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꼴집
둘레가 40마일 쯤 되는 분지에 산맥이 둘러쌌으니 어디를 보나 『산』의 능선이 하늘을 만진다. 그 안에 여섯 부락이 있는데 송상동, 귀락동, 회암동, 농경동, 삼봉동, 그리고 오봉동이다. 지금은 『아오지로 통일됐다.』
내가 나서 자란 동네는 오봉동의 일부인 『창꼴』 즉 창동이다. 그래서 집 이름도 『창꼴집』으로 되 있다. 누가 일부러 지은 이름이 아니라, 집안에서 저절로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 이조 때에 『비축미』 창고가 바로 우리 집 옆에 있었기에 그 동네를 창꼴이라 하고 우리 집은 『창꼴집』이라 했단다. 나는 『창고』를 본 일이 없다. 밭 가운데 두드러기처럼 불룩한 데가 보일 뿐 - 그것이 창고 터였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노성』 봉우리가 흘러내리다가 『아차, 너무 내려왔구나!』 하고 돌아 앉은, 집 한 채만을 위한 『명당』자리라고 한다. 동서남을 향했기에 햇빛은 남아돌아간다. 집 구조는 여기로 말한다면 똑 같은 크기의 침실 넷, 침실 둘만큼 큰 부억칸, 거기 이어 집새칸(소먹이 써는데) 방앗간(여인들이 발로 찧은 방아), 외양간 등등이 벽으로 가로 질린 한 채로 된 건물이다. 서재는 서쪽에 딴 건물로 됐는데 『봉계정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한 채로 된 기와집이지만 서재는 초가집이고 거기에도 부엌, 베 짜는 방, 널판지 두는 방, 곡식 저장소 등등이 붙어 있다.
집 앞면은 물푸레 가지나 싸리로 엮은 『바재』(울타리)로 둘렀고 농기구, 우차[1] 등속[2]을 넣는 고깐이 따로 『바재』 옆에 서 있다. 집에서 이십 핏(feet) 정도 산 밑에, 스무 자 깊이에서 솟는 샘물이 있어 우물이 맑다. 집터 주위에 자연스레 펼쳐진 『터 밭』이 만 평쯤 한 필로 되어 있고 그 가장자리는 절벽이 되었고 그 절벽 밑은 흰 돌, 푸른 돌이 되는대로 깔린 냇가, 시냇물이 맑게 흐른다. 그 시냇 벌판에는 개버들이 밀림을 이루어 여름철 꾀꼬리 노래가 시끄러울 정도다. 집 처마 끝에는 의례 제비둥이[3]가 있어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와 옛집을 수리하고 새끼를 길러 날린다. 고지낙한 밤이면 앞뒷산에서 접동새 울음이 구슬프다. 산비들기[4], 부엉이가 『뻬스』[5]라면 꿩은 『테너』랄까, 어쨌든 심심찮은 자연의 『향연』[6]이었다.
뒷산 꼭대기에는 『누성』(老城)이라는 한 옛날 『성채』(Citadel) 터가 있다. 앞면은 집덤이 같은 바위가 와락 무너져 길이 없고, 길을 낼 수도 없다. 그러나 주위는 넓은 초장이 무연하고 물기가 축축해서 동네 소들은 모두 거기서 한나절 풀을 핥으며 지낸다. 성채 및 가장자리에는 붓꽃이 수북하게 피었다. 뒷면에는 『성』에까지 오솔길이 늘여져 있다. 힘든달 것 없이 발을 옮기면 정상이다. 두리뭉수룩하고 샘터도 있고 성터도 약간 남아 있다. 거기에 노갑(老甲)이란 장군이 살았었고 앞면 바위들은 노갑 장군 부인이 치마자락에 담아다 팽개친 거라고 촌늙은이들이 전설을 일러주곤 했다.
두만강 가 여섯 고을은 땅 속이 온통 석탄이라니까 어느 태곳적에 어마어마한 지변(地變)이 있었던 것은 상상할 수 있겠다. 노성 주변 뙤밭에도 화석된 나무등거리가 널려 있다. 보기에는 나무토막 그대론데 들려며는 천근 무게다. 진짜 돌이다.
우리 집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것은 『송상이』 즉 『송진산』[7]이다. 푸른 능선이 하늘을 스쳐 달린다. 제일 높은 봉우리가 가마솥 엎어 놓은 모습인데 거기에 두 뿔이 마주 서 있다. 서쪽에 경흥과 경원[8] 두 고을의 『진산』인 탑향산(속칭 탑고개)이 있다. 생김새는 송진산과 비슷하나 뿔이 없다. 둘 다 장중한 『포오즈』다.
산은 인간과 생명으로 통한다는 것이 『풍수』 신앙이다. 노성은 가까운 동네의 『성역』이어서 거기가 『명당』이라고 어느 족속이 『암장』 즉 조상의 뼈를 몰래 묻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큰일 난다. 장마나 가뭄이 심하다든가 무슨 재난이나 유행병이 생기면 어른들은 우선 『노성』부터 점검한다. 누가 『성역』을 더럽히지나 않았나 해서다. 창꼴집 옆 골짜기에 유난히 늙은 버드나무가 있다. 그것도 소위 『용왕나무』여서 『성목』이다. 『제액』을 위한 『방도』로 헝겁[9] 조각을 매달기 외에는 거의 『불가촉』이다. 건드리면 탈이 난다는 것이다. 송진산이나 탑향산은 『성역』이랄 것은 없으나 『영산』[10]이어서 감히 정복했다거나 정복하려고 했다는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신령한 푸른 능선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으로 족해한다. 소낙비에 몸 씻는 맑은 푸르름, 흰구름이 신부의 면사포처럼 살짝 가리운 산기슭, 그리고 구름 위에 처든 머리의 드높음 - 이런 것이 내 어릴 때 몸에 밴, 과장 아닌, 산의 신비였다.
송진산이나 탑향산 기슭까지 드문드문 인가가 몇 호 있기는 하지만 『화전민』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집 형님은 한 해에 한 번씩 송진산 기슭에서 피나무 껍질을 벗겨다가 소고삐를 꼰다. 섬유가 질겨서 노한 황소도 끊기 힘들다. 소들은 열 발쯤 되는 이 고삐에 매여 왼 종일 뙤약볕에 쪼이며 물 한 모금 못 마시는 일도 있다. 저녁 때 고삐를 풀면 쏜살같이 뛰어 앞 시내에서 샘물에 주둥이를 박고 무한정 샘물을 들이킨다. 뚱뚱해진다. 풀 묶음을 몇 단 썰어 먹이면 그것으로 소들은 행복하다. 이튿날 다시 풀밭으로 끌려간다. 이것이 『소팔자』다. 그 대신 소는 못 고칠 병에라도 걸리지 않는 한, 잡아먹지는 않는다. 돼지와 닭만이 먹히기 위한 가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