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밖으로 쫓기신 예수
1975년 8월 10일 / 히브리서 13장 11-13절
김상근 목사
[회상노트] 거룩한 삶의 길
희생은 계속되었다. 감옥에 가는 사람이 이어졌다. 노동자들이 당하는 수탈 또한 더해 갔다. 그 숱한 희생자들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한다. 의미가 무엇인가?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은 이 역사 가운데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 그들을 그렇게 비극으로 몰아 넣음으로써 제 기득권과 안일을 지켜가는 저 부정의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되는 때였다. 독재권력은 얼씨구나 하고 안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탄압의 구실을 얻었던 것이다. 교회의 보수 세력은 차라리 절대다수 세력이었다. 그들은 앞다투어 반공을 외치고 나섰다. 무슨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라는 것이 관제로 등장했다. NCC에 맞세우겠다는 독재정권의 음모였다.
장준하 선생이 등산길에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세상이 들썩일 일이었지만 조용했다. 분명히 그것은 타살이였다. 테러였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 진상이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민중을 희생제물로 삼는 정권의 비열함을 폭로치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제물이 된 민중으로 인하여 민족이 살게 된다는 이 아픈 진리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이 절대적인 희생제물 아닌가! 그를 처형한 것은 인간의 절대적인 죄가 아닌가! 그러나 그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도 사실 아닌가! 아, 이 슬픔이여! 성 밖으로 쫓기신 주님이시여, 당신도 그리 당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존재의 바탕이 될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다기보다 그런 신앙을 강요받았다. 예수를 따라 차라리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신앙을 기도했다. 성문을 깨트리고. 성문은 겹겹이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기독교의 교리를 너무 값싸게 받으려 할 때가 많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도 기독교의 교리를 값싸게 받아들이는 것 중의 하나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과연 관념적으로, 마음으로 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일까? 오늘 우리와 같은 형편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슬라이드]
지난 주 증언에서 이스라엘의 제사습관에 비치고 있는 죄된 인간들의 추악한 내면성 ― 자신의 잘못을 자신이 책임지려 하지 않고 말 못하는 동물에게 그 책임을 전가, 뒤집어씌워 대신 죽게 하는, 추악한 내면성을 말씀드렸고, 거기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성해 보았다. 그리고 다른 각도에서 속죄제물이 된 염소의 억울함을 느껴 보았으며, 우리는 어느 경우 간혹 속죄 염소가 되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속한 세상 ― 가정, 친구 사이, 사회, 국가, 직장의 죄를 속죄하는 거룩한 삶이라는 증언을 드렸다.
히브리서는 바로 이 말을 받아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받으셨습니다”라고 증거하고 있다. 당시에까지 시행되어 오고 있는 속죄 제사에 제물로 쓰이는 염소와 예수님을 같이 놓고 있다. 예수는 당시 세대, 온 인류, 우리 자신의 죄를 대신 지고 피를 흘리신 분이라는 증언이다. 그리고 무인지경으로 쫓겨났던 염소처럼 예수도 성문 밖으로 끌려나가 거기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속죄 제사는 예수 당시에 와서는 이미 관습적인 제도가 되어 버려 제사를 드려야 할 때가 오면,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듯, 특별한 의미를 느끼지 않더라도 그냥 속죄제물이 드려지곤 했다. 자신들의 범죄를 통감하고 드리는 제사도 아니었다. 이미 죽은 제사의식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수가 속죄 염소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이 된 사건은 죽은 의식이 아니라 인간의 죄와 부정과 불의를 한 몸에 진 생생하게 산 사건이었다.
예수는 왜 죽으셨는가? 교리적인 대답으로는 히브리서 기자의 결론처럼 온 백성의 죄를 속하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대답한다. 그렇기에 그 이후의 인류는 그의 속죄하시는 피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염소로 인해 죄를 속죄받았다고 믿고 살았던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속죄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 교리는 사실이요 진리이지만 그 과정을 뺀 결론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결과에 급급하기보다 과정이 옳아야 한다고 믿는 종교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새 과정보다도 결과에 급급해 하는 현실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왜 죽으셨나?” 하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 죄를 속하시려고”라는 대답은 정답이면서도 정답이 아니다.
예수는 소위 말하는 죄인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쫓겨와서 거기서 강도처럼 처형되셨다. 죄없는 짐승이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간 것 이상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그는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어가셨다고 말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한 현실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라는 분의 존재 자체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생활이요 삶 때문이었다. 마치 어둠과 빛이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와 당시의 죄인의 상징인 지도층과는 같이 있을 수가 없었다. 예수가 있음으로 자신들의 거짓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그의 행위가 있음으로 자신들의 행위의 허구성이 폭로되어 버렸던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죄악상이 더욱 분명해졌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을 보류한다면, 예수는 당시의 힘 있는 사람들 자신의 죄의식 때문에 죽게 되셨던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예수를 놓아 두고는 더 이상 자신들의 거짓된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어서, 그리고 또 자신들의 죄의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자기들이 저지른 불의와 범죄의 짐을 예수의 등에 지워서 영원히 성문 밖으로 추방해 버렸던 것이다. 그는 마치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대신 지고 광야로 추방되었던 염소처럼 골고다라고 하는 예루살렘 성 밖에서 죽게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우리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본다. 전혀 죄없는 사람이 더욱 죄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규탄을 받고 성문 밖으로 쫓겨나는 것을 경험한다. 거기에 이유가 있다면 전혀 죄가 없다는 것이요 더 억척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만이 찾아지는 경우를 본다.
그런데 죄없는 예수가, 죄없는 자가 죄인처럼 죽은 사건이 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해석을 낳게 했는가? 그것은 죄는 우리가 지었지만 예수가 대신 죽어 주었으니 하는 얌체스런 구약성서시대 사람들의 심리현상일까? 어떻게 그것이 진리일 수 있을까?
예수가 쫓겨나신 예루살렘 성은 모든 억압자들,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는 자들의 기득권 수호의 상징이었다. 그 예루살렘이 부패의 온상이 되었고, 착취의 현장이 되었고, 자기를 위한 흉계와 음모의 본 고장이 되어 버렸다. 그 안은 혼이 없는 거죽만 남은 인간들의 장바닥이 되고 말았다. 거기서 한몫 할 수 없는 자들은 그곳 성도 예루살렘에 발붙여 살 수조차 없었다. 예루살렘에서 밀려난 군중의 수는 예루살렘에서 향락하며 사는 자들의 수백 배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의 법의 보호도, 심지어 종교의 보호조차도 받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예수는 처음부터 그러한 예루살렘에 살려 하지 않았다. 차라리 쫓겨나 그 시대의 모든 고통을 몸소 지고 살아가는 불쌍한 예루살렘 밖의 사람들과 살아 왔다.
그러던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다시 쫓겨나 성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던 것이다. 그가 예루살렘에 오르셨던 것은 거기서 안주하기 위함도 아니요, 권력의 핵 속에 끼어들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그 세대의 죄악을 막아야 하겠다고 올라가셨던 것이다. 그 세대의 죄악이 속죄되고 막아져야 자기가 평생 같이 살아온 힘 없는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그들이 비로소 살아날 수 있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판단, 그의 행위는 결국 권력자들의 미움을 사고 종국에는 성문 밖으로 쫓겨나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보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은 예수 개인의 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무죄한 이의 죽음, 모든 사람이 다 잘 살아야 하겠다고 외치고 투쟁하다 홀린 피, 이 땅의 모든 억울한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어야 하겠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당한 추방 ― 그것들은 무모한 자의 헛기개가 아니라, 그 행위가 있음으로 해서 이땅에 비로소 평화와 평강이, 자유와 정의가 있게 되고 죄로 인한 멸망을 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자의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진지하게 속죄제물로 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오늘도 우리의 죄를 대신 속량해 주시는 우리의 그리스도시요 주님이 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죄값 대신 다른 사람에게, 다른 것에 그 죄를 전가하고 돌려 결국 나 아닌 다른 것으로 제물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할 때마다 사실은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우리 손으로 못박는 엄청난 과오를 저지르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럴 때 예수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일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의 죄악을 고발하는 십자가요 우리 죄악의 영원한 증거품으로서의 십자가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과오를 누구에게 돌려버리는 한 예수가 내 죄를 대신 져 주셨다는 교리는 살아있을 수가 없다. 심지어 우리의 허물을 예수의 십자가 공로에 무책임하게 돌려버릴 때에는 예수의 피가 내 죄를 속했다는 교리는 거짓 교리로 머물고 만다.
물론 처절할 만큼 지쳐 예수의 십자가를 쳐다 보지 않고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그런 절박한 사람들에게는 그대로 예수의 십자가는 속죄의 상징이다.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이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생존에의 용기를 주는 이상한 힘을 가진 것이 될 수 있다. 병들고 허약한 무리들에게 예수는 그대로 구주였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기진 맥진한 무리들, 죄책감에 눌려 사는 우리들에게 예수는 구주요 그의 십자가는 회생의 신비를 가진 속죄의 대명사가 된다.
그러나 한가하고 편안하게 그리고 여유 위에 여유를 더하는 식으로 “예수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합니다” 하는 것은 용납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영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아갑시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 어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오직 생의 소생과 용기와 힘을 구해야 할 분들이 있다. 그러나 반면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영문 밖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도록 명령받은 사람들도 우리 중에 있다는 사실을 지나쳐서는 안 되겠다. 영문 밖으로,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피 흘리셨다는 교리가 살게 되는 것이다. 그 교리를 믿는 것이 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영문 밖은 어디인가? 물론 ‘골고다’라고 하는 이스라엘에 있는 한 지역, 한 공간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곳은 우리의 삶의 핵심으로부터 수치를 걸머지고 쫓겨난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승리한 사람, 영광을 받고 있는 사람, 대접을 받고 높임을 받는 사람, 아첨꾼들을 거느린 사람 ―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니다. 수치와 치욕을 걸머지고 짐승처럼 쫓겨난 그가 있는 곳이 영문 밖이다. 해마다 경제 소득은 높아만 가는데도 그날 그날의 끼니도 잇지 못하는 계층이 생겨나고 있다. 그들은 경제 소득의 증대에 반비례하여 영문 밖 멀리 쫓겨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못났다는, 능력없다는 수치스런 누명까지 뒤집어쓰고 쫓겨나는 것이다. 그들이 있는 곳이 영문 밖이다. 공장은 잘 돌아가고 수익은 높아만 가도 피땀으로 엉킨 노동의 대가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 하루 아침에 자기의 온 삶을 기울였던 직장에서 떨려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 ― 거기가 영문 밖이다. 나라를 사랑하고 그 나라 테두리 안에서 사는 모든 사람의 공익과 정의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옳은 말을 했는데도 반역자의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거나 죽어간 이들이 있는 곳 ― 거기가 영문 밖이다. 엄연히 신체의 자유와 정당한 보호를 받을 법이 있는데도 그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 그들이 있는 곳 거기가 영문 밖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런 이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피 홀리신 그분을 만나야 한다. 그분을 만나는 삶이 거룩한 삶이다. 그 길은 바로 영문 밖으로 나가야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 져 주셨다는 우리의 고백도 얌체스런 고백이 아니라 진실성이 있는 고백이 되는 것이다. 그를 따라 영문 밖으로 나아갈 때에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