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애가 5:1, 베드로후서 3:3-7] 우리를 기억하소서 – 1975년 5월 4일, 김상근 목사

우리를 기억하소서

1975년 5월 4일 / 예레미야 애가 5장 1절, 베드로후서 3장 3-7절

김상근 목사


[회상노트] 고통의 밤에 드리는 구원의 기도

그 해 2월에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가 있었다. 나는 물론 투표를 거부했다. 담당경찰이 매달렸다. 반대표를 던져도 좋으니 투표장에 가 달라는 것이다. 끝내는 경찰서장이 왔다. 그래도 거부했다. 아마 투표율이 높지 않으면 책임추궁을 당하게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투표율을 따질 필요도 없었다. 기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나는 기어코 내 뜻을 관철시켰다. 강압으로 치룬 국민투표를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도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했다. 정권과의 전면전이었다.

결국 NCC 총무 김관석 목사 등이 구속되었다. 혐의는 업무상 횡령이었다. 그래도 언론인들이 살아있었다. 정권은 정론을 펴려는 언론인들을 언론현장에서 내몰았다. 동아일보 기자들을 필두로 모두 거리로 쫓겨났다. 막가는 횡포요 폭거였다. 대통령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되었다. 대학교에 다시 군대가 진주했다. 대학들은 자진 휴강 형태로 문을 닫았다. 한국신학대학에는 휴업령이 내려졌다.

민생문제와 씨름하는 정권이 아니다. 탄압, 탄압, 탄압이 이어졌다.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 군이 양심선언을 하고 할복자살했다. 나도 문동환, 이해동 목사와 함께 반공법 위반혐의로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연행당했다. 그들은 목요기도회 주관을 포기케 하려 했다. 나는 기독교회관에서 목요기도회를 할 수 없다고 공고를 냈다. 저들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지만 두고두고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풀려 났다. 풀려 나와서는 장소를 옮겨 다니며 기도회를 이어갔었다. 골방에 틀어박혀 드리는 기도도 있다. 그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그리하라. 그러나 내놓고 기도회를 가지지 않는다면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 연대할 수 없다. 그리고 공고를 냈던 나의 부끄러운 행위를 만회할 수 없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힘에 의해 수난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난의 의미가 있는 것인가? 언제까지 이런 고난의 행진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 우리의 고난이 값없는 것이 되고 만다면 그것이야말로 절망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길고 험한 수난을 보시고 계시지 않는다면 절망, 그렇다 절망이 아닐 수 없다.

성서는 어떤 계시를 주고 있는가? 속죄제물들인가? 나의 이런 고뇌가 교인들에게 커다란 압박으로 가 닿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교인들이 이러한 고통을 비켜가게 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함께 고뇌하자니 그들에게 너무 무거운 일이고, 그렇다고 비켜가게 하자니 그것은 구원의 길이 아니다.


[말씀을 향한 물음]

우리는 분명히 고통의 현실 속에 살고 있다. 가난의 문제가 해결나지 않는 한, 학생들의 징계가 풀리지 않는 한, 북한의 위협이 존재해 있는 한, 그것을 이유로 자유를 제한하고 양심의 외침을 억제하는 한 우리의 현실을 고통의 현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주일 증언에서 이 고통의 현장에서라도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자고 했다.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면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과연 해방받을 수 있는 것인가? 오늘의 고통을 뚫고 나가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슬라이드]


우리를 기억하소서(예레미야 애가 5:1, 베드로후서 3:3-7)

우리는 분명히 고통의 현실(가난의 굴레, 학원의 억압, 안보의 위협, 양심의 질식) 속에 살고 있다. 이 고통의 현장에서, 오늘의 고통을 뚫고 나가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고통의 의미를 뒤집는 단 하나의 전제 : 신앙의 눈으로 해석할 때, 고통당하는 자는 시대의 희생양에서 역사를 구원하는 제물로 승화된다.

역사적 거울: 시온의 멸망과 처절한 탄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관심한 방관자가 아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고통을 '기억하시고 본다'는 것은 곧 구원의 행동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구원 도식: 1) 인간의 범죄, 2) 인간 세계의 고통, 3)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밤에 드리는 구원의 기도, 4)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

담대한 항변: 명령형 기도의 힘(기억하소서, 보시옵소서)

부조리한 사회의 해부학

신앙인의 최종적 자세: 고통의 복판에 서라. 도피하지 말라. 고통의 중심점으로부터 피하지 말라.


우리는 지난 두 주일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짙은 고통의 밤에 처해 있는 것인지, 그곳에서 몸부림치는 우리의 모습을 살펴 보고 그 고통의 의미를 신앙의 눈으로 해석해 보려 했다. 우리 자신 혹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고통이 의미있게 승화되어 나가려 할 때 한 전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했다. 그것은 “만약 우리의 고통이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 고통이라면”이라는 전제였다. 만약 이 같은 전제가 우리에게 신앙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이란 참으로 숭고한 고통으로 승화되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은 종교적 속죄제물이 된다고 했다. 참으로 오늘 우리의 공동체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자가 있다면 그의 고통이란 그 공동체를 구속키 위한 종교적 제물이라고 했다. 만약 이렇게 우리의 고통을 종교적 속죄제물로 삼키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같은 공동체, 그러한 백성을 영원히 잊으시지도, 버려두시지도 않을 것이라 증언했다.

이제 시온은 여우가 뛰어 놀 만큼 황무하여졌고, 유대의 부녀자들, 유대 각 성의 처녀들은 능욕을 당하고, 소년들은 맷돌을, 아이들은 섶을 지다가 넘어지고, 기업과 집은 다 외국 사람들에게 넘어가 버렸고,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은을 주고 물을 마시고 값을 주고 섶을 사고, 혹 양식을 구하려 할 때에는 죽음을 무릅써야 할 형편이었으며, 그렇게 해서라도 식량을 구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그 주림의 결과로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게 되어버리고 마는 이러한 실정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하였던가? 그들은 그 고통의 의미를 찾아내고 그 처절한 모습을 하나님께 기도드리게 되었다. 그들은 “여호와여, 우리의 당한 것을 기억하소서, 우리의 수욕을 보소서”라고 기도했다. 여기서 애국 시인의 탄원이 “기억하소서”, “보소서”라는 명령형으로 시작하고 있는 데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유대 백성들은 고난에 처해 있을 때마다 그들의 하나님께 그 고통을 부르짖는 것을 주저하지도 보류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요청을 담대히 외쳤으며, 직접 호소의 목적을 밝히기도 했다. “여호와여,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을 기억하소서. 여호와여, 우리의 수욕을 보시옵소서”라는 것은 강한 요청을 담고 있는 기도이다. 마땅히 기억하셔서 이만한 제물이 고통을 받고 괴로워했다면 이제 우리의 수욕을 보아 주셔야 하겠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간구하고 요청하는 것은 유대 백성들은 자신들의 운명과 국사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 그가 자기와 이스라엘간의 관계를 기억하고 계신지의 여부에 달려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고 있을 때, 고통의 깊은 심연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도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기억해 주실 것을 명령형으로 구하고 있다.

“여러 해 후에 이집트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 2:23-25).

이처럼 그들은 고통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주저하거나 겁내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보아주시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기만 한다면 그 고통은 분명히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모든 범죄를 속죄하는 거룩한 고통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고통이 더 이상 되살아날 수 없는 절망에까지 왔다고 느껴지는 자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보시고만 계시다면 그 모든 절망은 궁극적으로 딛고 설 수 있는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공동체, 어떤 개인의 고통을 기억하시고 보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행동의 시작을 알려 주는 말이기도 하다. 출애굽기 3장 7-10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구출하기 시작하는 구원 행동의 시작을 이 “본다”, “듣는다”는 동사로 시작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이집트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이집트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을 결코 잊어 버리지도 지나쳐 버리지도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결코 무관심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행동을 항상 이렇게 시작하신다. 먼저 고통 속에 있는 백성이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부르짖고 하나님의 구원을 청한다. 하나님은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곤 했다. 그러나 이 처음 행위인 이스라엘의 부르짖음도 실은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되고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이러한 방법으로 인간 역사에 개입해 들어오신다. 인간의 범죄一그로 인한 인간 세계의 고통一견딜 수 없는 고통의 밤에 드리는 구원의 기도一하나님의 구원의 행동, 이러한 도식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도식이다. 그러기에 애가를 쓴 시인은 자기 백성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을 선조와 자신들의 범죄의 결과로 보고 있으며,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밤에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일들을 기억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수치와 욕됨을 보시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나는 첫번째 설교의 물음에서 ‘우리는 오늘 불가사의한 많은 현실들을 경험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 혼동되어 가는 것 같고, 정직한 자가 욕을 보며, 선의가 배신을 당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문제를 던졌다. 오늘 교독한 신약성서 베드로후서 3장 3-7절에 있는 말씀이 우리의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다. ‘조상들이 잠든 이래 만물은 그대로가 아닌가? 도대체 그리스도가 오신다, 의가 승리한다,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 인류를 구원한다는 말이 어째서 진리냐’고 조롱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서 제 좋은 대로 사는 무리들이 횡행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역사의 심판이니, 진리의 승리니, 거짓되게 사는 자의 마지막은 멸망이니 하는 엄연한 교훈들을 억지로 잊으려 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을 날에 불사름을 당하는 때까지만 남아 있을 뿐이라는 확실한 말을 베드로후서는 하고 있다.

진실이 거짓으로 몰리는 현실만큼, 아무 근거없이 고의적인 오해에 의해 어떤 단정을 받는 것만큼, 의가 강제와 강압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만큼 더 견딜 수 없는 아픔이란 없는 것이다. 선의가 선의대로 받아지지 않고, 충언이 충언으로 인정되지 않는 사회만큼 불안한 현실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는 양^이 살 수 있는 인간의 사회가 아니요, 한갖 동물들의 칩거 현장에 불과한 곳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차라리 배고픔이 낫고, 차라리 판잣집이 좋다. 양심이 설 수 없는 사회, 양심이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란 바로 지옥, 그것인 것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너무나 많은 부조리, 너무나 짙은 고통, 너무나 진한 아픔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이 현실을 해석해야 하겠다. 오늘 우리가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 모든 고난, 모든 아픔은 우리 선조의 범죄 때문에, 우리 자신의 과오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게 되어야 하겠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 우리의 현실을 속죄하는 종교적 제물로서의 고통이라고, 그렇게 신앙으로 받아들이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우리의 모든 고통을 스스로 잊으려 하고 그 고통의 중심점으로부터 피해 도피할 것이 아니다. 차라리 우리는 그 고통의 복판에 서서 하나님께 눈을 고정시키자! 이 고통의 밤에 하나님께 구원의 기도를 드리자. ‘여호와여, 우리가 당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기억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당하고 있는 수치와 욕을 살펴 보아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하겠다.

이 기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귀에 들릴 것이며, 하나님은 이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기억하시고 보실 뿐 아니라 이집트의 마수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의 행동을 시작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를 해방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시작하실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진한 고통의 밤에 우리가 있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에게는 좌절이 있을 수 없다’ 절망이 있을 수 없다! 포기가 있을 수 없다. 타협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믿고 바랄 뿐이다. 하나님의 승리를 믿고 바랄 뿐이다. 의의 이김을 믿고 바랄 뿐이다. 다 같이 이 고통의 밤에 구원의 기도를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