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6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91) 北美留記 第二年 1975 - OTTAWA 한국대사관 앞에서

OTTAWA 한국대사관 앞에서

4월 15일 – 새벽 4시 반에 교인들과 민주인사 그룹이 이상철 목사 집에서 자동차로 출발하여 “오타와” 한국대사관 앞에 10A.M.에 도착했다. 박정희에게 살해당한 “인혁당” 인사 8명의 추도 장례식을 한국대사관 앞에서 거행했다. 사회는 이 목사와 “베일리”였고 “오글” 목사가 영어 메시지, 내가 한국말 담화로 약 5분씩 말했다. 그리고 “대사”와 면담하고 질문하고 “시가 데모”에 나선다는 순서였다.

아직도 추운 날씨였다. 연합교회 교우들이 부인들까지 수십 명 출동했다. 한가(韓加) 교회 합동이었고 오타와 백인교회들과 사회인들도 함께 나와 지원했다. 대사가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어딘가에 숨은 모양이란다. 정철기 등 젊은 부대가 마구 들어가 영사라도 끌어내려 했다. 옥신각신 난투가 벌어질 뻔 했다. “이건 우리 영사관인데, 그렇게 난동할 수 있느냐?” 하고 영사가 항변하더란다.

“‘우리’란 것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역적 박정희의 살인도당이란 뜻이 아니냐? 너희도 같은 강도의 무리다. 너희가 죄 없는 국민을 마구 도살하고 장례식도 못하게 했으니 우리가 여기서 추도 장례식이라도 해 드리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취지였다.

“데모” 후에 그 곳 백인교회에서 우리에게 샌드위치와 따끈한 수프를 점심식사로 제공해 준다.

[범용기 제3권] (90) 北美留記 第二年 1975 - 雪原의 토론토

雪原의 토론토

4월 2일 – 큰 눈이 내린다.

일본서 재일교포 인권옹호 사업에 분투하고 있다는 최창화[1] 목사가 연합교회에서 Documentary 영화를 돌리면서 재일교포의 인권옹호운동 보고 강연을 했다. 밤에는 이 목사 집에서 최 목사와 교회 유지들이 좌담회가 있어서 나도 참석 12시까지 얘기가 계속됐다. 이 목사 집에서 잤다.

4월 3일 – 스카보로 경용 집으로 간다. 폭설에 풍속 40마일이 눈보라다. 눈이 집 앞 “헷지”에 부딛쳐 보도는 눈 언덕이 됐다. 아직 갓내린 눈이라 걸음마다 풍덩 빠진다. 버스에서 내려서 5블럭 걷는 동안에 손이 설 얼고 귀도 제것이 아닌 것 같았다. “눈”이 눈, 코를 갈겨 낯이 엉망이다. 가까스로 경용이네로 왔지만 그날 저녁부터 기침이 나고 담이 끓고 가슴이 뻐근하다. 시카고에서는 67명이 눈 사고로 죽었단다.

4월 7일 – 기침은 여전하다. 온 식구가 다 기침인데 늙은 아내가 더 심하다.

4월 8일 – T.V.에서 베트남 함락 기록영화를 봤다. 6.25 때의 서울시민 피난부대를 연상했다.

4월 9일 - “고대”는 군대가 점령하고 “연대, 서강대, 서울대” 등은 자진 휴교했단다.

뉴욕의 이승만[2] 박사로부터 전화 인터뷰, 한국 상황에 대한 대책협의, 성명, 데모, 한국 대사관 점거 등등 교포 사회의 강경한 항거태도를 표명하기로 했단다.

4월 10일 - “선구자”에 “한국교회는 왜 박 정권에 반대하느냐?” 하는 “아티클”을 썼다.

4월 12일 – 서울에서는 박형규, 권호경, 이춘섭, 조화순[3] 등이 구속되었고 문익환도 잡힌 것 같다고 한다.

4월 12일 – 토론토에서는 “토론토 민건” 주최로 최근 박 정권에 의해 추방된 “오걸”(Geoge Ogle) 목사를 초청하여 환영회를 열었다. 순서는 나와의 대담과 연합교회강당에서의 오걸 목사 강연과 질의문답이었는데 청강자 약 400명이라고 했다. 성황이었다.



[각주]
1. 최창화(崔昌華, 1930~1995) - 평안북도 선천 출생. 재일 대한기독교 오쿠라(小倉)교회 목사로서 70만여 명에 이르는 재일교포들의 인권 개선을 위해 반 평생을 바쳤다. 참정권 획득 운동, 민족언어찾기 운동, 지문날인 거부운동 등을 통하여 재일교포를 국제법상 소수민족으로 규정하면서, 이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일본 사회 내에서 떳떳하게 살 수 있도록 소수민족의 생존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이승만(Syngman Rhee, 1931~2015) - 미국장로교회의 총회장, 루이즈빌과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활동.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미국 국적의 신분으로 북한을 30여 차례 방문하기도 하였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장로교회 총회장과 북미 NCC-USA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5년 캐나다의 김재준, 이상철, 독일의 장성환, 이삼열, 이승만, 손명걸, 노정선 등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이 있는 기독자들의 기도모임을 시작하였고, 이 모임이 이후 ‘한국민주화를 위한 세계협의회’, 1977년 ‘한국 민주화 운동 기독교 동지회’(민주동지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3. 조화순 목사 – 1934년 인천에서 태어남. 심훈의 『상록수』를 읽으며 인생의 ‘제2의 채영신’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아홉 번째 여성 목사가 되었다. 1966년 인천 지역에서 산업선교를 이끌던 오글 목사와의 만남 이후 ‘위장 취업’을 통해 여성 노동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동일방직’ 최초로 여성 지부장과 여성 간부로만 구성된 노동조합 집행부를 탄생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2026년 3월 15일 일요일

[범용기 제3권] (89) 北美留記 第二年 1975 - 베트남 “민주” 정부 몰락

베트남 “민주” 정부 몰락

베트남이 공산군에 함락돼 가는 임종기사가 신문 전면을 메꿨다. 물량과 신무기가 패권을 신주처럼 믿어온 미국이 근본에서 반성해야 할 계기가 주어진 것이 아닐까!

그러나 “바로”에게는 돌이켜질 은혜의 여백이 없다. 미국의 교회들은 모두 예언자 구실이라도 해야 할 것인데 그들에게 있어서는 “예언자”란 비현실적인 몽상가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범용기 제3권] (88) 北美留記 第二年 1975 - 휴스톤에

휴스톤에

Houston의 이은설 이종만 집에서 비행기 표까지 붙여 자택에 나를 초청한다. 그렇잖아도 여기까지 왔다가 “종만”을 안 보고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3:30PM에 경희 Drive로 “어머니” 박형근 여사와 4남 “긍수” 등이 동승하여 공항까지 나를 전송해 준다. Houston 가는 도중에 혜수(차녀)를 만나볼 작정이었다.

Houston 공항에는 1:00PM에 도착했다. 이은설 씨가 마중 나왔다. 은설, 종만 집에서 유숙하기로 했다. 큰 집인데 2층은 텅 비고 있었다.

3월 27일에는 휴스턴의 이은설 박사와 “종만”이 자기 집에 모신다. “이은설” 박사는 통계학 전공으로 휴스턴 대학에서 얼마 강의도 한다. “종만”은 “한신” 졸업생이다.[1] 두 자녀를 키우는 가정주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학위를 딴다고 집념이 대단하다.

3월 28일에는 NASA본부를 곁으로 견학했다. 밤에는 서울고교에서부터 서울대학까지 내 맏아들 “은용”과 동기 동창이라는 유영식 박사(하버드)가 찾아와 밤 12시까지 환담했다.

3월 29일에는 이은설 박사 안내로 수족관, 해항(海港)의 Seamen’s Centre 등을 봤다. Seamen’s Centre는 “선원선도 사업” 기관으로 Chaplain은 Steward라는 분이었다. 오랜 항해에서 상륙한 선원들은 우선 술과 계집으로 울적했던 고독을 발산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Chaplain Steward 씨는 거대한 체구의 “부두 목사”로서 이 선원들에게 높은 차원의 마음의 화평과 고상한 취미와 존엄한 인간대접 등등으로 “인간화”의 향연을 베푼다는 것이다. 상륙하는대로 예배실에서 예배를 드리고, 격조 높은 식당에서 뱅퀏을 열고 점잖은 사교(社交)춤을 추고 도서실에서 책을 읽고 좋은 영화를 보면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편지 쓸 조용한 방과 책상을 마련하고 각국말로 번역한 복음서와 그 밖에 여러 종교의 성전(聖典) 등을 각 나라에서 온 선원들에게 무료로 배급하는 일도 한다. Chaplain Steward는 Voluntier로 헌신했고, 이것을 천직으로 평생을 바쳤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나와 나란히 서서 사진 찍고 작별했다. 거인과 “피그미”가 나란히 선 것 같은 사진이 나왔다.

같은 3월 29일 밤에 이은설 이종만 집에서 이은설 박사가 개별 초청으로 유지 십여명이 모였다.

손님 중 한 분이 내 옆에 다가 앉아 얘기를 건다.

“김 박사님은 한국민주운동이 한국 현실에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는 따위 질문을 몇 마디 하다가 이은설 박사에게 호되게 책망 받고 잠잠해지는 광경도 있었다. 이은설은 충청도 태생으로 언행이 온유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놀랍게 매서웠다.

“나는 이 집 주인이요. 이 파티는 내 가정에서 초청한 파티요. 그런데 당신은 초청도 받지 않은 불청객인데 그렇게 왔으면 얌전하게 방청이나 할 것이지 무슨 건방진 수작이요? 여기가 정보국 수사실인 줄 아시오? 김 박사님이 누구신 줄 알고 그 어른 앞에서 그런 무례한 짓이오. 당장 나가시오!” 그는 호령한다. 거기 목사란 사람도 왔었는데 그 “오” 씨란 사람과 한 패인 모양이었다. 휴스톤에는 우리 영사관이 있고 민주세력은 거의 없어서 박 정권 독무대였단다. 나는 다른 데서 하던 얘기를 종합하여 약 한 시간 담화했다.

그 후 이은설 박사 중심의 민주인사 모임이 시작되어 10여 명이 매주 그룹모임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교회들이 너무 냉담하여 모임 장소를 얻기 어려웠다. 이 교회 저 교회 옮겨다니는 동안에 탈락자의 수가 늘어 “자연해체”가 됐다. 길 바닥에 떨어진 “씨”라 새들이 먹어버린 것이다.

3월 30일은 부활절이다. 나는 은설, 종만과 어린이 둘(주희와 동주)의 전송을 받으며 공항에 갔다. 7:15AM에 공항을 떠나서 오후 1시 16분에 토론토에 내렸다. 경용과 하령이 공항에 마중나왔다. 같이 한인연합교회에 들려 2:00PM 부활절 예배에 참석했다. 꽤나 먼데서 예배보러 온 셈이다. 이 목사댁에서 유숙했다.

3월 31일 폭설이 통로를 메웠다. 눈보라가 북극 풍경이다. 상하의 남극에서 갑자기 북극에 무장비로 내렸으니 여윈 몸이 추위에 짜증난다. 허리가 아프고 피곤하나 쉬어지지도 않는다.



[각주]
1. 1959년 한신대학교 제18회 졸업

[범용기 제3권] (87) 北美留記 第二年 1975 - DALLAS 제9회 북미한인 기독학자회

DALLAS 제9회 북미한인 기독학자회

3월 20일~22일은 멀리 남방 택사스 주 달라스 시 “남감리교 대학” 구내에서 제9회 “재미 한국 기독학자회” 연차대회가 열렸다. 이번 주제는 “최근 30년의 한국 역사와 전망”이었다. 나도 초청돼서 갔다. 내가 맡은 일은 개회식에서의 Keynote Speech[1]였다. (“제3일” 5호, “해방의 광야 30년 참조 요망).

Penal 내용들은

(1) 종교와 인간성(Humanity) : 이승만 박사

(2) 성리학에서 본 Humanity : 정재식 박사(서독 Heidelbing 대학)

(3) 기독교에서 보는 Humanity : 이상현 박사(Hope College)

오후 Penal의 주제는 “Korea 오늘과 내일”

(1) 근대화 작업에서의 오늘과 내일 : 오기송 박사(Montreal 대학)

(2) 북한 정치의 일관성과 변혁성 제형 : 김윤수(서독 Kiel 대학교수)

(3) 한국과 그 주변의 미래상 : 조형환 박사(아리조나 주립대학 교수박사)

밤 연회석에서는 오글 박사가 연사였다.

3월 22일 – 학자회는 오늘 오전으로 폐막

나는 달라스 “민통” 주최로 “학생관 회의실”에서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연설하고 한 시간쯤 질의응답 후에 김태수 군 집에 가서 유숙했다. “태수” 군은 고 김영환[2] 씨의 차남이고 그 형제자매와 “어머니”가 모두 이곳에 옮겨와 산다. “아버님”(영환 씨)을 미국에 모셔보지 못한 자녀들의 효성얽힌 한 됨이 아버지 친구인 나에게 제주처럼 부어진다. 태수 처 “경희”는 내 막내딸인양 허물없이 귀엽다. 갓이룬 가정이라 애기는 없다.

3월 23일은 주일이어서 오클톤 한인 감리교회에서 설교했다. 목사는 민주운동에 신념이 없는 것 같았다. 조심조심 피하다가 걸려들었달까. 어쨌든, 목사는 몹시 불안한 표정이었다. 학장회 분들이 많이 참석했다. 목사로부터 허락받은 내 시간은 약 5분. 그러나 성경공부라는 이름으로 2층에 옮겨 한 시간 남아 강연은 계속됐다. 손님으로 온 분들은 모두 2층에 옮겨 내 얘기를 듣는다.

얘기래야 특별이 준비한 원고도 없고 해서 내가 본국에서 하던 민주운동 얘기, 나 자신의 당한 경험과 막후담 따위를 사담(私談) 식으로 털어놓았다. 일종의 “노변한담”(爐邊閑談) 식이었다. 모인 분들은 그게 재미있다고 좋아한다. 질의 문답은 두 시간 남아 계속됐을 것이다. 나두 신이나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3월 24일(월) - 동원모[3] 박사와 낚시하러 나간다. 상항의 송선근 군도 동행했다. 낚시 도구는 고급이고 더할 데 없는 장비다. Lake of Pines “松湖”에 갔다. 목향(木香) 그윽한 독채 캐빈에서 잤다.

3월 25일(화) - 낚시터에서 낚시 줄을 내렸다. 고기는 안문다. 헛수고다. 그래도 맘 없이 낚시 끝을 들여다 보는 참을성은 수양이 된다 하겠다. 돌아올 때 빈광우리로 집에 찾아들기는 쑥스러워서 어느 일본 할머니에게서 한 “바께쓰” 가득 “카드피쉬”를 사 들고 와서 태수 부인(경희)에게 내놓는다. 카드피쉬 찌개는 별미였다.

달라스는 하늘가에 이은 푸른 초장과 농지와 목장과 석유의 나라다. 석유는 어디든 “펌핑” 시설만 하면 물처럼 쏟아져 나온단다.

푸른 초장에는 젖소들이 시름없이 누웠다. “말”도 많았다. 호수에 물고기는 무진장이다. 우거진 송림 속에는 떨어진 솔잎이 두껍다. 그러나 솔잎 두꺼운 쥬단 밑에는 개미떼와 온갖 독충이 왕국을 차렸다. 어쩌다 사람이 앉으면 “이거 어디서 굴러온 고기덩이냐?”고 떼지어 습격한다. 거기는 인간의 왕국이 아니었다.

3월 26일(수) - 종일 태수 집에 있었다.

저녁 후에 근수네, 동수네, 준수네, 그 밖에 출가한 인수 부부 등이 찾아와 인사한다. 태수네에서 연합 가정예배를 드렸다. 3대를 이은 기독교 가정이라 기독교 신앙은 가정종교로 토착화했다. 자라는 자녀까지 치면 4대를 물려 받은 기독교 가정이다. 뿌리가 깊고 전통이 섰다.

여러 가지 회고담이 밤 12시까지 쉴 새 없었다.

태수의 신혼한 “새댁”인 “경희”는 내 막내딸 같이만 느껴졌다. 실례지만 용서를 기대하며 하는 말이다. 대학에서 실내장식과를 전공, 4학년에서 태수와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었단다. 태수는 간염이어서 간경화증 수술을 받고 휴양하는 중이란다.

달라스에 사는 고 김영환씨 가족 명단은

미망인 박형근 여사

인수(장녀), 혜수(차녀), 동수(장남), 태수(차남), 준수(삼남), 성수(삼녀), 긍수(4남) - 모두 의젓한 가정을 이루워 산다. 성수만은 남편 유재건 씨를 따라 L.A. 근방인 Sacramento에 산다. 장남 동수는 미국 이민 떠나기 전에 아버님 묘소에 큼직한 현옥석 묘비를 세웠다. 그 비문의 선(禪)과 서(書)를 모두 내게 부탁한다. 내 글이나 글씨가 유명해서가 아니라 “아버님”의 맹우[4]였다는 데서 그리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3월 26일에는 온 집안이 태수네에서 모여서 연합가정예배를 드렸다. 자녀들이 모두 신앙이 견실하고 생활이 건전하고 효성이 지극하다.



[각주]
1. Keynote Speech – 기조연설
2. 노석 김대현 장로의 차남
3. 동원모(董元模, 1935~) - 함경남도 신흥군 출생. 1953년 배재고등학교, 1957년 연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사우스웨스턴대학교 정치학과(학사), 켄터키대학교 외교통상대학(석사)을 졸업하고 1965년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1981년 한민통 미주본부 창립인, 수석부의장, 의장을 역임하였고, 1973~80년 북미 한인기독학자회 총무 겸 재무, 회장을 역임하였다.
4. 맹우(盟友) - 우정을 서로 굳게 맹세한 벗

[범용기 제3권] (86) 北美留記 第二年 1975 - 토론토에

토론토에

3월 10일(월) - Boston 구경하러 나섰으나 오히려 고역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점심 먹고 4:30PM에 출발 8PM쯤에 토론토 공항에 내려 경용 집에 갔다.

[범용기 제3권] (85) 北美留記 第二年 1975 - BOSTON에

BOSTON에

3월 6일(목) - 눈보라가 땅을 뒤집는다. 공항이 막혔다. 못간다고 전화하고 이 목사 집에 돌아왔다.

3월 8일(토) - Boston에로 간다. 토론토 공항은 제설부대의 파업으로 활주로가 눈 속에 잔다. Taxi로 Buffelow공항에 가면 된다. 전세 Taxi를 탔다. 세 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60불에 “팁” 5불이 붙는다.

2:30PM에 떠나 5:30PM에 Boston에 내렸다. 김장호 박사와 그 밖에 서너 분이 마중나왔다.

그날 밤(8일) 보스톤 대학회의실에서 강연이라고 했다. 약 50명 왔을까 – 한의사, 침술하는 분, 청년, 교수, 목사 등 아주 다양했다.

“그레고리 헨더손” 집에서 그와 밤 늦게까지 얘기하다가 김장호 박사 댁에 옮겨 유숙했다. “로드 아일랜드”에서 여기까지 찾아 온 박요수아[1] 장로와도 환담했다.

3월 10일에는 “크리스찬 사이엔스 모니터” 기자와 단독 인터뷰. 그러나 편집국에서 Screening에 걸린 모양 - 햇빛을 못 봤단다.

크리스찬 싸이엔스 모교회 본당을 구경했다. 안내원은 친절 상세했다. 많은 팜플렛을 준다. 세월과 함께 기독교 본류(本流)에 접근하는 것 같았다. 이색적 Deviation[2]보다도 교회로서의 “주류”에 합류(合流)할 경향이 많다고 보았다.

3월 9일(일) - 2:30PM에 김장호의 안내로 김갑동 목사의 교회에서 설교했다.

박요수아 장로가 식구 한 부대를 인솔하고 내 숙소인 김장호 댁에 내방했다. 나의 민주운동에 대해서는 납득이 잘 안가는 모양이었고 역시 “교회주의”에 농성한 상태였다.



[각주]
1. 박요수아 – 함경도 출신 의학박사, 송창근 목사와 함께 서울성남교회를 설립하는데 공헌하였으며 1948년에 장로로 피택되었다. 미국 의료ㆍ선교봉사활동으로 1975년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선정되었다.
2. Deviation – 편차, 일탈, 이탈

[범용기 제3권] (91) 北美留記 第二年 1975 - OTTAWA 한국대사관 앞에서

OTTAWA 한국대사관 앞에서 4월 15일 – 새벽 4시 반에 교인들과 민주인사 그룹이 이상철 목사 집에서 자동차로 출발하여 “오타와” 한국대사관 앞에 10A.M.에 도착했다. 박정희에게 살해당한 “인혁당” 인사 8명의 추도 장례식을 한국대사관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