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밖으로 끌려갔던 이들
1981년 8월 6일 / 히브리서 13장 11-13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인간의 세계는 합리적인 세계가 아니다. 인간 문화란 오히려 남의 희생만을 추구하는 피의 문화이다. 성문 밖에서 숨져간 예수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일본 땅에서 숨져간 원자폭탄의 희생자들은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 나는 대단히 생소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가 나에게 생소하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지금 느끼고 있다. 여러분이나, 또 먼저 가신 7만여 원자폭탄의 피해자가 계셨음으로 이 나라의 역사가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이 땅 모든 사람들처럼 나 자신도 절감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여성연합회를 통하여 원폭 희생자에 대한 소식을 간간히 들어 왔으나 이처럼 직접 뵙게 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참으로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하는 바이다.
인간의 세계는 반드시 합리적인 세계가 아니다. 선한 사람, 착한 사람,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되게 살아야 하겠는데 꼭 그렇지를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무 죄없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것을 얼마든지 경험한다. 우리가 오늘 추도하고 있는 7만여 원폭 희생자가 그렇게 희생을 당해야만 했던 이유가 그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한 고난을 겪어야 할 만큼 죄가 있는 것도 아닌데, 3만여 생존자는 지난 36년간을 참으로 어렵게 살아오고 있지 않는가? 억울한 죽음과 억울한 고통으로 차 있는 곳이 인간 세상이다.
이유없이 특별한 고난 중에 있었던 가장 비극적인 사람은 2천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서 사셨던 예수라는 분이다. 훌륭하신 일생대로 한다면 그 분이야말로 호화롭고 영광스럽게 죽으셨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렸으며 창으로 찔려 그 나무 위에서 숨을 거두셨다. 그 당시로 본다면 가장 저주받은 생이요 가장 불행한 죽음을 당하셨던 것이다.
기독교는 원래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과 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씻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들의 불행을 몰아내기 위하여 제사를 드렸다. 그들의 제사법은 매우 특이했다. 염소를 성 안에서 잡아 그 피를 뿌리고 가죽과 고기와 똥은 성 밖으로 내다가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그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빨고 몸을 씻은 후에야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책임짐으로써 속죄와 안전을 얻고자 하지 않았다. 언제나 자기들 대신 피를 흘릴 다른 속죄물을 찾는다. 피는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으로 이해되었다. 말하자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책임을 져 보낼 생명을 찾았던 것이다. 그 염소들은 희생제물이다. 희생이 되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제물이다. 대대로 이 일을 되풀이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존속되어 왔다. 이것은 인간 문화란 도대체 얼마나 비정한 것이며 사람의 세계는 피의 문화임을 말해 주고 있다. 짐승의 피 위에 세워지던 인류 역사는 급기야 인간들의 희생 위에 세워지는 역사가 되고 말았다.
36년 전 일본 땅에서 숨져간 원폭 희생자들은 누군가? 그들은 염소들이다. 일본인에게 붙들린 희생제물 염소들이었다. 아니 미국을 비롯한 온 세계 인류의 위기를, 위험을 지고 숨져가도록 붙들려 죽은 희생제물 염소들이다. 마치 이스라엘인을 위하여 붙들려 죽임을 당했듯이 원폭 피해자들 역시 일본에 의하여 붙들렸고 끌려갔고 피를 뿌렸던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피를 뽑아 뿌린 다음 성문 밖으로 그 짐승의 몸뚱어리 등을 가지고 나가서 불태워 버린다. 마치 완전 범죄라도 꾸미려는 것처럼 느껴지는 행위다. 불태워 없애 버리면 영원히 잊혀져 버린다. 아무리 짐승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하여 피를 흘리게 한 염소에 대해서 미안스런 생각 정도는 가져야 한다. 혹 감상적인 말을 하자면 무덤이라도 만들어 줌직한 일인데 오히려 불태워 없애 버렸다. 잊어 버리자는 심리가 있었던 것일까? “성문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는 것은 자기들의 생활권 밖으로 몰아내 버리는 것이요 완전히 소외시켜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그렇다. 자기들의 안전을 위하여 피흘리게 한 희생제물들을 성문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 소외시키고 거들떠 보지도 않겠다는 작정이다. 급기야는 불태워 그 형체를 없애 버리는 것처럼 완전히 잊고 만다.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는다. 심지어 문안조차 없다. 인간 관계의 회색빛 사각지대로 내버린다.
36년 전 일본 땅에서 숨져간 원폭 희생자들은 누군가? 그들은 어느새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간 사람이다.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는 사람이다. 소외되고 관심의 대상이 못 되는 사람이다. 불태워 날려 버린 것처럼 끌고 나갔던 장본인들인 일본에 의해서조차 망각되어진 사람이다.
불태우고 돌아올 때는 옷을 깨끗이 빨아 입는다. 자신이 저지른 비정한 행위를 이제는 완전히 과거의 것으로 돌려 버리는 것이다. 아무 관련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것이다. 오늘 나는 36년간이나 원폭 피해자에 대하여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일본에게서 이 모습을 보고 있다. 그들은 이제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풍요한 생을 즐기고 있다.
36년 전 여러분의 희생과 오늘날 여러분의 고통 속에서 인간들의 못된 속성을 발견한다. 나를 위해 네 피를 흘려내고 성문 밖으로 내던져 불태워 버린다. 여기, 아픈 가슴을 안은 희생제물들의 원성이 세상에 차 있다. 억울하고 슬픈 저들의 울부짖음이 세상에 이미 포만되어 있다.
이제 이 땅의 한민족을 일본 땅으로 끌고 갔던 일본의 회개를 촉구한다. 그래서 저 염소처럼 미국의 원자폭탄이라는 칼에 피를 흘리게 했던 일본, 그리고 그들을 불태워 잊고 있는 일본은 회개해야 한다. 죽임을 당한 자가 있는데도 옷까지 깨끗이 빨아 입고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일본의 회개를 촉구한다.
이런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남의 희생 위에 서는 사회, 남의 피를 딛고 서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이다. 자신의 짐을 대신 지게 한 저들에 대하여 그 짐을 지운 자는, 그가 개인이건 국가건 단체이건, 언제까지라도 채무를 느껴야 한다. 그들의 회복을 위하여 성실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은 반드시 일본만을 전제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사실을 교훈 삼아 남의 희생 위에 이 사회를 건설하려는 뜻을 포기해야 한다. 남의 피를 딛고 세워지는 권력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엄숙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희생제물이 되었던 우리의 입장은 어떤가? 여러분과 먼저 가신 7만여 희생자들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겠는가?
희생제물의 가장 전형적인 표본은 예수님이다. 그는 붙잡혀 마치 희생제물 염소처럼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끌려 가서 거기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잡아 죽였다. 그러나 그는 희생자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죄를 속하는 거룩한 것이었다. 우리는 잘난 체하며 죽였던 저들을 숭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임을 당한 예수를 숭상한다. 억울하고 분한 우리의 가슴을 식히고, 찌들리고 아픈 현실을 초월하여 예수를 쳐다볼 수 있다면 거기에 영원한 위로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 우리의 죽음은 값없는 것이 아니라는 거룩함을 오히려 깨닫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이 땅을 속죄했다. 비록 천부당 만부당하게 제물이 되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땅을 속죄한 것이다. 여러분의 고통이 오늘 이 나라를 세워 놓고 있다. 7만 희생자가 이렇게나마 오늘 세계 평화를 유지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7만여 희생자와 여러분 위에 하나님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아울러 한 동포의 아픔을 같이 나누는 우리 민족이 되기를 또한 기도한다.
[회상 노트] 6ㆍ25와 교회
민족의 통일을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을 규탄했다. 아직까지 통일논의는 국민들 사이에서는 금기였다. 자칫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감옥살이를 하게 될 때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민족통일을 주도할 도덕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광주의 대학살, 삼청교육대, 온갖 숙청으로 손 가득히 피를 담고 있었다. 그가 민족통일의 성업에 끼어드는 것은 순전히 정략이었다.
그런데 교회지도자들이 또 때를 만난 것이다. 궐기 대회를 하고 6ㆍ25 상기 대부흥회를 한다. 김일성은 회개하고 전두환 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의를 즉각 수락하라는 것이 메시지였다. 구역질이 났다. 물론 김일성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을 수 있다. 그것은 나에게도 강하게 있다. 그러나 권력에의 아부가 그들의 본질이다. 정권이 반공하면 반공할 것이고 정권이 화해를 말하면 또 화해를 목소리 높여 주장할 것이다.
교회지도자들은 북한선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몽매한 교인들의 속주머니를 털어 기금을 마련하고 활동비로 쓰고 자동차도 산다.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닌다. 교인들이 그것을 용납하니 거짓 지도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전두환의 내심을 폭로해야 했다. 분단극복의 의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두환과의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교인들이 역사의 주체로 서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의 통일 몸짓에 동의를 보내서도 안 된다. 정권적 차원에서 만의 하나 통일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겨레 모두에게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민이, 남과 북의 민이 주체가 되어서 통일을 당기게 되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우리 남쪽에 공산주의의 노선에 동조하게 될 취약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빈부의 격차가 현저하고, 공동체의식이 무너진 곳에 공산주의의 평등과 정의 주장이 스며들게 되어 있다.
공산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규탄대회와 적개심 고취에 있지 않다. 평등과 사회 정의를 세우는 데 있다. 교회가 가난한 자 편에 서기를 꺼리고 고난받는 자와 일치하기를 두려워하는 한 공산주의는 우리에게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전두환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이 되기에 우리는 통일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야 한다. 바른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성 밖으로 끌려 갔던 이들”은 원폭피해자들을 위한 기도회에서의 설교이다. 그들 피해자들에게 우리는 한없는 빚을 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