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의 세계에 통합을
마가복음 1장 40-45절 / 수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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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말씀을 향한 물음]
주일이니까 예배에 나오셨겠지만 오늘은 장애인주일이다. 장애인이 우리 가정에 없는 것을 감사할 것인가? 우리의 의식과 문화와 사회 시설이 모조리 장애우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장애우와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다. 예수님의 기본 정신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사다. 예수님께서는 장애우를 어찌 대하셨을까? 주시는 성서 말씀에 귀를 모읍시다.
[설교 전문]
우리 수미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일하는 것을 여러분 모두가 알고 계신다. 장애우들을 위해 혹은 그들과 함께 일하는 비장애인들 중에 장애우와 결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수미에게 장애인을 경계하는 경계심이 없어진 것도 언제부터인지 감지할 수가 있었다. 내게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놈이 어느날 중증 장애인 남자를 데리고 와서 ‘우리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불쑥 주문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다. 장애인이니 안 된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내 신앙으로는 마땅히 장애 따위를 문제삼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허락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결혼하게 되었을 때 짊어져야 할 여러 문제가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나 자신이 장애우에 대한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고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차별 문화를 나 자신이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장애우에 대한 차별 의식이나 사회의 차별 문화는 옳지 못한 것이라는 판단을 나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내 삶과 의식 속에 구현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나의 모습이다.
나는 어느 장애우와 비장애인 부부로부터 받은 놀라움과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을 이렇게 오래도록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분들의 사진이 「함께 걸음」지 표지에 나왔기에 여러분께 소개하려고 몇 권을 가져왔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책을 가져가셔도 좋다. 물론 특정한 사람의 얼굴을 본인 허락 없이 이렇게 공개하는 것은 그분들의 초상권을 침해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책 표지로 공개된 사진이고 의도가 나쁜 것이 아니고 결과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에 용기를 내보았다.
수미의 설명으로 알게 된 것이지만 그가 타고 있었던 것은 유모차가 아니고 작은 휠체어였다. 몸은 자라지 못해서 아기 상태고 머리와 뇌는 비장애인과 똑같이 성장했다. 그는 신학대학을 졸업했고, 목사 안수를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는 종교인이었다. 수미처럼 장애우들 기관에서 일하던 한 비장애인 처녀가끝내 그의 부인이 된 것이다. 중증 장애우와 비장애인이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한 가정을 이루어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두려움과 경외감이 내 가슴에 이렇게 오래도록 남아 있다.
수천 년을 두고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을 차별해 오고 있다. 그들을 분리시키고, 사회의 모든 구조와 시설을 비장애인을 위주로 만들어 왔다. 우리 교회도 장애우에 대한 배려가 없다. 휠체어를 탄 장애우는 우리 교회에 올 수가 없다. 우리 비장애인 위주로 집을 만든 것이다. 장애인들은 그럼으로 해서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게 된 것이다. 비장애인들의 마음은 닫혀 있고, 오히려 우월감 같은 것을 가지게 된다. 결국 우리 사회는 한 몸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단절되고 관계는 파괴된다. 차별과 단절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이상은 무엇인가? 우리가 만든 고정 관념을 깨트리고, 모두가 그 차별을 극복하고, 더불어 한 몸을 회복하는 것이다. 저 사진의 주인공들은 바로 하나님의 이상을 실현한 것이다. 고정 관념을 깨트린 것이다. 차별을 극복한 것이다. 더불어 한몸을 회복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분, 이런 결합을 할 수 있겠는가? 내 자녀들이 이런 결합을 하겠다고 하면 쾌히 허락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시겠는가? 절대로 안 된다고 하시겠는가?
유대인들에게는 우리보다 더 무서운 전통, 차별의 문화가 있었다. 중병에 걸린 사람들은 강제로 격리시켰다. 가정에서, 그 동네에서, 사회에서 추방했다. 중병은 하늘이 준 벌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특히 나병 같은 것은 천형,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믿고 있었다. 만약 병이 나으면 병 나은 것을 제사장이 확인하고서야 가정과 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는 법을 제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나병이 완치된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그것을 철저히 차별하고 분리하는 기능을 했을 뿐이다.
예수께 나병환자 한 사람이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한다. 제발 고쳐 달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측은한 마음, 참으로 가엾고 불쌍한 마음을 가지게 되신다. 그의 처절한 슬픔, 그의 깊은 고통, 그의 외로움을 아시는 것이다. 가족에게서, 동네에서,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는 그의 격심한 소외감을 느끼시는 것이다. 차별당하고 분리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그런 것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얼마나 아픈 일인지,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영혼이 맑다고 해도 조금밖에는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예수의 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장애우들의 고통을 느끼는 마음이 예수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면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예수의 마음을 회복하시기 바란다.
예수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주신다. 그는 깨끗이 나았다. 율법에 있는 대로 제사장에게 확인받으라고 하신다. 그런데 마가복음 기자는 이 같은 병 치유 기적에서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한 대목이 있다. 오늘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에서는 43절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면서”가 그것이다. 마가복음 기자는 언제나 이것을 강조한다.
바로 다음 2장에 중풍병자를 고치신 기록도 그렇다. 예수가 계신 곳에 사람이 많아서 지붕을 벗기고 환자를 내린다. 그 환자를 낫게 하신 일로 율법학자들이 시비를 건다. 이런 극적 대목을 전하지만 11절 “집으로 가거라.”라는 말씀으로 이 기사를 마감하고 있다.
5장에 마귀 들린 사람을 낫게 해주시는 기록도 그렇다. 마귀들이 몽땅 돼지 떼에 들어갔고, 2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산비탈을 내리 달려 물 속에 빠져 죽고 만다. 마치 영화의 장면을 연상케 하는 기록이지만 19절 “집에 가서 가족에게 알려라”라는 말씀으로 마감한다.
8장에 벳세다에서 소경을 고치신 기록도 그렇다. 예수께서 소경의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으신다. 보이느냐고 물으시고는 다시 눈에 손을 얹으신다.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시는 행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를 집으로 보내셨다”(26절)는 예수의 행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10장에 여리고에서 소경을 고쳐 주신 기적에서는 그를 낫게 하시는 예수의 말씀이 “가라”(52절)였다고 전한다. 이것이 무엇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인가?
마가복음 기자가 주목한 것은 예수의 기적이 아니었다.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의 믿음도 아니 었다. 예수께서 행하신 특별한 행위도 아니 었다. ‘보내셨다’, ‘집으로 가라’, ‘집에 가서 가족에게 알려라’, ‘집으로 보내셨다’, ‘가라’ 하신 대목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를 가족으로, 사회로 ‘귀환’ 시키는 것이다. 사회에의 통합이다. 그는 마땅히 가족과 함께 살 권리를 가지고 있다. 사회에서 함께 어울려 살 권리를 가지고 있다. 사회가 그를 차별하고 분리하는 것은 그 사회의 죄악이다. 그러나 예수 시대의 장애우들은 고침을 받지 아니하고는 그 차별의 높은 벽을, 그 분리의 냉혹한 벽을 넘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병 자체도 문제였지만 그것으로 인한 차별과 분리가 그에게 더 큰 고통이었다. 예수의 구원하심은 통합이요 귀환이었다.
나는 지난 주일부터 ‘수도교회의 비전’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다. 갈라지고 나누어지는, 그리고 도무지 너와 내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 세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회복시키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거듭 말씀드리고 있다. 하나님의 이 일에 동참하고 행동하는 수도교회를 다시 꿈꾸어 보자고 말씀드려 오고 있다. 지난 주일에는 오늘의 우리 민족 사이에서의 ‘나눔’이 바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요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이라고 말씀드렸다. ‘나눔’ 의 철학, ‘나눔’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자는 말씀이었다.
오늘은 장애인의 날이고 장애인주일로 온 교회가 지키고 있다. 우리 교회는 일찍부터 ‘사랑의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교회 창립기념일에 지역 사회를 위한 특별 헌금도 해 왔다. 교인들이 사랑의 교실에 나가 자원봉사를 했다. 더구나 우리는 유치원과 통합 교육까지 생각하고 있다. 정신지체 아들을 껴안으려는 노력이었다. 아니, 그것은 우리의 영혼 깊숙이 박혀 있는 차별과 분리의 악령을 내쫓으려는 것이었다.
장애우와 결혼하는 것조차 아무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해도 장애를 가졌다는 것으로 차별하고 분리해서는 안된다는 신앙고백이 거기에 있다. 더 나아가 저들과 더불어 함께 삶으로 해서 장애우와 비장애인이 한 몸이 되는, 하나의 유기체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거기 있다. 나와 더불어 함께 삶으로써 차별의 사회를 통합의 사회로 변혁시켜 나가려는 신앙이 거기에 있다. 이것은 예수의 행위에 근접하는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열심, 우리의 노력, 우리의 신앙고백이 크게 후퇴한 것 아닌가 하는 불만스런 판단을 내가 가지게 된다.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사랑의 교실 헌금에 전보다 더 뜨겁게 참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유치원과 통합 교육을 시도하려 했던 것, 교인들은 그런 구상이 있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하려 하는지 알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기술주의, 기능주의만으로는 안 된다. 여기에 신앙적 고백과 합의와 결단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교실은 사회 통합을 지향하는, 하나의 유기체를 지향하려는 수도교회의 꿈이요 비전이어야 한다.
더 큰 열심을 내자. 우리의 의식, 문화를 바꾸자. “수도교회상”에 쓴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겸손과 감격으로 응답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