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빈 선생과의 인연
3ㆍ1 독립운동에서의 「피」의 댓가로 위선[1] 『제등총독』의 『문화정치』가 선언되었다. 그것이 사탕발림의 회유정책이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사회』에서는 『민족주의』가 어였하게 외쳐지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한국말 일간신문이 발간되고 『개벽』 잡지가 나오고 공개강연, 학생토론회 같은 것도 비교적 자유롭게 열리게 되었다.
그때 백부님은 할빈에서 서울에 돌아와 한성도서주식회사를 경영하시면서 각종 도서 출판과 아울러 『서울』, 『학생계』 두 월간지도 내셨다. 『서울』은 장도빈 선생이 주간으로 계셨다.
장도빈 선생은 한말 지사로서 『국사』 전공이시고 한말의 언론인으로 저명하신 분이었으나 현실과 꿈이 맞지 않았으며 맞게 할 만큼 사무적인 분도 아니었다.
『서울』이 재정난과 당국의 간섭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장 선생은 『조선지광』(조선의 빛)이라는 단독잡지를 창간하였다.
그는 나더러 심부름을 하라 하셨다. 한 달에 20원씩 주마하신다. 그때 하숙비가 16원이었으니 밥은 굶잖을 것 같아서 그러기로 했다.
『조선지광』[2]은 꽤 부피있는 월간 잡지로써 글솜씨가 아무리 좋아도 혼자서 다 메꾸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장 선생은 여기저기 『글 부탁』을 하신다. 장 선생의 청탁 편지와 함께 내가 뛰기 마련이다. 덕분에 『허헌』[3] 씨 댁에도 몇 번 갔었다. 몇 자 안되는 원고였지만 약속기일에 되는 일은 없었다.
장 선생 댁에 몇 번 찾아가 봤지만 추위가 한창인데 방 안에 불기는 체온 이하라, 밖앝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장 선생님은 재만 소복한 놋화로에 콩알만한 불씨를 심어놓고 언 손을 비비고 계셨다. 간혹 바늘 같은 윗수염에 손이 가기도 했다. 원고지도 없어서 소학교에 다니는 따님의 도화지 뒷등에 연필로 쓰다가 신문지 귀등[4]에 적기도 하셨다. 그야말로 서발 장대를 마구 휘둘러도 거칠데 없는[5] 선비집이었다. 그러니 내게 약속한 이십 원 월급이 나올 까닭은 없겠고 따라서 매달 십륙 원씩의 하숙집 밥값도 밀릴때로 밀린다.
내복도 외투도 없는 단벌 학생복에 눈길 눈보라와 맞서 도보로 아현고개를 넘고, 애기능 언덕을 오르내려 『연희전문』에 간다. 백낙준[6] 박사의 약속한 원고를 가지러 가는 것이다.
그때 백 박사는 미국서 갓 돌아온 이글이글 타는 청춘이었다. 연전 문과에서 강의하시는 모양인데 원고기일 같은 것은 기억에도 없으신 모양이었다. 나는 세 번 네 번 허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원고수집, 편집, 인쇄에 넘기는 것, 교정(마감교정은 장 선생님이 손수 보셨지만), 서점배본, 월말 『수금』 등등 모두 나 혼자서의 독무대였다.
결국 『페지』 수를 줄이면서 3호까진가 내다 말았다.[7] 한 달에 20원씩 주신다던 것도 그럭저럭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