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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제1권](각주해설판) - 목차

2월 24, 2026
[범용기 제1권](각주해설판) - 목차

〖 범용기 제1권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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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목사의 자서전 『범용기』(각주해설판)을 발행하며

첫머리


어릴 때 추억


경원 함양동 3년


회령에서 3년

 

웅기서 서울로

 

서울 3년

 

서울에서 고향에 돌아와

 

소학교 교사 3년

 

동경 3년

 

미국 3년

 

돌아와 보니

 

평양 3년

 

간도 3년

 

조선신학원 발족

 

편집후기


부록 :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및 휘호

[범용기 제1권] (115) 편집후기

2월 24, 2026
[범용기 제1권] (115) 편집후기

편집후기

위의 글은 『뉴코리아 타임즈지』에 연재해 온 것을 단행본으로 묶은 것입니다. 필자 자신이 한글 철자법에 정확하지 못하고 신문사에서도 일일이 고쳐 쓸 시간과 부서가 없었기 때문에 철자가 시원치 못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다음 책은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발간될 때까지 여러 가지로 수고하신 뉴ㆍ코리아 타임즈사 여러분과 읽어봐 주신 이상철 목사와 인쇄와 제본에 특별한 호의를 보여주신 칠성인쇄소 이인용 사장에게 감사들 드립니다. 모든 동지와 친구들의 건승을 빕니다.

[범용기 제1권] (114) 조선신학원 발족 - 식구들 서울에

2월 24, 2026
[범용기 제1권] (114) 조선신학원 발족 - 식구들 서울에

식구들 서울에

우리 식구래야 아내와 딸 셋, 아들 둘이다. 애들 이름은 아버님께서 옛날 지은 작명법을 따라 글자 획수를 헤면서 오행(五行)에 맞춰 지은 것이다.

맏딸은 선계(仙桂)라 했고 둘째 딸은 단계(丹桂)라 했다. 맏아들 은용(恩鏞)만은 내가 간도 가는 길에 “창꼴집”에서 났는데 그애 이름은 나더러 지으라 해서 나는 “은혜”로 주신 애기라는 뜻과 “은진”(恩眞)가는 길에 큰 집에서 났다는 뜻도 품겨서 “은용”이라고 했다. “선계”와 “단계”는 기생 이름 같아서 후에 내가 고쳤다. 맏딸은 “정자”(正子)라 하고 둘째 딸은 “신자”(信子)라 했다. 맏딸에는 정의감이 강하고 어느 정도 남성적인데다가 기(氣)가 승(勝)해서 남에게 지기를 무던히 싫어했기 때문에 바를 정(正)자를 붙였고, 둘째 딸은 좀 얌전하고 진실해 보이기 때문에 믿을 신(信)자로 부른 것이었다.

그때는 일제말기라 일본식으로 여자에게 아들 자(子)짜를 쓰는 사람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 풍속에서도 여자애에게 아들자짜 이름을 붙이면 다음에는 아들이 난다는 얘기도 있어서 두루두루 그리된 것이었다. 해방 후에 본인들이 일본식이 싫다고 “子”자를 “慈”자로 고쳐 쓰고 있다.

“혜원”은 내가 미국에서 돌아와 얻은 첫 아이니만큼 이름도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 본 것이었다.

사실 정자와 신자는 애기 시절에 “아버지” 사랑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자랐을 것이다.

“정자”는 내가 신아산 소학교 교사로 있을 때 잉태되어 만삭된 달에 나는 일본 유학을 떠났고 아내는 큰집에 돌아가자 곧 첫아이가 난 것이다. 내가 청산신학교 졸업반 때 하기방학에 귀국에서 처음 내 첫 애기를 면대했다. 그것이 정자가 4살 때였을 것이다. 그것도 잠깐이고 곧 순회전도니 뭐니 하고 돌아다녔고, 잠깐 후에는 귀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자는 내가 미국가기 바로 전에 여비 등 문제 등등으로 “창꼴집”에 들렀을 때 임신되었는데 미국 유학 4년을 마치고 귀국해서 처음 보았으니 아마 신자가 다섯 살 때였을 것이다.

귀국해서 내가 평양에 직장을 갖게 되자 온 식구가 처음으로 한데 모여 Home라고 갖게 된 것은 위에서 언급한대로다.

용정에서도 식구들이 모여 살았다. 제 집 갖고 살았다는 것이 발전일지 모르겠다. 내가 서울 가면서 가족들은 또 “창골집”의 “대가족” 보자기 속에 품겼다가 추후해서 서울에 모인 것이다.

그러고보니, 우리 식구들 중에서, 나서 네 살까지 자라면서 아버지 그림자도 못 본 딸은 “신자”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애는 “아버지”가 그리웠을 것이고 아버지 사랑을 동경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외톨이 학생 기분이었고 다섯 가족의 “아버지”란 의식은 뿌리박혀 있지 않았다. 그러니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한 셈이다. 했을 리가 없다.

부모를 떠나 남편과 연합하여 한 몸 되는 결혼이나 잘되어 축복받기를 기원했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녀들 결혼에 간섭하지 않았다. 여섯 자녀가 예외없이 자유 결혼이다. 자기들끼리서 결정해 놓고서야 아버지께 “문의”한다. 아버지는 “사돈될 분이 좋게 여기느냐? 너희가 서로 사랑하느냐?” 등등의 몇 가지를 묻고서는 “좋다”, “축복한다”로 끝낸다.

아버지는 그런 점에서 너무 비정서적이랄까. 신자가 어린 시절에 남달리 그리워한 사랑이 결혼 후에도 심층 어느 한구석에 응결돼 있지나 않을까 싶어 아버지는 미안한 것 뿐, 이제 와서 속량할 길은 막연하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교회나 사회나 국가에는 어느 정도 발언할 권리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가정과 가족들, 자녀들에게는 나 자신으로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그만큼 부모를 위해주고 자기들 생활에도 큰 재난을 탈선 없이 사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은혜라고 감사한다.

막내아들 관용은 이정희(李貞姬)와 역시 자유 결혼하여 지금 수유리에서 산다. 아버지가 1939년부터 줄곧 독재반대에 나섰고 해외에 나와서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막내는 일종의 인질(人質)로 거기를 뜨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에게도 미안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엉뚱한 대망이 없다. 교회 생활에 충실하고 직장에서 한 점 부정도 없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시련이 닥치지 않는다. 한양대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지금 그 학교 자재과장으로 있다.

늙은 아내는 “그 애까지 여기 왔으면 얼마나 좋겠소!” 하며 입버릇처럼 뇐다.[1]

작은 교직자요, 동지요, 나의 상담자인 이상철 박사는 내 사위로서 아들 직책도 분담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나는 자녀에게 물질적으로 남겨줄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자녀들 효양[2]은 남 못잖게 받고 있는 셈이다. 구태여 말한다면 그리스도가 내 유산이랄까? 예수도, 성프랜시스도, 로욜라도, 내게 세례 베푸신 김영구 목사님도 그러했으니 내가 외로울 것은 없겠다.



[각주]
1. 뇌다 – 지나간 일이나 한 번 한 말을 여러 번 거듭 말하다. ↩
2. 효양(孝養) - 어버이를 효성으로 봉양함 ↩

[범용기 제1권] (113) 조선신학원 발족 - 전롱정 『우리집』

2월 24, 2026
[범용기 제1권] (113) 조선신학원 발족 - 전롱정 『우리집』

전롱정 『우리집』

나는 그 동안에 현신규[1] 씨 부인 주선으로 서울 청량리 밖 전롱정에 주택공사에서 새로 지은 한옥을 한 채 계약했다. 부엌, 안방, 마루방, 건넌방 등 격식은 갖춰 있었지만 협책하기[2] 그지없는 소옥이다. 그래도 셋방보단 나으리라 생각됐다. 살림도구며 땔 것까지도 다 준비해 놓았다. 부엌문 바로 옆에 백척 깊이 우물도 팠다. 물맛이 약수 같다. 부토(附土) 모퉁이 집이어서 앞은 인조벼랑이다. 청량리 임업시험소 기사로 있는 현신규 씨네가 그 동리 같은 주택회사 가옥에 들어 있어서 집안 같은 이웃이 되었다. 우리 집 길 건너 모새기에 송 씨 집이 있었다. 따님 『정옥』(貞玉) 아가씨가 여의전 재학 중이었다.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한국역사를 가르쳤다는 혐의로 서대문 감옥에서 여섯 달 살고 오기도 한 아가씨이다.



[각주]
1. 현신규(玄信圭, 1911-1986) - 해방 이후 농촌진흥청장,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한 학자, 산림학자. ↩
2. ‘협착하기’의 오기인 듯 ↩

[범용기 제1권] (112) 조선신학원 발족 - 미군 진주

2월 24, 2026
[범용기 제1권] (112) 조선신학원 발족 - 미군 진주

미군 진주

미군 진주

결국 미군이 진주했다.

정치인들 사회에서나 해방되자마자 여운형 중심의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이니, 송진우 중심의 한민당이니 하는 정당들이 속출했고 총독부에서는 정권을 합법적으로 이양하려고 송진우 등에게 교섭했지만 그들은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면 일본총독부정치를 합법화한 것이 되고 자신들도 일제의 후신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미군정 수립

1945년 9월 2일에 미 극동사령관은 조선 분할 점령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9월 8일에 미군이 인천에 상륙, 11일에 군정실시를 성명했다. 『하지』 중장이 『총독』 자리에 앉고 아놀드 소장이 『정무총감』이 되고 그 밑에 민정장관으로 안재홍 씨가 임명되었다.

국민은 아직도 38선이 무언지도 몰랐다. 그런데 9월 2일에 벌써 미 극동군사령관은 조선 분할 점령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래도 미군정은 잠정적일 것이고 남북이 통일된 독립국가로서의 한국은 곧 출현될 것이라고 국민은 믿고 있었다.

12월 28일에 모스크바에서 소위 삼국외상회의가 열렸다. 거기서 조선신탁통치안이 나왔다고 모두들 흥분했다. 독립국인데 신탁통치가 다 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년, 학생, 시민 모두 『반탁』 운동에 나섰다. 좌익사람들도 가담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는 그들이 『신탁찬성』 데모를 한다. 제 정신이 아니라, 지령에 움직이는 꼭두각씨였다고 모두 실망했다.

그 당시 송진우 씨의 훈정5년설이 유포되어 거기에도 상당히들 반발했었다.

국민들이 너무나 거센 반발을 고려해서였던지 신탁통치설은 유야무야로 되고 그 대신에 조선독립에 관한 미ㆍ소 공동위원회가 성립됐다. 거기에는 김규식[1] 박사, 이윤영[2] 씨, 기독청년 대표로 강원룡도 참가했다. 결국 미, 소간의 합의는 기대할 수 없게 되어 해산하고 말았다.

임정요인 입국

이승만 박사는 벌써부터 입국해 있었고 상해 임정요인들도 추후에 모두 입국했다. 그러나 『임정』으로가 아니고 개인자격으로 허입된 것이다. 『미군정』이 정식 정부니만큼 다른 『정부』가 또 인정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임정요인들을 환영하는 모임이 감리교 정동예배당에서 열렸다. 김구, 이승만, 김규식, 3거두를 비롯하여 조소앙, 최동오, 엄항섭 등등 기라성(綺羅星)이 단상에 앉았다. 한마디씩의 인사 이야기가 모두 능숙했다. 모두가 막역한 동지 같았다.

김구 선생은 기독교회가 나라의 혼이 되면 경찰이 쓸데없을 테니 교회는 늘고 파출소는 주는 나라가 되야 한다고 했다. 청년학생들이 모두 열광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정객』들이고 해방 한국의 정치현실을 요리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대망(大望)이 몸에 밴 분들이니만큼 그때에도 『동상이몽』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승만 박사는 어떤 부자의 별장인 『돈암장』에 유숙하며 정략을 다듬고 있었다. 강원룡, 조향록, 이명하 등도 처음에는 부지런히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들은 김규식 박사에게로 갔다. 이 박사는 『너희는 내 하라는 대로만 해』 하는 독재벽이 너무 일관돼 있었다는 것이다.

미군정과 좌익계열

하지 중장은 군정초기에 공산당도 합법적인 정당의 하나로 인정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정당 중의 하나로 군정 아래서 얌전하게 협조하기에는 너무 『혁명적』이었다. 그리고 그 혁명은 『폭력혁명』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기존질서 존중을 기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장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선동하여 1946년 9월 28일부터 11월 중순까지 남한의 산업기능을 마비시켰고 참가인원이 3백만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 가서 유세에 분주했다. 하지 중장의 공산당 합법화는 처음부터 반대였다고 한다. 어쨌든 자유분위기였기에, 학생, 청년, 시민, 정객들의 활동은 활발했다. 특히 언론기관은 『자유과잉』이랄까, 『신문』이란 이름의 간행물이 수십 종 나왔다. 어제는 우익이다가 내일은 좌익 – 그리고 『비판』이 아니라 야비한 『욕지거리』가 활자화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보아, 어디서나 『좌』와 『우』 둘로 갈라지는 것이었다.

해방되자마자 미국교단본부와 W.C.C. 관계기관에서 그동안에 출판된 중요한 서적들을 골라 몇 궤짝 보내왔다. 거기에 토인비의 『역사 연구』도 들어 있었다. 『한신』에도 보내왔기에 나는 탐독했다. 교회와 세상과 역사의 현실과 미래가 차침[3]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서울대학을 위시하여 좌익학생들이 어느 정도 우세했었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유물사관을 읽고 이론 정연하게 다른 학생들을 설득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익에는 그런 조직적인 학문의 준비가 없었고 다만 기독학생들이 종교적인 신념을 이야기하는 것뿐이었다. 사실, 조선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정통신학으로 다졌기에 타계주의적인 부흥집회가 대표작이고 이론적인 역사 관심을 거의 없었다. 기독학생들은 이 점에서 좌익 학생들과 맞설 수 있는 역사관과 역사의식이 필요했다.

기독학생들은 학술강연회를 열고 강사를 초청하여 그들의 갈급을 축이려 했다.

제1회 학술강연에서 그들은 내게 토인비 역사관을 소개해 달라고 청했다. 내가 그 방대한 저서를 다 읽었을 리는 물론 없다. 그러나 마침 시카고 대학에서 이미 간추려놓은 요령을 더듬어 세 시간 강의했다. 강연 장소는 경동교회 별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대학생들이 창밖에까지 빼꼭[4] 서 있었다. 한국 역사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나는 믿게 됐다.

학생들은 『이제 우리도 할 말이 있다』하는 자신을 갖고 헤어졌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얼마든지 맞설 수 있다는 태세를 갖춘 것이었다.

그때 연대 총장으로 있던 백낙준 박사는 선생들 앞에서 『그 책이 우리 도서관에도 한질 와 있는데 소위 역사를 전공한다는 너희는 무엇하고 있었느냐』고 꾸지람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군정청에서는 일제 때의 여러 관립 단과 전문학교들을 통합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으로 부르게 했다. 그리고 미국인 무어란 사람을 총장으로 임명하여 그 통합절차를 맡겼다. 그는 각가지 반대와 비난을 무릅쓰고 이를 강행 실현했다. 기독학생들은 통합된 기념이라면서 서울대기독학생 주최로 내게 특별강연을 청해왔다. 장소가 어디였던가 시민회관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기억이 분명치 않다. 학생들도 빼꼭 차 있었다. 서울대 총장이란 분이 개회인사와 아울러 통합의 취지를 말하고 내 강연은 시작됐다. 연제[5]도 잘 기억되지 않지만, 내용인즉 『새로운 각도에서 하나님을 찾는다. ……』는 것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강연은 대성황이었다. 하나님은 전 우주를 통합한다는 뜻이 포함된 기독교적 유신론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미국의 움직임과 국내운동

미국은 1947년 10월 18일, 조선 문제를 정식으로 국제연합에 제소했다. 『국련』 감시하의 남북총선거에 의하여 통일한국의 정부를 수립하려는 안이 『국련』을 통과했다. 그러나 이북에서는 국련의 입국을 거부했다. 그래서 1948년 3월 1일에 하지 중장은 남조선 단독선거안을 발표했다. 여론은 찬반 둘로 갈라졌다. 영구분단의 징조래서 반대하는 사람들과 현실에서 『차선』(次善)이라도 해놓고 봐야 한다는 찬성파와의 두 갈래였다. 나는 반대편에 서명했다.

1948년 4월 2일에는 제주도에서 공산반란이 치열했다.

1948년 4월 19일에 평양의 주동으로 남북정당 및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개최되어 남한에서 김구 선생 일행이 참석했으나 북로당 일방통행적인 의사진행에 실망하고 돌아왔다. 이승만 박사는 공산당과의 협상에서 통일을 꿈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라고 일소에 붙였었다. 그러나 결과 여하를 막론하고 『통일』을 의논하자는데 불참할 수 있느냐 하는 『도의론』에서 김구 선생은 비장한 심정으로 북행한 것이었다.

군정에서 대한민국 수립에로

1948년 5월 10일 하지 중장은 마침내 국련 감시하에 남조선 단독선거를 실시했다. 그리고 동년 8월 15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수립을 선언했다.

동년 9월 9일에 소련점령군 사령부에서는 김일성을 수상으로 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북조선에 수립하고 10월 19일로부터 12월 26일까지에 소련군 철수를 완료했다.

동년 10월 20일에 남한에서는 좌익 음모에 의한 『여수 반란 사건』[6]이 발발해서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국군과 경찰의 토벌로 평정됐다. 그 얼마 전의 『대구 반란 사건』[7]도 같은 부류의 것이었다.

이렇게 소요, 반란 등 사건이 빈번했다는 정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한국 국회에서는 『국가보안법』[8]을 가결했다.

1948년 12월 12일, 제3회 국련 총회가 파리에서 열릴 때, 한국에서는 장면 씨를 수반으로 한 사절단을 파송하여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란 것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그 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도 채택되었다.



[각주]
1. 김규식(金奎植, 1877~1950) - 본관은 청풍(淸風).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부산 동래 출신. 중방파(仲房派) 23세손으로 1881년 김지성(金智性)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87년 6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마침 미국 북장로파의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 G.)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으며, 그 때 요한이라는 교명을 받았다. 1906년에 조순환(趙淳煥)의 딸 은수(恩受)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얻었으나, 차남 진동(鎭東)만 남았다. 1917년에 첫부인과 사별하고, 1919년에 김순애(金淳愛)와 재혼하여 장녀 우애(尤愛)을 얻었다. 1897년부터 1903년까지 미국 버지니아주의 로노크대학교(Roanoke University)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듬해 프린스턴대학원(Princeton Academy)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 YMCA학교 교사, 경신학교(儆新學校) 학감으로 있었고,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교회활동으로는 1910년에 새문안교회의 헌당식을 보게 되었고 장로가 되었으며, 1911년에는 경기ㆍ충청장로회 서기로 뽑혔고, 1912년에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11년 일본의 교회탄압이 시작되자,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 및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21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창설하고, 1927년에 그 의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東方民族)』을 창간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그 주석이 되었고,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해방 이후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이후 좌우합작운동에 나섰고, 1948년에는 남한단독선거를 반대하였으며, 그해 4월 평양을 방문했으나 북한지도자와의 회담은 실패로 돌아갔고 귀경한 다음부터는 정치에서 떠나 있는 듯 했다. 6ㆍ25사변 때 피납되어 1950년 12월 10일 만포진 부근에서 별세했다. ↩
2. 이윤영(李允榮, 1890~1975) -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백사(白史). 1907년 평양 숭실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태천창명학교 및 운산보통학교 교장을 역임하다가 목회자의 길에 뜻을 두고 1914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진학하면서 목회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해 북진교회 전도사로 취임하였다가 1917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로 안수를 받았으며 곧 신창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후 황해도 연백군 백천교회(1921~27)에 봉직 중이던 1922년 협성신학교를 졸업(제8회)하였으며 1927년 신흥리교회 및 진남포지방, 1931년 부부교회 및 개성지방, 1935년 남산현교회 등지로 전임하였고 평양지방 감리사직을 겸직하던 1941년 3월, 일제 침략만행에 항거하다가 1942년 평양 요한학교 이환신 목사와 함께 친일교단 지도자로부터 목사직을 파면당했다. 일제의 어용기관인 조선혁신교단 창단을 반대하다가 경기도 경찰부에 검속당하기도 하였으며 8ㆍ15해방 후에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1946년 12월까지 정치활동을 하다가 공산세력의 위협과 방해로 조선민주당을 끌고 월남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목회생활을 떠나 정치인으로 활약, 1948년 유엔한국위원단의 감시하에 제헌국회의원이 되었는데 그해 5월 31일 온 국민이 주시하는 가운데 중앙청 회의실에서 최초의 국회가 개회될 때 개회기도를 맡았다. 그해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무임소장관, 사회부장관, 국무총리 서리 등을 역임하였고 1947년 11월에는 기독교조선감리회 재건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제헌국회의원 임기가 끝난 1953년 신흥대학(현 경희대 전신) 학장으로 대학교육에 공헌하였고 1963년에는 반공통일연합회 위원장을 거쳐 1968년 군정연장 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 및 통일원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피난학교 광성고등학교 재건에도 참여한 후 평생 이사로 봉사한 그는 1975년 10월 15일 서울에서 별세했다. ↩
3. 차침 - ‘차츰’의 방언 ↩
4. 빼꼭 – 사람이나 물건이 어떤 공간에 빈틈없이 꽉 찬 모양. ‘빼곡’ 보다 센 느낌을 준다. ↩
5. 연제(演題) - 연설이나 강연의 주제나 제목 ↩
6. 여순사건(麗順事件) -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ㆍ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 ↩
7. 대구 10ㆍ1 사건 –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에서 발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 일련의 사건을 지칭한다. 역사적 관점에 따라 10월 인민항쟁, 10ㆍ1사건, 영남소요, 10월 폭동 등으로 불린다. ↩
8. 1948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 제국의 치안유지법을 기반으로 하여 대한민국 내에서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 ↩

[범용기 제1권] (111) 조선신학원 발족 - 해방 직후의 날들

2월 24, 2026
[범용기 제1권] (111) 조선신학원 발족 - 해방 직후의 날들

해방 직후의 날들

해방 직후의 날

이삼일 후에 나는 우선 혼자서 서울에 들어왔다. 서울은 환희에 미쳤다. 교통질서도 아무 것도 없었다. 전차고 기차고 지붕에까지 사람 무더기고, 달리는 전차 뒤에 매달렸다가 떨어져 죽는 사람도 수두룩했다. 그러나 그걸 문제 삼는 사람도 없었다.

거리는 『만세』 도가니였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만나는 대로 손잡고 축하한다.

미군 진주

이북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는데, 이남에는 미군이 오지 않는다. 일본군이 질서를 유지한다고 총에 칼을 꼽아 갖고 중요한 모새기를 지킨다. 그러나 이미 항복한 군대라 맥쌀이 없었다.[1] 저금을 모두 찾아가라고 한다. 조선은행에서는 지폐를 마구 찍어서 저금을 청산한다. 그동안에 총독부에서 강제 저금 시켰던 것을 부지런히들 찾아간다.

우리는 날마다 경성역 앞, 세브란스 옆에 나가 미군이나 소련군 오기를 기다렸다. 4대국이 똑같이 조선독립의 산파요, 사심 없는 친구인줄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평양쪽으로 간 기차가 예외 없이 『함흥차사』다.

이북에서 피난민이 내리닥친다. 소련군의 『다와이』(물건강요)와, 가정 침입, 난행, 행패에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김일성 공산정권 수립, 조만식 선생 납치와 감금, 조선민주당[2] 및 교회탄압 등등으로 기독교 지도자, 교인 사회유지들의 월남이 부쩍 늘었다.

단신 또는 식구 대동으로 빈손 들고 무작정 넘어오는 것이다.

이남에는 『자유가 있다』는 것 때문이라고 한다.

이북 월남민이 수만인데다가 일본, 만주, 북지, 상해 등지에서도 독립국에 간다고 떼지어 돌아온다.

작은 물웅덩이 정도밖에 안되는 서울 바닥은 인간소용돌이였다. 사람이 천하고 물건이 귀하다.



[각주]
1. 맥살없다 - ‘맥없다’의 방언 ↩
2. 조선민주당 – 1945년 조만식이 북한 지역 대표들과 함께 평양에서 창당한 민족주의 계열의 정당. ↩

[범용기 제1권] (110) 조선신학원 발족 - 해방의 기쁜 소식

2월 23, 2026
[범용기 제1권] (110) 조선신학원 발족 - 해방의 기쁜 소식

해방의 기쁜 소식

나는 아직도 도농에 있다.

1945년 8월 14일이다. 『긴급방송』이라면서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담화가 발표되었다. 이 농촌에도 들려온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숨을 모아 맥없이 말하고 있다. 일본이 항복하면 한국은 의례 독립하는 거라고 나는 다짐했다.

동리 사람들이 남녀노소 모두 통장네 집 앞 타작마당에 모였다. 나더러 이야기해 달라고 한다. 나는 이제사 애국지사 독립운동자들의 염원을 하나님이 들어주셨다고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어느 노인 한분이 『이번에는 진짜 독립이 될까요?』 하고 묻는다. 지금 생각하면 함축있는 질문이었다. 나는 독립은 되는데 당분간 미, 영, 중, 소 네 나라 합동위원회에서 그 업무를 감시 추진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동안에 서울 소식을 전달하는 연락원이 계속 있었기에 나는 대략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건국이념

그리고 하루 들어 앉아 『한 크리스찬이 본 건국이념』이란 글을 썼다. 주로 칼빈 신학에 근거한 것이었고 『카이퍼』의 『칼비니즘』을 참고했다. 급해마자서 퇴고할 사이도 없었다.

그래도 거기서 『권위』 문제부터 다룬 것은 잘한 일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나라』의 권위가 정부 수반에 있느냐? 국민에게 있느냐 하는 것인데 나는 어느 편에서도 궁극적인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인간은 그분의 『스튜워드』며 그의 앞에 충성해야 할 책임적인 『종』일 것뿐이라는 것이다.

맏딸 사위 들어오고

해방된 몇 일 후였던가 나는 시내로 들어가려고 도농 정거장엘 가는 중이었다.

정거장 바루[1] 못 미쳐 논둑길에서 맏딸 『선계』를 만났다. 혼자 허주레한 피난 보따리를 이고 주춤거리며 오는 것이었다. 도농서 신영희 의사와 결혼하고 만주 공주령에 따라가 살던 아이다. 소련군이 공주령에 진격한데서 신의사가 혼자서라도 먼저 가래서 떠나왔다는 것이다.

그때 공주령 살던 일본인들이 부녀자를 먼저 동만주 간도 방면으로 피난시키는 틈에 끼어 같은 기차를 탈 수 있었다고 한다. 자기도 그 일행과 같이 갈 작정이었지만 안동현 가까이서 갑자기 서울갈 생각이 나더라는 것이다. 그들 일행은 행동을 같이하자고 했었지만 자기는 거부하고 혼자 이렇게 왔노라 했다.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나는 감사했다. 동만주쪽으로 간 일본인 부인들은 소련군에게 유린, 강간, 강제수용 됐다가 많이들 죽고, 남은 부대는 시베리아로 강제수용됐다고 들었다.

두주일 후엔가 신영희 의사도 왔다. 공주령에서 얼마 가산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그건 철없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 동리 중국인들이 집집마다 덮쳐 약탈하고 인민재판에서 죽이고 불지르고 하는 바람에 손댈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자기는 그들에게 인심 잃은 일이 없었기에 아는 사람들의 증언으로 인민재판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도 공산당에게 간 데마다 걸렸었지만, 용케 빠져 나올 기회가 마련되더라고 한다.



[각주]
1. 바루 - ‘바로’의 비표준어 ↩

[범용기 제1권] (109) 조선신학원 발족 - 최후 발악상

2월 23, 2026
[범용기 제1권] (109) 조선신학원 발족 - 최후 발악상

최후 발악상

최후 발악

우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일본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것만은 눈치 챌 수 있었다. 일본 녀석 하나가 말끝에 『유단 다이덱끼』란 말이 옳다고 한다. 이건 『방심(放心)하는 게 큰 적(敵)이다』 하는 뜻이다. 『유단』을 그들은 한자로 『기름 유』(油) 자와 『끊을 단』(斷) 자를 쓴다. 말하자면 『기름이 끊어지는 게 큰 적』이다 하는 뜻이 된다.

그 무렵 일인들은 송진(소나무 진액)을 긁어 오라, 피마자를 심어 그 열매를 가져오라 하는 걸 보면 기름이 떨어진 게 확실했다. 집집마다 놋그릇을 바쳐라, 쇠꼬치는 무엇이든 가져오라 한다. 그리고 공용시설에서도 앵간한[1] 쇠붙이는 거의 다 뜯어간다. 그래 가지고 얼마나 오래 싸울 건가 싶었다. 그 뿐인가? 수송선을 만든다고 묘소나 능(陵) 지대의 잘 자란 소나무를 마구 베어간다. 목선을 만든다는 것이다. 동구릉 숲도 엉성하게 짤렸다. 청년만이 아닌 중년층까지도 불러내다 군사체조며 분렬연습을 시키고 아이들까지도 격검 연습을 시킨다.

그런다고 열심히 할 조선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어찌못해 하는 일이라, 빨랑빨랑하질 못하다. 『고라! 메다마가 신데 이루조!』(이 자식, 눈알이 죽었다)하고 악을 쓴다.

민간에는 『시일(是日)이 갈상(曷喪)고』란 말이 속담처럼 돈다. 이건 악정에 시달린 백성의 원망을 표시한 맹자의 말이다. (是日 衷 余及汝俱亡) 즉 『이 날이 언제 없어질까, 내가 너와 함께 망하련다』는 뜻이다. 내가 같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 죽는 게 시원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조선 사람의 심정이었던 것 같다. 『이날』(日)을 『일본』(日本)으로 치부하면 더 재미있다.

나두 동네 사람들과 같이 하라는 대로 했다. 그래서 악에 바친 일인들도 트집잡을 수가 없었다. 육류도 물론 극도로 통제되었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밤중에 몰래 숲 속에서 소를 잡아 나누어 먹기도 하고 돼지를 추념[2]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도 얼마 갖다 준다. 값은 분담하지만 아주 싸게 먹는다. 그것으로 못 먹는 창자에 기름칠하는 것이었다.

『하라는 대로 하면서 제 속 차린다.』 이것이 대대로 몸에 밴, 조선 민족의 『처세술』(?)이 아닌가 싶었다. 겉으로 적응하면서 속으로 항거하는 전술이다.

일본의 전설적인 검신(劒神)이라는 이도류(二刀流) 『미야모도 무사시』(官本武藏)는 평생 진검시합(眞劒試合)에서 져 본 일이 없다고 한다. 제자들이 그 비결을 물었다. 그는 『버들은 눈에 꺾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는 말이 있다. 버드나무(수양버드나무를 말한다)는 가지가 가늘게 축 늘어져 바람 부는 대로 흐느적거린다. 그래서 눈이 붙어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눈에 눌려 부러지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진검시합』이란 진짜 칼로 시합하는 것이기에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흥분하는 일 없고 조급히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언제까지나 수동적이고 방위적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조급해져서 함부로 덤벼드는 틈을 타서 결정타를 준다는 것이다.

한국 민족의 싸움이 이 비슷한 타입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민족성』이 아니라, 한 『전술』일 것이다.

해방직전 의(義)에 순한 우리 학생 두 사람

박학수가 신학교 2학년이었던가? 어쨌든, 그는 그때 뚝섬교회 전도사로 있었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와 딸 아이 둘도 같이 있었다. 아이 때 집에서 덮어놓고 짝지어준 아내였다.

그녀는 적어도 내 보기에는 드물게 미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싫어했다. 목사되기로 작정하고서도 그게 고민이라고 고백한다. 자기가 지원병 모집 반대유세를 하다가 잡혀 육 개월 징역하는 중에 모든 과거를 참회하고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아내를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기도 자체가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언』이니 『사랑의 신비』니 하는 말이 생긴 것이 아닐까?

나는 둘 사이를 의좋게 만들려고 애썼다. 내 앞에서는 제법 좋은 체하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박학수가 얼굴이 활짝 피어 장마 끝에 햇빛처럼 환해갖고 왔다.

『선생님, 난 놀라운 여자를 만났습니다. 정말 위대한 여성이예요. 나는 그녀하고 결혼하렵니다. …』

『둘이 사랑하는 사이냐?』

『그래요,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하고?』

『이혼하지요.』

그는 아내에게 보상금을 주고 타일러서 이혼서류에 도장을 받았다.

『둘 다 불행할 바에는 갈라지는 게 좋지 않으냐』 했더니 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호덕과 결혼했다. 전호덕도 그땐 아름다웠고 특히 그녀의 개방적인 성격이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몇 달 후에 박학수의 전처가 중화장에 결혼 첫날 색시같이 차리고 집에 찾아왔다. 자기도 자기 길을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후에사 안 이야기지만 그녀는 혜화동 어느 부자 영감 소실로 갔다고 한다.

박학수는 물론 뚝섬교회를 그만두었고 신학교도 퇴학했다. 교직자 자격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를 얻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교회 일을 못할 바에는 독립운동이나 한다고 나섰다.

그가 3학년생(졸업반)으로 있을 때, 1943년 여름이었다고 기억된다. 그는 조용히 내게 와서 말했다. 『일본이 손들 것은 뻔한 일이고 그 『때』도 가까워졌으니 이렇게 무심코 지낼 수가 없습니다』고 했다. 일본이 갑자기 물러날 경우 우리가 공백 기간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총독부 각부서로부터 지방이 관공서와 면사무소까지라도 그 대체 인물을 마련해 두었다가 즉석에서 그 사무를 인계해서 일사불란 정상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명단을 준비하는 공작에 나섰다고 한다.

서울에는 식량이 문제다. 그러므로 일본군량 창고를 지키고 미리부터 식량을 반입해 두어야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동안 여운형 씨를 따라다녔으나 『경륜 없는 선동자』란 인상밖에 받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당부했다. 그런 광범위한 인간명단을 준비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게 발각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하느냐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지하운동은 3년 안에 발각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낙관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서울서 사십 리 동쪽인 도농(陶農)이란 농촌에 소개해 살고 있었기에 학교 시간 이외에 날들은 거기서 지냈다. 주일 오후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대왕천에 멱감으러 나갔다가 늦게사 돌아왔다. 형사가 다녀갔다고 한다. 웬일인가 싶었다. 월요일에 학원에 갔다. 주일날 박학수가 잡혔다는 것이다. 박학수를 찾아서 우리 집에까지 왔던 것이라고 짐작됐다.

박학수는 1945년 8월 10일이었던가? 하여튼, 해방 직전에 석방되었다. 그의 아내 전호덕이 우리 집에 알리러 왔다 갔다. 그때 그는 파주에서 북촌 계동에 옮겨 살던 때였다. 나는 곧 그리로 갔다.

그는 누워 있었다. 피골이 상접(皮骨相接)이란 말 그대로였다. 뼈에 가죽 씌운 모습이다. 그렇게 여윈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거꾸로 달아매서 비행기 태우고 물먹이고 주리틀고 벌거벗겨 얼음통에 통조림하고 구둣발로 짓밟고 손톱에 못박고 …… 당하지 않은 고문이 없다고 한다. 거기다가 식량부족이라고 콩밥 한덩어리도 얻어 먹기 어려웠으니 그럴 밖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게 다 왜놈이 시킨 일이지만 직접 하수인은 언제나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치가 떨리도록 분하면서도 살아서 나왔으니 다행이라고 격려했다.

그대로 며칠 두면 죽을 것이기에 내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 전호덕의 정성어린, 적절한 간호로 현상유지 되는 것 같았다. 정신력은 강렬했다.

8월 15일, 그가 예상한대로 해방이 되었다. 아직도 그는 살아 있었다. 그는 정계에 나설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운형도 송진우도 따르려하지 않았다. 그럭저럭 9월이 되었다. 전호덕의 급보를 받고 달려간 때는 벌써 그가 떠난 후였다. 몇 집 건너 여운형 씨 저택에는 어마어마한 간판들이 두세 개 붙고 정객들이 저자를 이루고 있었다. 『건준』 초기였다. 여운형 씨와 가까이 지내는 김용기 장로가 장례준비에 수고했다. 나는 그를 관에 넣어 장의차에 실어 파주 그의 선영에 묻고 왔다. 오랜 후일 전호덕 여사가 불란서에서 다니러와 박학수 묘소에 비석을 세운다고 내게 비문을 청하기에 선(擈)과 서(書)를 도맡아 큼직한 검은 옥석에 새겨 호덕과 같이 파주 그의 묘소에 세우고 왔다. 나는 그를 『순국열사』(殉國烈士)라고 이름했다. 정부나 역사협회의 논공행상 절차를 밟을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순국열사』였던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박학수보다 조금 먼저 우리 학원 3학년생으로 대구 출신인 김은도 군이 인천서 잡혀 서대문 감옥에 들어갔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았다. 쌀 공출을 반대했다고도 하고 인간 징용을 비난했다고도 했다.

그 학생이 인천서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무라기시』(村岸) 목사와 함께 인천에 면회하러 가 보려고 인천서에 교섭했었지만 인천서에는 『면허불허』일뿐 아니라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고 통고해 왔었다. 그러나 그와 동기동창인 송두규[3]의 말에 의하면 김은도 군은 대구 출신인데 1943년 8월 하기방학에 인천방직공장에 근무하는 고향친구를 만나러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가 사상범으로 몰려서 그도 억울하게 같이 체포되어 얼마동안 인천서 있다가 서대문 감옥 미결수 감방에 옮겨졌다. 그것이 추운 겨울인데다가 일제 말기라 먹을 것도 없고 사상범에 대한 발악적인 잔인성 때문에 결국 감방에서 동사(凍死)겸 『아사』(餓死)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때 송두규 목사는 혼자서 빈 기숙사에 있었는데 『김은도 위독』이라는 전보가 몇 시간 동안에 두 번이나 서대문 형무소에서 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 보았는데 시체를 거적데기로 덮어 창고 세멘바닥에 내버렸더라는 것이다. 너무 말라서 『인지』할 수가 없었는데 그의 뒷머리에 있는 흠집을 보고서야 『은도』인줄 알았고 시신을 찾았으며, 통지받고 올라온 『어머니』를 위로하며 대구까지 가서 친구를 대신하여 아들 노릇을 했었다.

나는 우리 『한신』에서 역사를 바로 쓰게 될 때에는 김은도 군을 졸업생 순교자 1호로 취천[4]할 것을 염원하고 있다.



[각주]
1. 앵간하다 - ‘어지간하다’의 방언 ↩
2. 추렴 – 모임이나 놀이 또는 잔치 따위의 비용으로 여럿이 각각 얼마씩의 돈을 내어 거둠 ↩
3. 송창근 목사의 조카, 양평장로교회 시무, 한광학원 설립자 ↩
4. 취천 - ‘추천’의 방언 ↩

[범용기 제1권] (108) 조선신학원 발족 - 혜원 졸업과 입학

2월 23, 2026
[범용기 제1권] (108) 조선신학원 발족 - 혜원 졸업과 입학

혜원 졸업과 입학

혜원은 동덕소학교에서 줄곧 일번이었고 반장이었다. 졸업반 때 교무주임은 나더러 동덕여고에 보내라고 권했다. 같은 재단 소속이기에 일등한 졸업생을 학교장 취천[1]만으로 무시험 입학시키는 특권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화』에 보내기로 마음먹고 있었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혜원의 담임선생은 점심때 막걸리 마시는 버릇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후 시간에는 술냄새 풍기며 때로는 비틀거리며 교단에 오른다는 것이었다. 혜원은 그게 몹시 못마땅했던지 반장으로서 반을 대표해 선생에게 항의했다고 한다. 선생은 『아이들 앞에서 선생을 모욕했다』고 교장에게 혜원을 고발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졸업식날 아침에 『2번』 아이가 『1번』으로 발표되고 혜원은 『2번』이 되었다. 혜원은 분하다고 울었다. 나도 분노했다. 6년을 줄곧 1번으로 일관했고 졸업시험에도 마찬가지라고 교무주임이 내게 말한 것이 엊그제였는데 오늘 와서 갑자기 아이들 성적을 바꾸어치는 교육자가 어디 있나 싶어서였다. 그래서 나는 교무주임에게 따져보았다. 그는 몹시 죄송하다면서 『사실은 동덕여고에서 얻은 무시험 입학특권을 살려야 할텐데 혜원은 기어코 『이화』로 보내신다니 그 애를 『일번』으로 추천했답니다』 한다. 그리고 혜원에게는 설립자 특별상을 주고 답사도 혜원에게 시키기로 했다고 한다.

이화에 시험치던 날 나도 가서 밖에서 기다렸다. 소설가 이광수도 와서 언덕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학부형이란 차별 없이 천대받는 계급이라고 느꼈다.

발표하는 날에도 갔다. 혜원의 번호도 나붙어 있었다. 혜원이 좋아하는 것과 내가 기뻐하는 것 월계관 받는 마라톤 선수의 기쁨이랄까? 이광수 딸도 붙었다고 한다.



[각주]
1. 취천 - ‘추천’의 방언 ↩

[범용기 제1권] (107) 조선신학원 발족 - 선계 결혼하고

2월 23, 2026
[범용기 제1권] (107) 조선신학원 발족 - 선계 결혼하고

선계 결혼하고

맏딸애 선계가 정신여고를 졸업했다. 졸업하자마자 어떤 기관에 취직하든지 결혼하든지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대』로 징발되 가기 때문이다. 어떤 공장사무실에 취직이라고 했다. 그애는 비교적 잘생겼고 한참 예뻐질 연령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직장 그만 두었어요』한다. 이유인즉 주인이라는 젊은 사람의 눈치가 이상해서 일찌감치 그만두는 게 안전할 것 같아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속히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 당시 내 큰 조카(利鏞)가 하르빈 합작사(合作社)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하르빈 의대에 재학 중인 신영희를 좋게 보고 『선계』 신랑감으로 점찍어 두었다 한다. 신영희는 내가 간도 은진중학교에서 가르친 학생이고 나도 그의 진실한 성격과 신앙을 알고 있었고 머리도 총명해서 언제나 『톱』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사위감』으로 생각해본 일은 없었다. 큰조카는 하르빈서 오래 사귀는 중에 그만하면 만점이라고 추천해 왔다. 『좋다』고 나는 그를 도농에 불렀다. 그가 하르빈 의대를 졸업하고 공주령에서 공의로 있을 때였다.

아예 결혼하러 온 것이다.

선계는 초대면이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둘이 자유로 교제할 수 있도록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신영희는 우리 집 『건넌방』에서 유하게 했다. 아내 말에 의하면 신영희가 온, 첫날 저녁에 선계는 『엄마』와 함께 신영희 방에 들어가 인사하고 『처음 만나봅니다만, 저에 대한 첫 인상이 어떠십니까? 아예 싫으시면 여기서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그리면 저도 말씀드릴께요』 하더라는 것이다.

『마음에 듭니다』 하고 신영희가 대답하자 선계도 『저도 그랬습니다. 연분인가 보아요』 하더라는 것이다. 이건 내가 학교에서 오자마자 아내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게 약혼이었다. 나는 교제할 기간을 한 달가량 잡고, 다음에 의사를 물으려 했었는데 벌써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온 김에 결혼식을 올리고 갈 적에 데리고 가라고 했다.

첫 딸이라, 이부자리며 입을 의복 몇 벌이라도 해주어 보내려고 무던히 애썼다.

솜을 살 수가 없어서 하용, 춘우, 그리고 나 넷이 한강 건너 송파 어느 농가, 장로 집에 몰래 가서 씨 뽑지 않은 목화 뭉치를 사가지고 밤을 타서 도농까지 온다. 몇 번을 그렇게 했다.

아내는 씨앗을 뽑고 솜틀집에서 솜편을 만든다.

천을 살 수도 없다. 일본 부인들 입는 『하부다에』[1] 등속을 일본 선생에게 부탁해서 겨우 몇 필 샀다. 그걸로 이부자리 겉을 씌웠다. 도농교회에서 김영주 목사 주례로 식을 올렸다. 신랑은 걸어갔고 신부는 가마를 탔다.

가마는 하용 조카, 재한 종제, 이춘우, 그리고 동리 청년들이 번갈아 메웠다.

피로연은 춘우가 찹쌀 한가마 사와서 인절미만은 풍성했다. 신랑 신부는 한 달인가 집에 있다가 둘이서 만주 공주령으로 갔다.



[각주]
1. 하부다에(habutae) - 일본 특유의 견직물의 하나 ↩

[범용기 제1권] (106) 조선신학원 발족 - 하용 결혼하고

2월 23, 2026
[범용기 제1권] (106) 조선신학원 발족 - 하용 결혼하고

하용 결혼하고

하용 조카가 도농서 결혼식을 올렸다. 위에서 잠시 말했듯이 전농동 우리 집 길 건너 모새기 송 씨 댁 아가씨 정옥과 사귀고 있었는데 송 양도 여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면허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조선역사를 주일학교생에게 이야기했다는 혐의로 한때 연행되었다. 우리가 뚝섬 살 때, 정옥은 아직도 갇혀 있어 앞길을 예측할 수 없었다. 2년이 될지 3년이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하용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2년이고 3년이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하용은 학업도 우수했고 성적으로나 생활로나 아가씨들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간호원들 이화학생들이 눈독 들이고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가 가마구라(鎌倉) 보육원 주일학교를 책임졌을 때 주일학교 선생은 처치 곤란할 정도로 과잉이었다.

간호원, 이대생 등이 자원했기 때문이다. 『구혼』도 많았다. 그래서 그는 그의 의사를 떠본 것이다.

그는 확고했다.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정옥』은 육 개월 만에 나왔다.

그때 하르빈의 형님(在衡)이 회갑이었다. 그래서 하용은 약혼자 정옥을 데리고 하르빈으로 갔다. 나는 못갔지만 『창꼴집』에서 자란 식구들은 거의 다 『재연합』 했었다 한다. 하용은 정옥을 친척들에게 선도 보일 겸 데리고 간 것이었다.

하르빈서 돌아오자 도농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르빈의 형님과 형수님도 오셨다. 우리 집에서 새며누리[1] 큰절 받고 대추 던져주고 즐거우셨다.



[각주]
1. 며누리 - ‘며느리’의 방언 ↩

[범용기 제1권] (105) 조선신학원 발족 - 도농에서

2월 23, 2026
[범용기 제1권] (105) 조선신학원 발족 - 도농에서

도농에서

도농에

나는 뚝섬을 떠나기로 했다.

땅과 집 사고

그 무렵 한신 졸업생인 도농의 이춘우가 종종 우리 집에 들리곤 했다. 올 때면 자기 먹을 배급 쌀을 갖고 온다. 그럴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뚝섬 살림을 정리하고 도농에 오라고 권한다. 식량은 그래도 농촌이 낫다는 것이었다. 뚝섬집을 팔아 도농에 땅을 사서 감자농사라도 하면 식량이 될 거란다. 도농에는 마침 팔려고 내놓은 텃밭이 1500평 한필이 있고 초가집도 한 채 살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집을 내놓았다. 집이 팔렸다. 나는 예정대로 도농에 이사했다. 그래도 뚝섬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아내는 도농서 제일 고생했노라고 한다.

땔나무 없고

땔나무가 제일 문제였다. 길가나 언덕 밑에 풀도 모두 임자가 있었다. 국유림 속에 잡풀도 임자가 있었고 솔잎 긁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아내는 종일 누군가에게 핀잔맞으면서 솔방울을 주어다 땐다. 촌사람의 인심은 각박했다. 나는 거기서도 매주일 교회에서 설교했다. 유집사란 사람이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네에서도 제일 가난한 소작인이었다.

감자농사도 했고

내가 산 밭의 삼분지 이는 소작 주고 삼분지 일은 자작으로 감자, 고구마 등속을 심었다. 그러나 인분비료 없이 되는 곡식은 없었다. 그만큼 땅이 약탈당해온 셈이다. 농촌에서의 인분은 얻기 어려운 『귀중품』이다. 모두 못먹고 사니 배설될 여지도 거의 없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어느 날 동넷집 비료지게를 빌려 갚혀있는 비료 웅덩이에서 두세 지게 퍼다부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감자는 비료준 데서만 열렸고 그 밖의 것은 거의 『무』에 가까운 흉작이었다. 그래서 농촌에서의 인분 인기는 금비(金肥)[1]를 능가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덕분에 감자 몇 가마 부엌에 쌓아놓고 아내는 겨우내 든든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각주]
1. 금비(金肥) - 돈으로 사서 쓰는 비료 ↩

[범용기 제1권] (104) 조선신학원 발족 - 뚝섬에서

2월 23, 2026

뚝섬에서

뚝섬에 옮겨살다

전농정에서 1년 지냈는데 집 『모게지』[1] 물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집값이 조금 올라서 팔면 모게지 물고도 다소 여유가 생긴다는 계산이 선다. 그래서 팔고 뚝섬의 좀더 크고 칸수도 많은 집으로 바꾸기로 했다. 『전철』이 있어서 교통도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부랴부랴 뚝섬으로 이사했다.

뚝섬에서

뚝섬의 겨울은 추웠다. 강바람 산바람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워낙 불길이 들지 않는데다가 땔나무도 없었다. 방 자체가 『알라스카』였다. 전쟁말기라, 살림꼴은 엉망이었다.

뚝섬집에서
뚝섬집에서

콩죽

식량 배급도 있으나마나였다. 기름짜고 남은 콩찌꺼기(두병)를 만주에서 실어다가 기계로 얇게 잘라 대패밥 같이 된 걸 신문지 봉투에 한줌씩 넣어준다. 그리고 통밀과 눌른 보리를 하루 한 사람에게 이합오작씩 준다. 이것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한참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몰래 콩 한가마 살 수 있었다. 아내는 동대문 시장에서 멧돌을 사다가 그 콩을 갈아서 매끼 콩죽 한 공기씩 보급한다.

막내조카 남용(南鏞)도 같이 있으면서 중동학교에 다녔다. 서울에 유학하는 친척 아이들이 하숙에서 못견디면 우선 뚝섬으로 찾아온다. 어떤 때에는 날마다 식구 열사람 치닥거리[2]를 해야 했다. 그 중에는 심한 폐결핵 환자도 있었다. 없는 식량에 콩죽 한 그릇씩도 쉽지 않았다. 얼음장 같은 방바닥이라 애기자리 펼 데가 없다. 그래서 아내는 뒷잔등에 애기를 업고 있다. 젖먹일 때에는 앞으로 돌리면 된다. 젖은 왼종일 빨고 있다. 아내는 그래도 젖이 얼마 나오는 줄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인즉 젖은 말랐다. 『하용』이 갖다주는 『모리나가』 분유로 겨우 생존한 것이다. 하루는 엄마 잔등에 업힌 애기가 눈을 못 뜨고 머리도 가누지 못한다. 울지도 못한다. 나는 옛날 어머니가 『창꼴집』에서 미음 쑤어 주시던 것을 생각했다. 아내는 내 말대로 쌀을 씻어 앉히고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 그 물을 떠낸다. 젖같이 보인다. 거기에 설탕을 넣어 숟가락으로 애기 입에 떠넣으면 좋아라고 받아먹는다. 애기는 당장에 기운차렸다. 고마운 일이다.

큰 아이들은 그런대로 견뎌가는 것 같았다. 경용이가 다섯 살이었다. 여름 더운 때, 한강에 멱감으러 데리고 가면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그때 한강은 깨끗했고 좀더 올라가면 수심이 골고루 얕은 데가 있어서 아이들에게 위험한 일도 없었다. 은용은 배고픈 줄도 모르고 좋아했다.

아내는 아이들이 배고파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었던지 자기는 거의 굶어지내는 것 같았다. 한 숟가락이라도 아이들에게 더 먹여주고 보면 자기 몫은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나는 여기 국그릇 같은 접시를 한 『타아스』 사다가 아내 것까지 꼭 같은 분량을 담아서 내가 직접 배급했다. 그래도 별 수는 없었다.

하루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아내는 누워 있었다. 밭에서 배추뿌리를 뽑아다 끓여먹고 배탈났다는 것이다.

가정교회

일본 군벌 독재정치가 그대로 존속한다면 『교회는』 결국 없어지고 말 것 같았다. 가령 있다 셈 치더라도 교회란 이름의 정부기관이요 『교회』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를 가정 안에 보존하고자 생각했다. 가장(家長)이 목사고 식구들이 교인이고, 집이 예배당이고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저녁 예배하고 헌금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돌아가며 기도도 하고 했다. 그러려면 가정으로서의 전통도 이에 『토착화』 시켜야 한다는 의미에서 『족보』도 더듬었다. 그리고 그 유구한 흐름이 지금의 우리 가정교회에 흘러들었다는 신학(神學)을 기초로 가훈(家訓)을 만들었다. 그것을 아이들에게도 가르치고 조카들에게도 보내고 그때 중국 서주(徐州) 무슨 은행인가 근무하고 있던 재종 동생 재한(在翰)에게도 보냈다. 히틀러도 유대인 가정에 심겨진 유대교를 뿌리뽑을 수는 없었다는 발상에서였다.

뚝섬에서 아이들은 계속 시내로 통학했다. 나도 물론 같은 신세다.

몇 십 분에 하나씩 다니는, 큰 마차만큼이나한 기동차[3]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뚝섬은 인분냄새로 유명한 채소밭 구역이다. 그래서 기동차 안은 파리로 초만원이다. 천정, 벽유리창 할 것 없이 새까맣다. 사람이 들어서면 떠들썩 난리난다. 낯이고 뒤통수고 마구 덤빈다. 앉을 자리도 없어 나는 서서 간다. 그래도 모서리에 기대서 가벼운 책을 읽는다. 그때만 해도 눈에는 자신이 있어서 흔들리면서도 얼마든지 초점을 맞추어갈 수 있었다. 그건 『일』이 아니라 『소일』(消日)이었다.

그때 신자는 풍문여고에, 혜원은 동덕 소학교에 다녔다.



[각주]
1. 모기지(mortgage) - 은행이 부동산을 담보로 하는 대출 ↩
2. 치닥거리 - ‘치다꺼리’(일을 치러 내는 일)의 비표준어 ↩
3. 기동차(汽動車) - 석탄을 쓰지 않고, 전기나 석유 또는 휘발유를 쓰는 동력기관을 장치한 객차 및 화물차 ↩

[범용기 제1권] (103) 조선신학원 발족 - 전농정에서

2월 23, 2026
[범용기 제1권] (103) 조선신학원 발족 - 전농정에서

전농정에서

혜원을 소학교에

전농정에 살 때 나는 매 주일 청량리교회에서 설교했다.

1942년 혜원이 만 여섯 살 됐기에 감리교에서 경영하는 동대문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래도 사립학교가 좀더 『우리』와 가까운 상태가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때 학교에서는 조선말 사용 엄금이었고 사용자에게는 엄벌한다는 정책이었다. 혜원은 자기도 학교 간다고 좋아서 참새처럼 깡충댔다. 그런데 저녁에는 풀이 죽어 축 늘어져 온다.

선생이 일본말로만 이야기하는데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들끼리도 조선말로 하면 한마디에 일전씩 벌금 내라면서 상급반 아이가 순사처럼 무섭게 굴더라고 했다.

『나라 없는 어린 것』 눈물 없이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몇 달 다니더니 제법 일본말을 지껄였다. 여섯 달 후에 그 사립소학교가 없어졌다. 그래서 동덕소학교에 전학시켰다.

동덕소학교 교무주임은 어린이문학 작가여서 나와는 다소 통하는 데가 있었다.

혜원의 담임선생이란 젊은이도 좋은 사람 같았다.

관용이 나고

1943년 전농정서 뚝섬에 이사하기 바로 전에 아내가 해산했다. 역시 내가 학교에 간 동안이었다. 저녁 때 학교에서 와보니 아내가 안방 다락 속에 누워 있었다. 『아들』을 났다면서 갓난 애기를 보여 준다. 옆집 아주머니가 산파도 부르고 산모도 건사해 주었다 한다.

사흘이 지났지만 산모는 젖이 나지 않는다. 쌀밥에 미역국도 소용없었다. 세브란스에서 『인턴』으로 있는 『하용』 조카가 『모리나가(森永粉乳) 분유를 얻어와서 아껴가며 먹었다.

큰조카(利鏞) 결혼하고

일본 동경서 법정대학을 마친 큰조카(利鏞)는 만주국의 『합작사』 전국연합회에 취직해서 자기 약혼자를 데리고 임지로 가는 길에 전농동에 들러 우리 집에서 간단한 결혼식을 올렸다.

김영주 목사가 주례했다. 그리고 곧 하르빈으로 떠났다.

일 년 후에 아들을 나서 작명을 해왔기에 『삼열』(三悅)이라고 불러 보냈다.

창꼴집 없어지고

식구가 이리저리 다 흩어진 다음에 『창꼴집』은 빈집처럼 스산했다. 부모님 다 가시고 외동딸 시집가고 아들 셋이 다 떠나 있고 육순에 가까운 형님 부부만이 남았다.

그래서 형님은 집을 팔고 하르빈의 맡아들을 따라갔다. 『창꼴집』은 가재골 사람이 샀다고 들었다.

관용과 『엄마』

갓난 애기 이름은 『관』(寬)이라 했다. 어려운 때에도 『너그러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애가 봉사심이 많은 것 같았다.

방이 추워서 애기 누일 데가 없다.

[범용기 제1권] (102) 조선신학원 발족 - 설립자의 고충(苦衷)

2월 23, 2026
[범용기 제1권] (102) 조선신학원 발족 - 설립자의 고충(苦衷)

설립자의 고충(苦衷)

설립자 부대끼다

해방 바로 일년 전부터였다고 기억된다. 형사들이 설립자 김영철 장로에게 은근히 공갈하곤 했다.

『당신이 정신이 있소?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런데 돈 내시오? 좋지 않을 거요.』

그래서 그는 몹시 불안해졌다. 그는 어느 날 내게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나 이젠 조선신학원과의 관계를 끊겠소. 돈도 낼 수 없소. 김 목사도 아예 그만 두는 게 좋겠소. ……』

나는 『그건 내게 말할게 아니라, 이사회에 말씀하시지요. 내가 이사장에게 말씀드려 이사회를 소집하도록 할테니까요.』

며칠 후에 이사회가 모였다.

설립자의 말에 이사들은 분개했다. 설립자면 학원과 운명을 같이해야 할 것이지 그게 무슨 소리냐는 것이었다.

『내가 설립자라면 학원문 닫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그는 항변했다. 문을 닫고서 설립자도 그만둔다는 것이었다.

이사회에서는 다소 흥분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님 필생의 사업을 계승하셨다는 분이 아버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 있소?』 하고 힐난[1] 비슷하게 말하는 분도 있었다.

『아버님도 이렇게 될 줄 알으셨으면 시작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시작했더라도 손 떼셨을 것입니다』 하고 그는 대답한다.

나는 이사들에게 변명했다. 『나는 김 장로님의 고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경찰에서 묻거든 신학교에서 손을 뗐으니 모른다고만 하시고 돈도 내지 마세요. 더 자세히 따지거든 원장에게 물어보라고만 하세요. 우리도 김 장로님께서는 이 학원과의 관계를 끊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니 설립자 명의는 그대로 갖고 계셔야 합니다. 그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니만큼 맘대로 떼고 붙이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실제 행정에 관여하는 직책도 아니니 말입니다. 무슨 어려운 일이 있거든 학원 당국에 밀어버리세요』 했다.

그래서 그 정도로 낙착됐다. 이사회에서는 그를 격려하고 위해 기도하고 좋게 헤어졌다.

이제부터 경상비가 문제다. 나는 최저 예산서를 만들고 취지서도 써서 졸업생들에게 보냈다. 각기 담임한 교회에서 특별헌금을 보낼 것을 호소한 것이었다. 졸업생의 반응은 좋았다. 각처에서 연보가 들어와서 거의 예산대로 되어갔다. 총회에도 삼천 원 보조를 요청했다. 재정부장이었던가 하는 이승길[2] 목사는 못마땅하고 심술궂은 표정이었지만 청원한 대로 제의 가결됐다.

이것은 해방된 해 봄쯤의 일이다.

그후 김영철 장로도 별말 없이 지냈다.



[각주]
1. 힐난 – 트집을 잡아 지나치게 많이 따지고 듦 ↩
2. 이승길(李承吉, 1887~1965) - 장로교 목사. 1887년 7월 13일 황해도 황주군 서성면 서정리에서 출생. 1894년부터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896년 리(G. Lee ; 李吉咸)에 의해 구성면에 기독교가 전파되자 이후 부모와 함께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헌트(W. Hunt)로부터 1901년 15세에 세례를 받았고 같은 해 3년제 소학교인 황주 양성학교 및 1905년 19세의 청년으로 숭실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곧 사리원 광성교회 부속 광성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교육구국의 일념으로 후진양성에 매진하면서도 한편 서울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를 중심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08년 김구, 최광옥, 도인권, 김홍량 등과 함께 해서(海西)교육총회를 설립하였고 이 기관을 통해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 여파로 이승길, 김구 등은 이른바 「안명근 사건」(1910년)에 연루되어 15년의 실형을 언도받았으며 수감 중 7년으로 감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1921년에 사리원 광성리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았으며 그해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23년 이를 돌업(제17회)한 뒤 그해 12월 제25회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26년 황해노회장에 피선되었고 1930년부터 10년간 장연읍교회에서 시무하였는데 이 기간 중인 1935년 평양노회장, 1936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5회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937년 평양노회장에 재선되었으며 이때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섰으나 일본의 회유책에 의하여 신앙적 변절을 가져왔으며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결의됨으로써 평양신학교가 자진 폐교한 후 이승길은 설립자 대표로 신학교 복구운동에 앞장섰다. 1940년 겸이포 중앙교회를 담임, 1948년까지 근속하면서 1941-42년 황동노회장으로 활약하였고 1944년에는 정방산 사건으로 피검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과 함께 출감하였다. 1948년 월남, 「도마스목사기념전도회」를 조직하여 옹진, 연백 등지에 개척전도를 실시하였으며 1949년 황남노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에 피선되었다. 1951년 9월 인천제2교회를 개척하여 작고시까지 시무하였으며 1952년 기독교봉사회 한국지부중앙위원, 1953년 세브란스의과대학 재단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마르다 모자원을 설립하였다. 1954년 황남노회장에 재선되었고 1957년 11월 1일 인천제2교회에서 성역 41주년기념식을 가졌으며 1962년 9월 22일 제50회 예장총회에서 증경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65년 2월 18일 별세하였다. 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범용기 제1권] (101) 조선신학원 발족 - 조선신학원 발족

2월 23, 2026
[범용기 제1권] (101) 조선신학원 발족 - 조선신학원 발족

조선신학원 발족

수일 지내고 곧 서울에 돌아온 나는 개강준비에 분주했다. 원장으로는 김대현 장로님을 모시기로 했다.

교수진을 짜야 할텐데 해외유학까지 한 분은 통틀어 한두 사람 밖에 없었다. 동래의 윤인구[1]가 일본신학을 나오고 호주에 유학하고 프린스톤, 에딘버러 등에서 잠시 청강하고 돌아와 호주선교부 경영의 복음농민학교를 맡고 있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조희염[2] 씨가 조선신학 기성회 때부터 『열심당』이었지만 그 동안에 원산에 자리잡고 말았다. 송창근은 흥사단 사건에 걸려 아직도 보석 중이다. 한경직은 일제(日帝)의 설교 금지로 신의주 제2교회에서 퇴진하여 고아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사상불온』이란 이유로 못하게 되어 실업상태에 있었다. 우리는 그를 초빙했다. 그가 서울까지 오기는 했으나 한사코 교수 초빙은 수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윤인구 밖에 없었다. 나는 그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는 응락하고 상경했다. 그래서 함께 학칙, 커리큘럼, 강사물색, 개강식 날짜와 절차, 김대현 장로님 찬하회 준비 등등 일체를 대강 의논했다. 그리고서 그는 잔무정리와 가족 이사를 위해 일시 귀향했다.

그 동안에 나는 서울서 할 일들을 진행시켰다.

학원 장소로는 승동예배당 하층을 쓰기로 했다. 학칙을 기초했고 커리큘럼도 어느 신학교 못지않게 충실을 기했다.

책상 의자 등도 사 들였다. 제일 큰 책상에 회전의자를 붙여 윤인구 자리를 만들고 내 앞에는 작은 책상에 보통 의자를 놓았다. 그리고 시간 강사들을 위한 긴 책상과 의자들도 준비했다.

설립자겸 원장은 김대현 장로님이고, 이사장에는 함태영[3] 목사님, 그리고 모모한 분들이 이사였다.

교수로는 윤인구, 김재준. 강사로는 신약에 전필순, 이정로[4], 그리고 음악에 현제명[5], 웅변(speech expression)에는 웅변술로 이름난 김창제[6] 씨, 종교철학에 갈홍기[7] 박사, 일본어와 일본사상에 당시 약초정 일본교회 목사 『야마구찌』(山口) 씨 등등이었다.

개원식

개강식과 김대현 장로 원장 취임식, 그리고 그에 대한 찬하회 등등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경기 노회원들과 타교파 명사들이 승동교회당에 운집(雲集)했다.

김 장로님의 취임사는 간단했다. 『나는 처음부터 크게 당당하게 시작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사실, 지금까지 내 하는 일은 다 그러하였다. 조선신학교도 어렵고 작고 눌린 데서 탄생한 것이 오히려 자랑이다. 『이소성대』(以小成大)가 내 평생의 좌우명이다. 나는 지금의 미미한 조선신학원이 꾸준하게 자라서 전세계에서 가장 제일 훌륭하고 유명한 신학교가 될 것을 확신한다. …』 하셨다. 일종의 예언이었다고 나는 지금 회상한다.

진영과 학생

윤인구가 원장 실무를 보았고 그 밖의 일은 내가 모두 맡았다. 학감일, 교무주임 일에서부터 서무, 재무, 회계, 소사 - 『만사도감이다』. 그리고 교수 시간도 제일 많았다. 구약은 물론이고 교수 시간도 신약, 교회사, 실천신학, … 닥치는 대로 메꾸어갔다.

학생들은 열심이었고 모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졸업연한은 3년
교수 용어는 조선어
대략 이런 내용과 진용이었다.

모여온 학생들은 백 명 이상이었다. 평양이나 다른 신학교에서 이삼년 공부한 사람은 3학년에 그 나머지는 모두 2학년에 넣었다. 학생의 대부분은 장년들이었고 사오십대, 이십대 청년들도 얼마 있었고, 사오십대 장로님인 충북의 김영주, 이창재 등도 충실한 학생이었다. 그리고 칠십대도 한 분 계셨다. 시인 임인수(林仁洙)[8]도 끼어 있었다. 그는 그때 벌써 동아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시로 당선되어 있었고 신학생으로는 최연소자였다.

일제(日帝)의 의용군 모집에 반대하여 몰래 전국을 유세하다가 잡혀 6개월 징역하고 나온 경기도 파주군의 박학수(朴學洙)[9] 군과 그의 친구 이춘우[10] 군도 학생으로 등록했다.

승동교회 담장밑, 회랑(回廊)[11]을 기숙사로 썼다.



[각주]
1. 윤인구(尹仁駒, 1903~1986) - 해방 이후 부산사범학교 초대 교장, 부산대학교 초대 총장, 연세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종교인. 1926년 메이지학원 신학부를 거쳐 1931년 영국 에딘버러 대학원 수료. 1941년 조선신학원 개설하교 교장이 되었으나 일제 탄압으로 사임. 해방 이후 미군정하 경상남도 내무국 학무과장으로 부임, 부산대학을 개교시키고 1953년 부산대학교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초대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1961년 연세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
2. 조희염(曺喜炎, 1885~1950) - 장로교 목사, 신학자, 순교자. 1885년 2월 20일 함남 함흥에서 출생.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20대에 캐나다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울의 경신중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14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캐나다 유학길에 올랐고 이후 캐나다의 할리팍스신학교 및 토론토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캐나다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으며 미국 유학시절에는 한국 유학생 총회장 및 동양 유학생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시카고 대학 내에 동양 출신 유학생을 위한 복지시설인 인터내셔날하우스를 설립하기도 했다. 1930년 귀국하는 길에 유럽 및 러시아를 시찰하였고 귀국하여 <동아일보>에 「노농노국별견기」 및 「북구별건기」로 연재하기도 했다. 귀국 즉기 함흥 YMCA 총무로 선임되어 농촌 및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수차에 걸친 기독교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캐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마르다윌슨 여자신학교에서 교수하였으며 일제말기 선교사 추방과 함께 학교가 폐쇄되면서 일본 헌병대에 구속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송창근, 김재준 등이 서울에서 설립한 조선신학원 이사로도 한때 참여하였으며 간접적으로 교회를 돕고 있었다. 해방후 원산시장으로 추대되었다가 공산당 치하에서 일할 수 없어 사임하고 원산 남부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하는 한편 평양의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에 소속되어 민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6ㆍ25사변이 일어나고 그해 10월초 유엔군이 원산에 진주하던 10월 9일 공산군에게 끌려가 원산형무소에서 총살당하였다. 이때 같이 체포되어 총살현장에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한준명 목사가 그의 순교 사실을 전하였다. ↩
3. 함태영(咸台永, 1873~1964) - 장로교 목사, 독립운동가, 법조인, 정치인. 호는 송암(松岩). 1973년 12월 11일 함북 무산에서 함우택의 아들로 출생.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고 11세 때 서울로 이주하였으며 1895년 한국 법관양성소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가 판사로 있을 때 독립협회사건이 일어났고 그는 사형이 언도된 이승만의 형량을 7년으로 감등시켰으며 이상재를 엄벌하라는 법무대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죄석방시키기도 하였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동기는 그의 부친이 먼저 교인이 되어 연동교회에 열심히 출석한 데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1908년 복부내종으로 사경을 헤매던 중에 기도로 치료를 받고 그도 철저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듬해 부친은 연동교회 당회장 게일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이원긍, 오경선 등 양반교인들이 따로 묘동교회로 분립하여 나갈 때(1909년) 함께 나갔다. 그러나 함태영은 계속 연동교회에 남아 집사가 되었고 1911년에는 장로로 장립되었으며 1915년 경충노회 추천을 받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8년 조사로 임명되어 남대문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는데 당시 남대문교회 교인이던 이용설, 이갑성 등과 교분을 갖게 되었고 그는 이들과 이듬해 3ㆍ1운동 기독교측의 추진세력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언급되는데, 사실상 3ㆍ1운동에 있어서 그의 활약이 없이는 기독교 각교파간의 연합 및 기독교, 천도교, 불교와의 제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920년 9월 경성복심법원은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이인환, 한용운 등과 함께 관련자들 중 최고형인 징역 3년형을 언도했다. 1921년 12월 22일 최린,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김창준, 한용운 등과 함께 가석방되어 풀려났다. 이후 신학을 계속하여 1922년 졸업하였고 그해 12월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청주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3년 장로회 총회장에 피선되었고 1926년 충청노회장을 역임했다. 1926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박승명 목사 사건으로 분규가 일어나 총회에까지 문제가 상정되어 그는 조사위원의 한사람으로 마산에 내려가 분규사건을 수습하였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27년 12월 문창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경남노회장을 역임했으며 문창교회 문제를 수습한 후 1929년 10월 연동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연동교회 역시 노년층과 청년층 교인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교회 분규에 휩싸이던 터에 그가 부임하여 내분을 종식시키며 교회를 발전시켰다. 1929년 경기노회장, 1932년 경성노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에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34년 박용희, 권영식, 전필순, 최석주 등 중부지역 기독교지도자들과 함께 YMCA 신흥우가 주도한 「적극신앙단」에 가입, 이를 통한 민족운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서북계 교회지도자들과의 마찰을 일으켰고 이에 선교사 및 서북계인사들에 의해 지휘받고 있는 총회와 경성노회에 반발하여 경중노회를 따로 분립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결국 1937년 양측의 화해로 경중노회는 자진 해산되었지만 그 사이에 경성노회에서 파송한 강병주 목사가 연동교회 당회장으로 부임하고 교회 교인들의 의견이 나뉘는 등 적잖은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같은그의 반선교사적 주체의식은 1939년 3월 김대현, 김영주, 송창근, 채필근 등과 손을 잡아 「조선신학원」(후의 한국신학대학) 설립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1940년 조선신학원이 개교되었고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여 순수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신학교 운영의 책임을 맡게되었다. 1941년 그는 전필순을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선정하고 자신은 일선에서 은퇴,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전쟁말기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피해 경기도 광주군에 내려가 은둔하며 둔전교회를 돌봤다. 해방후 다시 교계에 복귀하여 1946년 조선기독교남부대회 부회장에 피선되었고 1947년 남부총회 부총회장이 되었으며 조선신학교 이사장, 기독교흥국형제단 총재, 기독공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밖에 일반 사회활동으로는 민의원을 거쳐 1949년 제2대 심계원(현 감사원의 전신) 원장에 취임하여 건국 초기 사회기강을 잡는데 헌신하였다. 6ㆍ25사변 중인 1951년 부산에서 피난중인 조선신학교 5대 학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8월 정ㆍ부통령선거에서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부통령으로 재임하는 기간 중 한국신학대학(1951년에 개명) 학장직은 계속 보유하고 있었으며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교수의 신학적 입장이 총회에 문제가 되어 결국 1954년 장로교 분열에까지 발전하였는데 한국신학대학 교수와 이들을 지지하는 교회는 기독교장로회(약칭 기장)를 형성하게 되었다. 부통령 임기가 끝나는 1956년 그는 이 대한기독교장로회(후의 한국기독교장로회) 제41회 총회장에 피선되었으며 그해 캐나다연합교회의 초청을 받아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에 참석한 후 구미 각국을 순방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공로국민장을 받았고, 1963년에는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4. 이정로(李鼎魯, 1884~1962) - 장로교 목사, 교육가. 충남 홍성에서 출생. 1808년 보성전문학교 법률과에 입학하여 1922년 졸업하였고 1917년 일본 토오쿄오신학교에 입학하여 1922년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양평읍교회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으며 1923년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8년 피어선성경학교 원감이 되었다. 1938년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이듬해 3월 서울에서 채필근, 김영주, 차재명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한국인에 의한 신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는데 그해 4월 정식 개교될 때 이정로는 교수로 참여하게 되었다. 1940년 왕십리 교회로 임지를 옮겼으며 1953년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1949년 장로회신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이외에 세브란스병원 원목, 경성노회 노회장, 경기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62년 12월 31일 별세하였으며 부인(채광덕)과의 사이에 2남 1녀가 있다. ↩
5. 현제명(玄濟明, 1903~1960) - 기독교인 은막가, 교육가, 호는 현석(玄石). 1902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여 보통학교를 거쳐 1920년 계성중학교를 졸업하였고, 1924년 숭실대학교를 졸업(15회)하였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숭실에 재학하는 동안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숭실교수로 부임한 박윤근에게서 체계적인 음악지도를 받았는데 이때 동창들로는 박태준, 김세형, 김형준, 박경호, 차재일, 위혜진 등 훗날 한국 음악계를 이끌어갈 인재들이 많았다. 숭실대학을 졸업한 그해 전주의 신흥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으며 1926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 양신선과 결혼하였다. 1927년 미국인 실업가 히버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의 길이 열려 도미, 무디성경학원을 거쳐 시카고의 건(Gunn) 음악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9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받아 귀국하였고 연희전문 음악부장에 취임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외에 1929년 서울 YMCA 안에 혼성합창단을 창설하여 지도하였으며 박경호와 함께 중앙향우회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직접 연주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해방후 경성음악학원을 서울음악학원으로 개칭하고 그 교장으로 봉직하였는데 이것이 1946년 경성음악전문학교가 되었고 후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흡수되었다. 1945년 10월에 한국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였다. 1960년 10월 16일 별세하였고 1965년 대통령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 있다. ↩
6. 김창제(金昶濟, 1877~1947) - 기독교인 교육가, 청년지도자. 충남보령의 선비 가문에서 출생. 신학문에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황성기독교청년회 초창기 회원으로서 기독교에 입교했다. 1909년 서울 안동장로교회가 창설될 때 그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그뒤 그는 기독교 청년회 학관의 국어ㆍ역사 교사로 재직했고, 1910년부터 해마다 기독학생 하령회(夏令會; summer conference)가 열릴 때에는 언제나 강연과 기도회를 주관했다. 1915년경, 관북 최초의 신교육기관인 함북 경성 함일(咸一)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재직했다. 1917년 함남 함흥 영생중학교의 학감으로 부임하였고, 1918년 3월 25일 함흥 YMCA를 조직했다. 이로써 그는 서울 YMCA를 제외한 최초의 지방 YMCA의 창설자가 되었다. 1919년 3ㆍ1운동 이후 그는 1922년경 상경하여 이화여자중학교의 국어ㆍ역사 교사, 1926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국어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주로 그는 YMCA 운동에 헌신하여, 매주일 열리는 일요 강좌의 강사, 학생하령회 강사, 특별 강연회의 연사, 그리고 서울 YMCA와 연합회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당대의 웅변가요 사상가였다. 본래 강직한 선비이고 학식과 웅변을 겸비한 교육가였으므로 그가 연설할 때는 언제나 초만원을 이루었다. 8ㆍ15 해방 후 그는 서울대학교의 명예교수로 추대되어 윤리 및 국사를 맡아 강의하다가 1947년 별세했다. ↩
7. 갈홍기(葛弘基, 1906~1989) -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 1925년 배재고등학교, 192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34년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교수직을 상실했으나 전향 성명서를 내고 복직된다. 1939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중부연회에 준회원으로 허입되어 인천지방 화도, 영흥 구역의 부담임으로 목회를 시작하여 41년 목사안수를 받고 감리교 신학교와 장로교 조선신학원에서 강의하였다. 1945년 일본기독교 조선교교단의 종교교육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해방 후 초대 공보실장, 외무부차관(1952년), 동명학원 이사장(1957년), 말레이시아 대사 등을 지냈으며 미국에서 만년을 보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 있다. ↩
8. 임인수(林仁洙, 1919~1967) - 해방 이후 『땅에 쓴 글씨』를 저술한 시인, 아동문학가. 호는 현석(玄石) 또는 구촌(九村).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1944년 조선신학교를 졸업. 해방 이후 동시, 동화, 아동소설 등 아동문학작품 외에 시도 발표하면서 주로 잡지의 편집일을 보았다. ↩
9. 박학수(朴學洙, 1917~1950) - 일제 말기 지원병 제도에 반대하여 동료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
10. 이춘우. 조선신학교 3회 졸업.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피란학교를 세워 학교 위기 극복에 공헌(송탄중부교회 원로장로) ↩
11. 회랑(回廊) - 종교 건축이나 궁전 건축 따위에서 건물의 중요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지붕이 달린 복도 ↩

[범용기 제1권] (100) 조선신학원 발족 - 아버님 별세

2월 23, 2026
[범용기 제1권] (100) 조선신학원 발족 - 아버님 별세

아버님 별세

전보가 이틀이나 늦었고 기차에서 내가 정신없이 종착역을 지나쳐 웅기까지 갔다가 북행차를 되잡아 탔기 때문에 만 하루를 쓸데없이 차 안에서 보냈다. 그래서 『창꼴집』에서는 나를 기다리다 못해 예정대로 그날 아침에 장례식을 마치고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먼 친척들은 모두 흩어졌던 것이다.

나는 뒷동산 아버님 묘소 앞에 엎드려 사죄(謝罪)했다.

아버님도 용서해 주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 Smith란 사람이 쓴 『Life Hereafter』란 책을 자미[1]있게 읽었기에 아버님이 다음 세상에서 더 자유롭게, 더 넓게, 더 많이 『생명』을 깨달으시고 거기서 더 바른 『제2의』 선택을 하셨으리라고 느꼈다.

아버님은 1864년(甲子) (음) 2월 24일에 나셔서 1940년(庚辰) (음) 2월 12일에 별세하셨다. 향년 77세시다.

그는 한말 급변하는 정황 속에서 『위정척사』(衛正斥邪) 켠에 서 계셨지만 차츰 『개화』(開化)의 영향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개화운동의 전선에서 일하시던 백부님(㴤炳 씨)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후일에는 단발까지 하셨다. 시흥(詩興)이 샘같이 솟아 하찮은 범용사(凡庸事)도 시의 후광(後光)으로 빛나게 하셨다.

그는 거대한 체구에 머리가 유난히 둥글고 크셨다. 기억력이 비상하셨고 최후까지 감퇴되지 않으셨다. 치아는 온전하셔서 한 대의 낙치(絡齒)도 없으셨다.

나는 어머님 떠나신 후로는 명절이나 세시(歲時) 또는 휴가 동안에 반드시 근친(覲親)했다.

아버님은 『혜원』을 귀여워 하시면서도 내게 일러주셨다. 『자식 사랑에도 절도(節度)가 있어야 한다. 『편애』는 삼가는 것이 좋으리라, 다른 아이들이 원망하기 쉽다. 혜원이만 갖구 그리셨지 우리야 무슨… 이렇게 되면 화목에 금이 가기 쉬우니라…』 하셨다.

우리 형님은 미상불[2] 효자였다. 불철주야 아버님을 간호하셨다. 한약도 지어오곤 했지만 아버님은 절대로 잡수지지 않으셨다고 형님은 원망스레 말한다. 아버님은 그의 마감 날을 예감하셨고 그 날을 기다리고 계셨다 한다. 그래서 약도 의사도 거부하셨다는 것이다.

아버님은 『위정척사』의 각도에서 모든 것을 보셨기 때문에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금수』(禽獸)라는 양이(洋夷)의 종교에 『미혹된』 둘째 아들에게는 임종(臨終)마저 기대하지 않으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님이 저 세상에 가셔서는 모든 것을 알아주시리라 믿으며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허망한 기대라고 생각지 않는다. 묘 앞에서라도 실컷 울고 싶은 심정이다.



[각주]
1. 자미 - ‘재미’의 방언 ↩
2. 미상불(未嘗不) -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게 ↩

[범용기 제1권] (99) 조선신학원 발족 - 조선신학원 인가

2월 23, 2026
[범용기 제1권] (99) 조선신학원 발족 - 조선신학원 인가

조선신학원 인가

1940년 3월, 조선신학원이 인가되었다. 나는 도청에 가서 직접 인가서류를 받아왔다. 바로 그날 집에서 보낸 전보가 주소 이동 관계로 여기저기 돌다가 늦게사 내게 배달되었다. 『부친 위독 급내 형』이었다.

나는 김영철 장로에게 인가서를 맡기고 그길로 함경선 기차에 올랐다.

[범용기 제1권] (98) 조선신학원 발족 - 신학교 설립사무부터

2월 22, 2026
[범용기 제1권] (98) 조선신학원 발족 - 신학교 설립사무부터

신학교 설립사무부터

원래 신학교 설립기성회를 대표하여 그 실무를 맡은 분은 채필근 목사였다. 그는 그 업무를 완수하는 대로 교장 자리에 앉을 것을 약속받고 있었다.

총독부로부터 신청만 하면 인가한다는 언질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발기 위원회로서는 총회 인가 맡은 다음에 총독부에 신청하는 것이 바른 순서라 하여 보류하기로 했다. 그 기간이 약 반년이었다.

결국 총회에서는 선교사들이 문 닫고 간 평양신학교를 직영 신학교로 하여 정식 인가신청을 내기로 했다. 그래서 서울의 조선신학교 설립청원은 제풀에 묵살될 운명에 직면했다.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기』보다도 더 싱거워졌다.

그런데 폐회 직전에 평양의 윤원삼[1] 장로가 긴급 발언을 요청하여 조선신학을 대변하는 일장 연설을 했다 한다. 『이 교회의 수난기에 총회 산하의 현직 장로가 교회를 지키려는 충성으로 오십만 원의 사재를 주의 제단에 바쳤는데 총회로서 감사와 격려의 표지는커녕 냉대와 질시로 대한다는 것은 인지상정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라고 전제하고 제단의 성금까지 교권다툼에 희생된다면 금후 어느 신도가 충성을 보이겠느냐 하고 통매(痛罵)[2]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옆 찔러 절 받기로 김대현 장로님에게는 총회 결의로 감사의 뜻이 전달되었고 조선신학교는 사설기관으로 인가수속을 계속 진행시켜도 좋다는 묵허[3]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때늦게나마 전문학교령에 의한 조선신학 설립인가 신청을 총독부에 제출했다. 평양신학교에서도 거의 동시에 같은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평양신학교를 위해서는 평남도지사(일본인)가 직접 선두에 나섰다.

『기독교의 일본화 또는 일본적 기독교를 강력히 추진시키려면 그 대적인 선교자들 발뿌리에 폭탄을 던져야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한다. 사실 한국의 장로회 현직 목사가 거의 전부 평양신학교 출신이라는 현실에서 『일본화』 정책에서도 『평신』을 이용하려는 것이 당연한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총독부에서는 양손에 떡을 쥔 셈이어서 한때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교파에 신학교 둘을 허락해도 되느냐? 하나만 허락한다면 어느 것을 택하느냐?

위치로 본다면 수도인 서울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교회의 일본화 정책을 위해서는 평양이 그럴 듯하다.

결국 우유부단한 수개월을 지냈다. 그 공백기간에 교회 내 정치 브로커들만이 아니라 직업적 정치 낭인들까지도 끼어들어 막후[4] 암약[5]이 볼만했었다. 총독부에서는 일본교단 통리 도미다 미쯔루(富田満)에게도 의논했다고 들었다. 그는 한 교파 한 신학교 정책을 진언했다 한다. 결국 『평양』 켠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관제 신학교』 맡을 친일교장으로서 채필근 목사가 뽑혔다는 것이다. 그는 옛날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친일 목사로, 동경제대 졸업생이니 안성마춤이었다.

그런데 채 목사는 서울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그 일에 분주했다. 그런데 하루 아침 그는 간다온다 말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쩐 영문인지 몰랐다. 설립자와 기성회 간부들도 모르고 있었다. 몰랐다는 것은 그의 행방을 몰랐다는 말이다.

수일 후에 평양신학교가 인가되고 채필근 목사가 교장으로 취임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큰 소가 없어지면 송아지가 대신한다는 식으로 남은 일은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할 일을 세 항목으로 나누어 보았다.

① 평양신학교와 동등의 신학교를 서울에도 인가해 달라는 기정방침을 관철해 보자는 것, 안될 줄 알면서도 해 보자는 것이다.
② 그것이 안되면 총독부 인가문제에 너무 개의할 것 없이 신학교육의 실속만을 채워 보자는 것.
③ 전국 교회 특히 경기 이남의 교회 안에 통일된 지지 세력을 육성하자는 것. 이것은 졸업생의 목사임직에도 관계되는 실제문제이기 때문이다.

첫째 과제에 대해서는 당분간 관망하기로 했다.

둘째 과제에 있어서는 도청 권한에 속한 단기 강습소로 출발해 놓고 보자는 방침을 세웠다.

나는 도청에 들러 문의했다. 경기 도청에서는 신학교를 평양에 뺏긴 분노도 있었기에 내게 대해서는 호의와 후원이 대단했다. 담당관은 일본인이었지만 친절했다. 그는 격려의 말까지 한다.

『학교 인가 없으면 신학교육 못하나요? 강습소 인가로서도 얼마든지 신학을 가르칠 수 있을 겁니다. 곧 인가해 드릴테니 걱정마시오. 오히려 까다롭지 않아서 좋을지 모릅니다.』

셋째 과제인 교회관계는 상당히 복잡했다.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경기 이남 교회에서의 첫째 난제는 교권과 관련된 지방색의 흐름이었다.

황ㆍ평 양도 교회가 전체 교인의 3분지 2를 차지하고 있으니만큼 다수였고 따라서 남도 교회는 거듭하는 『소수자』의 『서러움』이 『앙심』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 신학교가 하나 생겼다. 그것이 또 『다수』의 횡포에 희생되고 있다. 이것은 묵과할 수 없다. 이번에는 총회를 나누는 한이 있더라도 신학교는 지켜야 한다.

그래서 총회 분립운동이 암암리에 진행되어 분립총회 대의원수와 그 명단까지 작성되고 소집날자까지 통고되었다 한다. 그러나 대의원들이 출발 직전에 연행되기도 하고 서울역 도착 즉시 경찰에 의해 송환되기도 하여 회집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 지령에 의한 경찰의 방해공작이었다.

이 총회분립의 주목적은 교권획득이었고 신학교 문제는 구실 또는 명분으로 이용된 것이었을지 모른다.

이 총회분립운동 진행에 있어서 그들은 내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눈치는 챌 수 있었다.

나는 이 작업의 주동자 중 한 분이신 승동교회 오건영[6] 목사님에게 내 태도를 표명했다. 『이 총회분립 문제는 신학사상이나 신앙고백적 진리파지(把持)[7] 문제가 표면화 한 것이 아니고 남과 북의 교권 싸움이 노골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솔직히 말한다. 신학교는 이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이용되지도 않는다. 총회분립 문제는 내 알바 아니지만 내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반대다.』

어쨌든 이 작업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재연할 불씨는 남아 있었다.

둘째 난제는 신학문제다. 남도 장로교회의 중심은 대구였다. 대구는 서울 이남의 『평양』이라고 한다. 평양신학교 출신 원로급 목사님들이 대부분의 교회를 맡았고 신학적으로는 정통주의 일색이다. 그들은 서울에 새로 된 다른 조선신학교에 대하여 『지지』보다도 『감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것이 『신신학』파의 책동이나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경기노회는 어떠한가? 교권쟁탈의 첨단적인 책사들이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문제에 있어서는 유동적이어서 『대구』의 기류와는 같지 않았다.

경기에서의 두목은 『전필순』이었고, 『최석주』 유재한[8] 등 목사가 『에이드』로 일하는 것이었다. 『교권쟁탈』이란 서북교권을 기호교권에로 교체하자는 것이다.

전필순은 벌써부터 똘똘뭉친 자기 그룹을 만들어 갖고 있었다. 서울 안에 서북세력을 『체제화』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정인과(당시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 뿔럭[9]에 대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도 생각된다. 사실 그들은 이전에 신흥우 씨 중심으로 『적극신앙단』을 조직하여 한번 도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정인과를 지지하는 절대적인 서북세력 앞에서 참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의 전필순 그룹은 그 그루터기라 하겠다.

이 전필순 그룹에는 서울 근방의 감리교 목사들도 얼마 가담해 있었다. 감리교 안에도 같은 남ㆍ북 세력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전필순은 나를 찾아왔다. 자기 집에서 저녁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부인 차사백[10] 여사도 지면있는 분이었기에 인사도 할겸 잘되었다고 동행했다. 댁에 들어가니 전씨 그룹이 다 모여 있었다. 나는 그게 『그룹멤버』인줄은 몰랐었지만 몇 마디 대화에서 곧 알게 되었다. 감리교 목사들도 섞여 있었다. 다 아는 친구들이다. 얼마 이야기 하다가 선약이 있다고 나와 버렸다. 전필순은 나를 배웅하면서 나도 그 그룹에 들라고 권한다.

『모두 내 아는 친구니 얼마든지 가까이 지낼 수는 있지만 『그룹에』 들 생각은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 후에도 자주 모이는 모양이었으나 내게 알리는 일은 없었다.

멀리하면 방해할 것이고 가까이하면 『서울화』 할 것 같아서 나는 신중을 기했다. 서울은 일종의 소용돌이였다고 할까. 그래서 나는 『서울』에서는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관계를 갖기도 했다.

전필순은 이런 말도 했다. 『교회에도 정치가 있는 것이고 정치는 권력을 노리는 것이 사실인만큼 교권쟁취 운동이 교회 총회나 기관에 없을 수는 없다. 그런데 평안도 교권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충동적인 요소가 다분히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경도가 교권을 잡으면 큰일이다. 그들은 한 번 잡으면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의지적이기 때문에 걸머쥐면 뺏기 어렵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나는 듣고만 있었다. 나도 함경도내긴데 무슨 정치적 포석으로 그런 말을 내게 했는지 지금도 판단이 분명해지지 않는다. 일종의 『예방전쟁』 통고였는지 기상측정 『발룬』이었는지 알숭달숭[11]하다.

서울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형편을 보아 대처하기로 하겠지만 『대구』의 굳어진 『정통』 아성에는 어떻게 접근하며 어떻게 극복하고 그들을 조선신학교 지지 세력에 가산할 수 있을까?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었다.

통틀어 서울 세력을 『좌』라 하고 대구 세력을 『우』라 한다면 좌(左)가 지배적인 경우 총회분열의 우려가 짙어진다.

우(右)가 극성부릴 경우 평양신학의 홍수 때문에 조선신학이 익사(溺死)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나는 당분간 발톱을 감추고 날개 펴 하늘에 떠 있는 그러나 그 눈은 숲속의 토끼까지도 놓치지 않는 『독수리』가 되려고 마음먹었다.



[각주]
1. 윤원삼(尹愿三, 1885~?) - 장로교 장로. 독립운동가. 1885년 3월 3일 평남 평양부 상수리에서 출생. 1911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8회)하였다. 이후 상업에 종사하면서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로 시무하던 중,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는 더욱 독립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평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그해 4월 석방되어 상해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의 교통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0년대 귀국하여 장대현교회 장로로 계속 시무하였다. ↩
2. 통매(痛罵) - 몹시 꾸짖음 ↩
3. 묵허(默許) - 잠자코 내버려두고 슬그머니 허락함 ↩
4. 막후(幕後) – 겉으로 들어나지 않은 이면의 장소 ↩
5. 암약(暗約) – 떳떳하지 못한 약속을 남몰래 함 ↩
6. 오건영(吳建永, 1882~1961) - 장로교 목사, 교육가. 호는 청구(靑丘). 1882년 8월 4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문촌리(文村里)에서 오필선의 장남으로 출생.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1904년 대한제국 전보국양성소를 졸업하였다. 졸업후 우정국 전보주사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1908년 승동교회의 박승봉 장로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전보주사직을 내놓고 평양 대성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에 3학년을 수료하였으며,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다. 1913년 경충노회의 추천을 얻어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재학중 중국에 다년간 머문 적이 있어 졸업은 1923년에야 할 수 있었다(17회). 졸업한 그해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경충노회 순회목사가 되었으며 동시에 안성읍, 김양, 방축리, 아옥교회 당회장으로 시무하였다. 1924년 장로회 총회에서 경충노회가 경기, 충청 2개 노회로 분립할 것을 결의함에 따라 그해 12월 29일 안동교회에서 경기노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때 그가 초대 노회장에 선출되었다. 1926년경 경신학교 교목으로 부임하여 2년간 학생들의 신앙을 지도하였으며 1929년 다시 목회 일선으로 돌아와 서울의 용산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직하면서 동시에 왕십리교회, 잠실교회, 동막교회(마포)도 담임하였다. 1938년 12월 김익두 목사 후임으로 승동교회 제9대 목사로 전임하였다. 그는 이곳에 시무하는 동안 태화유치원을 설립하였으며 김대현 장로를 권면하여 조선신학교 설립자금을 기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일본 유학생 독립운동이 일경에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체포될 때 이 사건에 연루되어 그도 체포되었고 1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사상범으로 감시를 받게 되자 1942년 11월 승동교회를 사임하고 향리인 원삼면 문촌리로 내려 갔다. 그곳에서 8ㆍ15 해방을 맞아 용인군 자치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해방후의 혼란된 사회를 정돈하였으며 계속 용인군 원삼면장으로 선임되어 2년간 봉직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서울 YMCA 종교부 총무가 되었으며 미군정하의 경제대책위원회 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50년 6ㆍ25사변이 나자 부산으로 피난하였으며 수복후 원삼으로 돌아와 원삼고등공민학교(현 원삼중학교)를 설립하여 불우한 청소년들을 모아 교육시켰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이 학교를 국가에 헌납, 공립중학교로 발전시켰다. 말년에는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1961년 1월 29일에 문촌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유족으로 양자 오진근이 있다. ↩
7. 파지(把持) - 물건을 꽉 움켜쥠 ↩
8. 유재한(劉載漢, 1901~1963) - 장로교 목사. 경기도 출신. 1939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34회)하였다. 경기도 김포군 양평교회 조사 및 장로를 거쳐 동막교회 장로로 시무했으며 1933년 8월에 연동교회 흥신회의 초청으로 청년교역자로 부임하였다. 1934년 1월부터 이 교회에서 장로이임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해 가을부터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닦이 시작했으며 신학교 졸업후 목사안수를 받고 양평교회 등지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61년 총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1963년 4월 25일 별세하였다. 그의 장녀 유정순은 연동교회 권사이고 그의 사위 진영득은 연동교회 장로로 시무하였다. ↩
9. 블록(bloc) - 정치나 경제상의 목적으로 형성된 국가나 단체의 집합 ↩
10. 차사백(車士百, 1897~1990) -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 전필순 목사의 부인. 해주보통학교와 의정여학교,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하였다. 3ㆍ1운동 당시 해주 의정여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3ㆍ1운동 후 차사백은 일본에 유학(1921)하여 오사카에 있는 램버드여자학원 사범과를 졸업(1923)했으며 귀국 후 중앙교회 안에 설립된 중앙유치원 교사 및 중앙보육학원(중앙대학 전신) 교수로 봉직하였다. 그리고 서울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2대 회장에 선출(1925)되기도 했으며, 근우회 창립부터 깊이 관여하였다. 근우회 해산(1929) 이후 여자기독교청년회 4대 회장,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등으로 활약했고, 장로교 목사였던 전필순과 결혼한 후 남편의 목회를 도왔다. 해방 후 무학여고 교장,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 이사로 활약했으며 연동교회(예장 통합) 명예권사로 추대(1969)되었다. ↩
11. 알숭달숭 – 작고 분명한 점이나 무늬 따위가 촘촘하게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

[범용기 제1권] (97) 조선신학원 발족 - 김대현 장로님

2월 22, 2026
[범용기 제1권] (97) 조선신학원 발족 - 김대현 장로님

김대현 장로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청년 때 승동교회에서 예수를 믿었고 거기 나갔고 그 교회 김영구 목사님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니까 『승동』이 내 모교회다. 김대현 장로님은 승동교회 시무장로로서 우리 또래 학생반 주일학교를 가르치셨다. 노인이시라 세대차 어쩔 수 없었지만 시골 어른의 중후한 풍모는 인상적이었다. 경북 영일 출신으로서 자수성가하여 거부가 된 일도 있었지만 파산도 몇 번 겪었단다.

폐광된 금광을 염가로 얻어, 엉뚱하게 새 금맥을 발견, 당장에 또 거부가 되기도 했다.

그의 둘째 자제 『영환』은 내 막역한 친구였기에 내가 미국 갈 때 여권 수속에 필요한 재정보증도 김 장로님이 서 주셨다. 물론 서류상 『형식』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유사시에는 재정적으로 책임추궁이 따르는 것이어서 『결단』을 요하는 일이었다.

나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종묘 담장 옆에 있는 장로님댁부터 먼저 찾아 인사드렸다. 그후 나는 평양 3년, 간도 3년을 지내고 다시 그가 경영하는 사업에 봉사하려고 서울에 온 것이다. 그는 천식증이 심했다.

그는 재산을 정리했다. 아들 두 분과 맏아들, 전실 소생인 맏손자, 그리고 사모님과 장로님 자신, 이렇게 다섯으로 나누어 자기 몫은 몽땅 신학교 기금으로 헌금하신 것이다. 그것이 그때 돈 50만원 그 당시 미화시세로 25만 불이었다. 그러나 부동산이 대부분이어서 당장 필요한 10만원을 내놓으셨다. 그것이 우리 조선신학원 경상비가 되는 것이다. 맏아드님 『영철』 장로가 재단 회계이였다.

조선신학교 설립운동이 태동할 무렵 한국교회 여론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말하자면 선교사파(필자가 편의상 붙인 이름)와 조선교회파랄까.

전자는 선교사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학교를 폐문하고 돌아갔으니 우리도 그 뒤를 따르자는 주장이었다. 평양신학교 재개 또는 서울에서의 새 신학교 설립 등등은 모두 선교사에 대한 배신행위요 우상숭배에 굴종하는 『배교』 행위라는 것이었다. 유명한 부흥사 김익두 목사가 그 선봉이었다고 들었다.

조선교파?(이것도 필자가 붙인 가칭)란 것은 선교사 시대는 지났고 잘되든 못되든 조선교회는 조선사람 손으로 운영 추진 건설해야 한다는 분들이다. 물론 후자가 절대다수였다.

그러나 그 지도 이념에 있어서는 반드시 일치된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될수 있는대로 또는 거의 전적으로 선교사 전통을 답습하자는 대다수 서북교회 지도자들과 이남의 동조자들 그리고 다른 하나로는 이 시기에 일약 세계교회의 신학적 방향과 수준에로 도약하자는 서울 이남의 신진 『엘리트』 그룹이었다. 그런 지도 이념 차이는 『조선교회파』 자체 안에서도 현저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내가 김대현 장로님을 산장에 예방했을 때 장로는 꽤 많은 서한을 내놓으시며 답장해 달라고 하셨다.

그것은 거의 전부가 김 장로님의 새 신학교 설립을 공격하는 편지들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교사에 대한 배신이며 조선교회의 순수한 신앙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공박이었다.

나는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무어라고 회답하랍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묵묵히 계시다가 전도서 3:1 이하의 구절을 펴셨다. 『천하만사가 기한이 있고 때가 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그는 내게 재미있는 암시를 주신다고 느꼈다. 선교사 때와 지금의 때가 같지 않으니 때를 따라 헐기도 하고 새로 세우기도 해야 하나님의 새 경륜이 이루어질 것이 아니냐? 평양신학교를 헐어야 하겠고 조선신학교는 세워야 한다는 『때』의 요청에 내가 응답한 것뿐이다. … 이런 의미가 그분의 의도인 것으로 짐작되었다. 나는 『알겠습니다』 하고 편지 회답들을 대필했다.

김재준의 첫 글, “이혼하려는 형님네에게”

離姻[이혼]하려는 兄[형]님네에게 학생계 잡지에 실린 글 장공 김재준은 자신의 회고록인 『범용기』 제1권에 자신의 이름으로 공개한 첫 글을 소개하고 있다. 학생계 잡지에 투고한 “離姻[이혼]하려는 兄[형]님네에게”라는 제목의 글이다. 당시 순위는 ‘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