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의 세계에 생명을
요한복음 6장 22-29절 / 수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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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말씀을 향한 물음]
오늘은 어린이주일이다. 우리만큼 우리 자식들에게 정성을 쏟는 사회도 세계에 유례가 없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남겨 주려고 한다. 남겨 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 말씀은 무엇을 주라 하는지 마음을 열어 경청하자.
[설교 전문]
참으로 많은 군중이 예수에게 모여왔다. 5천 명이 넘는 군중이었다. 그들은 배고픈 군중이었다. 끼니때가 되었다. 또 굶게 된 것이다. 한 아이가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그것으로 그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였다. 부스러기를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했다.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라고 말했다. 이런 사건이 있은 다음 날에도 무리들은 예수님을 만나려 했다.
그러나 바로 조금 전에 여기서 뵈었는데 어느 순간에 보이지 않으셔서 허겁지겁 다른 곳으로 찾아가 보니 어느 사이에 거기 와 계셨다. 가까스로 예수를 만나자 그들은 언제 이쪽으로 오셨느냐고 묻는다. 어떻게 공간을 초월할 수 있으셨느냐는 질문이다. 몇 초면 거기 계시던 곳에서 여기까지 오실 수 있는 것이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서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당신들이 나에게서 그 어떤 철학을, 내가 행한 ‘기적의 뜻’을 깨닫고 그 ‘뜻’ 때문에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기적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물질적이고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효과 그리고 기적 현상에만 관심을 두는 그들을 나무라신다.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나를 찾는데 그것은 당신들이 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평생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인류 역사도 그렇다. 그것이 무엇인가? 배불리 먹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절박한 것인가를 안다. 나이가 조금 드신 분들은 가난이 무엇인지 배고픔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 배고픔이 북녘을 뒤덮고 있다는 것 아닌가. 결국 자기의 딸을 삶아 먹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며칠 전 어느 TV가 방영을 했다고 한다. 육고기간을 모두 폐쇄시 켰는데 그것은 인육을 공공연히 팔기 때문이라는 신문 보도를 나도 보았다. 이 두 보도의 취지는 북녘의 사정이 이렇게 절박하니 우리가 도와야 할 것 아닌가 하는 것일 것이다. 도와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차가운 전쟁, 냉전의 칼을 섬뜩하게 느끼고 있다. 아프리카 등지에도 절대 빈곤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오고 있다. 그렇게 된 지가 수십 년이 된 나라도 있다. 그래도 거기에서는 자기 딸을 삶아 먹는다거나 인육을 육고기간에서 판다는 스캔들이 들려오지 않는다. 북이 절대 빈곤으로 떨어진 것은 이제 2년째다. 그런데 어느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인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만약 아니라면, 이것은 북의 굶주림을 호소하는 것이라기보다 암암리에 북을 공격하고, 궁지에 몰고, 돕기는 돕되 인간 이하의 인간들로 폄하해 버리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인간이어야
하고 인간들이다. 전쟁 중에 서로를 비인간적으로 살육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제 새끼를 잡아먹는 짐승은 없지 않은가! 우리 민족은 그런 민족이 아니다.
남쪽에서 이런 보도를 하는 것은 사실은 공산주의의 철학에 대한 공격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을 노동의 가치로만 여긴다는 인간관을 공격하는 것이다. 노동력을 가진 인간만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 노동력이 없게 되면 인간을 폐기 처분하는 사회가 공산주의 사회라는 공격이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식을 삶아 먹을까? 과연 그럴까? 이것은 공산주의에 대해 핵폭탄을 쏘는 것과 같은 공격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곳이 이미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는 단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북녘 동포들의 인간성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 북의 근원적 문제는 배고픔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 시대의 사람들이 배고픔의 극복을 인간 최대의 가치로 여겼던 것과 같은 것이다. 배고픔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목적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남쪽 우리의 사정은 어떠한가? 우리는 배고픔, 굶주림의 시대를 극복했다. 차라리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여기서는 절대 빈곤이 아닌 상대적 빈곤이 문제가 되고 있다. 내가 저만큼 살지 못하는 데서 오는 빈곤이다. 상대적 빈곤이란 끝이 없지 않은가? 더 많이 가져야 한다. 가져도 가져도 가짐의 추구는 끝나지 않는다. 수백만 원의 재화를 가지면 만족하게 되나? 수천만 원의 재화를 가지고 싶어한다. 수천을 가지면 수억, 수억을 가지면 수백억, 수천억, 수조 원을 넘어가도 가짐의 추구는 끝나지 않는 것 아닌가. 주식회사 한보 사건, 김 대통령의 스캔들, 그 아들 현철 사건의 핵은 가짐의 추구다.
더 가지기 위해, 더 생산해야 한다. 더 생산하자니 자원을 그만큼 소비해야 한다. 더 가지고 더 쓴다는 것은 더 버린다는 것이다. 생산—소비—쓰레기의 악순환이 지금 남녘 사회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만이 아니다. 인류 생존의 기반인 지구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다. 남쪽이 50년 동안 추구한 것 역시 배고픔의 극복, 풍요의 사회다. 그런데 남과 북의 50년의 결과는 죽임의 세계로 전락하고 있는 것 아닌가. 예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 6:27).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는 양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요한복음 4장 5절 이하에 이런 선문답이 있다.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로 물을 길러 왔다. 우물가에 앉으셨던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고 청한다. 그 여인은 매일 거르지 않고 물을 길러 간다. 그럴 수밖에 없다. 대화 끝에 예수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그 여인은 이 말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우물이 이렇게 깊은데다 선생님께서는 두레박도 없으시면서 어디서 그 샘솟는 물을 떠 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의 반문이 아니다. 우리의 반문이다. 길어도 또 길어도 끝이 없고 충족이 있을 수 없는 것을 향해 우리는 모든 것을 쏟고 있다.
남도 북도 그렇다. 북은 결국 굶주림이요 남은 낭비다. 그 결과는 남도 북도 죽임의 문화, 죽임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두레박을 찾는다. 두레박이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 나는 것인가?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4:13-14).
두레박을 가졌다 하여 목마름이 끝나지 않는다. 두레박으로 깊은 우물의 물을 길어 올린다. 그러나 시원함, 만족은 잠시다. 목은 또 다시 마른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이다. 우리 후손들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주려 하는가? 배고픔의 극복, 풍요인가?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죽임의 세계를 가져온다. 무엇을 물려 주시려 하는가? 생명을 물려 주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물려 주라.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물려 주라. 생명을 물려 주라.
무리들이 묻는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느냐고 묻는다. 예수께서 즉답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줄 유산이어야 한다. 이것이 죽임의 세계를 생명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길이다. 우리의 후손, 인류가 영원히 사는 길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란 무엇이겠는가? 두고두고 곱씹어 보자. 그것은 무엇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