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17-22 ; 스가랴 7:8-14] 6ㆍ25 극복의 신앙 – 1981년 7월 11일, 김상근 목사

6ㆍ25 극복의 신앙

1981년 7월 11일 / 마가복음 10장 17-22절(슥 7:8-14)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밖에 있는 적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욕과 갈라짐이 아닐까? 서로 맥을 끊고 관계를 끊어버리고 이제는 완전히 흘로 있게 된 현실이 우리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다. 서로 위할 수 없는 사회, 서로 갈라서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자.


[슬라이드]















[설교 전문]

인간 사회에서 평등의 문제는 영원한 숙제일지도 모른다. 경제적인 평등뿐 아니라 문화, 사회적인 평등의 문제는 수천년 전부터 문제가 되어 오고 있다.

어떤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었을 때 제자들 중에 그 일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 낭비를 규탄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예수께서 그 여인의 행위를 두둔해 주시고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든지 너희가 하려고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막 14:3 이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도 가난의 문제, 경제적 평등의 문제는 영원한 숙제라는 것을 간파하시고 계셨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인도의 거지와 유럽의 거지, 한국의 가난한 자와 캐나다나 미국의 가난한 자는 결코 똑같을 수 없다. ‘가난’이라는 의미는 인간의 모든 생활에서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먹고 싶은 것이 있는데 먹어 보지 못한다거나 수술을 받아야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데 수술을 받을 수 없는 형편, 사회의 구조 속에 억압되어 있는 상태가 가난의 상태일 것이다.

지난 30여 년은 지구상에 엄청난 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한 자에게 100의 혜택을 주어 더 부유하게 했다면 가난한 자에게는 겨우 10의 혜택을 주어 더 가난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오늘날 경제는 기술의 향상, 그에 따른 상품의 고급화를 지향한다. 기업의 생리상 어쩔 수 없다. 가난한 자에게는 구매력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상대로 하는 상품은 이윤을 크게 남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생산되는 상품은 점점 고급화되고 고급화될수록 가난한 자들의 소외의식, 가난의식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이렇게 갈 수밖에 없고 빈부의 불평등, 사회적 충족감의 불평등은 점점 더 벌어지게 되어 있다.

이것은 개인간의 문제만이 아니다. 과학 기술로 무장을 한 강대국들은 소위 다국적 기업, 혹은 경제적 식민주의인 신식민주의를 형성해 내고 있다. 신식민적 구조와 다국적 기업에게도 변은 있다. 그래도 약소한 나라에 노동이라도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가난의 문제에 해결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지의 자원을 약탈해 가고 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커다란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나라에도 싼 노동력을 노리고 들어온 다국적 기업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물론 우리의 경우 노동 임금이라도 벌어 들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벌어 들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이익을 외국 기업들이 가져가고 있다. 여기에 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 세력은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만연되어 있다. 여기에 국제간의 불평등의 격차가 감당할 수 없게 커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난의 문제는 결코 해결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같은 국내의 개인적 불평등의 문제, 국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특히 우리에게는 남의 일일 수가 없다. 이유는 가난의 문제를 쟁점으로 내걸고 있는 공산주의와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6‘25 동란의 명분은 소위 ‘인민의 해방’이었다. 지금도 저들의 남침의 명분은 ‘인민의 해방’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 안에서의 불평등, 이 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점하고 있는 불평등의 자리를 완전하게 극복해 내야만 저들의 도발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불평등의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어느새 구조화되어버렸다.

성서의 역사,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항상 가난한 자들과 희망을 나누고 억압당하는 자들을 위해 살아온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가난의 극복을 위하여 불평등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한 내용을 간직한 성서 가운데 이스라엘의 오랜 기도로서 왕을 위한 기도문이 있다.

“백성을 억압하는 자들을 쳐부수고 약한 자들의 권리를 세워 주며 빈민들을 구하게 하소서. …… 그는 하소연하는 빈민을 건져 주고 도움받을데 없는 약자를 구해 주며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가난에 시든 자들을 살려 주며 억울한 자의 피를 소중히 여겨 억압과 폭력에서 그 목숨 건져 주리이다”(시 72:4,12-14).

예레미야 선지자의 외침도 그 가운데 하나다.

“너의 아비는 법과 정의를 펴면서도 먹고 마실 것 아쉽지 않게 잘살지 않았느냐? 가난한 자의 인권을 세워 주면서도 잘 살기만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나를 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너는 …… 죄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려고 눈을 부릅뜨고 백성을 억누르고 들볶을 생각뿐이구나”(렘 22:15-17).

오늘 봉독한 구약성서의 말씀도 그 대표적인 구절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오랜 포로생활 끝에 가까스로 예루살렘에 귀환하게 된다. 이제는 다시 불행한 민족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해야 한다는 필사적 요청이 있었다. 그럴 때 스가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왜 우리 민족이 고난을 받았던가’ 하는 것을 밝힌 대목이다.

“너희는 …… 동족끼리 서로 신의를 지키며 열렬히 사랑하여라. 과부와 고아, 더부살이와 영세민을 억누르지 말고 동족끼리 해칠 마음을 품지 말아라. 이렇게 일러 주셨는데도 사람들은 귀담아 듣기는커녕 오히려 외면한 채 귀를 막았다 …… 그리하여 만군의 야훼께서 크게 노하셨다 …… 사람들을 흩뜨리시어 낯선 민족들 가운데 끼어 살게 하셨다. 그들이 다 흩어진 다음, 이 나라는 오가는 사람도 없이 황폐해졌고 기름진 땅은 거칠은 쑥밭이 되고 말았다”(슥 7:8-14).

사도 바울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내가 지금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해주면서 여러분에게만 괴로운 부담을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공평하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넉넉하게 살면서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그들이 넉넉하게 살게 될 때에는 또한 여러분의 궁핍을 덜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공평하게 되지 않겠습니까?”(고후 8:13-14).

성서에는 가난한 자들의 문제, 혹은 반대로 특권도 없고 가난한 자들의 희생 위에 풍요를 즐기는 사람들의 문제가 수없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 성서는 빈부의 불평등은 하나님의 뜻이 거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예수 이후의 선물인 교회라는 선물을 거부하는 것임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을 성서는 추상적인 용어로 다루고 있지 않다. 성서 어디를 보아도 빈곤 자체의 문제나 가난한 자 자신의 문제보다 그들의 불행을 줄일 가능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행동에 대해 훨씬 더 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눅 16:1-5; 18:18-27 등). 모세, 예언자,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 - 그들의 정통적인 신앙생활은 불평등의 극복을 위하여 스스로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살았던 삶이었다. 언제나 부한 자들은 “너희가 이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찌할 것인가”를 질문받아 왔다.

오늘의 신약성서 본문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기사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십계명 중 하나님께 관한 계명은 언급을 안 하시고 5번째에서 10번째 계명,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져야 할 계명을 지켰느냐고 반문하신다. 여기서 예수의 입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당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정당한 관계를 이루는 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정당하지 못하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도 정당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규정하는 입장을 갖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안에 불평등이 있다는 사실을 신중하고 진지하게 취급하도록 우리를 강요하는 말씀이다.

그 다음 말을 보면 더욱 그렇다. 위와 같은 말씀을 듣고 이 부자는 그런 십계명은 모두 지켰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그러면 “가서 네 가진 것을 무엇이나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불평등의 극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라는 말씀이다. 그랬더니 슬픈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났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가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밝혀 놓았다.

우리의 상황은 무엇인가?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 북은 소위 ‘인민 해방’을 위해 무력으로 남침이라도 해보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남은 그것을 역시 무력으로 막아 보자고 출혈에 출혈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민 해방’이라는 명분의 소지를 우리 사이에서 없애 버리는 것이 가장 적극적인 반공이며 공산주의를 막는 것뿐 아니라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이다. 우리는 절대로 북에 명분을 주어서는 안 된다. 평등에의 피나는 노력, 불평등의 극복을 위해 가진 것을 팔아야 한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우리의 불평등의 상황은 어찌할 수 없다고, 국제적 불평등은 더더구나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해 버려서는 안 된다. 가진 것을 파는 첫 발걸음이 가난한 자와 유대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학자 프롬(E. Fromm)은 인간성의 변혁이 없이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인간성의 문제로 귀착한다. 우리의 말로 표현한다면 거듭나지 않고는, 새로이 창조받지 않고는 가난한 자와의 유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교회 안의 가난한 자들과 유대를 가져야 하고, 교회 밖에 있는 과부와 고아, 떠돌이들과도 유대를 가져야 한다.

모름지기 교회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고자 하는 작은 시도로 지역의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헌금을 하자 했고 지난 주일 증언에서 언급까지 했으나 우리는 자칫 부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죄악시해 버리기 쉽다. 그러나 예수는 부자청년을 부자라는 사실로 나무라고 있지 않다. 부가 곧 죄일 수 없다. 문제는 가난한 자와 유대를 가지라 했을 때 “슬픈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났다”는 것이 문제다. 가난한 자와의 유대를 기피하고 거부하는 자리에 하나님 나라는 없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면 했지 가난한 자와의 유대를 거부하는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 청년부의 일부 학생들이 농촌 봉사활동을 떠난다. 저들은 오늘날 이 땅의 가난한 자, 이 땅의 고아와 과부, 떠돌이들과의 유대를 이루기 위하여 농촌으로 떠나는 것이다. 여러분의 출발은 사회정의에 의한 것일 수만은 없다. 하나님의 명령이어야 한다. 여러분의 활동은 자선일 수 없다. 가진 것, 여러분이 얼마 후에 갖게 될 것을 팔아 그들에게 주려는 행위이어야 한다. 여러분은 가난한 자의 편에 서기에 앞서 하나님의 편에 선다는 사실, 정의의 사신이기보다 하나님의 사자라는 사실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한다. 이것을 사회활동이라 이름할 것이 아니라 신앙활동이라 명명해야 한다.

우리가 6ㆍ25의 비극을 다시 경험치 않고 평화적인 통일을 이룰 수 있는 하나의 길은 가난한 자와 유대를 가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6ㆍ25는 무기로만 극복될 수 없다. 불평등의 심화 위에 세워지는 경제 부흥은 국력일 수 없다. 우리 교회의 구조가 굳어져 버린 이 사회에 한 모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구원에 용납되게 될 것이다.


[회상 노트] 6ㆍ25와 교회

민족의 통일을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을 규탄했다. 아직까지 통일논의는 국민들 사이에서는 금기였다. 자칫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감옥살이를 하게 될 때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민족통일을 주도할 도덕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광주의 대학살, 삼청교육대, 온갖 숙청으로 손 가득히 피를 담고 있었다. 그가 민족통일의 성업에 끼어드는 것은 순전히 정략이었다.

그런데 교회지도자들이 또 때를 만난 것이다. 궐기 대회를 하고 6ㆍ25 상기 대부흥회를 한다. 김일성은 회개하고 전두환 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의를 즉각 수락하라는 것이 메시지였다. 구역질이 났다. 물론 김일성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을 수 있다. 그것은 나에게도 강하게 있다. 그러나 권력에의 아부가 그들의 본질이다. 정권이 반공하면 반공할 것이고 정권이 화해를 말하면 또 화해를 목소리 높여 주장할 것이다.

교회지도자들은 북한선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몽매한 교인들의 속주머니를 털어 기금을 마련하고 활동비로 쓰고 자동차도 산다.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닌다. 교인들이 그것을 용납하니 거짓 지도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전두환의 내심을 폭로해야 했다. 분단극복의 의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두환과의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교인들이 역사의 주체로 서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의 통일 몸짓에 동의를 보내서도 안 된다. 정권적 차원에서 만의 하나 통일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겨레 모두에게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민이, 남과 북의 민이 주체가 되어서 통일을 당기게 되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우리 남쪽에 공산주의의 노선에 동조하게 될 취약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빈부의 격차가 현저하고, 공동체의식이 무너진 곳에 공산주의의 평등과 정의 주장이 스며들게 되어 있다.

공산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규탄대회와 적개심 고취에 있지 않다. 평등과 사회 정의를 세우는 데 있다. 교회가 가난한 자 편에 서기를 꺼리고 고난받는 자와 일치하기를 두려워하는 한 공산주의는 우리에게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전두환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이 되기에 우리는 통일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야 한다. 바른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성 밖으로 끌려 갔던 이들”은 원폭피해자들을 위한 기도회에서의 설교이다. 그들 피해자들에게 우리는 한없는 빚을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