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은 언제인가?
1981년 11월 1일 / 마가복음 1장 14-15절 ; 베드로후서 3장 8-13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누구나 먹고 사는 일에 바빠지기 십상이다. 더구나 분위기나 정황이 경색되어 있는 경우에는 일상생활 외에 아무 관심도 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란 언제나 궁극의 것을 떠날 수 없다.
우리는 궁극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을 지금도 갖고 있는가? 일상성 속에 함몰되어 있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평소 성서 봉독 시간에 구약과 신약성서를 읽었으나 오늘은 이례적으로 베드로후서와 마가복음을 읽었다. 이 두 성서는 우리에게 상당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오늘은 이 두 성서를 증언하기 위한 서론적인 말씀만을 드리겠다.
특히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성서 말씀을 읽고 대할 때 또는 그것을 주석하는 설교를 들을 때, 우리처럼 현실 가운데서 사신 예수보다 신격화된 예수를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사는 일 같은 것, 세상과 같은 것, 역사 같은 것은 속된 세인에게 맡기고 도(道)를 통한 도인처럼 초역사적이고 추상적인 것에만 관심한 예수를 전제하게 된다. 그래서 성서를 대할 때에도 그 시대,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서 어떻게 사셨느냐 하는 삶의 현장성을 생생하게 살려내고자 하지 않는다. 그저 그 말씀 자체가 의미가 있고 빛이 된다고 생각하곤 한다.
『기독교 사상』 10월호가 “한국 교회의 성서 공부 - 그 현황과 전망”이라는 특집을 냈고 그 특집에 대한 독자의 평을 11월호 책머리에 싣고 있다. 거기 강환우 장로님의 짧은 평이 있다. “예수의 삶의 현장성이 우리의 삶의 현장과 전혀 무관한 상태에서 성서 공부가 되어지고 있다”고 10월 특집을 읽은 느낌을 적고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성서를 예수의 삶의 형편 속으로 가지고 가서 읽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냐? 물론 우리의 생의 폭이 넓고 다양한 것처럼 우리의 문제 역시 다양하고 종류도 엄청날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고통 가운데 있는 이 집사님 가정 문제, 젊은이들의 남녀 문제, 먹고 살고 취직을 해야 하는 문제 등 극히 개인적인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과 함께 그 시대 전체를 싸고 있는 시대 정의의 문제, 사회 구조를 사랑의 구조가 되게 하는 문제 등 사회적 문제도 우리에게 있다. 전자의 경우는 화급한 문제로 여겨지지만 후자는 남의 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민주적 사회가 되면, 빈부간에 병들 수도 있고 건강할 수도 있으나, 민주 시민이 되는 것이고, 공산 사회가 되면 모두가 예외없이 공산주의자가 되고, 독재 사회가 되면 독재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커다란 문제는 이 사회에 정의가 과연 세워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손으로 정의를 세울 수 있느냐, 아니면 어차피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큰 일은 몇 사람 혹은 강대국에 맡기고 우리는 먹고 사는 일이나 할 것이냐라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아니, 벌써 결론을 내려 버렸는지 모르겠다. 세상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기 때문에, 힘을 가지면 정의가 되고 못 가지면 불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은 먹고 사는 일이나 관심하자고 결론을 지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정의로운 사회는 올 수 있는 것인가? 이 말을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은 올 것인가?”라고 표현했다. 오늘 우리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종말 실현에 대한 회의다. 유대인들은 어떠한 박해와 시련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반드시 새로운 나라, 새로운 역사, 정의의 나라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께 이렇게 묻는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행 1:6).
이것은 종말의 시간을 묻는 말이요 그 종말에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정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기대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올라가시는 것을 너회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행 1:11).
이 말을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믿었다. 그렇다. 지금 당장은 예수가 망한 것 같고 정의가 무너진 것 같으나 종말의 날에 기어이 정의로운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다. 같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만으로 도 그리스도인들을 사형에 처하곤 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자신의 정치적 실정을 막기 위하여 엉뚱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혼란의 핵으로 지적하여 온세계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게 만들었다.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투쟁해 왔던 그리스도인들은 투쟁을 멈추어 갔다. 투쟁만 멈춘 것이 아니라 나아가 어차피 ‘그 날’은 오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기 시작하여 점점 일상성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 날’에 대한 포기다. ‘그 날’을 기다리는 신앙을 포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예수는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했던 그 약속이 벌써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예수는 오시지 않는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라를 세우실 때가 이 때입니까?”라고 물었던 자신들의 질문이 속절없는 것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투쟁의 포기요 기다리는 신앙의 포기였다. 일상성에서 뛰쳐 나왔던 저들이 다시 일상성 속으로 돌아가 버리게 된다. 그 날을 기다려 결혼조차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생활을 위하여 일도 하려 하지 않을 만큼 급박하게 굴던 저들이 이제는 모두 소시민적인 일상성으로 돌아가 버리고 있었다.
더욱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와 같은 좌절과 절망을 극복하고자 유대인들은 최후로 필사의 항쟁을 해 본다. 기원후 66년에 점령군 로마에 항거하여 대대적인 독립 전쟁을 일으켜 보았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봉기한 유대인은 처절한 혈전을 벌였다. 그들은 이것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라를 세우실 때”를 만들어 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군은 그들을 가차없이 토벌하고 말았다. 기록에 의하면 다메섹 토벌에서만 1만 8천 명이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5개월 동안이나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초토화되어 버렸고 급기야 성전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예수의 말씀처럼 그야말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덧놓인 것이 없을 만큼 그 파괴는 엄청났다.
예루살렘 성의 출입이 로마 군인에 의하여 엄격히 통제되었고 성전에는 쥬피터 신상이 세워졌다. 그 신명을 따서 예루살렘을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고 이름을 바꾸어 성전을 쥬피터 신에게 봉헌했다. 그리고 유다 땅 전 국토를 이제 유다 땅이니 이스라엘 땅이니 이렇게 부르지 못하게 하고 이스라엘의 오랜 숙적이요 원수였던 블레셋 필리스터(Philister)의 이름을 따서 팔레스티나(Palestina)라고 부르게 했다. 70년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이교도의 손에 함락되고 말았다. 절망하며 좌절하던 유대인을 일으켜 세우고자 치른 이 독립 전쟁은 오히려 유대인에게서 희망을 앗아가 버렸다. 신앙을 앗아가 버렸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라를 세우실 때가 이 때입니까?”라고 물을 여지조차 말살하고 말았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성 속으로 그 몸을 숨기고 만다. 문제의 핵심을 흐려서 비본질적인 문제를 필요 이상으로 확대하여 옳거니 그르거니 다투기나 한다. 우상 앞에 놓았던 제사 물건을 먹어도 좋으냐 안 되느냐? 여자가 교회 안에서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하느냐 그럴 필요가 없느냐? 방언하는 것을 용납할 것이냐 막을 것이냐? 역사 가운데,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던, 그래서 그때가 지금이냐고 물었던 그들의 관심이 이렇게 바뀌고 말았다는 말이다. 한 때는 ‘종말’을 기다리며 궁극적 변화와 개혁을 기대하던 그들이 겨우 이 정도의 관심에 얽매이게 되었다. 얼마나 한심하게 된 현실인가?
그러나 나는 저들의 형편 속에서 우리를 발견한다. 우리 역시 해방 이후 36년간 더 이상 겪을 수 없는 갖은 비극들을 처절하게 겪어오면서 ‘그 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기에 이르고 만 것 같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보겠다거나 정의의 사회를 이루어 보겠다는 생각을 이제는 모두 포기해 버린 것 같다. 그리고는 일상성 속으로 숨어 들어가서 먹고나 살자고 자포자기하고 있다. 비본질적인 문제를 크게 과장하여 그것이 마치 귀중한 일인 것처럼 흥분한다. 사소한 문제, 개인적 감정 따위에 몰입하여 옳거니 그르거니 하고 있다. 아니,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정의의 사회를 이루어야 하겠다는 의지와 신앙은 어디에 팽개치고 우리 자신을 팔레스틴의 한 소시민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인가?
이 때에 마가는 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일으켜 세울 것이며 어떻게 궁극적 관심으로 저들의 관심을 바꿀 수 있겠는가고 고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예수의 생, 예수의 사건을 생생하게 전하는 길뿐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래서 쓴 것이 마가복음서이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의 흐트러진 눈, 사소한 감정 따위에 충혈된 우리의 눈, 일상성 속으로 도망칠 길을 찾던 우리의 눈을 ‘예수’, 예수에게로 돌려야 한다. 그만을 뚫어지게 응시해야만 한다. 마가는 첫 마디로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다. 이 말씀을 우리의 가슴에 뜨겁게 담아 돌아가자.
[회상 노트] 카이로스 회의
‘한 때 나도 그랬었지! 그러나 지내놓고 보니 그것 모두 쓸데없는 짓이었어. 세상은 으레 그런 것이야.’ 그래서 그렇게 누구나 사는 것과 똑같은 생활을 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수난의 기간이 너무 길다. 투쟁의 터널이 너무 깊다. 모두가 지쳐 있다. 나도 너도 이른바 일상성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그치지 않으나 우리는 옛날처럼 충격을 받지 않는다. 그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혀도 우리는 좀처럼 놀라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이리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했지만 희망은 사라지고 소망의 빛은 오히려 꺼져가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마치 블랙홀에 쓸려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일상성으로 급속하게 복귀한다. 나는 ‘초조해졌다. 포기구나! 좌절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고 있구나’ 어떻게 해야 하나?
성서를 펼쳐 들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성서의 계시는 포기와 좌절의 때가 곧 카이로스라 했다. ‘마지막이다!’라고 주저앉을 때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신다. 그때가 하나님의 때다!
이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신앙이란 포기하지 않는 것이리. 좌절하지 않는 것이리. 절망하지 않는 것이리. 포기와 좌절과 절망은 일상성으로의 복귀다. 그렇다. 중도 포기는 안 된다. 소시민적 성취나 비본질적인 것에의 지나친 집중은 궁극적 가치를 포기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