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1-12] 새 세계의 전환점 – 1977년 2월 6일, 김상근 목사

새 세계의 전환점에서

1977년 2월 6일 / 요한복음 3장 1-12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지나가버린 옛것, 실현되는 새것

나는 아직 40세에 이르지 않은 청년성직자였다. 몸을 던져 목회했고, 몸을 던져 세상을 바꾸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속절없이 또 한 해를 보냈고 다시 한 해를 시작한다. 이 한 해, 무슨 희망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간단 말인가. 가능성! 가능성! 과연 있는 것인가. 작년 한 해 그렇게도 애써 살았는데도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올해도 아무리 애써 보아도 가능성은 없는가?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저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어제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보여 주십시오. 가능성을! 사람이 바꾸어지고, 세상도 역사도 바꾸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힘들어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교인들이 슬슬 나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매주일 예배에 아니 나올 수 없어 나오지만 설교가 무섭다 하는 것만 같았다. 나도 너무 무겁고 힘들다. 듣는 사람도 힘들어 못 듣겠다 할 것만 같았다. 저들에게 격려가 필요하다. “당신들은 지금 변하고 있소. 당신들은 역사를 바꾸어내고 있소.” 이렇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데 어찌 그리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주여! 주님이시여! ……

아니다. 바뀜이 있다. 유엔이 그 해 1977년을 “양심수 석방의 해”로 가결하고 선포했다. 공산주의의 나라 체코에서 이른바 “77 헌장”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인권선언이었다. 역사의 전진이었다. 바뀌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관점을 바꾸면 변함도 보인다. 바뀜의 가능성,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에게 있는 것인가? 예수가 매맞고 짊어지고 앓고 고통을 대신 당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화해하시기에 가능하게 된다는 가르침이 나를 쳤다.

새것의 근거, 그것은 나, 우리, 나라에 있지 않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절대적 사랑! 그것이 가능성이구나! 새것, 바뀜의 가능성이 거기에만 있구나!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다시 나게 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교인들이 이 설교를 어떻게 받아 들일 수 있었을까?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다. 그 하나님의 일손이 내 삶 속에서 이미 일하고 계시다고 했다. 이 세상 역시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를 보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는 지금 새 세계가 열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 세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자 한다. 우리의 이 염원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슬라이드]

새 세계의 전환점에서

관점을 바꾸면, 엄혹한 옛것 속에서도 움트는 새것이 보인다.

새것의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옛 질서(돈과 권력, 세력 확충이 지배하는 부조리한 질서) vs 새 기운(인권, 자유, 도덕, 양심이 행위의 동기가 되는 역사의 전진)

옛 질서의 수혜자, 니고데모의 등장

니고데모의 딜레마

단호한 선언, 거듭남. 예수는 단호하다. 적당한 타협으로는 결코 새 세계의 영역에 머물 수 없다.

제도를 뜯어고치고 생활양식을 바꾸어도, 인간의 내적 개혁이 앞서지 않으면 새 세계는 오지 않는다.

서구 기독교의 무력함

새 세계를 여는 진정한 아키텍처

지금의 것에서 해방되라

어떤 경로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어도, 다시 났다는 기쁨과 확신. 그래야 새 세계가 세계에 이루어진다.


[설교 전문]

나는 이번 증언의 주제를 “지나가 버린 옛것, 실현되는 새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첫날에 “옛것 속의 새것”, 둘째날에는 “움터지는 구원의 날”이라는 증언을 했다. 나를 내 눈으로 세상을 세상의 기준대로 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그의 입장에 서서 보면 이미 옛것 속에서 새것이 된 나와 세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했다. 나와 이 세상 속에 이미 구원의 움이 터지고 있음을 경험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옛것은 사실상 지나가 버린 것이고 새것은 이미 실현되고 있는 것이라는 증언을 드렸다.

그렇지만 그것이 엄연한 사실이라고 해도 새로워지는 그것이 피동적으로 이룩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당신과 세계를 새롭게 하시기 시작했으니 우리는 딴전을 차려도 된다는 말은 아닐 것 아닌가?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고 당황이 있다. 차라리 모든 것이 옛것대로 있는 것이라면 괜찮겠으나 그리스도의 눈, 하나님의 화해의 역사의 입장에서 보면 무언가 변화하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인데, 그것을 알면서 그냥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슨 응답을 곧장 하게 되지도 않는 우리 자신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본문을 택하여 읽게 되었다. 니고데모의 고민이 바로 우리의 고민이 아닐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우리는 너무나 닮았다. 무엇이 닮았나?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를 찾아 왔다. 왜 왔을까? 2절의 말 속에 그의 의도가 있다. “랍비여,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지 않으면 당신이 행하시는 그런 기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가 예수를 찾아온 것은 그냥 위대하다고 소문난 선생을 만나서 뭐 특별한 친교나 대화를 가져 보고자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수가 행하는 기적의 소문을 듣고 또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단정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미 이 낡아진 옛 질서인 유대 사회에서 새 질서, 새 기적을 일으켜 가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감지한 사람이다. 우리도 지난 두 주일의 증언을 통해 말씀드린 것처럼 내 속에서 이미 일하시고, 우리 가정에서 이미 역사하시고 한국사회 속에서 이미 활동하시며 세계 역사를 이미 이끌어가고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도 보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니고데모의 고백을 내 말, 우리의 말로 바꾸어 표현해 보자. 죄의 힘이 아직도 온 세계를 욱여싸고 있지만 정의와 선의 의지가 세계 역사를 꿰어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본다. 바야흐로 세계 정치가 양심과 도덕을 운위하게 되었고, 국제사면위원회(International Amnesty)는 1977년을 “양심수 석방의 해”로 결정하였으며 인도, 칠레, 필리핀 등의 인권탄압 국가에서 양심수를 석방하고 있다. 심지어 소련에서 체제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는 “77 헌장”이라 이름한 인권과 자유의 선언서가 뿌려지고 있다. 세계 이권과 돈과 자기 세력 확충이라는 종래의 인간 관심사를 바꾸어 인권과 자유와 평등, 그리고 도덕과 양심이 행위의 동기가 되는 세계를 이루어 보자는, 옛것과 새것의 전환점에 서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다. 우리는 모두 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돈을 벌자고 살인 무기를 제조하여 팔고 사며 제 권좌를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권리를 짓밟아도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는 오늘의 세계 질서 속에, 더구나 공산주의 치하에서조차도 모든 반인류적인 것들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나고 또 냉엄한 국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인권과 도덕을 높이자는 새 질서가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계 속에서 일하시고 계시다는 증거요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고는 아무도 이같은 새 기운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우리는 오늘날 이렇게 말하고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니고데모가 2절에서 한 말과 똑같은 고백이다. “새 이스라엘”이, “새 사회”가, “새 한국”이, “새 세계”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이미 움터졌음을 그도, 우리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첫째로 같은 점이요, 두번째로 같은 점은 이 새것으로의 전환점에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니고데모 자신이 고민하고 있다는 기록은 없다. 내 고민이 이런 것입니다라고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말한 바도 없다. 그러나 예수는 대뜸 그의 고민의 가장 깊은 곳을 찌른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말하자면 옛것이 지나가고 새것이 오는 전환점에서 어떻게 새것의 영역 속에 있을 수 있게 될 것인가고 고민하는 것이 니고데모의 고민이요 또 우리의 고민이라는 것이다. 새 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염원과 갈등이 니고데모에게도 있고 우리에게도 있다. 새 세계, 새 질서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서도 복락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예수는 단호하다. 다시 나지 않으면 결코 새것의 영역 속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향하여 지금 오고 있는데 그것은 나 자신의 전적인 다시남 없이 나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의 이 말은 너무나 무서운 말이요 불가능한 말일 뿐 아니라 모욕적인 말로 들렸다. 너 같은 친구는 이 새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기 “다시 난다”라는 희랍어(ἄνωθεν)는 “처음부터”라는 뜻과 “위로부터”, “근본적으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다시 난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뜻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근본적으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이다.

니고데모는 학문이 높은 분이다. 그가 이 말을 못 알아 들을 리 없겠는데 그는 고의적으로 예수의 말을 문학적으로 받고 있다. 그래서 그는 빈정댄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니고데모는 왜 이처럼 반발하고 빈정대기까지 하는가? 그의 신분은 상당히 높았다. 바리새파 의회 의원이었다면 당시의 경제, 사회, 사법, 종교, 입법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던 산헤드린의 의원이었다. 혹은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을 알아 듣지 못하느냐?”에서 ‘선생’이라는 말 앞에 관사를 붙여 놓았는데 그것은 유명한 선생, 당시에 일반에게 꽤 알려진 저명인사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공동번역 성서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로 번역하고 있다.

그는 당시의 사회 속에서 저명인사로서 별 부러울 것 없이 살았을 것이나 병자와 약자와 세금을 못 내는 사람들과 농사꾼 등을 죄인으로 만들어 나간 장본인 중의 하나였다. 말하자면 그는 당시의 기존 질서에서 튼튼한 자리에 앉은 사람이다. 그는 현재의 질서가 바뀌게 되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다. 현재를 고수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새 세계는 오고 있으니 문제다. 그래서 그는 일단 반발하여 예수의 말을 문학적으로 고의로 받는다. 그는 타락한 옛 세계에서도 또 새 세계에서도 복락을 누리고 싶어한다. 이 고민이 우리와 같은 점이다.

그가 예수께 나아와 빈정거리자 예수는 다시 분명히 한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5-6절).

물론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고 전혀 새것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움터진 새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철저한 새 존재가 되어야 미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선언이다. 어떻게 새로 날 것인가? 그것은 모른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불며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8절).

바람의 근원지와 목적지를 알지 못하나 어쨌든 바람이 분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라고 지탄할지 모른다. 합리적이 아니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니고데모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 있습니까?”(11절)라고 물었다. 그런 사람은 하늘의 일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12절). 찬송가 250장을 실로 몇 년 만에 불러 보았다. 어떻게 어떤 경로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어도 우리에게 다시 났다는 기쁨과 확신이 있어야 하겠고 또 그럴 수 있다고 믿기에 이 찬송가를 택했다.

새 존재, 다시 날 수 있다. 그래야 새 세계가 가정에, 사회에, 나라에, 이 세계에 이루어진다. 이것을 제쳐 놓고 아무리 제도를 뜯어 고치고 법을 만들고 벌을 강화하고 생활양식을 바꾸어 보아도 새 세계가 이룩되지는 않는다. 벌금을 올려도 궁극적인 데까지 갈 수 없다. 생활양식의 혁명을 이루어도 안 된다. 공산주의 혁명도 아무 쓸데가 없었다. 공산주의 혁명 후에 때묻지 않고 순수한 무산계급들이 독재를 이룩했다. 저들의 독재가 이루어지면 유토피아 낙원이 온다고 기대했고 장담했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이론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은 누구나 어떤 제도를 만들고 그것을 집권하는 순간 집권욕의 노예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제도, 조직의 변혁보다 인간 개혁이 앞서야 한다. 그렇다고 외적인 제도나 체제는 어떻든간에 수양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명상하면 새로워질 수 있다는 중세 이후의 기독교의 독선을 다시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믿어온 서구 기독교는 참으로 무력한 노아의 방주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식민정책, 이민족 착취, 인종차별, 상업주의의 횡포 속에서 서구 기독교는 아무런 힘이 없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면 니고데모가 걸려 있는 지점은 무엇이냐? 니고데모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현재를 고수하면서도 새것을 얻어 보려는 니고데모의 태도다. 이것은 성령으로 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새 세계,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현재의 것을 나의 신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내 자리, 내 것, 내 신분을 떠나서는 나는 망한다고 여기고 있는 한 그는 아직도 육으로 난 육이요 옛것 속에 머물러 있는 자일 뿐이다. 비록 지금의 것으로부터 재미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새 세계가 오는 것과 가정주부, 혹은 범부인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 나라가 왕정에서 일제 치하로 갈 때도 우리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될 때도 우리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러기에 우리에게 새 세계가 왔으나 그것은 우리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도 내 것이 아니다. 국민 전체, 민중 모두가 지금의 것에 매어 있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이룩하시는 새 세계의 주인이 된다. 그래야 내가, 우리가 새 사람이 된다.

나를 지금의 것에서부터 풀어 자유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요 거듭난 것이요 다시 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오는 새 세계, 하나님 나라를 향해 자유하게 해야 한다. 지금의 세계에서 버려진 사람들을 하나님은 관심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에게 있지 ‘지금의 것’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