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북간도로: 새로운 모색을 꿈꾸다
김재준(1901-1987)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1933년부터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유로 부임하였다. 당시 평양에는 송창근 목사가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로 시무하면서 김재준이 평양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시기에 김재준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기관지인 『신학지남』의 편집 실무를 담당하면서 글을 기고하였다. 그러나 그의 글에 대해서 보수 정통주의를 표방한 박형룡 등이 문제를 삼기 시작하였고, 결국 『신학지남』에 글을 더 이상 기고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학교에는 점차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가 강화되기 시작하였는데, 김재준은 개인적인 신앙으로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적 요소를 가진다고 생각하여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사직하였다(1936년).
숭인상업학교를 그만두고 몇 달이 지나자, 숭실전문학교 교장 마우리 박사가 김재준을 찾아왔다. 김재준을 추천하기 위해서였다. 김재준은 바로 북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교유, 즉 교목 겸 성경교사로 부임했다. 은진중학교는 캐나다 선교부에서 지원하고 있었다. 김재준은 이 나라 이 민족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새 세계, 새 인류의 지도자가 될 창조적 소수를 길러내는 학원’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뚜렷했다. 김재준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은진중학교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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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5월호 『십자군』 제1권 제1호 |
북간도에서 잡지 『십자군』을 발행하다
김재준은 북간도 은진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잡지 『십자군』을 발행하였다. 『십자군』 발행에 대해서 『장공 김재준의 삶과 신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김재준이 용정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용정에서는 신사참배가 강요되지 않았다. 김재준은 자신이 평양에서 쓴 『순교자 열전』을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일본 영사관을 찾아갔다. 그러나 담당직원은 원고를 읽어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두고 가라고 했다. 한 달쯤 지나서 다시 김재준은 영사관을 찾아갔다. “너무 잔인한 기록이어서 민심을 자극할 것 같고 신사참배 거부소동이 야기될 우려도 있으니 출판은 중지하는 게 좋겠소.”라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원고라도 돌려 달라는 김재준의 요청에 “원고도 압수하기로 결재났소!”라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에 김재준은 정기간행물로 잡지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정기간행물은 검열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십자군(十字軍)》 첫 호를 냈다.
《십자군》은 만주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던 김재준이 이태준의 협조를 얻어 창간한 월간지이다. 창간호부터 2호까지는 총 12면의 얇은 팜플릿에 불과했지만 제3호부터는 국판 40면으로 확장시킬 만큼 독자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재준은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가 아닌 사회의 각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이 활동하기를 원했다.
... 1937년 5월 창간되었지만 일제의 규제로 인해 1년도 채 못 된 1938년 2월에 폐간되었다. 그 후 1950년 속간되고 1957년까지 간행되었다. 이 잡지를 통해 김재준은 한국의 몰역사적 보수 정통주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주체적 역사 참여 신학을 강조했다.
【참고】 장공김재준목사기념사업회, 『長空 김재준의 삶과 신학』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14), 82-83.
잡지 『십자군』의 의미에 대하여
잡지 『십자군』은 1930년대 김재준이 발행한 개인잡지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1930년대 상황을 한 목회자(교사)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내용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1) 김재준과 성경 번역
한 목회자의 글이지만 『십자군』에 실린 글에는 상당히 중요한 글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우선 김재준은 『십자군』을 통해서 구약성경 창세기 1장부터 4장까지 사역해서 소개하고 있다. 당시에 개역성경 번역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기간에 히브리어 실력은 누구보다 뒤지지 않았던 김재준이었지만 번역위원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재준은 『십자군』을 통해서 성경 창세기를 사역한 것이며, 특별히 김재준의 사역은 당시 개역성경에 비해 여러모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고】 이환진, “「十字軍」(1937-1938)에 실린 김재준 목사의 창세기(1-4장) 번역의 특징,” 「성경원문연구」 제32호 (대한성서공회, 2013): 7-29.
2) 김재준과 교회연합 운동
그리고 십자군에는 특별히 ‘교회연합’(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김재준의 입장이 다수의 글에 소개되어 있다. 1930년대 교회연합운동은 위기의 시기였다. 장로교의 불참으로 결국 교회연합이 와해되었고, 그러한 틈을 이용해서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것이다. 만약 당시에 장로교가 불참하지 않고 연합운동이 활발했다면 일제가 그렇게 쉽게 연합공의회를 강제로 해산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재준은 당시에 장로교 목사이지만 교회연합에 대해서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었는데, 1930년대 교단의 지도층 인사가 교회연합에 대해서 강조한 사례는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변방(북간도)의 한 목회자가 교회연합에 대해 강조한 사례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있는 자료라 생각된다. 아울러 이러한 김재준의 교회연합에 대한 생각은 이후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출범 이후에 적극적으로 교회연합에 참여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3) 김재준의 청빈 사상과 어거스틴
김재준이 성 프란체스코의 삶을 자신의 청빈의 모델로 삼았다는 것은 기장의 목회자라면 당연히 아는 상식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십자군』에서 김재준은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번역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김재준 자신이 어거스틴의 글을 ‘경건 문학’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김재준의 청빈은 후에 한신대학교의 ‘학문과 경건’에서의 ‘경건’의 바탕이 되는데, 여기에 어거스틴의 참회록이 그의 경건의 하나의 뿌리로 인식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김재준이 번역한 참회록에서 화자인 어거스틴은 끊임없이 절대자인 신(하나님)을 찾고 갈망하고 있다. 김재준은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고대 기독교 교부 중에서 어거스틴에게서 그 모델을 발견한 것이라고 본다.
4) 한국교회사의 의미있는 초기 사료
그 밖에도 십자군의 다양한 글들은 한국교회사의 초기 사료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쉬운 것은 현존하는 『장공전집』에는 십자군의 글이 다수 누락되어 있으며, 현대인들이 보기에 어려운 한자어, 그리고 해독이 불가능한 단어와 문구가 있어서 보다 집중적인 관찰과 검토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