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26-32] 하늘을 담은 씨 – 1976년 10월 17일, 김상근 목사

하늘을 담은 씨

1976년 10월 17일 / 마가복음 4장 26-32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거룩한 고투와 하나님의 나라

모두가 지쳤다. 설교 듣기에 지쳤고 당국의 이런저런 간섭과 압력을 감당해 내기에 지쳤다. 누구인들 지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주일예배 후에 점심을 함께 하자는 권사 한 분이 계셨다. 학벌도 낮고 배경도 없는 분이었다. 그런데도 사업이 크게 성공하여 굉장한 부를 쌓았다. 나를 만나고서 비로소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목사인 나에게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점심식사가 다 끝났는데도 특별한 말씀이 없었다. 건널목에서 파랑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을 건너면 서로 헤어지게 되어 있었다. 슬그머니 내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다. “목사님, 너무 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너무 힘듭니다.” 참으로 미안한 말투였다. 점심을 함께 먹으며 긴 시간을 보냈지만 이 한마디 말을 하기가 그렇게도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잘 알겠노라 했다.

그 날, 그 일 이후 내 마음속은 힘들어 하는 교인들로 가득 찼다. 그렇지, 교인들이 얼마나 힘들까! 살기도 힘들 게다. 무서운 세상이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주일예배에 오면 설교로 내리치고 몰아 세우니 얼마나 힘들까!

교인들을 격려할 필요가 있다. 용기를 가지게 해야 한다. 축복도 해야한다. 축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축복을 제 욕심으로만 구하고, 쓰는 것이 문제다. 축복도 하자.

이리해서 시작한 설교다. 그러나 성서를 펼쳐보니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성서는 고난을 뚫고 새로운 가치를 이루어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축복이라는 것이다. 격려하자고 시작한 설교가 또다시 곧게 가자는 것으로 채워졌다. 성서가 그러한데 어찌할 것인가! 기독교의 진리가 그런 것인데 다른 도리가 없다.

오늘 우리의 행진이 무엇이며 그 의미는 어떤 것인가를 밝혀 가게 되었다. 힘들고 어려우니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권면하고 권면을 받아들이고, 광야 40년을 성공적으로 가자 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고통도 당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훈련이라 하고 말았다.

무슨 대가를 바라는 행동은 기독교적이 아니다. 선을 행하는 것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이 곧 축복의 약속이라 설교하고 말았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씨가 뿌려졌노라고 설교하고 말았다. 교인들을 향한 애틋한 정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나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기독교의 본질이 그러한 것이었을까?


[말씀을 향한 물음]

거룩한 고투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받게 되는 관문이라고 했다.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언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인가?


[슬라이드]

하늘을 담은 씨: 거룩한 고투 속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

모두가 지쳐있던 시간, 1976년: 시대의 억압, 일상의 피로, 신앙의 무거움

어느 교인의 간절한 호소: "목사님, 너무 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너무 힘듭니다."

목회자의 번민과 성서의 역설

거룩한 고투가 축복의 관문이라면, 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있는 것인가?

엇갈린 시선들: 인간이 상상하는 세 가지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4장의 역설: 보이지 않는 생명력

패러다임의 전환: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우리의 토양: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치열한 현장들

신앙인의 또 다른 싸움: 내면의 마찰열

종합: 하늘을 담은 씨

지금 여기에서의 하나님 나라

결론: 일상 속의 거룩함


[설교 전문]

지난 시간에 (1) 광야 40년의 고투가 무엇을 교훈하느냐? (2) 우리의 고투를 견디며 달려 가자. (3) 시련을 극복하는 거기에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있다는 증언을 드렸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자주 썼다. 우리가 겪는 고투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우리를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했다.

현세에 만족하는 사람이란 거의 없다. 만리장성을 쌓고 불로초를 찾아 현세를 영원히 지속시켜 보려 한 진시황 같은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세란 언제나 불안하고 다 채워지지 못하고 아쉽고 불만족스런 곳이다. 또 여기는 인간의 욕심과 죄로 구멍이 뚫려 있어서 어느 선한 것, 즐거운 것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누구나 완전하게 선한 세상을 꿈꾸게 된다. 이상 세계를 기대하게 된다. 서로 죽이고 미워하는 이 세계에서 인간은 평화의 세계를 기대하게 되고, 죄에 끌리고 또 여러 가지 고생을 경험하게 될 때 선과 평안의 세계를, 죽음으로 슬퍼하며 가슴 에는 이별에 부딪힐 때 영원한 나라를 그리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각 자기가 아프게 부딪히는 세계에 따라서 각각의 하나님의 나라를 상상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영원한 세계, 이상적인 세계를 요청하고 우리의 아름다운 상상을 투영해 놓은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이런 세계를 성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일컬었을까?

현대인들이 가져온 발전은 참으로 놀랍다. 원시인들은 천둥을, 해와 고목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은 인간 만능을 자랑하게 되었고, 인간의 지성도 이제는 임금이 천하를 호령하고 한 사람 임금을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던 시대정신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곧 과학이 완벽하게 발달하고 정신적 능력이 고도로 발휘된 민주주의적 세계 국가, 전인류의 복지를 보장해 주는 나라를 꿈꾸고 있다. 이런 세계를 성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일컬었을까?

물론 구약성서의 이사야서 11장 6-9절에는 그런 세계가 그려져 있다.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무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뗀 어린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사 11:6-9).

이런 것이 어디에 세워진다는 말인가? 예수의 경우는 어떠한가?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퍽 많이 하셨다. 그의 첫 선포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였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곧 이런 때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하는 것이 실현될 것이라는 선포다. 말하자면 예수의 말을 듣고 회개하는 자는 이런 때를 누리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선포하셨다. 이것은 분명히 이 세상에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런 축복은 언제 어디서 실현되었는가? 실현된 바 없다. 여전히 죄와 악이 차 있고 불의와 재난과 곤고가 쌓인 대로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비참하고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의 바보며 그것으로 신병을 얻어 비극적으로 죽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예수의 선포 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불의하며 억울함이 있고 한숨이 있다. 오히려 예수 자신도 불의한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인간의 꿈도 예수의 선포도 세상 어디에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장소를 찾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누릴 것이라는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며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이런 모순을 극복하는 길을 너무 쉽게 찾고 안이하게 거기 주저 앉아버렸다. 하나님 나라란 이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곳이요 죽어 저 세상에 가서 누리게 되는 것이라는 출구다.

그러나 우리가 말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라는 것이 꼭 그런 것인가? 또 예수가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란 죽은 다음의 일일까? 그럴 수도 있다. 특히 바울의 경우는 이런 의도가 강하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5장 1절의 말씀 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들어 있는 지상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집입니다”(고후 4:16-5:1).

본문인 마가복음 4장 26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는 비유가 있다.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 것은 누구나 알아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씨가 자라가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에 저절로 자라고 사람의 힘을 빌지 않고 열매를 맺는다. 씨는 땅의 작용으로 자라며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수하게까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는 말은 그러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추수하게 되는, 최후의 심판 같은 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 함은 뿌려진 씨가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되는 전 과정을 가리키고 있는 말임에 분명하다. 어떤 장소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다는 말은 새겨 들어야 한다.

본문은 또 하나님 나라의 묘사와 설명을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한다. 여기서도 작은 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었다는, 큰 나무라는 데서 하나님 나라를 찾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초점은 작은 시작이 큰 나중으로 성장하는 겨자씨의 생명력이며 전 활동인 것이다. 큰 나무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아니고 겨자씨의 성장과정이 마치 하나님 나라의 존재 양태와 같다는 말이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위의 두 비유에서 나중, 결과만을 확대시킨다. 세상의 끝에 실현될 이상의 세계, 문화의 세계, 의의 나라, 혹은 심판 후에 누릴 영원한 저 세상이 곧 뿌려진 씨에서 열매가 맺은 것이요 겨자씨가 무성하게 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분명한 것은 결과를 떼어 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뿌려진 씨가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또 여러 사람의 주목 속에서가 아니라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사이에 알찬 낱알이 맺히게 되는 전 과정을 하나님 나라와 같다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님 나라를 묘사한다면 가장 작은 겨자씨, 보잘것없고 볼품없는 그것이 그 자체의 생명력으로 자라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무성하게 된다는 전 과정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그 과정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를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뿌려진 씨, 작은 겨자씨란 무엇이냐? 그 과정은 어떤 것이냐? 교인 가정을 심방하거나 개인적으로 상담을 하게 되면 당황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나는 교인들의 현장이 어디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청년들의 주관심은 사회정의, 자유, 인권, 등록금, 애정의 문제, 세대의 간격, 출세 등이다. 그리고 가정을 꾸려가는 남자의 경우는 경쟁 사회 속에서 지위와 장래에 대한 불안, 자녀의 교육 문제, 집 문제 등이, 부인의 경우는 시부모와의 문제,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불이해의 문제 등이 주관심의 대상이다. 그런데 나는, 아니, 성서는 계속해서 의와 정의와 평등과 자유, 언뜻 차원 높다고 여겨지는 것들만을 선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인들의 현장과 하나님의 경륜 사이에는 간격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륜이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당황하게 되고 번민하게 된다. 지난 1주일은 참으로 괴로운 경험을 하였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교육 여하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저들의 삶 속에 아픔과 고뇌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없다. 물론 그 성격은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씨앗이 자라는 것과 같다고 할 때 그 씨앗은 꼭 차원 높은 단어, 즉 평등, 자유들 속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것일까? 혹 우리의 현실의 고투가 바로 그런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를 묻고 싶다. 나는 작은 겨자씨, 그 과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갖은 고난의 길을 걸으며 가나안을 향해 가는 출발로 본다. 작은 모욕과 작은 환난, 또 그런 와중에 있는 자들을 위하는 마음 — 그런 것이라고 본다. 의와 선과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시련을 극복하려는 신앙이라고 본다.

가나안으로 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투가 나에게는, 나의 현실 속에서는 무엇일까? 신앙의 선조들이 당한 작은 모욕과 작은 환난이 나에게는, 나의 현실 속에서는 무엇일까? 의와 선과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시련이 나에게는, 나의 현실 속에서는 무엇일까? 그것이 열매를 맺게 하는 씨요 큰 나무가 되는 겨자씨라면 그 공통점은 작은 것,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무시받고 평범하고 가치없는 것으로 취급받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서 겪고 있는 고투라는 것은 바로 어디다 내놓고 이야기하기에는 부끄럽고 대수롭지 않은 것이고 무시받고 평범한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양심 저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요 신앙의 대지에 실뿌리를 뻗고 있는 것이라면 바로 그것이 ‘하늘을 담은 씨’이다. 그 씨가 어떻게 자라나?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게 해준다.

우리의 고민은 퍽 세속적이다. 돈을 벌어야겠다, 지위를 얻어야겠다, 억울하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출세하고 지위를 갖고자 경쟁하고 그러자니 어두운 마음과 행위가 나오고…… 그러나 그런 인간들의 싸움과 경쟁의 복판에서 싸우는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또 다른 싸움을 하게 된다.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인데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또 미워하지 않는 예수의 삶 때문에 또 하나의 다른 고투를, 속이고 빼앗는 비정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또 그렇게 사는 나에게도 그래서는 안 된다, 예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또 하나의 다른 고투를 하게 된다.

어떤 때는 이런 마음이 부질없고 어떤 때는 원망스럽게도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이 ‘하늘을 담은 씨’이며 그것을 키우는 것은 씨가 뿌려진 땅이다. 그것을 땅이 키울 때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케 해주는 것이요 그것을 소중히 여길 때 우리는 벌써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대단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 자신도 그렇다. 그러나 주의 말씀과 주님의 삶 때문에 미워하면서도 미워하지 못하는 그것을 통해, 속이고 빼앗는 비정의 현실 속에서도 머뭇거려지는 바보스런 결단을 통해 그 씨는 지금도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매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 겪는 작은 고난, 서로의 관계 속에서 맛보게 되는 씁쓸함, 알아 주지도 않는 고투 一 그러나 그것은 바로 하늘을 담은 씨요 지금도 자라나가고 있는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줄 때 거기에서 벌써 이 씨앗의 생명이 약동하고 있는 것이요, 눈물을 흘리는 사람, 절망하는 사람에게 베푼 사랑의 심정 속에 하나님의 나라는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씨앗을 키우면 우리는 심판의 때를 기다릴 것 없이 그 씨앗이 담은 하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씨앗을 소중히 여기면 죽음 저편을 넘겨다 볼 필요도 없이 지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거룩한 고투의 걸음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다른 어디서 찾을 수 없다. 제도와 규범으로 인간의 욕심과 살의를 다 묶어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그런 인간이면서 하늘을 담은 씨가 내 속에 있기에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고되고 억울한 삶 속에서라도 이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축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