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8-14] 평화가 꽂힌 날 – 1975년 12월 25일, 김상근 목사

평화가 꽂힌 날

1975년 12월 25일 / 누가복음 2장 8-14절

김상근 목사


[회상노트]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

1975년, 만감없이는 그 한 해를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강요되었고, NCC 총무인 김관석 목사, 박형규 목사 등이 구속되었고, 다시 대학에 군이 진주했고, 할복자살하는 학생들이 생겼고, 유신헌법에 대한 비방이나 비방사실을 전언하는 것까지도 엄금되었고, 장준하 선생은 의문사를 당했다. 대학들이 휴교를 당했고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되었다.

교회 내의 이른바 보수-친군부 세력이 국가안보를 앞세워 반정부적 교회세력에 반립했다. 정권의 탄압보다 더 아팠고 괴로웠다. 역사에 정의를 세우는 일에 함께 하지는 못할 망정 이를 비난하고 대립하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두웠다. 캄캄했다. 희망이 없었다. 이 암흑을 정공으로 뚫고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연말, 성탄절 분위기는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결연함을 무디게 하고 있었다. 그것을 더욱 진한 절망의 근거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성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가 온다고 한다. 그것을 믿기가 어려웠다. 고백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무릎을 꿇고 성서의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할텐데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괴로웠다. 설교자가 설교자 자신에게 설교할 때가 있다. 그것은 자기 회개다. 그것은 결단이다. 자기를 다잡는 것이다.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것, 더구나 절망의 복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러나 그것이 신앙이다. 그것이 신앙의 승리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다.


[말씀을 향한 물음]

성탄절이 다가오면 크리스마스 트리와 전등불빛이 거리를 장식하고 캐롤송이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러나 성탄은 낭만적 회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성탄은 들뜸이나 상혼의 재료가 될 수 없다. 무법의 땅, 파멸의 땅, 절망과 비정의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 우리에게 성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슬라이드]


평화가 꽂힌 날: 1975년 12월 25일, 어느 캄캄한 시대의 성탄 고백

시대의 암흑을 마주하다(1975) : 어두웠다. 캄캄했다. 희망이 없었다.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것, 더구나 절망의 복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성탄은 무법과 파멸, 절망의 땅을 덮는 가벼운 위로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 인간의 캄캄한 역사 한가운데로 직접 뚫고 들어오신 파열의 사건(성탄)

어둠과 인권유린의 세계(기원전 1세기 유대): 헤롯의 폭정, 종교 지도자들의 배반

절망의 해부학: 1975년 대한민국 vs 1세기 유대

말구유의 해체: 낭만이 아닌 철저한 '밀려남'의 자리

포로된 자의 해방을 향한 절실한 외침

침입해 들어온 하나님의 사건, 그것이 바로 크리스마스다

하나님의 맹렬한 평화: 이 화살의 꽂힘으로 비겁의 땅, 배반의 땅, 파멸의 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평화가 꽂히는 자리: 모두의 심장을 향하여

역사의 심장을 터뜨린 사건: 하나님이 쏘신 평화의 화살은 기어이 역사의 심장, 인간의 심장을 터뜨려 놓고야 말았다. 그 파열의 정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이제, 몸이 화살이 되어... 성실하고 진지하게, 겸손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 초대 앞에 나아가자.


징글벨이 울려 퍼지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소란스럽게 거리에 흘러넘쳐도 거기에 성탄은 없다. 이것은 단순한 들뜸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트리와 오색 종이로 장식하고 손님을 부르는 상가, 거기에 성탄은 없다. 이것은 상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구유를 만들어 놓고 동방박사를 그려 놓고 다채로운 행사로 분주히 돌아가는 교회, 거기에 성탄은 없다. 그것은 낭만적 회상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 성탄 축하예배를 드리는 것은 2천년 전을 아름답게 회상해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위대한 인물의 탄신일을 기쁘게 맞으려는 것은 인간의 상정이다. 그러나 성탄은 들뜸이나 상혼이나 회상의 재료가 아니다. 성탄은 ‘사건’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 인간 역사에 오신 사건이다. 우리가 이 사건에 부딪칠 때 성탄의 참 축하가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이 예수가 나신 시대를 잘 설명하고 있다면, 누가복음은 예수가 태어나신 자리에 상당한 관심을 쏟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탄생하게 될 것을 그의 부모에게만 계시하신 것으로 되어있으나, 누가복음에서는 천사들이 밤중에 들에서 양치는 목자에게 나타나서 구주가 탄생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그 시간에 태어난 아기가 꼭 예수 하나만이라는 법이 없기 때문인지 구주인 표징을 가리켜 준다. 그 표징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아기는 구유에 누워 있을 것인데 그 사실이 바로 구주, 그리스도, 메시아의 표징이라는 것이다. 누가는 이 표징을 특히 강조하여 그 바로 뒤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 만났다고 써놓고 있다. 구유에 태어난 자면 다 메시아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아들은 구유에 태어난다는 말이다. 구유에 탄생했다는 누가의 기록은 대단히 중요한 기록이다. 그리고 그 사실, 메시아가 구유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누가는 기쁜 소식이라고 쓰고 있다. 왜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 말 구유에 놓인 사실이 기쁜 소식일까?

우리는 지난 4주 대강절 기간에 이스라엘인들에게 메시아가 탄생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형편들을 살펴보았다. 이스라엘 역사상 인간을 쓰레기처럼 취급한 가장 혹독한 폭군 헤롯의 치하에 이스라엘인들은 살고 있었다. 그가 천하를 통치하고 있는 거기에 울음과 비통이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억울한 이들의 피맺힌 호소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어둠과 인권유린의 세계’였다.

그 치하에 살고 있는 백성들, 그들에게 정의니, 옳음이니, 자유니, 인간다움이니 하는 말은 사치가 되어버렸다. 먹고 살면 그만이요 헤롯의 주변에 붙어 살아갈 수 있다면 오히려 축복이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을 보나 주변을 보나 그 살아가는 꼴이 참으로 비참했다. 이것도 사는 것이라고 …… 이것은 ‘비겁과 배반의 세계’ 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 판국에서도 자기들이라도 영원무궁토록, 잘 살아보자고 모든 법과 제도를 마음대로 고쳐 나갔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의 배를 채우고 있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니 여기에 로마의 문물이 침범할 수 없다는 가장 성스러운 명분을 내세워 황제의 얼굴이 새겨 있는 로마 화폐를 예루살렘에서 사용할 수 없게 함으로써 환전상 노릇을 하고 수익을 올렸던 것은 그 한 예이다. 화려한 명분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주저함 없이 써먹고 있었다. 거기는 법은 있으나 ‘무법의 세계’였다.

세상은 날로 험악해져 갔다. 그 틀 속에서 살아날 수 없는 자들이 자꾸만 늘어났다. 가난에 허덕이는 자가 늘어났다. 헐벗은 자가 늘어났다. 굶주린 자가 늘어났다. 병원에 못 가는 병자가 늘어났다. 매춘부가 늘어났다. 옥에 갇히는 자가 늘어났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이 자꾸만 늘어났다. 그것은 ‘절망의 세계’ 였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살아가자니 악해지는 것은 마음뿐이다. 속여야 하고 빼앗아야 살았다. 미워하고 모략해야 살아갈 수 있었다. 시기하고 질투해야 무언가 한 자리 할 수 있게 되어 갔었다. 이것은 ‘미움과 파멸의 세계’였다.

남을 받아 주고 포용하고 껴안을 마음이 없어져버렸다. 눈물이 마르고 인정이 자취를 감추어 갔다. 배부른 임산부가 대문을 두드려도 누구 하나 내다보지 않는다. 만삭이 된 여인이 여관 방을 기웃거려도 누구 하나 걱정해 주는 사람도, 선뜻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거나 나누려는 자가 없었다. 그것은 ‘비정의 세계’ 였다.

쫓아내는 사람이 있고 쫓겨나는 사람이 있게 된다. 예수의 부모들도 쫓겨났다. 민가에서, 여관에서 쫓겨났다. 그는 날 때부터 사람들에 의해 쫓겨났고 그래서 그는 짐승들 틈에서 첫 울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이것은 그의 운명이 아니라 그 세계의 아픈 비극이었다. 쫓아내는 사람이 있고 쫓겨나는 사람이 있게 된 이 현실이 짐승들 틈에서 탄생한 예수의 현실로 설명되고 있다. 빼앗는 사람이 있었고 빼앗기는 사람이 있었다. 누르는 자가 있었고 눌리는 자가 있었다.

땅은 비겁의 땅, 배반의 땅, 무법의 땅, 절망의 땅, 파멸의 땅, 비정의 땅이 되고 말았다. 어둠의 땅, 죄악의 땅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주님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절실한 것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이 전하여져야 했다. 포로된 자가 해방을 받아야 했다. 눈먼 자들의 눈도 떠져야 했다. 눌린 자들이 놓임을 받아야 했다. 얼마나 절실한 기도인가7 얼마나 절실한 외침인가? 그런데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뻗히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의 세계는 비겁의 세계가 아닌가? 배반의 세계, 무법의 세계, 절망의 세계, 파멸의 세계, 비정의 세계가 아닌가? 우리에겐 기쁜 소식을 향한 절실한 기도가 없는가? 포로된 자의 해방을 향한 포로된 자의 절실한 외침이 없는가? 눈뜨기를 원하는 눈먼 자의 절실한 기도가 없는가? 놓임받기 위해 투쟁하는 눌린 자의 절실한 외침이 없는가?

아무리 이스라엘의 현실이 어둡고 무거워도 하나님은 그 땅에 평화의 화살을 쏘시고야 말았다. 침입해 들어온 하나님의 사건이 크리스마스, 성탄의 사건이다. 하나님이 쏘신 평화의 화살은 드디어 2천년 전 베들레헴 마굿간에 꽂힌 것이다. 그 화살이 지구의 대기를 뚫고 꽂힘으로 비겁의 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배반의 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법의 땅은, 미움의 땅은, 파멸의 땅은, 절망의 땅은, 비정의 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평화의 화살은 쫓아내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꽂혔다. 쫓겨난 사람들의 가슴에도 꽂혔다. 빼앗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빼앗기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누르는 사람, 눌리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하나님의 평화의 화살은 꽂혔다. 오늘 우리들의 가슴에도 하나님이 쏘신 평화의 화살이 와서 박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가 아무리 어둡고 무거워도 하나님은 지구의 대기를 가르고 이 땅에 평화의 화살을 꽂아 놓고야 마실 것이다. 이제 이 세계가 흔들리는 것을 볼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런 현실을 천사는 노래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라고. 그 화살은 기어이 역사의 심장, 인간의 심장을 터뜨려 놓고야 말았다. 그것이 그의 죽음과 부활이다. 우리는 우리 세계, 우리 자신에게 평화의 화살을 쏘아 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제 몸이 화살되어 여기 오시어서 평화를 꽂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의 성찬의 상으로 초대하신다. 화살되어 평화를 꽂으신 주님의 초대에 성실하고 진지하게, 겸손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