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15-19] 예수의 분노는 복음이었다 – 1977년 4월 3일, 김상근 목사

예수의 분노는 복음이었다

1977년 4월 3일 / 마가복음 11장 15-19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고난을 뚫고 온 하나님의 은총

예수는 구조악에 도전하셨다. 그랬기에 죽임을 당하셨다. 그것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가장 잔혹한 처형을 당하셨다. 그것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복음은 사는 것, 커지는 것, ‘더 많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함은 교리다. 교리가 되기까지는 많은 경험과 오랜 정리로 정제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바로 그 교리의 과정을 간과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그 해에도 부활주일은 어김없이 왔다. 그에 앞선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예수는 왜 수난을 당하셨고, 종래에는 십자가형을 받으시게 되었던가? 하나님이 미리 짜 놓으신 일정에 따라 그리된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삶은 흉악범으로 내몰릴 그런 삶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이 어떠했길래 극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가? 그의 가르침 때문인가? 아니다. 병자를 고쳐 주신 것 때문일까? 아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먹였기 때문일까? 아니다. 죽은 자를 살렸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은 훈장을 받아야 할 만큼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으셨다. 여기에 비약이 생긴다. 그런 분이지만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죽어주셨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것은 당시 사회의 구조적 악을 타파하고자 했던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의와 자유를 실현코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돈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정죄받아서는 안 된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곧 범죄는 아니다. 기득권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죄는 그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사회구성원 전체의 행복을 보지 않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전체의 전진을 회생시키는 거기에 있다. 갖은 명분과 이유를 동원하여 기득권을 지키려는 데 있다. 종교지도자의 죄는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니 국가조찬기도회니 하는 조직이 생겼다. ‘반공’을 내세웠다. 민족복음화성회를 한다. 복음화를 내세운다. 그 명분에 이의를 달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군사정권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분명하다. 군중을 동원한다. 여의도에 수십만이 운집하여 반공을 외치고 민족복음화를 기도한다. 역사는 그 함성과 기도로 인하여 억압의 사슬을 풀지 못한다.

자기희생과 기득권의 포기없이 예수를 따를 수 없다. 예수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이것을 볼 수 있을 때에만, 사회와 이웃 전체의 증진을 볼 수 있을 때에만 자기희생과 기득권의 포기가 가능하다. 더 본질적인 것을 수용할 때에만.

예수의 고난은 단순한 한 개인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한 것일까? 권력에 아부하여 영달을 누린 많은 사람을 보았다. 우리는 그 길을 답습하지 말자했던 것 같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고난절의 문턱에 서 있다. 주님의 고난은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으며, 오늘 우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걷고 계신 것인가? 그 고난은 우리에게 복음이 되고 있는가? 또 우리를 부르시는 소명의 힘이 지금도 있는 것일까?


[슬라이드]

예수의 분노는 복음이었다 : 십자가 사건에 가려진 구조악과의 대결, 그리고 거룩한 저항

예수는 왜 십자가형을 받았는가?

개인의 죄를 넘어, 사회의 구조를 겨냥하다.

권력과 결탁한 종교: 1977년의 겨울

평소와 달랐던 예수 : 예루살렘 입성 후의 3가지 이상 행동(환호의 수용, 무화과나무 저주, 성전 정화 사건)

대단히 합리적인 성전, 그러나 강도의 소굴

종교의 껍데기를 쓴 착취 시스템

이제부터는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 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예수를 죽이기 위한 '여야'의 단합

종교 행위인가, 정치 행위인가? 예수를 보는 3가지 시선

이 거룩한 분노는 단순한 화가 아니라, 생명을 향한 절망적인 사랑이었다.

미움받을 수밖에 없었던 길

참된 구원과 기득권의 포기

예수의 분노는 어떻게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가?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 앞에 서서 가고 계신다


[설교 전문]

예수의 전생애를 ‘수난의 생애’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 수난은 오늘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입성에서 절정에 이르러 결국 십자가에서 처형되셨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배경으로 하고 일어난 사건이다. 이때는 유대 민족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 시작되기 몇 날 전이었다. 유대 민족은 언제나 이 날이 오면, 이집트의 학정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해방받았던 출애굽의 사건을 기념하고 또 그것으로 소망을 갖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당연히 분위기는 상당히 고조되고 예루살렘 성 안의 인구도 퍽 많아졌다. 이때 예수로 인해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1. 예수는 평소, 자신을 높이거나 자신에게 주어지는 영광을 완강하게 사양해 왔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할 때마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만류했었다. 그러나 유월절을 몇 날 앞둔 어느 날, 그는 나귀를 타고 개선장군을 흉내라도 내듯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다. 군중이 그가 가는 길에 웃옷을 벗어 깔고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흔들고 깔아 놓으며 환호를 높인 사건이 일어났다. 평소 예수의 태도와는 너무나 판이했다. 왜 예수는 이 환호를 용납하셨을까?

사건 2. 아마 밤이 되면 다시 나왔다가 이튿날 입성하곤 했던 것 같은데 다음날 입성하려던 때 예수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는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 이것도 하나님의 아들의 품성에 맞지 않는 태도다. 왜 그랬을까?

사건 3.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셨나? 성전 안에서 팔고 사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 돈 장수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고 물건을 나르려고 성전 뜰을 지름길로 사용하는 것을 금하셨다.

그런데 오늘 분문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 다음에 곧바로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갔습니다”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주행위와 오늘 본문을 관계시켜 놓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사건 1도 의아하고 사건 2도 그렇지만 사건 3은 더구나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 밖에서 사용하는 돈은 로마의 황제 흉상이 새겨 있는 돈이었고, 그 흉상 때문에 그것을 우상이라 하여 예루살렘 성 내에서는 그 화폐 사용을 막고 있었다. 그러기에 유월절 예배를 위하여 몰려 온 유대인들에게는 한편 환전상이 없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예수는 왜 그랬을까?

비둘기를 파는 것도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에 꼭 필요한 제물을 파는 것이고 그 제물은 개인이 가져 왔을 경우 제사장의 검사를 받아서 합격이 되어야 바칠 수 있는데 성전에서 파는 제물은 이미 검시를 필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이것 역시 예배를 드리려는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히 편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왜 그랬을까?

그리고 한꺼번에 제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자들이 몰려오니 성전 뜰을 분주히 뛰어다니면서 돈을 나르고 비둘기며 양을 날라 봉사할 수밖에 없었고, 바쁘다 보니 성전 뜰을 지름길로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예수는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하셨나? 마가 기자에 의하면 이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집인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집이라는 말에는 수긍이 간다.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닌데 “강도의 소굴”이라고 단정하는 데는 상당한 비약이 있다. 예수의 행위는 너무 과격하다. 교회에 가면 예배실 정면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을 흔하게 본다. 그런데 그 성전에서 예배도 드리고 바자(bazar) 따위도 한다고 해서 강도의 소굴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사건 1, 2를 미뤄 놓고 사건 3부터 보자. 본문에 나타난 바대로 한다면 예수께서 이렇게 한 것은 “내 집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부를 것이다”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 반응과 그 이유, 그 표현만을 본다면 그것은 분명히 종교적인 이유다. 그런데 예수는 이어서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정도의 비판은 또 당연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런 말을 듣는다해도 구태여 반박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를 없앨 방도를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사제 집단은 의회 안의 여당이었고 율법학자 집단은 야당이었다. 말하자면 예수의 그 행위와 말 때문에 여야가 단결하여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성전을 성전되게 하자는데 왜 여야가 단합하여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는 것이며, 또 예수가 성전을 깨끗하게 하려 했다면 왜 그처럼 과격하게 했을까? 그 이면에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예루살렘 성전이 유대에 있어서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심이었다는 것은 여러 번 말씀드렸다. 그래서 모두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여야를 포함한 의회원으로 표현되는 당시의 집권자들은 성전을 유지하는 십일조세 등 각종 세금과 명절 때마다 팔리는 희생제물에서 얻은 막대한 이익금, 또 화폐의 환율에서 얻어내는 이익금 등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상인들의 배후에서 민중을 착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많은 법과 규례를 만들어 통치의 수법으로 남용하고 있었고, 그런 수탈에 견디지 못한 사람들을 법률적으로 종교적으로 몰아쳐 죄인으로 단정했던 것이다. 당시의 의회원들은 소위 율법이라고 번역된 유대의 법체제를 자신들의 권익을 위하여 만들어 놓았고 그에 따라 수많은 유대 백성들은 고난과 어려움을 당했다. 화폐 제도 역시 우상을 배제한다는 높고 고상한 명분하에서 자신들의 이익 체계를 세우고 독점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종교까지도, 물론 거기에서의 명분은 야훼를 섬기고 예배한다는 것이었지만 그 실상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꾸며 나갔던 것이다.

예수는 이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진실을 회복하여 나갔다. 그랬기에 무리가 예수의 가르침에 감탄하고 예수를 추종하는 것을 보자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들의 죄악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억압으로 법으로 막아왔던 둑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예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해 버린 것처럼 이미 의회라는 것으로 상징되고 또 그것에 의한 당시의 지도체제인 성전 종교체제를 때려 부순 것이다. 무화과나무에 저주한 말씀, “이제부터는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 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곧 성전 종교의 마지막을 고한 것이다. 이런 종교, 이런 법체제, 이런 성전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정치활동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랬다면 그가 그렇게 맥없이 수모를 당하고 죽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순전히 요샛말로 종교활동만을 했던 것도 결코 아니다. 그랬다면 그는 민중의 고통 속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요 당시의 체제주의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하신 것인가? 그의 행위를 종교행위다, 정치행위다라는 것으로 구분하여 보려는 것부터 잘못이다. 인간은 종교적으로 살고 그러면서 정치적으로 사는 것이다. 인간의 죄가 어울려 잘못된 정치세계를 이루고 잘못된 정치체제 속에서 인간의 죄는 만발하게 된다.

그가 자기 욕심으로 굳어진 체제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생을 짓밟히고 위축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았을 때 그의 가슴은 아픔으로 쓰렸던 것이다. 빼앗기고 짓밟히면서도 그래도 지도자들이 가르쳐준 대로 나는 못난 놈이라고, 나는 능력이 없는 놈이라고, 내 팔자는 고작 이것이라고 장탄식을 늘어 놓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만났을 때 그의 가슴은 터져버릴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저들을 저런 꼴로 만들어 놓은 성전체제를 향하여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순진한 백성들을 짓밟는 자들에게 분노를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을 가리켜 “위선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이라 불렀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난을 퍼부었고 의인을 죽인 살인자라는 폭언을 거침없이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화가 있으라” 하고 거듭 저주했다.

물론 이런 폭언과 비판은 예수를 체포하기에 충분한 동기와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는 자기 행위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 바리새인 등의 체제주의자들에 의해 결국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예견치 못했던 것이 아니다. 한편, 입성할 때 소리쳐 호산나를 부르던 사람들의 속마음과 기대, 즉 폭력으로라도 현체제를 엎어 주었으면 하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요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 때 받을 냉대를 예기치 못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길을 갔다. 체제주의자에게서도 미움을 사고, 미움과 복수심으로 가득 찬 민중들에게도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길을 갔다.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이었다. 그는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야만 인간으로만 뒤엉켜 있는 이 세계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지를 심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인간의 길과는 다른 이 길을 가는 자가 있어야만, 그래야만 절망한 자가 소망을 가질 수 있고, 그래야만 제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이 회개할 수 있고, 그래야만 서로 물고 물리고 뺏고 빼앗기는 이 인간의 세계가 새 꿈과 새 비전을 향해 갈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 한다면, 인간 세계가 그리고 당신과 내가 구원을 얻게 되겠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구체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도 지금 이러한 처지와 형편 속에 산다. 예수의 분노는 우리에게 복음이다. 분노하셨던 예수, 그는 오늘도 백성을 위하지 않고 사람을 짓밟는 모든 것을 향하여 분노하신다. 이 예수가 유대 민족을 사랑하여 고난의 길을 갔듯이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신다. 그리고 오늘도 수모와 배신을 감수하시며 우리 앞에 서서 가고 계신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하나님 나라를 향한 새 꿈과 새 비전을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