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45-53] 의회의 음모와 가야바의 고백 – 1977년 3월 27일, 김상근 목사

의회의 음모와 가야바의 고백

1977년 3월 27일 / 요한복음 11장 45-53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고난을 뚫고 온 하나님의 은총

예수는 구조악에 도전하셨다. 그랬기에 죽임을 당하셨다. 그것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가장 잔혹한 처형을 당하셨다. 그것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복음은 사는 것, 커지는 것, ‘더 많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함은 교리다. 교리가 되기까지는 많은 경험과 오랜 정리로 정제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바로 그 교리의 과정을 간과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그 해에도 부활주일은 어김없이 왔다. 그에 앞선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예수는 왜 수난을 당하셨고, 종래에는 십자가형을 받으시게 되었던가? 하나님이 미리 짜 놓으신 일정에 따라 그리된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삶은 흉악범으로 내몰릴 그런 삶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이 어떠했길래 극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가? 그의 가르침 때문인가? 아니다. 병자를 고쳐 주신 것 때문일까? 아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먹였기 때문일까? 아니다. 죽은 자를 살렸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은 훈장을 받아야 할 만큼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으셨다. 여기에 비약이 생긴다. 그런 분이지만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죽어주셨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것은 당시 사회의 구조적 악을 타파하고자 했던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의와 자유를 실현코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돈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정죄받아서는 안 된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곧 범죄는 아니다. 기득권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죄는 그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사회구성원 전체의 행복을 보지 않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전체의 전진을 회생시키는 거기에 있다. 갖은 명분과 이유를 동원하여 기득권을 지키려는 데 있다. 종교지도자의 죄는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니 국가조찬기도회니 하는 조직이 생겼다. ‘반공’을 내세웠다. 민족복음화성회를 한다. 복음화를 내세운다. 그 명분에 이의를 달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군사정권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분명하다. 군중을 동원한다. 여의도에 수십만이 운집하여 반공을 외치고 민족복음화를 기도한다. 역사는 그 함성과 기도로 인하여 억압의 사슬을 풀지 못한다.

자기희생과 기득권의 포기없이 예수를 따를 수 없다. 예수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이것을 볼 수 있을 때에만, 사회와 이웃 전체의 증진을 볼 수 있을 때에만 자기희생과 기득권의 포기가 가능하다. 더 본질적인 것을 수용할 때에만.

예수의 고난은 단순한 한 개인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한 것일까? 권력에 아부하여 영달을 누린 많은 사람을 보았다. 우리는 그 길을 답습하지 말자했던 것 같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 기독교에는 위대한 고백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고백이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도 사하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고백은 오늘날 마치 건조한 방 속에서 말라 주름진 화분의 나무처럼 앙상한 교리로 남아서 우리에게 믿기 어려운 믿음을 강요하고 있다.

예수는 과연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는가? 2천년 전에 당하신 예수의 고난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 고난과 나, 그 고난과 우리, 그 고난과 오늘의 역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왜 하필 예수의 죽음만이냐? 그런 희생자는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


[슬라이드]

십자가, 구조악의 해부학 - 1세기 산헤드린 의회의 음모부터 현대의 기득권까지

박제된 교리와 살아있는 역사적 진실

예수는 무엇 때문에 극형을 받았는가?

세상 모두가 예수를 믿는 것이 왜 당대의 지도자들에게는 위험으로 간주되었을까?

유대 사회 구성원 전체의 행복이 아니라, 기득권자들만의 만년대계가 흔들리는 것. 그것이 그들이 느낀 진짜 공포였습니다.

옳지 못한 일을 자행할 때마다 권력은 가장 그럴듯한 명분의 뒤에 탐욕을 숨깁니다.

시대적 평행 이론: 자신을 위해 전체의 전진을 희생시키는 구조적 일치

구조악 진단 매트릭스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는 거창한 권력의 중심에서만 야기된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전체를 보지 않고 항상 그러면 나는... 이라는 이기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곳에 우리의 작은 산헤드린이 세워집니다.

오늘날의 구조악과 죄된 욕심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역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권력의 승리가 아니라, 민족과 인류를 살리는 위대한 고난이었습니다.

고난 속에 숨겨진 은총

[설교 전문]

사순절을 지내고 있다. 주님의 부활절을 맞는 준비기간으로서 4세기 말부터 지켜오는 전통적 절기이다. 고대 교회의 전통을 보면 기도와 금식으로 이 기간을 보냈다.

우리 기독교에는 위대한 고백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고백도 그것을 처음 고백하게 되었던 사람들의 충격과 생생하였던 경험이 증발되어 버렸다. 그 위대한 고백은 마치 건조한 방 속에서 말라 주름진 화분의 나무처럼 앙상하게 된 채 우리에게 “그런 것이다. 이것을 믿으라”라는 수용키 어려운 강요의 내용이 되어버렸다. 예수의 고난이 왜 우리의 죄를 속하는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고백하는 것인가? 예수는 한 번도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하여 내가 고난을 당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이 사실이 강요된 교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나의 고백,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교리로만 들어오던 예수의 고난의 진실을 당시의 현장으로 가서 살펴 보려고 한다.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순서에 대해서 공관복음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도대체 예수는 왜 고난을 당하시게 되었던 것인가?

오늘 본문의 평행구인 마태복음 26장 1-5절, 마가복음 14장 1-2절, 누가복음 22장 1-2절에 보면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흉계를 꾸며 예수를 잡아 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습니다”라고 적고 있을 뿐이다. 즉 흉계를 꾸며 예수를 잡아 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그 직접적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에는 그 직접적인 이유가 밝혀져 있다.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쳐 죽이려던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 후 예수는 옛날 요한이 활동했던 요단강 근방으로 몸을 일시 피해 있었다. 그러고 있던 중 당신이 평소 가깝게 지내고 사랑하던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인편에 듣는다. 그러고는 그들이 사는 예루살렘 근처 촌락인 베다니로 가신다. 이 때 제자들이 그 곳에 가는 것을 말린다. 가면 무슨 변을 당할지 예상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예수는 위험을 무릅쓰고 베다니로 가서 나사로를 살린다. 여기까지가 본문 앞의 이야기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까지 쫓아가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린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의회를 소집한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 밑에 있었지만 종교를 포함한 자치권을 유대인들에게 주었는데 이 자치권 행사의 주체가 의회, 산헤드린이였다. 말하자면 당시의 집권세력들이다. 집권자들이 긴급 회의를 연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죽었던 사람을 살렸다는 이야기가 퍼진 것이 의회를 소집하게 된 동기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안건은 예수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많은 기적을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것이 회의 소집의 취지요 바로 안건이었다.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다. 여러 분석을 했다.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요”라는 분석이 나왔다.

“모두 그를 믿을 것”이라는 전망이 왜 그다지도 위험한 것일까? 이 점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왜 위험하게 느껴질까? 우리는 세상 사람 모두가 그를 믿게 되기를 바란다. 본문의 표현대로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을 염원하고 있다. 그를 믿게 된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그것을 문제삼고 의회를 열고 법석일까? 오늘날 누구도 예수를 믿게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누구도 예수 믿는 일을 위험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믿도록 도와준다. 그럼 당시의 의회원은 왜 그랬을까? 예수가 나쁜 짓을 해서인가? 아니다. 슬픔에 싸인 상가에 가서 죽은 자를 살린 가장 선한 일을 했다. 여기서 그를 문제삼고 있는 것은 그의 행위가 선하냐 악하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를 문제삼고 있었다. 즉 이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라는 결과가 문제다. 이 말 속에는 이제는 우리를 믿지않고, 우리를 따르지 않고 그를 따르게 될 것이 아니냐 하는 판단이 있다.

그렇게 되면 왜 문젠가?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다음 주일 증언을 기다릴 수밖에 없으나 간단한 스케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소위 의회를 중심한 집권세력들은 국민을 지도하고 국민을 위합네하고 말했지만 실은 자신들의 만년대계를 위하여 탄탄한 체제를 이룩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바탕에 신에게 충성한다는 명분이 두텁게 깔려 있었던 것이다. 자기들이 가장 하나님을 잘 알고 있으니 하나님 공경은 자기들의 지시와 지도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 양 체제를 굳혀 왔다.

그러나 예수는 그 거짓을 지적하고 저들의 반민중적인 행위를 지탄했다. 의회 의원과 집권세력인 대제사장, 장로, 율법학자, 서기관, 바리새파 사람들을 예수는 지나치다고 여겨질 만큼 비판하고 공격한다. 물론 예수가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또 사명으로 여겼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관심은 그보다 그러한 구조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은 모두가 그들이 이룩해 놓고 자족하던 체제를 혼들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런 예수를 모두가 다 믿게 된다는 것은 곧 자기들의 기반과 이권이 무너지는 것이요 자기들의 기득권이 붕괴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몽매했던 민중이 깨치게 되면 큰일이다. 의회를 열게 된 알 수 없는 이유가 여기 밝혀진다.

여기서 문제는 유대사회 속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된 삶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자들만의 행복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전체를 희생시키는 것이 문제였다. 백성이야 어떻게 되든지 자신이 왕이 되고 자기 족벌이 실권을 잡아야 하겠다고 아우성을 쳤던 역사가 우리의 5천년 역사에는 수없이 많은 흔적으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그 많은 당쟁, 분파, 사화 — 그것이 결코 백성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의회를 소집한 저들은 무어라 말하고 있는가? “그렇게 되면” 우리의 기득권이 무너지지 않느냐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 우리의 적인 예수를 없애야 하겠다고 말하고 있지않다. 저들은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예수를 잡아 죽일 음모의 명분이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 자기들의 국토와 민족의 안보가 위태롭게 된다는 것이다. 국토와 민족의 안보를 내세워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흉계를 꾸민 것이다. 우리는 항상 옳지 못한 일을 자행할 때마다 이 따위 명분을 찾는다. 아무도 저항하거나 이의를 달 수 없는 명분을 내세운다. 53절 말씀처럼 이렇게 해놓고는 “그들은 그 날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했다.

다음으로 그래서 고난을 당하신 예수의 고난을 왜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며 오늘의 나, 우리, 우리 역사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일까? 어떻게 관계되나? 예수를 죽이려고 한 음모는 특수한 현상, 당시의 의회원들에게만 있었던 일이었던가? 의회원들의 심성이 우리에게는 없는가? 우리에게 이러한 철학은 없는가? 전체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보다 자신의 기득권과 자신의 이해가 먼저 앞선다.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는 거창한 데서부터 야기된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마음,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사고가 우리에겐 없는가? 싸움과 분쟁과 갈등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그것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반기기는커녕, 기득권을 고수하자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예수를 죽이려고 한 것은 뭐 거창한 사연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주장이 우리에겐 없는가?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이 사회 속에서도 전체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항상 “그러면 나는…… ”이라는 사고의 틀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도 발견되며 또 우리의 역사 현실에서도 본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물음을 다시 상기해 보자. 예수는 왜 고난을 당하신 것인가? 위에서 본 것처럼 저가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죽는다고 한 번도 말한 적도 없다. 전혀 다른 이유에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자신과 이 현실 역사 속에도 있는, 전체를 보지 않으려는 자기 중심적 사고,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고 그것을 보장시켜 주는 제도와 조직, 체제의 고수주의가 엄존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너, 나를 가릴 것 없이 의회의 의원임이 분명하다.

예수의 고난은 이런 것 때문에 일어났다. 곧 당시 인간들의 죄된 사고와 죄된 행위와 죄된 욕심이 그를 죽였던 것이다. 저들의 죄가 예수를 고난 속에 몰아 넣었다면 오늘날도 우리의 죄된 사고와 죄된 행위와 죄된 욕심은 다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일 음모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야바의 입을 빌려 초대교회는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예수의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다. 민족 전체를 살리는 죽음이요 온 인류를 살리는 고난이다.

이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구원의 길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중심적 사고와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주님을 죽이는 음모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이다. 기득권을 위해 제도와 조직과 체제를 고수코자 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주님을 죽이는 음모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과 오늘 역사는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이 있다. 이 자기 중심적 사고와 기득권의 고수주의에 희생되고 있는 분이 있는가? 주님께서 오늘도 고난을 받고 계시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은혜요 은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