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안 광야와 타지 않는 불
1976년 7월 11일 / 출애굽기 3장 1-5, 7, 9-10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인간의 결론과 하나님의 기적
“이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 승공의 길, 민족통일의 첩경은 민주역량을 기르는 일이다. ……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틈바구니에서 당한 고생을 살려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세계만방에 드날리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통일된 민족으로, 정의가 실현되고 인권이 보장되는 평화스런 나라 국민으로 국제사회에서 어깨를 펴고 떳떳이 살게하는 일이다. 민주주의 만세!”
제목은「민주구국선언서」였다. 이러한 유의 선언서는 당시에는 흔히 있던 것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몸을 내던진 민주 인사들에게는 새삼스럽거나 결정적인 선언은 아니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이를 정부전복 선동사건으로 몰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했다. 이후 재판이 거듭되고 정부부처와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여론몰이가 거세게 일어났다. 불구속이지만 전 대통령까지 피고석에 세운 사건이고 보면 그 위협은 강력했다. 민주화운동은 위축되었고 군사정권은 일정한 안정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쯤, 우리는 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오랫동안 싸워 보았지만 민주화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불의라 하였지만 그 무리는 부를 쌓고 잘 살고 있다는 것, 그러기에 너무 지나치게 투쟁하는 것은 손해를 가져 올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숨을 고르고 경험에서 얻은 상식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인가? 타지않는 불, 작은 소리, 변화산 사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언제나 분명하다. 다만 우리가 말씀에 자기를 쳐 복종시킬 것인가만이 문제일 뿐이다.
아직 익혀낼 수 없는 대목이 있었다.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수의 위대한 제자도 아닌 우리에게, 교인들에게 이 말씀을 그대로 들이댈 수 있는 것일까? 무척이나 특수한 사람들의 응전을 평범한 우리에게 요구할 수 있을까? 그대로 전하는 나의 주저함이 있었다. 고뇌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설교는 지금도 돌이켜보면 나에게 한 설교였던 것 같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쉬지 않고 늙어 간다. 육체보다 더 빠른 속도로 늙어 가는 것은 우리의 속 사람인 것 같다. 진실하려는 의지도, 선하려는 노력도 작년보다 올해는 훨씬 늙었다. 왜 그렇게 될까? 또 어떻게 극복하여 하나님과 함께 사는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을까?
[슬라이드]
[설교 전문]
나는 무더운 여름 중에는 가벼운 증언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만큼 여유 작작하지 못하다. 해결해야 할 너무나 많은 신앙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충고가 기억난다. 설교는 교인들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는 가끔씩 다루어야 한다고, 항상 그러하면 교인이 싫어한다고 하는 충고였다.
그러나 아무리 덥다고 우리의 신앙생활 一 선을 구하고 악을 버리려는 우리의 노력이 중단되어서는 안 되며, 쉽게쉽게 살려고만 해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는 남들 못지않게 선하게 살아 보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 더운 날에도 예배를 드리려 찾아 오고 증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그 증거다. 우리에게는 남들 못지않은 정열과 힘도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몇 번이고 튕겨져 나왔던 착한 행실들이 그 증거다. 우리에게는 남들 못지않은 이론과 이성이 있다. 우리의 신앙이 고리타분하다는 평을 듣지 않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러나 우리는 선하게 살려는 의지에 자신이 없다. 쉽게 주저앉고 쉽게 포기한다. 또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너무나 인간들의 차원에서만 관계되어지는 것 같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 나간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인 나의 의지요 나의 판단이요 나의 논리가 된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지속성이 없어지고 도막도막 끊긴다. 여기에 신앙이 설 자리, 하나님이 작용하실 자리가 없어지고 만다. 따라서 인간은 수천년을 통해 똑같은 결론을 내리게 되고 그 결론 속에서 살아 가려는 유혹에 빠진다. 인간의 결론이란, ‘인생이란 그저 그런 것이다, 뭐 그리 야단스럽게 특별나게 살 것 없다, 모든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그럭저럭 살아가자’ 하는 것이다. 또 우리에게는 한때 ‘이것은 기어코 내가 해야만 할 일이다’ 라고 다짐하고 하나님께기도까지 하다가도 쉽게 그 일을 손에서 놓아 버린다. 뭐 그렇게까지 아등바등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인이란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다. 그래서 그 인간의 결론이 무너지는 경험을 갖는 사람들이다. 자기 삶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다. 모세의 생의 전반부가 바로 그런 삶이었다. 왕궁에서 자라 성년이 된 모세는 어느날 밖에 나갔다가 이스라엘 민족이 고생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이집트인이 동족인 히브리인들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이집트인을 죽이고 파라오가 두려워 미디안 땅으로 달아난다. 그곳에서 모세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살게 된다.
이것은 모세에게만 있는 경험이 아니다. 가정이고 사회고 간에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선과 악이 있기 마련이고 의와 불의가 있기 마련이다. 또 마땅히 바로 잡아야 할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이런 것들을 그냥 지나쳐 버린다. 못 본 척하고 지나간다. 한때 서울 사람들은 옆의 사람이 소매치기당하는 것을 보아도 그냥 상관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고 만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고, 이렇게 맥없는 무골충이 되어서야 되겠느냐는 비판적 여론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도에 차면 저항하기 마련이다. 내가 만나는 수사기관 사람들에게서 “누구는 젊었을 때 항거 안해 보고 데모 안해 본 줄 아느냐, 나도 대학생일 때 데모에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사실 이런 저항의 경험이 없이 4-50세를 지나가 버린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모세가 이집트인을 때려 죽였듯이 과격한 젊은날의 추억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생의 연륜이 쌓여져 가면서 ‘아하 세상이란 그런 것이 아니구나’ 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눈이 뜨인다. 정의나 선이 반드시 이긴다는 말은 젊은이의 외침일 뿐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모세가 자기가 한 일이 옳다고 생각되나 아무에게도 용납받지 못하였던 것과 같은 경험이다. 결국 이 세상에서는 정의, 선보다 힘이 우선한다. 힘이 없으면 옳고 그르고 간에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경험한다.
이 경험 앞에서 인간은 두 갈래 길 중 어느 한 길을 택하게 된다. 하나는 얼른 힘에 영합하는 것이다. 어제의 불의를 의라고 말하고, 어제의 악을 선이라고 믿어 보려고 애쓰고 결국 그렇게 믿어 거기에 서버린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구제의 가능성은 없어진다. 또 하나의 길은 ‘아이구, 나는 모르겠다. 세상이 이런 것이라면 나는 도대체 상관하지 않겠다. 나 혼자 조용히 내 먹고 살 궁리나 하면서 살아가지’ 하는 체념의 길이다. 적어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라면 앞의 경우가 될 수도 없고, 또 되어서도 안 된다. 뒤의 경우가 대부분의 경우가 아닐까 한다.
모세도 이 뒤의 경우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제 민족을 사랑할 것을 포기한다. 옳은 것을 옳다고 주장할 것을 포기한다. 자기 민족의 독립도 포기한다. 범부로 살기를 작정한다. 그저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것처럼, 그와 똑같이 살 것을 결심하게 된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결론이다. 모세도 그렇게 체념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미디안 광야란 어디인가? 그곳은 선을 향한 인간의 체념이 모인 곳이다. 그곳은 세상이란 다 그런 것이요, 선이 악을 이긴다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라는 인간의 결론이 머물고 있는 곳이다. 거기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 양을 쳐서 먹을 것을 장만하고, 돈 벌고 결혼하여 귀여운 자식 낳고, 그래서 잘 살면 그만이라는 인간의 결론이 머물고 있는 곳이다. 여기서 편안하게 살면 됐지 무슨 의고 선이고 따져 목청을 높일 필요가 없다는 인간의 결론이 먹구름처럼 덮혀 있는 계곡이 미디안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나 나름대로, 혹은 세상에 통용되는 인간의 결론이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바로 미디안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처럼 살던 모세는 어느 날 그 미디안 어느 구석에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인간의 결론 속에 깊이 머물러 있던 모세에게 신비한,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에 대한 인간의 결론 一 그것을 완전히 뒤엎는 순간이다. 불이 붙었다면 타는 것이 경험에서 얻은 인간의 결론인데 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결론 속에 파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기적의 사건이다. 우리의 체념의 세계를 휘젓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기적의 사건이다. 내 의지와 내 합리적 사고에 의해서 인간의 결론, 체념이 무너져 나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인간 세계 저쪽에서 개입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 기적은 일어난다.
그 기적은 모세로 하여금 한 음성을 듣게 한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이 음성은 미디안에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 가려는 모세에게 완전히 새 경지를 던져 주고 있다. 그곳이 비록 미디안 땅 一 체념의 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개입해 들어오신 이상 이제 그곳은 체념의 땅이 아니요 상식의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거룩한 땅인 것이다. 신을 벗어 들 수밖에 없는, 다시 말하면 그 신비한 기적은 체념과 안일에 묻혀 있는 모세를, 범부의 생활 속에 있는 모세를 절대자 앞에 세워 놓고야 만다. 우리 현대인 — 특히 인간의 결론을 생의 신조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절대자 앞에 서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도 그것을 굳이 또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할 뿐, 그것을 통해 절대자 앞에는 서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고민은 우리가 체념의 땅 미디안에 살고 있다는 것보다 어떻게 이 하나님의 기적의 사건에 접하게 되며, 어떻게 절대자 앞에 서게 되느냐 하는 문제다. ‘타지 않는 불’ — 하나님과의 만남이 어떻게 우리에게 가능한가? 오늘 본문에는 그 방법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절대자를 만난 모세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에서 모세는 어떻게 절대자를 만나 미디안을 탈출해 나왔는가 하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들은 말은 무엇인가?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알고 있다. ……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어라”(출 3:7, 10).
이것이 모세가 들은 절대자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듣지 못했다면 절대자를 만났다고 하는 것은 모세와는 직접 관계없는 그저 신비한 경험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젊은 시절 모세의 고민이요, 그가 ‘이것이 내 사명이 아닐까, 이것이 나에게 꼭 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 아닐까’ 하고 저항하고 투쟁했던 바로 그것이다. 모세는 지금 바로 이것을 피하여 혹은 이에 대한 인간의 결론 때문에 여기 미디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자를 만나는 순간 그가 이 말을 들었다는 것은 비록 그가 미디안 땅에서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마음 구석에는 이것 — ‘내 백성을 어떻게 이집트로부터 탈출시킬까, 그 일을 체념하고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는 나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순진한 고민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된다. 비록 체념의 땅 一 인간의 결론으로 차 있는 땅 一 미디안에서 살지만 모세의 마음 구석에는 이 고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냥 아무 생각도 고민도 없는 그에게 갑자기 잘 이해할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뚱딴지 같은 소리가 들려 온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한때 가졌던 선하게 살려는 의지를 쉽게, 완전히 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의를 향한, 또 ‘이것만큼은’ 하고 몸부림치던 그것을 쉽게, 완전히 잊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자기가 버리고 온 자기 민족의 수난의 광경을 아기자기한 사생활의 틈새에서 분명히 눈을 감고 보았을 것이다. 거리야 천리길이 떨어졌다 할지라도 그 아우성과 부르짖음이 오히려 모세의 속에서부터 들려 왔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 같은 진실성이 있는가? 너무나 쉽게, 미디안에 안주해 버리려는 자신을 뉘우치자. 인간의 결론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는 법이다. 하나님이 개입해 들어오신다. 비록 지금 우리가 미디안 땅에 있다 할지라도 첫 진실을 버리지 말자. 타지 않는 불의 경험을 할 것이며, 하나님이 붙드시는, 인간으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감격의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이 축복을 주시기 위해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