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5:16-21] 옛것 속의 새것 – 1977년 1월 23일, 김상근 목사

옛것 속의 새것

1977년 1월 23일 / 고린도후서 5장 16-21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지나가버린 옛것, 실현되는 새것

나는 아직 40세에 이르지 않은 청년성직자였다. 몸을 던져 목회했고, 몸을 던져 세상을 바꾸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속절없이 또 한 해를 보냈고 다시 한 해를 시작한다. 이 한 해, 무슨 희망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간단 말인가. 가능성! 가능성! 과연 있는 것인가. 작년 한 해 그렇게도 애써 살았는데도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올해도 아무리 애써 보아도 가능성은 없는가?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저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어제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보여 주십시오. 가능성을! 사람이 바꾸어지고, 세상도 역사도 바꾸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힘들어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교인들이 슬슬 나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매주일 예배에 아니 나올 수 없어 나오지만 설교가 무섭다 하는 것만 같았다. 나도 너무 무겁고 힘들다. 듣는 사람도 힘들어 못 듣겠다 할 것만 같았다. 저들에게 격려가 필요하다. “당신들은 지금 변하고 있소. 당신들은 역사를 바꾸어내고 있소.” 이렇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데 어찌 그리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주여! 주님이시여! ……

아니다. 바뀜이 있다. 유엔이 그 해 1977년을 “양심수 석방의 해”로 가결하고 선포했다. 공산주의의 나라 체코에서 이른바 “77 헌장”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인권선언이었다. 역사의 전진이었다. 바뀌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관점을 바꾸면 변함도 보인다. 바뀜의 가능성,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에게 있는 것인가? 예수가 매맞고 짊어지고 앓고 고통을 대신 당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화해하시기에 가능하게 된다는 가르침이 나를 쳤다.

새것의 근거, 그것은 나, 우리, 나라에 있지 않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절대적 사랑! 그것이 가능성이구나! 새것, 바뀜의 가능성이 거기에만 있구나!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다시 나게 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교인들이 이 설교를 어떻게 받아 들일 수 있었을까?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해가 바뀌어 새해를 맞았지만 아무것도 새로워진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자신이 옛것대로요 우리 주변이 그렇고 세계가 옛 성품대로, 옛 질서대로 그냥 흘러가는 것 같다. 그래서 새 활력이 우리에게 없는 것일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삶의 새 활력을 얻게 되기를 원한다.


[슬라이드]

옛것 속의 새것: 고갈과 절망의 시대, 역사를 다시 읽는 패러다임의 전환

몸을 던져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1977년 회상 노트

현대의 역설 : 평화를 말하면서도 스스로 핵무기의 공포에 떠는 멸망의 시대

2000년을 관통하는 평행 이론 : 1세기 고린도, 1977년 세계와 한국

철저한 절망 속의 역설적 선언: 보시오,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습니다.

패러다임의 전환: 사물을 이해하고 평가함에 있어 인간적인 차원을 포기하는 것

변화의 주체는 누구인가?

두 가지 표준(육적인 표준, 그리스도 안의 표준)의 충돌

역사의 표면과 심층

관점을 바꾸면 비로소 변함이 보입니다

자아의 재발견: 우리는 헐값의 인간이 아니다.

새 창조물로서 역사에 참여하기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보시오,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습니다.


[설교 전문]

본문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퍽 감격적인 대목이다. 피땀을 쏟아 세운 고린도 교회에 파쟁이 생기고 바울은 그중 한 파로부터만 지지를 받게 되었고, 자신의 진실과는 달리 점점 위신과 신임이 떨어져 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교인 사이에 돈 때문에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사건이 생기는가 하면 성적인 문란도 여전하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그런 일에 대하여 충정어린 교훈을 보내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막무가내며 바울을 비난하기에 이른다. 바울의 고충과 고민은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충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인들에게 바울은 격분한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교회는 바울의 진실 앞에 고개를 숙이고 그와 다시 깊은 우의와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이 본문은 이렇게 된 후 활짝 피어진 마음으로 비로소 자신의 신앙을 간증하는 말이다.

나는 종종 오랜만에 만나는 분들로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라는 인사를 듣게 된다. 물론 이런 인사는 외모를 두고 하는 말이거나 혹은 행동하는 품세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로부터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보시오,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우리가 혹 거울 앞에 서서 자기의 모습을 본다면 자기의 여전한 모습을 언제라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우리 옆에 앉은 교우를 보아도 어제나 오늘이나 하나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한 교회에서 목회하신 목사님이 내게 주신 충고가 있다. 20년 이상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여 20살 때 알았던 사람이 이제는 40이 넘었고 그때의 장년들은 이젠 노년이 되어가지만 사람은 하나도 변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목회에서 너무 직선적인 기대나 목회의 결과나 전망 때문에 지나친 괴로움과 재촉을 하지 말라는 충고였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교인들에게 부담감과 피곤함만을 가중시켜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눈에 보이게 달라진다는 것은 확실히 예외이다.

우리 주변을 보아도 그렇다. 새롭게 되는 것이 없다. 새로운 구호와 새로운 약속은 세상에 가득 차지만 항상 마찬가지다. 지난 20일은 지미 카터라는 분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을 한 날이다. 나는 그의 취임사를 읽고 무언가 새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 전 대통령들도 커다란 공약을 던졌었다. 존슨 대통령은 “위대한 사회”를 제창했으나 스스로 월남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 그리고 닉슨 대통령은 “법과 질서의 나라”를 주장했으나 스스로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을 일으킴으로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물러났었다.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들, 법과 질서는 항상 약자를 잡는 무기요 자신은 그것으로부터 초연하거나 그것을 교묘히 빠져나가 보려는 인간 세계라는 점에서는 바뀐 것이 없다.

모두가 하나같이 세계 평화를 말하고 있지만 세계는 핵무기의 시대에 들어와 스스로 멸망의 무기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공포에 떨고 있다. 우리는 모르고 살지만 아는 사람은 더없이 공포스러울 것이다. 과학의 전능을 신뢰할 수 없고 천재지변의 가능성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명령권자의 인격과 정서를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깊이 본다면 거기에는 사기와 속임수, 욕정과 도덕적 타락, 이기주의와 자기 사랑, 그리고 불안과 공포, 싸움과 살해, 공허성과 파멸의 위험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나 자신이 예외일 수 없다. 나를 깊숙히 관조해 본다면 이 세계의 온갖 패륜과 죄악의 근원지가 우리들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이 본문을 우리 세계에서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새로워진 것이 있으며 어디서 새것을 볼 수 있겠는가?

바울의 처지는 어떠했는가9 로마의 탄압이 한참 동안 계속되었고 율법학자들로부터는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로마와 유대인들로부터는 사회의 질서를 문란케 하는 자라 하여 감옥에 갇히고 굶고 매맞았던 처지에 바울은 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본문 바로 다음(6:5)에 이렇게 적어 놓고 있다.

“우리는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폭동을 겪고 괴로운 노동을 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굶주리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이 편지를 받는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배척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처지나 우리의 처지가 거의 비슷하다. 전혀 새로워진 것도 없고 새로워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여전한 환경 속에 있다.

그러나 그는 “보시오,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습니다”라고 환호를 높인다. 그러면 그는 환상가인가? 혹은 모든 것을 적당히 얼버무려 놓는 속없는 낙관주의자인가? 그럴 리는 없다. 그의 생은 너무나 많은 고통으로 시달려 오고 있다. 그런데도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고 외친다. 여기에 무슨 근거가 있는가? 사실 우리는 새것, 새로워진 세계, 신선하고 상쾌한 공기를 깊이 원하고 있는 것 아닌가? 어떻게 우리는 새것을 보고, 새로워진 세계에 살 수 있으며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먼저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달리한다. 그것은 16절,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적인 표준으로 판단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는 것이다. 사물을 이해하고 평가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차원에서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묻는 자신과 우리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여 간다.

18절 이하는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고 너희로 하여금 이런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말하자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행위’와 ‘하나님의 사명’의 틀이다. ‘하나님의 사명’은 다음 주일에 말씀드리도록 하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보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18절),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인간들의 죄과를 인간들에게 돌리시지 않고”(19절),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그(그리스도)를 정죄하셨습니다”(21절)이다.

여기 나타난 “우리”, “세상”, “인간들”이라고 표현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거울이 아닌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되어 나간다.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는 ‘보시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다시 너와 세계를 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를 다시 보고 우리 세계를 다시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기와 속임수라는 옛 세계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것이요, 욕정과 도덕적 타락으로 얼룩진 나 속에서 새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요, 이기주의와 자기 사랑, 불안과 공포, 싸움과 살해의 우리 세계 속에서 새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런가? 욕정으로 더럽혀지고 도덕적 타락으로 폐허가 된 오늘도 그러한가? 미워하고 시기하는 관계 속에 살고 있는 오늘도 그러한가? 자기 이익과 자기를 사랑하여 남을 죽이는 오늘도 그러한가! 소위 적군을 전멸하기 위해 가공할 살인 무기가 제조되고 또 팔고 사는 오늘도 그러한가! 오늘도 사실 그런가? 그렇다. 오늘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근본적으로 새것이 된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먼저 “나”와 “우리”에 대한 발견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우리”는 누군가? 그는 하나님이 화해코자 하는 대상이요 죄과를 추궁하지 않게 된 자요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를 대신 지도록 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사랑받는, 용서받는, 화해받는 자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헐값의 인간이 아니요 도덕적 타락에 던져 버릴 수 있는 값싼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새 인간이 된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곧 나와 너를 육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본다면 죄의 힘이 이 세상에 가득 찬 반면 정의와 선의 의지가 세계와 역사, 그리고 지구의 중심을 꿰뚫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의 새 대통령 취임이 그렇고, 국제사면위원회가 1977년을 “양심수 석방의 해”로 결정한 사실이 그렇고, 인도나 칠레, 필리핀 등 인권탄압 국가에서 양^수를 석방하는 것이 그렇고, 심지어 공산주의 세계에서조차도 자유의 물결이 일어나는 것이 그렇고,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한복판에 “77헌장”이라는 인권과 자유의 선언이 뿌려진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은 괜한 나의 외침이 아니요 궁색한 주장이 아니다. 18절에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라고 씌어진 성서의 말씀에 그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사실 一 우리 자신이 새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과 세계는 지금 하나님의 선을 좇아가고 있다는 이 사실은 분명한 하나님의 사실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러운 악령에 물려가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것이 된 “나”, “우리”를 그리스도 쪽에서 보자. 그리고 거기 가득 찬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의 심장을 가득히 잠그자! 그러면 나는 옛 모습이나 그러나 이미 새것이 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혁명이요 다시남이다. 그리고 새로움의 기운이 꿰뚫고 있는 세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 하나님의 뜻과 기운이 번쩍이는 세계의 흐름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자! 그러면 이 세계 역시 죄악과 한숨만이 가득 찬 세계가 이미 아니요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는 삶의 의지가 우리 속에 충일하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보시오,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