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16-19] 대리적 소수 – 1982년 11월 7일, 김상근 목사

대리적 소수

1982년 11월 7일 / 마가복음 3장 16-19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지금 개인으로 여기 예배의 자리에 나아왔다. 개인은 끝까지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무지 우리를 오직 한 사람으로만 보시려 하지 않는다. 나를 많은 사람과 연관시키신다. 하나는 백이요 혹은 천이요 혹은 만, 십 만이라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누군가? 이것이 이번 증언 동안 우리에게 물어오는 물음이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우리에게는 넘겨버릴 수 없는 갈등이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최근 수요강좌에서 우리 교회의 위치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있다. 우리 교회가 참으로 오늘에 와서는 한 마디로 ‘유명해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때 유명해진 그것이 겉만 번지르르한 것이지 내용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우리는 갈등하기도 한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상당히 본질적이고 성서적인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는 꿋꿋하게 신앙을 생활해 오고 있고 쉽게 흔들리거나 좌우되지 않는 우리의 특유한 신앙이 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기장성’이라 하고 이제 이 말은 교계에서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다. ‘수도교회상’과 같은 이상을 가진 교회도 드물다. 그저 이상이 있다면 ‘전도하는 교회’, ‘기도하는 교회’, ‘성경 읽는 교회’, 혹은 1,000명 돌파, 1억 목표……. 그러나 우리가 갖는 갈등은 거기에 아무런 힘도 생기지 않고 뜨거운 진실도 일어나지 않으니 그 신앙고백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갈등이다.

입을 열면 제법 그럴싸한 주장이 쏟아져 나온다. 설교를 들어도 제법 수준 높게 듣는다. 설교를 잘한다, 못한다 할 만큼 그리고 그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말이 아닌 수준에 이르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수준 높은 설교를 들어도 그것이 우리의 가슴에 와서 충격을 일으키지도 않고 우리 안에 한 획기적 사건이 야기되지도 않는다. 귀는 상당히 높아졌다. 어지간한 말은 이미 다 들은 말이다. “아, 그거 우리는 이미 몇 년 전에 다 들었어.” 이렇게 말하지만 자신을 들여다보면 우습지도 않다. 신앙인인지 아닌지조차 구별하기 힘들다. 높아진 귀와 꺼져 내려앉은 종교적 열정 사이가 너무나 깊어서 우리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설교를 비교적 정성들여 준비한다. 이 강단에서 설교를 전담한 지 8, 9년이나 된다. 처음에는 거의 15시간 이상이 걸렸다. 20-30분을 증언하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요새는 조금 나아졌다. 그래도 최소한 5시간은 쓴다. 지난 주일도 지방에 내려갔다가 토요일 6시에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준비한다면 너무 정성이 부족한 것 같고 성실치 못한 것 같아서 미리 황성규 목사님께 설교를 부탁드렸던 것이다. 그만큼 정성을 들인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나의 갈등이고 우리 교회의 갈등이다.

한국에는 수없이 많은 교파가 있다. 교회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중에서 그래도 올바른 교파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라 한다. 진보적인 세계적 기구나 교회에서는 기장이라면 그저 좋아한다. 요새도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축하 편지를 꾸준히 받고 있다. 당신네 나라, 당신네 역사에서 당신네 교파가 갖는 책임과 역할은 대단한 것임을 아는데 잘해야 한다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몇 년 전 어느 분이 한국 교회의 수적 성장을 조사한 통계를 발표한 일이 있다. 1970년에서 1975년 사이에 교인수가 배가 된 교회가 수두룩하고 심지어 10배 가까이 늘어난 교회들도 있는데 기장 교회는 거북이 걸음이다. 그래도 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하간 인기만큼 커지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이 우리 교단의 갈등이다.

나는 위에서 두 가지 우리의 갈등에 대하여 말씀드렸다. 깔끔하고 날카로운 신앙고백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삶 속에서 현실로 구현해 내지 못하는 ‘내적 갈등’과 숫자적으로 늘어나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외적 갈등’이 그것이다. 요컨대 깔끔하고 날카로운 신앙고백만큼 신앙생활, 교회의 깊이도 뜨겁고 그만큼 우리의 숫자도 늘어나야 되지 않느냐는 반성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다. 이 둘은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인가? 우리 옛말에 “작은 고추가 맵다”거나 “키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 없다”는 말이 있는데 날카로운 신앙고백이 있으면 차야 하며 작아야 한다는 것일까? 개인의 신앙이 뜨거운 사람은 신앙의 깊이가 없고 깊이가 있으면 차가울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구약성서에는 굵은 두 줄기의 신앙 흐름이 있다. 그 한 줄기를 아브라함이 상징하고 있고 다른 하나를 모세가 상징한다. 아브라함은 안정과 평안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부름을 따라 고되고 험난한 길을 걸어간다. 모세는 물론 출애굽이라는 사건이 있었지만 안정된 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법을 만들고 사회를 고정시킨다.

오늘에까지 이어온 모세의 줄기는 개인적으로는 안정과 성공을 성취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게 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 나는 그저 분명히 믿습니다. 뜨겁게 믿습니다”라고 외치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신앙은 확신에 차고 성공이 약속되고 업적이 인정되어 열의가 넘치게 된다. 교회적으로 안정과 성공을 신앙의 목표로 삼게 되면 자연히 교인 숫자가 늘어나고 헌금이 늘고, 하고 싶은 일이면 무엇이나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교회가 작년이 다르고 올해가 다르게 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이 모세의 줄기를 잇고 있다. 오늘의 문화 - 성공지향적인 문화에 가장 알맞는 기류다. ‘하면 된다’는 문화풍토에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성구만큼 적절한 것이 없다. 그러니 거기에 뜨거움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아브라함적인 줄기는 설 자리를 잃는다. 아브라함은 이미 이루어 놓은 안정과 번영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것도 어떤 특정한 지역, 가나안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일어나 명령을 좇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은 어느 경우에 안정보다 고난이고 풍요보다 궁핍이고 대보다 소가 된다.

우리는 이 아브라함의 줄기에 서왔다. 우리는 오히려 ‘하면 된다’가 중요하다기보다 “무엇을 할 것이냐? 왜 하려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은 거기에 윤리도 원칙도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신앙고백이 깔끔하고 날카로우면 우리의 내적 신앙심도 뜨거워야 할 텐데, 귀도 높아져야 하지만 참여, 몸을 던져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기를 태우는 열성도 있어야 할 텐데, 약자의 편에 서는 신앙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들과 함께 서야 할 텐데, 민주화를 외치면서 동시에 민주적이 되어야 할 텐데, 사회정의를 고백하면서 동시에 제 이익을 구할 때 내는 열심과 똑같은 열심을 발휘해야 할 텐데 …….

열심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여겨서는 안 된다. 뜨거움 자체를 덕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열심을 말하자면 공산주의자의 열심을 따라갈 수가 없다. 뜻이 먼저이고 열심이 다음이다. 뜻이 먼저이고 숫자는 부수적이어야 한다. 끝까지 하나님의 뜻과의 일치, 하나님의 편에 서려는 극기의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오늘날 온 세계와 우리의 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 시작은 불과 12명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오늘 나는 한 가지를 제시하려고 한다. 그것은 마가복음 3장 13절 이하에서 암시하고 있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제자를 택하셨다. 열 두 명을 택했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택함받은 자들의 자기 의식이지 숫자가 아니다. 요컨대 열두 사람이 자신의 자리, 자신이 택함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들로 인하여 기독교는 온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가고 있다. 그것이 1,200 혹은 12,000명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자기 인식 때문이다.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갔다가 모두가 바빌론이라는 이방 국가의 종교와 문화에 동화되어 버렸지만 소위 소수의 “남은 자”를 하나님은 이스라엘 재건의 기틀로 삼으셨다. 기드온의 군대 이야기는 더욱 설명적이다. 수천 명을 줄이고 줄여서 350명을 만들었다. 적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명에 철저한 군대가 더 중요하였다는 뜻이다.

열두 제자는 수로는 매우 작은 소수다. 물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들처럼 우리가 왜 제자로 선택되었느냐를 깊이 통찰한다면 거기에 놀라운 힘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성공을 찾아가는 열정이 아니다. 1,000명을 만들어 가려는 열의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해가 걸려 있기에 내게 되는 뜨거움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택하셨는가? 마치 열두 제자가 주님께서 나를 왜 택하셨는가를 묻고 택하신 뜻에서 하나가 되었을 때, 그 뜻에 철저하였을 때 그들 속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하나님의 뜨거움이 폭발했던 것처럼 우리가 깨달음의 근본에 서야 한다. 자신들이 오직 개인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가정, 혹은 사회, 혹은 직장, 혹은 이 세계를 위하여, 그것을 대리하여 선택된 것이라 인식할 때 거기에는 놀라운 힘이 있게 된다.

열두 제자도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 따라서 열두 명은 소수이지만 민족 전체를 대리하는 대리적 소수다. 주님과 뜻을 함께 하기 위하여, 병든 자를 일으켜 주고 온갖 귀신을 열두 지파의 삶에서 내쫓기 위하여 저들을 대리하여 선택되었다는 자기 인식이 저들 힘의 원동력이었다. 그랬을 때 저들의 신앙은 펄펄 뛰었고 생명력이 있었다. 그랬을 때 수를 늘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나 세계의 기독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앞서서 우리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를 묻자.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자. 우리는 그냥 우리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 나와 궤를 같이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대리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는 기업인들을, 누구는 노동자들을, 누구는 2세들의 어머니를 대리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랬다.

우리의 수는 작은 것이 아니다. 나는 10을, 혹은 1,000을 대리하고 있다. 이 인식은 어느 땐가 그 10, 혹은 그 1,000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고야 말 것이다. 우리가 대리적 소수이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을 물어야 하겠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 하는 자기 인식, 나는 나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을 대리하여 여기 나와 앉아 있으며, 우리는 우리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대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대리적 소수 의식이 절실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에 들어 선택해 주셨다. 그 뜻에 부합한 자기 인식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뜨거워지게 된다. 펄펄 뛰는 신앙의 용사가 된다. 비로소 온갖 일을 축복으로 받는 성숙한 신앙이 있게 되고 작다는 갈등도 자연히 극복되게 된다.


[회상 노트] 하나님의 수학

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총무로 피선되었다. 9월의 일이었고 너무나도 예상치 않았던 일이었다. 교회에서는 내가 교회를 떠나는 것을 반대하였다. 또 총회 총무를 오래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정치력과 유연성이 요구되는 자리인데 그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쫓겨나든지 스스로 박차고 나올 것이니 우선 후임목사 모시기를 뒤로 미루고 있었다. 일종의 겸직을 요구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정들고 손때 묻힌 교회이지만 떠나야 한다. 그래서 떠날 것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내가 떠나면 금방 교회성장주의로 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와 더불어 지낸 거의 16년이란 긴 세월동안 눌려온(?) 데 대한 반작용이 걱정되었다.

우리 교회는 자라지 않는 것인가? 예산도 고작 연 10%만 올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 주변에는 쑥쑥 자라는 교회도 많지 않은가? 내 귀에까지 들려 오지는 않아도 나는 들을 수 있고 듣게 되곤 했다. 누군가가 딱히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해도 내 속에서 그같은 문제가 제기되곤 했다. 나도 전력투구하면, 목회에만 전념한다면 교회를 키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분명히 해야 했다. 교회를 키워야 한다면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확실한 말로 남기고자 했다. 이른바 대형 교회 중에도 더 예수적이고자 노력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대중에 영합하는 목회를 하는 경우도 많다.

원(原) 예수와 받아들여진 예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바른 것은 원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나의 신앙은 말하자면 원 예수에 승복하는 것이다. 그래야 한다. 사이비하거나 예수와는 관계도 없는 예수 신앙은 극복하고 배척해야 한다. 그러나 원 예수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면 과연 오늘날과 같은 교회가 확산될 수 있었겠는가? 대중과의 영합은 환영할 수 없으나 그럼으로써 교회는 존속되고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원 예수와 왜곡된 예수는 상호보충적일까? 예수가 기대했던 공동체(교회)와 타협하고 왜곡된 현실 교회는 상호보충적 관계에 있는가?

우리는 어차피 예수를 왜곡시킨다. 우리는 어차피 교회를 타협적, 왜곡된 교회가 되게 한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대중에게 더 매력있게 되고 교회에는 사람이 모이게 된다. 어차피 이렇게 가게 되어 있다. 우리가 모두, 모두 죄인이기에 그렇다. 우리가 모두 죄의 유혹에서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원 예수를 만나고자 함이 정도다. 왜곡되지 않은 교회를 만들고자 함이 정도다. 그러면 신앙은 굳고 교회는 왜소하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더 문제일 것이다. 실제 원 예수를 만나고 원 교회를 세워가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참으로 엄청난 힘이 있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체성의 회복이다. 언제나 왜곡되고 있는 것을 부단히 다시 펴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백번 옳은 일이다. 이것은 너무나 부족하지 않은가! 소수가 문제가 아니다. 정체성조차 잃으면서 소수로 있는 것이 문제다. 중요한 것은 정체성이다” 그렇다. 정체성이다!!! 이것을 애절하게 호소하고자 했던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