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7-18] 자기 인식의 경건 – 1976년 2월 22일, 김상근 목사

자기 인식의 경건

1976년 2월 22일 / 고린도후서 4장 7-18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경건의 시종

종교인의 일반적 모습은 경건이다. 경건은 명상과 기도, 은둔과 부드러움으로 나타난다. 매일 성서를 열심히 읽고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한다. 가끔 부흥회도 참석하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나오지 않는다. 천천히 말하고 겸손하게 행동한다.

‘왜 당신은 그러하지 않으며 당신의 설교를 듣는 젊은이들은 감옥을 드나드나? 반정부는 신앙의 일이 아니지 않는가? 기도를 가르치고 경건을 배우게 하지 않으니까 교회도 성장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이런 비판이 노골적으로 있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너무나 다른 신앙 양태를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교회의 윗직분을 맡고 있던 분에게서 반정부 같은 것은 고만두고 교회 일에 충실해 달라는 충고를 들었던 것 같다. 목회자로서 괴로웠다. 교회를 크게 만들어, 보란 듯이 내 능력을 과시할까 하는 유혹도 순간적으로 어른거렸을 것이다.

진짜 신앙, 기독교의 진짜 본질을 밝혀 내야 한다.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임을 밝히고 싶었다. 난들 안일을 왜 거부할까! 그럴 만한 힘이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 길을 가는 것인가? 기도가 무엇인가를 밝혀 보자. 경건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보자.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공에서 오지 않는다. 백성의 삶의 현장에서 온다.

그 현장에의 참여가 진짜 경건이다. 누구라서, 참여, 그렇다 현실에의 참여를 감히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속에 우리 자신이 되어 있는 주님의 혼 - 보화가 그 근거다.

괴로운 일이지만 그 결과는 고난이다. 바울은 세상 역사에 무관심했던 정신세계의 지도자가 아니다.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다가 온갖 고난을 당하고, 무엇인가 후유증까지 가지게 되었다. 예수의 낙인!

마침 각급 학교의 졸업철이었던 것 같다. 학생들, 청년들에게 참 신앙을, 참 교육을 밝혀 보이고자 했던 것 같다. 수도교회 청년들이 그렇게도 감옥을 드나드는 이유인즉 예수 때문임을 밝히고 싶었다. 역사는 그리하여 발전하고, 그러기에 하나님은 역사의 주이심을 분명하게 하고 싶었다.


[말씀을 향한 물음]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대세에 자기를 맞추어 살아간다. 그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무언가 특수한 소명감에 살자면 고난과 역경에 부딪히게 된다. 여기가 우리의 생의 전진이 포기되는 함정이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 포기의 함정에 빠져 든다. 이 포기의 함정을 넘어설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은 무엇인가?


[슬라이드]


깨진 질그릇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

도피의 종교 vs. 참여의 신앙

생의 전진이 포기되는 함정

2천 년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어, "우리는"

바울의 생애를 일관하는 기나긴 수난의 역사(고린도후서 11:23-27)

우리의 진짜 고민: 발이 움직여지지 않는 경험

인간이라는 형질: 질그릇의 해부학

깨진 틈새로 발현되는 근원적 힘: 보화

고난의 역설 곡선

참된 경건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질그릇이라는 자기 인식, 종말론적 역사 인식

제1기둥: 철저한 자기 인식(질그릇의 수용)

제2기둥 : 역사적 상황에 대한 확인(종말 신앙)

깨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나는 지난 주일 증언을 통해 경건이란 잃은 자기를 찾는 노력이요 자기를 확립해 가는 삶을 가리킨다고 했다. 흩어진 자기를 모으고 그래서 오직 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 바로 그것이 기도라고 했으며 주님이 사신 삶을 본받아 흘로 드리는 기도를 드리자고 했다. 그랬을 때 우리 주변에서 울려 오는 크고 작은 신음 소리, 구조를 청하는 아우성 소리가 우리에게 들려 올 것이라 했다. 그 신음 소리와 아우성이 남의 것이 아닌 내 부르짖음이요 비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실제 삶의 경험에서 온 또 하나의 장벽이 있다. 그것은 신음 소리와 비명을 듣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느냐는 경험이다. 이 경험을 앞에 놓고 오늘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를 우리에게 보낸 것으로 읽어 보자.

먼저 바울은 8-9절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쓰고 있다. 욱여쌈을 당하고 당황케 되는 일이 생기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바울의 생애를 서술하고 있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4장 9-13절을 보면 그는 온 세계와 천사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서, 어리석은 자가 되고 약한 자가 되고 천덕꾸러기가 되고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학대를 받으며 집 없이 유랑하며 멸시와 박해와 능욕을 받으며 마치 이 세상의 폐물, 인간의 찌꺼기처럼 살았 다고 한다.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는 더 실감나게 씌어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들입니까? 미친 사람의 말 같겠지만 사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는 그들보다 낫습니다. 나는 그들보다 수고를 더 많이 했고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도 없이 맞았고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의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기나긴 수난의 역사 기록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욱여쌈을 당하고 당황케 되는 일이 생기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우리는”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이러한 수난사가 물론 바울 자신의 고백이지만 자기 자신의 일만으로 이해하지 않고 전체 그리스도인들이 처해 있는 입장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당한 수난은 바울 개인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이 말, “우리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눌리지 않고……” 라는 글을 읽었을 때 ‘과연 그렇습니다’ 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첫째 자문은 이 글을 읽을 때 2천년 후에 살고 있는 여기 한국의 교인들도 이 글을 읽으며 ‘과연 그렇습니다’라고 반응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바울의 수난은 2천년 전에 된 일이고 오늘과는 그 상황이 상당히 다른 것은 사실이다. 만약 이 다르다는 말이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만다면 바울이 당한 것과 같은 수난이나 난관은 오늘의 우리에게는 오지 않을 바울 자신의 일로만 그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과연 그렇습니다”라는 반응은 결코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히 성서는 나에게 오늘도 살아서 내 가슴 속을 파고 들고 내 혼을 흔들어 놓는 산 말씀이 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바울과 같이 특수한 소명감에 자기가 가진 것을 배설물같이 내버리고, 세상에 맞추어 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거슬러 사는 삶을 살아 간다면 바울이 당한 수난의 기록이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상투적인 염려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젊은이들에게는 하나의 소명감, 자신의 신앙고백이 없다는 염려를 많이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누가 그렇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도 물어야 하겠으나 얼마큼 나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본다. 모든 것이 자기 입신양명의 수단이지 그것이 나의 신앙고백이라거나 그것이 내 존재의 근거라거나, 나는 거기서야 하나님을 만난다는 진실성이 얕은 것이 사실이다.

바울이 그 갖은 고난을 견디며 선교의 열을 낮추지 않았던 것은 그것을 떠나서는 나 바울이란 도대체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그 숱한 난관을 겪으면서도 이스라엘을 이끌고 40년을 광야에서 헤매었던 것은 일시적인 낭만에 젖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삶의 고백이요 목표요 존재의 근거였기 때문이다. 여가선용이나 자선 행위 정도가 아니다. 한때 해보는 일들이 아니었다. 우리도 때로는 어떤 특별한 소명감에 불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세계, 내가 사는 이 삶의 현장에 부정의나 불의, 불평등이 횡행하는 것을 보면 젊은이로서, 더구나 선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무리로서 자기 살 길이나 찾아다닐 수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회의 작은 집단이나 한 민족이나 세계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특수한 각오를 한다면 바울의 수난은 오늘에도 분명히 우리의 수난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말해 온 이 특수한 각오를 우리가 하게 된다면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라는 이 말에 그리스도인 본연의 일체감과 공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고민은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지 않고 더 근본적인 데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곧 특수한 각오 一 하나님의 부르심 一 그것을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듣고 보고 알고 있으나 우리의 발이 움직여지지 않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 바울은 욱여쌈을 당해도 눌리지 않는다고 했으나 우리는 욱여쌈을 당하면 눌린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나 우리는 실망한다. 그는 궁지에 몰려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고 하나 우리는 쉽게 버려져 버린다. 그는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는다고 하나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 자신을 포기하기 일쑤이다.

왜 그럴까? 여기에 우리가 찾는 참 경건의 한 비밀이 있다고 본다. 경건은 외양이 아니다. 경건은 성실한 생 자체이다. 그는 그 엄청난 능력이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물론 교육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우리의 우수한 머리나 훈련된 기술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져 가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다. 그는 우리 인간 자신을 하나의 질그릇으로 비유하고 있다. 짓누르면 눌리고 때리면 깨지는 연약한 질그릇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스스로 훌륭한 인격자거나 엄청난 지도력의 소유자거나 백절불굴의 투사라고 자랑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맞으면 아프고 굶주리면 쓰러지는 나약한 인간임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그 숱한 고난과 역경을 견디어 냈다고 자부하고 있지 않다.

그는 이 엄청난 힘, 고난도 괴로움도 자기의 특수한 결단, 즉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신을 깨뜨리지 못하게 하는 이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백한다. 바로 그것을 ‘질그릇 속에 담긴 보화’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보화는 학교가 준 것이 아니다. 책이 준 것이 아니다. 내 의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내 진실성이 일군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 인간이라는 이 질그릇을 보수하고 닦는 것에 불과한 것들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보화라 고백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모셔들임으로써 백절불굴, 칠전팔기, 진실에 대한 철저한 고백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바로 이것이 참 경건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나약한 우리, 바울과 같은 범속한 우리는 바울의 이 고백 속에서 참 경건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 각급 학교를 졸업하게 된 우리들, 그리고 모든 교우들은 바울의 이 경건을 배울 수 있게 되어야 한다. 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은 미래를 향해 전진의 거보를 내딛는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런 때마다 특수한 각오,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아 거기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 결단의 길이 어떻게 가능한가? 바울의 방식대로 한다면 철저한 자기 인식에서 가능성은 열린다.

첫째, 그것은 자신은 질그릇이라는 자기 인식이다. 그는 자신은 깨질 수밖에 없는 하잘것없는 존재임을 시인하면서도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넘어지거나 좌절하지 않을 능력이 있다고 했다. 자신은 역시 제한받은 한계적인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칠전팔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바로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바울은 언제나 자기는 유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자랑처럼 늘어 놓는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특수한 각오,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해 박해를 피하지 않고 박해의 복판을 뚫고 나간다.

그는 ‘질그릇 같은 나를 때리고 짓누르고 궁지에 몰아 넣어라. 그러면 나는 깨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내 안에 담긴 보화 —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위해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에게는 예수를 우리 속에 모신다는 것을 무슨 무식쟁이들의 말 정도로 백안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모심으로 그 엄청난 고난의 길을 걸어 갈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둘째로, 변해질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 속에 있는 자기 확인이다. 인간 바울이 이러한 어려움을 뚫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는 자기 확인이었다.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17절).

나는 무엇이냐?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온 인류, 혹은 내가 속한 작은 집단에 가져다 줄 하나님의 사자, 종이라는 자기 확인이다. 이 박해와 이 현실은 과도기적인 것이요 일시적인 것이라는 신념이다. 우리의 각오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가로막고 서 있는 장벽이 아무리 구조화되었고 영원한 것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곧 지나가 버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의 상황은 반드시 변하고 끝장이 난다는 종말 신앙이다. 초대 교인들이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은 용기는 바로 이 종말 신앙 때문이었다. 만일 우리가 이 현실에서 쉽게 좌절하고 쉽게 체념한다면 도대체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무엇이며 어느 점에서 비그리스도인과 다른 점이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의 질그릇이다. 이 질그릇은 언젠가는 깨진다. 엄밀한 의미에서 일시적인 현상에만 매여 울고 웃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인간됨을 포기하는 결과에 이른다. 우리는 이제 무엇보다도 자기 인식, 내가 누구냐 하는 자기 인식의 깊은 경지에 이르러야 하겠다. 그것이 경건의 바닥이요 거기에 오늘 우리가 부딪힌 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계실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