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낙인
1976년 2월 29일 / 갈라디아서 6장 11-17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경건의 시종
종교인의 일반적 모습은 경건이다. 경건은 명상과 기도, 은둔과 부드러움으로 나타난다. 매일 성서를 열심히 읽고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한다. 가끔 부흥회도 참석하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나오지 않는다. 천천히 말하고 겸손하게 행동한다.
‘왜 당신은 그러하지 않으며 당신의 설교를 듣는 젊은이들은 감옥을 드나드나? 반정부는 신앙의 일이 아니지 않는가? 기도를 가르치고 경건을 배우게 하지 않으니까 교회도 성장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이런 비판이 노골적으로 있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너무나 다른 신앙 양태를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교회의 윗직분을 맡고 있던 분에게서 반정부 같은 것은 고만두고 교회 일에 충실해 달라는 충고를 들었던 것 같다. 목회자로서 괴로웠다. 교회를 크게 만들어, 보란 듯이 내 능력을 과시할까 하는 유혹도 순간적으로 어른거렸을 것이다.
진짜 신앙, 기독교의 진짜 본질을 밝혀 내야 한다.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임을 밝히고 싶었다. 난들 안일을 왜 거부할까! 그럴 만한 힘이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 길을 가는 것인가? 기도가 무엇인가를 밝혀 보자. 경건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보자.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공에서 오지 않는다. 백성의 삶의 현장에서 온다.
그 현장에의 참여가 진짜 경건이다. 누구라서, 참여, 그렇다 현실에의 참여를 감히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속에 우리 자신이 되어 있는 주님의 혼 - 보화가 그 근거다.
괴로운 일이지만 그 결과는 고난이다. 바울은 세상 역사에 무관심했던 정신세계의 지도자가 아니다.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다가 온갖 고난을 당하고, 무엇인가 후유증까지 가지게 되었다. 예수의 낙인!
마침 각급 학교의 졸업철이었던 것 같다. 학생들, 청년들에게 참 신앙을, 참 교육을 밝혀 보이고자 했던 것 같다. 수도교회 청년들이 그렇게도 감옥을 드나드는 이유인즉 예수 때문임을 밝히고 싶었다. 역사는 그리하여 발전하고, 그러기에 하나님은 역사의 주이심을 분명하게 하고 싶었다.
[말씀을 향한 물음]
종교생활은 어떤 의식의 반복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성서 읽기를 반복하고, 기도하기를 반복하고, 찬송 부르기를 반복하고, 예배에 반복적으로 참예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예수를 경험하지 못하고 그를 만나는 경험을 갖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종교생활의 외형만 매미 허물처럼 생명없이 널려져 버린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참 경건은 무엇일까?
[슬라이드]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교인들의 생활 스타일로서 ‘경건’의 문제가 퍽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그 경건이 중요시되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그렇게 문제가 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 사이에 이 경건을 다시 세우고 그 경건된 생활 속에서 우리의 삶이 정리되어야 하겠다는 내면적 요청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경건을 다시 일으킨다고 할 때 우리가 기왕에 배격해 왔던 경건의 모양의 재건 一 그 근본 의도는 어디로 없어져 버린채 껍데기만 있는 一 소위 습관성 경건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건은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경건의 모양을 거듭 연출하는 그런 류의 경건은 세상과 우리를 감각적으로 구별해 놓을 뿐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경건은 아닌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건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거기서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이 솟구칠 수 있고, 종이 겪을 수밖에 없는 숱한 어려움이라도 뚫고 나가는 능력을 얻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주제를 “경건의 시종”(始終)이라 하여 경건이란 무엇이 바탕이 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려 했다. 첫째 증언 “홀로 드리는 기도”에서는 홀로 있어 본다는 것의 창조성과 기도의 본질, 그리고 기도의 목적을 생각해 봄으로써 기도란 그냥 우리 쪽에서 말에 말을 거듭하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서 이상한 수단으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이웃들의 목소리로 우리의 심령 속에 들려 온다. 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곳에 경건은 없다. 습관성 경건은 있을지라도 둘째 증언에서는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인식함으로 새 삶의 목
적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사실을 뼈 속 깊이 확인할 때 하나님의 소리, 즉 이웃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를 생각하는 거기에 습관성 경건은 있을 수 있으나 참다운 경건은 없다. 오늘 우리의 길이 그래도 험준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실제로 어려움을 한 번 당하고 보면, 또 조그마한 손해라도 보고 나면 하나님의 영광 따위는 아랑곳없게 되고 마는 것 아닌가 하는 데서부터 우리의 생각을 출발시켜 보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은 경험적인 것이고 또 인간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나는 평소 솔직하게 바울 선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의 생의 의미를 너무나 정신화해버림으로써 산 생명의 종교가 아닌 교리의 종교로 기독교를 다분히 전락시키고 있다고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나는 바울의 서신들을 다른 각도에서 읽게 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문과 그 의문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의문 1. 바울은 스스로 자기의 전생애를 예수에게 바친다고 거듭 말하고 있는데도 그는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하고 있지 않고 예수의 교훈을 한 번도 인용하지 않고 있는데 왜 그랬을까? 예수에게 전생애를 바쳤다면 예수의 생이 그에게 강렬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또 전해 내려오는 복음서에 기록된 것과 같은 그러한 가르침들을 거듭 인용함직한 데도 전혀 그렇지 않다.
의문 2. 그는 사회적, 정치적 불의에 대하여 거의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박해를 받는다. 그는 결국 로마법에 의하여 로마 정권의 손에 죽었다. 종교적 이유 때문이라면 유대 종교법에 의해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로마법에 의해 죽었다는 것은 종교범이 아닌 정치적 이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1과 2의 의문을 놓고 볼 때 그의 편지에 쓰지 못한 혹은 쓰되 은유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쓴 그의 고백은 무엇일까? 그의 생을 경건된 생이라고 볼 때 과연 그가 무엇 때문에 고난을 받았고, 또 그가 주장하여 산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에서 자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다른 무엇도 결코 자랑하지 않겠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곧이어 상당히 침통한 느낌의 감정으로 “내 몸에는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바울의 몸에 찍힌 예수의 낙인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희랍, 로마 시대에 도장을 불에 달구어 자기 가축의 궁둥이에 찍어 지짐으로 다른 것과 구별했었다. 그런 풍습이 나중에는 노예나 포로를 영원히 종으로 부려먹기 위해 쇠도장을 불에 달구어 이마나 팔에 찍었는데 그것을 가리켜 낙인이라 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예수의 낙인”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예수가 마치 자기의 종이나 포로처럼 바울의 마음에 쇠도장을 찍은 것이라고 하나 여기서의 낙인이란 그런 정신적인 것을 지나 매우 구체적인 것이다.
“내 몸에는”이다. 그냥 “나에게는”도 아니요, 또 “내 마음에는”이 아니다. “내 몸에는”이다.
바울은 무수한 고난을 구체적으로 받았다. 옥에 갇히고 극심한 환란에 처하고 매를 얻어맞되 서른 아홉 대의 태장을 다섯 번이나,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이나, 돌로 맞은 것이 한 번, 폭동의 표적이 되기도 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당해 왔었다. 툭하면 당시의 치안관들에게 잡혀 갔었다. 가서 수모를 당하고 나왔다. 나는 틀림없이 바울이 이러한 박해를 받는 도중에 육체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리를 절게 되었다든지, 몸에 몽둥이 맞은 자국이 선명하게 났다든지, 얼굴에 무슨 큰 상처가 나게 되었다든지, 불치의 병을 얻게 되었다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얻게 된 육체의 큰 상처를 틀림없이 몸에 짊어졌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이것이 “예수의 낙인”이다.
그런데 그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 말은 무슨 말인가? 그냥 종교적 의미도 아니요, 관념적인 선언도 아니다. 그 다음 말에서 “이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은 내게 대하여 못박혀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하여 못박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이 십자가가 결코 관념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그것은 구체적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낙인”이란 이 예수의 십자가를 자랑함으로 당한 상처와 관계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를 전하다가 구체적으로 상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몸에 찍힌 예수의 낙인, 상처는 분명히 예수의 십자가의 도를 전하다가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상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상처를 들여다 보자. 그 상처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을 것이다. 그 상처는 악한 자의 손이 허용된 자리임이 틀림없다. 의로운 자의 행위와 호소가 불의한 자들의 손에 의해서 상처나게 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이러한 경험을 얼마든지 한다. 선한 뜻을 악한 자가 짓밟아 놓는다. 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유한 마음과 생활 자세를 가지고는 이 세상을 살아낼 수가 없다. 가능한 한 지독하다는 말은 듣게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수룩하다는 단죄와 함께 짓밟힌다. 또 선하든 악하든 강한 자에게 얼른 아부해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짓밟히고 만다. 지혜가 있어서 시세를 빨리 파악하고 거기에 영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바울은 자기는 그렇지 못하여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낙인”이다.
그것은 물론 바울을 태장을 치고 몽둥이로 때리고 돌로 친 자 — 그를 감옥에 가둔 자 一 그 불의한 자에 의해 찍힌 상처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예수의 낙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을 죽이려 한 자가 태장을 쳤으나 그는 결코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고 예수께서 자기를 쳤고 때렸고 감옥에 가두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몸에 낙인이 찍히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수난당하도록 하신 표식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변적이고 종교적인 것으로 생애 변두리에 밀어 제쳐 놓질 않았다. 그의 십자가 고난을 결코 숭고하고 고상한 종교적 행위 따위로 사변하지 않았다. 그것을 믿음으로 내 죄가 사해져 버린다는 신통력 있는 상징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바울은 예수를 위한 육체적인 고난 속에서 예수의 고통에 현실적으로 동참했다. 그는 예수의 생애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역사적 삶인 십자가 사건만은 가장 소중한 것으로 붙들고 있다. 그는 예수가 그 십자가에서 어떻게 고통을 당했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복음서 기자처럼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의 이 십자가에서의 역사적 고통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떤 수난을 당하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형제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결코 후퇴나 타협을 하지 않을 때 오늘날 우리에게도 반드시 수난은 오고야 만다. 그것이 크고 작은 것은 문제가 아니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그것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배신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처형된 사건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처지에 놓이는 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를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일인 것이다. 그것이 2천년 전의 예수의 삶을 오늘날 내 삶 속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세상과 높이 담을 쌓고 완전히 밀폐된 분위기 속에서 손해나거나 위험한 일은 다 피하는 자리에서 아무리 십자가를 부르고 십자가를 노래한다 한들 그것은 습관성 경건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가정이야 어떻게 되든, 어떤 불의가 어떻게 난무하든 나는 십자가의 공로만 믿어 구원에 이르겠다는 종교적 이기주의자에게 십자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 몸에 짊어지고 다니고, 그리고 예수의 낙인이 찍힘으로써만 알 수 있는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 그랬기에 그는 계속해서 고난을 당했고 결국 로마법에 의해 처형을 당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우리도 예수의 삶을 우리 삶 속에 구현하려 할 때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그 현실을 피하고 만다. 그리고도 습관적인 경건의 모습으로 자기를 거룩하게 보이려 한다. 그러나 피하지 말자. 차라리 내 몸에 “예수의 낙인”을 찍히우자. 그것은 어리석음의 표가 아니라 예수의 종된 표식이다. 지혜 없는 결과가 아니라 예수의 제자됨의 결과이다. 이렇게 사는 자들은 불행한 자가 아니다. 그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평안과 자비를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16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