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며 달려갑시다
1976년 10월 3일 / 히브리서 12장 1-11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거룩한 고투와 하나님의 나라
모두가 지쳤다. 설교 듣기에 지쳤고 당국의 이런저런 간섭과 압력을 감당해 내기에 지쳤다. 누구인들 지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주일예배 후에 점심을 함께 하자는 권사 한 분이 계셨다. 학벌도 낮고 배경도 없는 분이었다. 그런데도 사업이 크게 성공하여 굉장한 부를 쌓았다. 나를 만나고서 비로소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목사인 나에게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점심식사가 다 끝났는데도 특별한 말씀이 없었다. 건널목에서 파랑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을 건너면 서로 헤어지게 되어 있었다. 슬그머니 내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다. “목사님, 너무 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너무 힘듭니다.” 참으로 미안한 말투였다. 점심을 함께 먹으며 긴 시간을 보냈지만 이 한마디 말을 하기가 그렇게도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잘 알겠노라 했다.
그 날, 그 일 이후 내 마음속은 힘들어 하는 교인들로 가득 찼다. 그렇지, 교인들이 얼마나 힘들까! 살기도 힘들 게다. 무서운 세상이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주일예배에 오면 설교로 내리치고 몰아 세우니 얼마나 힘들까!
교인들을 격려할 필요가 있다. 용기를 가지게 해야 한다. 축복도 해야한다. 축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축복을 제 욕심으로만 구하고, 쓰는 것이 문제다. 축복도 하자.
이리해서 시작한 설교다. 그러나 성서를 펼쳐보니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성서는 고난을 뚫고 새로운 가치를 이루어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축복이라는 것이다. 격려하자고 시작한 설교가 또다시 곧게 가자는 것으로 채워졌다. 성서가 그러한데 어찌할 것인가! 기독교의 진리가 그런 것인데 다른 도리가 없다.
오늘 우리의 행진이 무엇이며 그 의미는 어떤 것인가를 밝혀 가게 되었다. 힘들고 어려우니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권면하고 권면을 받아들이고, 광야 40년을 성공적으로 가자 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고통도 당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훈련이라 하고 말았다.
무슨 대가를 바라는 행동은 기독교적이 아니다. 선을 행하는 것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이 곧 축복의 약속이라 설교하고 말았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씨가 뿌려졌노라고 설교하고 말았다. 교인들을 향한 애틋한 정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나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기독교의 본질이 그러한 것이었을까?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예수를 알았고 신앙을 가졌기에 감수해야만 하는 고난과 손해를 가끔 경험하게 된다. 그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가? 그런 고난과 손해를 감수했던 신앙의 선조들은 왜 그것을 감수해 나갔으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러분”은 누구겠으며 “그 처음 시절”이란 어떤 때였는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일 것이다. 그들은 여기 ‘처음 시절’이라고 표현된 황제 네로의 박해를 받았던 경험이 있었는데 또다시 지금도 박해의 현실 속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일제말기에 경험한 말할 수 없는 박해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필자는 이 모든 박해란 사실 ‘너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훈련이 아니겠느냐’ 하는 충고를 주고 있다.
6절에는 ‘주는 사랑하시는 자를 훈련하시고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엇이나 목표를 달성하고 어떤 자격을 갖자면 훈련이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군인이 되자면 군인으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하고, 사무원이 되자면 사무원으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하고, 어머니가 되자면 어머니로서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아 그가 주시는 축복을 누리고 그의 분부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에도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훈련을 받지 않고 있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 자요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자가 아니라는 입장이 히브리서 기자의 입장이다.
그러나 기자가 살피건데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서 이 훈련의 문제에 이상이 생겼다고 판단된 것이다. 그 문제가 무엇이냐? 저들이 자신들이 받고 있는 훈련을 가볍게 여기거나 또 그것 때문에 오히려 낙심하게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5절).
훈련이란 무엇이었느냐? 또 누구를 훈련하시느냐? 흔히 한국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훈련이라면 무엇을 생각하느냐? 외형적인 경건의 훈련을 주로 생각한다. 기도, 교인답다고 생각되는 몸가짐, 예배에 참예하는 규례 ……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훈련이란 외형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이요 삶의 모양보다는 삶의 질의 문제였다. 다시 말해 서신의 수신자가 처해 있는 박해 바로 그것이다.
그 훈련이란 10장 32-34절에 나타나 있다. (1)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는 것. (2) 그런 형편에 있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것. (3) 감옥에 갇힌 자를 동정하는 것. (4) 자기 재산을 빼앗기는 어려움을 견디는 것. 이런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을 땅에 사는 거룩한 백성,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들의 삶의 자리에 이룩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훈련시켜 오셨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상식을 넘어선 훈련들이다.
이런 훈련은 누가 경험하게 되느냐? 양斗과 정의와 사랑과 평등을, 인권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다. 어떠한 “일을 당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일을 기쁘게 당했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받는 박해, 그것을 치르고라도 누려야 할 더 좋고 더 영구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만이 이 훈련을 받아내는 것이다. 눈치를 보며 의를 굽히고 거짓을 말하여야만 하는 세상보다는 양심을 누리며 정의와 사랑, 평등과 인권이 펴진 세상이 더 좋고 더 영구한 것임을 알 뿐 아니라 기어코 이 같은 세계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고야 말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받는 박해는 참으로 크다. 그런 사람들은 모욕과 환난을 당해서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모욕과 환난을 당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도 하며,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동정하게도 되고 그러다가 커다란 손해를 보게도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모욕과 환난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말할 수 없는 모욕과 환난을 당했으나 그것은 결코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친구가 된다는 것도 자신의 이해타산 때문이 아니다. 또 감옥에 갇힌 자를 동정하는 것도 예사스런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행위를 말하는 정도는 아니다. 자기 재산을 빼앗기는 경우를 당하는 것도 더 갖고 덜 갖는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의 근거와 목표, 가치를 이 세상의 것과는 온전히 다르게 가지려 하기 때문에 당하는 일들이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갈라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문 목사님은 어리석다. 지혜롭지 못하게 되지도 않을 일을 하신다. 또 장사를 하다가 도저히 못하겠다는 교인들이 나온다. 거기는 그런 곳인데 그렇게 살 수는 없으니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볼 수도 있다. 바보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면회하고 왔다. (바보 이반을 만나고 왔다.) 좀 지혜롭지 못하게 …… 어리석게도, 그렇게 산다고 딴 세상이 오기나 하겠나…….
그러나 이것은 이들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이미 세상적인 것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저들은 세상을 이렇게 지혜있게 그리고 욕심에 차 살려는 것보다는 양심을 소중히 여기고 정의와 평등을 이룩하여 사랑이 자신의 삶의 세계에 퍼지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결코 이것은 어리석은 삶도 아니요 바보스런 걸음일 수도 없다. 이런 사람들은 “그보다 더 좋고 영구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고 그 일을 오히려 기쁘게 당했다”는 것이다(10:34b). 결국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훈련을 받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런 훈련을 받고 산 사람들은 로마에 있는 너희뿐 아니라 각 세대마다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 앞에 긴 예를 들어 늘어 놓고 있다. 아벨에게서 시작하여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스라엘 사람들,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 ―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이 거룩한 역사의 줄기가 아벨에서 시작하여 지금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 로마에 있는 교인들아! 너희는 이 훈련, 이 걸음을 가볍게 여기고 또 이런 걸음 때문에 오히려 낙심을 하니 웬일이냐?
“내 아들아, 주의 훈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 낙심하지 말라”(5b절).
“주께서 여러분을 훈련하시거든 그것을 견디어 내시오”(7절).
로마의 교인들은 이 사실을 망각했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초석이 되는 소중하고 거룩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것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신념과 생활을 하기에 지금 내가 당한 꼴이 무엇이냐고 낙심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저 선조의 반열에 서서 살아간다면 너희는 이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늘의 역사, 하나님 나라를 이룩해 가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역사에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이 닿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보슬비처럼 내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바로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못 되었던 것입니다”(11:38)고 했듯이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려움과 고투의 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이 고투, 이 모욕, 이 환난, 이 마음, 이 손해 一 그런 것들 끝에 영글어 간다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길을 걷도록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로마의 교인들처럼 이 길이 얼마나 소중하며 이 길이 과연 무엇을 탄생시킬 것인가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에 빠지고 또 낙심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며 낙심하여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이 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내가 지금 당하는 작은 모욕, 작은 환난, 또 그런 사람들을 위하고 저들의 편에 서는 이 노력, 감옥에 갇힌 자, 양심과 정의와 평등과 사랑 때문에 감옥에 갇힌 것처럼 오늘을 어렵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 편에 서는 숭고함, 경우에 따라서는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을 포기하여 내어 놓게도 되고 또 소유의 기회까지도 포기하게 되는 이 고투 一 이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냥 나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벨에게서부터 시작된 거룩한 백성의 반열에 서 있는, 그래서 결국 이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삶의 자리에 끼우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고투의 길을 걷고 있다면, 그것이 그리스도 때문이요, 그것이 정의 때문이요, 그것이 평등 때문이요, 그것이 자유 때문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면 ― 그렇다면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반열 위에 분명히 서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보자! 저는 이 사실을 보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를 참으셨지 않느냐?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지 않느냐?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바라보고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12: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러고나서 이 훈련을 견디어 나가야만 한다.
이 훈련을 가볍게 여긴다니, 또 이것 때문에 낙심을 한다니 웬말이냐?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길을 걷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 기자는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경주자가 경주를 잘하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경주에 필요한 것 이외의 것은 훌훌 벗어던져 버려야 한다. 그런데 너희가 주의 훈련의 이 경주장에서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그대로 짊어지고 몸에 휘감은 채 오히려 이 훈련을 가볍게 여기고 또 오히려 후회와 낙심까지 한다는 것이다.
여기 본문에 무거운 짐이 무엇이고 얽매이기 쉬운 죄가 무엇이냐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다만 이 훈련을 견디어 나가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가야만 하는 이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틀이 디모데전서 6장 11-12절에 있다.
“아!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것들을 피하고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시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오.”
여기서 ‘피하라’고 하는 “이것들”이란 무엇인가? 6장 4-10절에 보면 피해야 할 것들은 교만과 지나친 욕심과 탐욕과 배금주의이다. 그리고 또 한 군데 빌립보 3장 1-11 절에서는 우리를 얽매이게 하고 또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은 우리 자신 속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우리를 쉽게 넘어지게 하는 헛된 자랑, 들뜬 마음, 습관이나 약점 등이라 하고 있다. 결국 이런 것들이 로마의 교인 사이에 있어서 저들로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거룩한 훈련의 길을 가볍게 여기고 또 낙심까지 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친구들 사이에, 그리고 이 사회, 이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려는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얽매는 죄가 무엇인가? 무거운 짐이 무엇인가? 우리에게도 교만과 지나친 욕심과 탐욕과 배금주의, 헛된 자랑, 들뜬 마음, 습관 따위가 아니겠는가? 이것을 벗어 버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반드시 가야만 할 경주의 길을 견디며 달려 가자. 이것을 벗어 버리려는 작은 노력을 포기하지 말자. 당신의 달려감 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세계를 축복하시고 그 속에 당신의 완성이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