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뎀나무와 작은 소리
1976년 7월 18일 / 열왕기상 19장 1-4절, 9-13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인간의 결론과 하나님의 기적
“이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 승공의 길, 민족통일의 첩경은 민주역량을 기르는 일이다. ……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틈바구니에서 당한 고생을 살려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세계만방에 드날리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통일된 민족으로, 정의가 실현되고 인권이 보장되는 평화스런 나라 국민으로 국제사회에서 어깨를 펴고 떳떳이 살게하는 일이다. 민주주의 만세!”
제목은「민주구국선언서」였다. 이러한 유의 선언서는 당시에는 흔히 있던 것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몸을 내던진 민주 인사들에게는 새삼스럽거나 결정적인 선언은 아니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이를 정부전복 선동사건으로 몰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했다. 이후 재판이 거듭되고 정부부처와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여론몰이가 거세게 일어났다. 불구속이지만 전 대통령까지 피고석에 세운 사건이고 보면 그 위협은 강력했다. 민주화운동은 위축되었고 군사정권은 일정한 안정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쯤, 우리는 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오랫동안 싸워 보았지만 민주화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불의라 하였지만 그 무리는 부를 쌓고 잘 살고 있다는 것, 그러기에 너무 지나치게 투쟁하는 것은 손해를 가져 올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숨을 고르고 경험에서 얻은 상식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인가? 타지않는 불, 작은 소리, 변화산 사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언제나 분명하다. 다만 우리가 말씀에 자기를 쳐 복종시킬 것인가만이 문제일 뿐이다.
아직 익혀낼 수 없는 대목이 있었다.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수의 위대한 제자도 아닌 우리에게, 교인들에게 이 말씀을 그대로 들이댈 수 있는 것일까? 무척이나 특수한 사람들의 응전을 평범한 우리에게 요구할 수 있을까? 그대로 전하는 나의 주저함이 있었다. 고뇌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설교는 지금도 돌이켜보면 나에게 한 설교였던 것 같다.
[말씀을 향한 물음]
현대를 물질문명의 시대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물질의 소유에서 구하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갖게 된다는 결과가 예측되지 않으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 ‘소유한다는 것’보다 더 높은 인간의 삶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정진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려 하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구약성서를 읽어나가자면 극단적인 종교적 편협주의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먼저 10계명 중 제1계명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네 앞에 두지 말라’는 것이고, 여러 가지 피나는 투쟁 또한 이스라엘이 섬기는 신 야훼와 다른 신들과의 싸움의 기록들임을 발견한다. 여기서 우리가 명분없는 신들의 싸움에 선뜻 야훼의 편에 선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이미 야훼 신앙인이기 때문이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싸움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도 그러한 싸움의 한 면이다. 야훼를 자기들의 신으로 섬기는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바알을 섬기는 나라의 왕녀인 이세벨과 결혼한다. 그리고 사마리아에 바알의 사당을 건축하고 그 안에 제단을 쌓고 바알신을 숭상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가의 바알신 숭상에 분연히 일어선 젊은이가 엘리야다. 그는 갖은 투쟁을 다하여 나라의 정책에 대항한다. 그러나 마치 전염병처럼 온 나라에 번진 바알 신앙은 도저히 엘리야 한 사람으로는 싸워낼 수 없는 보편적 신앙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엘리야는 단판에 승부를 내기로 제의하여 이방신의 제사장과 선지자들 950명과 갈멜산에서 대결하여 이기고 저들을 완전히 몰살시켜 버린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되었는가?
우리 나라 역사를 보아도 어느 시대에는 아주 천박한 무당 신앙을 가진 때가 있었고 또 불교나 유교가 국교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종교를 중심으로 한 정치 싸움이 치열했다. 종교 투쟁을 앞세운 정치 탄압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열왕기 기자는 아합의 죄과를 이렇게 적고 있다.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야훼의 노를 격발하였더라”(왕상 16:31, 32).
이것만 보아서는 객관적으로 아합의 죄과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다음을 보면 죄과란 분명히 바알을 섬기게 되었다는 거기에 있다. 아합이 엘리야를 대면하여 한 말은 이렇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야훼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들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18:18).
이것은 무엇인가? 그야말로 순수한 종교 싸움인가? 마치 불교냐 기독교냐, 유교에 구원이 있느냐 기독교에 구원이 있느냐 하는 정도의 종교적 편협주의냐? 만약 이런 정도의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는 무서운 싸움을 벌인 것인가? 물론 여기에는 종교적 편견과 고집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왜 엘리야는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것일까? 이것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원래 바알신이란 이스라엘이 정착한 가나안의 토속신이다. 바알은 잉카의 사원이나 이집트의 스핑크스처럼 ‘부동(不動)의 신’이다. 어느 한 곳을 지배하고 어느 한 지역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신으로 숭상을 받는다. 따라서 바알신은 자연을 지배하는 신이 된다. 결국 바알은 모든 생산과 부의 신으로 한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저는 언제나 승리와 축제의 주인공이 된다. 바알이 섬겨지는 문화가 있다면 그곳의 철학은 생산이다. 그리고 부와 풍요가 최고의 가치가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섬겨온 야훼는 ‘움직이는 신’이다. 신당이 필요없다. 자기 백성이 움직이는 곳이면 어디나 같이 간다. 같이 간다기보다 자기 백성을 한 발 앞서서 이끌고 간다. 결코 자연의 신이 아니요 풍요와 생산, 부의 신이 아니다. 야훼신은 승리와 축제 속에서만 의식되는 신이 아니고 패배와 좌절을 통하여서도 자신을 계시하는 신이다. 이방민족을 쳐서 승리를 얻었을 때나, 혹은 이방민족에게 패배를 당했을 때라도 야훼는 그 사건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는 신이다. 다시 말해서 바알을 부동의 생산신이라고 한다면 야훼는 움직이는 역사의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면 어느 임금이 현군이었느냐 하는 것을 국토의 확장이나 경제력의 증강에 두고 있지 않고, 누가 더 선을 구하고 악을 멀리하였으며 누가 더 삶의 의미, 역사의 뜻을 중요하게 여겼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바알과 야훼를 비교해 보면 그 둘을 각각 신봉하는 사람들 사이의 투쟁이란 결국 두 가치관의 싸움이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한 끝없는 투쟁인 것이다. 바알은 최고의 가치를 생산에 두는 삶, 그것의 상징이다. 어쨌든 풍요해지고 어쨌든 수확이 늘어나고 어쨌든 다산이 되면 그것을 바알의 축복이라고 믿는다. 최고의 가치를 많이 생산하여 풍요해지는 데 두고 있는 삶이다. 그에 반하여 야훼는 최고의 가치를 사람답게 사는 데 두는 삶, 그것의 상징이다. 야훼 신앙에서 풍요와 다산을 저주로 여기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치있다고 신앙적으로 판단하는 그 삶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가치인 것이다. 풍요는 어디까지나 주인이 될 수가 없다. 인간답게 되는 데 쓰여질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 경우 가난과 패배로 인해 더 인간답게 되어지는 것을 보는데 그것을 야훼 신앙은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결국 지금 이스라엘이 직면하고 있는 바알과 야훼의 싸움이란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와 유혹하는 뱀과의 싸움인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이 우리에게는 없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야훼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바알이란 명사의 신은 없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그렇지만 바알은 이름과 모양을 바꾸어 오늘날에도 우리의 삶 속에 파고 들고 있다. 우리의 신앙은 이렇게 모습을 바꾼 바알에 의해 유혹되고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가치를, 어느새 나도 모르게, 품고 소유하는 데 두고 있다. 사람의 훌륭함도 그가 얼마나 부한 자냐 하는 것으로 가늠한다. 그러자니 이것을 갖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한다. 먹으면 죽는 식품을 만들고, 나 편하자고 남의 목구멍에 독약을 부어 넣고, 도대체 왜 공부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섭게 공부해야 하는 현실이 오늘의 현실이다. 우리는 오늘의 이 바알적인 현실을 거부한다. 심지어 기독교 신앙까지도 나에게 하나의 이윤을 얻게 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참으로 엘리야는 무섭게 싸웠다.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야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는 이 싸움을 자기의 판단과 노력에 잡아매고 자기의 의지를 그 동기로 삼고 있다. 갈멜산 위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하는 엘리야는 분명히 의분의 사람, 분노의 사람, 뜨거운 충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감히 하나님이 자신을 원호해 줄 것을 확신할 만큼 자기의 논리와 이론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지금은 세상의 추세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왕후 이세벨이 왕 아합을 충동하여 국가의 대권을 가지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바알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정책적으로 밀고 나간다. 온 나라의 대세는 바알 쪽으로 기운다. 모세가 마치 자기의 애국심과 의분에 따라 행동했다가 대세에 쫓겨 미디안으로 도망쳤듯이 엘리야는 자기의 힘의 한계를 비로소 의식하고 그리고 자기가 싸운다는 것이 도저히 승산없는 불장난임을 알아 차리고 모세처럼 체념하고 만다. 안 되는 일이구나, 결국 인간이란 스스로 물질을 하나님으로 삼고 그것을 위해 사는 그런 동물일 수밖에 없구나, 야훼 신앙이란 결국 설 자리가 없는 것이구나, 이런 결론이 엘리야를 싸리나무 아래 주저앉게 했다는 것이다. 쫓기다 쫓기다 쫓겨온 곳이 싸리나무 밑이다. 거기서 엘리야는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라고 외쳐댄다. 이것이 인간의 결론의 자리이다.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는 노력은 항상 다산의 신인 바알에 의해 쫓겨나기 마련이다. “꿩잡는 게 매”라는 말이 있듯이 무슨 고상한 가치와 인간의 의미, 그리고 의니 선이니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결국 그것은 이세벨에게 밀리고 만다는 결론이 수천년 동안 인간들이 내려온 결론이다. 우선 쥐고 장악하고 소유하는 것이 으뜸이라는 결론이다.
이 결론을 극복해 보려고 애쓰는 무리가 있다. 여기 앉은 우리가 그런 부류에 속한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또 엘리야만큼이나 우리는 인권과 민주에 대한 이론과 논리가 정연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선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애써오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또 모든 사람이 내린 인간의 결론에 빨려들고 있지나 않나 생각된다. 그렇게 살려고 해 보아도 안 되는 것이다 하는 결론, 그곳이 바로 싸리나무 밑이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지는 모르겠다. 지치고 지쳐서 “하나님’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우리에게 인간답게 사는 가치를 찾아 나가란 말입니까? 우리는 못하겠습니다” 하고 항변하고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싸리나무 밑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힘이 다 소진되고 우리의 한계가 분명해진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겠다. 하나님은 싸리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아 있던 엘리야를 그냥 버려두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불러 호렙산 언덕 위에 세우셨다. 그는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숲에서 신비한 기적을 경험했듯이 인간의 상식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물량과 힘,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이 선하고, 가벼운 것보다는 무거운 것이 좋고, 연약한 것보다는 강력한 것이 호감을 사는 상식의 세계, 그래서 더 많이 갖게 하는 바알이 숭상되는 세계에 인간의 통념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기적의 사건이 일어난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야훼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야훼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야훼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19:11-12).
엘리야는 여기서 자기의 상식과 인간의 통념, 인간의 결론이 산산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一야훼의 능력,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다면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인간의 상식이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지진이 일고 불이 날 것이라는 것은 인간의 결론이다. 그랬기에 엘리야도 크고 강한 것, 지진이나 불길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려 했다. 그러나 이 인간의 결론은 하나님이 개입해 오시는 경우 맞지 않는 결론이 된다. 하나님은 조용하고 여린 소리를 통해 자신의 임재하심을 엘리야에게 계시하셨다. 이 하나님은 이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 상황에서 나무 아래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바알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 것을 구체적으로 명령한다. 다마스커스로 가서 하자엘에게 기름을 부어 시리아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이것은 엄청난 명령이다. 아합을 거부하라는 것이다. 이제 나 야훼가 직접 아합을 상대하여 저를 함몰시키겠다는 결의다. 왕에 대한 하나님의 도전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엘리야가 경험한 이 기적을 경험할 수 있을까? 이 확신을 가져야 비로소 우리는 신앙으로 무장된 주님의 군병이 될 수 있겠기 때문에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이 경우 엘리야의 철저한 삶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아 있던 엘리야가 호렙산 굴속으로 피하였을 때 하나님이 묻는다.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엘리야는 대답한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만군의 하나님 야훼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습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습니다.” 얼마나 성실하고 진지한 대답이냐?
우리는 오늘 우리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21세기의 바알 종교를 거부하고 힘과 풍요가 최대의 가치가 되어 있는 여기에서 참답게 사는 인간, 사람답게 사는 인간, 모든 것보다 인간이 우선하는 인간의 삶을 나 자신 속에서, 우리 가정 속에서, 우리 직장 속에서, 우리 사회 속에서, 이 나라 속에서 이룩해 보겠다고 스스로 주먹을 쥐고 일어나 보았으나 엘리야만큼 정직하게 산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간의 결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또 이제는 이 온 나라 삼천 오백만 인구 속에서 나만 홀로 남았다고 할 만큼 철저히 살아 왔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세미한 소리를 경험하여 다시 강한 야훼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밀리고 밀려 나무 아래까지 가기까지 참 신앙을 위해서 노력하고 애쓰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기적을 보이신다.
나는 지금 우리가 꿈꾼 첫 꿈,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살려던 첫 꿈, 오늘의 가치관을 거슬러 살아 가려던 첫 꿈을 쉽게 버려 두고서 오히려 되지도 않을 것을 괜히 시작했다고 하는 말을 거두고, 그 꿈을 정직하게 그리고 꾸준히 현실화해 보려고 다시 일어서자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무모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싸리나무 아래 있다고 해도 그래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적을 신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정직하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려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기적을 일으키실 것이다. 우리 귀에 아주 작은,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소리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분명히 보이실 것이다. 이제 싸리나무 아래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하나님이 일으켜 주실 것이다. 박차고 일어서는 우리를 성령께서 안위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