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3:13-16] 성문을 깨뜨려서 – 1975년 8월 17일, 김상근 목사

성문을 깨뜨려서

1975년 8월 17일 / 히브리서 13장 13-16절

김상근 목사


[회상노트] 거룩한 삶의 길

희생은 계속되었다. 감옥에 가는 사람이 이어졌다. 노동자들이 당하는 수탈 또한 더해 갔다. 그 숱한 희생자들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한다. 의미가 무엇인가?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은 이 역사 가운데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 그들을 그렇게 비극으로 몰아 넣음으로써 제 기득권과 안일을 지켜가는 저 부정의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되는 때였다. 독재권력은 얼씨구나 하고 안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탄압의 구실을 얻었던 것이다. 교회의 보수 세력은 차라리 절대다수 세력이었다. 그들은 앞다투어 반공을 외치고 나섰다. 무슨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라는 것이 관제로 등장했다. NCC에 맞세우겠다는 독재정권의 음모였다.

장준하 선생이 등산길에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세상이 들썩일 일이었지만 조용했다. 분명히 그것은 타살이였다. 테러였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 진상이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민중을 희생제물로 삼는 정권의 비열함을 폭로치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제물이 된 민중으로 인하여 민족이 살게 된다는 이 아픈 진리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이 절대적인 희생제물 아닌가! 그를 처형한 것은 인간의 절대적인 죄가 아닌가! 그러나 그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도 사실 아닌가! 아, 이 슬픔이여! 성 밖으로 쫓기신 주님이시여, 당신도 그리 당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존재의 바탕이 될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다기보다 그런 신앙을 강요받았다. 예수를 따라 차라리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신앙을 기도했다. 성문을 깨트리고. 성문은 겹겹이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에게는 언제부터인지 내세에 대한 이야기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오늘의 이야기만을 해 오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분명히 “장차 올 도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장차 올 도시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어떻게 오는 것인가? 그것은 오늘 지금의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슬라이드]


성문을 깨뜨려서: 1975년의 역사적 어둠을 가르는 거룩한 결단과 현대의 경건

1975년 절망과 희생이 교차하던 시대의 풍경: 노동 수탈, 폭력과 의문사, 정권의 공포 정치, 교회의 변절

억울한 희생 앞에서 묻는 영적 존재의 이유: 성서가 말하는 '장차 올 도성'은 과연 무엇이며, 오늘 지금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두 공간의 영적 지형도: 예루살렘 성 안과 밖

혁명이 아닌 전진: 출애굽의 진정한 목적

왜 영원한 도성을 찾아야 하는가? 자신의 권익을 위해 타인을 짓밟고, 속죄 염소를 찾아 책임을 전가하는 세계는 결코 영원할 수 없다.

영원한 도성을 찾는 두 가지 제사: 입술의 열매(찬양), 선한 일(나눔)

선결 조건: '나'라는 아성을 부수는 결단.

거룩한 삶의 길(The Path of True Piety) : 통합적 여정

죽어서 천당에 가겠다는 계산만으로는 영원한 도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성문, 나 자신의 성문을 깨뜨려 억울한 자들 곁으로 가는 것 - 이것이 참 거룩한 삶의 길이요, 현대의 경건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를 쫓아냈다. 지난 주일 증언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예루살렘에 있던、사람들이 예수를 추방했던 것은 예수 자신의 삶과 행위가 자신들의 삶이나 행위와 본질적으로 너무 달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수를 성 밖으로 추방하고 성 밖에서 예수가 처형되던 그 순간, 성 안을 연상해 본다면 참으로 부조리의 극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 안에서는 죄인 아닌 죄인을 처치해 버린 승리감, 앓던 이가 빠져버린 것과 같은 쾌감을 한껏 즐기면서 축하의 연회가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 혹 양심에 조그마한 가책이라도 느끼는 사람이면 괴로워서라도 오히려 축하 연회에 더 휘말려 들어 갔을지도 모르겠다. 억울함은 항상 이런 데서 극에 달하게 된다. 예루살렘은 이제 거룩한 도시라는 상징의 자리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의인을 도태시킨 도시, 죄없는 자들을 쫓아낸 공동체는 이미 그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는 의인을 죽인 진짜 죄인들,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기에 속죄 염소라도 잡아서 제물로 바치고 스스로의 죄책감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는 얌체 족속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들 주변에서 그들과 눈을 맞추고 아첨하여, 그 무책임하고 얌체스런 기존 질서의 한쪽 끝에 그대로 붙어서 연명해 보려는 가련한 사람들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대개의 경우 자신이 속한 집단이 불의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줄을 알면서도 그렇기에 거기에 더 이상 머물러 있는 것이 수치스럽게 느껴지면서도 거기를 떠난다는 것이 곧 죽음이라고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바로 그런 사람들의 아지트가 되고 말았다.

반면에 예루살렘 밖을 연상해 보자. 거룩한 자, 순진한 자, 죄없는 자가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다. 그만이 위로가 되며 그만이 소망이기에 그와 더불어 살았고 그를 중심하고 살았던 사람들 ― 그들이 절망스럽게 쳐다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고 있는 곳이 예루살렘 밖의 정경이다.

그러나 나는 지난 주일 증언에서 성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우리도 성문 밖에서 어려움을 겪고 억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아가자고 했다. 그래야 예수의 구속의 피가 나와 연관되는 것이라고 했다. 고난을 받고 있는 자들 ― 그들에게 나가서 그들과 더불어 살게되면 예수를 만나는 거룩한 삶이 된다.

그럼 나가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곳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에게로 나아가 힘을 합쳐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권리를 찾자는 것인가? 이 땅에서 소외된 모든 사람들을 선동하여 혁명을 하자는 것인가? 히브리서 기자가 성문 밖으로 나가자고 한 것은 나갔다가 되돌아 들어오자고 해서 한 말은 아니다. 그가 성문 밖으로 나가자고 한 것은 새 세계를 향해 전진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땅 위에는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앞으로 올 도성을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히 13:14).

이것은 굉장히 무서운 선언이다. 이제는 거룩한 도시가 예루살렘 도성 안에서는 찾아질 수 없다는 선언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얌체스런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권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는 사람들이 운거해 있는 곳에는 영원한 도시가 건설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을 억압하면서라도 내 체면, 내 지위, 내 것만을 지키려 하는 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영원한 도시가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아첨하여 이 생이 전부인양 그들의 주변에서 떨어진다면 영원히 죽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그런 사람들이 우굴대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그렇기에 예루살렘 성은 영원한 도시가 아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탈출시킬 때와 같은 형편의 말이다. 이집트 사람들 ― 그들은 압제하는 자들이요, 다른 사람을 밟고 서서 자신들의 행복을 쌓은 사람들이요 자신들이 짊어질 온갖 무거운 짐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지웠던 사람들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기들과 같은 인간으로도 취급치 않았다는 것이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죽이라는 말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집트는 영원한 나라를 이룩할 수 있는 곳이 못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 그곳에서 제물이 되어 왔던 이스라엘 사람들, 그곳에서 지리적으로는 같이 있으나 이미 이집트 사람과 같이 있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 ― 그들을 이집트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단 탈출한 후 힘을 합하여 이집트를 침공해야 하겠다는 아무 계획도 없었다. 이스라엘의 목표는 이집트 탈환이 아니라 가나안이라는 새 땅을 향해 행군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성문 밖으로 나가자고 한 히브리서 기자도 예루살렘 성은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곳이 못 된다고 했다. 성문 밖으로 나가자는 것은 “영원한 도시”를 찾자는 것이다.

그러면 영원한 도성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나? 우리는 오늘 여기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자리가 아님을 여러 번 말해 왔다. 오늘의 가치관으로부터 탈출할 것도 말해 왔다. 오늘의 문화가 잘못된 것도 말해왔다. 더구나 죄없는 양을 잡아 자신의 과오와 허물을 뒤집어씌우는 오늘의 세계가 영원한 도성일 수가 없다고 했다. 차라리 이런 세상에서 찢기고 억울함을 당하고 제물이 되고 아픈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자들에게로 나아가자고 했다. 그 말은 옳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한 후에 무엇이 올 것이냐 하는 것에 우리는 부딪힌다. 사실 솔직하게 말하여 오늘 성서에도 떠난 다음의 청사진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앞으로 우리에게 올 것이라는 설명밖에는 다른 아무 설명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은 하늘에서 우연하게 떨어지는 그런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야 하고 찾아야 하는 현실이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투쟁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 신앙의 투쟁이란 무엇이며, 영원한 도시를 찾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먼저, 입술의 열매를 드려야 한다. 입술의 열매란 하나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는 것 ― 찬미의 제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로 우리에게는 이것이 없다. 없을 수밖에 없다. 천당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말로라도 천당에 갈 수 있다고 얼러맞추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이기심과 서로 어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생활 속에서 내 이기적인 기도, 이기적인 요청에 동원되어 내 이익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문 밖에서 억울하게 살고 있는 저들과 같이 계시며 그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그의 은혜를 노래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억울한 우리의 삶 속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그 억울함을 나누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자기 욕심에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는 내가, 성문 밖의 억눌린 자들을 기억하게 되고 관심하게 된 것을 은혜로, 감사한 사건으로 받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찬미와 찬양의 제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나에게 유리해서 드리는 천당 값을 치루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하나된,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과 하나된 감사, 감격의 찬양이다.

다음으로, 선한 일, 자기 것을 나누어 주는 일을 통해서 장차 올 영원한 도시는 찾아진다는 것이다. 영원한 도시 ―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선한 일을 통해서 찾아지는 도시이다. 자기 것을 나누어 주는 일을 통해서 찾아지는 도시이다. 오늘과 같은 자기 중심 사회, 소위 능력 본위의 사회에서는 선한 일이란 정력의 낭비요, 시간의 낭비요, 기업 목표의 이탈이요, 결국 패배의 요인이 된다고 믿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선한 일을 통하여 영원한 도시는 온다는 것이다.

소득 경쟁의 사회에서 자기 것을 준다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물건을 주는 것도 주는 것이지만 마음을 주고 눈길을 주고 관심을 주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 같다. 그럴 만한 여유들이 없다. 모두가 자기를 생각하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언제부터인지 선한 일을 외면하고 사는 것이 전혀 신앙의 문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따위의 감상적 삶이 무슨 신앙이냐는 투의 반론이 생기게 되었다. 현대인이란 그런 얄팍한 감정에 살아서는 안 되고 철두철미 자기중심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장차 올 영원한 도시를 찾는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 그동안 퍽 소원했던 일들이다. 아직 미숙한 신앙인들이나 하는 일이요 저급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보게 되었다. 또 그것은 제 욕심 차리자고 하는 일이라고 백안시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변색되지 않은 선한 일들, 자기 것을 나누어 주는 일들, 찬양과 찬송을 입에 담는 일들 ― 이런 제사들을 우리 사이에 탄생시켜야 하겠다.

속죄 염소를 대신 잡아 제사를 드릴 만큼 나 자신은 털끝 하나 다칠 수 없다고 하는 현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이익 추구적이요 이기적으로 되어버린 현대 사회, 약육강식이 가장 정당한 진리인 양 부끄러움 없이 활개를 치는 오늘 ― 이것은 영원한 도시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찬미와 찬양의 제사, 선한 일을 하는 제사, 나를 나누어 주는 제사는 저속한 것도, 유치한 것도 아니요, 그것이 바로 영원한 도시를 찾아가는 혁명적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성문을 깨뜨려서 영문 밖으로 나가겠다는 거룩한 결단이다. 이것은 온전히 새 것을 찾기 위한 투쟁이기 때문에 옛 것에 그냥 머물러 있어서는 찾아질 수 없는 것이다. 성 안에서 성문을 닫고 기다리고 앉아 있다고 해서 나에게 값없이 오는 새 것이란 없다. 성문을 깨뜨리고 밖으로 나가는 결단 ― 그것이 바로 장차 올 도시를 찾겠다는 결단의 시작이다. 성문을 깨고 억울한 자들, 고통받는 자들에게 나아가지 않는 한 장차 올 도시는 찾아질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삶 속에서 영글고 있는, 벌써 영글어 우리 자신도 그 습성에 젖어버린 이 땅의 비리들, 죄됨을 우리 속 깊이에서 보고 오늘의 성문을 깨뜨리고 나가야 한다. 그런 행위는 곧 ‘나’ 라고 하는 자기 아성의 성문을 깨뜨리는 결단과 동일시되는 일이기도 하다. 자기는 다행히 성 안에서 안도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성문을 굳게 닫는 ‘나’ 를 깨야 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천당을 모르는 신앙인이다. 여기서도 성 안에, 죽어서도 천당에 머물겠다는 계산은 용납되지 않는다. 오늘의 성문을 깨지 않는 사람은, ‘나’의 아성을 깨지 않는 사람은 내세라고 표현되어온 영원한 도시가 장차 오게 될 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우리는 차원이 다른 각도에서 장차 올 영원한 도시를 향해 오늘의 성문, 나 자신의 성문을 깨뜨려야 하겠다. 이것이 참 거룩한 삶의 길이요, 현대의 경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