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찬(禮讚)의 말씀
- 『김재준전집(1992)』 제1권, 1-3쪽.
- 『장공 김재준 저작전집(1971)』 제4권, 45-47쪽.[1]
- 在日本 조선기독청년회, 「使命」誌 제3호, 1926년
아씨시의 성자여, 볼딩구라[2] 거친 초방(草房)[3]의 한 구석에서 제단도 사제[4]도 없이 주(主)의 성찬을 지키시고[5] 깊은 침묵가운데 저 세상으로 옮기신 성자여, 당신이[6] 가신 지 700유여년[7] 움부리아[8]의 봄풀은 해마다 푸릅니다. 그러나 흐르고 흐르는 큰 물결의 한 구비인 이 세상은 너무 변하지 않았습니까.
성자여, 당신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主)의 가슴에 안기셨습니다. 거만(巨萬)의 부(富)를 가질 수도 있었으며 영예로운 무사(武士)도 될 수 있었습니다. 청춘의 붉은 노래 속에서 향연(饗宴)의 왕이라고 젊은이의 찬탄(讚嘆)을 받던[9]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막히게 맑은 움부리아[10] 창공에 흰 구름이 흐르고 무너진 아씨시 성(城) 틈에 묵은 풀이 푸른[11] 봄날, 교외(郊外)로 거니는 병여(病餘)[12]의 당신 가슴 속에는 하염없는 공허가 느끼어졌습니다.
“헛되고 헛되어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 사람이 수고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해가 뜨고 해가 지나 같은 곳을 허덕이며, 바람은 남으로 갔다 또 북으로 오되 같은 곳을 돌고 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13]
“아, 나의 과거도 헛된 것뿐이다. 생각하면 하염없는 일이다.”
이리하여 당신은 모든 것을 버리고 조그마한 암자(庵子) 속에 모신 성상(聖像) 앞에 꿇어 엎디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실재(實在)이시며, 내[14] 생명을 받으실 주인이시라고. 이래(以來) 당신은 성루(聖淚)[15] 머금은 두 눈으로 만상(萬相)을 보시며 일소부주(一所不住)[16]의 순례자로 세상을 마치셨습니다.
성자여! 당신은 사랑으로 만상(萬相)을 포옹하셨습니다. “형제인 태양이여, 자매인 달이여”[17]하고, 아름다운 피조물 찬탄(讚嘆)의 노래를 부르셨으며, 숲속에[18] 새를 모으시고 주(主)의 사랑을 말씀하시며, 이리(狼)를 찾아가서 순순(淳淳)히[19] 가르치셨습니다.[20] 당신의 자안(慈顔)[21]을 대(對)할 때 자연(自然)의 모든 것은 기뻐 뛰놀았으며 죄(罪) 많은 사람은 가슴에[22] 얼음이[23] 풀리었습니다.
성자여! 당신은 주(主)의 십자가를 생각하시고 대로(大路)에서 통곡하셨으며 머리에 재를 뿌리시고 참회를 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실 때 “오, 주여!” 하는 첫 말씀에[24] 감(感)이 극(極)하셔서[25] 더 많은 말씀 못하시고 눈물 흘리셨습니다.
성자여, 당신은 가장 작은[26] 이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걸인과 나병자와[27] 빈자(貧者)와 죄인의 가장 살뜰한 형제이셨습니다. 당신은 갈의승대(褐衣繩帶)[28]에 일장일표(一杖一瓢)[29]로 표박(漂泊)[30]하시면서도 가난한 형제의 양식을 빼앗는가 하여 늘 염려하셨습니다.
성자여! 당신은 참으로 순진하셨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거짓을 찾을 수 있사오리까. 당신의 행실에서 꾸밈을 볼 수 있사오리까.
성자여! 당신은 참으로 겸손하셨습니다. 당신은 종교개혁가나 예언가로서의[31] 의식(意識)을[32] 갖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오직 당신의 영(靈)을 응시하시고 당신의 몸을 편달하셨습니다.[33] 그러나 당신의 정적(靜寂)[34] 속에는 영원한 활동이 품기어[35] 있었으며 당신의 여윈 몸에는 그윽한 후광(後光)이 둘리어[36] 있습니다.[37] 당신의 고요한 기도와 함께 어두운 종교계에 새벽이[38] 왔습니다.
성자여! 그러나 당신의 자광편조(慈光遍照)[39]하시는 거룩한 인격(人格) 속에는 아무도 손대지[40] 못할 준엄(峻嚴)한 힘이 숨어 흐름을 봅니다.
성자여! 당신이[41] 가신 후 700여 년, 세상에는 성빈(聖貧)을[42] 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맘몬의 발아래 엎드려[43]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44] 사이는 기계와[45] 기계의 접촉같이[46] 차갑게[47] 되었습니다. 유혈(流血)과 다툼이 진리(眞理)가 되었습니다. 자비(慈悲)는 자기(Catholic) 죄악(罪惡)의 엄식물(掩飾物)[48]이 되었으며 위선자(僞善者)의 피난처만[49] 불었습니다.[50] 나팔과 꽹과리 소리에 가두(街頭)는 소연(騷然)[51]합니다. 영리(怜悧)한 조그만[52] 요마(妖魔)가 지붕에서 지붕으로 원숭이같이 춤을 춥니다. 수만(數萬)의 발자국[53] 소리는 망령(亡靈)의 영탄(詠嘆)과 함께 멸절(滅绝)로 흘러갑니다.
성자여, 당신이 세상(世上)에 계실 때 교회당[54] 안에는[55] 도박(賭博)과 고리대금(高利貸金)이 공개(公開)되었으며 승직(僧職)을 매매(買賣)하며 빛다른[56] 여자(女子)가 방황(彷徨)하였다 합니다. 당신의 거룩한 눈으로 어찌 그 현상(現狀)을 참고 보셨습니까. 그러나 당신은 겸손하게 말없이 앉으셔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나라를 나타내셨습니다.
성자여, 지금은 말세(末世)라고들 말합니다. 미래(未來) 세계(世界)의 물결소리가 원뇌(遠雷)[57]같이 들립니다.[58] 이제 우리는 거친[59] 우리 영혼의 폐허(廢墟)를 바라보며 성자(聖者)의 발자취를 사모하여 예찬(禮讚)의 말씀을 드립니다. 주(主) 그리스도의 영광(榮光)을 위하여……. 아멘.
在日本 조선기독청년회, 「使命」誌 제3호, 1926년[60]
[텍스트 요약]
1926년 김재준은 식민지 청년의 고뇌 속에서 아씨시 성자의 삶을 소환한다. 병마를 겪은 뒤(病餘) 마주한 세상의 허무를 딛고 ‘그리스도라는 영원한 실재’를 발견한 성자는 거만의 부를 버리고 ‘볼딩구라’의 초방에서 성빈의 삶을 택한다. 만상을 형제로 포용하며 실명에 이르도록 흘린 성루(聖淚)는 타락한 교계와 기계화된 근대 문명을 향한 준엄한 경종이다. 성자는 일소부주의 순례자로 살며 가장 낮은 자의 형제가 되어 그리스도의 나라를 현현한다. 이는 물화된 시대를 치유하는 거룩한 가난의 예찬이자 영적 재건의 선언이다.
[핵심 키워드]
-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 절대 청빈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한 인물로, 김재준에게는 근대 문명을 심판하는 영적 준거점이 된다.
- 움부리아(Umbria): 성자의 영적 배경인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고전적 음역어로, 지리적 공간을 영성적 고향으로 치환하는 효과를 준다.
- 볼딩구라(Portiuncula): ‘포르치운쿨라’의 고전적 한글 음역어이다. 이는 당시의 국어학적 표기 관행과 초기 한국 교회의 외래어 수용 양상을 보여주는 교회사적 가치를 지닌다.
- 성빈(聖貧): 거룩한 가난. 물질적 소유를 거부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영적 충만에 도달하는 성자의 핵심 영성이다.
- 성루(聖淚):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실명에 이르기까지 흘린 눈물이다. 연구자는 이를 ‘감성 신학’이나 ‘신비주의 고행’의 관점에서 분석 가능하다.
- 일소부주(一所不住): 한곳에 머물지 않는 순례의 삶. 판본에 따라 ‘일소부재(一所不在)’로 표기되기도 하며, 이는 무소유의 공간적 확장을 의미한다.
- 갈의승대(褐衣繩帶): 거친 베옷과 새끼줄 띠. 청빈의 시각적·상징적 실천을 연구하는 복식 영성 연구의 키워드가 된다.
- 자광편조(慈光遍照): 자애로운 빛이 온 누리를 비춤. 성인의 영성이 피조물 전체로 확산되는 생태 영성적 함의를 내포한다.
- 일장일표(一杖一瓢): 지팡이와 바가지 하나. 극한의 무소유를 상징하며, 동양적 은사(隱士) 개념과 기독교적 청빈의 결합을 시사한다.
- 표박(漂泊): 정처 없는 유랑. 세속적 정주(定住)를 거부하는 종말론적 나그네 의식을 상징한다.
- 초방(草房): 소박한 초막. 화려한 제도권 교회와 대비되는 영적 겸비의 장소이자 수도적 공간의 원형이다.
- 자안(慈顔): 죄인을 감화시키는 자애로운 얼굴. 타자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영혼의 회복을 상징한다.
- 만상(萬相): 모든 피조물. 성자가 ‘형제와 자매’로 부른 대상으로, 현대 생태 신학적 논의로 확장이 가능하다.
- 엄식물(掩飾物): 가식과 겉치레. 원문에서는 자비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위선자들의 피난처를 비판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종교 비판적 기능을 수행한다.
- 원뇌(遠雷):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 김재준이 바라본 ‘종말론적 미래관’이나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 대한 신학적 예감을 상징한다.
- 소연(騷然): 시끄럽고 어수선한 세태. 성자의 침묵과 대비되는 근대 도시 문명의 소음과 혼란을 묘사한다.
- 정적(靜寂): 내면의 고요. 판본에 따라 ‘정숙(靜肅)’으로 표기되며, 정적인 고요 속에 내포된 영원한 활동성을 의미한다.
- 맘몬(Mammon): 성빈과 대척점에 있는 물신. 김재준은 당시 세상을 맘몬의 발아래 엎드린 상태로 규정하며 문명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다.
- 병여(病餘): 병을 앓고 난 뒤의 허무. 성자가 세속의 영예를 버리고 회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이자 영적 전환점을 의미한다.
- 요마(妖魔): 근대 문명의 부정적 형상화. 지붕 위에서 춤추는 원숭이로 비유되어, 영성이 거세된 인간 문명의 기괴함을 폭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