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드리는 기도
1976년 2월 15일 / 마태복음 14장 22-23절
김상근 목사
[회상 노트] 경건의 시종
종교인의 일반적 모습은 경건이다. 경건은 명상과 기도, 은둔과 부드러움으로 나타난다. 매일 성서를 열심히 읽고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한다. 가끔 부흥회도 참석하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나오지 않는다. 천천히 말하고 겸손하게 행동한다.
‘왜 당신은 그러하지 않으며 당신의 설교를 듣는 젊은이들은 감옥을 드나드나? 반정부는 신앙의 일이 아니지 않는가? 기도를 가르치고 경건을 배우게 하지 않으니까 교회도 성장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이런 비판이 노골적으로 있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너무나 다른 신앙 양태를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교회의 윗직분을 맡고 있던 분에게서 반정부 같은 것은 고만두고 교회 일에 충실해 달라는 충고를 들었던 것 같다. 목회자로서 괴로웠다. 교회를 크게 만들어, 보란 듯이 내 능력을 과시할까 하는 유혹도 순간적으로 어른거렸을 것이다.
진짜 신앙, 기독교의 진짜 본질을 밝혀 내야 한다.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임을 밝히고 싶었다. 난들 안일을 왜 거부할까! 그럴 만한 힘이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 길을 가는 것인가? 기도가 무엇인가를 밝혀 보자. 경건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보자.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공에서 오지 않는다. 백성의 삶의 현장에서 온다.
그 현장에의 참여가 진짜 경건이다. 누구라서, 참여, 그렇다 현실에의 참여를 감히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속에 우리 자신이 되어 있는 주님의 혼 - 보화가 그 근거다.
괴로운 일이지만 그 결과는 고난이다. 바울은 세상 역사에 무관심했던 정신세계의 지도자가 아니다.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다가 온갖 고난을 당하고, 무엇인가 후유증까지 가지게 되었다. 예수의 낙인!
마침 각급 학교의 졸업철이었던 것 같다. 학생들, 청년들에게 참 신앙을, 참 교육을 밝혀 보이고자 했던 것 같다. 수도교회 청년들이 그렇게도 감옥을 드나드는 이유인즉 예수 때문임을 밝히고 싶었다. 역사는 그리하여 발전하고, 그러기에 하나님은 역사의 주이심을 분명하게 하고 싶었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또 묻지도 않고 산다. 그래서 자신을 상실해 버리고 있다. 그것은 해야 할 많은 일, 번거로운 일상생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자기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무엇으로 잃은 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또 자기를 되찾는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가?
[슬라이드]
우리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니 도구를 만드는 존재니 사회적 동물이니 등 여러 가지로 규정한다. 이런 인간 설명 중에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함은 인간이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얽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소박하게 이해해 본다. 더구나 현대인이란 결코 혼자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하루 종일 어떤 무엇과 관계를 가져야 하고 하루 종일 무엇을 듣고 무엇을 말해야 한다.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 속에서, 그리고 짜여진 일과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또 다음날을 맞게 된다. 군중 속에서 그날 그날을 보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적 상황이다. 더구나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으로 인간을 저울질하는 현대 기능사회에서는 자산이 서 있는 자리 자리에서 누구보다도 자기가 자기의 위치에 가장 적합한 기능인임을 과시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은 내가 누구냐, 나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이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어떤 기능인이냐 하는 질문만을 거듭해야 한다. 사장은 사장으로서,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총무과 사원은 총무과 사원으로서, 교사는 교사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 내일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인으로서 자기를 확립해야만 한다. 그리고 더 유능한 사장으로 혹은 자기 능력 이상으로 평가받게 되는 데서 자기 안전의 면을 찾게 된다. 그 산물로 우리 인간은 그가 사장이건 사원이건 인간 아닌 생산의 훌륭한 기계가 되고 만다. 소위 거룩한 사업에서조차 그렇다. 여기에 자기 상실, 인간 상실의 비극이 깔려 있다. 그리고 어느 경우 좌절도 하지만 또 어느 경우는 그 속에서 나를 받쳐 올린 영광에 싸인다. 영광의 빛을 뿜고 있는 거기서 우리는 또 내 자리, 본질을 잃는 수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상실된 자기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경건이다. 경건이란 잃은 자기를 찾는 노력이요 자기를 세워가는 삶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수도 하루 온종일 사람들에 싸여 지냈다. 무슨 새로운 말을 기대하는 사람들, 병자들, 그리고 사람들의 문제 속에 같이 얽혀 지내셨다. 사람들의 고픈 배의 문제도 심각했다. 그들 앞에 예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자”로 서야만 했다. 새 교훈을 기대하는 무리들에게는 참 생명의 말씀을 해줄 수 있어야 했다. 병자들에게는 치유의 능력을 가진 자로 등장해야 했다. 배고픈 군중에게는 먹을 떡도 주어야만 했다. 이런 것들 속에 얽혀 사는 것이 예수의 삶의 현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되고 메시아로 보여지고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유대 나라를 로마로부터 독립시켜 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할 것을 요청받는 자리에 이르기도 했다. 그도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예수로서의 기능의 물음에 무엇인가 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물음의 수렁 속에 자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날이 저물자 같이 있던 제자들을 재촉해서 다음으로 갈 곳으로 미리 보내고, 같이 있던 무리들을 헤쳐 돌려 보내셨다. 그리고 그는 산으로 올라가서 거기 “홀로” 계셨다. 예수가 이렇게 홀로 계셨다는 기록은 여기저기에 있다. 전도여행을 떠나시기 전에도 예수는 홀로 있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 예수께서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막 1:35). 산에 가셨다고 하는 것이나 이른 새벽에 가셨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피한 것이다. 예수는 홀로 있으려 했다. 그는 공생애를 시작하려 했을 때도 광야에 홀로 나가셨고 십자가를 지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도 홀로 나가셨다. 예수는 간간이 홀로 있으려 했다. 사랑하는 제자도, 그를 유일한 희망으로 믿어 따라다니던 무리들도 피하여 예수는 홀로 있으려 했다. 홀로 있으면서 예수는 기도했다.
홀로 있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 삶의 차단이요 흩어져 이리저리 찢겨진 자기를 찾는 행위이다. 사람들 틈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과의 능력의 비교에서 자신이 존재해 있음을 확인하는 삶으로부터, 내 어떤 기능에서 자신을 보고 그 와중에서 자신이 있음을 알게 되는 그런 삶으로부터 자기를 회수하는 행위이다. 나와 너, 나와 무리들, 나와 제자들, 그리고 나와 일들의 관계 이전인 예수가 예수와의 관계, 자기가 자기와의 관계로 돌아가는 행위이다. 모든 것을 다 떼어버린 나 一 메시아라는 면류관도 벗어버리고 군중의 기대에 찬 눈길, 그 속에서 유혹을 받는 유혹의 눈길도 제쳐버린 나 一 예수 자신, 바로 그것을 찾는 행위이다.
우리에게서 우리를 장식하는 모든 것, 우리의 직위, 우리에게 모아진 기대, 짊어진 과제들 이런 것들로 나는 다분히 위장되어 있지만 바로 이것을 다 떨어버린 나, 다 제쳐버린 나 一 그것이 바로 나다. 인간에게 가장 겸손한 순간은 바로 이러한 순간이다. 아무것도 더해지거나 덜해진 것 없는 나를 복잡한 관계 속에서 회수하여 낼 때 나는 나를 비로소 찾게 된다. 그 나는 사장으로서의 나도 아니요 어떤 기능인으로서의 나도 아니요 교사로서의 나도 아니요 그것은 그냥 나다. 이미 스승도, 추앙의 대상도, 내 공로 위에 나를 올려 놓는 그런 의식을 다 버린 상태가 바로 홀로 있는 상태다.
예수는 기도를 가르치실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기도하라 했다. 그것 역시 나에게 덧입혀진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흘로 있으라는 말이다. 이렇게 홀로 있는 것, 그것이 곧 기도다. 철저하게 홀로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무슨 기도를 했을까?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외에는 기도의 내용이 없다. 예수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인간과 차단하고 홀로 산에 올라갔다. 철저한 고독, 그것 자체가 벌써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가 무슨 내용의 기도를 했는지는 기록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눈 뜬 기도’라는 충격적인 증언이 있다. 우리 교인들은 세상 모든 것을 두 손으로 가려 보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는 ‘눈 감은 기도’ 만을 드려 오고 있었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거나 눈 감고 나를 위해 기도만 드리면 적어도 나는 구원을 받게 된다는 약삭빠른 계산속이 우리에게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눈 감은 기도를 중지하고 눈을 크게 떠 세상의 모든 것을 직시하는 때 거기에 참 기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세상을 보지 않는 자에게 삶을 통한 그리스도에의 충성이 있을 수 없고 참다운 삶의 투쟁이 있을 수 없고 그렇기에 깊은 참 기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은 눈을 뜨고 기도하자 했다.
또한 세상과 부딪치면서, 사건과 부딪치면서 세상과 사건과 씨름하면서 “주여, 이 일을 이렇게 해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자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우리의 삶의 세계로 보냄을 받는 때 우리가 가서 살아야 할 세상을 향해 서고 그리고 눈을 크게 떠 그 세상을 직시하면서 축복의 기도를 받자고 했다. 그것은 고질화되고 관습화되고 울림없는 독백의 기도를 걷어 치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칫 그것이 우리에게 큰 오해를 가져 오고 있다. 그러다가 우리는 신앙생활 자체까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기능의 문제로 취급하게 되고 말았다. 나를 잃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에게 이제는 홀로 드리는 기도 一 그것을 갖자고 호소하고 싶다. 나를 찾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나 고독을 찾아 홀로 있으려는 것이 기도의 목적은 아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건너편에 먼저 보냈다. 먼저 보냈다 함은 제자들과 다시 만날 것을 전제로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홀로 계셨던 것은 다시 만나기 위한 것이다. 마가복음 1장 35절의 경우도 그렇다. 예수는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가까운 여러 마을을 찾아가자. 거기서도 말씀을 전해야겠다. 내가 이 일을 하러 왔다.” 그리고 이어서 성서는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여러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귀신을 쫓아 내셨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한 경우도 그렇다. 기도하신 후 고난의 자리를 향해 가신다. 기도하는 행위 자체가 기독교의 덕목이 될 수도 없고 그것이 신앙생활의 종착역이 될 수 없다. 그것도 다시 가기 위해서다. 홀로 있음으로 자신을 찾은 예수는 하나님을 바로 찾았다. 하나님을 찾음으로 그는 사람들과의 본래 관계를 다시 찾은 것이다.
제자들, 저들은 서슴없이 자기들의 능력으로 바다를 항해한다. 그러나 저들은 풍랑을 만난다. 저들은 파도에 시달리게 된다. 그 때 저들은 비로소 전혀 다른 방법으로 홀로 있음을 느낀다. 홀로 있음을 뼈아프게 느낄 때 자기들의 힘의 한계를 보게 된다. 자기가 밝히 자기에게 보여진다. 자기가 누구임을 묻게 된다. 비로소 자기들을 향해 오시는 예수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는 이제 어제 해지기 전 자기들과 함께 있던 예수가 아니다. 으레 함께 있는 그도 아니다. 이제 그를 만나게 된 것은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다. 그러기에 예수와 만났다고 하는 것은 감격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이 감격이 없다. 아직까지도 내 힘으로 파도를 헤쳐갈 수 있다고 자만하고 있다. 내 능력, 내 지혜, 내 수단, 내 노력으로 이 파도를 가르고 건너편 언덕에 가 닿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바람은 계속 거슬러 불어와서 우리의 노 저음이 별 효과가 없음을 최근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가 과연 무엇을 했단 말인가? 우리는 건너편 언덕에 이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사장으로 자신을 위장할 수는 있으나, 아버지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러나 주님께서 먼저 가라 하시는 그 곳, 그 일에 있어서 우리는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기에 더욱이 나는 사장으로서만 있으려 하고 좋은 아버지로서만 있으려 하고 훌륭한 사원으로서만 있으려는 경향이 생긴다.
그러나 이제 우리 자신을 분명하게 보자. 파도에 몰려 제대로 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보자. 사회적인 인간이기를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바로 직시해 보자. 거기서 우리는 예수를 만나고 그 만남은 감격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참 기도가 우리 가슴에 담기게 될 것이다.
모세는 불 붙은 떨기나무 속에서 무엇을 찾지 못했었다. 그런 환상이 지나간 다음 조용한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엘리야도 바알의 모든 제사장을 쳐 죽이는 대승리를 거둔 결전 속에서 자기를 보지 못했고 지진이 나고 바위가 무너지는 소동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모세나 엘리야나 철저하게 홀로 있어 오히려 고독 속에 빠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은 바로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그럴 때 이 세상의 신음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를 타고 우리에게 비로소 들려 오게 되는 것이다.
참된 소명은 홀로 드리는 기도 속에서 들리고 그 소명을 위한 기도는 눈 뜬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수없이 크고 작은 신음 소리가 울린다. 우리 주변에는 파도를 만난 제자들처럼 구조를 청하는 아우성 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런 소리에 대해서 우리는 만성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지쳐 있다. 그런 소리가 가슴에 아프게, 뜨겁게 들려 오지 않는 것은 나에게 문제가 있는 증거이다. 우리는 병들어 있다. 너의 소리에 민감하지 않은 것은 나를 너희들 속에 상실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를, 나 자신을 되찾아야 하겠다. 이 세계의 부르짖음에 예민한 자기를 되찾아야 한다. 이 세계의 문제가 내 문제이다. 이 세계의 부르짖음은 나의 비명이다. 그럼에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있음은 자기 상실의 신호이다. 우리는 잃은 나를 찾아야 하겠다. 이 나를 찾는 길, 그래서 잃은 형제를 찾는 길이 바로 기도이다. 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 우리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홀로 있어야 한다. 홀로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