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3:12-19] 광야 40년의 거룩한 고투 – 1976년 9월 26일, 김상근 목사

광야 40년의 거룩한 고투

1976년 9월 26일 / 히브리서 3장 12-19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거룩한 고투와 하나님의 나라

모두가 지쳤다. 설교 듣기에 지쳤고 당국의 이런저런 간섭과 압력을 감당해 내기에 지쳤다. 누구인들 지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주일예배 후에 점심을 함께 하자는 권사 한 분이 계셨다. 학벌도 낮고 배경도 없는 분이었다. 그런데도 사업이 크게 성공하여 굉장한 부를 쌓았다. 나를 만나고서 비로소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목사인 나에게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점심식사가 다 끝났는데도 특별한 말씀이 없었다. 건널목에서 파랑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을 건너면 서로 헤어지게 되어 있었다. 슬그머니 내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다. “목사님, 너무 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너무 힘듭니다.” 참으로 미안한 말투였다. 점심을 함께 먹으며 긴 시간을 보냈지만 이 한마디 말을 하기가 그렇게도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잘 알겠노라 했다.

그 날, 그 일 이후 내 마음속은 힘들어 하는 교인들로 가득 찼다. 그렇지, 교인들이 얼마나 힘들까! 살기도 힘들 게다. 무서운 세상이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주일예배에 오면 설교로 내리치고 몰아 세우니 얼마나 힘들까!

교인들을 격려할 필요가 있다. 용기를 가지게 해야 한다. 축복도 해야한다. 축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축복을 제 욕심으로만 구하고, 쓰는 것이 문제다. 축복도 하자.

이리해서 시작한 설교다. 그러나 성서를 펼쳐보니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성서는 고난을 뚫고 새로운 가치를 이루어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축복이라는 것이다. 격려하자고 시작한 설교가 또다시 곧게 가자는 것으로 채워졌다. 성서가 그러한데 어찌할 것인가! 기독교의 진리가 그런 것인데 다른 도리가 없다.

오늘 우리의 행진이 무엇이며 그 의미는 어떤 것인가를 밝혀 가게 되었다. 힘들고 어려우니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권면하고 권면을 받아들이고, 광야 40년을 성공적으로 가자 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고통도 당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훈련이라 하고 말았다.

무슨 대가를 바라는 행동은 기독교적이 아니다. 선을 행하는 것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이 곧 축복의 약속이라 설교하고 말았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씨가 뿌려졌노라고 설교하고 말았다. 교인들을 향한 애틋한 정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나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기독교의 본질이 그러한 것이었을까?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이 퍽 힘든 일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왜 어렵게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인지를 회의해 보게 된다. 꼭 어려운 걸음을 걸어야만 하는 것인가? 과거의 신앙의 선조들은 어떻게 살았었는가?


[슬라이드]

광야 40년의 거룩한 고투

목사님, 너무 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너무 힘듭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무의미한 위로가 아닌, 고난 속에서 새 역사를 창조하는 행진이다.

세 번의 광야, 하나의 패턴

고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타협하는가? (히브리서 3:15)

광야의 진짜 의미: 무의미한 방황인가, 연단의 장인가?

광야를 걷는 자들을 위한 3가지 행동 원리: 현재적 긴장 유지, 공동체적 연대, 흔들리지 않는 뿌리

원리 1. '오늘'이라 부르는 동안에

원리 2. 서로 권면하라

원리 3. 처음 확신을 굳게 잡으라

단순한 생존이 아닌, 거룩한 행진


[설교 전문]

히브리서 기자는 자기의 독특한 필법으로 독자들을 설득하고 있다. 16-18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을 향하여 해방의 전진을 했었지만 그들이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말을 질문형으로 이야기해 나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실 때 모세와 아론을 시켜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장로들을 모아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실까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들려 주었다. 이에 대한 반응은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를 숙여 경배하였더라”(출 4:31)이다.

여기서의 하나님의 경륜은 무엇일까? 저들을 이집트의 종노릇하는 삶에서 구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해방시켜 나오게 함으로 거기서 자유하게, 그리고 자주적으로 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나라를 세우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안식이다. 이 안식의 꿈에 부풀어 해방의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 해방의 길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황무지의 땅을 걷기만 하다가 어느 곳에 이르면 천막을 치고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곤 했었다. 결정적인 문제는 르비딤이라는 광야에 진을 쳤을 때 발생했다. “물”이 없다. 저들은 지쳐 이제 자기들의 행진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기 시작한다.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발하게 했다.

결국 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17절에 의하면 광야 40년은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케만 했던 것이다. 결국 출발 당시의 사람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오랜 동안의 고통을 겪고도 정작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 바닥에 깔린 요인은 무엇일까? 15절, 19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 불신앙에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완고해졌다는 말은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을 때의 심정과 같은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느냐? 내가 정말 죽을까? 이렇게 산다는 것은 결국 내게 불리하게 되는 것 아니냐? 사실상 내일이라는 것은 없는 것 아니냐? 내가 뿌릴 수는 있으나 거두어 들일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에 떨어진 상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이 불신앙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정말 우리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집트에서 살던 종노릇이 정말 나쁜 삶이란 말인가? 이렇게 애써 행진을 해 보았자 누가 알아나 줄 것인가? 결국 이것은 “내일”을 위한 것인데 우리에게 내일이 올 것인가?

종국에 가서 저들은 들어가지 못했고 저들의 2세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광야 40년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 내는 과정이었다. 새 역사에 참예할 수 있는 자와 묵은 역사와 함께 사라져 버려야 할 자를 갈라 놓는 시금석 40년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못했다. 당장의 고투가 역겨웠다. 쉽게 못견뎌 했다. 그것을 삼키고 이것이 영원한 안식을 얻는 시험대에 섰다고 생각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우리를 보자! 우리 모두가 같은 성정의 사람들 아닌가?

히브리서 기자의 교훈은 무엇이냐? 왜 썼을까? 오늘 본문의 상황과 출애굽 사건과는 몇천 년의 거리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강한 교훈적 의미가 있다. 기원후 70년 아니면 80년경이다. 그렇다면 한참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심했을 때이다. 오신다던 예수는 다시 오시지도 않고 또 기를 쓰고 믿어 보아야 특별히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슬슬 자기들이 믿던 옛 종교, 그 시대에 허용되었던 옛 종교 속으로 자신을 숨기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졌던 것처럼 완악해지기 시작하였다. 정말 나에게 이익이 있을까? 사실 그리스도는 재림하실까? 이 길을 걸으므로 새 세계를 탄생시킬 수 있을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초대 교인들이 모든 박해와 고투를 극복하는 신앙의 용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기자의 눈에는 옛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점점 마음이 완악해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여러분 가운데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권하면서 구체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는 각각 무엇을 소망하고 있었는가7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 욕심만 채우면 세상이야 어떻게 되거나 내 알 바 아니라 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이 거룩한 사업에 나를 부르셨다고 느꼈을 때 나는 감격하기도 했다. 나와 더불어 내가 살고 있는 그곳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시겠다니, 또는 내 자신을 구속받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으시겠다니 감격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랬듯이, 또 로마에 있는 교인들 마음속에 그랬듯이 우리의 마음속에 완악함이 생기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우리가 가는 길이 고된 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목전의 현상에 급급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걸어가자고 하는 것은 예사스런 길이 아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걸음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당장의 이익에 눈이 가려진다. 지금 당장 편한 쪽만을 택한다. 재빨리 강한 것 쪽에 나를 숨긴다. 그리고 너무 경박하게 현실에 반응한다. 조그마한 고난도 감수할 수 없는 것이 현대인의 심성이다. 무슨 의미고 거룩이고를 생각할 여지가 없다. 도덕이고 책임을 따질 생각이 없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여러분 가운데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없도록 하시오”라고 하는 히브리서 기자의 교훈에 우리 마음을 기울여야 하겠다.

“날마다 오늘이라고 부르는 동안에”라는 말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오늘”을 지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내일이 있다고 해서 안심해 버리는 태도는 아니다. ‘오늘이 내게는 마지막이다’라는 태도다. 오늘을 오늘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은 다만 오늘밖에 없다. 참된 경건은 항상 ‘오늘’과 ‘이 순간’에 대한 긴장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이런 긴장된 자세를 어느 특정한 때만 갖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오늘에 대한 긴장이 없다.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으니 의미 따위는 내일 찾고 오늘은 내 욕심껏, 혹은 안이하게 살아보자는 찰나주의에 묻혀 있다. 참으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걸음의 의미를 살피지 못한다.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권면하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서로 권면하라.” 매일 매일 서로 권면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싫다. 권면하려고도 하지 않지만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매일매일 서로서로 권면해야 한다. 교인들 서로 권면하라는 것이다. 교인들에게서 독립하여 ‘나 혼자’ 있자고 하는 유혹은 곧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는 유혹이 되고 만다. 오늘의 모든 고난을, 그리고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무리들답게 우리 서로의 마음을 열어야 하겠다. 서로 권면하자. 오늘에 빠져 버리지 말자고. 오늘의 향락에 몰입해 버리지 말자고. 또 오늘의 고난에 눌려 버리지 말자고.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걸음의 의미를 보게 해주는 길이다.

‘처음 확신을 끝까지 굳게 잡자.’ 이 확신(ὑπόστασις)이란 말은 “밑에”(ὑπό)와 “서다”, “자리를 잡다”(ἵστημι)라는 두 말이 합해진 말이다. 처음 확신을 끝까지 굳게 잡자는 말은 처음 자기가 옳다고 고백하여 자기의 행동과 자신을 세운 바로 그 고백, 그 신앙에 끝까지 서자는 것이다. 형편이 바뀌고 이해가 엇갈린다고 하여 처음의 신앙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충고다. 이런 충고는 우리로 하여금 오늘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이 거룩한 고투를 피하지 말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가 우리의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고난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지금 마음속에 떠올려 보자. 그리고 오늘 그것을 피하지 않으려는 결단을 다시 세우고 이러한 풍토를 위해 피차 마음을 열어 권면하자. 그것을 끝까지 붙들자. 결코 우리가 걷는 이 걸음은 내 걸음만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버릴 수 없는 걸음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행진은 그들의 걸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걸음이었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걸음도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걸음이다. 너무나 소중하다.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길고 답답한 고투의 걸음을 걷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함께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