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25:9-13, 35-41; 이사야 61:1-2] 통일 희년 – 1995년 7월 5일, 김상근 목사

9월 16, 2026

통일 희년

레위기 25장 9-13, 35-41절; 이사야 61장 1-2절 /기장 희년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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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문]


희년의 전거구는 레위기 25장과 누가복음 4장 18-19절이다. 이사야서 61장 1-2절도 희년 선언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희년을 선언한지 7년이 지났다. 바로 올해가 희년이 되게 하자던 1995년이다. 올해는 해방 50년임과 동시에 분단 50년이다. 50년이 된 이 해를 ‘희년’이 되게 하자는 것은 훌륭한 발상이다.

1. 희년은 회개이며 화해다.

‘희년’의 명령이 담긴 제사 문서(P)는 바빌론으로 잡혀가 있던 포로들이 수집했던 것을 귀환 후 에스라가 편집해서 공포한 것이다. 희년 사상이 생긴 때는, 희년을 갈망했던 때는, 이국 땅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였다. 이스라엘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싸웠다. 결국 남도 북도 이방 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 지금 그들은 바빌론이라는 강대국에 점령당했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바빌론 땅으로 끌려 갔다.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지배 계층 사람이 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땅에 그냥 남아 있었다. 명망가나 종교 지도자, 정치가, 재력가들이 끌려갔다. 그들은 지금 이방 땅에 있다. 언제 자기 땅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조차 예측할 수 없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땅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선민이라는 자신들의 신세가 처량하고 불쌍하다. 이렇게 초라할 수가 없다. 부끄러웠다.

급기야 그들은 우리가 왜 이런 신세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라가 왜 망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희년 사상의 배경이다.

그들은 지난날 자기들이 어떻게 살아 왔던가를 반성해 본다. 우리가 이 꼴이 된 것은 바빌론이 강했기 때문인가, 우리의 군대가 약했기 때문인가, 국방 정책이 잘못된 때문인가를 묻는다. 아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이라고 회개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만약 자기들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속죄의 뿔나팔을 크게 불리라고 다짐한다. 그들이 불려고 했던 희년의 나팔은 속죄의 나팔이다.

“일곱째 달 열흘 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라. 나팔을 불어, 너희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 돌아가는 해이다. … 희년에는 씨를 뿌리지도 말고, 저절로 자란 것을 거두어서도 안 되며, 너희가 가꾸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저절로 열린 포도도 따서는 안 된다”(레 25:9-13).

이것은 회개다. 희년은 회개다.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뉘우치는 것이 희년이다. 희년의 나팔은 회개의 나팔이요 속죄의 나팔이다. 회개는 화해다. 온 땅에 불어야 할 뿔나팔은 회개와 속죄의 나팔이다. 이 같은 회개와 화해의 가닥이 여러 가지지만 한가닥만 살펴보자.

‘그렇다.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가 망할 수밖에. 우리가 귀환한다면 그들과 함께 살 것이다. 그들을 돌보아 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회개했다. 그리고 화해를 결심했다. 레위기 25장 35절의 말씀은 바로 이 회개와 화해다.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을 돌보지 않은 죄를 회개한다. 귀환한다면 그들과 더불어 살겠다는 화해다.

“너희의 동족 가운데, 아주 가난해서,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너의 곁에 살면, 너는 그를 돌보아 주어야 한다. 너는 그를, 나그네나 임시 거주자처럼, 너와 함께 살도록 하여야 한다”(25:35).

그들의 회개는 더욱 깊어진다. ‘그렇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절박한 사정을 틈타 돈놀이를 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망할 수밖에. 우리가 만약 귀환할 수 있게 된다면, 절대로 다시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살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회개하고 화해를 결심한다. 25장 36절 이하의 말씀도 바로 이 회개와 화해다. 절박한 사정을 틈타 돈놀이 한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그들과 화해하겠다 하는 것이다.

“그에게서는 이자를 받아서도 안 되고, 어떤 이익을 남기려고 해서도 안된다. … 너는 그런 사람에게, 이자를 받을 목적으로 돈을 꾸어 주거나, 이익을 볼 셈으로 먹을거리를 꾸어 주어 서는 안 된다”(25:36~38).

‘급기야 그들을 종으로 사서 마구 부렸다. 그러니 우리가 포로로 끌려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귀환하여 다시 종을 부리게 된다 하더라도 50년마다 그들을 그들의 땅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회개하고 화해를 결심한다. 39절 이하의 말씀은 바로 이 회개와 화해다. 채무를 이유로 종으로 삼았던 것을 회개한다. 그들 종들과 화해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가난하게 되어서 너에게 종으로 팔려 왔어도, 너는 그를 종 부리듯 해서는 안 된다. … 너는 희년이 될 때까지만 그에게 일을 시키다가, 희년이 되면 … 자기 가족이 있는 … 땅으로 돌아가도록 하여야 한다”(25:36-38).

자기들이 만약 고국으로 돌아간다면 회개의 뿔나팔, 속죄의 뿔나팔을 온 땅에 불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들과 화해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희년은 갈등 관계에 있던 너와의 화해다. 희년의 나팔은 화해의 나팔이다. 화해의 뿔나팔이다. 귀환하면 이 화해의 뿔나팔이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리라.

2.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신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사람들이 급기야 석방되었다. 그들은 줄을 지어 자기 조국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정작 돌아온 후에는 바빌론 땅에서 일으켰던 회개가 증발되어 버린다. 회개하던 심정도 없어진다. 결단은 시행되지 않는다. 화해는 불발되고 만다.

이런 형편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하나님의 영을 내려주신다. 그로 하여금 ‘희년’을 선포하게 하신다. 우리는 그 예언자가 누구였는지 알지 못한다. 학자들은 ‘제3이사야’라고 부르자고 한다. 그는 ‘희년’을 다짐했으면서도 ‘희년’의 삶을 살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희년’을 선포한다.

제3이사야의 활동 기간이 포로의 귀환 후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그가 선포한 ‘희년’이 아직 바빌론에 남아 있는 이들의 석방을 뜻한다는 견해에 나는 이견을 가진다.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는 등의 대목이 포로의 완전 석방을 선언한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의 ‘희년’의 선포라 보아야 할 것이다.

제3이사아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61:1-2).

무슨 뜻인가? 바빌론으로 잡혀갔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거기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돌아오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채권자들이기 때문이다. 섬겨야 할 자기들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넘겨줄 수밖에 없는 땅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막막하다. 옛날의 생활을 다시 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해방이 되었으나 그것은 지난날의 복원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결코 새 날일 수 없었다. 그들은 두려웠다. 이런 자리에 제3이사야가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상한 마음을 싸매 주는 것,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는 것,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희년’을 실행하는 것이다. 저 바빌론에서 다짐했던 내용들을 실행하는 것이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그들이, 과거에 빼앗았던 땅을, 본래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겠다고 선언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돌아오지 못하였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느냐고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자기들에 의해 상처 받은 사람들, 가슴에 슬픔을 안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아니겠는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겠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놀라운 선언이 현실로 나타난다고 상상해 보자. 이 선포를 듣는 사람들은 너무 너무 기쁠 것이다. 이게 웬 말인가? 이럴 수도 있나? 선포를 듣는 사람만 기쁜 것이 아니다. 선포하는 사람들도 기뻐 어쩔 줄을 모르게 될 것이다. 사람다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희년’이다.

그렇다. 이것이 ‘희년’이다. ‘희년’은 추상적인 일이 아니다. 현실이다. 피부에 와 닿는 삶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하지 않는다. 제3이사야는 희년을 일구어 내자고 외친다. 하나님께서는, 희년이 실종되고 증발되는 이 위기에, 제3이사야를 부르신다. 그로 하여금 희년을 다시 선포하게 하신다.

3. ‘1995 희년’도 회개요, 화해다

우리 역시 그렇다. 레위기나 제3이사야의 삶의 현실과 우리의 그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우리의 희년은 무엇인가?

우리는 ‘1995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희년’을 갈망하고 있다. 세계 정세는 완전히 변했다. 냉전적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휙휙 지나가고 있다. 절대적 가치로서 50년이나 우리에게 군림했던 냉전 논리로는 도무지 설명해 낼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어느새 옛 일이 되고 만다.

사회주의의 세계적 틀이 무너졌다. 북한과 미국이 수교를 탐색한다. 북한과 일본이 관계 개선을 탐색하고 있다. 우리 남한도 그렇다. 6ㆍ25 전쟁의 배후인 러시아와 돈을 주어가며 수교를 서둘렀다. ‘침략자 오랑캐 중공’과 친해졌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던 월맹과 도 수교한다. 그 최고 권력자를 초청하여 극진하게 환대했다.

지금은 냉전 시대가 아니다. 절대 가치였던 이데올로기는 온데 간 데 없다. 그런데도 남과 북은 냉전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도, 이념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종신 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 역시 이른바 비전향 장기수들이 있다. 김선명 씨를 44년째 감옥에 가두어 두고 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그를 세계 최장기수로 지정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국가보안법 사범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전ㆍ노 대통령 때보다 지금이 더 많다. 갈등과 반목의 이년을 보내고도 아직도 부족하다는 말인가?

지난 시절, 북의 반제가, 남의 반공이 타당했다는 나름대로의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붙잡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 민족 역시 21세기의 새 도전에 직면해 있다. 21세기의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강대국 사이에 또 다른 모양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더 많은 나라들을 자기들의 경제권에 집어넣으려 한다. 더 넓은 지역을 자기들 시장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른바 ‘세계화’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 지배, 그리고 분단에 이어 또다시 경제적 종속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여 있다. 우리가 민족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후손들을 사랑한다면, 또다시 종속국으로 전락하는 길은 가지 않아야 한다. 남과 북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 함께 살 수 있어야 한다. 함께 살아가자. 민족을 생각하자.

우리가 서로에게 지나쳤다고, 당시에는 그것을 최선의 길이라 여겼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강대국이 뒤집어씌운 운명에 맹종한 것이었다고, 그래, 우리가 언제부터 공산주의자였다고, 언제부터 자본주의자였다고, 그렇게도 매몰차게 상대를 숙청하고, 감옥으로 보내고, 그 식구들까지 못살게 굴고, 죽이기까지 했단 말인가! 공산주의자를 죽이는 것도 사람을 죽이는 것인데, 이른바 반동분자도 사람인데, 그렇게 무참하게 죽였더란 말인가? 너무 했다, 너무 지나쳤다, 너무 어리석었다, 너무 부끄럽다. 이렇게 반성하는 것, 이렇게 깨닫는 것, 이렇게 회개하는 것이 바로 1995년 희년이다.

희년은 회개다. 희년의 나팔은 회개의 나팔이다. 희년의 나팔은 속죄의 나팔이다. 이 나팔을 불지 못한다면 희년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제는 너를 나의 적으로, 원수로 삼지 않겠다고,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한민족이요 동포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응어리진 마음을 풀자고 선언하는 것이다. 과거에 맺혔던 것들을 툴툴 털어 내는 것이다. 이제는 용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함께 더불어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화해다. 남이 북에 내미는 화해다. 북이 남에 내미는 화해다.

희년의 뿔나팔은 화해의 뿔나팔이다. 화해의 나팔을 온 땅에 울려 펴지게 해야 한다. 삼천리 금수강산, 우리 강토 구석구석에 울려 퍼지게 해야 한다. 7천만 가슴마다 울려 퍼지게 해야 한다.

바빌론 포로들이 한때 그러했듯이 우리도 꽤나 신통한 생각을 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91년 12월 13일, 남의 국무총리와 북의 정무원 총리가 서명한 “남북 기본 합의서”다. 그 합의서 제1조는 “우리는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남은 북의 공산주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북은 남의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난 50년 동안, 상대에 대한 존중은 고사하고 결단코 인정도 하지 않았던 것, 그럼으로써 서로 증오하고 비방하고 살해했던 것이 지나쳤다는 회개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남과 북이 화해하겠다는 결단도 들어 있다.

북의 체제를 인정한다면, 나아가 존중한다면, 국가보안법에 담긴 반통일적 요소를 고치겠다는 것 아닌가! 북도 그렇다. 남의 체제를 인정한다면, 나아가 존중한다면, ‘조선로동당 당 규약’을 개정하겠다는 것 아닌가! 이 규약은 “전국적 범위에서”,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북은 물론 남도 사회주의화하겠다는 것이다. 1991년 12월 13일에 서명된 기본 합의서는 남북이, 바로 이런 지금까지의 입장을 버리고 화해로 나아가겠다는 일대 화해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형편은 마치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왔으나 거기서 일으켰던 회개를 내동댕이친 것과 같다. 그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나? 제3이사야를 보내셨다. 그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영으로 임하셨다. 그로 하여금 ‘희년’을 선포하게 하셨다.

지금,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다. 영으로 임하신다. “희년의 나팔을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라 명하신다. 희년의 나팔을 불라 명하신다. 선언하라 명하신다. 통일 희년을 일구어 내라 명하신다. 통일 희년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제3이사야가 필요하다.

주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셨다는 자의식을 가지자. 주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셨다는 확신을 가지자. 기름을 부으시고 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다급함을 우리 가슴으로 받자. 그리고 선언하자. 주께서 우리를 보내셔서 냉전 문화를 벗어 던지게 하셨다고, 지난 50년 동안 상한 마음을 싸매 주라 하셨다고, 냉전적 심판으로 갇힌 사람들에게 석방을 선언하라 하셨다고, 화해와 통일을 저해하는 제도와 법을 남에서도 북에서도 혁파하라 하셨다고 외치자. 희년을 선포하라 하셨다고 외치자.

한국 교회여, 제3이사야로 일어서자. 기장이여, 제3이사야로 일어서자.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에게 기름을 부으신다. 영을 부어 주신다. 일어나자.

4. 희년은 선포다.

희년을 선포하자.

(1) 남북은 더 이상 원수가 아니라 한 민족, 한 형제라 선언하는 것이다.

남북 기본 합의서를 실현하자.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선언하자. “상대방에 대한 비방, 중상을 하지 아니”하겠다 하자. “국제 무대에서 대결과 경쟁을 중지하고 서로 협력하며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한다 하자. “의견 대립과 분쟁 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 하자. 1995년 올해 안에 기본 합의서가 현실이 되게 하자. 그래야 1995년 통일 희년이 된다.

(2) 분단과 대결 때문에 남과 북에 억류되어 있는 피해자들이 그들의 희망대로 송환되고 석방되는 것이다.

남에 억류되어 있는 비전향 장기수, 김인서, 함세환, 김영태 씨가 북으로 돌아가게 하고, 김선명 씨를 석방하자. 북에 억류되어 있는 동진호 선원과 고상문 교사가 돌아오게 하자. 최근 항로를 잘못 잡아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우성호 선원들을 돌아오게 하자. 이산 가족들이 상봉할 수 있게 하자. 1995년 올해 안에 이 일이 이루어지게 하자. 그래야 1995년이 통일 희년이 된다.

(3) 통일을 저해하는 법들을 개폐하는 것이다.

남의 국가보안법 중에, 북의 조선로동당 규약 중에 통일을 저해하는 조항이 있다. 모두 개폐하자. 1995년 올해 안에 이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1995년이 통일 희년이 된다.

(4) 8ㆍ15 50주년을 남북이 함께 기념하는 것이다.

8월 13일, 판문점에서 남북 교회가 함께 드리는 예배, 이 예배를 반드시 실현해 내자. 서로, 주 안에서 얼싸안고 지난 50년의 갈등을, 미움을, 살의를 툴툴 털어 내자. 8ㆍ15 50주년 기념식을 남북이 함께 드리자. 50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이것조차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민족의 수치다. 1995년 올해에 반드시 이 일을 이루어내야 한다. 그래야 1995년이 통일 희년이 된다.

희년은 선언이다. 선언은 현실이다. 현실이 아니 되는 선언은 선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희년의 나팔을 온 땅에 불어 댈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럴 교회를 찾고 계신다. 그럴 단체를 찾고 계신다. 그의 영을 부어 주신다. 기름을 부으신다. 희년을 일구는 구원의 사업에 함께 참여하자.

여러분! 북도 남도 대변혁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상호 연계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른바 상호주의 원칙은 새 시대를 만들 수 없다. 화해를 이루어내지 못한다. 희년을 일구어 내지 못한다. 새 지평을 보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새 시대를 열 수 있다. 그래야 1995년 평화와 통일의 희년’을 만들 수 있다.

통일 희년은 열린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오셔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펼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룩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14-22] 우주적 구원과 희년 신앙 – 1995년 6월 20일, 김상근 목사

9월 15, 2026

우주적 구원과 희년 신앙

에베소서 2장 14-22절 /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 강사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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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문]

1. 선민과 이방인 – 원수 관계

기독교는 분명히 유대교의 한 분파로 출발하였다. 유대교 입장에서 보면 분파라기보다 이단이다. 유대교의 특성은 차별성이다.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는 것이 유대교의 정체를 분명히 하는 기본이 었다. 모름지기 모든 종교, 종파가 이 차별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종교나 종파로 존립할 수 없다. 특히 유대교가 이 점에서 유난하다.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기들 나라만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지키시고, 도우시는 나라라는 의식이 강했다. 이른바 ‘선민 의식’이다. 그것은 유대 민족의 영광, 유대인의 세계 지배라는 패권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기원전 600년쯤에 유대인의 나라는 패망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의 나라가 지구상에 다시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약 2,500년 후의 일이다. 그 긴 세월 동안 그 땅은 아랍계 국토였다. 그랬는데 어느날 그들은 쫓겨났고 유대인들이 들어와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사실 억지다. 쫓겨난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조직하여 항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로써 중동은 세계의 화약고라는 별칭을 받게 될 정도로 전쟁이 그치지 않게 된 것이다.

전쟁이 났다 하면 유대인들은 단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곤 했다. 임산부가 비행기를 조종하여 전투에 임했고, 해외에 유학을 가 있던 학생이 참전하기 위하여 서둘러 귀국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예비군 훈련 때 듣는 단골 메뉴다. 이게 모두 유대인-유대교의 차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의식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유대인이 나라를 잃고 세계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게 된 지 2,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차별 의식이 이렇게 강하다면 2,000여 년 전에는 오죽했겠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기, 유대인들의 차별 의식은 굉장했을 것이다. 유대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얕잡아 호칭한 것이 이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원수로 여겼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완전히 다른 두 세력이요 결코 통합되거나 공존할 수 없는 관계였다. 이방은 오로지 점령의 대상일 뿐이다. 이방인을 정죄하고 그들을 지배하고자 했다. ‘시온의 영광’을 그들은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것을 이른바 이방 국가의 시각에서 보면 유대 민족 - 유대교는 타도와 침탈, 점령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관계는 상식이요 통념이 었다. 그 둘 사이의 공존이란 절대 불가였다. 유대인에게 더욱 그러했다. 이것이 당시의 현실이다.

2. 바울의 예수 인식 - 원수를 해소하는 구원자

바울은 예수 운동을 어떻게 이해했나? 예수의 복음의 핵심을 무엇이라고 인식했나? 예수가 죄의 실체로 파악한 것은 무엇이며, 예수가 이루려 한 구원은 무엇인가? 바울은 어떤 이해를 가졌나?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1절 이하에 자기가 이해한 예수에 대해 썼다.

우리는 죄를 대단히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것이 죄가 아닌 것은 아니다. 미움은 죄다. 살인은 죄다. 그러나 미움과 살인은 ‘관계’에서부터 발생된다. 바로 유대인이 다른 민족을 이방인이라고 하고 그들을 무시하며 그들을 경멸하는 거기에서 미움도 살인도 나온다. 유대인의 죄는 이방인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바로 그것이다.

바울은, 예수께서는 바로 유대인의 이 차별성을 깨부수기 위하여 오셨고, 바로 그 일을 하셨다고 믿은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 죄의 현실에 오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몸을 던져 둘 사이를 가르는 담을 헐어내신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신 희생이라고 바울은 인식한다. 십자가는 구체적 사건이다. 원수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원수 된 사람 사이, 원수 관계, 서로를 가로막는 담에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원수의 관계를 소멸하신다. 이것이 예수께서 벌이신 구원 운동이다.

그럼으로써 기어코 둘을 하나가 되게 하신다. 한 몸으로 만드신다. 이제까지 원수가 되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연결되어 한 큰 건물, 몸을 이루게 된다. 바울은,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갈라져 원수로 여겨 오고 있는 현실에서, 아직도 모두가 그런 통념에 붙들려 있는 현실에서, 예수는 그 둘을 하나가 되게 하시는 운동을 하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대립과 갈등의 복판에서 바울은 통합과 일치를 꿈꾸었던 것이다. 원수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뜻이 통하고, 기가 통하고, 생각이 통하고, 살아 움직이는 몸을 꿈꾸었던 것이다. 모두가 예수 안에서 한 큰 유기체가 되는 꿈이다. 참으로 위대한 꿈이다. 이것은 바울의 꿈이 아니다. 예수의 꿈이요, 예수의 비전이다. 바울은 예수가 이루시려 하신 구원이란 바로 이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구원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여기 살아있는 동안 거듭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구원도 기독교의 구원이다. 사후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의 품에 안기게 되는 구원은 기독교의 구원이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구원이다. 큰 구원, 구원의 완성은 모든 대립 관계가 평화의 관계가 되고 갈등이 극복되고 한몸을 이루어내게 되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이 한 큰 유기체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선언이다. 유대교는 자기들에게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했다. 자기들 종교의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은 결코 거기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별하고 가르고 나누는 유대교에 하나님이 계실 리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이 이방인을 끌어안고 하나가 되는 거기에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선언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인식이다. 저 유대교의 극단적인 차별주의의 복판에서 그것을 죄라 한 것은 놀라운 선언이다. 예수는 그 차별주의를 깨시고, 담을 허시고, 원수 관계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에게 한 백성이요 한 자녀라 하는 것은 참으로 혁명적인 선언이다. 그것이 구원이라 했으니 혁명이다. 결국 하나, 한 큰 집을 짓게 되는 비전을 보았으니 참으로 참으로 위대하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태초의 회복을, 구원의 완성을 거기서 보았으니 참으로 위대하다. 아, 바울은 위대하다! 그가 이방 선교에 나선 것은 단순히 전도열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업에 정진하는 것이었다.

3. 오늘의 선민, 오늘의 이방인

여기서, 우리에게 있어서 죄의 상태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자. 지금 예수께서 일으키시고 계시는 운동은 무엇이며, 그가 이루어 가시고 계시는 구원은 무엇인가? 오늘날 갈등과 대립은 어디에 있는가? 절대로 너를 용납할 수 없다 하는 사건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우리가 유대인이라면 누구를 이방인으로 삼고 있는가? 무엇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가? 무엇과 무엇 사이에 담을 높였는가? 원수의 관계는 무엇인가?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이런 관계가 있을 수 있다. 사실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럴 것까지는 없을 것인데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랜 원수처럼 지낸다. 그리고 그런 관계가 집단화하면 파가 생기게 된다. 많은 경우, 특별한 차이도 없이 파를 만들어 갈등의 골을 깊게 한다. 이런 것은 교회 내에도 있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도 이런 관계다. 최근 여성들이 깨기 시작했다. 옛날 여성들 같지 않다. 남성은 결코 지금까지의 지배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갈등이 생긴다. 남성에게 있어서 여성은 이방인이다.

눈을 돌려 우리 사회를 보자. 지금 우리는 자본과 노동의 커다란 충돌을 경험하고 있다. 아니, 자본과 노동의 충돌이 아니다. 권력과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이다. 한국통신 노사문제에 권력이 개입하여 노동자를 구속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와 사, 혹은 노와 권력은 하나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해 왔다. 노에게는 사가, 혹은 권력이 이방인인 셈이다. 사와 권력에게는 노가 이방인인 셈이다.

우리나라 안에서의 빈부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1994년 12월 27일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은 빈부 문제가 나쁜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60%,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30.6%다.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3.8%에 불과하다. 계층 갈등, 계급 갈등이 발생하게 되어 있다. 서로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원수 관계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죄의 현실이다.

남북 관계도 그렇다. 분단 50년이 되었다. 지금쯤은 새로운 국면을 만들 때가 된 것이다. 세계가 너무 변했지 않은가? 그런데도 남과 북은 서로를 이방 국가-이방 민족으로 대한다. 8ㆍ15 50주년을 민족이 함께 기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지에서 ‘8ㆍ15 50주년 민족 공동 행사 남측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물론 북에도 비슷한 조직이 생겼다. 그렇지만 7천만 겨레의 공동 행사는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하도 답답하여 통일 부총리를 좀 만나자 했다. 지난 6월 3일에 만났다. 나는 호소했다. 이게 무슨 부끄러운 일이냐고, 분단 50년이 되는 해에 이르러서까지도 남북이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마는 것 아니냐고. 판문점에서 공동 행사를 할 수 없다면 북의 행사에 우리가 가고, 남의 행사에 북의 대표가 참석하는 형식으로라도 우리의 담을 헐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부총리는 많은 것을 수용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남북 당국자 간의 대화가 성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도무지 될 것 같지가 않다. 원수 관계다. 도대체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죄의 현실이다.

제1세계와 제3세계의 대립은 이미 화해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시키고 있다. 한 쪽은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이다. 다른 쪽은 굶어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세계는 이 갈등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세계무역기구(WTO) 시대란 바로 그것이다. 약소국은 상대적으로 더 가난하게 되기 마련이다. 강대국은 더 부해지게 되어 있다. 결코 정의에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반정의, 부정의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담이 높아 간다. 서로 이방인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죄의 현실이다.

인간과 자연이 그렇다. 인간 문명의 발달이란 자연침탈사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인간은 침탈해 왔다. 지금도 침탈하고 있다. 불을 발견한 인간은 자연이 주는 나무로 땔감을 삼았다. 그러나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부터 자연으로부터 빼앗기 시작했다. 땅속을 헤집고 들어가 석탄을 캔다. 그것이 바닥이 난다. 더 깊이 들어가 기름을 뽑아 올린다. 기름도 바닥이 나기 시작한다. 이제는 핵 연료를 사용한다. 여기가 인간의 딜레마다. 결국 그 결과로 인간은 파멸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땅이 인간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원수가 되었다. 죄의 현실이다.

이것은 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결과 바로 그것이다. 죄를 범하기 전,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들과 자연은 한 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각각의 것,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창조를 끝내신 다음을 창세기 기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창 1:31).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다. “모든 것”, 전체로 보시니 “좋았다”는 것 아닌가. “모든 것”, 전체다. 전체는 하나의 유기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의 유기체가 쪼개진 것이다. 한몸이 나누어진 것이다. “모든 것”이 각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립한다. 하와와 아담이 대립한다. 아담과 땅이 대립한다. 땅이 아담 때문에 저주를 받는다. 한 몸이 깨진 것이다. 하나의 유기체가 쪼개진 것이다. “모든 것”이 아니다. 아담은 아담이고, 하와는 하와다. 땅은 땅이고, 자연은 자연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죄의 현실이다. 이런 갈등을 그대로 지속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죄다. 이것을 죄라 하지 않는다면 예수와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다. 예수는 여기 분열과 갈등과 대립 사이에 개입해 오시기 때문이다.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이다. 거기서 피를 흘리시기 때문이다. 거기 쌓아 놓은 담을 허시기 때문이다. 원수 관계를 무너뜨리시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를 우리가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그의 피로 속죄함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이다.

4. 우주적 구원과 희년 신앙

우리가 지난 몇 년 전부터 ‘정의ㆍ사랑ㆍ평화ㆍ 창조세계의 보전’(JㆍLㆍPㆍIC)이라는 생소한 과제에 대해서 많은 강연을 들어 왔다. 금년 여름성경학교의 주제는 “사랑으로 이루는 희년”이다. 무엇하자는 것인가? 우리는 그동안 대립하는 것을 ‘선’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힘이 있는 쪽이 힘이 없는 쪽에 대립해 왔다. 남과 북이 그래 왔다. 인간이 자연을 그렇게 했다. 세계도 대립과 갈등으로 나아가고 있다. 21세기가 더욱 그렇다. 21세기의 생존 수단은 ‘경쟁’이다. ‘무한 경쟁’ 시대에 들어섰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것은 약육강식의 다른 말이다. 패권주의의 다른 표현이다. 죄인 것이다. 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죄의 현실에서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는 것이다. ‘대립’이 ‘선’이 아니요 ‘화해’가 ‘선’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엡 2:14)라고 고백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자. 우리의 기대는 거기 머물 수 없다. 이 죄의 복판에서 한 큰 몸들, 한 큰 살아 있는 유기체가, 피가 통하고 신경이 연결되는 유기체를 꿈꾸고 그것을 지향하자는 것이다. 어린이부는 그 씨를 뿌리는 것이다. 중고생에게는 꿈을 잉태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우주적 구원을 보게 하고 거기에 동참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희년 신앙’이다.

우리 교회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은 이것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자 함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자 함이다. 우리가 이 시대 여기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 우주적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자 함이다.

우리 주변을 깊이 있게 통찰해 보자. 갈등과 대립의 관계를 찾아보자. 내 주변, 나와 관련하여 발생한 갈등, 대립을 찾아보자. 거기에 주님께서 오신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자.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대로 따르자. 특히 1995년, 해방 50주년, 분단 50주년에 남과 북의 높은 담 위에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의 저 높은 뜻을 수용하자. 죄에 찌든 우리 자신을 회개하자.

이방인과 북을 받아들이자. 하나가 되자. 유기체가 되자.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도 그렇게 하자. 이것이 회개다.

아니,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자. 교회를 교회 되게 하자. 성숙한 신앙인이 되자. 멋지고 크고 옹골진 비전, 우주적 구원을 보아내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자.

[마태복음 13:31-33] 확장과 변혁 – 1995년 3월 3일, 김상근 목사

9월 15, 2026

확장과 변혁

마태복음 13장 31-33절 / 한국신학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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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설교 전문]

작년 가을 학기에 이 자리에 섰을 때, 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특히 그를 좇아 ‘성직의 길을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베푸셨던 최후의 만찬의 메시지가 바로 그 내용이었다. 그리고 소설 『동의보감』의 유의태와 허준과의 관계를 예수와 교회, 혹은 우리들과의 관계의 유비(類比)로 삼아 말씀드렸다.

오늘 설교는 그 설교의 연장이다. 우리는 주님을 몽땅 통째로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오늘의 삶의 현실 가운데 존재해야 한다. 교인들에 대해서 예수의 본체는 아니나 예수와 똑같아야 한다. 역사에 대해서도 감히 예수의 본체는 아니나 예수로서 현존해야 한다. 이런 전제 아래 같은 시대에 같은 교단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의 현존적 위상을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 교회와 한국 역사 속에서의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위상이 무엇이며 교회사적인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한다. 물론 무슨 교파주의 따위를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젊은 후배들과 비교적 폭넓은 교분을 가지려 노력하고 있고 또 그렇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젊을수록 신앙고백이 개방적이고 진보적이며 개혁적이다. 특히 신학대학 졸업 후 민중 교회나 농어촌 교회로 진출하는 후배들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존경하기도 하고 또 사랑한다. 결코 쉽게 선택할 수 없는 목회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의 더 본래적인 모습이 거기 있고 그것이 예수의 분부를 바르게 따르는 길이라는 고백으로 어려운 길을 택해 나섰다. 비록 주관적인 고백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실제로 그들이 그 길을 감으로써 한국 교회에 신선한 충격이 있게 되었고, 또 1970-80년대 한국 역사에 한국교회의 긍정적 참여가 이만큼이라도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길게는 20년을 그리고 대부분 10년 안팎의 세월 동안 그들은 이 길을 꾸준하게 걸어왔다.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교회적인 차원에서도 인간적인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나는 간파하고 있다. 아이들이 자란다. 그들의 눈도 어김없이 경쟁 시대의 눈이 된다. 자기 부모가 다른 아이들의 부모만 못하고, 자기들의 꼴도 다른 아이들의 꼴에 비해 초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유를 묻는 아이들에게 설명할 말을 좀처럼 찾지 못하여 당황하게 되는 경험을 갖는다.

교회당은 대부분 전세다. 높아지는 전셋돈 정도는 척척 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목사가 세차를 하고 호떡 장사를 하여 제 생활비나 교회 유지비를 마련하는 경우도 있다. 10년을 목회하여 교인이 겨우 10명을 넘어섰을 뿐이다. 여기에 어떻게 인간적 갈등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에게 이런 것은 사실 아무 문제가 아니다. 목사가 세차를 하면 어떻고 호떡 장사를 하면 어떠냐고 이를 악물 수 있다. 바울도 그랬지 않느냐고 자위할 수 있다. 그렇다. 이미 교인인 사람들을 모은 것이 아니니 10여 명도 대견하고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니 목사가 운영비를 마련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자신의 내면에 대고 외쳐왔을 것이다.

그러나 부딪혀 오는 비교의 잣대를 도무지 이겨내기 어렵다. 그래도 학교 다닐 때 내로라 하던 자기들이 이렇게 초라하게 비쳐지는 것을 견디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헌신으로 한국 교회가 갱신되어 나간다는 증거도 없다. 세계가 바뀔 것이라는 확증도 없다. 이런 열악한 환경이라면 민중에게로 가는 교회 운동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막을 내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갖는 교회 차원의 갈등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 세계의 큰 교회 중에 한국의 교회들이 20여 개나 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커지기 위해서는 온갖 수단을 모두 동원한다. 성령 운동을 해보기도 하고, 무슨 찬양 집회를 해보기도 한다. 영성을 개발한다 하지만 교회에 많이 나오게 하는, 그래서 큰 교회가 되고자 하는 것이 진짜 의도다.

기장 교단은 이제 40년의 새 역사를 살아왔다. 100여 년 전 한국의 처음 교회가 일구어 놓았던 ‘민중민족사적 해방 전통’은 1920년 이후 40여 년 동안이나 실종되고, 한국 교회는 세상의 소금도 아니요 빛도 아닌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I960년대 중반부터 한국 교회는 다시 소금의 역사, 빛의 역사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I960년대 이후 이 나라 민중민족사의 과제인 인권, 정의, 민주, 자유, 통일은 곧 한국 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된다. 민중민족사적 해방 전통에 한국 교회가 다시 서게 된 것이다. 이 일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중심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기장의 참여를 말할 때 여기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장공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여러분은 지금 민중민족사적 해방 전통의 진원지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장은 저 민중 교회 목회자들이 갖는 갈등과 비슷한 갈등을 갖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적 잣대로 스스로를 잰다. 다른 교단과 비교한다. 그리고 스스로 위축감을 갖는다. 성공하지 못했다고 자탄한다. 교인이 적고 돈이 없다, 다른 교단은 여기저기 대교회당을 건축하는데 우리는 고작 이만한 교회당밖에 갖고 있지 못하다, 다른 교단은 해외에 수백명의 선교사를 보내는데 우리는 1-20명에 불과하다는 자괴 섞인 탄식 소리가 들려온다.

예수의 제자들도 그랬던 것이리라. 스승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성취되는 것인가? 도무지 그것이 오는 것 같지 않고 올 것 같지도 않다. 제자들의 회의요 갈등이 여기에 있었다.

예수는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라고 가르치신다. 이어서 그는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라고 말씀하신다. 겨자씨는 ‘확장’의 상징 언어이며 누룩은 ‘변혁’의 상징 언어라고 생각한다. 하늘 나라 운동의 특성은 확장이라는 측면도, 변혁이라는 성격도 모두 갖는다는 말씀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겨자씨와 누룩이 각각의 성격을 분명하게 갖고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확장은 하늘 나라와 무관하다거나 반대로 변혁으로 하늘 나라 운동이 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교단마다 성격이 있기 마련이다. 기장의 맛은 변혁이다. 누룩이다. 겨자씨의 특성을 완전히 아니 갖는 것은 아니다. 두 특성을 모두 갖되 개혁성, 변혁의 힘을 더 가질 때 그것이 기장이리라. 겨자씨를 지향하는 교회도 있어야 하고 누룩을 지향하는 교회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장은 전체로 보아 변혁의 자리에, 변혁의 맛으로 있어야 한다. 이것을 존경하고 이에 합의하는 분위기가 기장의 분위기이어야 한다.

그럴 때야만 자본주의적 잣대에 시달리는 우리의 동역자들이 온갖 자본주의적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제 길을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럴 때야만 기장이 건강하게 되고 기장이 건강할 때야 한국 교회가 건강할 수 있다. 그래야 한국이 변혁으로 가게 되고 하늘 나라의 기적이 여기에 일어날 수 있게 된다.

모두가 변혁군에 서게 되는 이변은 없다. 그러나 모두가 확장군에 서려는 현상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분명히 교회의 위기다. 기장은 한국 교회의 누룩을 자임해야 한다. 그것이 기장을 구태여 또 하나의 교단으로 따로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믿는다.

1995년 회상노트(3월 3일, 6월 20일, 7월 5일, 12월 10일)

9월 15, 2026

1995년 회상노트


  • 1995년 3월 3일 / 한국신학대학 – “확장과 변혁”
  • 1995년 6월 20일 /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 강사 교육 – “우주적 구원과 희년 신앙”
  • 1995년 7월 5일 / 기장 희년대회 – “통일 희년”
  • 1995년 12월 10일 / 대치교회 – “까치밥이 있는 사회”













1995년은 해방 50주년의 해요 동시에 분단 50년이 된 해였다. 한국 교회는 1988년에 1995년을 ‘희년’(禮年)으로 선포했었다. 드디어 그해에 섰다.

사실 남ㆍ북의 총리가 1991년 12월 13일에 “남ㆍ북 기본합의서”를 작성하고 서명함으로써 정치적 희년은 이미 선포된 것이었다. 그때 벌써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자는 획기적 약속을 했었기 때문에 그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도무지 희년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내게도 어려운 일임이 사실이다. 나는 6ㆍ25 한국전쟁 때 북에 의해 아버지를 잃었다. 그들이 총살로 나의 아버지를 앗아갔다. 그로 인한 가난과 피폐는 나에게 북에 대한 증오로 커 갔다. 한으로 쌓여 갔다. 보복의식이란 것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많은 것을 생각했다. 6ㆍ25 전쟁의 진실, 남북의 대결과 동족상잔의 어리석음, 세계의 탈냉전화와 우리의 여전한 이념 갈등의 폐해 등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엄청난 증오와 한을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가 나를 압박했다. 이성적으로 많이 극복했다. 그러나 정서는 여간하여 극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나! 극복할 수 있게 해주시라고 기도했다. 미래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기도했다.

나는 이 시기 김국홍, 함세환 씨 등 출옥한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 운동에도 앞장서고 있었다. 김선명 씨는 세계 최장기수였다. 그의 석방 운동은 내 속의 갈등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결국 석방되었으나, 그를 포함한 송환 운동 대상자 모두는 지금도 여기 남쪽에 머물고 있다. 그들 또한 자신의 사상에 철저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경영하는 탕제원을 도왔다.

민족의 내일을 생각했다. 깊이! 생각했다. 나를 극복해 가고 있었다.

[레위기 25:9-13, 35-41; 이사야 61:1-2] 통일 희년 – 1995년 7월 5일, 김상근 목사

통일 희년 레위기 25장 9-13, 35-41절; 이사야 61장 1-2절 /기장 희년대회 [회상 노트] ☞ 바로가기 [슬라이드] [설교 전문] 희년의 전거구는 레위기 25장과 누가복음 4장 18-19절이다. 이사야서 61장 1-2절도 희년 선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