용이 없었다. 간도와 그 근방 만주에는 2백만 교포가 망명 또는 이주해 있었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쳤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성재’는 시베리아로 떠난다. ‘만우’는 자기도 따라간다고 졸랐다. 그러나 ‘성재’는 허락하지 않았다.

“너는 본국에 돌아가서 신학공부하고 목사가 되라!”

그래서 ‘만우’는 집에 돌아왔다. 소년이지만, 농사일에 참여해야 한다. 김매고, 소 먹이고, 콩씨 뿌리고… 그는 고단했다. 몸보다도 맘이 가만있지 않는다. 그럭저럭 몇 해 지났다.

그는 도망쳐서 서울에 왔다. 피어선 성경학교에 입학했다. 한 달에 16원씩 도와주는 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달, 돈이 안 온다. 알아봤다. 벌써 보냈다는 것이었다. ‘만우’는 어느 놈이 가로챘구나 싶어서 몰래 조사했다. 같은 반 학생 하나가 봉투 속 소액수표를 훔쳐 쓴 것이었다.

‘만우’는 학우회 모임에서 벽에 걸린 지도축[15]으로 그놈을 두들겨 팼다. 지도축이 부서지고 동강났다.

선생이 들어와서 지도축이 동강난 이유를 묻는다. ‘만우’는 설명했다. 그 학생은 ‘도둑놈’으로 퇴학됐다.

‘만우’는 정답고 세련된 미남자였다. 그러니만큼 따르는 처녀들도 많았다. 일본 유학 초기에는 ‘만우’를 사모하는 일본 처녀도 한두 사람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만우’는 여전히 정답게 친교를 계속한다. 그러나 선을 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만우’는 일본말을 배운 일도 없고 영어를 배운 것도 아니었다. 일본말을 못하면서도 일본 유학에서 좌절된 일이 없었고, 영어를 모르면서도 미국 유학에서 최고 학위까지 획득했다. 그리고 간 데마다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벽’이라도 ‘문’이라 믿고 밀어닥치면 ‘문’이 된다.”

‘만우’의 미국 유학에서 첫 신학교는 ‘싼안셀모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샌프란시스코신학교’였다.

영어는 듣지도 보지도 읽지도 못하니 크레딧이 나올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인격적으로는 교수들도 같은 교수인양 존대했고 학생들은 ‘선배’로 경의를 표했다.

학비가 대중없이 부족해서 하기 방학에는 노동이라도 해야 했다. ‘레더스’ 솎아내는 농장 일을 얻었다.

멕시코 인부들 틈에 끼어 그들과 같이 일한다. 한 사람이 한 이랑씩 맡는다. 멕시코 인부들은 숙련공일뿐 아니라, 체력이 몇 갑절 세다. 뒤에는 말탄 감독이 뒤떨어지는 자를 기다란 채찍으로 후려갈긴다. ‘이랑’[16]이 어찌나 긴지, 끝이 안 보인다. 이랑 끝까지 단번에 가야 한다. ‘만우’는 죽어라고 애써도 노상 뒤떨어진다. 솎아내는 기술이 없으니 시간도 많이 든다. 감독의 가죽 채찍이 등을 후려갈긴다.

밤 잠자리가 더 큰 문제다.

밭 모새기에 큼직한 바라크[17]가 있다. 거기는 멕시코 인부들 합숙소다. 조금 떨어져서 한 두 사람 잘만한 작은 ‘바라크’가 있다. 그것이 ‘만우’의 숙소다.

‘만우’는 고단해서 일찍 잔다. 멕시코 인부들은 술 먹고 떠들다가 ‘만우’ 숙소에 침입하여 ‘남색’을 강요한다. ‘만우’는 도망친다.

어느 포도원 속에 들어갔다. 포도원 주인은 일본인이었다. 언어가 통하니 친교도 통한다. 주인은 과수원에서 포도 따는 일, 사과나 배에 종이봉지 입히는 일 등등을 하라 한다. 감독이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니 자유로 기분 내키는 대로 쉬며 일하라고도 한다.

‘만우’에게는 그 주인이 ‘천사’같이 고마웠다. 주인은 ‘만우’에게 ‘동부’로 갈 여비를 마련해 준다. 그래서 프린스톤 신학교에 다니게 됐다.

오랜 후일에 ‘만우’는 ‘한신’ 학장이 됐다. ‘장공’의 신학을 ‘이단’으로 규정지으려는 미국 선교사들과 이북 피난 목사들의 공동전선이 형성되는 중이었다.

총회장 ‘이자익’[18]은 이쪽에 가서도 “그래, 그래!” 저쪽에 가서도 “그래, 그래!” 도무지 대중을 잡을 수 없는 인물이란 평을 받고 있었다.

그는 걸핏하면 ‘한신’에 찾아온다.

한신 입장에 동조한다는 자기의 의사표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싫어했다. 때로는 미워했다. 그러나 ‘만우’는 그를 모셔들어 푸짐하게 식사 대접하고 선물도 주고 친절과 공손으로 그의 기분을 돋운다.

나는 불평했다. “어쨌다고 그 영감을 그렇게 치켜 올리는 거요! ‘한신’의 위신도 생각해야 하잖겠소?”

그럴 때 만우의 대답은 언제나 같은 것이었다.

“미운 놈 떡 한 개 더 줘도 손해보다 이익이 많을 거요!”

해방 직후 적산 접수에 미쳐 돌아가던 때 얘기다. 우리가 합법적으로 접수한 천리교 재단 목록에는 용산 근처에 있는 광대한 집회실과 기숙사를 겸한 대하(大廈)[19]도 들어 있었다. 그 집을 상명여고 교장(女子) 남궁 처장에게 말하여 이중으로 계약했다. 그래서 “계쟁중의 적산”에 들었다. 그러나 실상으로는 이미 상명여고에 넘겨준 것이었다. ‘만우’는 여자 의복을 한 벌 갖고 가서 양복 위에 치마저고리를 입고 남궁 처장 앞에 나타났다.

“당신은 치마저고리 앞에서는 법도 의리도 없이 ‘예, 예’하는 것 같으니 나도 치마저고리를 입었소!”

‘만우’에게는 영웅주의(Heroism)가 남아 있었다. Hero가 되려면 전술과 전략이 필요하다. 싸움에서는 이겨야 한다. 그는 때를 못 만난 Hero였다. 그는 ‘情’과 ‘恨’이 넘치는 Hero였다. 이것은 내 망평일 수도 있겠기에 독자의 동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게는 둘도 없는 친구요, 동지요, 형제다.



[각주]
1. 송진산맥(松眞山脈) -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회령시, 경흥군의 경계에 있는 조두령의 북쪽에서 시작하여 대체로 동서방향으로 뻗어 나선시 화대산에 이르는 산맥, 함경산맥의 지맥이다. 길이는 60km, 평균 해발은 650m, 너비는 8~12km이다.
2. 남만철도회사 – 1906-1945년까지 만주에 존재했던 반관반민(半官半民)의 특수 일본회사.
3. 일본해(日本海) - ‘동해’를 일본측에서 이르는 말
4. 만주국(滿洲國) - 일본이 1932년에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 세운 국가. 1945년에 일본에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여 죽구에 반환될 때까지 존재하였다.
5. 북관(北關) - ‘함경도’를 달리 이르는 말
6. 굽도리 – 장판과 접해 있는 벽의 아랫부분
7.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에 위치한 이 항구는 1921년에 개항장이었다가 이후 무역항으로 정식 개항한 항구로 북한에서는 웅기 일대의 지명을 개칭하여 선봉군으로 취급하였고, 이 이름을 붙여서 선봉항으로 부르고 있다.
8. 서수라(西水羅) - 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 두만강 하구 남서쪽에 있는 항구
9. 이동휘(李東輝, 1973~1935) - 일제강점기 신민회 간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호는 성재(誠齋).
10. 사사(師事)하다 – 스승으로 섬겨 가르침을 받다
11. ‘솟구친다’
12. 고육책(苦肉策) - 자신의 피해를 무릅쓰고서 어쩔 수 없이 택한 방책
13. 항간(巷間) - 일반 사람들 사이
14. 사동(使童) - 관청이나 회사, 학교, 영업처 등의 사무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
15. 축(軸) - 둘둘 말도록 되어있는 물건의 가운데에 끼는 막대
16. 이랑 – 갈아놓은 밭의 한 두둑과 한 고랑을 아울러 이르는 말
17. baraque : 주둔군을 위해 만든 막사
18. 이자익(李自益, 1882~1961) - 해방 이후 대전성경학교 초대 교장, 장로회 총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경남 남해에서 출생하여 선교사 테이트(L.B. Tate, 최의덕)를 만나 예수를 믿고 조사로 일하게 되었다. 191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9년 전북노회장, 1924년 제13회 총회장, 1927, 1928년 경남노회장을 역임하고, 해방 후 1947년과 1948년에 연속으로 총회장에 추대되었다.
19. 대하(大廈) - 덩실하게 큰 집, 규모가 큰 건물

[범용기 제2권] (29)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만우”의 납북

“만우”의 납북

그후 며칠동안 송 목사는 집에 있었다. 더운 때라, 모시 고의적삼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루는 민청 젊은이들이 자동차를 갖고 찾아왔다. “송 박사님, 잠깐만 여쭤볼 말씀이 있어서 모시러 왔습니다. 자동차로 모시렵니다. 곧 또 댁에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송 목사는 그럴줄만 믿고 세마포 잠뱅이[1]만 걸치고 차를 탔다. 그들은 국립도서관에로 모신다. 들어서자, 문들이 잠긴다. 검은 커튼이 창을 막는다. 깜깜한 버스에 실려 어디로인지 모르게 사라졌다. 그것이 소위 ‘납치’란 것이었다.

‘한신’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권대희[2] 목사는 전택완[3] 장로댁 벽장에 숨었다가 인민군이 쌀 저축량 조사할 때 들켜서 초기에 납치됐다.

납북인사의 행렬은 길었다. 파주 쪽으로 기차에 실려간 행렬도 있고 철원 쪽으로 걸어간 행렬도 있었다. 송 목사에 대해서는 소식이 구구했다. 어떤 사람은 파주 쪽 금천역에서 봤다 하고, 어떤 사람은 철원에서 금화가는 길에서 봤다고 한다. 그 중 철원설이 더 신빙성이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신당동 사는 한 탈주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수백 명 인사가 두 줄로 서 간다. 오른켠 사람의 왼손과, 왼켠 사람의 오른손을 함께 묶는다. 인민군 두 세 사람이 줄 끝을 쥐고 끌어간다. 송 목사는 걷다걷다 못해 기진맥진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인민군은, 송 목사와 나란히 묶여가는 젊은 친구에게 송 목사를 업고 가라했다. 송 목사는 업혔다. 한참 갔다.

송 목사는 그 젊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젊은이 누구신지 모르지만 고맙소. 나는 남대문밖 도동에 사는 송창근 목사요. 혹시 젊은이가 탈주해서 서울에 가거든 내 ‘제삿날’이 9월 29일이라고 전해 주소.”

그리고서 몸을 땅에 던져버리더라는 것이다. 낙후자는 총살하는데, 총소리는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 사람이 도중에서 옥수수 밭 속에 변보러 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때 그 자신이 얘기한 그대로라고 들었다.

송 목사 큰 아들 윤규는 철원-금화방면에 가본다고 준비했다. 그러나 10월 8일 국련군이 38선을 돌파 북진하는 바람에 길이 막혀 버렸다.

후일에 이북에서 이남에 망명한 김창순이란 사람이 자기가 납치인사들 담당관이었다면서 사연들을 상세하게 동아일보에 연재한 일이 있다. 너무 Dramatize한 느낌이 있지만 ‘만우’의 면모가 드러나는 구절도 많았다. 만우 일행은 압록강 중류 중강진 쪽으로 걸어가다가 도중에서 구자옥[4] 서울중앙 Y총무가 지쳐 쓰러져 묻힌 무덤을 찾아 목놓아 통곡했다는 얘기, 중강진에서 기독교연맹 김창준 목사가 일부러 환영한다고 찾아왔을 때, “이 배신자야 물러가라!”고 호통했다는 얘기 등등은 ‘만우’ 아니고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느꼈다. ‘만우’는 평양까지 갔었으나 장질부사[5]에 걸려 민가의 독방에 감금된대로 세상 떠났다는 것이 김창순의 얘기였다.

어떤 이는 ‘만우’의 대남방송을 들었다고도 했지만, 내가 들은 대남방송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권태희’[6]의 방송은 나도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권태희는 지금도 생존해 있다는 것이다.



[각주]
1. 잠뱅이 - ‘잠방이’(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도록 짧게 만든 남자용 홑바지)의 비표준어
2. 권태희 목사를 말하는 듯
3. 문동환 박사의 회고에 의하면 전택완 장로는 만주 용정 중앙교회를 다닐 때 1938년, 29세의 나이로 장로로 장립받았으며 주일학교 교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성남교회에서 1949년에 장로로 취임하여 섬겼는데, 6ㆍ25 당시 송창근 박사를 비롯한 교수들이 신학교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피난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던 문동환 박사에게 서울을 빠져나가라고 강권했다고 한다. 전택완 장로는 1979년에 서울성남교회 원로장로로 추대되었으며, 1983년에 우석해외선교회를 설립하였다.
4. 구자옥(具滋玉, 1887~1950) - 일제강점기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 해방 후 경기도지사를 역임했다. 태평양 전쟁 기간에 친일 단체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친일 행사에는 소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에 경기도청사에서 조선인민군에게 납치되어 북송되었다.
5. 장질부사(腸窒扶斯) - 장티푸스균에 의하여 발생하는 법정 전염병의 하나
6. 권태희(權泰羲, 1907~1983) - 숭실전문과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으며 도시샤 대학 신학과에서 수학하였다. 조선신학교 전임강사, 1947년 김천공립중학교(현 김천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경북 김천갑)을 역임하였는데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으며, 기독교연맹의 설득으로 김창준 기독교연맹위원장 산하에서 종사하였다.

[범용기 제2권] (28)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만우”의 자택 감금

“만우”의 자택 감금

그후부터 자택 감금 상태여서 아무도 얼씬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도농에 피난해 있었다. 하루는 신양섭이 도농에 찾아왔다. 그는 우리 졸업생으로서 ‘기독교연맹’ 맹원[1]으로 가장하고 있었다. 그 덕택에 저쪽 소식을 적어도 한주일쯤은 앞당겨 알아낸다. 그리고서는 송창근 학장과 도농에 있는 나에게 전한다. 그는 자전거 타고 40리길을 한주일 두세 번 다녀간다. 겁 없는 친구다. 그는 이렇게 전한다.

“전쟁은 말기 현상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저애들은 초조하게 발악합니다. 오늘은 송 목사님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송 목사님이 김천교회를 목회할 때 집사로 있던 ‘박철’이란 사람이 김일성이 지명한 이남 국회의원격인 인민대표자의 하나로 월북한 일이 있었는데 그자가 이번에 서울 와서 송 목사님을 찾아뵙고 사연을 말하더랍니다.

‘제가 송 목사님 신분과 안전을 절대 보장합니다. 안심하고 댁에 계십시오. 그리고 다른 교수들의 안전도 절대 보장합니다. 다들 돌아와서 다시 신학교를 맡으라고 하십시오!’” 했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이튿날, 신학교 건물을 접수하여 지키고 있던 ‘민청’ 아이들을 당장 몰아내고 모든 재산과 관리권을 송 목사에게 도루[2] 마끼더라고[3] 했다.

송 목사는 혼자서 그 건물을 맡아 돌아보노라니 외로워 견딜 수 없었다면서 “‘장공’을 데려오라고 해서 일부러 왔습니다” 한다.

나는 갈 생각도 있었지만, 그때 역시 악성 마라리아[4]에 걸려 매일 떨고 있는 판이었고 못 먹고 쇠약해서 일어서다가 까무러치기도 하는 형편이어서 40리를 걸을 자신이 없었다. “몸이 좀 나으면 간다고 송 목사에게 알려라” 하고 돌려보냈다.

성결교회 신학교도 접수되고 박현명 목사 등도 숨어 있었는데 송 목사는 일부러 박현명 교수를 찾아가서 한신재단 반환된 얘기를 하고 ‘박철’을 만나라 했단다.

그대로 해서 성결신학교도 되찾고 박현명[5] 교수와 다른 선생들도 학교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한주일 지나서였다. 신양섭은 다시 도농에 왔다.

“목사님, 그때 서울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서울 안 목사 40여명이 몽땅 잡혔습니다.”

인민군 정부에서는 종로 YMCA회관에서 목사들 주최로 대대적인 ‘미영격멸대회’를 열라고 지령해 왔었는데 유호준ㆍ김종대 등을 주최자로 강제 등장시켰고 송창근 목사도 단위에 앉히려고 강권하더라는 것이다. 송 목사는 청중들 틈에 끼어 앉았었지만, 안고 밀고하면서 단상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시종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시민이래야 모두 소개하고 몇 사람 없는데 늙은 할머니들이 수십 명 나와 앉았더라고 한다.

그 모임은 완전 실패였다. 그 후부터 목사 잡기 운동을 벌여서 우선 김재준부터 잡으려고 동자동을 비롯하여 있음직한 곳은 모조리 찾아다녔단다. 사람들은 김재준의 행방을 물어도 ‘모른다’고만 대답한다. 나는 도농에로 떠날 때 동사무소에 소개지 주소를 정직하게 써 놓고 왔으니까, 그것만 들춰봐도 알법한 일이었지만 그건 건드리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모두가 엉터리 주소를 써 놓았기 때문에 나도 예외가 아니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단다.



[각주]
1. 맹원(盟員) - 특정한 동맹에 속해 있는 개인이나 집단
2. 도루 - ‘도로’의 방언
3. ‘맡기더라고’
4. 말라리아(malaria) - 열대, 아열대에 많이 서식하는 학질모기를 통해 옮기는 전염병
5. 박현명(朴炫明, 1900~납북) - 성결교 목사.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처가는 이준을 배출한 명문가였는데 과거 공부를 위해 처가에서 공부하다가 근처의 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되었다. 성결교 계열의 경성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되어 있던 8월 23일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기독교도 연맹회의에 송창근 등과 함께 참석했다가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범용기 제2권] (34) 부산 피란 3년 - 1ㆍ4 후퇴

1ㆍ4 후퇴 1950년 6월 27일에 미국 대통령 트루먼 [1] 이 ‘국련’ 결의를 거치지 않고 대만 해협에 미국 제7함대를 파견한데 대하여 많은 ‘국련’ 가맹국과 국제여론이 악화됐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사이에 어떤 예측 못한 중대 사태가 일어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