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8일 일요일

[범용기 제2권] (142) 잠시 “런던” 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 - 경용ㆍ효순 약혼하고 캐나다에

경용ㆍ효순 약혼하고 캐나다에

같은 해 1969년 -

경용과 효순은 수년 전부터 사랑하는 사이였다. 효순은 성모병원 간호원으로 명동언덕 위 기숙사에 있었고 경용은 명동거리 한양증권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 동안에 효순은 자기 힘으로 토론토 어느 병원에 교섭하여 취직허가와 함께 이민 초청 공한[1]을 받았다.

떠나기 전에 약혼식이라도 해야 한다고 서둘렀다.

효순은 충남 천안에 사는 정종각(鄭鐘珏) 씨 차녀로서 큰 오빠는 재일 한국재벌이라는 김봉학 씨의 한국인 기업체인 천마유지(天馬油脂) 한국책임자로 있는 분이었다.

약혼식은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강원용 목사 사식으로 성대하게 거행했다. 내빈이 수백명 – 결혼식 못잖게 성황이었다. 약혼식 일주일 후엔가 효순은 혼자서 캐나다로 떠났다.

임지에 도착하는 대로 ‘약혼자’로 경용을 초청할 작정이었다. 첫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이라, 작별은 견디기 어려운 슬픔인 것 같았다. 효순은 목놓아 울며 떠났다.

두달 후에 경용이도 캐나다로 가게 됐다.

경용은 ‘아버지’가 평생 ‘무소유주의자’(?)란 것을 알기 때문에 무슨 일에나 ‘아버지’ 신세를 기대하지 않았다. 여비고 혼비고 신부를 위한 다이아 반지도 제 돈으로 샀다. 내가 사 준 것은 약혼식 때 입을 신부의 한복 한 벌 밖에 없다.

자기 돈 만 불이 그의 발전에 요긴한 밑천이 되었다.

경용은 아버지 어머니의 노후(老後)를 자기가 돌봐야 한다는 생각도 미리부터 갖고 있었다. 효순이 편지에서도 시부모 모실 “자신이 있어요” 하고 편지했다.

나는 효순이 떠날 때에나 경용이 갈 때 돈 한 푼, 선물 하나도 주어 보내지 못했다. 늙을수록 맘이 아파진다. 나는 평생 교회일, 나라일 한답시고 내 가족에게는 그렇게까지 무심하고 등한했던 것이다.

어쨌든, 경용이 뱅쿠버에 도착할 날짜에 효순이도 그리로 와서 재회(再會)하고 그때 뱅쿠버 백인 교회 목회 중이던 이상철 목사 주례로 결혼식을 치렀다 한다.

신부는 한복에 너울[2]을 썼는데 너울은 신부가 한국 떠날 때 가지고 온 것인데 꽃관 노릇하는 부분이 붙어 있지 않아서 이 목사의 클러지 칼라에 조카들이 꽃도 붙이고 하여 쓰고 들어갔다고 한다. 교인들도 많이 참석했었다고 한다.

피로연은 경용의 누나인 신자와 장범식 박사 부인이 만든 케잌과 커피를 나누는 간소한 파티였다고 한다. 그것이 그때 이민 온 젊은이들의 결혼식 피로연의 스타일이었다는 것이다.

경용과 효순은 호텔에서 하루 쉬고 기차 일등실에서 앉은 대로의 신혼여행을 즐겼단다.



[각주]
1. 공한(公翰) - 공적인 편지
2. 너울 – 조선시대, 궁중이나 양반 집에서 부녀자들이 나들이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쓰던 쓰개의 하나

[범용기 제2권] (141) 잠시 “런던” 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 - 손순조 목사 얘기 한 토막

손순조 목사 얘기 한 토막

원래 성결교회 목사로 강원도 강릉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한다.

젊은 성직자로서 2년 동안 목회에 정성을 쏟았다.

일제 말기, 일제의 성결교회 말살정책에 걸려 투옥되어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형기를 마치고 강릉 자기 교회에 가 봤다.

교인이라곤 한 사람도 없고 교인들이 갔고 있던 성경 찬송가 등은 모조리 목사 집 고깐에 쌓여 곰팽이[1]로 썩는 것이었다.

“예수 냄새 내다간 감옥 가기 알맞다. 다 집어 치우자!” - 그런 심사였던 모양이란다.

그는 너무 실망했다. “나는 목사 자격이 없나보다!”

그래서 그는 목사직을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와 가정인으로 충실한다.

그렇다고 그가 예수를 버린 것도, 교회를 물러난 것도 아니다. 그는 근처 감리교회에서 평신도로 깔끔하게 봉사한다.

사람들이 그를 ‘목사’라 불러도 구태여 변명하지는 않는다. 오랜 후일에 그는 감리교 목사로 교회를 맡았다.[2]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렇게 인정있고 예절 바른 분은 보기 드물 것이다.

그의 한 옛날 회고담 한 토막으로 이런 얘기도 있다. 그의 결혼 초기 신접살림이 시작될 무렵에 그는 신부와 함께 자주 이름난 한식집에서 융성한 식사를 즐겼다. 신부는 즐거웠다.

그런데 가는 때마다 메뉴를 바꾼다. 신부는 그 숨은 의도적인 행동에 생각에 잠겼다.

“아, 이건 내 요리 솜씨가 좀더 성숙되게 하기 위해 ‘교재’(敎材)를 제공하는 것이구나!” 그래서 신부는 눈을 흘겼다. 다시는 안 따라온다고 화를 냈단다.

그래서였는지 우리 안사둔님 요리 솜씨는 보통이 아니다.

손 목사는 수석회원(水石會員)이기도 하다.

동양적인 고상한 풍류다. 일 년에 두 세 번씩 수석회원들은 산수(山水)를 탐방한다. 소풍도 즐길 겸, 기묘한 자연석을 주워보려는 것이다. 어떤 돌은 진정 산수화(山水畵) 그대로다.

회원들은 가담가담[3] 합동전시회를 연다. 나도 두어 번 관람했다. 일품(逸品)[4]들이 많았다. 손 목사가 출품한 것도 자연의 비범한 작품들이었다. “어디서 이런 묘한 돌을 주어 왔나” 싶었다.

그는 논 6만평인가를 팔아 언덕을 몇 십만 평 사서 거기에 밤나무를 심었단다. 수익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말단공무원들의 성화는 감소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수석과 전원(田園)을 즐길 줄 아는 동양 풍정(風情)[5]의 예술인이랄 수 있겠다.

그는 내 큰 사돈이다.



[각주]
1. 곰팽이 - ‘곰팡이’의 방언
2. 서울연합감리교회 홈페이지에 보면, 손순조 목사가 1978년 1월에 담임목사로 취임했으며, 1981년 5월 31일 퇴임예배를 하였다고 나온다.
3. 가담가담 - ‘이따금’의 북한어
4. 일품(逸品) - 이 세상에 다시는 없을 만한 아주 뛰어난 물품
5. 풍정(風情) - 정서와 회포를 자아내는 풍치나 경치, 세상이 돌아가는 정황이나 형편

[범용기 제2권] (140) 잠시 “런던” 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 - 은용ㆍ행강 결혼하고 캐나다에

은용ㆍ행강 결혼하고 캐나다에

1969년 -

그 당시 이상철 목사는 뱅쿠버교회를 사면하고 토론토 한인연합교회에 전임했다. 무대가 넓어진 셈이다.

신자가 은용을 초청했다. 은용은 뱅쿠버 도착, 이 목사 가족과 함께 자동차로 대륙 횡단, 토론토로 갔단다.

그 무렵의 캐나다 이민법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은용은 그동안에 신당동 손순조 목사 장녀 손행강 양과 사귀고 있었다. 은용은 일편단심인 모양이었지만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았다.

손 목사는 다소 생활에 여유가 있는 축이었고 ‘행강’은 첫 따님으로 귀엽게 자란 처녀여서 무일푼의 ‘시집’에서 고생을 감당할지 의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자녀들의 연애관계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온전한 자유분위기랄 수 있겠다.

은용은 상당히 초조해 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손 목사의 직장인 어느 예식장 사무실에 손 목사를 방문했다.

“은용이가 행강 양을 사랑한다는 것은 의심 없는 사실인 것 같은데, 그것이 성취될 수 있는 소망인지 엿주어[1] 보고 싶습니다. 나는 자녀들의 ‘배우자’ 결정에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치는 채면서도 손 목사님께 엿줍지 않고 지내왔습니다. 혹시나 그런 내 태도가 실례였다면 사과할 겸 오늘 찾아뵙는 겁니다…” 했다.

손 목사는 ‘천만의 말씀’이라면서 “그렇게 과분한 혼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딸애에게 권했습니다. 그런데 그 애는 제 방에 누워 울기만 하길래, 나는 영문을 몰라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네게 잘못 권했다면 용서해라.’

그랬더니 그런 게 아니라면서 행강은 은용 군과의 결혼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아마도 그러고 보니 부모의 사랑에서 떠나는 서러움이 북바친 모양입니다…” 했다.

그래서 나는 은용에게 교제를 계속하라고 일렀다. 은용은 날마다 나갔다. 교제는 순조로운 모양이었다.

얼마 후에 행강의 허락을 받았노라면서 좋아하며 들어왔다. “사랑을 표시하더냐? 애교로 맞이하더냐?” 하고 나는 따졌다. 끝없이 강가를 같이 걸으면서 숨김없이 얘기했고 사랑도 서로 고백했고 애교로 대해주기도 했다고 은용은 대답하는 것이었다.

은용은 매일같이 그 댁에 가서 식사도 같이 하곤 했다. 그래서 하루는 집에서 ‘디너’를 마련하고 행강을 초청했다. 그 자리에는 이우정 선생도 참석했었다.

아무리 말을 시키려해도 시종 침묵이었다. 뭔가 아직도 석연찮은 데가 있지 않은가 싶어 조금 걱정이 됐다.

은용이 캐나다로 떠날 날짜는 두 달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을 서둘렀다.

경동교회에서 강원용 목사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신부 모두 의젓했고 하객(賀客)은 초만원이었다. 손님들에 대한 답례로는 포켓 성경 한권씩을 드리기로 했다. 피로의 다과는 경동교회 여신우회에서 대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진 찍고 문간에서 손님들께 인사드리고 신부는 시어머니 팔을 끼고 문밖 계단을 내렸다.

그 길로 신랑 신부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온양온천(?), 어디어디, 제주도까지 돌아다니다가 열흘만엔가 온다고 했다.

수유리 집이 하두 초라해서 여기저기 딴 숙소를 마련해 봤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안방을 신방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온돌, 장판, 도배 모두 새로 했다. 그러나 ‘스팀온돌’ 생각은 미처 못했다. 그만하면 ‘신방’ 기분도 안나는 것이 아닐 것 같았다.

3선개헌 때 같이 일하던 정객들이 보낸 어마어마한 화분들도 조처하기 힘들 정도였다.

신랑 신부는 신방에 돌아와 행복한 것 같았다.

얼마 후에 은용은 캐나다로 떠났다.

비행장에서 탑승시간이 다 돼서 승객이 다 들어갔는데도 은용, 행강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조마조마하던 최후 순간에 둘이 나타나 들어가기는 했다. 어딘가에 숨어서 실컷 울었던 모양이다.

은용은 제 돈 만들 기회가 없었기에 혼비, 여비 등을 내가 댔다.

은용이는 캐나다 도착 즉시로 행강을 부양가족으로 초청했다. 수속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두 달 동안 행강은 수유리 집에서 시부모 모시고 맏며느리 구실을 착실히 했다.

식모애를 직접 지도하며 아궁이마다의 연탄도 깔축없이[2] 보살폈다. 본가에 가서 얼마 지내라 해도 한사코 가지 않는다. 어쩌다 갔다가도 꼭 그날로 돌아오곤 했다.

언제나 명랑해서 외로운 티를 내지 않았다. 나는 거의 매일 시내로 나갔는데 현관에 들어설 때면 언제나 반가운 미소로 맞이했다.

‘지영’이 두 살 때였는데 혜원이 한신대 도서관에 근무하기 때문에 지영이는 우리 집에 맡기고 나가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봐줬지만, 행강이도 몹시 귀여워했다.

어느 더운 날 우리 식구는 지영을 데리고 남산 꼭대기에 소풍을 갔다. 남산 잠두에서 을지로 아스테리아 호텔까지 행강은 지영을 안고 걸었다. 을지로에 와서야 내가 대신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무겁다고 느꼈다.

행강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싶어서 미안했다. 그는 티 없이 참았던 것은 그때사 알았다.

캐나다 가면 자동차를 운전해야 할거래서 가까이 있는 운전강습소에 다니면서 운전도 배웠다.

결국 수속이 다 돼서 떠나게 됐다.

무슨 책 쓴 고료였던가? 그 때에는 한국 돈으로 표를 살 수 있었기에 그만큼의 액수를 나는 국민은행에 저금해 둔 것이 있었다. 그걸 몽땅 찾아 행강의 여비에 충당했다.

얼마 후에 예정대로 행강은 캐나다로 떠났다. 혼자였지만 비행기 안에서 동행자가 생길 것으로 예상하면서 보냈다. 낯선 외국이지만 둘이 서로 도우며, 은용이는 공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가는 사람, 보내는 사람의 꿈은 푸르렀었다.

십년 예정으로 터 닦고 세우라고 부탁해 보냈다.



[각주]
1. 엿주어 – 웃어른에게 말씀을 올리다. 규범 표기는 ‘여쭙다’이다.
2. 깔축없이 – 조금도 부족하거나 남는 것이 없이

[범용기 제2권] (139) 잠시 “런던” 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 - 박형규와 그 그룹

박형규와 그 그룹

내가 삼선개헌 반대에 나섰을 때, 박형규는 『신동아』엔가 “노(老) 목사의 비장한 사회참여 결단…”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던 것 같은데 사실인즉 ‘비장’할 것도 ‘결단’이랄 것도, ‘사회참여’랄 것도 없는 것이었다. 목사로서 최소한의 증언을 남겼다면 남긴 것뿐이다.

나는 사실, 한국 교회도 “No!”라고 증언해 주기를 바랐다. 내가 런던 간 동안에 장준하가 나를 대신해서 내 이름으로 여러 번 교회에 격문을 보냈었다는 데 그야말로 광야에 외치는 소리랄까 메아리가 없었다 한다. 뒤늦게 N.C.C.에서 짧은 성명이 나왔었다고 들었다.

“교회가 왜 정치에 관여하느냐?” 하는 것이 교회 지도자들의 거의 일치된 대답이었다.

나는 말했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하룬들 살 수 있느냐?”, “정부에서 하는 대로 하는 친여적인 행태는 ‘정치’가 아니고 정부의 잘못을 충고하는 것만이 정치 관여냐?”고.

“김 목사(나를 의미한다)가 이번에 정치인과 관계없이 순 교회 지도자로서 교회에 호소했었다면 우리도 다 따라나섰을 거요” 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진짜 그랬더라면 그들은 “목사 내놓고 정치에 나서라”고 대들었을 것이 아닐까?

“‘삼선개헌반대’ 운동은 ‘범국민투쟁위원회’로 발족했고 정치인들이 많이 참여했지만, 그들은 ‘정치인’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다. ‘국민’으로 참여한 것이다. ‘헌법’은 국민이 자기들 주권을 수호할 유일한 근거기 때문에 그걸 양보 또는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주권의 양보 또는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운운했다.

이 말은 3선개헌반대 위원회 발대식 때 ‘이병린’[1] 변호사가 연설한 내용의 한 구절인데 나도 목사들에게 같은 말로 설명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 ‘투쟁위원회’란 이름에서 ‘투쟁’이란 단어가 기독교인의 성미에 거슬린다고도 했다.

의를 위한 ‘투쟁’을 회피했다면 예수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대답했다. 예수님도 세상에 싸움을 일으키러 왔노라 하지 않았는가? 하고 나는 항변했다.

나는 3선개헌 반대 발기인 명단에 박형규와 신애균 여사를 기입했다. 박형규는 그 당시 『기독교사상』 편집책임자로 있었는데 기독교서회 김춘배 총무의 비위에 거슬린다고 이름 내기를 꺼려했다. 신애균 여사도 가정사정상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오라, 가라” 하지 않을테니 이름만 빌리라고 했다.

뱃장세기로 이름난 ‘이태준’ 노(老) 목사도 처음에는 아주 적극적이었는데 중도에서 이름을 뺐다.

김대권인가 하는 사위님이 청와대 검찰담당관으로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박형규는 『기독교사상』지 8월호였던가를 ‘3선개헌 반대 특집호’로 편집, 김춘배 총무의 인허 없이 돌격 간행, 비밀 배부에 성공했다. 한 획기적인 Document였다고 본다. 거기에 나와의 인터뷰 기록이 자세하게 게재되있다. 이 책은 곧 발매금지로 압수됐지만 퍼질 대로 퍼진 후였다.

하루는 박형규가 어느 치벽한 다방에서 자기의 숨은 동지들을 내게 소개했다. 이문영[2], 서광선[3], 현영학[4], 이극찬(?), 홍동근[5] 등등이 아니었던가 싶다.

행정학 박사로 고대 교수인 이문영은 “3선개헌이 통과되면 국민은 할 일을 다 뺏긴다”고 했다. 한 사람이 나라의 대소사를 혼자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할 일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박정희가 독재자로 군림할 것과 민주분권제도가 사멸할 것을 암시한 말이라 하겠다.

이분들이 후일에 『제3일』 동인이 되어 4년을 하루같이 집필했던 것이다.



[각주]
1. 이병린(李丙璘, 1911~1986) - 호는 심당(心堂). 경기도 양평 출생.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 서울매동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재직하다가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다. 190년에 경찰조직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3ㆍ15 부정선거 후에 일어난 마산소요사태의 진상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박정희 정권 때 3선개헌 반대, 유신헌법철폐를 위해 활동하였다. 1970년 군사정권을 비판한 당시 <오적> 필화사건의 시인 김지하와 윤보선 전 대통령과 강신옥 변호사의 긴급조치 위반 사건 등에서 변론을 맡았다.
2. 이문영(李文永, 1927~2014) - 호는 소정(小丁). 서울 출생. 1970-80년대 민주화운동과정에서 3ㆍ1 민주구국선언, YH사건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고려대 교수직을 세 번 해직당했으며 모두 4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2008년 자서전에서, ‘유진오 총장에 대한 평가에서 일제 학병 출정을 독려한 친일파보다 전두환의 국정을 자문한 사람이기에 더 나쁘다’고 회고했다.
3. 서광선(徐洸善) - 1931년 평안북도 강계 출생. 한국전쟁 당시에 아버지 서용문 목사는 공산군에게 총살을 당하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으로 간 그는 해군에 입대하였다(당시 사귄 친구 중에 민경배 교수가 있다). 그곳에서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어 몬타나 주의 로키마운틴 대학과 일리노이 주립대학원에서 공부를 하였다. 함선영 사모와의 만남 이후에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이화여대 교단에 서게 되었고, 유니온신학교에서 사귄 박형규 목사를 통해서 김재준 목사를 만나게 되고 <제3일>이란 동인지에 관여하게 되었다. 1980년 군사정권에 의해 해직교수가 되면서 장로회신학대학에서 학과목을 이수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4. 현영학(玄永學, 1921~2001) - 함경남도 함흥 출생. 목사 현원국과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인 신애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윤치호의 여섯째 딸 윤보희와 결혼했다. 1938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간사이학원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광복 이후에 이화여전 강사,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7년 미국 유학 성서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49년 유니언신학교에서 니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55년 이화여대 신학과 교수로 복귀하였고, 박정희 군정 연장에도 반대하였다. 1970년대에는 서남동, 안병무와 함께 민중신학 운동을 주관하였다.
5. 홍동근(1926~2001) - 평양 출생. 한국전쟁 중 월남하였고 북의 평양신학교, 남의 장로회신학교를 거쳐 미국의 뉴욕신학교와 풀러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서울 영락교회와 동신교회에서 부교역자로 목회하다가 일본 경로한인교회를 섬기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1970년대 미국으로 이민하여 목회활동을 하다가 1970년대 말부터 북한을 왕래하면 통일운동을 벌였고, 1989년부터 미국과 평양을 오가며 김일성대학에서 기독교를 가르쳤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2026년 3월 7일 토요일

[범용기 제2권] (138) 잠시 “런던” 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 - 삼선개헌 투쟁위 해체

삼선개헌 투쟁위 해체

그래서 소위 국민투표란 것도 엄청난 부정 조작으로 박정희 면목내는 구실을 했다.

이제는 ‘3선개헌’이란 투쟁 목표 자체가 사라져 버렸으니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란 것이 존속할 명목도 사라진 셈이다. 해산하지 않으면 쑥스러운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이었던가, 삼선개헌 반대운동에 가담했던 분들을 자유로 모이게 하고 해산결의를 했다. 모두 침통하고 좌절된 표정들이었다.

이철승은 “이제 나는 정계의 고아가 됐습니다. 신민당에 들어갈래도 이미 다져진 그들 자신의 권력구조 틈에 나를 끼어줄 리가 없고, 저는 베어버린 ○○○이 됐습니다” 하며 탄식한다.

그런데 불과 10년 안에 그가 ‘당수’까지 됐으니 그의 정계 유영술(游泳術)[1]이 어지간하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영선은 경성제대 제1회 출신으로서 재정학을 전공한 3대 수재중의 하나라고 한다. 한때 서울대학에서 교편도 잡았었다. 그는 고등고시에 합격해서 일제시대에 군수도 했단다.

그는 열렬한 삼선반대 투사였다. 그런데 그도 나에게 서글픈 푸념을 남겼다.

“나는 이제 앞길이 막연합니다. 신민당에 갈 수도 없고 김 박사님이 정당이라도 하나 만든다면 힘껏 심부름하겠는데 그건 안하신다니 할 수 없고….”[2]

나는 투쟁위원회 해체식에서 간단히 인사하고 물러났다.

“이제부터 장기적인 국민민주화 계몽운동에 각자 있는 고장에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교회의 사회화와 국민의 민주화에 미력이나마 장기 봉사할 작정입니다.”

이 위원회는 신민당, 군소정당, 각계 인사가 잡다하게 모인 모임이었지만, 온전히 일체되어 단 한 번도 인간관계에 투정이나 역작용이 생겨본 적이 없다. 당국에서 쐐기 박을 틈도 없었다. 이간이나 불신을 의심한 적도 없다.



[각주]
1. 유영술(游泳術) - 헤엄치는 재주
2. 김영선은 이후 박정희 정권에 등용되어 국토통일원 장관(1970-1973), 1974년부터 5년간 주일대사를 역임했다.

[범용기 제2권] (137) 잠시 “런던” 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 - 삼선개헌안 날치기 통과와 국민투표

삼선개헌안 날치기 통과와 국민투표

3선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더라도 통과될 가망은 없었다. 박정희의 ‘바지저고리’라는 이효상[1] 국회의장이 또 무슨 날치기 지령에 놀아날지 몰라서 국회의원들은 밤낮 의사당에 농성하는 것이었다.

토요일 밤 열두시 -

“이제부터는 일요일인데 일요일은 의사 일정도 없으니 다들 돌아가 쉬시지요” 하고 이효상 의장은 말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의장은-

“그럼 나는 집에 가겠소” 하며 뒷문으로 나간다. 몇 사람의 공화당 의원이 따라 나갔다.

자정이 지났으니 통금 시간이라 길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의사당 뒷골목은 어두컴컴했다. 길 건너에 ‘제3별관’이 있다.

물론 앞문이 닫혀 있다. 이 의장과 몇 사람 위원은 뒤로 돌아 판자로 된 뒷문을 뜯고 들어가 제3별관 어두컴컴한 뒷방에 촛불을 켜고서 삼선개헌안 통과라고 속삭이고 방망이를 두들겼다. 그리고 각 신문사에 통고한 다음에 생쥐처럼 도망쳤다. 박정희는 새벽 세시에 ‘싸인’하고 기자들에게 발표했다. 신문은 대문짝 같은 호외를 돌렸다. ‘날치기’라는 내용을 폭로한 것이다.

이효상은 물론 박정희의 지령대로 한 것뿐이다.

국회의원들은 닭 쫓던 개가 울타리 쳐다보는 식이 되었고 시민들은 울분이 곤두 솟아 불신자들까지도 교회당에 마구 모여 들었다.

“덤덤한 설교하는 목사는 없다”고 수군거리더라는 것이다. 특히 경동교회는 초만원이었는데 강원용 목사의 설교는 울분의 분화구였다 할까. 모두들 통쾌하다고 했단다. 나는 주일날 아무데도 나가지 않았다.

나는 곧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실행부를 모이고 대책을 강구했다. 이제 국민투표 절차가 남았는데 끝까지 투쟁해 보자는 것이었다.[2]

투표 자체를 ‘보이콧’하느냐 투표를 하면서 부투표를 던지느냐 하는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다. 김상돈은 전적으로 ‘보이콧’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투표 거부란 시골에서는 불가능한 얘기였다. 동반장 책임으로 트럭을 동원하여 전 주민 유권자를 투표장까지 실어가는 판국에 ‘거부’가 성립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투표를 하든, 안하든,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니 ‘부표’ 던질 기회라도 국민에게 허용하는 것이 옳다는 것으로 낙착됐다.

이 판국에 ‘부정선거’ 아닌 ‘공정선거’를 기대할 수는 물론 없는 것이었다.



[각주]
1. 이효상(李孝祥, 1906~1989) - 호는 한솔. 대구 출생.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일본 동경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교직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경상북도 학무국장을 지냈으며, 1954년 벨기에의 루뱅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수학하고 귀국한 뒤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다. 4ㆍ19 혁명 이후 무소속으로 당선, 5ㆍ16 이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정치활동을 계속하였다. 삼선개헌안 통과 시 국회의장이었다(1969년 9월 14일).
2. 삼선개헌안이 통과된 직후 1969년 9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재준 목사 기사 
三選改憲(삼선개헌)반대 汎國民鬪委(범국민투위) 金在俊(김재준) 위원장은 十六日(십육일) “改憲案(개헌안)의 國會變則(국회변칙) 처리사건은 國會議決(국회의결) 사항으로 간주할 수 없고 전적으로 無效(무효)”라고 주장하고 “汎國民鬪委(범국민투위)는 앞으로 國民主權(국민주권)의 守護(수호)와 伸張(신장)을 위해 正權(정권) 타도운동에 전력을 집중하겠다”고 역설했다. 金(김)위원장은 이날 記者會見(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밝히고 “앞으로 國民投票(국민투표)는 政府(정부)의 信任(신임)을 묻겠다는 朴(박)정권의 방침에 맞서 朴(박)정권 不信任(불신임) 打倒(타도) 운동으로 삼아, 싸울것이며 公定(공정)한 분위기만 보장된다면 현政府(정부)를 불신할 것으로 믿는다”고 주장, “汎國民鬪委(범국민투위)는 필요에 따라 機構(기구)를 확장 개편하여 투쟁대열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재건되는 新民黨(시민당)에 鬪委(투위)가 참여할 생각은 없으나 앞으로 新民黨(신민당)과 共同目標(공동목표)아래 黨(당)이 재건 되는대로 협조 제휴하여 전국적인 유세에 나설 계획이며 폭력 이외의 방법으로 一體兩面(일체양면)의 투쟁을 강화할 것”이라 다짐하고 “新民會(신민회) 의원들은 改憲案(개헌안)의 院內(원내)저지투쟁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면서 “野黨議員(야당의원)들이 議員職(의원직)을 사퇴하는 것은 소극적인 극한투쟁이므로 끝까지 議員職(의원직)은 지키면서 싸우는 게 보다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범용기 제2권] (136) 잠시 “런던” 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 - 런던

런던

Y대회가 끝난 다음에는 자유다. 다른 대표들은 국한된 여비라 곧장 귀로에 올랐지만 김은우와 나는 여비도 넉넉해서 런던에서 약 10일 동안 무작정 방랑했다.

의젓한 번화가지만 길바닥 구멍으로 지하에 내려가면 섹스영화, 스트립쇼 등등이 쉴 새 없이 연속된다.

그러나 거기가 유흥가 자체인 것은 아니었다.

‘트라팔가’니 뭐니하는 번화가 ‘로타리’에는 환각제에 취한 아가씨들이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박고 평토장[1]으로 앉아 침을 흘리는 것도 눈에 뜨인다.

젊은 남녀가 무더기로 분수탑 언저리에 서고 앉고 했지만, 서로 말을 건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모두 ‘멍’해서 실신자의 그늘진 표정이었다. 그게 ‘히피족’[2]이라기도 했다.

‘하이델 팍’ 공원 입구에는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 인도에서 온 사람 등등이 즉석 연단에서 자기들 불평을 털어 놓는다. 전과 달라서 귀담아 듣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너댓 사람 섰다가도 가곤 했다. ‘하이델 팍’ 넓은 잔디언덕은 시원스러웠다. 공원 저켠에 직장을 가진 사람들은 날마다 그 공원 주변을 돌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몇 갑절 더 든다고 한다. 그래서 공원 안에 직통로를 만들어 달라고 몇 번이고 청원했었지만 언제나 ‘NO!’ 였단다.

그 이유는, “이 공원은 런던의 폐(肺)다.”

하루는 강원용 목사가 일부러 나를 보러 왔다. ‘하이델 팍’, 잔디언덕 외나무 밑에서 진종일 얘기했다. 그는 내가 이번에 출국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중대한 책임자로서 이런 경우에 국외로 나온다는 것은 사기(士氣)에 관계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돌아가는 시기를 잘 택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자기가 먼저 들어가서 정황을 살피고 날짜를 알려드리겠단다.

나는 그가 유숙하는 고급 호텔 라운지에서 와인을 나누며 진지하게 간담했다. 그리고 식당에서 정식 ‘디너’를 같이 했다. V.I.P.들의 호텔이라고 한다. 자못 귀족적이었다.

런던은 늙어가는 도시랄까!

한참 자식들을 키울 때에는 흥성한 대보(大家)였는데, 자녀가 모두 자라 시집가고 장가들고 제각기 분가해 나간 다음, 그 커다란 옛집에 늙은 부모만 남아 있다는 것이 런던의 인상이다.

열흘 후, 김은우는 파리로 떠나고 나는 토론토로 직행했다.

대서양을 북으로 날아 북극권을 넘는다. 조금 졸다가 밖을 내다봤다. 맑은 햇빛에 흰 눈의 세계다. 어느 설산(雪山) 위를 날으는가 했었는데 형편은 달랐다. 산꼭대기에 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눈 속에 산들이 통째로 묻혀 있었다.

높은 봉우리 끄트머리가 겨우 눈 위에 내민 것뿐이다. 아 이런 게 북극이구나 했다.

토론토에 도착하자, 강원용에게서 전보가 왔다. 곧 귀국하라는 것이었다.

투쟁위원회에서도 소식이 왔다.

3선개헌안을 반대하고 공화당을 탈당한 길재호[3] 등 국회의원들의 투표권을 살리기 위해서 신민당에서는 당을 해체하고 다시 창당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반드시 정당원이라야 하는데 어느 기성 정당에서 탈당한 의원은 다른 기성 정당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이 ‘박’이 만든 정당법이었다. ‘무소속’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신민당에서 해당하고 새로 창당하면서 그들을 포섭해야 할 형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악전고투하고 있는 이 마당에서 내가 여기 있을 수는 없다고 느껴 그 이튿날로 떠난 것이다.

김포비행장에는 가족들 이외에 대한일보사에서 나왔고 3선개헌반대위원회에서도 나왔다. 서로 나를 자기 켠 차에 태우려고 귀빈실을 서성거린다.

나는 “가족들과 같이 간다”고 끊어 말했다. 이철승은 역시 센스가 빨랐다. 우리 가족들을 슬쩍 자기 차에 태우고 함께 수유리 집까지 모시고 간다. 차 안에서 그동안에 된 경과를 보고하고 이제부터의 ‘프로’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 집에까지 가서 내 식구들을 내려놓고 시내 사무실로 나를 데려간다.

이제 투쟁의 마감 고비가 남아 있었다. 몇 주일 후에는 국회 투표가 실시될 것이므로 일대 민중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길재호 등 공화당 탈당위원들은 신민당에 포섭되었다.[4] 우리는 며칠 후에 효창공원에서 대연설회를 열었다.[5] 대성황이어서 약 6만이 모였다. 장준하가 사회하고 내가 개회사를 했다. 그리고 야당 정치인들이 연설했다. 십여 명 연사가 모두 연설가였지만 그 중에서도 역시 김대중이 제일 먹어드는 연설을 하는 것 같았다. 6만 청중이 온전히 매혹된 표정이었다. 그때만 해도 순사는 얼씬도 못했었다.

이런 집회가 두 번 있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투표 전일에는 데모에 나섰다. 한파는 종로 경찰서 쪽으로 한파는 국회의사당 쪽으로 행진했다. 후에 주일대사로 임명된 김영선[6]이 나와 같이 국회의사당 쪽으로 걸었다. 유도 8단이라나 하는 장사가 나를 옹호하며 걸었다. 순사들이 달려들면 한 팔로 밀어제치며 나갔다. 어쨌든 옥신각신 국회의사당까지 가긴 했었다. 젊은이들이 프랭카드를 들고 구호도 외치면서 시청 가까이까지 따라 올 수 있었다.

신민당수 유진오는 삼선개헌안은 결코 국회를 통과 못한다고 예언하며 낙관했었다.

삼선개헌 반대운동 때 받은 지워지지 않는 인상의 하나로서 청년들의 소탈한 행동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사무실인 종로회관 옆 대합실 비슷한 작은 방에 청년 십여 명이 아침부터 밤중까지 매일 모여 있었다. 우리가 사무실에 들어오면 보리차를 갖다 준다. 우리가 무슨 심부름을 시키면 그들은 영락없이 준행한다. 문자 그대로 손발 노릇을 했다.

하루는 경찰에서 밤중에 그들을 몽땅 잡아갔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사무실에 나왔을 때 그 방은 여전히 명랑한 젊은이들로 꽉 차 있었다.

“웬 젊은이들인고?”

“우리는 제2진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제2진이 잡히면 제3진이 또 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한다.

C.I.A.에서 잡아다가 위선[7] 불문곡직[8], 두들겨 패고, 다음에 경찰에 넘긴단다. 경찰에서 또 두들겨 패고 서대문 감옥에 옮긴다.

그래서 제1진은 서대문 구치소에 있다. 우리 늙은이들은 서대문 감옥에 방문을 갔다.

군사 쿠데타 때 그걸 못하게 하려다가 실패하고 10년 징역을 끝내고 나온 ‘반역장교’도 몇 분 우리 위원회에 끼어 있었기에 그들이 앞장서서 제집 드나들 듯 감옥문을 출입한다. 십년 사귄 간수라, “또 왔어?” 하고 어깨를 툭툭 무사통과다. 우리는 들어간다.

학생 청년들은 한 면회실에 한 사람씩 나와 있었다. 들창구멍으로 보고 말한다.

“얼마나 고생스러운고?” 하고 인사를 하면 그들은 거의 한결같이, “괜찮습니다. 고생이 무슨 고생입니까? 저희 걱정은 마시고 민주운동을 계속해 주십시오. 나가면 저희도 또 하겠습니다.”

명랑하고 씩씩했다. 이런 젊은이들이 한국의 소망이라고 고마워하며 나왔다.

한 청년은 C.I.A.에서 무지무지한 고문을 겪고 풀려 나왔다.

몸 전체가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몇 번을 기절했다고 한다. 그래도 기술자가 때리기 때문에 피 터진 자욱은 없다고 쓴 웃음.



[각주]
1. 평토장(平土葬) -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평하게 매장함
2. 히피족(hippie族) - 기성의 사회 통념이나 제도,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의 회복과 자연에의 귀의 등을 주장하며 자유로운 생활 양식을 추구하는 사람들
3. 길재호(吉在號, 1923~1985) - 평북 영변 출생. 1948년 국민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1949년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마친 뒤 1959년 제1전투단 부단장을 역임하는 등 야전경험을 거쳤다. 5ㆍ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사법위원장과 제6대 국회내무위원장을 지냈다. 삼선 개헌 당시에 길재호는 공화당에서 이탈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후 이른바 ‘10ㆍ2파동’을 겪으면서 공화당에서 제명당하였다. 당시 삼선개헌에 반대했던 공화당의 의원들은 정구영, 김용태, 예춘호, 양순직, 박종태, 김달수, 이만섭 등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만섭이 개헌에 찬성하는 조건으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대통령 비서실장 이후락 퇴진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4. 공화당에서 삼선개헌에 반대했던 의원들은 정구영, 김용태, 예춘호, 양순직, 박종태, 김달수, 이만섭 등이었다. 당시에 이들은 탈당이 아니라 제명되거나 지속적인 회유와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들 중에 예춘호와 양순직은 삼선개헌 저지를 위해 야당과 함께 활동했다.
5. 1969년 7월 19일 오후 2시 서울 효창운동장. 동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오후 3시 현재 5만인파가 모였다고 한다.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이날 비가 내리는 가운데 행사를 강행했다고 전한다.
6. 김영선(金永善, 1918~1987) - 충남 보령 출신. 1937년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해방될 때까지 전남 진도군수로 재직했다. 해방 이후 2, 3,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58년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2년간 경제논설을 집필했고 흥한경제연구소를 설립하여 경제부흥책 등을 연구하였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재무부장관을 역임하면서 5ㆍ16 군사정변으로 실각하기까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 추진하였다. 이후 박정희 정권에 등용되어 국토통일원 장관(1970-1973), 1974년부터 5년간 주일대사를 역임했다.
7. 위선 – 다른 것에 앞서서
8. 불문곡직(不問曲直) - 사리의 옳고 그름을 따져 묻지 않음

[범용기 제2권] (142) 잠시 “런던” 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 - 경용ㆍ효순 약혼하고 캐나다에

경용ㆍ효순 약혼하고 캐나다에 같은 해 1969년 - 경용과 효순은 수년 전부터 사랑하는 사이였다. 효순은 성모병원 간호원으로 명동언덕 위 기숙사에 있었고 경용은 명동거리 한양증권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 동안에 효순은 자기 힘으로 토론토 어느 병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