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1-38절 ; 요한일서 3장 17-18절 / 1990년 3월 25일 / 한빛교회 / 문익환 목사 방북 1주년
[회상 노트]
1년 전 부활주일날 아침이었다. 새벽예배를 다녀와서 잠시 눈을 부쳤다. 전화벨이 울렸다. ‘한국일보 OOO 기잔데 문익환 목사가 지금 평양에 간 것, 알고 있습니까?’ 나는 소스라쳐 일어났다. 아, 이 일을 또 어떻게 하나? 의미 따위를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것이 몰고 올 보수의 가공할 공격이 얼른 떠올랐다. 그걸 또 어떻게 막아내란 말인가? 솔직히 짜증이 났었다.
처음에는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긍정적 의미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적극적인 전망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우리와 반대 입장을 가진 이들은 여전히 보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있었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그 의미와 값을 매겼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일을 이어갈 방도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총회 총무로서 교단 안팎의 도전을 막아내고 재창조의 씨앗을 싹 트게 해야 했다. 문 목사님의 이른바 ‘잠입 탈출’ 사건을 긍정적으로 전환 시키는데 우리는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기까지는 길이 멀었다. 가족과 주변 인물들은 여전히 괴로웠다. 문 목사님이 출석하는 한빛교회에서 방북 1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문익환 목사님께서 이 나라 통일의 문제를 끌어안고 몸으로 기도를 결행한 지 1년이 되었다. 문 목사님의 방북이 정당한 것이었다든지 그 효과가 어떤 것이었다든지 하는 것을 우리들끼리 말할 필요는 이미 없다. 나아가 그분이 평양을 가신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반민족적인 행위였다는 따위의 매도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아마 유 목사님이나 이 강단에 서는 모든 사람을 통하여 그 의의와 정당함을 수없이 들었을 것이고 또 문 목사님 자신의 말을 들었고 들을 것이며 우리는 이미 그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터다.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는 그분의 진심을 알고 있다. 그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우리 기장총회도 정치적 효과에 대하여는 차치하고라도 그 진심에 대하여 지지를 보냈고 석방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다.
작년 여름 서울에서 모인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총회, 이 달 초에 모였던 세계교회협의회 모임(WCC—PIC) 등에서도 강대국의 패권주의를 심각하게 다루었다. 통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한 문 목사님 등을 구속한 국가보안법 폐기 등을 결의하고 석방을 촉구했다. 우리의 민족 통일 운동에 전세계 교회가 동참하고 기도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외로움을 느끼시고 계실 것 같다. 사모님이나 가족들께서도 겉으로는 주변의 격려에 만족해 하시는 것처럼 하시지만 저 깊은 곳에는 외로움이 있을 것이며 고독이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섭섭함도 있고 서운함도 있으실 것 같다.
오늘 저를 청해 설교를 부탁한 것도 무슨 특별하고 별난 설교를 들어보려는 것보다 총회 총무의 입으로부터 무언가 분명한 말을 들음으로써 이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벗어볼 수 있을까 하는 심정 때문일 것이라고 혼자 짐작해 보았다. 그러나 제 말을 들어보아도 외로움이 가시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우리의 길은 외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정부는 여러 적성 국가들과 옛 관계를 청산하고 협력 관계를 맺는 소위 북방 외교에 열을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 목사님과 우리는 여전히 탄압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북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며 김일성의 꼭두각시라고 매도하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함께 성탄 예배를 드리자, 헌금을 하겠다 하는 형편이지만 그러나 평양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함께 드린 문 목사님과 그 행위를 지지하는 우리의 길은 외로운 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들에게 붉게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공허하며 우리는 참으로 자유하지 못한 존재라는 것을 아프게 느낀다.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요일 3:17-18).
이 말씀은 사람들의 죄 된 모습을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못하고 또 하지 않는다. 나에게 재물이 있고 내 형제가 궁핍하다면 도와야 하고 재물이 있으니 또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못한다. 왜 못하나?
내 욕심 때문일 것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돕는 것이 그를 꼭 도와주는 것일 수만은 없다. 도와주기만 하면 오히려 그에게 거지 근성을 만들어 주고 그래서 오히려 그를 더 나쁘게 되게 할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보다 내 것을 조금이라도 남에게 준다는 것이 도무지 잘 되지 않는 것이다. 내 욕심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요한일서 말씀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핍한 자를 돕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면 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유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내가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그 재물을 쓸 자유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궁핍한 자를 도울 자유를 나는 가지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자유하게 되는 것인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알게 되면 그 진리로 인하여 우리가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앞의 요한일서 말씀과 연결하여 보면 이렇다. 나에게 재물이 있고 내 형제는 헐벗고 있어도 그를 돕지 못하는 것은 내가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으로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게 되면 그 진리가 나를 자유하게 하여 형제를 도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어떤 분인가? 그는 자유인이었다. 옳은 것,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면 서슴없이 그 일을 하신 분이다. 법에 저촉되는 것 따위에 얽매이지 않으셨다. 심지어 죽음의 관문까지 뚫고 갈 수 있었다. 물론 예수에게도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에게도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사로잡고 있는 진리가 기어코 그 길을 가게 한 것이다. 법을 어긴다고 얼마나 법석댔겠는가? 실정법을 어긴 정도가 아니다. 민족의 반역자였다. 민족의 반역자 정도였겠는가? 하나님을 배역하는 자였다. 사람들이 좀 따르니 영웅심이 일어나 놀아나고 있는 것이라는 비난이 있었다.
그런 비난 정도였겠는가? 종국에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이런 사정을 예수가 모르셨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옳은 길을 갔다. 사람을 살리는 길을 갔다. 두려움과 갈등과 공포가 결국 그의 길을 좌절케 할 수 없었다. 비난과 매도가 결국 그의 길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그는 자유한 사람이었다. 그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인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자유인이었다. 그 자유로 인류에게 새 세계를 열어 주셨다. 자유인이었기에 새 세계를 열었다.
우리는 현 정권자들에게서 자유하지 못한 가련한 모습을 지금 보고 있다. 비민주, 반인권의 역사를 반전시켜 민주화, 인권의 길을 가겠다고 약속한 것이 6ㆍ29 선언 아닌가? 그것이 6공화국 아닌가? 그 약속의 실천을 구조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국민은 여소야대 정국을 만든 것 아닌가? 그런데 그들에게 진리가 없다. 민주화의 길을 가는 6공화국이 아니라 반민주의 5공화국으로 회귀해 버렸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은 여대야소 정국의 인위적 합당으로 무너져 내려 버렸다. 커진 힘으로 민주화로 가는 것이 아니다. 반민주로 간다.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과 더불어함께 사는 사회로 가는 것이 아니다. 힘 있고 강한 사람들의 기득권만을 지키는 대립 사회로 가고 있다. 남북의 화합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북의 고립을 통한 정복으로 가고 있다. 저들에게 진리가 없다. 자유하지 못하다. 저들은 반자유의 노예다. 권력과 힘의 노예다. 저들은 새 세계를 열 수 없다.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없다.
문익환은 누군가? 예수를 바라보며 예수처럼 자유인이 되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이다. 주님의 참 제자가 되고자 예수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다.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다. 그 진리로 인하여 자유하게 된 사람이다.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라는 말씀을 우리의 상황 속에서 다시 읽자. 이 민족이 분단당해, 그러고도 이토록 못나게 살아가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면서도 아무도 선뜻 이 부끄럽고 못난 우리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진실하게 몸을 던지지 않는다. 진실하게 사랑하지 않는다. 문익환, 그는 예수의 진리로 이 민족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문익환은 누군가? 옳은 것, 사람을 살리는 것, 그것을 그냥 해내는 사람이다. 법에 저촉되는 것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다. 심지어 지금은 어찌보면 죽음의 관문까지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가슴에 채워진 진리가 그를 자유케 하고 있다. 민족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지금 죽음이 가로막아 서고 있다. 그러나 끝끝내 민족을 사랑하는 걸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붙들림 받은 문익환은 지금 이 나라에 새 세계를 열고 있는 것이다. 새 역사를 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문 목사님의 방북 1주년을 기념하여 이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자신을 주님께 비추어, 아니 주님은 고만두고라도 문 목사님께 비추어 보고자 해서다. 진리가 우리 속에 없다는 사실을 불행하지만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앞에 지금 나왔다. 그를 우러러 본다. 자유인 예수를 쳐다 본다. 자유하지 못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 스스로에게 ‘자유인이어라!’ 라고 다짐하며 결단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예수를 따라, 아니, 문 목사님을 따라 우리도 자유케 하여 주십사고 기도하기 바란다. 우리도 새 세계를 여는 데 일조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기 위하여 오늘 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날, 진리로 자유케 된 문 목사님, 그가 끝끝내 자유인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자. 죽음까지도 얽맬 수 없는 자유인이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자. 그럼으로써 기어코 우리에게 새 세계를 열어 주시고자 하시는 주의 사도이기를 위하여 기도하자. 한빛교회는 이런 기도를 함으로써 새 세계를 여는 큰 역사에 동참하고 있다. 이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다.
문 목사님과 한빛교회, 또 그와 함께 진리로 자유케 되고자 고군분투하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이날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