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5:16-6:2] 움터지는 구원의 날 – 1977년 1월 30일, 김상근 목사

움터지는 구원의 날

1977년 1월 30일 / 고린도후서 5장 16절 – 6장 2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지나가버린 옛것, 실현되는 새것

나는 아직 40세에 이르지 않은 청년성직자였다. 몸을 던져 목회했고, 몸을 던져 세상을 바꾸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속절없이 또 한 해를 보냈고 다시 한 해를 시작한다. 이 한 해, 무슨 희망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간단 말인가. 가능성! 가능성! 과연 있는 것인가. 작년 한 해 그렇게도 애써 살았는데도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올해도 아무리 애써 보아도 가능성은 없는가?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저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어제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보여 주십시오. 가능성을! 사람이 바꾸어지고, 세상도 역사도 바꾸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힘들어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교인들이 슬슬 나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매주일 예배에 아니 나올 수 없어 나오지만 설교가 무섭다 하는 것만 같았다. 나도 너무 무겁고 힘들다. 듣는 사람도 힘들어 못 듣겠다 할 것만 같았다. 저들에게 격려가 필요하다. “당신들은 지금 변하고 있소. 당신들은 역사를 바꾸어내고 있소.” 이렇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데 어찌 그리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주여! 주님이시여! ……

아니다. 바뀜이 있다. 유엔이 그 해 1977년을 “양심수 석방의 해”로 가결하고 선포했다. 공산주의의 나라 체코에서 이른바 “77 헌장”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인권선언이었다. 역사의 전진이었다. 바뀌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관점을 바꾸면 변함도 보인다. 바뀜의 가능성,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에게 있는 것인가? 예수가 매맞고 짊어지고 앓고 고통을 대신 당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화해하시기에 가능하게 된다는 가르침이 나를 쳤다.

새것의 근거, 그것은 나, 우리, 나라에 있지 않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절대적 사랑! 그것이 가능성이구나! 새것, 바뀜의 가능성이 거기에만 있구나!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다시 나게 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교인들이 이 설교를 어떻게 받아 들일 수 있었을까?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나 자신이 좀더 선하고 죄없는 인간으로 다시 나게 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사회도 개혁되어 더욱 행복하고 평화로워지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 소망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또 언제 가능할 것인가? 모든 것이 새로워지기를 기도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은 무엇일까?


[슬라이드]

절망의 시대, 변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1977년의 고뇌와 화해의 패러다임

시대의 절망: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적 해법의 해체: 제도의 실패

새것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세계

변화의 단초: 관점을 바꾸면 변함도 보인다.

위대한 교환(The Great Exchange)

새로운 정체성: 우리는 헐값의 인간이 아니다.

관점의 이동: 동일한 현실을 해석하는 두 가지 렌즈(인간의 눈, 믿음의 눈)

악한 현실 속에서 역사하는 화해

구원은 먼 훗날의 막연한 희망이나 유토피아가 아니다. 우리의 모든 불만과 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내가 새로워지고 세계가 선하게 되는 구원의 날은 이미 '움터지고' 있다.

움터지는 구원을 향하여 - 소망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자리로 나아가자!


[설교 전문]

본문은 지난 주일에 증언드린 바 있는 본문에 6장 1, 2절만을 더 한 것이다. 지난 주일에는 전혀 변하지 않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절망하고 또 개혁되고 개선되지 못하는 세계의 모습에 역시 좌절하지만, 그러나 “육적인 표준”을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새것이 된 나, 우리,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연구에 비추어 인간을 개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고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들은 자신이 새로워지고 거듭나기를 그렇게 절실하게 원하고 있지도 않고, 그렇기에 별다른 노력을 하지도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바꾸어지지 않는 인간을 혁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되고 있는 사유재산제도를 없애고 공산제도를 채택해야 한다고 한 것이 공산주의 혁명이다. 그래서 초기 공산혁명에서는 모든 개인 재산을 인정치 않고 모두의 것으로 공산화하여 인간의 욕심을 극소화시켜 보려 했었다. 그러나 베르쟈예프는 소련의 인간들은 하나도 변한 데가 없고 다만 의복만 붉은 빛깔의 것으로 갈아 입고 무대에 등장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혁명을 한다, 제도를 고친다 해도 부패하고 이기적인 인간성, 타락한 인간세계는 그대로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어차피 인간의 이기심과 죄악성이 일신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선의의 경쟁으로 유도해야 한다, 유도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인간세계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본주의를 실현시켜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처럼 하루 목숨을 단 3, 4백 원으로 이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처럼 가난한 나라에서 한 사람의 소유가 천 몇백 억을 헤아리게 되고 한 사람의 분묘를 장식하는 데 수억을 들이는 부조리가 있게 된다.

인간 자신의 개혁없는 제도와 주의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구약성서 전도서를 쓴 전도자는 그래서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고 개탄하고 있다. 알베르 까뮈는 “사람들은 현실 속에 머물러 있으려 하고, 그 현실 속에서 명석하게 생각하고 그 이상 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 역시 새것에의 기대를 포기하고 있다. 그런데 새것을 갈구하고 새로워지고 거듭나기를 원하고 있는 인간을 바울은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여 간다. 본문 18절 이하는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고 너희도 이런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는 형식으로 씌어졌다. 말하자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행위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의 틀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고 또 무엇을 명령하시며 나는 누구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18절).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죄과를 인간들에게 돌리시지 않고 오히려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19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이며”(20절).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그를 정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21절).

여기에 나타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화해의 직분을 맡은자’요, ‘화해의 말씀을 맡은 그리스도의 사절’이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된 자’이다. 그리고 세계는 하나님의 화해의 대상이다. 이것은 분명히 옛 나가 아니다. 시기와 속임수를 삶의 수단으로 할 수 없는 나이다. 욕정과 도덕적 타락에 던져버릴 나가 아니다. 이기성과 자기 사랑,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을 나가 아니다. 싸움과 살해의 질서 속에 편승하여 살아갈 나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이 화해코자 하는 대상이요, 우리의 죄과를 추궁하지 않게 된 자요,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를 대신 지도록 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헐값의 인간이 아니요 도덕적 타락에 던져버릴 수 있는 값싼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새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옛 모습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새것이다. 세계와 나는 세상의 제도와 주의에서처럼 갱신이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화해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화해의 직분을 맡은 자요, 화해의 말씀을 맡은 그리스도의 사절이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된 자이다. 세계는 하나님의 화해의 관심의 표적이다.

어떻게 우리는 새것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이루시는 화해란 무엇일까? 그리스도는 그의 부활이 없었다면 육적인 표준으로 볼 때 참으로 실패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도 전에는 육적인 표준을 따라 그리스도를 알았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는 스스로의 몸을 사랑으로 내어 주고 그 대신 모든 인류의 죽음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이셨다. 그는 ‘네가 그리스도냐? 그러면 뛰어 내려 보라’는 멸시를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멸시를 받음으로 우리가 받을 멸시를 자신의 몸에 짊어지고 우리의 냉냉한 심장도 짊어지셨던 것이다. 그의 최후는 참으로 비참했다. 그러나 그는 세계의 비참을 자신이 짊어지시고 또 나의 슬픔도 짊어지셨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의 종처럼 말이다.

저는 과연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근심을 메었거늘 ……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았고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저가 찔림을 받은 것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저가 상함을 받은 것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다.
저가 형벌을 받은 것은 우리로 화평을 얻게 함이요
저가 채찍에 맞은 것은 우리로 나음을 얻게 함이로다.

하나님은 이 순수한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하여 세계를, 그리고 당신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다고 바울은 주장한다.

21절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강한 충격을 준다. 그리스도는 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그를 우리를 위해서 죄인으로 다루어 속죄의 제물이 되게 하셨고, 우리는 그 때문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불의를 짊어지심으로 예수의 모든 의가 우리에게 온 것이다. 우리의 모든 죄된 성품을 짊어지심으로 예수의 높고 거룩한 성품이 우리에게 온 것이다. 이기성과 살의를 짊어지심으로 예수의 깨끗한 마음이 우리에게 온 것이다. 불안과 공포를 짊어지심으로 예수의 평안과 화평이 우리에게 온 것이다. 욕정과 도덕적 타락를 짊어지심으로 예수의 선한 의지가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악과 시기, 진노와 비애는 그에게 있고 그의 모든 기쁨이 우리에게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화해이다. 이 사랑의 행위로 말미암아 세계는 바뀔 수 있고 인간은 거듭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자리 자리에, 사회에, 가정에, 내 자식에게, 또 형제에게 증거하는 것이 화해의 직분이며 사절인 것이다. 세계, 나는 이 화해의 역사 속에 있다.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가 보자. 우리의 가정에는 아직도 불화와 불평의 불이 타고 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도 걱정해 주지 않는 노인들이 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질고가 있고 근심이 있고 전쟁이 있다. 가난이 있고 허물이 있다. 욕정과 도덕적 타락이 너와 나 사이를 춤추며 돌아간다. 우리 자신은 도무지 변한 것 같지 않고 세계는 변화가 무쌍한 것 같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 베르쟈예프의 말처럼 똑같은 사람이 옷만 갈아 입고 나타나는 것이 역사의 무대인지도 모르겠다. 가공할 살인무기가 제조되고 있으며 또 팔고 사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인권의 탄압이 자행되고 있고 잘못된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화해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절망이 있다.

그러나 다시 6장 2절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이런 현실 속에서도 바울은 “보시오, 지금은 은혜의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라고 담대하게 말한다. 세계는 타락에만 내어 맡겨진 것이 아니다. 파멸에 던져진 것이 아니다. 악한 세력에 맡겨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삶의 자리를 불화와 불평의 악령에게 던져 놓은 것이 아니다. 우리를 죄악과 욕정과 도덕적 타락에 맡겨 놓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간성을 제도와 주의에 던져 놓은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워질 수 없구나 하고 좌절하고 포기한, 그 좌절과 포기의 저 깊은 축 속에 붙박아 놓은 여러분과 나의 눈길을 뽑아 그리스도에게로 돌려 보자. 만약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화해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6:1). 사람들은 세계는 악하기 때문에 변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린 사람들은 세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화해받고 있음으로 변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가정에 불화와 불평이 있으므로 새로워져야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린 사람들은 우리 가정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화해받고 있기 때문에 변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병든 사람, 버림받은 사람, 소외된 사람들의 환경은 비참하기에 바꾸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눈을 돌린 사람들은 저들이 이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화해받았기 때문에 저들의 환경은 지금 바뀌어가고 있음을 본다. 인권의 탄압이 세계 도처에 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새로워져야 한다고 염원한다. 그러나 자신의 눈길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린 사람들은 세계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화해받고 있기 때문에 이미 새로워져 가고 있으며 인권은 보장받아 가고 있음을 확신케 된다. 나는 도덕적 타락과 욕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하겠다고 기도한다. 그러나 내 눈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려보자! 하나님께서 나와 화해하심으로 나는 이미 화해의 직분자요 화해의 사절이요 하나님의 의에 참예하고 있는 자요 바꾸어지고 거듭난 나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내 성품과 내 노력과 세상의 주의나 사상이나 제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화해로 말미암아 지금 은혜의 때가 그리고 구원의 날이 이미 움터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계심으로 나의 거듭남이 가능하고 세계의 변화가 가능한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것을 신앙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 자신을 보라. 당신의 깊은 곳을 보라. 하나님께서 화해코자 하시는 당신에게 이미 구원이 움터지고 있다! 당신의 가정을 보라. 우리 사회를 보라. 이 세계를 보라. 그리스도의 화해사건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먼 훗날의 희망이 아니고 지금의 이야기이다.

“보시오. 지금은 은혜의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의 모든 불만과 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내가 새로워지고 다시 나며 세계가 보다 선하게 되는 구원의 날은 이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움터졌다는 사실을 신앙하자!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우리를 앞서가신다. 소망을 가지고 삶의 자리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