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굴러져 있었다.
마가복음 16장 1-8절 / 연세대 대학교회 / 1998년 4월 12일
[회상 노트]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어떻게 하여 얻은 국정 경영의 기회인가? 우리가 함께 척결하고 세우고자 했던 일을 위해서 모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거들고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새 ‘한 자리’ 때문에 맘들이 상하기 시작했다. 참여의지일 수도 있겠으나 논공행상 기대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 해 초부터 대한기독교서회 사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저 나의 자리는 역시 교회라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루어 냈으니 이제 교회에 묻히자 했었다. 행여 무슨 일이라도 맡게 되면 그동안 함께 일해 왔던 동지들의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게 될 것 같았다. 조심스러웠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어느새 실망이 쌓이고 있었다. 우리가 줄곧 요구해 왔던 이른바 양심수 석방,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의 철폐, 민주화운동을 한 연유로 파멸에 이르게 된 이들에 대한 명예 회복 등 새 세상을 향한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아니. 이루어 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초조함이 번지기 시작했다.
연세대 대학교회에서 부활주일 설교를 해 달라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다른 교회에 비해 학생이 많은 교회다. 교수와 교직원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에게는 맞지 않는 설교였던 것 같다. 내 설교는 역시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은 부활주일 아침이다. 여러분께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넘치기를 바란다. 예수의 부활이 주는 감격과 기쁨, 용기와 감사가 우리 사이에 넘쳐나기를 기도한다.
나는 지금 부활절 아침에 드릴 수 있는 인사로 설교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인사가 여기 누구 한 분의 가슴에도 뭉클하게 가 닿지 못했을 것이다. 퍽 의례적인 말로 들렸을 뿐일 것이다. 부활절 아침인데 감격이 없고 기쁨이 없다. 어떤 용기 같은 것이 용솟아 오르는 것도 아니다. 특별한 감사의 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렇다는 말씀이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은가? 이날 아침 감격이 있는가? 기쁨, 용기, 감사가 있는가?
그렇다. 예수의 부활의 소식은 원래 기쁜 것이 아니었다. 두려운 것이었다. 감격이 아니었다. 벌벌 떨리는 것이었다. 넋이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부활에 직면한 처음 사람은 그랬다. 오늘 성서 본문은 그렇게 전하고 있다.
“그들은 뛰쳐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 하였다”(막 16:8).
이것이 예수의 부활에 맞닥뜨린 처음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기쁨이니 감격이니 용기니 감사니 하는 것은 그들 반응의 어디에도 없다. 그런 흔적조차 없다. 그것은 부활에 대한 ‘교리’에서 배운 기쁨, 감격, 용기, 감사가 아닐까? 교리에는 생명이 없다. 부활은 생명이다. 부활은 살아있는 것이다. 움직인다. 우리에게 부딪혀 오는 것이다.
이 날 아침, 나처럼 여러분도 역시 감격과 기쁨과 용기와 감사의 정이 출렁이지 않는가?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도망가지 않는다. 떨리지도 않는다. 넋이 나가지도 않는다. 우리는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예수의 부활 사건에 맞닥뜨린 여인들이 반응했던 반응이 우리에겐 왜 없는 것일까? 오히려 이것이 문제일 것이다.
오늘날 예수의 고난 - 십자가도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이 아니지만 더구나 부활은 우리에게 무의미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글쎄 죽음 후를 보장해 주는 보험 같은 것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이가 많아 생을 마감할 즈음에 이른 분들에게나 중요하게 된 것이 아닐까?
예수의 부활과 맞닥뜨린 여인들의 반응과 우리의 반응은 너무나 반대인 것은 왜일까? 우리는 그 실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임을 당한 예수를 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 처절하게 처형당한 예수, 사형당한 예수의 무덤을 찾아가지 않는다.
여러분! 이 날 우리 함께 그의 무덤을 찾아가자. 그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의 무덤을 찾아내자. 저 여인들처럼 예수의 무덤을 먼저 찾아가야 한다. 부활을 노래하기 전에 먼저 무덤을 찾아가야 한다.
그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그 무덤은 놀랍게도 ‘나’다. 나에게도 한때 예수의 삶이 꿈틀거렸을 때가 있지 않았던가? 사랑도 있었고, 의분도 있었고, 희생도 있었지 않았던가? 나눔도 있었고 순결도 있었고 눈물도 있지 않았던가? 정의도 있었고 자유의 혼도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 예수를 죽여 묻은 무덤이 아닌가? 무덤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어느새 예수를 큰 돌로 막아 버렸다.
이 날 아침 예수의 무덤을 찾아가자. 그러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을 굴려내 주겠는가? 자신이 없다. 그러나 하여간 무덤으로 가자. ‘나’라는 무덤 안에 죽임을 당한 예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다른 무덤이 있다. 1998년 오늘, 예수의 무덤은 ‘여기’이다. 한국의 ‘교회’다. 여기가 예수의 무덤이다. 예수는 여기에 죽임을 당해 묻혀 있다. 예수는 이 땅의 무지랭이들을 온갖 굴레에서 끌어냈다. 문화의 눈을 뜨게 했다. 병든 자를 치유했다. 배우지 못한 자에게 배움을 주었다. 청빈을 가르치고 나눔을 실천했다. 젊은이를 껴안고 사랑하고 키워냈다. 독재와 싸우고 민족의 화해를 추구했다.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정의를 예언했다. 예수는 우리 가운데 살아 있었다. 그 예수가 지금 어디에도 없다. 그 예수를 묻은 무덤만이 있을 뿐이다. 지나친 판단인가?
무지랭이들은 참다운 해방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어떤가? 여기가 어느새 무덤이다. 돈 있는 자에게 안식을 준다. 여기가 무덤이다. 머리 좋고 돈 있는 자만을 가르친다. 청빈과 나눔은 오래 전에 증발해 버렸다. 여기가 무덤이다. 정의를 향한 전선이 없어졌다. 민
족의 화해도 돈의 크기에 끌려 다닌다. 여기가 무덤이다. 어떤 불이익도 거부한다. 십자가는 도금되어 빛나는 장식이 되었다. 여기가 무덤이다. 오히려 사회의 지탄을 받는다. 세속보다 더 타락했다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여기가 무덤이다. 그렇다. 여기가 무덤이다.
이 날, 부활을 찬양하는 이 날, 우리는 한국 교회 무덤을 찾아 나서자. 그것이 이미 무덤이지만 여기에 죽임을 당한 예수의 주검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 아닌가! 이 무덤, 굳어져 버린 것 아닌가! 결코 무덤을 열 수 없을 것이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굴려내 줄 것인가?”
그러나 무덤으로 가자. 오늘은 이레의 첫날이다. 향료라도 챙겨 무덤으로 가자. 여기에 예수의 주검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날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말씀은 무엇인가?
“그런데 눈을 들어서 보니, 그 돌덩이는 이미 굴러져 있었다. 그 돌은 엄청나게 컸다.”
이것이 이 날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가르치심이다. 이미 모든
것은 끝났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이미 무덤이 되어버렸다고 나를 포기하지 말라. ‘교회’는 이제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하지 말라. 그것은 무덤의 돌을 굴릴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눈을 들어 보자. 그 돌덩이는 이미 굴러져 있다. 엄청나게 컸지만 이미 굴러져 있다.
주저하지 말자. 무덤으로 가자. 가 보면 돌은 이미 굴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면 예수는 내 속에 주검으로 누워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무덤에 가 보면, 교회라는 무덤에 이미 예수의 주검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의 부활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빈 무덤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만, 그는살아나셨습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 이르십시오. 그는(그들보다) 앞서서 갈릴리로 가십니다.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십시오.”
여러분, 어떻게 하겠는가? 예수는 ‘나’의 무덤 속에 주검으로 있지 않다. 살아나셨다. 살아나셨을 뿐 아니라 갈릴리로 앞서서 가신다고 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는 거기 갈릴리에서 볼 것이라고 하신다.
여러분, 이 말은 우리도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이다. 예수의 부활을 그저 기뻐할 수 없게 하는 원인이다. 갈릴리로 다시 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떨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부활의 메시지다. 안 가면 부활은 없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수 없다.
여러분, 이 아침, 기도하자. 갈릴리로 가겠사오니 도와주십사고 기도드리자. 부활의 예수를 만나자면 갈릴리로 가야 한다는 것, 우리가 만든 무덤은 이미 비었다는 것을 알리자. 무덤의 돌은 이미 굴러졌다고, 무덤은 이미 비었다고, 부활하신 예수는 갈릴리에 계시다고 알리자.
여러분, 두려운가? 떨리지 않는가? 무섭지 않는가? 지금 차라리 뛰쳐나가야 하겠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렇다. 처음 여인들도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말하고 증언했다. 그럼으로써 부활의 종교를 열어 냈다.
감격이 없어도 좋다. 그러나 지금 무덤 속을 보자. 기쁨이 없어도 좋다. 그러나 지금 빈 무덤을 보자. 감사가 없어도 좋다. 그러나 흰옷 입은 청년의 말을 듣자. 용기가 없어도 좋다. 갈릴리로 가자는 말을 기어코 뱉어 낼 것이라고 다짐하자. 이것이 부활의 축복이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님의 부활의 축복이 넘치기를 이제 다시 기도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