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만류와 변화산 사건
1976년 7월 25일 / 마가복음 9장 2-8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인간의 결론과 하나님의 기적
“이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 승공의 길, 민족통일의 첩경은 민주역량을 기르는 일이다. ……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틈바구니에서 당한 고생을 살려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세계만방에 드날리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통일된 민족으로, 정의가 실현되고 인권이 보장되는 평화스런 나라 국민으로 국제사회에서 어깨를 펴고 떳떳이 살게하는 일이다. 민주주의 만세!”
1976년 3월 1일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제목은「민주구국선언서」였다. 이러한 유의 선언서는 당시에는 흔히 있던 것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몸을 내던진 민주 인사들에게는 새삼스럽거나 결정적인 선언은 아니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이를 정부전복 선동사건으로 몰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했다. 이후 재판이 거듭되고 정부부처와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여론몰이가 거세게 일어났다. 불구속이지만 전 대통령까지 피고석에 세운 사건이고 보면 그 위협은 강력했다. 민주화운동은 위축되었고 군사정권은 일정한 안정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쯤, 우리는 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오랫동안 싸워 보았지만 민주화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불의라 하였지만 그 무리는 부를 쌓고 잘 살고 있다는 것, 그러기에 너무 지나치게 투쟁하는 것은 손해를 가져 올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숨을 고르고 경험에서 얻은 상식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인가? 타지않는 불, 작은 소리, 변화산 사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언제나 분명하다. 다만 우리가 말씀에 자기를 쳐 복종시킬 것인가만이 문제일 뿐이다.
아직 익혀낼 수 없는 대목이 있었다.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수의 위대한 제자도 아닌 우리에게, 교인들에게 이 말씀을 그대로 들이댈 수 있는 것일까? 무척이나 특수한 사람들의 응전을 평범한 우리에게 요구할 수 있을까? 그대로 전하는 나의 주저함이 있었다. 고뇌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설교는 지금도 돌이켜보면 나에게 한 설교였던 것 같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영광을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누구보다 빛나고 누구보다 잘 되기를 바란다. 나뿐 아니라 내 자식이 그렇게 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어떻게 남보다 뛰어나게 될 수 없을까 하는 욕망이 항상 마음속에 차 있다.
그러나 그 욕망이 너무나 인간적임을 발견하면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때도 있다. 무엇이 참으로 훌륭하게 되는 것인가? 무엇이 참 영광인가? 우리는 사실 본질적인 것을 포기하고 지엽적인 영광을 추구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다 보면 그 나름대로의 결론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그 결론이란 인간을 의롭게, 선하게 하는 것보다는 약하고 비굴하게 하고 안일과 체념 속에 빠지게 하는 것들이기 쉽다. 그래서 누구나 젊었을 때 가졌던 선한 의지나 뜻을 쉽게 체념해 버리고 만다. 예수를 믿어 우리 가슴이 뜨거워지고 우리에게 새로운 정열이 솟구쳐 올라온 경험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은 과거의 일이요, 어느새 첫 생명력은 없어지고 그저 하나의 습관이나 혹은 떠나기 힘든 어떤 힘에 얽매여 버리는 실정에 떨어진다. 쉽게 첫 순정, 첫 꿈이 무산된다.
이것은 물론 하루 이틀 동안에 잠깐 얻어진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의 고되고 아픈 고통의 걸음을 걸어 본 결과들이다. ‘그래 보았자 그렇게 사는 사람만 손해다’는 결론, ‘세상에 누가 옳은 것을 모르고 인간의 길을 몰라서 그러느냐? 다 아는 것이지만 세상을 산다는 것은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지혜있게 살아야 한다’는 인간들의 통념이다. 더구나 오늘과 같이 비정상적인 사회 속에서는 이 통념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먹혀 들어 간다. ‘오늘, 인간의 통념은 무엇인가?’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 역시 이 통념의 세계에 살고 있고 더구나 최근 1, 2년 사이에 더욱 절실하게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를 염려하고 민족을 사랑하던 모세가 그랬고, 그 시대의 잘못된 가치관과 싸우던 엘리야가 그랬다. 그러나 지난 증언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정열이 체념으로 스러지고 말려는 순간에 하나님의 기적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다시 첫 정열을 하나님의 것으로 승화하여 나간 사람들임을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증언을 드렸으나 역시 그들이 문제로 여겼던 것이 역사나 민족, 또는 가치관이었다고 한다면, 그것들과 우리 개인의 삶과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해도 어쩐지 거리가 먼 이야기 같고 직접 살고 죽는 문제로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겠다. 또 나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문제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 신약성경으로 눈을 돌려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서 인간의 노력과 판단, 그리고 기적의 만남, 그리고 다시 바른 삶의 힘을 갖게 되는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찾아지는 생동력, 그리고 우리가 항상 기대하는 영광의 성취를 살펴 보려고 한다.
오늘 증언의 본문으로 마가복음 9장 2절 이하의 변화산 기사를 읽었다. 이 기사를 마가복음 기자는 왜 하필 여기에 수록했는가?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도 그 순서는 동일하다. 마가복음 기자가 이것을 편집할 때 가졌던 자기의 어떤 관점이 있지 않았겠는가? 그 관점이 무엇인가를 찾아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다시 격려하시는 빛을 보려고 한다.
변화산 기사 앞에는 당신의 죽음 예고와 베드로와의 논쟁이 있고 그 앞에는 베드로의 고백이 있다. 학자들(벨하우젠, 불트만 등)은 마가복음에 한 큰 분수령이 있다면 8장 27절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8장 27절을 기점으로 하여 예수의 가르침이 달라지고 당신의 사명에 대한 비밀스런 예고를 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수난의 종’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제까지 전혀 하시지 않던 질문을 갑자기 던지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며 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제자들을 대신해서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러자 마태복음에는 예수가 베드로를 칭찬하고 “네 이름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축복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첫 복음서인 마가복음에는 이 고백에 대하여 예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시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그 고백이 다음의 예수의 말을 당연하게 이끌어내는 것처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시고는 “너희는 나보고 그리스도라고 하지만 나는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리라”고 자기의 고난을 예고하시는 것이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모시고 간했다”(막 8:22)는 것이다. 이 말을 공동번역 성서는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럴 수는 없다고 야단하였다”고 한다. “간했다”, “야단했다”라고 번역된 이 말(ἐπιτιμάω)은 “비난했다, 꾸짖었다, 규탄했다”라는 말로서 바로 다음 예수가 베드로를 꾸짖었다고 하는 단어와 똑같은 말이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베드로가 대변하고 있는 인간의 결론과 예수로 대변되고 있는 하나님의 경륜과의 싸움이다. 이것이 우리말 성서에는 점잖게 표현되었지만 사실은 얼굴을 붉히고 침을 튀겨가며 호된 말로 비난하고 규탄하여 피차에 몰아 세우는 그런 장면이다.
베드로는 왜 예수를 비난하고 빈정대고 규탄하였는가? 혹시 인간적으로 예수를 아꼈기 때문이라고 하나 ‘간했다’는 말을 ‘비난, 빈정댐, 규탄’의 뜻으로 본다면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베드로를 위시하여 모든 사람들의 경험과 논리에 의한 자기들의 결론과 욕망에 어긋나고 또 그것을 깨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인간들은 그리스도라면 저 하늘의 뭉게구름을 타고 천군 천사가 호위하고 하늘의 웅장한 심포니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가장 영광스럽게 우리에게 군림해 오시는 제왕의 모습 — 심판자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어야 자신들의 통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생각 속에는 저들의 승리의 철학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잘된 것, 가장 성공했다고 하는 것들은 이기고 누르고 더 장악하고 더 넓히는, 그래서 모든 다른 사람 위에 왕처럼 군림하는 그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세상의 철학이다. 그렇게 되어 보려고 우리는 발버둥친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어떤 길도 주저하지 않는다. 거기에 선이니 의니 하는, 봉사니 희생이니 하는 말이 있을 자리가 없다.
그러기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예수가 자신은 영광되게 최후를 마치게 되지 못하고 많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이 못난 소리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서 제자들을 배신하는 일종의 배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승리의 그리스도이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베드로는 무슨 돼먹지 못한 말이냐고 스승에게 대들고 규탄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자기들의 통념과 같지 않은, 말하자면 인간의 결론을 거스르는 뚱딴지 같은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 베드로의 이런 사상과 철학과 통념에 사로잡혀 있다. 예수는 베드로를 꾸짖으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즉 승리, 영광, 힘, 지위, 이런 것을 기준으로 하고 거기에서만 참 가치를 찾으려 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의 첫 순정, 첫 열심, 첫 꿈을 쉽게 버리게 되는가? 우리의 생각과 뜻이 인간의 생각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예수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자가 누군가를 다음에 말한다. “제 십자가”를 지는 자이다. 여기서 “제 십자가”라고 말함이 중요하다. 예수의 십자가가 아닌 제 십자가이다. 제 십자가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란 내가 사는 국가, 사회도 될 수 있고, 내 직장, 내 가정, 또는 나와 너의 관계일 수도 있다. 우리가 다 각각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바로 거기에서 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일만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인간의 결론, 베드로가 예수를 꾸짖은 그 결론에 머무르게 된다.
인간은 항상 베드로의 결론을 완전한 결론으로 삼는다. 우리의 통념, 우리의 계산, 그리고 인간의 가치 판단을 전부로 여긴다. 이 자리가 모세의 경우는 미디안이었고, 엘리야의 경우는 로뎀나무 밑이었다. 사실 인간의 결론, 인간의 논리가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은 인간의 논리가 아니라 좌절된 인간의 실상인 것이다. 선하게 살려는 노력의 종식이요, 값있게 살려는 기도의 중단이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성실성의 포기의 자리인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고,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 영원히 있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와 베드로도 변화산의 경험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기적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변화산에 오른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기이한 광경을 보았다. 이 기이한 광경이야말로 인간이 그렇게도 염원하는 영광의 자리였다. 얼마나 영광되었던지 베드로, 승리의 그리스도 사상, 즉 인간의 결론으로 머리 속이 가득 차 있는 베드로가 “선생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참 좋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을,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십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정말 자기들이 바라고 원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인간적인 욕심과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가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의 결론은 약삭 빠르고 계산이 빠르고, 잔인하여 결코 지지 않는 거기에 승리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차원 이상을 보지 못한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무사안일 一 그런 것 속에 승리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철없이 고난 이야기를 하는 예수를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나 변화산의 영광 一 그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냥 경험해 볼 수 있는 그런 영광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제자들이 변화산, 거기에서 들은 음성 속에 영광에로의 길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베드로, 너 인간의 결론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인간의 계산, 인간의 수판 위에 머물러 있지 말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인간의 결론에 완전히 도전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의 정면 도전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는 자만이 변화산의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영광이 드러나거나 이 땅, 여기서 뽐낼 수 없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일단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겠다는 것을 이미 극복하려는 사람들이다.
그 말을 듣는 자는 누구인가? 제 십자가를 지는 자다. 우리가 가는 길이 아프고 험하고 혹 바보스런 걸음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포기하지 말자. 우리의 삶이 인간의 통념에 맞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그래서 인간의 일만 생각하는 자리에 머무르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자. 현대인은 정신적인 피곤, 생의 무의미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차원으로 우리의 삶의 차원을 높여 보자. 각각 우리가 있는 자리 자리에서 제 십자가를 지고 오늘을 참고 이기며 살아가 보자. 인간의 결론, 통념이 무너지는 변화산의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권면하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