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속죄 염소
1975년 8월 3일 / 레위기 16장 7-28절
김상근 목사
[회상노트] 거룩한 삶의 길
희생은 계속되었다. 감옥에 가는 사람이 이어졌다. 노동자들이 당하는 수탈 또한 더해 갔다. 그 숱한 희생자들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한다. 의미가 무엇인가?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은 이 역사 가운데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 그들을 그렇게 비극으로 몰아 넣음으로써 제 기득권과 안일을 지켜가는 저 부정의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되는 때였다. 독재권력은 얼씨구나 하고 안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탄압의 구실을 얻었던 것이다. 교회의 보수 세력은 차라리 절대다수 세력이었다. 그들은 앞다투어 반공을 외치고 나섰다. 무슨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라는 것이 관제로 등장했다. NCC에 맞세우겠다는 독재정권의 음모였다.
장준하 선생이 등산길에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세상이 들썩일 일이었지만 조용했다. 분명히 그것은 타살이였다. 테러였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 진상이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민중을 희생제물로 삼는 정권의 비열함을 폭로치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제물이 된 민중으로 인하여 민족이 살게 된다는 이 아픈 진리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이 절대적인 희생제물 아닌가! 그를 처형한 것은 인간의 절대적인 죄가 아닌가! 그러나 그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도 사실 아닌가! 아, 이 슬픔이여! 성 밖으로 쫓기신 주님이시여, 당신도 그리 당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존재의 바탕이 될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다기보다 그런 신앙을 강요받았다. 예수를 따라 차라리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신앙을 기도했다. 성문을 깨트리고. 성문은 겹겹이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합리적인 세상이 아니다. 선한 사람, 착한 사람,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축복받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의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오히려 기독교는 선한 사람도, 착한 사람도,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도 고난을 받고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조금 깊이 알게 되면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게 된다. 세상 삶에서 자칫 밑지며 살게 되기 때문이다. 억울한 꼴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선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현실을 다르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슬라이드]
본문에는 두 종류의 속죄 염소와 그 제사법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첫째 염소는 성 안에서 죽여서 그 피를 속죄소에 뿌린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죄를 위해서이다. 예식을 거행하는 자는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은 세마포 옷을 거기에 벗어 두고 몸을 물로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온다. 그리고 가죽, 고기, 똥은 성 밖으로 내다가 불사르고, 불사른 자는 옷을 빨고 몸을 씻은 후에 성으로 들어와야 한다. 두 번째 염소는 산 채로 광야로 내보내는 염소다.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머리에 뒤집어씌우기 위해 산 염소에게 안수한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진 그 염소를 무인지경인 광야에 풀어 놓는다. 염소를 광야로 끌고 갔던 자는 옷을 빨고, 몸을 씻은 후에 성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것은 수천년 전의 이스라엘 속죄 제사법이지만 이 제사법이 우리의 문제와 고민에 해답을 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중요한 본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인간들의 추한 내면, 혹은 인간 사회의 비정성을 볼 수 있다.
첫째, 범죄한 사람은 그 죄값을 스스로 감당하기보다 전가할 대상을 찾는다. 본문을 보면 범죄는 분명히 사람이 한 것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범죄한 사람들이다. 구약성서의 사고대로 한다면 죄를 범하면 그 죄를 속죄해야 한다. 그 속죄의 방법은 피를 바치는 것과 성 밖으로 내쫓는 것이다. 피가 바쳐져야, 속죄 제사를 드려야 범죄자 자신은 물론이고 그 사회, 그 단체가 유지될 수 있었다. 범죄자는 당연히 성 밖으로 내쫓김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 범죄자들은 자신의 죄값을 스스로 감당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자기들 대신 피를 흘릴 다른 속죄물을 찾는다. 책임을 스스로 지려 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는다. 얼마나 옳지 못한 삶의 자세인가?
염소를 성 밖으로 추방하는 제사 습관에서 그 얄팍한 인간의 속셈이 더 잘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죄를 그 염소의 머리에 뒤집어씌우기 위해” 그 염소에게 대제사장이 안수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 안수하는 행위는 자신의 죄, 이스라엘 민족의 불의, 어떤 단체, 공동체의 죄를 염소에게 뒤집어씌우는 행위이다. 거룩한 종교의식,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시 말하면 가장 그럴싸한 권위를 가지고 뒤집어씌운다.
둘째로, 범죄자는 죄를 남에게 전가한 일이 억지로 행한 일임을 숨기고 태연한 척한다. 그리고 더러운 것은 성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하여 성 밖으로 끌고 나간다. 성 안의 범죄자인 거룩한 인간과 성밖의 순결한 범죄자인 짐승과 구별지어 놓는다.
속죄 제사를 드린 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을 위해 대신 죽어준 짐승 一 비록 그것이 짐승이라 할지라도 그 짐승에 대하여 고마운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피를 뽑아 제단에 뿌리기는 했지만 미안한 생각에 무덤이라도 만들어 주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일 것이다. 그러나 범죄자인 인간들은 피를 뽑고 남은 몸뚱아리를 성 밖으로 가지고 나가 불태워 버렸다. 완전 범죄를 위해 증거물을 인멸시켜 버리는 행위와 비슷하다. 그리고 성으로 다시 돌아 올 때는 손을 씻고 의복을 빨아 입는다. 자기는 이 뒤집어씌우는 제사와는 무관한 것인 양한다. 예수를 죽게 성 밖으로 내준 빌라도도 손을 씻어 예수의 사형집행이 자기와는 무관한 것처럼 했었다. 또한 광야로 짐승을 추방할 때도 무인지경에 이르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그 짐승을 쫓아버렸다. 범죄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다른 것에 전가하고는 그것을 자기들과는 무관한 양 태연하려고 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 세계의 추악상을 본다. 어쩌면 이렇게도 이기적일 수 있겠는가9 어떻게 이런 사고, 이런 발상법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것에 절대적인 죄를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빠져나가는 이러한 얌체 같은 삶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이런 것은 이스라엘의 속죄 제사법이지만 거기에 인간의 추한 내면적인 욕구가 노골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의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기보다 남에게 그것을 전가하려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은 모르는 척 지나쳐 버리려 한다.
이것이 집단, 더 큰 사회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스라엘의 제사법도 어느 개인만이 준수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 간악한 흉계를 지탄받기도 했을 것이고 또 중지당하게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즉 이스라엘의 제사법에 시비가 붙게 되면 이스라엘 전체가 당황하게 된다. 그 본질상 문제가 잘못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그냥 지나쳐 버려야지 따지고 들면 현상이 유지되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잘못을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려 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이렇게 되는 한, 제물이 된 짐승에게 만약 의식이 있고 넋이 있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이 짐승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피를 흘리고 쫓겨날 뿐 아니라 짐승이기에 말도 항변도, 자기 변호의 기회도 못 가지게 되어 결국 마치 정말 범죄자처럼 피를 흘리고 성 밖으로 추방을 당하는 것이다. 이 짐승은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오늘날 이렇게 억울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억울하게 피를 흘리고 억울하게 성 밖으로 쫓겨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얼마든지 한다.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나라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까지도 제물을 만들어 자신이 받을 화를 대신 받게 하는 일들을 경험한다. 특히 힘이 한 곳으로 몰려 절대화되어 있는 곳, 부가 양극화되어 있는 곳, 지식이 양극화되어 있는 곳에서는 더욱 이러한 제물들이 속출하게 된다. 그 제물들은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어 아픈 가슴들을 부둥켜안고 그냥 그날 그날을 씹어 지내게 된다. 그래서 세상은 그 억울한 넋, 억울하게 쫓겨나는 제물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제물들은 마치 죄인처럼 취급받는다. 저주받은 것 같이 보인다. 자신들의 생각에도 자기가 정말 죄인이요 저주받은 것 같다.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게 느낀다. 그렇기에 제물이 되어 보았자 자기만 밑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모두 약삭빨라진다. 서로 억울하게 되지 않겠다는 생각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도 억울하고 못나기까지 한 제물이지만 그 제물이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들’ 이라는 점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이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오신다”라고 증거한 일이 있다. 거짓된 사람들, 진짜 범죄자들에 의해 힘없는 자들, 약한 자들, 변명할 능력도 없는 자들은 제물이 되어 손해를 보고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나 정처없이 방황한다고 할지라도, 세상은 바로 그들에 의해 속죄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속죄제물로 염소를 택했던 것은 자기들만 못 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랬을 것이다. 자기들보다 나으면 제물이 되어 줄 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만 못한 염소를 택했다. 그러나 일단 억울하지만 제물이 되고 나면 그것은 사람들의 죄를 속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할에 있어서는 택하는 사람보다 억울하게 제물이 된 바로 그 염소가 더 훌륭한 것이 된다. 사람은 보잘것없다고 버렸지만 그것은 버린 그 사람의 죄를 속하는, 억울하지만 거룩한 제물이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하자. 우리는 어떤 경우 회사 안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심지어는 교회안에서까지 제물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직장과 가정과 사회와 학교와 교회를 속죄하는 일이다. 민중은 이 땅에서 많은 경우에 제물이 되곤 한다. 그러나 그 제물은 이 땅을 속죄하는 제물이다. 어리석은 제물도 아니다. 못난 제물도 아니다. 재주가 없는 제물도 아니다. 밑져 사는 제물도 아니다. 비록 힘이 없어 제물이 되었지만, 비록 부당하게 제물이 되었지만, 비록 강자의 미움을 받아 제물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모습을 지닌 자이다. 그는 결코 억울한 자가 아니다. 그는 결코 못난 자가 아니다. 그는 결코 재주가 없는 자가 아니다. 그는 거룩한 자이다! 오늘도 세상은 그러한 자들의 소리없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점에서 이 세상의 제물이다. 그래서 고민한다. 부심한다. 억울함을 느낀다. 그러나 억울해 하지만은 말자. 분해하지만은 말자. 밑지고 산다고 자책하지만은 말자. 못났다고 자신을 깍아내리지 말자. 세상 죄를 ― 가정의 죄를, 직장의 죄를, 사회의 죄를, 국가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죄 양임을 자부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