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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1-14] 치욕 수용과 저항 신앙 – 1997년 5월 18일, 김상근 목사

9월 20, 2026

치욕 수용과 저항 신앙

히브리서 13장 10-14절 / 수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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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말씀을 향한 물음]

오늘이 마침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제17주년이다. ‘폭도 5ㆍ18 광주’는 올해부터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17년 만의 이 역사 현실의 관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지난 17년 동안 우리의 잘못은 무엇이고 우리가 한 일은 무엇인가? 감회가 없을 수 없는 이 날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는가?


[설교 전문]

인간 세상에 정의란 없다. 언제나 불의한 사람이 잘된다. 정도를 걷는 사람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다.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정의롭게, 바르게 살려고 하다가도 바로 그것 때문에 실패한 경험을 하고 나면 그도 영악해지고 교활해진다. 정도를 가지 아니하게 되고 만다. 이른바 세상 사는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게 될 수밖에 없다. 가면 갈수록 세상이 악해져 간다면 세상은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망하지 않고 또다시 중심을 잡고 가곤 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도 그저 그렇게 되는 법인가? 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망하지 않게 하자면 죄를 속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어디 그렇게 쉽게 회개하는가? 그래서 생긴 제도가 제사제도다.

구약 시대의 제사는 이렇다. 대제사장이 제물로 바칠 짐승을 택하고 그 짐승의 머리에 안수한다. 인간들의 모든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짐승은 그 온 몸에 인간의 죄를 짊어지게 된다. 대제사장은 그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성전의 지성소라는 데 가지고 들어가 속죄의 제물로 바친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속죄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를 다 받아내고 나면 그 짐승의 몸은 불살라 없애 버린다. 불사르는 곳은 영문 밖이다. 서울로 말하면 문 밖인 셈이다. 부정한 몸이기 때문에 성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부정한 것은 인간인데 자기들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해 놓고, 그 짐승은 부정하니 성 밖에서 살라 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 세계가 망하지 않고 이렇게라도 유지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종교다.

오늘 본문으로 택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죽으심이 딱 이 모델과 같다고 해석하고 있다. 예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영문 밖인 골고다 언덕에서 죽임을 당하셨고 그 피는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깨끗함을 받게 되고 인류 세계가 망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예수의 피가 속죄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예수의 그 공로가 없다면 누가, 어느 시대가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덧붙인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

이것이 덧붙인 말씀이다. 속죄의 피를 믿는 데 머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그분이 치욕을 겪으시고 계신 영문 밖으로 나가 함께 겪자는 것이다. 예수처럼 당하는 그 당함 때문에 그 시대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도 당하러 가자 한다. 그렇다. 예수는 구약 시대 제물이었던 짐승처럼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렸다. 그 주검은 영문 밖에 버려졌다.

그러나 예수는 구약 종교를 뛰어넘으신다.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의 부활이 무엇인가? 죽음이 인간들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라면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 세계를 의에 세워 놓는다. 구약 시대는 속죄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예수에게 와서는 속죄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을 바로잡는 예수의 저항으로 이어진다. 예수의 저항, 그것이 부활이다.

오늘이 마침 5ㆍ18 17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이 주일이 아니었으면 나는 마땅히 광주에 가 있었을 것이다. 5ㆍ18 광주가 무엇인가? 전두환, 노태우 등이 자신들의 집권 야욕을 위해 내란을 획책했다. 광주를 택하여 학살하고, 그들에게 온갖 죄를 뒤집어씌웠다. 지난 17년 동안 전ㆍ노와 우리는 광주를, 호남을 영문 밖으로 밀어냈다. 과격하고 용공적이라는 인상을 뒤집어씌웠다. 시대를 혼란케 하는 불순 세력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씌우고, 그들을 희생시킴으로써 우리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살인자들은 대통령이 되고 나라를 지배할 수 있었다. 우리는 광주를 희생시켜 우리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주를 택하여 죄를 뒤집어씌우고, 자기들이 뒤집어씌워 놓고 부정하다 하고, 부정하니 고립시켜 영문 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현재를 유지해 왔다. 구약 종교의 재미를 누려온 것이다.

그러나 광주는 뒤집어쓰고, 모든 걸 포기해 버리지 않았다. 그 죽임을, 그 불의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십수 년을 저항했다. 1980년 5월 진압군은 폭도가 되었고, 그때 폭도로 선고를 받았던 그들은 이제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 것이다. 5ㆍ18은 국가기념일이 되고. 망월동 묘역은 성역화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이 대이변의 의미는 무엇인가?

영문 밖으로 끌려 나가 죽임을 당한 ‘5ㆍ18’이 부활한 것이다. 1980년 5월 18일에 일으킨 광주의 저항이 오늘에 이르러 끝내 부활한 것이다. 죄를 뒤집어씀으로써 지난 17년이 보존될 수 있었다면 5ㆍ18이 부활함으로써 이 나라에 드디어 정의가 세워진 것이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광주 사건 해결을 위해 비교적 그 복판에 서 있었다. 전두환, 노태우 등 35명을 내가 대표하여 검찰에 고발했다. 1994년 5월 13일, 그들을 고발할 때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이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5ㆍ18을 부활시켜 주소서.”

나는 오늘 5ㆍ18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우리의 역사의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실감하며 일했다.

악의 세력은 저항을 불용한다. 오히려 그에게 온갖 것을 뒤집어씌워 영원히 매장하려 한다. 결국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면 오히려 부활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 개인도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운다. 그래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 종교의 한계에 머무는 것이다. 뒤집어씌움을 받은 그가 저항하는 것이 ‘예수의 부활’이다. 그래야 그 관계가 바로잡아진다. 그래야 모두가 살게 된다.

전직 대통령 둘이 퇴임하자마자 감옥으로 가더니 현직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기도 전에 더러운 뒷구멍을 몽땅 드러내고 있다. 부도덕스럽고 기만적인 승부사의 추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야 말았다. 세계 어느 나라에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된 예가 있는가?

참으로 부끄러운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을 위기라 한다. 나라에 중심이 없다고 한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어떻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인가? 5ㆍ18 광주가 부활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5ㆍ18을 부활시켰다. 5ㆍ18을 부활시킨 우리가 이 나라의 중심이다. 중심이 없지 않다.

수도교회는 저항하는 교회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악에 도전하는 교회가 된다.”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히지 않았던가! 1970년 3선 개헌 때 우리는 반대 성명을 당당하게 발표했다. 정부는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못하게 기업들을 얼러댔고, 신문은 광고란을 백지로 내기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했는가? 돈을 거둬 교회 이름으로, 여신도회 이름으로, 자모회 이름으로, 요나회 이름으로, 빈 광고 지면을 채우지 않았던가! 이것이 수도교회다. 이것이 그분에게로 나가 그분이 겪으시는 치욕을 함께 겪는 것이다. 이것이 저항이다. 그래서 끝내는 정의의 부활을 일구어내는 것이다. 아니, 이것이 성령의 인도에 순복하는 것이다. 저항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다. 세상의 온갖 악에 도전하는 교회야말로 살아 있는 교회다.

다음 주일에 새 담임 목사님이 취임하게 된다. 새로운 각오가 있게 되기를 바란다. 가장 중요한 것을 희망하고, 결단하고 다짐하기를 바란다. 목사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요구하시기 바란다. 목사가 이런 일을 하도록 하라. 이 교회가 악에 도전하는 교회가 되게 하라. 살아 있는 교회를 만들라. 아니,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고 그분께 순종하라. 이것이 수도교회의 꿈이 되기를 바란다.

[히브리서 13:12] 영문 밖에 계신 주님에게로 나아가자 – 1991년 5월 10일, 김상근 목사

8월 25, 2026

영문 밖에 계신 주님에게로 나아가자

히브리서 13장 12절 / 1991년 5월 10일 / 고 강경대 군 빈소

김상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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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설교 전문]


나는 지난 1987년 이전의 젊은 죽음들을 빠짐 없이 찾아갔다. 가서 애도를 표하고 부모님들을 위로했다. 그런데 이번 경대의 죽음을 찾아올 수가 없었다. 아니, 여기 오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기보다 올 수가 없었다고 해야 정직한 표현이 될 것 같다. 부끄러워서다. 그 앞에 가서 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쳐 가는 공권력의 고삐를 그냥 방치한 채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가 이런 멀쩡한 희생이 나니까 가서 조문이나 한다는 것이 가증스럽게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은 어디 나뿐이겠는가? 여기 모인 우리 모두의 심정이 그랬을 것이다. 미친 공권력을 막지 못한 우리가 경대를 이 모양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끝내 오지 않는 것 또한 비 겁한 도피라고 여겨지기에 부끄러운 얼굴로라도 다시 경대의 죽음 앞에 나온 것 아닌가? 우리를 한 번 더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미친 공권력을 퇴치하는 일에 미력이라도 바치겠노라고 스스로 결단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시 젊은이의 죽음 앞에 선 것이다.

왜 오지 않겠다 했는가? 부모님들 얼굴 뵐 낯이 없기 때문 아니었는가? 경대는 그 부모님들만의 자식이 아니다. 미친 공권력 앞에 선 젊은이들은 그들을 낳은 부모들만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우리 모두의 자녀들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지키지 못했다.

우리들이, 오늘을 사는 성직자들이 바르게 살고 있다면 경대의 죽음은 이렇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영균이, 세웅이, 기설이 그리고 박창수 씨의 죽음도, 승희의 고통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경대와 영균이와 세웅이와 기설이와 박창수 씨의, 그리고 승희의 부모님들을 뵐 낯이 없어 이렇게 구차스러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뵐 낯이 없다고 오지 않는 것 또한 우리들의 도피이기에 낯없는 낯으로 여기 부모님 앞에 왔다. 비록 메마른 위로의 소리로 들리실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드리는 위로의 말씀을 받아 주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위로가 있으시기 바란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도 공권력에 타살되신 것이다. 함부로 휘두르던 공권력이 죄 없는 우리 주님을 십자가 형틀에 못을 박아 매달았다. 공권력은 망치로 대못을 예수님의 손과 발에 내리박았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절명케 했다.

경대의 죽음은 마치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죽음의 모양과 비슷하다. 예수님을 못 박은 망치는 오늘 쇠파이프가 되어 경대를 친 것이다. 옆구리를 찌른 창은 오늘 쇠파이프가 되어 경대의 가슴을 친 것이다. 이게 어인 일인가? 예수님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나? 예수께서 죄가 있어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다. 죄 없는 사람의 죽음이기에 그 죽음은 백성을 구하는 죽음이요 그의 고난은 온 인류를 살리는 고난이라고 성서는 적고 있다.

오늘 경대에게 이렇게 죽임을 당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경대가 이런 죽임을 당해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습으로 죽어 있다. 참으로 억울하다. 이 억울함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서의 증언 정신에 따르면, 그러기에 경대의 죽음은 이 백성을 공권력으로부터 구해내는 죽음이 될 것이다. 폭력의 악신들을 몰아내는 죽음이 될 것이다. 기어코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죽음이 될 것이다. 기어코 민주를 가져오는 죽음이 될 것이다. 기어코 통일을 가져오는 죽음이 될 것이다.

죽음이란 본래 외로운 것이다. 우리 주님은 외롭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시어 오늘 온 인류의 가슴과 삶 속에 살아 계시다. 경대도 홀로 외롭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경대는 어느새 수천수만으로 부활되고 있다.

나는 어제 오후 무거운 걸음으로 거리에 나섰다. 학생들이 걱정되어 그리고 격려하기 위해 거리에 나갔다. 종로에서도 을지로에서도 퇴계로에서도 수천 명씩 떼를 이룬 젊은 시위 학생들을 만났다. 당당하게 노래를 부르며 시청을 향하고 있었다. 다가가 그들을 격려했다.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기 쇠파이프가 있는데, 직격탄이 있는데, 그래도 너희는 또 나서는구나!

그래, 경대는 어느새 부활하였다. 그래서 악한 공권력과 당당히 싸우는구나! 이 나라는 희망이 있다. 너희가 있어 희망이 있다.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저들을 보호해 주소서. 저들의 저 맑은 투쟁으로 이 나라를 건져 주소서. 더 이상 경대의 비극이 없게 도와주소서. 더 이상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몸부림 치는 부모가 있지 않게 하소서.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이 같은 고통과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서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에 귀를 모으자.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영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갑시다”(히 13:12).

경대는 죽음의 수치를 걸머지고 먼저 고난받으신 주님에게로 나아간 것이다. 주님은 그의 고난과 죽음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도 주님이 당하신, 경대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영문 밖에 계신 주님에게로 나아가자.

[히브리어 13:11-13] 성 밖으로 끌려갔던 이들 – 1981년 8월 6일, 김상근 목사

7월 06, 2026

성 밖으로 끌려갔던 이들

1981년 8월 6일 / 히브리서 13장 11-13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인간의 세계는 합리적인 세계가 아니다. 인간 문화란 오히려 남의 희생만을 추구하는 피의 문화이다. 성문 밖에서 숨져간 예수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일본 땅에서 숨져간 원자폭탄의 희생자들은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 나는 대단히 생소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가 나에게 생소하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지금 느끼고 있다. 여러분이나, 또 먼저 가신 7만여 원자폭탄의 피해자가 계셨음으로 이 나라의 역사가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이 땅 모든 사람들처럼 나 자신도 절감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여성연합회를 통하여 원폭 희생자에 대한 소식을 간간히 들어 왔으나 이처럼 직접 뵙게 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참으로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인간의 세계는 반드시 합리적인 세계가 아니다. 선한 사람, 착한 사람,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되게 살아야 하겠는데 꼭 그렇지를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무 죄없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것을 얼마든지 경험한다. 우리가 오늘 추도하고 있는 7만여 원폭 희생자가 그렇게 희생을 당해야만 했던 이유가 그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한 고난을 겪어야 할 만큼 죄가 있는 것도 아닌데, 3만여 생존자는 지난 36년간을 참으로 어렵게 살아오고 있지 않는가? 억울한 죽음과 억울한 고통으로 차 있는 곳이 인간 세상이다.

이유없이 특별한 고난 중에 있었던 가장 비극적인 사람은 2천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서 사셨던 예수라는 분이다. 훌륭하신 일생대로 한다면 그 분이야말로 호화롭고 영광스럽게 죽으셨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렸으며 창으로 찔려 그 나무 위에서 숨을 거두셨다. 그 당시로 본다면 가장 저주받은 생이요 가장 불행한 죽음을 당하셨던 것이다.

기독교는 원래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과 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씻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들의 불행을 몰아내기 위하여 제사를 드렸다. 그들의 제사법은 매우 특이했다. 염소를 성 안에서 잡아 그 피를 뿌리고 가죽과 고기와 똥은 성 밖으로 내다가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그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빨고 몸을 씻은 후에야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책임짐으로써 속죄와 안전을 얻고자 하지 않았다. 언제나 자기들 대신 피를 흘릴 다른 속죄물을 찾는다. 피는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으로 이해되었다. 말하자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책임을 져 보낼 생명을 찾았던 것이다. 그 염소들은 희생제물이다. 희생이 되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제물이다. 대대로 이 일을 되풀이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존속되어 왔다. 이것은 인간 문화란 도대체 얼마나 비정한 것이며 사람의 세계는 피의 문화임을 말해 주고 있다. 짐승의 피 위에 세워지던 인류 역사는 급기야 인간들의 희생 위에 세워지는 역사가 되고 말았다.

36년 전 일본 땅에서 숨져간 원폭 희생자들은 누군가? 그들은 염소들이다. 일본인에게 붙들린 희생제물 염소들이었다. 아니 미국을 비롯한 온 세계 인류의 위기를, 위험을 지고 숨져가도록 붙들려 죽은 희생제물 염소들이다. 마치 이스라엘인을 위하여 붙들려 죽임을 당했듯이 원폭 피해자들 역시 일본에 의하여 붙들렸고 끌려갔고 피를 뿌렸던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피를 뽑아 뿌린 다음 성문 밖으로 그 짐승의 몸뚱어리 등을 가지고 나가서 불태워 버린다. 마치 완전 범죄라도 꾸미려는 것처럼 느껴지는 행위다. 불태워 없애 버리면 영원히 잊혀져 버린다. 아무리 짐승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하여 피를 흘리게 한 염소에 대해서 미안스런 생각 정도는 가져야 한다. 혹 감상적인 말을 하자면 무덤이라도 만들어 줌직한 일인데 오히려 불태워 없애 버렸다. 잊어 버리자는 심리가 있었던 것일까? “성문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는 것은 자기들의 생활권 밖으로 몰아내 버리는 것이요 완전히 소외시켜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그렇다. 자기들의 안전을 위하여 피흘리게 한 희생제물들을 성문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 소외시키고 거들떠 보지도 않겠다는 작정이다. 급기야는 불태워 그 형체를 없애 버리는 것처럼 완전히 잊고 만다.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는다. 심지어 문안조차 없다. 인간 관계의 회색빛 사각지대로 내버린다.

36년 전 일본 땅에서 숨져간 원폭 희생자들은 누군가? 그들은 어느새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간 사람이다.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는 사람이다. 소외되고 관심의 대상이 못 되는 사람이다. 불태워 날려 버린 것처럼 끌고 나갔던 장본인들인 일본에 의해서조차 망각되어진 사람이다.

불태우고 돌아올 때는 옷을 깨끗이 빨아 입는다. 자신이 저지른 비정한 행위를 이제는 완전히 과거의 것으로 돌려 버리는 것이다. 아무 관련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것이다. 오늘 나는 36년간이나 원폭 피해자에 대하여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일본에게서 이 모습을 보고 있다. 그들은 이제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풍요한 생을 즐기고 있다.

36년 전 여러분의 희생과 오늘날 여러분의 고통 속에서 인간들의 못된 속성을 발견한다. 나를 위해 네 피를 흘려내고 성문 밖으로 내던져 불태워 버린다. 여기, 아픈 가슴을 안은 희생제물들의 원성이 세상에 차 있다. 억울하고 슬픈 저들의 울부짖음이 세상에 이미 포만되어 있다.

이제 이 땅의 한민족을 일본 땅으로 끌고 갔던 일본의 회개를 촉구한다. 그래서 저 염소처럼 미국의 원자폭탄이라는 칼에 피를 흘리게 했던 일본, 그리고 그들을 불태워 잊고 있는 일본은 회개해야 한다. 죽임을 당한 자가 있는데도 옷까지 깨끗이 빨아 입고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일본의 회개를 촉구한다.

이런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남의 희생 위에 서는 사회, 남의 피를 딛고 서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이다. 자신의 짐을 대신 지게 한 저들에 대하여 그 짐을 지운 자는, 그가 개인이건 국가건 단체이건, 언제까지라도 채무를 느껴야 한다. 그들의 회복을 위하여 성실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은 반드시 일본만을 전제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사실을 교훈 삼아 남의 희생 위에 이 사회를 건설하려는 뜻을 포기해야 한다. 남의 피를 딛고 세워지는 권력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엄숙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희생제물이 되었던 우리의 입장은 어떤가? 여러분과 먼저 가신 7만여 희생자들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겠는가?

희생제물의 가장 전형적인 표본은 예수님이다. 그는 붙잡혀 마치 희생제물 염소처럼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끌려 가서 거기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잡아 죽였다. 그러나 그는 희생자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죄를 속하는 거룩한 것이었다. 우리는 잘난 체하며 죽였던 저들을 숭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임을 당한 예수를 숭상한다. 억울하고 분한 우리의 가슴을 식히고, 찌들리고 아픈 현실을 초월하여 예수를 쳐다볼 수 있다면 거기에 영원한 위로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 우리의 죽음은 값없는 것이 아니라는 거룩함을 오히려 깨닫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이 땅을 속죄했다. 비록 천부당 만부당하게 제물이 되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땅을 속죄한 것이다. 여러분의 고통이 오늘 이 나라를 세워 놓고 있다. 7만 희생자가 이렇게나마 오늘 세계 평화를 유지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7만여 희생자와 여러분 위에 하나님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아울러 한 동포의 아픔을 같이 나누는 우리 민족이 되기를 또한 기도한다.


[회상 노트] 6ㆍ25와 교회

민족의 통일을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을 규탄했다. 아직까지 통일논의는 국민들 사이에서는 금기였다. 자칫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감옥살이를 하게 될 때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민족통일을 주도할 도덕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광주의 대학살, 삼청교육대, 온갖 숙청으로 손 가득히 피를 담고 있었다. 그가 민족통일의 성업에 끼어드는 것은 순전히 정략이었다.

그런데 교회지도자들이 또 때를 만난 것이다. 궐기 대회를 하고 6ㆍ25 상기 대부흥회를 한다. 김일성은 회개하고 전두환 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의를 즉각 수락하라는 것이 메시지였다. 구역질이 났다. 물론 김일성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을 수 있다. 그것은 나에게도 강하게 있다. 그러나 권력에의 아부가 그들의 본질이다. 정권이 반공하면 반공할 것이고 정권이 화해를 말하면 또 화해를 목소리 높여 주장할 것이다.

교회지도자들은 북한선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몽매한 교인들의 속주머니를 털어 기금을 마련하고 활동비로 쓰고 자동차도 산다.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닌다. 교인들이 그것을 용납하니 거짓 지도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전두환의 내심을 폭로해야 했다. 분단극복의 의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두환과의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교인들이 역사의 주체로 서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의 통일 몸짓에 동의를 보내서도 안 된다. 정권적 차원에서 만의 하나 통일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겨레 모두에게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민이, 남과 북의 민이 주체가 되어서 통일을 당기게 되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우리 남쪽에 공산주의의 노선에 동조하게 될 취약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빈부의 격차가 현저하고, 공동체의식이 무너진 곳에 공산주의의 평등과 정의 주장이 스며들게 되어 있다.

공산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규탄대회와 적개심 고취에 있지 않다. 평등과 사회 정의를 세우는 데 있다. 교회가 가난한 자 편에 서기를 꺼리고 고난받는 자와 일치하기를 두려워하는 한 공산주의는 우리에게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전두환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이 되기에 우리는 통일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야 한다. 바른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성 밖으로 끌려 갔던 이들”은 원폭피해자들을 위한 기도회에서의 설교이다. 그들 피해자들에게 우리는 한없는 빚을 지고 있다.

[히브리서 12:1-11] 견디며 달려갑시다 – 1976년 10월 3일, 김상근 목사

6월 19, 2026

견디며 달려갑시다

1976년 10월 3일 / 히브리서 12장 1-11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거룩한 고투와 하나님의 나라

모두가 지쳤다. 설교 듣기에 지쳤고 당국의 이런저런 간섭과 압력을 감당해 내기에 지쳤다. 누구인들 지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주일예배 후에 점심을 함께 하자는 권사 한 분이 계셨다. 학벌도 낮고 배경도 없는 분이었다. 그런데도 사업이 크게 성공하여 굉장한 부를 쌓았다. 나를 만나고서 비로소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목사인 나에게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점심식사가 다 끝났는데도 특별한 말씀이 없었다. 건널목에서 파랑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을 건너면 서로 헤어지게 되어 있었다. 슬그머니 내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다. “목사님, 너무 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너무 힘듭니다.” 참으로 미안한 말투였다. 점심을 함께 먹으며 긴 시간을 보냈지만 이 한마디 말을 하기가 그렇게도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잘 알겠노라 했다.

그 날, 그 일 이후 내 마음속은 힘들어 하는 교인들로 가득 찼다. 그렇지, 교인들이 얼마나 힘들까! 살기도 힘들 게다. 무서운 세상이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주일예배에 오면 설교로 내리치고 몰아 세우니 얼마나 힘들까!

교인들을 격려할 필요가 있다. 용기를 가지게 해야 한다. 축복도 해야한다. 축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축복을 제 욕심으로만 구하고, 쓰는 것이 문제다. 축복도 하자.

이리해서 시작한 설교다. 그러나 성서를 펼쳐보니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성서는 고난을 뚫고 새로운 가치를 이루어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축복이라는 것이다. 격려하자고 시작한 설교가 또다시 곧게 가자는 것으로 채워졌다. 성서가 그러한데 어찌할 것인가! 기독교의 진리가 그런 것인데 다른 도리가 없다.

오늘 우리의 행진이 무엇이며 그 의미는 어떤 것인가를 밝혀 가게 되었다. 힘들고 어려우니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권면하고 권면을 받아들이고, 광야 40년을 성공적으로 가자 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고통도 당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훈련이라 하고 말았다.

무슨 대가를 바라는 행동은 기독교적이 아니다. 선을 행하는 것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이 곧 축복의 약속이라 설교하고 말았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씨가 뿌려졌노라고 설교하고 말았다. 교인들을 향한 애틋한 정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나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기독교의 본질이 그러한 것이었을까?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예수를 알았고 신앙을 가졌기에 감수해야만 하는 고난과 손해를 가끔 경험하게 된다. 그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가? 그런 고난과 손해를 감수했던 신앙의 선조들은 왜 그것을 감수해 나갔으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가?


[슬라이드]

견디며 달려갑시다

권력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지친 교인들

기독교의 진리는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그 처음 시절'의 경험이 오늘 재현되다

고난은 형벌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를 향한 '훈련'입니다.

'경건의 훈련'에 대한 본질적 재정의

하나님의 자녀로 다듬어지는 4가지 실천적 훈련

세상의 눈에는 '바보 이반'처럼 보일지라도

거룩한 훈련을 가볍게 여기고 낙심하는 위기

우리는 이 거룩한 역사의 줄기 끝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고투 끝에 영글어가는 하나님의 나라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경주를 방해하는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 벗어버리기

고난을 기쁘게 당하는 인내의 건축학

무거운 짐을 벗고, 견디며 달려갑시다.


[설교 전문]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러분”은 누구겠으며 “그 처음 시절”이란 어떤 때였는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일 것이다. 그들은 여기 ‘처음 시절’이라고 표현된 황제 네로의 박해를 받았던 경험이 있었는데 또다시 지금도 박해의 현실 속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일제말기에 경험한 말할 수 없는 박해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필자는 이 모든 박해란 사실 ‘너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훈련이 아니겠느냐’ 하는 충고를 주고 있다.

6절에는 ‘주는 사랑하시는 자를 훈련하시고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엇이나 목표를 달성하고 어떤 자격을 갖자면 훈련이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군인이 되자면 군인으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하고, 사무원이 되자면 사무원으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하고, 어머니가 되자면 어머니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아 그가 주시는 축복을 누리고 그의 분부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에도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훈련을 받지 않고 있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 자요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자가 아니라는 입장이 히브리서 기자의 입장이다.

그러나 기자가 살피건데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서 이 훈련의 문제에 이상이 생겼다고 판단된 것이다. 그 문제가 무엇이냐? 저들이 자신들이 받고 있는 훈련을 가볍게 여기거나 또 그것 때문에 오히려 낙심하게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5절).

훈련이란 무엇이었느냐? 또 누구를 훈련하시느냐? 흔히 한국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훈련이라면 무엇을 생각하느냐? 외형적인 경건의 훈련을 주로 생각한다. 기도, 교인답다고 생각되는 몸가짐, 예배에 참예하는 규례 ……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훈련이란 외형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이요 삶의 모양보다는 삶의 질의 문제였다. 다시 말해 서신의 수신자가 처해 있는 박해 바로 그것이다.

그 훈련이란 10장 32-34절에 나타나 있다. (1)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는 것. (2) 그런 형편에 있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것. (3) 감옥에 갇힌 자를 동정하는 것. (4) 자기 재산을 빼앗기는 어려움을 견디는 것. 이런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을 땅에 사는 거룩한 백성,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들의 삶의 자리에 이룩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훈련시켜 오셨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상식을 넘어선 훈련들이다.

이런 훈련은 누가 경험하게 되느냐? 양斗과 정의와 사랑과 평등을, 인권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다. 어떠한 “일을 당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일을 기쁘게 당했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받는 박해, 그것을 치르고라도 누려야 할 더 좋고 더 영구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만이 이 훈련을 받아내는 것이다. 눈치를 보며 의를 굽히고 거짓을 말하여야만 하는 세상보다는 양심을 누리며 정의와 사랑, 평등과 인권이 펴진 세상이 더 좋고 더 영구한 것임을 알 뿐 아니라 기어코 이 같은 세계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고야 말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받는 박해는 참으로 크다. 그런 사람들은 모욕과 환난을 당해서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모욕과 환난을 당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도 하며,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동정하게도 되고 그러다가 커다란 손해를 보게도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모욕과 환난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말할 수 없는 모욕과 환난을 당했으나 그것은 결코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친구가 된다는 것도 자신의 이해타산 때문이 아니다. 또 감옥에 갇힌 자를 동정하는 것도 예사스런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행위를 말하는 정도는 아니다. 자기 재산을 빼앗기는 경우를 당하는 것도 더 갖고 덜 갖는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의 근거와 목표, 가치를 이 세상의 것과는 온전히 다르게 가지려 하기 때문에 당하는 일들이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갈라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문 목사님은 어리석다. 지혜롭지 못하게 되지도 않을 일을 하신다. 또 장사를 하다가 도저히 못하겠다는 교인들이 나온다. 거기는 그런 곳인데 그렇게 살 수는 없으니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볼 수도 있다. 바보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면회하고 왔다. (바보 이반을 만나고 왔다.) 좀 지혜롭지 못하게 …… 어리석게도, 그렇게 산다고 딴 세상이 오기나 하겠나…….

그러나 이것은 이들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이미 세상적인 것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저들은 세상을 이렇게 지혜있게 그리고 욕심에 차 살려는 것보다는 양심을 소중히 여기고 정의와 평등을 이룩하여 사랑이 자신의 삶의 세계에 퍼지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결코 이것은 어리석은 삶도 아니요 바보스런 걸음일 수도 없다. 이런 사람들은 “그보다 더 좋고 영구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고 그 일을 오히려 기쁘게 당했다”는 것이다(10:34b). 결국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훈련을 받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런 훈련을 받고 산 사람들은 로마에 있는 너희뿐 아니라 각 세대마다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 앞에 긴 예를 들어 늘어 놓고 있다. 아벨에게서 시작하여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스라엘 사람들,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 ―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이 거룩한 역사의 줄기가 아벨에서 시작하여 지금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 로마에 있는 교인들아! 너희는 이 훈련, 이 걸음을 가볍게 여기고 또 이런 걸음 때문에 오히려 낙심을 하니 웬일이냐?

“내 아들아, 주의 훈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 낙심하지 말라”(5b절).
“주께서 여러분을 훈련하시거든 그것을 견디어 내시오”(7절).

로마의 교인들은 이 사실을 망각했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초석이 되는 소중하고 거룩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것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신념과 생활을 하기에 지금 내가 당한 꼴이 무엇이냐고 낙심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저 선조의 반열에 서서 살아간다면 너희는 이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늘의 역사, 하나님 나라를 이룩해 가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역사에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이 닿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보슬비처럼 내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바로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못 되었던 것입니다”(11:38)고 했듯이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려움과 고투의 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이 고투, 이 모욕, 이 환난, 이 마음, 이 손해 一 그런 것들 끝에 영글어 간다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길을 걷도록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로마의 교인들처럼 이 길이 얼마나 소중하며 이 길이 과연 무엇을 탄생시킬 것인가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에 빠지고 또 낙심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며 낙심하여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이 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내가 지금 당하는 작은 모욕, 작은 환난, 또 그런 사람들을 위하고 저들의 편에 서는 이 노력, 감옥에 갇힌 자, 양심과 정의와 평등과 사랑 때문에 감옥에 갇힌 것처럼 오늘을 어렵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 편에 서는 숭고함, 경우에 따라서는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을 포기하여 내어 놓게도 되고 또 소유의 기회까지도 포기하게 되는 이 고투 一 이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냥 나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벨에게서부터 시작된 거룩한 백성의 반열에 서 있는, 그래서 결국 이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삶의 자리에 끼우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고투의 길을 걷고 있다면, 그것이 그리스도 때문이요, 그것이 정의 때문이요, 그것이 평등 때문이요, 그것이 자유 때문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면 ― 그렇다면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반열 위에 분명히 서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보자! 저는 이 사실을 보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를 참으셨지 않느냐?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지 않느냐?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바라보고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12: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러고나서 이 훈련을 견디어 나가야만 한다.

이 훈련을 가볍게 여긴다니, 또 이것 때문에 낙심을 한다니 웬말이냐?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길을 걷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 기자는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경주자가 경주를 잘하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경주에 필요한 것 이외의 것은 훌훌 벗어던져 버려야 한다. 그런데 너희가 주의 훈련의 이 경주장에서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그대로 짊어지고 몸에 휘감은 채 오히려 이 훈련을 가볍게 여기고 또 오히려 후회와 낙심까지 한다는 것이다.

여기 본문에 무거운 짐이 무엇이고 얽매이기 쉬운 죄가 무엇이냐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다만 이 훈련을 견디어 나가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가야만 하는 이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틀이 디모데전서 6장 11-12절에 있다.

“아!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것들을 피하고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시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오.”

여기서 ‘피하라’고 하는 “이것들”이란 무엇인가? 6장 4-10절에 보면 피해야 할 것들은 교만과 지나친 욕심과 탐욕과 배금주의이다. 그리고 또 한 군데 빌립보 3장 1-11 절에서는 우리를 얽매이게 하고 또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은 우리 자신 속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우리를 쉽게 넘어지게 하는 헛된 자랑, 들뜬 마음, 습관이나 약점 등이라 하고 있다. 결국 이런 것들이 로마의 교인 사이에 있어서 저들로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거룩한 훈련의 길을 가볍게 여기고 또 낙심까지 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친구들 사이에, 그리고 이 사회, 이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려는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얽매는 죄가 무엇인가? 무거운 짐이 무엇인가? 우리에게도 교만과 지나친 욕심과 탐욕과 배금주의, 헛된 자랑, 들뜬 마음, 습관 따위가 아니겠는가? 이것을 벗어 버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반드시 가야만 할 경주의 길을 견디며 달려 가자. 이것을 벗어 버리려는 작은 노력을 포기하지 말자. 당신의 달려감 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세계를 축복하시고 그 속에 당신의 완성이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 14-19절] 거짓된 하늘의 우상들을 꺾으신 창조의 빛, 오직 주권자만을 향한 우주적 헌사

거짓된 하늘의 우상들을 꺾으신 창조의 빛, 오직 주권자만을 향한 우주적 헌사 [본문] 창세기 1장 14절-19절 1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절: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