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12-14] 목표를 향하여 – 1978년 1월 8일, 김상근 목사

목표를 향하여

1978년 1월 8일 / 빌립보서 3장 12-14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사람들

장래에 대한 불안이 생겼다. 지금처럼 인권투쟁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10년, 20년 후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 40세에 다가가지 않는가. 훗날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닐까. 실력을 기르고 내일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마지막 시간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1977년 말이었다. “유학을 떠나라. 여기서 더 활동하면 목회 못하게 된다. 감옥에 갈 수밖에 없게 된다. 가족 생계는 내가 알아서 할테고, 유학비용은 장학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공부를 더 해야 앞으로 큰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 아닌가.” 최태섭 장로님의 은밀한 권유였다. 교계는 물론 한국의 재계에서도 존경받는 어른이셨다. 집권세력의 흐름도 아셨고, 일정한 정보도 얻을 수 있으셨다. 김 목사도 결국 감옥에 가게 되는 것이라는 판단을 가지시게 되셨던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김관석 총무님과 상의하여 나를 유학 보내기로 하셨던 것이다. 장학금은 김 목사님이 외국에서 얻어 내고 가족 생활은 최 장로님이 맡으시기로 했다는 말씀이셨다.

최 장로님은 나를 아들처럼 아끼셨고 나 역시 아버지처럼 여겼었다. 돌아가실 즈음에 이르러서는 아예 아들이라 하셨고 나도 아버님이라 불렀다. 나이로 보면 나는 그 분의 둘째 자식과 셋째 자식 사이였다. 그런데도 담임목사에 대한 온갖 예를 다하셨다. 두텁고 깊은 사랑과 깍듯한 예는 세상에 미담으로 알려져 있다.

하여간 이로 인해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인생의 목표, 나의 목표가 과연 무엇이냐? 학식을 쌓고, 박사 학위를 얻고, 그래서 좀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따라서 공헌도 더하게 되고……. 나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부활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지. 그러나 사실 답답했다. 숨이 막혔다. 신앙적 깨달음이 그러했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 유학을 떠나는 것은 도피다. 동지들에 대한 배신이다. 역사에 대한 책임회피다. 이런 생각이 나를 위와 같은 결론으로 강제했던 것 같다. 그 즈음에 함께 인권운동을 하던 친우가 유학을 가겠다고 했다. 나는 열심으로, 진심으로 속히 떠나라 했다. 나와 같은 깨달음이 그의 발목을 잡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나의 결론에 강제당하면서도 그것이 불만스러웠고 불안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유학을 이미 마치고 상당한 명성을 가진 선배나 스승에 대한 부러움도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반발도 있었다.


[말씀을 향한 물음]

새해가 되면 한 해의 목표를 세운다. 우리도 “올해에는 …… 이것을 꼭 ……” 이런 식의 목표를 세운다. 여러분은 어떤 목표를 세웠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표를 주시려 하는가?


[슬라이드]

목표를 향하여: 1978년의 고뇌와 영원한 마라톤

인권 투쟁의 길 vs. 유학과 명성의 길

나의 인생 목표는 과연 무엇인가?

나폴레옹의 세계지도 : "너희는 고기를 점령해라. 나는 세계를 점령하겠다."

우리가 삶 속에서 드리는 다양한 기도들. 이러한 기도 제목들은 정당하고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들이 내 삶이 존재하는 이유, 즉 '궁극적인 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나폴레옹식 목표 vs 바울식 목표

그리스도의 가슴과 심장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는 어떠한 신분적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은 자랑과 부끄러움 모두에 집착하기 않고 철저히 포기했다. 과거를 우려먹고 사는 것, 무엇을 취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과거는 결코 '진정한 나'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

영원한 미완성, 그래서 아름다운 목표

1978년의 응답, 그리고 오늘의 도전


[설교 전문]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었다. 그가 도시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때 어느 음식점 이층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너무 가난했던 그는 끼니를 거르기가 일쑤였다. 아래층에서부터 올라오는 고기 냄새며 맛있는 음식 냄새가 고픈 배를 더 고프게 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책상 위에 넓다란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서 ‘너희는 고기를 점령해라. 나는 세계를 점령하겠다’면서 세계 침공의 전략을 세우고 공격의 화살을 그어 보곤 했다는 것이다. 나는 어린 나이에 퍽 깊은 감명을 받았고 지금도 그 대목만큼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어려서부터 세계 정복을 하겠다는 생의 목표가 분명하게 있었다는 것이다.

혹시 새해가 되면서 우리가 갖게 되는 생의 목표란 그런 유의 것일지 모르겠다. 그런 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하나님, 이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이것을 얻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게 될지 모르겠다. 물론 가난한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셋방살이 생활자가 집을 얻으려고 기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중병에 걸린 사람이 병을 낫게 해주십사고 기도하고 애쓰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것이 생의 목표는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집 없는 사람이 집을 갖게는 되어야 하겠지만 ‘집을 지니고 사는 생, 바로 그것이 내 생의 목표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소위 일천 불 소득을 달성하는 것을 일단 좋게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일천 불 소득의 달성이, 바로 그것이 이 나라가 존재하는 이유요 또 이 나라의 목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목표”란 내가 왜 살고 있느냐? 우리 가정은 왜 있는 것이냐? 이 나라는 왜 여기 한반도에 나라를 이루어 살고 있느냐? 이렇게 묻는 물음에 ‘이것이’ 그 이유라고 대답하는 바가 생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인 바울의 생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빌립보서 3장 12절에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에서의 “희망”이라고 표현된 것이 바울이 왜 사느냐 하는 삶의 목표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일까? 12절에 “나는 이 희망을”이라고 말함으로 구체적으로 앞의 서술을 지적하고 있다. 앞의 서술은 이렇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10절).

이것이 바울의 희망이요 생의 목표인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오늘의 본문 14절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공동번역) 라고 말함으로 이것을 “높은 곳에 사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나폴레옹의 목표나 내 자식이 무슨 장관이 되어 주었으면, 얼마의 재산가가 되었으면 …… 하는 등의 목표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사람이란 신분상 높이 될 수도 있고 낮게 될 수도 있다. 부자일 수도 있고 가난하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여건으로 그렇게 결정된다. 문제는 내가, 혹은 가난한 내가, 지위가 높은 내가, 혹은 신분이 비천한 내가 바로 “나”라고 믿고 있는 데 있다. 내가 나를 규정하는 데 이런 외형적인 것으로 규정하려 든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소위 성공을 한 사람이나 실패를 한 사람이나 “네가 얼마나 값지고 훌륭한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질문 앞에서는 똑같은 것이다. 네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가슴으로,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그리스도의 자녀답게, 아니 그리스도의 제자요 동지답게 사느냐 하는 질문 앞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살고 이렇게 죽는 것이 바울의 희망이요 생의 목표였다. 내가 이것을 가져야 하겠다, 내가 이만한 지위에 올라야 하겠다는 나폴레옹식의 목표는 있을지 몰라도, 올해에도 그 같은 목표를 설정했을지 몰라도, ‘높은 곳’에서 살려는 의지, 생의 목표, 바울의 그 희망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없느냐? 그것은 나폴레옹식의 목표, 다시 말하여 무엇을 갖게 되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게 되면 높은 곳,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바울식의 목표를 바라볼 수 없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만 다른 하나를 성취하는 것이다.

올해 여러분이 그려 보는 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과장, 국장, 사장, 무엇이 되는 것, 무엇을 갖는 것, 일천 불 소득을 하게 되어 우리도 중진국이 되자 그런 것인가? 그것을 무조건 나쁘다 말하고 싶진않다. 앞서도 말했지만 특히 가난한 사람이 부해지고, 병약한 분이 강건해지고, 계장은 과장되고 과장은 부장되며, 자식들은 모두 공부 잘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생의 목표’다 그럴 때 내가 고작 그것이냐 싶어서 서글퍼진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이요 기도도 하는 사람이요 성경도 읽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식의 목표를 달성키 위해 신앙한다면 또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면 나폴레옹도 자기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그리스도를 필요로 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바울도 한때는 나폴레옹식 생의 목표를 위해 살았었다. 그는 4절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든다면 나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더 많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믿고 있었던 것을 나열한다. 족보도 훌륭하고 정통적인 유대교 신자며 높은 학문을 닦았고 무엇을 한다 하면 뿌리를 뽑고마는 철저파라는 자부가 있었다. 그는 한때 참으로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또 높은 학문에 도달하게 된 자기, 로마 시민권을 갖게 된 자신이 바로 자신인 줄 알았었다. 그것이 자기구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 그런 것을 얻고 취하겠다고 발버둥치는 바로 자신을 의식하고 ‘아! 내가 살아 있구나’ 하고 느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뽐내며 살아가는 한 그것은 과거를 우려먹고 사는 것일 뿐이요, 그것은 또 남과 자기를 구별짓는 심성일 뿐이요, 그것이 내가 아닌 것을 바울은 알게 되었다. 그것이 과연 산다는 것일까?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냐, 그리스도의 제자요 동역자답게 사느냐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 자기가 그런 것을 아등바등 추구해 가고 그것을 전부로 여기고 있는 동안 자기를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나일까? 그는 이 같은 자랑만 가진 것이 아니라 전에 그리스도인을 잡아 가두고 박해했던 쓰라린 과거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감히 주님 앞에 낯을 들고 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랑이나 부끄러움이나 어떤 것이든지 거기에 집착하거나 붙매이지 않고 그것을 모두 잊어버렸던 것이다. 왜냐? 그것은 결코 자기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외쳤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13-14절).

바울은 과거를 철저하게 포기했다. 자랑도 부끄러움도 모두 포기했다. 그것은 무엇을 달성하고 무엇을 취하려는 데만 급급했던 과거요, 무엇이 되려고 발버둥친 과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앞에 있는 목표, 자기의 희망을 향하여 “온몸을 앞으로 기울여”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실로 과거에 붙매여 사는 사람들이다. 과거의 자랑 속에서 오늘의 기쁨을 찾고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자부하고 과거에 이루어 놓은 그것이 자기인 양 그 속에 안주하거나 그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바울처럼 새 목표를 바라보아야 하겠다. 그새 목표는 나를 외형적으로 규정지어 주는 것이 아니다. 백만장자라거나 청소부라거나 장관이라거나 급사라는 그런 데서 출발된 목표가 아니다. 내 가정과 내 직장과 이 사회 속에서 얼마나 값지고 훌륭한 삶을 살아나갈 것이냐 하는 목표다. 얼마나 내가 가정생활을 하는 중에, 또 직장생활, 이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살고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할 때 같이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그리스도처럼 죽을 것이냐 하는 목표를 바라보아야 하겠다. 이것은 무거운 말일 수만은 없다. 그것은 그 다음의 말씀, 이렇게 살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이르려는 것입니다”라는 바울의 말씀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목표를 향하여 살면 결국 부활에까지 이르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것은 무겁고 힘든 말일 수만은 없다.

그러나 이 희망은 돈을 버는 것처럼, 세계를 정복하는 것처럼 그렇게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무지개를 따려고 가도가도 그 무지개는 저만큼 저만큼 있는 것처럼 그것은 완성이 없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12, 13절).

“달음질칠 뿐입니다”,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라는 바울의 이 고백적인 외침 속에 그가 바라보는 목표란 완성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평생 노력해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가 아파하시는 때 내가 아파지고, 그리스도가 기뻐하시는 때 내가 기뻐지는 삶, 자기의 신분이나 과거가 나를 지탱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으니 그는 부활하신 것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삶, 더구나 그리스도와 같이 고난을 당할 수 있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을 수 있는 삶이란 영원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올해 1978년 무오년에 우리는 무엇을 목표하며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향하여 달려갈 것인가? 나폴레옹식 야망 때문에 울고 웃는 삶을 거부하자. 성공과 실패를 따져 거기에 삶의 근거를 두려는 속성을 거부하자. 나를 속박하고 정체시키려는 과거의 즐거움과 과거의 슬픔을 다 잊어버리자! 건강과 질고, 부와 가난, 그런 것으로 나를 규정지으려는 일체의 통념을 거부하자! 바울이 가졌던 이 희망, 삶의 목표를 향하여 영원한 마라톤을 시작하자. 바울을 이끌어 주셨던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