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유한가?
1977년 8월 14일 / 갈라디아서 5장 1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고난을 뚫고 온 하나님의 은총
예수는 구조악에 도전하셨다. 그랬기에 죽임을 당하셨다. 그것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가장 잔혹한 처형을 당하셨다. 그것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복음은 사는 것, 커지는 것, ‘더 많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함은 교리다. 교리가 되기까지는 많은 경험과 오랜 정리로 정제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바로 그 교리의 과정을 간과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그 해에도 부활주일은 어김없이 왔다. 그에 앞선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예수는 왜 수난을 당하셨고, 종래에는 십자가형을 받으시게 되었던가? 하나님이 미리 짜 놓으신 일정에 따라 그리된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삶은 흉악범으로 내몰릴 그런 삶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이 어떠했길래 극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가? 그의 가르침 때문인가? 아니다. 병자를 고쳐 주신 것 때문일까? 아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먹였기 때문일까? 아니다. 죽은 자를 살렸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은 훈장을 받아야 할 만큼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으셨다. 여기에 비약이 생긴다. 그런 분이지만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죽어주셨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것은 당시 사회의 구조적 악을 타파하고자 했던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의와 자유를 실현코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돈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정죄받아서는 안 된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곧 범죄는 아니다. 기득권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죄는 그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사회구성원 전체의 행복을 보지 않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전체의 전진을 회생시키는 거기에 있다. 갖은 명분과 이유를 동원하여 기득권을 지키려는 데 있다. 종교지도자의 죄는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니 국가조찬기도회니 하는 조직이 생겼다. ‘반공’을 내세웠다. 민족복음화성회를 한다. 복음화를 내세운다. 그 명분에 이의를 달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군사정권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분명하다. 군중을 동원한다. 여의도에 수십만이 운집하여 반공을 외치고 민족복음화를 기도한다. 역사는 그 함성과 기도로 인하여 억압의 사슬을 풀지 못한다.
자기희생과 기득권의 포기없이 예수를 따를 수 없다. 예수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이것을 볼 수 있을 때에만, 사회와 이웃 전체의 증진을 볼 수 있을 때에만 자기희생과 기득권의 포기가 가능하다. 더 본질적인 것을 수용할 때에만.
예수의 고난은 단순한 한 개인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한 것일까? 권력에 아부하여 영달을 누린 많은 사람을 보았다. 우리는 그 길을 답습하지 말자했던 것 같다.
[말씀을 향한 물음]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벌써 32년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일제의 혼으로부터 해방되었는가? 해방받아 여러분은 지금 해방된 민족으로서 자유한가? 우리는 왜 지금도 그때처럼 감옥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으며 가족들은 왜 8일째 단식 농성을 하고 있는가? 저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우리의 동지들은 왜 거기 어두운 감방에 있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은 마침 우리 나라가 해방된 지 32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아래 있으면서 해방을 위해 참으로 피눈물나는 투쟁과 기도를 드려 왔다. 그러나 그렇게도 기다리던 해방이 이 민족 앞에 펼쳐진 지 32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과연 해방되어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역사적 현실을 반성해 보고, 해방의 요체였던 자유를 향하여 새 걸음을 내딛도록 하시는 성서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려고 한다.
당시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그 많은 율법적인 규례들을 인간으로서는 결코 다 지켜낼 수 없었고, 또 자신의 조건 여하에 따라서는 지킬수도 없는 일이었다. 예컨대 수백 가지의 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지킬 수도 없었거니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사람에게는 안식일을 지켜낼 도리가 없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은 율법의 노예가 되어 형식상 자기는 모든 율법을 다 지킨 척함으로 자신과 이웃과 하나님을 속인다든지, 아니면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자신을 구원받을 수 없는 절대적인 죄인으로 스스로 낙인찍어 좌절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얽어매고 있는 외형적인 율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셔서 자유하게 하셨던 것이다.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하셨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런 벌이온다, 또 저렇게 하지 않으면 저런 벌이 온다는 식으로 무엇을 하고 안 하는 것이 자유한 자기 의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타율적인 감시와 두려움에서 행위하는 것, 이것을 율법의 속박 아래 있는 것이라 한다면, 자기 행위를 감시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선한 것이고 그 선이 모든 사람에게 선과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라는 자기의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행위하는 것, 이것을 율법에서 해방받은 자유인의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자기가 그렇게 사심으로 저를 믿는 모든 자들이 나도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그 다짐이 신앙으로까지 발전해 가도록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받았으면서도 다시 율법의 구속 밑으로 기어들어 가려는 경향이 있자 바울은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이제 율법 밑에 살아서는 안 될 사람들이 되었다. 율법이 너희를 구원해 줄 수 없다.” 말하자면 율법 밑에 살았던 너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해방시켜 주시어 자유하게 하셨는데 너희는 다시 종의 멍에를 메려 하니 웬일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하게 하셨으니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자!”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율법의 멍에 아래 있지 않다. 율법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삶, 다시 말하여 새로 지음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거가 될 수 없었던 것이고 또 그것이 결코 새 삶과 병존해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비록 그것이 율법이라는 명칭으로는 아니라 해도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부터 해방을 쟁취하여 나왔다는 것은 단순히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모세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 온다. 또한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못살게 구는 모습도 보인다”(출 3:7,9).
그리고는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하라는 말씀을 주시는데 그것은 이렇다.
“히브리인의 하나님 야훼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우리는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우리 하나님 야훼께 제사를 드려야 하겠소”(출 3:18).
이상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이기에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는 감상주의적인 동기가 결코 출애굽 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받는 압제와 억압이 그 동기다. 그것을 물리적으로 과장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출애굽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데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 고역이 견딜 수 없는 정도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5:20). 그러기에 압제와 억압은 물리적인 고역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연관지어져 있다.
야훼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 것은 그냥 이집트의 신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야훼를 예배할 것이냐 하는 예배의 대상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집트의 신으로 대표되는 일체의 가치관과 야훼로 표현되는 일체의 가치관과의 투쟁이다. 출애굽 사건은 말하자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배운 모든 가치관과 생의 목표를 부정하고 새 가치관, 새 세계, 새 목표를 향해 거창한 발을 내딛는 첫 발걸음이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이제 이집트적인 것에서부터 야훼적인 것으로 개혁하겠다고 하는 것이 곧 이집트의 신을 예배하지 않고 야훼를 예배하겠다고 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해방절이었다. 갈라디아서의 표현을 빌린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일체의 이집트적인 것으로부터 해방하여 자유하게 하셨으니 굳게 서서 다시는 이집트적인 것에 얽매이지 맙시다’라고 된다.
우리도 똑같이 해방을 32년 전에 맞았는데 우리 역시 일본의 통치로부터 벗어나와 한국인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식의 해방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초대 교인들이 일체의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버린 것이 율법에서의 해방이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체의 이집트적인 것을 뒤에 버려버리고 새 세계를 향한 것이 저들의 해방이라면, 우리의 해방도 일체의 일본 제국주의적인 것을 버리고 새 세계를 건설하는 바로 그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일본 제국주의적인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저들의 통치 정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적인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획일주의와 관료주의였다. 이것이 일제의 지배원리였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든 나라를 획일화하여 입는 옷부터, 신는 신, 머리의 형, 행동거지, 그리고 사고의 유형 등 모든 것을 다만 한 가지로 만들어 나가려 했다. 이러한 것을 지도할 수 있는 체제는 관료체제요 그 주체는 일부의 관료들이었다. 제7대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오(南次郞)는 “조선 통치 5대 지침”을 발표했었는데 그중 중요한 것은 ‘국체명징 교학진작’(國體明徵 敎學振作)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50대 후반의 분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국체명징 — 제국 9천만 동포가 거국일치 상하일심으로 천황의 도를 선양하자면 우선 국체 관념이 명징되어야 한다. 이는 곧 조선 통치의 근본이다. 신사참배, 황거요배, 국기ㆍ국가의 존중과 국어(일어)의 보급 등으로 실을 거두어야 한다. 교학진작 一 국민 정신의 함양을 기본으로 하고, 우리는 일본제국의 신민이라는 신념과 긍지를 갖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우리가 일제의 통치를 거부했던 것은 바로 여기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모든 한국인을 황민화하여 일본 천황을 우상으로 섬기며, 저를 비판해도 안 되고 저에게 이의를 제기해도 안 되는 현인신(現人神)의 존재로 여기게 했던 것이다. 여기에 한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자유가 있을 리 없다. 우리 민족은 황국의 한 노예에 불과했고 자유 인권이란 설 자리가 없었다. 그들은 거국일치니 상하일심이니, 국가관이 뚜렷해야 하느니, 신사참배, 황거요배를 해야 하느니, 국기와 국가를 존중해야 한다고 하여 강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교육도 이런 것을 위하여 시행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보편타당한 진리를 배우고 연구하며 인류의 공동선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황국 신민으로서 황국에 보탬이 되는 교육만을 강요하기에 이르렀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사참배를 하면 어떻고 황거요배를 하면 또 어떠냐? 거국일치하고 상하가 일심이 되자는 말이 왜 나쁘냐, 국가관이 투철해야 하며 국기와 국가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왜 나쁘냐, 교과서를 바꾸고 서정쇄신을 하는 것은 이 나라가 당면한 과제라고 외치며 돌아다녔던 우리의 선배들이 허다했다. 소위 저명인사라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대열에 마다하지 않고 앞을 다투어 참여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서 우리 국민이 갖는 부자유와 압제의 의식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32년 전 우리에게 해방의 날이 왔다. 우리는 그날을 회상하면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받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이라고 입을 모아 고백했던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표현대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제의 강압과 압제에서 해방하여 자유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받아 자유하게 되었던 초대 그리스도인이 다시 율법의 멍에 아래 들어가려 했던 것처럼, 또한 이집트를 탈출하여 해방의 노정을 걸을 때 고되고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도 해방이 된 지 32년이 지난 오늘날 이 민족의 구원의 길을 일본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데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취급해야 한다.
그 경향이란 무엇이냐? 명치유신에서 본 바 자유민권의 신장보다는 절대권력을 주축으로 한 공업국 건설과 그리고 서양의 기술은 도입하면서도 그 자유주의적인 사상은 거부하고 충효의 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정립한 것, 거국일치, 상하일심하여 국체를 명징하자는 것, 모든 교육은 이것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것, 이런 것이 일본 제국주의적인 잔재라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이 잔재에 의하여 구원을 받으려는 경향이 없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초대 교회 교인들이 해방받기 전의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반해방적인 경향이요, 결코 거기에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성서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것은 벌써 해방 초기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독립된 새 나라에 이제는 노예가 필요없고 식민교육이 필요없었다, 자주하는 인간과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행동할 수 있는 새 인간을 탄생시켜야 했다. 반드시 새 교육자가 새 교육이념을 가지고 새 나라 교육에 임했어야 했다. 그런데 거기서 오는 혼란을 피하여 바로 전날까지 일선동조동근(日鮮同祖同根)을 외친 사람들, 황국신민되기를 무상의 영광으로 가르치던 사람들, 이른바 교화정책의 하수인들이 그대로 교단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잠시의 고난과 혼란을 피하기 위해 황국군대에 들어가 무고한 이웃 백성과 애국적인 조선인을 잡아 죽였던 사람들이 그대로 이 나라 군대의 기틀이 되지 않았나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행정부 관리가 그랬고 종교지도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선일체(內鮮—體)를 가르치고 황도선양(皇道宣揚)을 결의했던 그들이 해방이 되자 다시 종교분열의 지도자로 등장했던 부끄러운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벗어나올 때 있었던 사람들, 말하자면 옛 체제와 전통에 얽매였던 사람들은 하나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의 멍에를 그 역사 속에서 단절시켜 버리시는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를 못했다. 일제의 잔재, 남긴 체제, 정신, 문화, 한국을 망쳐 놓으려고 꾸몄던 그 일체의 계획이 그대로 해방 후에도 이어져 내려왔다는 이 사실에 우리는 깊은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어느 개인을 매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일반적 사실에서부터 벌써 이 나라는 진정한 해방, 진정한 자유를 거부해 왔다는 놀라운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해방의 문을 열어 주셨는데 이스라엘인들이 일체의 이집트적인 것을 배척하고 오
직 야훼 하나님께만 예배하려 했던 것을 선언했던 것처럼 우리는 일체의 일본적인 것을 거부하고 새 세계, 새 가치를 선언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무슨 정치 강연이나 역사 강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그것이 32년이 지난 우리에게, 더구나 한 소시민이요 혹은 가정주부인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나는 32년 전의 해방이란 우리에게 해방에의 문을 연 것에 불과하지 그것으로써 해방이 완성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일제의 망령 一 자유민권이 위축되고 절대권력이 팽배해 가며 서양의 대포와 기계는 재빠르게 수입하면서도 그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배척하고 봉건적 이데올로기인 충효를 국가이념으로 재편성한 一 일제의 잔재가 오늘에도 춤추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국체명징, 교학진작의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가 아직도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고 있음을 본다. 그것으로부터 이 나라가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일제로부터 해방받으려 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느냐고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내 몸 속에 배어 있는 이 망령들을 구축하고 우리의 자녀와 후손들에게 결코 이것을 계승시키지 않겠다는 결의가 절대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정치가만의 일이 아니요 교육자만의 일이 아니다.
해방은 32년 전 그날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자유에의 역사는 오늘도 내일도 계속되어야 하며 그럴 때 해방절인 8ㆍ15는 지난날의 회상의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자유하게 하는 참 해방의 날이 될 것이다. 우리는 율법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처럼 자유민권을 위축시키는 절대권력이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봉건적인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없고 국체명징, 교학진작의 정책이 이 나라 이 민족을 결코 자유로 이끌어갈 수 없는 것임을 일제로부터 해방을 받는 8ㆍ15에 다시 선언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다시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