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 수용과 저항 신앙
히브리서 13장 10-14절 / 수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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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말씀을 향한 물음]
오늘이 마침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제17주년이다. ‘폭도 5ㆍ18 광주’는 올해부터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17년 만의 이 역사 현실의 관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지난 17년 동안 우리의 잘못은 무엇이고 우리가 한 일은 무엇인가? 감회가 없을 수 없는 이 날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는가?
[설교 전문]
인간 세상에 정의란 없다. 언제나 불의한 사람이 잘된다. 정도를 걷는 사람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다.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정의롭게, 바르게 살려고 하다가도 바로 그것 때문에 실패한 경험을 하고 나면 그도 영악해지고 교활해진다. 정도를 가지 아니하게 되고 만다. 이른바 세상 사는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게 될 수밖에 없다. 가면 갈수록 세상이 악해져 간다면 세상은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망하지 않고 또다시 중심을 잡고 가곤 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도 그저 그렇게 되는 법인가? 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망하지 않게 하자면 죄를 속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어디 그렇게 쉽게 회개하는가? 그래서 생긴 제도가 제사제도다.
구약 시대의 제사는 이렇다. 대제사장이 제물로 바칠 짐승을 택하고 그 짐승의 머리에 안수한다. 인간들의 모든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짐승은 그 온 몸에 인간의 죄를 짊어지게 된다. 대제사장은 그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성전의 지성소라는 데 가지고 들어가 속죄의 제물로 바친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속죄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를 다 받아내고 나면 그 짐승의 몸은 불살라 없애 버린다. 불사르는 곳은 영문 밖이다. 서울로 말하면 문 밖인 셈이다. 부정한 몸이기 때문에 성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부정한 것은 인간인데 자기들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해 놓고, 그 짐승은 부정하니 성 밖에서 살라 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 세계가 망하지 않고 이렇게라도 유지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종교다.
오늘 본문으로 택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죽으심이 딱 이 모델과 같다고 해석하고 있다. 예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영문 밖인 골고다 언덕에서 죽임을 당하셨고 그 피는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깨끗함을 받게 되고 인류 세계가 망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예수의 피가 속죄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예수의 그 공로가 없다면 누가, 어느 시대가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덧붙인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
이것이 덧붙인 말씀이다. 속죄의 피를 믿는 데 머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그분이 치욕을 겪으시고 계신 영문 밖으로 나가 함께 겪자는 것이다. 예수처럼 당하는 그 당함 때문에 그 시대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도 당하러 가자 한다. 그렇다. 예수는 구약 시대 제물이었던 짐승처럼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렸다. 그 주검은 영문 밖에 버려졌다.
그러나 예수는 구약 종교를 뛰어넘으신다.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의 부활이 무엇인가? 죽음이 인간들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라면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 세계를 의에 세워 놓는다. 구약 시대는 속죄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예수에게 와서는 속죄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을 바로잡는 예수의 저항으로 이어진다. 예수의 저항, 그것이 부활이다.
오늘이 마침 5ㆍ18 17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이 주일이 아니었으면 나는 마땅히 광주에 가 있었을 것이다. 5ㆍ18 광주가 무엇인가? 전두환, 노태우 등이 자신들의 집권 야욕을 위해 내란을 획책했다. 광주를 택하여 학살하고, 그들에게 온갖 죄를 뒤집어씌웠다. 지난 17년 동안 전ㆍ노와 우리는 광주를, 호남을 영문 밖으로 밀어냈다. 과격하고 용공적이라는 인상을 뒤집어씌웠다. 시대를 혼란케 하는 불순 세력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씌우고, 그들을 희생시킴으로써 우리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살인자들은 대통령이 되고 나라를 지배할 수 있었다. 우리는 광주를 희생시켜 우리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주를 택하여 죄를 뒤집어씌우고, 자기들이 뒤집어씌워 놓고 부정하다 하고, 부정하니 고립시켜 영문 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현재를 유지해 왔다. 구약 종교의 재미를 누려온 것이다.
그러나 광주는 뒤집어쓰고, 모든 걸 포기해 버리지 않았다. 그 죽임을, 그 불의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십수 년을 저항했다. 1980년 5월 진압군은 폭도가 되었고, 그때 폭도로 선고를 받았던 그들은 이제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 것이다. 5ㆍ18은 국가기념일이 되고. 망월동 묘역은 성역화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이 대이변의 의미는 무엇인가?
영문 밖으로 끌려 나가 죽임을 당한 ‘5ㆍ18’이 부활한 것이다. 1980년 5월 18일에 일으킨 광주의 저항이 오늘에 이르러 끝내 부활한 것이다. 죄를 뒤집어씀으로써 지난 17년이 보존될 수 있었다면 5ㆍ18이 부활함으로써 이 나라에 드디어 정의가 세워진 것이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광주 사건 해결을 위해 비교적 그 복판에 서 있었다. 전두환, 노태우 등 35명을 내가 대표하여 검찰에 고발했다. 1994년 5월 13일, 그들을 고발할 때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이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5ㆍ18을 부활시켜 주소서.”
나는 오늘 5ㆍ18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우리의 역사의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실감하며 일했다.
악의 세력은 저항을 불용한다. 오히려 그에게 온갖 것을 뒤집어씌워 영원히 매장하려 한다. 결국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면 오히려 부활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 개인도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운다. 그래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 종교의 한계에 머무는 것이다. 뒤집어씌움을 받은 그가 저항하는 것이 ‘예수의 부활’이다. 그래야 그 관계가 바로잡아진다. 그래야 모두가 살게 된다.
전직 대통령 둘이 퇴임하자마자 감옥으로 가더니 현직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기도 전에 더러운 뒷구멍을 몽땅 드러내고 있다. 부도덕스럽고 기만적인 승부사의 추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야 말았다. 세계 어느 나라에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된 예가 있는가?
참으로 부끄러운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을 위기라 한다. 나라에 중심이 없다고 한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어떻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인가? 5ㆍ18 광주가 부활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5ㆍ18을 부활시켰다. 5ㆍ18을 부활시킨 우리가 이 나라의 중심이다. 중심이 없지 않다.
수도교회는 저항하는 교회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악에 도전하는 교회가 된다.”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히지 않았던가! 1970년 3선 개헌 때 우리는 반대 성명을 당당하게 발표했다. 정부는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못하게 기업들을 얼러댔고, 신문은 광고란을 백지로 내기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했는가? 돈을 거둬 교회 이름으로, 여신도회 이름으로, 자모회 이름으로, 요나회 이름으로, 빈 광고 지면을 채우지 않았던가! 이것이 수도교회다. 이것이 그분에게로 나가 그분이 겪으시는 치욕을 함께 겪는 것이다. 이것이 저항이다. 그래서 끝내는 정의의 부활을 일구어내는 것이다. 아니, 이것이 성령의 인도에 순복하는 것이다. 저항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다. 세상의 온갖 악에 도전하는 교회야말로 살아 있는 교회다.
다음 주일에 새 담임 목사님이 취임하게 된다. 새로운 각오가 있게 되기를 바란다. 가장 중요한 것을 희망하고, 결단하고 다짐하기를 바란다. 목사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요구하시기 바란다. 목사가 이런 일을 하도록 하라. 이 교회가 악에 도전하는 교회가 되게 하라. 살아 있는 교회를 만들라. 아니,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고 그분께 순종하라. 이것이 수도교회의 꿈이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