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베드로의 가슴에만 온다
1975년 12월 28일 / 누가복음 22장 54-62절
김상근 목사
[회상노트]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
1975년, 만감없이는 그 한 해를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강요되었고, NCC 총무인 김관석 목사, 박형규 목사 등이 구속되었고, 다시 대학에 군이 진주했고, 할복자살하는 학생들이 생겼고, 유신헌법에 대한 비방이나 비방사실을 전언하는 것까지도 엄금되었고, 장준하 선생은 의문사를 당했다. 대학들이 휴교를 당했고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되었다.
교회 내의 이른바 보수-친군부 세력이 국가안보를 앞세워 반정부적 교회세력에 반립했다. 정권의 탄압보다 더 아팠고 괴로웠다. 역사에 정의를 세우는 일에 함께 하지는 못할 망정 이를 비난하고 대립하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두웠다. 캄캄했다. 희망이 없었다. 이 암흑을 정공으로 뚫고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연말, 성탄절 분위기는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결연함을 무디게 하고 있었다. 그것을 더욱 진한 절망의 근거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성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가 온다고 한다. 그것을 믿기가 어려웠다. 고백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무릎을 꿇고 성서의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할텐데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괴로웠다. 설교자가 설교자 자신에게 설교할 때가 있다. 그것은 자기 회개다. 그것은 결단이다. 자기를 다잡는 것이다.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것, 더구나 절망의 복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러나 그것이 신앙이다. 그것이 신앙의 승리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다.
[말씀을 향한 물음]
어느 사이에 1년이 갔다. 새해의 문턱에 우리는 서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새해란 자연현상으로서의 새해가 아니다. 소망과 환회, 새로운 삶을 가져 올 새해를 우리는 대망한다. 새해는 어디에 있는가? 새해를 어떻게 맞을까?
[슬라이드]
우리는 지금 또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문턱에 서 있다. 1975년의 해는 한 해의 그 숱한 오욕을 삼킨 채 어느새 서산 너머로 그 검은 몸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런 때면 지난 해를 돌이켜 보며 갖가지 고마움과 뉘우침의 심정을 갖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무엇을 하나하나 세고 손꼽아서가 아니라 1년 동안 지내온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우선 우리의 감사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나의 삶을 돌이켜 보며, 그리고 우리 가정을 돌이켜 보며 주님께서 돌보시고 이끄신 모든 손길을 느끼면서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들 중 살림이 어려워진 분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작년보다 올해의 살림이 더욱 윤택해진 것을 우선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다.
또한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목회자로서 나는 감사해 오고 있다. 우리 교인들의 성실한 노력의 흔적을 나는 많이 본다. 연수회에서 드러난 우리의 고민은 바로 우리의 노력과 기도의 말이었다. 나는 항상 자부심을 갖고 있다. 우리 교회에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래도 교인 한 분 한 분이 보람있게 살아 보려고, 올바르게 살아 보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하나님은 알고 계실 것이다. 가정을 그리스도의 가정답게 성장시켜 보려고 애쓰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도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대로 옳게 세우려고 수고하고 있음을 나는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다스리는 자리에 있는 교인들이 갖는 피고용인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서 자라는 신앙의 줄기를 보고 감사를 드린다.
교회생활에서도 양에 차지 않는 면이 여러 가지 많지만 1년 동안 온 교인의 정성은 넘쳤던 것 같다. 당회원이나 제직은 물론 교인 한 분 한 분이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 적어도 이것은 교회주의에서 나온 억지 봉사나 훗날 상을 겨냥한 약삭빠른 봉사가 아니라 그야말로 교회가 왜 그런지 아껴지고 잘 자라야 하겠다는 느낌에 근거한 봉사이었다.
그러나 한 해를 보낼 때 하나님께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또 그 해의 허물을 그 감사 속에 덮어 지나쳐 버려서도 안 된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한 해가 밝고 감사한 해였던 분도 있겠으나 우리 전체를 보면 결코 밝게만 볼 수 없는 것이 올해의 결산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서 이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고자 기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항상 슬프고 괴로운 것을 먼저 쉽게 잊는다. 그래서 침통에 젖어 있다가도 며칠만 지나면 또 다른 생에 적응한다. 그러나 우리는 올해 우리 주변에 휘몰아쳤던 거센 파도들을 잊을 수가 없다. 국민소득도 높아가고 사람들 살아가는 것도 나아지는 것 같은데 왠일인지 빈부의 격차는 더 혹독해져 갔다. 못살겠다는 노동자, 노무자의 아우성이 우리 귀를 때린다. 소득이 높아졌어도 사람 대접 받지 못하고 살기는 매일반이다. 수단 방법은 문제삼을 것도 없이 더 많이 소유하면 그만이라는 풍조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까지 왔다. 사회는 날로 타락해 간다. 하루 아침에 칠공자가 생겨날 리 없다. 하루 아침에 밀수조직이 생겨났을 리 없다. 하루 아침에 대마초 중독자가 되었을 리 없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술집을 수십만 원에 빌려 대낮에 고고 쌍쌍파티를 할 정도가 되었다. 하루 아침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흉악범이 늘어난다. 하루 아침에 흉악해진 것이 아니다.
작년 1974년을 넘어서고 올 봄에 이르면서 그래도 이 사회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정의와 자유, 인권을 외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있었다’기보다 그것이 온 국민에게 보이고 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종교인이, 법률가가, 문인이, 학생들이 또다시 무더기로 감옥에 가게 되면서, 그리고 긴급조치가 발표되면서부터 그 목소리마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백수십 명의 기자가 신문사로부터 쫓겨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교회는 그야말로 방주처럼, 잠수함처럼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자신들의 독립된 왕국을 쌓아 나가고 있다. 그것은 거룩한 성벽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님의 자리까지를 넘나보는 바벨탑이다. 이문동 철거민들은 “우리의 제3호소문”에서 교회를 다음과 같이 책망하고 있다.
“동냥은 못해줄 망정 쪽박을 깨지는 말라는 옛 속담도 있듯이 우리 약한 자의 대변인이 되어 주지 못할 망정 구타하고 경찰관에 고소하고 내어쫓는 교회의 사랑에 우리 주민들은 다시 한번 감탄하고 예수 안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예수님의 사랑마저도 받지 못하는 딱한 처지고 보면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저희들은 이미 소외된 사람이지만, 또 예수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이지만 이 나라에 있는 교회가 ○○교회 같은 깡패집단이 되지 말고, 고발하기 좋아하는 교회가 되지 않고, 약한 자를 멸시하는 교회가 되지 않고, 말로만 복을 찾고 사랑 찾는 그런 딱한 교회가 되지 않고, 허울좋게 교회만 크게 지어 돈만 벌려고 하는 기업주 장사꾼이 되지 않는 교회가 되시기를 빌면서 이만 여기서 그칠까 합니다.”
나는 이 호소문을 주님의 설교로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아도 우리의 감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 고백기도에서 기도한 것처럼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낸 것 같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마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그 뜻대로 살아온 것 같지 않다. 또 우리 주변에 우리의 사랑의 손길, 따뜻한 마음을 부르는 수많은 이웃들 ―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이웃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선한 이웃, 좋은 이웃이 되어 주지 못하였던 것 같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긍지와 자부를 가지고 주어진 삶을 부끄럼없이 살아내지 못한 것 같다. 물론 부족하고 다 채워지지 못한 것 같은 이 모든 삶은 우리가 살고있는 정치, 경제, 문화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올해 우리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새 세계, 새롭게 창조받은 삶에로의 의지가 소멸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 체념과 불안, 위축과 공포의 깊은 잠 속에 빠져 버리게 되었다. ‘될 대로 되어가 버려라. 남이 이렇게 하면 나도 이렇게 하고, 남이 저렇게 하면 나도 저렇게하며 살아가면 될 것 아닌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리” 하는 약고 퇴폐적인 어떤 선조의 망령이 우리 모두를 삼켜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체념과 불안, 위축과 공포의 밤에 새벽, 새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한 해를 어서 물려 보내고 싶은 감상에 차있다. 그러나 새해 아침이라고 특별히 다른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보면 새해는 우리가 새해로 만들 때 비로소 새로운 해가 시작되게 된다.
오늘 신약성서에 보면 베드로는 어느 때보다 어둡고 무거운 밤 ― 칠흙 같은 밤을 보내고 있다. 무섭고 괴로운, 후회스러워 뱉고 싶은 묵은 해의 마지막 문턱에 서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 보자. 삼 년 동안이나 고락을 같이 했기에 누구보다 자기 스승의 뜻을 알아 그 뜻에 따라 살아야 할 베드로이다. 그의 신앙고백은 어느 누구보다 분명했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파악한 사람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고백한 사람이 베드로이다. 예수가 그를 불렀을 때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그를 따랐었다(마 4:20 ; 19:27).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죽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예고를 했을 때 선뜻 나서서 그를 만류하고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토로했던 사람도 베드로이다(마 16:22).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이 다 흩어져 도망칠 것을 예견했을 때 “주님, 저는 감옥에라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눅 22:33)라고 말한 사람도 베드로이다. 자기 스승인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과 대항하여 싸운 유일한 사람도 베드로이다(요 18:10). 그리고 예수가 잡혀서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 갔을 때 그 적진 복판에까지 따라간 제자는 단 둘이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이 베드로이다(요 18:15). 그러나 이 베드로에게도 밤이 왔다. 어두운 밤, 숨이 막히는 밤이 왔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새벽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인간적인 이 베드로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고 또 우리나라의 뜻있는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이 민족에게 새벽이 와야 하겠다. 우리는 1975년을 보내면서 “하나님! 우리에게서 1975년의 묵은 해를 제하여 주시고 새해 새벽을 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해야 하겠다. 새해 새벽은 과연 어떻게, 언제 우리에게 오는가?
이 새벽은 닭의 울음소리로 온다.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약한 인간 베드로에게 드리워졌던 밤을 거두고 새벽을 오게 한 것은 닭의 울음소리다. 우리는 1973년을 보내고 1974년을 맞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결코 밝은 태양이 솟아 올랐던 것은 아니다. 동이 튼 것 같지 않은데 달력은 열두 장이 모두 떨어져 또다시 새벽 전의 어둠만이 가득하게 되어가고 있다. 시인 전재경 씨는 “야도”(夜禱)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직도 어두움은 남아 있는데
검은 껍질은 그냥 남았는데
시몬의 가슴에 불을 지른 닭의 울음은 있어야겠는데
……
방황과 허무에 불을 지른 예루살렘의 닭은 있어야겠는데
밤을 울어 목이 터져도 모가지에 피가 엉켜 콱 막혀와도
내가 이젠 닭이 되어야겠다.
이 죽음의 세대를 울어야겠다.
깨어나지 못한 이웃을 위하여 어두움에 눌려 앉은 형제를 위하여 홰를 치고 우는 닭이 되어야겠다.
이 시인은 새벽다운 새벽이 오지 못하는 이유를 “홰를 치고 우는 닭이 없다”는 데서 찾고 있다. 그 닭은 대제사장 집 뜰에 위축되어 떨고 있는 베드로의 가슴을 울린 닭이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그 닭이 있었으나 우리에게는 지금 그 닭이 없다는 것이다. 이 민족의 절망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닭이 없다. 어둠에 질식되어 있는 그 자리에 닭이 없다. 밤이 하도 길어 이제는 밤밖에 없는 줄 알고 오히려 어둠에 자신을 가리우고 체념의 영원한 잠자리에 자신을 묻어버린 눌린 형제에게 새벽을 알릴 닭이 없다. 그래서 이 시인은 스스로 한 마리의 닭이 되어 목에 피가 엉켜 콱 막히도록 소리쳐 동트는 여명을 알리겠다는 비장하고 장중한 각오를 펴고 있다.
우리는 새해의 새아침, 동터올 이 어둠의 문턱에서 무엇이라 기도할 것인가? “하나님! 방황과 허무,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좌절의 깊은 잠을 자는 우리를 깨우기 위해 나를 한 마리 닭이 되게 해주옵소서. 어둠에 눌려 주저앉은 형제를 위하여 목이 터지도록 목구멍에 피가 맺히도록 홰를 치며 우는 닭이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새벽은 이 기도의 소리에 매달려 오기 때문이다. 이 기도가 없는 곳에 새벽은 올 수 없다.
대제사장의 뜰에는 베드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병사들, 재판 관계자들, 성직자들, 구경꾼들도 있었다. 그러나 닭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은 베드로뿐이었다. 그 울음소리에서 새벽의 냄새를 맡은 사람은 베드로뿐이었다. 앞서 말한 시인은 그 시 맨 마지막에 이렇게 쓰고 있다.
“주여, 가슴속 불을 울게 하소서.
피의 온도만큼
뼈의 빛깔만큼 진실하게 하소서.
시몬의 가슴이 되게 하소서.”
베드로는 참으로 진실한 사람이었다.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에 대한 기사는 그를 퍽 성급하고 경솔하며 비겁한 사람으로 나타내고 있다. 3년 동안이나 같이 살아온 예수를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어 자신의 안전을 추구한 그의 행동을 정당하다고 평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기사는 네 복음서의 공동자료이고 베드로는 기원후 64년에 죽었다. 마가복음이 68년(어떤 사람은 55년)에 씌었다면 이러한 전승은 훨씬 전, 베드로 생존시 돌아다녔을 것이고 그 전승은 베드로 자신의 고백에 의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수석 사도요 예수의 수제자인 그에게 이 같은 스캔들이 유포되어 성서에까지 실렸다고 하는 것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진실성, 피의 온도만큼 뼈의 빛깔만큼 진실한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뜰 밖으로 나가 통곡한 베드로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새벽의 문턱에서 베드로의 진실성을 가져야 하겠다. 그렇기에 우리는 새벽 앞에 깔린 자정의 문에서 이렇게 기도해야 하겠다. “하나님! 우리가 진실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피의 온도만큼, 뼈의 빛깔만큼 진실하게 하소서. 시몬의 가슴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반성하고 자신의 현실을 무서우리만큼 숨김없이 인정하는 거기에 새벽이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벽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새해가 있는가?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와 새벽을 기다리는 진실한 마음이 맞부딪치는 순간이 새벽이다. 그 자리가 새해이다. 새벽은 홰를 치고 울어대는 닭의 울음소리에 자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사람에게 있다. 새해는 그런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지금 1975년이 저물어 간다. 태양이 소멸되지 않는 한 새벽은 오고야 말 것이다. 체념과 불안, 위축과 공포는 잠의 수렁이다. 새벽을 맞으려면 이 체념에서, 불안에서, 위축에서, 공포에서 깨어나야 한다. 칠혹 같은 어둠을 깨뜨리고 떠오르는 태양을 믿자. 태양은 소멸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소멸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이 소멸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새벽은 반드시 있다. 새해는 반드시 있다. 닭을 울게 하시는 하나님! 나를 진실하게 하시는 하나님! 지긋한 눈길을 던져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자. 반드시 내일이 새해 새아침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