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02] 마가복음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02] 마가복음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마가복음 16:1-8] 이미 굴러져 있었다 – 1998년 4월 12일, 김상근 목사

9월 20, 2026

이미 굴러져 있었다.

마가복음 16장 1-8절 / 연세대 대학교회 / 1998년 4월 12일


[회상 노트]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어떻게 하여 얻은 국정 경영의 기회인가? 우리가 함께 척결하고 세우고자 했던 일을 위해서 모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거들고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새 ‘한 자리’ 때문에 맘들이 상하기 시작했다. 참여의지일 수도 있겠으나 논공행상 기대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 해 초부터 대한기독교서회 사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저 나의 자리는 역시 교회라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루어 냈으니 이제 교회에 묻히자 했었다. 행여 무슨 일이라도 맡게 되면 그동안 함께 일해 왔던 동지들의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게 될 것 같았다. 조심스러웠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어느새 실망이 쌓이고 있었다. 우리가 줄곧 요구해 왔던 이른바 양심수 석방,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의 철폐, 민주화운동을 한 연유로 파멸에 이르게 된 이들에 대한 명예 회복 등 새 세상을 향한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아니. 이루어 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초조함이 번지기 시작했다.

연세대 대학교회에서 부활주일 설교를 해 달라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다른 교회에 비해 학생이 많은 교회다. 교수와 교직원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에게는 맞지 않는 설교였던 것 같다. 내 설교는 역시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은 부활주일 아침이다. 여러분께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넘치기를 바란다. 예수의 부활이 주는 감격과 기쁨, 용기와 감사가 우리 사이에 넘쳐나기를 기도한다.

나는 지금 부활절 아침에 드릴 수 있는 인사로 설교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인사가 여기 누구 한 분의 가슴에도 뭉클하게 가 닿지 못했을 것이다. 퍽 의례적인 말로 들렸을 뿐일 것이다. 부활절 아침인데 감격이 없고 기쁨이 없다. 어떤 용기 같은 것이 용솟아 오르는 것도 아니다. 특별한 감사의 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렇다는 말씀이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은가? 이날 아침 감격이 있는가? 기쁨, 용기, 감사가 있는가?

그렇다. 예수의 부활의 소식은 원래 기쁜 것이 아니었다. 두려운 것이었다. 감격이 아니었다. 벌벌 떨리는 것이었다. 넋이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부활에 직면한 처음 사람은 그랬다. 오늘 성서 본문은 그렇게 전하고 있다.

“그들은 뛰쳐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 하였다”(막 16:8).

이것이 예수의 부활에 맞닥뜨린 처음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기쁨이니 감격이니 용기니 감사니 하는 것은 그들 반응의 어디에도 없다. 그런 흔적조차 없다. 그것은 부활에 대한 ‘교리’에서 배운 기쁨, 감격, 용기, 감사가 아닐까? 교리에는 생명이 없다. 부활은 생명이다. 부활은 살아있는 것이다. 움직인다. 우리에게 부딪혀 오는 것이다.

이 날 아침, 나처럼 여러분도 역시 감격과 기쁨과 용기와 감사의 정이 출렁이지 않는가?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도망가지 않는다. 떨리지도 않는다. 넋이 나가지도 않는다. 우리는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예수의 부활 사건에 맞닥뜨린 여인들이 반응했던 반응이 우리에겐 왜 없는 것일까? 오히려 이것이 문제일 것이다.

오늘날 예수의 고난 - 십자가도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이 아니지만 더구나 부활은 우리에게 무의미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글쎄 죽음 후를 보장해 주는 보험 같은 것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이가 많아 생을 마감할 즈음에 이른 분들에게나 중요하게 된 것이 아닐까?

예수의 부활과 맞닥뜨린 여인들의 반응과 우리의 반응은 너무나 반대인 것은 왜일까? 우리는 그 실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임을 당한 예수를 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 처절하게 처형당한 예수, 사형당한 예수의 무덤을 찾아가지 않는다.

여러분! 이 날 우리 함께 그의 무덤을 찾아가자. 그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의 무덤을 찾아내자. 저 여인들처럼 예수의 무덤을 먼저 찾아가야 한다. 부활을 노래하기 전에 먼저 무덤을 찾아가야 한다.

그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그 무덤은 놀랍게도 ‘나’다. 나에게도 한때 예수의 삶이 꿈틀거렸을 때가 있지 않았던가? 사랑도 있었고, 의분도 있었고, 희생도 있었지 않았던가? 나눔도 있었고 순결도 있었고 눈물도 있지 않았던가? 정의도 있었고 자유의 혼도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 예수를 죽여 묻은 무덤이 아닌가? 무덤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어느새 예수를 큰 돌로 막아 버렸다.

이 날 아침 예수의 무덤을 찾아가자. 그러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을 굴려내 주겠는가? 자신이 없다. 그러나 하여간 무덤으로 가자. ‘나’라는 무덤 안에 죽임을 당한 예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다른 무덤이 있다. 1998년 오늘, 예수의 무덤은 ‘여기’이다. 한국의 ‘교회’다. 여기가 예수의 무덤이다. 예수는 여기에 죽임을 당해 묻혀 있다. 예수는 이 땅의 무지랭이들을 온갖 굴레에서 끌어냈다. 문화의 눈을 뜨게 했다. 병든 자를 치유했다. 배우지 못한 자에게 배움을 주었다. 청빈을 가르치고 나눔을 실천했다. 젊은이를 껴안고 사랑하고 키워냈다. 독재와 싸우고 민족의 화해를 추구했다.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정의를 예언했다. 예수는 우리 가운데 살아 있었다. 그 예수가 지금 어디에도 없다. 그 예수를 묻은 무덤만이 있을 뿐이다. 지나친 판단인가?

무지랭이들은 참다운 해방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어떤가? 여기가 어느새 무덤이다. 돈 있는 자에게 안식을 준다. 여기가 무덤이다. 머리 좋고 돈 있는 자만을 가르친다. 청빈과 나눔은 오래 전에 증발해 버렸다. 여기가 무덤이다. 정의를 향한 전선이 없어졌다. 민

족의 화해도 돈의 크기에 끌려 다닌다. 여기가 무덤이다. 어떤 불이익도 거부한다. 십자가는 도금되어 빛나는 장식이 되었다. 여기가 무덤이다. 오히려 사회의 지탄을 받는다. 세속보다 더 타락했다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여기가 무덤이다. 그렇다. 여기가 무덤이다.

이 날, 부활을 찬양하는 이 날, 우리는 한국 교회 무덤을 찾아 나서자. 그것이 이미 무덤이지만 여기에 죽임을 당한 예수의 주검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 아닌가! 이 무덤, 굳어져 버린 것 아닌가! 결코 무덤을 열 수 없을 것이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굴려내 줄 것인가?”

그러나 무덤으로 가자. 오늘은 이레의 첫날이다. 향료라도 챙겨 무덤으로 가자. 여기에 예수의 주검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날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말씀은 무엇인가?

“그런데 눈을 들어서 보니, 그 돌덩이는 이미 굴러져 있었다. 그 돌은 엄청나게 컸다.”

이것이 이 날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가르치심이다. 이미 모든

것은 끝났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이미 무덤이 되어버렸다고 나를 포기하지 말라. ‘교회’는 이제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하지 말라. 그것은 무덤의 돌을 굴릴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눈을 들어 보자. 그 돌덩이는 이미 굴러져 있다. 엄청나게 컸지만 이미 굴러져 있다.

주저하지 말자. 무덤으로 가자. 가 보면 돌은 이미 굴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면 예수는 내 속에 주검으로 누워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무덤에 가 보면, 교회라는 무덤에 이미 예수의 주검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의 부활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빈 무덤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만, 그는살아나셨습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 이르십시오. 그는(그들보다) 앞서서 갈릴리로 가십니다.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십시오.”

여러분, 어떻게 하겠는가? 예수는 ‘나’의 무덤 속에 주검으로 있지 않다. 살아나셨다. 살아나셨을 뿐 아니라 갈릴리로 앞서서 가신다고 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는 거기 갈릴리에서 볼 것이라고 하신다.

여러분, 이 말은 우리도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이다. 예수의 부활을 그저 기뻐할 수 없게 하는 원인이다. 갈릴리로 다시 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떨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부활의 메시지다. 안 가면 부활은 없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수 없다.

여러분, 이 아침, 기도하자. 갈릴리로 가겠사오니 도와주십사고 기도드리자. 부활의 예수를 만나자면 갈릴리로 가야 한다는 것, 우리가 만든 무덤은 이미 비었다는 것을 알리자. 무덤의 돌은 이미 굴러졌다고, 무덤은 이미 비었다고, 부활하신 예수는 갈릴리에 계시다고 알리자.

여러분, 두려운가? 떨리지 않는가? 무섭지 않는가? 지금 차라리 뛰쳐나가야 하겠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렇다. 처음 여인들도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말하고 증언했다. 그럼으로써 부활의 종교를 열어 냈다.

감격이 없어도 좋다. 그러나 지금 무덤 속을 보자. 기쁨이 없어도 좋다. 그러나 지금 빈 무덤을 보자. 감사가 없어도 좋다. 그러나 흰옷 입은 청년의 말을 듣자. 용기가 없어도 좋다. 갈릴리로 가자는 말을 기어코 뱉어 낼 것이라고 다짐하자. 이것이 부활의 축복이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님의 부활의 축복이 넘치기를 이제 다시 기도하자.

[마가복음 8:27-33] 예수는 교회를 세우신 일이 없다 – 1997년 6월 8일, 김상근 목사

9월 20, 2026

예수는 교회를 세우신 일이 없다 

마가복음 8장 27-33절 / 낙산교회


[회상 노트] ☞ 바로가기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예수는 ‘교회’를 설교한 적이 없다. 예수의 가르침 어디에도 ‘교회’ 중심적인 사고는 없다. 예수의 가르치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것이 예수의 중심 화두였다. 공관복음서는 똑같이 예수의 첫 설교의 테마가 ‘하나님의 나라’였다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역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다. ‘다스림’, ‘지배’, ‘통치’라는 개념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실 때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으라’, 이렇게 바꾸어 놓으면 전혀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통치를 수용하는 것이다.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즉시, 또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외에 더 필요한 것은 없다.

하나님의 통치를 가르치시고 또 통치적 현실을 몸소 실현하던 예수를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으로, 엘리야로, 또는 예언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드로의 판단은 달랐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확신하였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중요한 두 가지를 담고 있다. 그 하나는 고난의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통치란 수난을 통하여 현실화된다. 강제와 강압과 독재가 아니다. 스스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그 고난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고백자의 결단이다. 베드로는 놀랍게도 수난의 그리스도, 나아가 그를 따르겠다고 고백한 것이다.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은 이 둘을 포함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여기에 다른 것을 첨언했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스도 고백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중요한 고백이 되고 있다. 바로 이 중심적 고백과 “교회를 세우겠다.” 하신 말씀이 연계되어 있다.

여기에 얽힘이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했는데 결과된 것은 ‘교회’이며, 그 교회는 수난의 삶을 거부한다는 모순이 얽혀 있다. 이 말씀의 중심은 수난의 그리스도다. ‘교회’가 아니다. 이 반석 위에다가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은 수난의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바로 이 고백 위에다가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교회’ 의 본질은 ‘수난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교회’라 할 수 없다.

그런데 베드로의 고백에 이어 예수께서 자기가 당할 고난과 배척과 죽임을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동의하지 않았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베드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되 수난 받지 않는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 교회의 한계를 보게 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실현하며, 고난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베드로는 수난을 거부한다. 이것이 현실 교회다. 아니, 현실 교회의 한계라고 규정하기에 앞서, 예수가 그러한 교회를 세우려 하셨던 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대목은 오로지 마태복음에만 있다. 예수께서 ‘교회’를 언급하셨다는 대목은 16장 18절과 18장 17절 두 곳뿐이다. 예수에게는 ‘교회’ 개념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는데 나타난 것은 교회”(Alfred Loisy)다. 그렇다. 예수의 관심은 하나님 의 나라다. ‘교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관심은 전적으로 교회다. 한국 교회 설교의 중심은 교회를 강고하게 하라는 데 집중되어 있다. 교회 중심적이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통치를 수용하기 위한 몸부림보다 가시적인 교회 확장에 더 열성적이다.

낙산교회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우리는 다른가? 우리도 교회 지향적이다. 다만 이른바 대형 교회, 재벌 문화적인 교회, 관료화되고 계급화된 교회, 자체 조직에의 복무를 강제하는 교회를 지양하자고 했을 것이다. 부드럽게 표현하여 지양이지, 사실은 거부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내면적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를 결속시키고 조직화시키는 그 어떤 것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미미한 갈등도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딱히 대형 교회는 아니더라도, 딱히 재벌 문화 교회는 아닐지라도, 계급적 교회는 아닐지라도, 교회를 위한 교회는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있는 허술함, 이 허술함을 보강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겠다는 갈증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는 무교회주의 신앙자들이 세운 교회다. 무교회를 지향해 왔는데 결과는 교회가 된 것이다. 무교회로는 무교회적 신앙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래서 무교회주의 신앙을 유산으로 받은 교회로 귀착했다.

교회를 거부하지만 교회로 가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를 거부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교회의 직제나 성직자의 권위나 교회의 구속을 거부하는 것이다. 옳은 일이다. 도대체 예수께서 오늘과 같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다. 오늘과 같은 교회를 세워 무엇을 하시겠다고 죽임까지 당하셨겠는가? 성직자의 거들먹거림, 재벌화되는 교회, 기업화된 교회, 철저한 자본주의에 지배당하는 교회를 탈출해야 한다. 예수는 교회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추종자들은 결국 교회를 조직한다. 우리도 교회를 지향한다. 무교회! 교회를 거부했던 사람들도 교회를 세웠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나 자신을 특화하고자 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너와 다르다는 차별성을 가지고자 한다는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즉시 집단화한다. 유유상종이다. 유대인들의 게토가 그 대표적인 예다. 교회란 특수 집단이다. 교인들에게는 선민의식이 있다.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이 그 뿌리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민의식을 가졌던 것처럼 교회도 특수한 집단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구약성서나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복음서까지도 특수 집단의 구원의 틀이라는 의식을 담고 있다. ‘좀 다른 사람들’의 집단이어야 한다는 의식이다. 바리새인들도, 에세네파들도 그런 의식을 가졌고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그랬다. 그래서 교회가 생긴 것이다.

교회는 차별적 집단임을 자처한다.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이 구원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 ‘다름’을 보장하고 있다는 데까지는 이르게 된다. 그래서 교회에 속하라 하고 또 교회에 속하고자 한다. 교회란 근본적으로 다름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집단체가 되어 버렸다. 너와 차별되는 나들의 집단이 된 것이다. 죄인이 아닌 의인들이다. 교회라는 공간에 들어오면 그 즉시 그를 ‘성도’라고 부른다. 차별이다. 이런 인센티브를 줌으로써 교회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차별적 집단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예수는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다. 다르다 하는 그들이 구별하는 사람들을 예수는 배척하지 않았다. 이것이 예수의 스캔들이 되었지만 예수는 그랬다. 의롭고 경건하고 순수하다 하는 사람들을 모으려 하지 않았다. 차별적인 사람들이 모인 모임을 교회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차별적인 사람들의 집합일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렇다. 차별화되어야 한다. 그 차별화의 내용이 더 중요하다.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고백이 앞서 있다는 점에서 차별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고백은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고 그것의 실현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고백은 수난의 그리스도 고백이다. 그리스도 고백은 그 그리스도의 수난을 이어가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수난자 예수 그리스도, 고난에의 동참이 신앙의 핵심이다. 이 신앙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 요청에 부응하는 집단을 교회라 해야 할 것이다.

낙산교회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서 다름을 말하지 말자. 훨씬 다른 사람들의 집단임을 자랑하지 말자. 어느 교회나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하자. 교회에 집중하지 말자. 수난의 종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교회가 지향하는 바는 아니다. 수난의 종, 그가 남기신 고난을 이어가자고 결단하자. 교회를 해보자는 것은 아니다. 낙산교회는 오늘,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수난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이어내는 교회로 서자. 낙산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일 것이다.

[마가복음 1:40-45] 차별의 세계에 통합을 – 1997년 5월 4일, 김상근 목사

9월 20, 2026

차별의 세계에 통합을

마가복음 1장 40-45절 / 수도교회


[회상 노트] ☞ 바로가기


[슬라이드]














[말씀을 향한 물음]

주일이니까 예배에 나오셨겠지만 오늘은 장애인주일이다. 장애인이 우리 가정에 없는 것을 감사할 것인가? 우리의 의식과 문화와 사회 시설이 모조리 장애우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장애우와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다. 예수님의 기본 정신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사다. 예수님께서는 장애우를 어찌 대하셨을까? 주시는 성서 말씀에 귀를 모읍시다.


[설교 전문]


우리 수미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일하는 것을 여러분 모두가 알고 계신다. 장애우들을 위해 혹은 그들과 함께 일하는 비장애인들 중에 장애우와 결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수미에게 장애인을 경계하는 경계심이 없어진 것도 언제부터인지 감지할 수가 있었다. 내게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놈이 어느날 중증 장애인 남자를 데리고 와서 ‘우리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불쑥 주문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다. 장애인이니 안 된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내 신앙으로는 마땅히 장애 따위를 문제삼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허락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결혼하게 되었을 때 짊어져야 할 여러 문제가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나 자신이 장애우에 대한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고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차별 문화를 나 자신이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장애우에 대한 차별 의식이나 사회의 차별 문화는 옳지 못한 것이라는 판단을 나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내 삶과 의식 속에 구현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나의 모습이다.

나는 어느 장애우와 비장애인 부부로부터 받은 놀라움과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을 이렇게 오래도록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분들의 사진이 「함께 걸음」지 표지에 나왔기에 여러분께 소개하려고 몇 권을 가져왔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책을 가져가셔도 좋다. 물론 특정한 사람의 얼굴을 본인 허락 없이 이렇게 공개하는 것은 그분들의 초상권을 침해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책 표지로 공개된 사진이고 의도가 나쁜 것이 아니고 결과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에 용기를 내보았다.

수미의 설명으로 알게 된 것이지만 그가 타고 있었던 것은 유모차가 아니고 작은 휠체어였다. 몸은 자라지 못해서 아기 상태고 머리와 뇌는 비장애인과 똑같이 성장했다. 그는 신학대학을 졸업했고, 목사 안수를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는 종교인이었다. 수미처럼 장애우들 기관에서 일하던 한 비장애인 처녀가끝내 그의 부인이 된 것이다. 중증 장애우와 비장애인이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한 가정을 이루어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두려움과 경외감이 내 가슴에 이렇게 오래도록 남아 있다.

수천 년을 두고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을 차별해 오고 있다. 그들을 분리시키고, 사회의 모든 구조와 시설을 비장애인을 위주로 만들어 왔다. 우리 교회도 장애우에 대한 배려가 없다. 휠체어를 탄 장애우는 우리 교회에 올 수가 없다. 우리 비장애인 위주로 집을 만든 것이다. 장애인들은 그럼으로 해서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게 된 것이다. 비장애인들의 마음은 닫혀 있고, 오히려 우월감 같은 것을 가지게 된다. 결국 우리 사회는 한 몸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단절되고 관계는 파괴된다. 차별과 단절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이상은 무엇인가? 우리가 만든 고정 관념을 깨트리고, 모두가 그 차별을 극복하고, 더불어 한 몸을 회복하는 것이다. 저 사진의 주인공들은 바로 하나님의 이상을 실현한 것이다. 고정 관념을 깨트린 것이다. 차별을 극복한 것이다. 더불어 한몸을 회복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분, 이런 결합을 할 수 있겠는가? 내 자녀들이 이런 결합을 하겠다고 하면 쾌히 허락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시겠는가? 절대로 안 된다고 하시겠는가?

유대인들에게는 우리보다 더 무서운 전통, 차별의 문화가 있었다. 중병에 걸린 사람들은 강제로 격리시켰다. 가정에서, 그 동네에서, 사회에서 추방했다. 중병은 하늘이 준 벌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특히 나병 같은 것은 천형,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믿고 있었다. 만약 병이 나으면 병 나은 것을 제사장이 확인하고서야 가정과 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는 법을 제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나병이 완치된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그것을 철저히 차별하고 분리하는 기능을 했을 뿐이다.

예수께 나병환자 한 사람이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한다. 제발 고쳐 달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측은한 마음, 참으로 가엾고 불쌍한 마음을 가지게 되신다. 그의 처절한 슬픔, 그의 깊은 고통, 그의 외로움을 아시는 것이다. 가족에게서, 동네에서,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는 그의 격심한 소외감을 느끼시는 것이다. 차별당하고 분리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그런 것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얼마나 아픈 일인지,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영혼이 맑다고 해도 조금밖에는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예수의 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장애우들의 고통을 느끼는 마음이 예수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면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예수의 마음을 회복하시기 바란다.

예수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주신다. 그는 깨끗이 나았다. 율법에 있는 대로 제사장에게 확인받으라고 하신다. 그런데 마가복음 기자는 이 같은 병 치유 기적에서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한 대목이 있다. 오늘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에서는 43절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면서”가 그것이다. 마가복음 기자는 언제나 이것을 강조한다.

바로 다음 2장에 중풍병자를 고치신 기록도 그렇다. 예수가 계신 곳에 사람이 많아서 지붕을 벗기고 환자를 내린다. 그 환자를 낫게 하신 일로 율법학자들이 시비를 건다. 이런 극적 대목을 전하지만 11절 “집으로 가거라.”라는 말씀으로 이 기사를 마감하고 있다.

5장에 마귀 들린 사람을 낫게 해주시는 기록도 그렇다. 마귀들이 몽땅 돼지 떼에 들어갔고, 2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산비탈을 내리 달려 물 속에 빠져 죽고 만다. 마치 영화의 장면을 연상케 하는 기록이지만 19절 “집에 가서 가족에게 알려라”라는 말씀으로 마감한다.

8장에 벳세다에서 소경을 고치신 기록도 그렇다. 예수께서 소경의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으신다. 보이느냐고 물으시고는 다시 눈에 손을 얹으신다.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시는 행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를 집으로 보내셨다”(26절)는 예수의 행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10장에 여리고에서 소경을 고쳐 주신 기적에서는 그를 낫게 하시는 예수의 말씀이 “가라”(52절)였다고 전한다. 이것이 무엇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인가?

마가복음 기자가 주목한 것은 예수의 기적이 아니었다.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의 믿음도 아니 었다. 예수께서 행하신 특별한 행위도 아니 었다. ‘보내셨다’, ‘집으로 가라’, ‘집에 가서 가족에게 알려라’, ‘집으로 보내셨다’, ‘가라’ 하신 대목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를 가족으로, 사회로 ‘귀환’ 시키는 것이다. 사회에의 통합이다. 그는 마땅히 가족과 함께 살 권리를 가지고 있다. 사회에서 함께 어울려 살 권리를 가지고 있다. 사회가 그를 차별하고 분리하는 것은 그 사회의 죄악이다. 그러나 예수 시대의 장애우들은 고침을 받지 아니하고는 그 차별의 높은 벽을, 그 분리의 냉혹한 벽을 넘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병 자체도 문제였지만 그것으로 인한 차별과 분리가 그에게 더 큰 고통이었다. 예수의 구원하심은 통합이요 귀환이었다.

나는 지난 주일부터 ‘수도교회의 비전’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다. 갈라지고 나누어지는, 그리고 도무지 너와 내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 세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회복시키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거듭 말씀드리고 있다. 하나님의 이 일에 동참하고 행동하는 수도교회를 다시 꿈꾸어 보자고 말씀드려 오고 있다. 지난 주일에는 오늘의 우리 민족 사이에서의 ‘나눔’이 바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요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이라고 말씀드렸다. ‘나눔’ 의 철학, ‘나눔’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자는 말씀이었다.

오늘은 장애인의 날이고 장애인주일로 온 교회가 지키고 있다. 우리 교회는 일찍부터 ‘사랑의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교회 창립기념일에 지역 사회를 위한 특별 헌금도 해 왔다. 교인들이 사랑의 교실에 나가 자원봉사를 했다. 더구나 우리는 유치원과 통합 교육까지 생각하고 있다. 정신지체 아들을 껴안으려는 노력이었다. 아니, 그것은 우리의 영혼 깊숙이 박혀 있는 차별과 분리의 악령을 내쫓으려는 것이었다.

장애우와 결혼하는 것조차 아무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해도 장애를 가졌다는 것으로 차별하고 분리해서는 안된다는 신앙고백이 거기에 있다. 더 나아가 저들과 더불어 함께 삶으로 해서 장애우와 비장애인이 한 몸이 되는, 하나의 유기체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거기 있다. 나와 더불어 함께 삶으로써 차별의 사회를 통합의 사회로 변혁시켜 나가려는 신앙이 거기에 있다. 이것은 예수의 행위에 근접하는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열심, 우리의 노력, 우리의 신앙고백이 크게 후퇴한 것 아닌가 하는 불만스런 판단을 내가 가지게 된다.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사랑의 교실 헌금에 전보다 더 뜨겁게 참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유치원과 통합 교육을 시도하려 했던 것, 교인들은 그런 구상이 있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하려 하는지 알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기술주의, 기능주의만으로는 안 된다. 여기에 신앙적 고백과 합의와 결단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교실은 사회 통합을 지향하는, 하나의 유기체를 지향하려는 수도교회의 꿈이요 비전이어야 한다.

더 큰 열심을 내자. 우리의 의식, 문화를 바꾸자. “수도교회상”에 쓴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겸손과 감격으로 응답하자.

[마가복음 15;33-41] 예수 죽음의 목격자만이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 1996년 4월 7일, 김상근 목사

9월 19, 2026

예수 죽음의 목격자만이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마가복음 15장 33~41절, 16장 1-2절 / 천안교회


[회상 노트] ☞ 바로가기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이다. 이 예배에서, 우리는 죽임을 당하신 아들을 부활시키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자 한다. 이 예배에서 우리는 무덤에 갇히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주님 예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자 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 그러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부활 신앙으로 극복하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자 한다.

그렇다! 누구라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죽음 후의 사태에 대한 공포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님의 부활은 이러한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러한 두려움으로부터, 공포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부활 신앙이다.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인류는 비로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 놀라운 사건을 처음 발설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였다. 이 세 여자가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이다. 위대한 여자들이다. 이들은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실 때, 멀리서였지만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이었다. 예수 죽음을 지켜본 여자 셋이 예수 부활의 첫 세 증인이었다. 그들이 본 예수 죽음은 어떤 죽음이었나?

병사들이 예수를 모욕한다. 왕이 입는 홍포를 두르고 왕관 대신 가시관을 씌운다.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비아냥댄다. 머리를 친다. 침을 뱉는다. 그리고서는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린다. 실컷 희롱한다. 결국 자색 옷을 벗기고 누더기 같은 예수의 옷을 도로 입힌다. 십자가 형틀에 못을 박는다. 죄명은 “유대인의 왕”이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예수를 모욕한다. 온갖 말로 비아냥댄다.

세 여인은 견딜 수가 없다. ‘저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의롭다는 하나님은 무얼 하시는 건가? 하나님, 저분을 도와주십시오 당신은 의로우신 하나님 아니십니까? 하나님,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들은 기도한다. 예수께서는 더 버티시지 못한다. 급기야 큰소리로 부르짖으신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것은 외마디 소리다. 예수는 기어코 고개를 떨어뜨리신다. 숨을 거두신다.

여인의 가슴은 찢어질 것 같다. 우리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를 당당하게 살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애쓰시던 저분이 왜 저렇게 죽임을 당해야 하느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렇게도 당당하시던 저분이 저렇게 맥없이 죽임을 당하시다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저분조차 저렇게 죽어 간다면 누가 선하게 살 것입니까? 누가 의롭게 살 것입니까? 누가 우리 같은 천한 사람, 가진 것 없는 사람, 배운 것 없는 사람을 위해줄 것입니까? 누가 슬피 우는 사람을 위해 일할 것입니까? 누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줄 것입니까?’

세 여인은 사흘째 되던 날 새벽, 예수의 무덤을 찾는다. ‘오, 불쌍한 예수여! 하나님도 돌보시지 않으시지만, 하나님도 버리셨지만 우리는 당신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안쓰럽습니다. 너무나 불쌍합니다. 너무나 억울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삶이 옳고 바른 것을 압니다. 당신의 가슴에 가득한 사랑을 한껏 느낍니다.’ 여인들은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 같다. 무덤 속에서 세 여자는 웬 청년을 만난다. 그 청년에게서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것을 듣게 된다. 무덤에서 도망쳐 나온다. 무서운 마음이 든다. 벌벌 떨린다. 넋을 잃는다.

기쁨이나 감격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니다. “아멘, 할렐루야”라는 탄성이 나오지 않는다.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분부를 듣는 순간, 그들은 벌벌 떨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떨리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들이 해야 할 말 때문에 떨리는 것이다.

당신들과 우리가 죽인 예수가 살아났다는 것을 전하는 것은 무슨 뜻을 전하는 것인가? 사람들을 선동하고 정권을 뒤엎으려 한다고 하여 죽였다. 그래서 다른 처형도 아닌 십자가 처형을 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자고 했다. 서기관, 당신들도 그랬다. 제사장, 당신들도 그랬다. 빌라도, 당신도 그랬다. 그런데, 그 예수가 살아나셨다. 이미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더불어 사시던 갈릴리로 가셨다. 이렇게 외쳐야 한다. 벌벌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 복판에서 예수가 옳았다고, 너희가 죽여버린 예수가 옳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말만 하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살았기에 체포되고 모욕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된 바로 그 삶을 사는 것이리라. 그분이 사랑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분이 돌본 사람을 돌보고, 그렇게 하라는 것 아닌가! 가난한 사람, 슬피우는 사람, 굶주리는 사람, 누명을 쓴 사람, 그런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살라는 것 아닌가! 그렇게 살면 박해가 올 것이다! 고난이 올 것이다! 그 여인들은 무덤 밖으로 나와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그 세 여인이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이 된다.

예수가 왜 죽임을 당하셨는지, 예수의 죽음의 참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예수 부활의 참 증인이 될 수 있다. 오늘 아침, 우리 모두는 체포되시는 예수를 먼저 보시기 바란다. 모욕을 당하시는 예수를 먼저 보시기 바란다. 재판 받으시는 예수를 먼저 보시기 바란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시는 예수를 먼저 보시기 바란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지만,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버리시지만, 그러나 그 길을 끝까지 가시는 예수를 먼저 보시기 바란다.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바르게 보아내는 사람만이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죽임을 당하신 바로 그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으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그렇게 죽임을 당하신 바로 그 예수를 살리셨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가? 그러면 부활의 증인이 되라. 예수처럼 살라. 성령께서, 이 거룩한 날 아침,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바란다. 힘을 주시기 바란다. 용기를 주시기 바란다. 우리 모두를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시기 바란다. 그래서 이 땅에 정의가 서고, 사랑이 넘치게 되기를 바란다. 기쁨이 넘쳐나기를 바란다.

[창세기 1장 14-19절] 거짓된 하늘의 우상들을 꺾으신 창조의 빛, 오직 주권자만을 향한 우주적 헌사

거짓된 하늘의 우상들을 꺾으신 창조의 빛, 오직 주권자만을 향한 우주적 헌사 [본문] 창세기 1장 14절-19절 1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절: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