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3:19] 이제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 1987년 8월 3일, 김상근 목사

이제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이사야 43장 19절 / 1987년 8월 3일 / 기장 남신도대회


[회상 노트]

“이제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는 남신도회 전국대회의 주제였다.

사실 1987년 들어 시대에 새 기운이 돌고 있었다. 경찰이, 박종철 군에게 수배 중인 친구의 소재지를 대라며 고문을 가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고야 만 사건은 차라리 그 낡고 사악한 정권을 심판하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정권은 더 가파른 죽음의 고개를 숨을 헐떡이며 기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간선 대통령제를 결코 내놓지 않겠다는 ‘4ㆍ3 호헌 선언’이 그런 것이고, 민정당이 간선에 내놓을 대통령 후보를 선출한 것이 그랬다.

결국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6월 29일, 정권은 소위 ‘6ㆍ29 선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의 승리, 아니, 하나님의 위로가 드디어 우리 위에 내리게 되었다고 나는 믿었다. 이 믿음을 우리 남신도 회원 모두가 함께 고백하게 되기를 염원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나는 이미 같은 본문을 가지고 지난 봄 남신도회 총회 개회 때 설교를 했다. 그때가 2월 27일이었으므로 오늘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지난해 9월 총회 주제를 잡을 때 무슨 직감이랄까 아니면 당위적 요청 같은 것을 강하게 느꼈다. 말하자면 ‘우리 백성이 이만큼 시련과 고통을 당했다면 하나님, 이제는 해방을 선포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것이 당위적 요청의 정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터무니없는 요청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퍽 막연하기는 하나 그러나 어떤 직감이 있었다. 그래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 복역과 징벌의 때가 지났다.”라는 제2이사야의 첫 선언을 주제로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2이사야는 누군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지 40여년이 지났을 때, 이제는 포로 생활, 피압박 민족으로 사는 데 차라리 익숙해졌을 때, 그 바닥에서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무너지고 기가 부서져 버리는 것을 본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는 복역과 징벌의 때가 지났다고 선포해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고, 또 그것을 믿음으로 내다보면서 아직 포로기에 있으나 그런 선언을 했던 예언자였다.

그는 그렇게 선언하면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기 시작한다. 우리의 하나님은 누구시냐?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신 이시며 세상의 주이시지 않느냐? 그가 우리의 하나님 이신데 우리는 그를 믿지 않고 오히려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을 관심도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내 권리 따위, 알은 체도 않으신다”(사 40:27)고 투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스스로 불신앙으로 떨어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이스라엘아, 너희가 지금 포로로 있다 하지만 야훼를 믿고 바라라.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 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사 40:31). 이렇게 외치며 이스라엘을 격려하고 부추겼다.

우리가 복역과 징벌의 때가 지났다고 선언했을 때만 해도 그것이 한낱 허세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우리의 삶의 정황은 포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황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드렸던 지난 2월 말 그때쯤 이 나라에는 새로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2이사야와 동시대 예언자였던 에스겔은 이런 환상(겔 37:1-14)을 보았다. 그는 야훼에게 인도되어 해골과 뼈다귀만 뒹구는 한 골짜기에 가게 되었다. 삶의 용기와 희망이 없는 뼈의 세계, 죽음의 회색 지대였다.

우리도 우리 민족이 분단된 지 40년이 넘었다. 분단 문화에 적응하여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오관이 잘 길들여졌다. 이것은 마른 뼈 이상이 아니다.

정치적 독재 체제 아래 살게 된 것도 이제 만 40년이 되고 있으니 역시 그 체제 아래 별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 길들여져 버렸다. 자유라는 말, 인권, 민주라는 말이 오히려 국론을 분열하는 말로 느껴질 지경에까지 갔다. 이런 민족은 마른 뼈에 불과한 것이다.

경제적 정의, 노동자의 권익, 농민의 생존권을 말하면 붉은 색 안경으로 본다. 사상성을 의심하여 용공 분자시 해 버리는 도식적 사고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마른 뼈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분명한 증거였던 것이다.

에스겔은 무엇을 보았는가? 거기서 기적을 보았다. 새 일의 시작을 보았다. 앙상하게 말라 버 린 뼈들에게 야훼께서 숨을 불어넣자 그 뼈들에 살이 붙고 가죽이 씌워져 산 영, 강한 군대가 되는 환상을 보았다.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 40여 년에 마른 뼈처럼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나 하나님께서 새 일을 시작하신다면 산 영, 강한 군대가 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그렇다. 우리는 마른 뼈와 같았다. 포로 생활 복역 생활에 오히려 익숙해져 버렸다. 그러나 “내 백성을 위로하라. 복역과 징벌의 때가 지났다고 선언하라.” 하신 그 하나님, 우주와 역사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급기야 새 일을 시작하셨던 것이다.

2ㆍ7 박종철 군 국민추모대회, 3ㆍ3 평화 대행진에서의 국민은 어제의 국민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마른 뼈가 아니었다. 그 엄청난 물리력 앞에 맨손으로 버티어 서서 내일의 희망을 움켜쥐고자 가능한 모든 일을 감행하는 국민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마른 뼈에 하나님의 숨이 불어넣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4ㆍ13 호헌 선언을 하고 여기저기서 그것을 지지하는 대회, 성명이 나왔을 때, 더구나 교회 일각에서조차 ‘교회는 정치에 개입하여 신앙 본령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기도회가 열렸을 때 우리는 민주의 날이 또다시 까마득하게 멀어진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박종철 군 살인 은폐 조작 사건이 참으로 우연하게 터져 나왔다. 우연하게라는 표현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폐 조작을 터트리셨고 급기야 6ㆍ10, 6ㆍ26 국민대회를 일으키셨다. 당국은 40여 년 동안 억눌러 온 억압의 반동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6ㆍ29 선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우리가 주장하던 모든 것을 수용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승리요 국민의 승리다. 이제는 민주화라는 말에 그렇게도 거부 반응을 보이고, 인권이라는 말에 역겨움을 나타내던 사람들까지 민주화니 인권이니 하는 것을 서슴없이 말한다. 자유와 정의를 말하면 용공 분자라고 사시(斜視)하던 사람들도 사상의 자유, 신체의 자유, 경제 정의, 노사의 정의를 다투어 말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직 민주 시대에 들어가지 못한 채 포로 시대에 그대로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집권자는 그대로 군부이기 때문이요 1979년 12ㆍ12, 1980년 5ㆍ17의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있어 우리나라의 민주화의 제일 장애는 일부 부패한 군부였다. 5ㆍ16 군사 쿠데타가 없었더라면, 1979년 12ㆍ12, 1980년 5ㆍ17 일부 군부의 정치 개입이 없었더라면 그때 민주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군 일부에서는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 후보가 되면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둥의 망언을 버젓이 하고 있다. 아직도 주권과 모든 것의 결정권이 군에 있다고 착각하고 총칼을 앞세우는 군이 있는 한 민주화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군부 독재의 퇴진을 요구했으나 아직도 군부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포로 시대에 있다. 일차적 승리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믿음이란 무엇인가? 어두움 저쪽에서 비쳐 오는 빛 - 새 일을 보아 내는 것이다. 제2 이사야는 포로 시대의 끝점에서 이렇게 새 일을 확인하고 있다. 그는 새 일이 일어날 것이라 하지 않는다. “보아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시작하였다.”라고 단언한다.

“대머리 산에 개울물이 흐르고 골짜기에서 샘이 터지리라.
마른 땅에서 물이 솟아 나와 사막을 늪으로 만들리라.
사막에 올리브 나무를 심고 황무지에 전나무와 느티나무와 회양목을 함께 심으리라.
이것은 야훼께서 손수 하신 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루신 일.”
(41:18-20)

오늘날 우리의 사정이 어렵다 하더라도 지금 새 일이 무엇인가를 보아 내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믿음이다. 6월의 국민대회에 나선 국민의 모습을 보자. 어제의 국민이 아니다. 7ㆍ9 이한열 군 장례식에 150만 인파가 거리로 나왔다니 이것이 새 일이 아닌가? 끝내 6ㆍ29 항복 선언이 나왔다. 이것이 새 일이 아닌가? 어쨌든 정치적 민주화 작업은 이제 시작되었다. 이것이 새 일이 아닌가? 경제, 노동, 농민, 국민 모든 삶에서 민주화는 거칠게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새 일이 아닌가? 여러분이 비록 지금 일차적 승리밖에 이루지 못한 시점이라 하더라도 시작된 새 일을 보아 내기 바란다.

믿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새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다. “보아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시작하였다.”이다. 새 일의 주체는 휴전선 방위 책무를 파기하고 총칼로 정권을 탈취하는 일부 군인이 아니다. 무슨 선언을 한 집권당 대표도 아니다. “보아라, 내가” 하나님이시다. 마른 뼈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국민을 일으켜 세우셔서 새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 일은 반드시 성공한다. 믿으시기 바란다. 지금 시작된 새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지금 시작된 새 일을 보고 그 새 일의 주체자가 하나님이심을 믿고 거기에 동참하는 사람이다. 구경꾼은 안 된다. 하나님은 참여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새 일에 동참하자. 작게든 크게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동참하느냐 계속적으로 거부하느냐가 문제다.

우리가 깊이 빠진 편견과 세뇌의 늪에서 벗어 나와 새 일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안일과 게으름을 떨치고 나와 새 일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새 일에 흔연히 동참하는 용기, 그것이 믿음의 정수다. 이 용기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