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하늘의 우상들을 꺾으신 창조의 빛, 오직 주권자만을 향한 우주적 헌사
[본문] 창세기 1장 14절-19절
- 1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 15절: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16절: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 17절: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 18절: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19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성서 명상]
창조의 넷째 날을 기록한 이 본문은 첫째 날의 ‘빛’의 창조와 완벽한 문학적·신학적 조화를 이룹니다. 사람의 창조를 제외하고는 이 천체들의 창조 기사가 가장 길게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이 주제가 창세기 저자에게 지녔던 각별한 중요성과 논쟁적 성격을 시사합니다. 구조적으로 본문은 카수토(Cassuto), 보샹(Beauchamp), 스텍(Steck) 등의 학자들이 지적하듯, 16절의 ‘두 큰 광명 창조’를 정점으로 하는 매우 정교한 교차대구법적(역순환법, palistrophic)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낮과 밤의 분리(14a)에서 시작해 징조와 사시(14b), 땅에 비췸(15), 그리고 16절을 지나 다시 땅에 비췸(17), 주야를 주관함(18a), 빛과 어둠의 분리(18b)로 이어지는 이 구조 속에서, 천체의 역할을 규정짓는 히브리어 전치사 ‘르(~에게, ~를 위하여)’가 무려 열한 번이나 사용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피조물의 기능과 한계를 얼마나 치밀하고 빈틈없이 통제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본문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요소는 단어의 선택과 의도적인 생략에 있습니다. 본문에 쓰인 ‘광명(마오르, מאור)’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1장을 제외한 오경의 다른 곳에서는 성막의 성소를 밝히는 등불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해와 달의 히브리어 명칭인 ‘셰메쉬(שמש)’와 ‘야레아흐(ירח)’가 이 본문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대신 저자는 이들을 단지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이라는 건조하고 기능적인 용어로 격하하여 부릅니다. 또한,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어 주시던’ 하나님의 후속 말씀(명명 작용)이 넷째 날에는 완전히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이한 문학적 장치들은 당대 고대 근동(ANE)의 세계관을 산산조각 내는 거대한 예언자적 논박입니다. 하젤(Hasel)의 지적처럼, 이웃 문화권에서 해와 달은 만신전(Pantheon)에서 가장 으뜸가는 신들이었으며, 태양신 ‘샤마쉬(Shamash)’와 달신 ‘야리흐(Yarih)’로 숭배받았습니다. 별들 또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강력한 신적 존재들로 여겨졌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 천체들이 신이라는 일말의 암시조차 차단하기 위해 고유명사(셰메쉬, 야레아흐)의 사용을 극도로 꺼렸고, 심지어 신적 인격을 부여하는 듯한 ‘이름 짓는 행위’마저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일월성신이 자신들의 운명을 쥐고 있다고 믿고 그 앞에 엎드렸으나, 창세기의 선포는 단호합니다. 그들은 영원한 신이 아니라 덧없이 창조된 피조물에 불과하며,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기는커녕 그저 땅을 비추고 절기(사시)를 표시하는 도구적 역할만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당대 에누마 엘리쉬 신화 등에서 신들의 자리를 정하는 것이 우주적 대사건이었던 반면, 창세기에서 천체들의 역할은 고대 근동의 기준으로는 아주 보잘것없고 하찮은 기능으로 묘사됩니다. 가장 두려운 경배의 대상이었던 별들조차 마치 덧붙이는 부록처럼 “또 별들을 만드시고”라며 무심하게 취급됩니다.
이 맹렬하고도 거룩한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의 외침은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현대인들의 영혼을 정조준합니다. 현대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더 이상 하늘의 해와 달을 향해 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의 본질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우리 내면에 더욱 교묘하고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샤마쉬’와 ‘야리흐’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돈과 자본, 권력과 명예, 그리고 과학기술의 만능주의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시장 논리가 우리의 생사화복을 쥐고 흔든다고 믿으며, 통장 잔고의 숫자에 따라 매일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처럼 돈 앞에 납작 엎드려 살아갑니다. 권력의 해가 뜨면 안도하고, 경제적 지표의 달이 기울면 두려움에 떨며 영혼의 안식을 잃어버립니다. 우리 스스로 피조물인 자본과 권력에 ‘신’의 이름을 부여하고, 그것들이 내 인생의 밤낮을 주관하도록 스스로 노예가 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넷째 날은,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이 세속의 가짜 신들을 향해 맹렬한 영적 우상 타파를 명령합니다. 당신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그 거대한 돈의 위력, 당신을 목마르게 하는 권력과 세상의 평판은 결코 당신의 주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을 잠시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작은 광명’이요, 일상을 비추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돈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흘려보내는 성막의 ‘마오르(등불)’처럼 사용되어야 할 물질일 뿐, 내 삶을 구원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의 보좌에 앉아 낮과 밤을 통제하고 있는 그 세속의 우상들에게서 ‘신’의 이름을 박탈하십시오. 그것들을 단지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이라는 피조물의 자리로 무자비하게 끌어내리십시오. 오직 참된 빛이시며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을 경외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속의 헛된 운명론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무리 기도]
영광과 찬송을 홀로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 온 우주의 해와 달과 별들조차 주님의 말씀 앞에 순복하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함을 경외함으로 고백합니다. 주님, 하늘의 우상들을 깨뜨리신 이 엄위하신 말씀 앞에서,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세워둔 세속의 추악한 우상들을 회개하며 나아갑니다. 저는 입술로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돈이 제 인생의 낮을 주관하게 하였고, 세상의 평판과 권력이 제 인생의 밤을 지배하도록 허락했습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재물과 지위를 ‘나의 구원자’처럼 떠받들며 두려워했던 영적 간음의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시옵소서. 주님, 이제 제 삶을 옥죄고 있는 모든 거짓된 우상들에게서 신의 이름을 박탈합니다. 저를 두렵게 하는 이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결코 제 영혼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의 주권자이십니다. 제게 허락하신 물질과 재능이 오직 세상을 밝히는 거룩한 성막의 등불(마오르)로만 쓰이게 하시고, 세상의 헛된 빛을 쫓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빛이신 주님만을 온전히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거짓된 우상을 이기시고 참된 빛으로 세상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석적 해설]
- 교차대구법(역순환법) 구조와 넷째 날의 중요성: 카수토, 보샹, 스텍 등의 학자들은 넷째 날 기사가 16절을 중심으로 A-B-C-D-D'-C'-B'-A'의 교차대구법을 취하며, 전치사 ‘르(le, ~에게)’를 11번이나 사용하여 천체들의 도구적 기능을 치밀하게 규정하고 있음을 입증합니다.
- 히브리어 명칭의 의도적 회피 (비신화화): 당대 최고 신들이었던 태양신 ‘샤마쉬’와 달신 ‘야리흐’와의 연관성을 차단하기 위해, 저자는 일상적인 해와 달의 명칭(셰메쉬, 야레아흐)을 철저히 피하고 단지 “큰 광명”, “작은 광명”이라 부릅니다.
- ‘이름 짓기’ 관용구의 생략: 첫째~셋째 날에 존재했던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명명 작용(이름 지으심)’이 넷째 날에는 생략되었는데, 이는 천체들이 신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거나 신격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계획적인 시도입니다.
- 고대 근동 우주관의 붕괴(천체의 지위 강등): 에누마 엘리쉬 등에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주권자로 묘사된 천체들은, 본문에서 단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땅을 비추고 절기와 시간(징조와 사시)을 가리키는 보잘것없는 기능의 피조물로 전락합니다.
- 광명(마오르)의 제의적 의미: 본문에 쓰인 ‘광명(마오르)’이라는 단어는 오경의 다른 곳에서 성막의 성소를 비추는 등불을 지칭할 때 사용되어, 천체들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에 봉사하는 도구임을 암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