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극복과 하나님 나라의 축복
1976년 10월 10일 / 베드로전서 1장 5-7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거룩한 고투와 하나님의 나라
모두가 지쳤다. 설교 듣기에 지쳤고 당국의 이런저런 간섭과 압력을 감당해 내기에 지쳤다. 누구인들 지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주일예배 후에 점심을 함께 하자는 권사 한 분이 계셨다. 학벌도 낮고 배경도 없는 분이었다. 그런데도 사업이 크게 성공하여 굉장한 부를 쌓았다. 나를 만나고서 비로소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목사인 나에게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점심식사가 다 끝났는데도 특별한 말씀이 없었다. 건널목에서 파랑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을 건너면 서로 헤어지게 되어 있었다. 슬그머니 내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다. “목사님, 너무 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너무 힘듭니다.” 참으로 미안한 말투였다. 점심을 함께 먹으며 긴 시간을 보냈지만 이 한마디 말을 하기가 그렇게도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잘 알겠노라 했다.
그 날, 그 일 이후 내 마음속은 힘들어 하는 교인들로 가득 찼다. 그렇지, 교인들이 얼마나 힘들까! 살기도 힘들 게다. 무서운 세상이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주일예배에 오면 설교로 내리치고 몰아 세우니 얼마나 힘들까!
교인들을 격려할 필요가 있다. 용기를 가지게 해야 한다. 축복도 해야한다. 축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축복을 제 욕심으로만 구하고, 쓰는 것이 문제다. 축복도 하자.
이리해서 시작한 설교다. 그러나 성서를 펼쳐보니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성서는 고난을 뚫고 새로운 가치를 이루어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축복이라는 것이다. 격려하자고 시작한 설교가 또다시 곧게 가자는 것으로 채워졌다. 성서가 그러한데 어찌할 것인가! 기독교의 진리가 그런 것인데 다른 도리가 없다.
오늘 우리의 행진이 무엇이며 그 의미는 어떤 것인가를 밝혀 가게 되었다. 힘들고 어려우니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권면하고 권면을 받아들이고, 광야 40년을 성공적으로 가자 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고통도 당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훈련이라 하고 말았다.
무슨 대가를 바라는 행동은 기독교적이 아니다. 선을 행하는 것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이 곧 축복의 약속이라 설교하고 말았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씨가 뿌려졌노라고 설교하고 말았다. 교인들을 향한 애틋한 정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나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기독교의 본질이 그러한 것이었을까?
[말씀을 향한 물음]
사람은 누구나 지불한 것보다 더 큰 대가를 소망한다. 예수를 믿는 것 역시 그렇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교회에서 모든 인간이 바라는 보상의 소리를 들어 보지 못한다. 성서에 보상에 대한 말씀이 없는 것일까? 우리는 왜 보상과 위로의 말을 들으려 하는가? 성서가 주는 보상의 말, 위로의 말은 무엇일까?
[슬라이드]
[설교 전문]
보상을 강조하는 교회, 보상을 개의치 말아야 한다는 교회, 하나님 나라에는 보상 개념이 없다는 교회 등이 있다. 우리 교회는 제3의 교회에 속한다. 도대체 성서는 우리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성서에 상이나 대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에 관해 쓴 복음서 중 제일 먼저 씌어졌다는 마가복음보다는 뒤에 씌어진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상에 관한 언급이 빈번하다. 또 예수가 돌아가신 후 교회를 다스리고 교인들을 직접 상대하여 소위 목회를 하게 되었을 때에 씌어진 부분에 보상에 관한 말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에게 있어서는 보상, 대가 따위가 없는데 교인들을 유혹하고 붙잡아 매놓기 위해서 이렇게 된 것인가? 우리 교회에 이 사실이 없으니 우리도 뭔가 보상을 이야기하자는 것은 곧 교인들을 이것으로 붙잡아 매놓자는 것인가? 성서는 어떤 경우, 또 어떤 형식으로 보상을 말하고 있는가?
첫째, 보상과 대가는 어떤 행위를 한 자가 주장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20장 1-16절에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포도원 주인은 오후 5시부터 일한 사람에게도,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었다. 그러자 맨 먼저 온 사람들이 불평을 늘어 놓았다.
“친구여, 나는 당신에게 불공평하지 않았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지 않았오? 당신의 삯이나 가지고 돌아가시오.”
“그들은 주인에게 불평을 말했습니다. 마지막에 온 일꾼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건만 하루 종일 찌는 더위 속에서 땀을 흘려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은 대우를 당신은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농부들의 공로 주장이 거부당한다. 공로를 주장하고 대가를 요구하는 경우와 형식에서는 결코 성서는 보상을 말하지 않는다.
둘째,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에 보상을 주장하지 않는 경우, 말하자면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경우, 성서는 상을 말한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는 보상을 바라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라. …… 주여,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 ”
여기서는 무엇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상을 전제로 하는 사상은 없다. 우리 사이에서 말하기를 ‘우리 교회는 너무나 이런 것이 없다, 그저 무겁게만 된다, 상이 있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1/10을 내면 돈을 더 번다는, 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오면 천당간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비성서적이요, 정확하게 말하면 거짓이요 기만이다. 성서는 이런 식으로 보상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거짓을 듣고자 함이 아니요 기만을 당하고자 함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갚아 주신다. 그러나 갚아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 동기가 되는 행위가 아닌 경우만이다.
셋째, 또 하나의 보상은 주님의 뜻, 선을 위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는 자에게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를 위하여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 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으면 너희가 복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 5:10-11).
이것은 저들이 우리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으니, 주를 위해 모욕을 당했으니, 박해를 받았으니, 비난을 받았으니 나에게 상을 주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주장도 아니요, 또 상을 줄테니 박해를 받고 모욕을 당하고 비난을 받으라, 혹은 받아야 하겠다는 동기를 유발시키는 가르침이 아니다. 당시 예수 앞에 있는 자들 곧 그런 상태에 있는 자들을 보시고 위로하고 격려한 말이다. 오늘 본문은 이런 성격의 글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힘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벧전 1:5).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할 것입니다”(벧전 1:7).
이 편지는 기원후 90-100년에 기록된 것이다. 이 때가 어느 때냐 하면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 시대로서 94년부터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 정부의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던 때이다.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사이에 일어나더라도”(4:12),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더라도”(2:19)라는 말은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바로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 아래 있던 사람들이었고, 저들이 받는 박해는 불 속에 던져지는 것과 같은 극렬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전서는 이런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씌어진 편지다. 당시의 심한 박해를 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보내진 편지이다. 무엇 때문에 박해를 받았을까?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2:20).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있는 사람입니다”(3: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4:14).
여기서 시련과 박해를 꼭 로마 정부 때문에 당하는 것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정부로부터 받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주변으로부터, 가정, 직장, 타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받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선을 위해서 받는 것이고 의를 위해서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는 박해요 시련이다.
나는 우리 교인들이 나의 설교를 무거워하는 것을 안다. 위로를 구하고 안식을 찾는 것도 안다. 그리고 주일마다 좁은 길을 가자고 나는 거의 여러분께 애걸을 하고 있다. 난들 쉬운 말, 편안한 말, 귀에 좋은 말을 찾아낼 줄 몰라서 그러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들어야만 하는 그런 자리에 먼저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아무나 보고 위로의 말을 하고 그저 상대가 바란다고 쉽고 편하고 흐뭇한 말만 골라 할 수는 없다. 아무에게나 천당을 약속해 주고 예수의 피의 공로를 값싸게 뿌리고 다닐 수는 없다. 가짜 수표를 남발하듯 하나님 나라를 척척 안겨주는 척할 수는 없다. 값싸게 뿌려진 것은 허위다, 거짓이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당신께 예배드리러 나왔으니 이 나온 것을 보아서 우리를 위로하고 편안하게 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을 철회해야 한다. 또 덮어놓고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이며 또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의 힘으로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말’을 들으려는 우리의 마음을 먼저 깨끗하게 해야 한다. 또 나는 ‘그렇게 해주실테니 그것을 기대하고 여기 나오고, 그것을 기대하고 예수 그리스도 교인이 되고, 그것을 기대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으라’는 헛된 소리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성서에는 이런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선을 행하는 일에, 의를 위하는 일에,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에 이 편지를 받았던 교인들처럼 철저해져야만 한다. 이 거룩한 고투의 길을 우리도 저들처럼 가야만 한다. 가정 속에서, 일터 속에서, 나 자신에게서, 이 사회 속에서 거룩한 고투의 길을 가야만 한다. 가정을 하나님의 선한 가정으로, 우리의 일터에 의가 있도록, 이 사회에 그리스도의 뜻이 있기 위해 고투의 길을 가야 한다. 우리가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으려 한다면 이 편지를 받았던 사람들과 똑같은 상황 속에 있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우리의 기대와 요구를 정화시키자!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눈물을 뿌리며 주실 것이다. 그 말씀이 무엇일까? 우리가 이 편지를 받았던 사람들과 같은 상황에 있다면 이미 이 위로의 말씀을 들었을 줄 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힘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벧전 1:5).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선과 의와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고 그리고 시련을 받는다면 그 길은 분명히 힘들고 고달픈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나님의 힘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구원을 주신다니 어찌 그 길이 고달프기만 하고 무겁고 힘든 길이기만 하겠는가?
이런 걸음을 걷는 자가 되자.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듣자. 하나님이 당신의 힘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고 구원을 얻게 해주신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런 어려움 속에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한 단련이고 격려이다. 금도 좋은 금은 불 속에서 제련되어 소위 정금, 순금이 된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단련이다. 그런 시련을 통해서 여러분은 많은 사람 중에 순수한 믿음의 사람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선 때문에, 의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고달파져 있느냐? 고달파 하지 말자. 하나님의 칭찬, 영광과 영예가 여러분에게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여러분이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는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욕을 당하고 있는가? 또 이런 것을 위해 자신을 훈련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자신을 쳐 복종시키고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힘으로 보호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여러분은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격려와 위로의 말씀 속에서 오늘을 진지하게 살아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