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수치와 고난의 흔적
빌립보서 2장 5-8절 / 1983년 4월 1일, 성금요일 / 수도교회
[말씀을 향한 물음]
나는 지난 종려주일의 증언을 통해 두 가지 요점의 말씀을 드렸다.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는 명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칫 우리는 경건을 말할 때 명상을 유일의 방법으로 여긴다. 오늘 같은 성 금요일에 우리는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명상하고자 한다. 물론 하지 않는 것보다야 좋은 일이지만 가장 좋은 것은 아니라는 증언을 드렸다.
그리고 신앙인이라면 그에게 고난이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것은 결코 거창한 고난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혹 진리를 위하여, 또는 인권을 위하여 감옥에 가는 일이라면 도대체 예수의 고난에 참여할 기회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예수의 고난도 처음부터 그렇게 거창한 데서 출발되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무엇인가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구체적으로 하고자 할 때, 외부적으로 고난이 오지 않는다 해도, 내적인 고난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난이 없어져 버렸고 그것은 신앙이 구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씀 드렸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예수 상은 고난의 예수 상이 아니다. 그 예수는 영광과 존귀를 한 몸에 지닌 영화의 존재다. 나는 이 교회를 지을 때 원래 설계에 있었던 십자가 탑을 없앴다. 다른 예산이 초과되어 맞추어 보겠다는 것이 첫째 이유였고, 교회당 높이의 거의 두 배나 올라간 십자가 탑이 처음부터 싫었기 때문에 예산을 조정할 때 탑을 취소하자고 했던 것이다.
교회들은 십자가를 높일 수 있는 대로 높인다. 십자가를 높이는 거기에는 고통이나 고뇌, 아픔이 증발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비록 십자가이지만 고통보다는 자랑이, 고뇌보다는 승리의 보장이 높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누가 그 십자가를 보고 예수께서 받으신 수치를 연상할 것인가? 세상은 십자가를 부끄러움으로 몰아치지만 우리는 오히려 예수께서 수치를 당하셨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노라는 심정으로 십자가를 높이 세우는 자가 있겠는가? 모두가 십자가를지지 않겠다고 아우성인 현실에서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다.’라는 아픈 긍지에서 십자가를 높이는 자가 있는가?
처음 십자가는 부끄러움이었다. 그것은 모멸의 뜻이요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한 수치였다. 욕된 고난의 표적이었다. 예수의 십자가는 고난이요 수치요 멸시며 비극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십자가 밑에서 충만과 형통을 기도한다. 십자가 밑에서 고난을 감수하기를 결단하는 자는 오늘날 거의 없다. 십자가는 은혜로 받을 것뿐이지 따를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무엇을 추구하는가? 잘되는 것이다. 영광을 얻는 것이다. 번영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나쁘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잘되는 것, 영광, 번영이 절대적으로 무가치하다거나 나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종교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교회의 건축양식을 잠시 생각해 보자. 특이하게 짓는 교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십자가 탑을 갖는다. 우리 교회는 건물 옆면에 비스듬한 십자가를 장식해 놓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에 있는 십자가들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다. 왜 십자가 탑을 높이려 하는 것일까? 물론 십자가가 기독교의 표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을 높이 올려 놓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십자가 탑을 자꾸만 높이는가?
예배실 안 정면에 어느 교회나 역시 십자가를 장식해 놓았다. 대개 비슷하지만 특별히 잘 다듬어 놓는 경우도 있다. 잘 다듬어진 십자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어떤 충격이나 특별한 깨달음을 일으키지 못한다. 무언지 강조점이 없이 말끔하고 깨끗하여 어떤 느낌을 주지 못한다. 우리 예배실의 십자가도 조금은 특이하지만 그 어떤 강력한 의미를 튕겨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예수의 처음 십자가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찬송가 가사에 있는 대로 ‘험한 십자가’였다. 사형의 틀이 매끄러울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아름다울 필요도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를 잘 다듬어 앞에 세운다. 왜 십자가를 다듬어 놓고 있는 것일까?
서양에서 들어온 풍습이지만 특별한 예식에는 까만 가운을 입는다. 그리고 스토울(stole)이라는 것을 늘어뜨린다. 총회에 총회장용과 총무용 스토울이 있는데 총회장 스토울 끝에는 우리 교단 마크가 새겨져 있고 총무 스토울 끝에는 작은 십자가가 양쪽에 수놓여 있다. 스토울이란
‘멍에’의 상징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상징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도 매끔하고 아름답게 다듬어져서 어떤 권위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그것을 걸치면 무언가 권위가 있어 보이고 근사해 보인다. 우리는 소가 큰 맷돌을 갈 때 어깨에 짊어졌던 그 멍에를 왜 권위의 상징으로 잘 다듬게 되었을까?
흔히 십자가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자기 소원을 비는 장면을 쉽게 보게 된다.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게 해 달라는 기원에서부터 자신의 안전이나 민족의 안전을 빈다. 퍽 경건하게 보인다. 천주교에 매력을 느끼는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곧 이 같은 신비함에 끌리는 것을 본다. 우리 신교에는 그런 것이 없는 것을 유감으로 여기는 분들도 있다. 수치와 모멸, 욕과 멸시의 상징인 십자가가 어떻게 하여 이처럼 소원 성취의 신화를 지니게 되었을까?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수의 상은 무엇일까? 십자가 탑을 높이 높이 올리고 십자가를 잘 다듬고, 멍에조차 권위의 상징으로, 십자가는 신비적인 힘이 있는 것으로 바꾸어 놓은 우리가 예수 상도 우리 마음대로 바꾸어 버렸다.
우리는 그가 수치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의 십자가가 욕된 십자가가 아니기를 바란다. 입으로는 험한 십자가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가 지신 멍에조차 그것이 멍에이기보다 권위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바랐고 지금도 그렇게 바라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속성 때문이다. 우리는 수치보다는 영광을 좋아한다. 멸시보다는 존경받기를 갈구한다. 욕을 당하기보다는 번영을 기대한다. 어떻게든 모든 것을 잘된 일로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수치스러워 모두가 도망쳐 버렸던 십자가도 어느새 영광으로, 곤욕과 멸시의 십자가도 잘 다듬어진 십자가로, 노예의 상징인 멍에도 권위로 바꾸어 놓고 만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예수는 탈색된 예수가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채색되고 화려하게 물들여진 예수 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우리는 멸시와 천대 속에서 곤욕스러워 하는 예수를 추방하고 우리 입맛에 맞는 예수를 만들어내 온 것이다. 성공하고 또 성공하는 예수, ‘적어도 하나님
의 아들이라면’, 높아지고 또 높아지는 예수를 만들어내 온 것이다. 만사형통하는 예수, 잘되는 것, 영광, 번영의 예수를 만들어내 온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가치 세계 속에서 본래적인 예수는 여지없이 비판되고, 여지없이 성형수술 되어버렸다. 고통에 찬 얼굴은 현대 자본주의의 수술실에 들어갔다 나온 후 환히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수척하고 윤기 없는 예수의 얼굴이 수술실에서 나올 때 어느새 오동통하게 살이 오르고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얼굴로 성형되고 말았다.
십자가조차 높이, 매끄럽게, 권위 있게, 신비한 힘을 가져야 한다. ‘위로 위로’다. 그리고 ‘위로 위로’ 올라가서 천당에까지 일직선으로 이어가려 한다. 자랑과 영광, 존귀와 부귀 그리고 영생 복락, 이것을 십자가가 보증해 준다는 것이다. ‘위로 위로’의 과정에서 우리는 신을 경험하고자 한다. 아니 그렇게 되는 것만 신의 축복이라고 한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에 대하여는 가차 없이 폭력을 구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철학자 앙드레 지드는 공산주의로 전향했던 사람이었다. 어떤 친구로부터 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친구는 호화 여객선을 타고 항해를 했는데 갑자기 배가 난파되었다. 마침 구조선이 띄워졌다. 다행히도 거기에 재빨리 올라탄 사람들이 있었다. 얼마쯤 타고 나니까 구조선은 가라앉으려 했다. 그러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뒤늦게 올라타려는 사람들을 밀쳐 내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주먹으로 때리고 난간을 붙들고 매달리는 사람들의 손을 작은 주머니칼로 찌르고 난도질하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피나는 생존 경쟁이 끝나자 그들은 살아남게 된 것을 신께 감사하더라는 것이다. 앙드레 지드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자본주의를 보았고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공산주의에 갔다가 거기도 인간의 본성에 다름이 없는 것이 확인되자 다시 공산당을 탈퇴해 버렸다고 한다.
우리의 감사는 차라리 난파 후 구조선에 올라탄 자의 감사가 아닐까? 우리의 예수는 구조선에 탈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시는 예수가 아닌가? 우리의 감사의 근거는 구조선에 타게 된 것이요, 그렇기에 예수의 십자가도 패배가 아닌 승리요, 거친 십자가가 아닌 매끄러운 십자가요, 모멸이 아닌 권위의 십자가이어야만 한다. 승리와 높아짐에서 우리는 신의 능력, 신적 경험을 한다. 손을 찍혀 물에 빠지고 죽어 가는 저들의 비극 속에서는 결코 신적 경험을 하지 못한다. 지는 자에게는 신적 은혜가 없다. 이기는 곳에만 신 경험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래도 찜찜하다. 성서는 무엇이라 했나? 참으로 놀라운 말을 하고 있다. 신적 경험이 높아져 가는 데 있지 않다. 하나님의 본체이면서도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고 하시지 않은 그에게서 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종이 아니면서 스스로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인간의 모습이 되시는 거기서 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인간 중에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자리인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는 바닥에까지 내려가는 거기에서 신 경험을 하고 있다.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나 단순히 기념에 그쳐서는 안 된다. 십자가 원형을 회복하여야 한다. 도색한 십자가에서 우리가 덧칠한 색깔을 벗겨 내고 원형의 십자가를 만나야 한다. 성형된 예수의 본 모습을 찾아내고 그 예수와 만나야 한다. 이것이 고난절을 지키는 의미다. 어차피 성형해 가고 도색해 간다고 하더라도 이 고난절에 다시 원형의 십자가 앞에 서게 되어야 고난절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본래의 십자가를 만나게 되는 때 우리에게 갈등과 고통이 오게 된다. 내려가야 한다는 것인가? 구조선에 이미 탄 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만약 우리의 오늘 현실이 구조선에 요행히도 올라탄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감사하기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의 모습이 되는 것, 종이 되는 것, 십자가에 죽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그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것은 곧 이 갈등을 하는 것이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활 태도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철학적으로, 혹은 정(情)으로 명상할 수는 있으나 거기에 동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밑에 모이는 것은 그가 선불해 놓은 대가를 받아 내고자 함이어서는 안 된다. 받고 또 받아, 위로 위로 결국 천당에까지 이어지려고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의 고난에 어떻게 참여할까’이어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위를 볼 것이 아니라 아래를 보아야 한다. 소위 축복을 향하여 달려갈 것이 아니라 종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를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달려가야 할 자리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다. 이 자리들을 외면하여 위로 향하는 곳에 기독교의 신적 경험은 없다.
아래를 보자!
종의 자리를 찾아라!
십자가의 자리로 감히 달려가라!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자!
[회상 노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교단 총무로 일하게 되었지만 아직 수도교회가 후임 목사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일예배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 주일마다 강단에 설 수는 없었다. 이곳저곳 교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수도교회에서 종려주일과 성 금요일, 그리고 부활주일 설교를 이어하게 되었다.
현대의 기독교인은 고난을 생각하지 않는다. “승리하십시오.”라는 인사가 유행되고 있다. 승리만을 생각한다. 고난은 예수가 내 몫까지 이미 다 치러버렸다고 믿으려 한다. 사실 소시민적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종교적 의미의 고난을 말하는 것은 무리다. 또 지금은 지난 시대에 비해 고난이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에도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노동자들의 삶에 다가가는 대학생들이 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삶에서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봤다. 그들의 삶은 어떤 것인가? 고난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예수처럼 내려간다. 그들의 신앙은 구체적이다. 추상적이지 않다. 기복적이 아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불행한 것일까?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산 예수, 그를 죽음에서 살려내셨다는 것 아닌가! 그를 우리의 주가 되시게 하셨다는 것 아닌가! 이것이 기독교의 부활신앙이리라!
소위 운동권 학생들의 설 자리가 매우 좁아졌다. 당국의 압박이 그들의 공간을 빠르게 좁혀 왔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는 어떤 모임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간에 사용해 왔던 모임 장소도 어느새 모두 드러났다. 이른바 MT 장소는 이미 완전하게 노출되고 말았다.
학생들은 교회로 몸을 피하고, 교회에서 모임 장소를 얻고자 했다. 어찌 보면 교회가 최후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안고 가려는 교회는 많지 않았다. 서울에는 불과 몇 교회밖에 없었다. 내가 목회하던 수도교회는 몇 안 되는 교회 중의 하나였다. 나는 그들이 신앙을 가지고자 하여 교회로 찾아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받아들이고 뒷바라지를 했다. 그들이 옳고 가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내려갔다. 대학생이라는 신분, 그것도 소위 일류 대학의 학생이라는 특권, 이미 담보된 장래를 버린다. 나는 그들에게서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한 교인보다 더 그리스도인다움을 발견했다. 외형으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그들은 이미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예수를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기대를 가졌었다.
그들은 툭하면 구속되고 재판을 받았다. 이런 일은 차라리 일상적이 되어버렸다. 목사인 나는 고통스러웠다. 아니,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교인들 중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는 것이었다. 신앙 성향이나 정치적 입장이 달라서 그리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업하는 교인들 중에는 불이익을 당할까 봐서 그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회는 신앙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지 데모나 하고 투쟁이나 하는 데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신앙고백이 먼저라는 주장은 옳다. 목사의 지도가 과격하여 그런 성향의 학생들이 모이고 또 그들이 툭하면 구속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었다. 사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목사의 지도에 의해 이러고저러고 할 단계를 이미 넘어서 있었다. 그들의 생각과 안목과 철학은 목사의 그것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내려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예수의 삶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을 배웠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후원자요 보호자를 자임했었다.
나는 교단의 총무로서 교단의 교회들을 두루 살폈다. 불행하게도, ‘많은 교회가 학생들과 비교해 훨씬 교회답지 못하다. 교회는 과연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교회다운 교회로 거듭날 수 있게 할 것인가? 나는 그리할 수 있는 교단이 되도록 하는 책임에서 비켜설 수 없었다. 기장 교단을 어떻게든지 교회다운 교회가 되게 해야 했다. 그즈음 나의 설교는 여기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제는 ‘교회!’다. ‘예수를 따르는 신도!’다. 그것은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교회가, 신도들이 옳음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려는 신앙을 가질 때에만 교회는 교회 되고, 신도는 신도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