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4-15] 요한 체포 직후에 선포되는 복음 – 1981년 11월 8일, 김상근 목사

요한 체포 직후에 선포되는 복음

1981년 11월 8일 / 마가복음 1장 14-15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여름날 더위를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고 겨울에 추위를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선을 추구하는 신앙의 의지에도 역시 한계가 있는 것 같다. 한계점에 도달하면 가던 걸음을 포기하게 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은 포기한 신앙인가 아니면 원래의 신앙인가? 신앙은 포기할 수가 없다.


[슬라이드]











[설교 전문]

지난 주일 증언을 통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신 직후,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처했던 상황을 살펴 보았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러하다. 예수께서 활동하실 때 부름을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은 높은 이상과 꿈을 가졌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재림해 오셔서 이 이상을 실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 기대를 위한 운동에 참여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먹고 자고 그저 그럭저럭 살아가는 일상성에서 뛰쳐나와 비상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날이 많이 지나면서 점점 본질적인 문제, 즉 자신들이 왜 예수 운동에 가담하고 있으며 가담했느냐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잊고 매우 비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게 되었다. 고린도에 모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그들 안에 파벌이 생긴다. 누구는 누구 편이고 또 누구는 누구의 편이라는 식의 파당이 생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음행이 빚어지고 서로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일이 일어난다. 우상 앞에 놓았던 물건을 먹을 것이냐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냐, 예배 시간에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쓸 것이냐 안 써도 좋으냐, 방언을 해야 할 것이냐 억제할 것이냐 하는 것들이 그들의 문제였다. 이렇게 비본질적인 문제에 자신들의 관심을 옮겨 놓음으로써 평범한 생활에서 뛰쳐나왔던 그들이 다시 옛 평범한 사고와 의식으로 되돌아갔다.

더구나 예수로 말미암아 갑자기 성취될 것으로 믿었던 하나님의 나라는 실현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인은 고난과 박해에 시달리게 되었다. 기원후 66년의 유대 독립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졌지만 결과는 완전 패망이요 야훼 신앙을 봉쇄당하는 것뿐이었다. 이제, 그들은 거의 완전히 일상성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마가복음 기자는 이와 같은 상황을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위기로 파악했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지난 주일 오늘 우리의 상황이 기원후 66년 당시 유대의 상황과 흡사하다고 보았다. 민주적인 나라를 세워 보려고 노력했으나 언제나 개인적인 손해와 막급한 인명의 피해, 경제적 후퇴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학생들은 제적당하고 교수는 해직되고 기자의 붓은 꺾이고 말았다. 수백 명, 항간에는 수천 명이 죽었다고 하기도 한다. 경제는 이 같은 소용돌이가 있을 때마다 겉잡을 수 없는 내리막길을 달리게 되고 회복의 기운을 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이상에 매달려 피해를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현실이야 어찌 되든지 먹고 살면 된다는 일상성 속으로 주저앉고 말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무엇인가? 우리 개인의 삶도 그렇다. 젊은 시절의 꿈과 이상이란 사회에 나와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면서 한낱 젊었을 때 가져보는 꿈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현실주의자가 되는 경험을 얼마든지 한다. 그래서 “나도 젊었을 때는 다……”라는 말을 어른들은 곧잘 하곤 한다. 5-60대는 그만두고 3-40대의 관심은 무엇인가? 본질적인 사고를 조금이라도 하는가?

교회의 걸음걸이도 그렇다. 첫 열심, 첫 정열이란 것은 서서히 없어지고 어느새 점점 비본질적인 것에 급급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나는 나 자신이 이 교회의 목회자로서 심방을 하고 교회의 행사를 이것저것 마련하며 집행하고 크고 작은 일에 신경을 써 가는 중에 방향을 잃게 되는 위협을 느낄 때가 있다. 현실적으로 오늘 일을 처리하면서도 현실을 안정시키는 일에 급급하여서는 안 되겠다는 긴장 - 이 긴장을 잃을까 항상 조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는 처음 이상이 성취되지 않고 우리의 꿈이란 한 때 가져보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체념의 늪에 빠져 들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 교회의 궁극적 관심은 무엇인가? 교회에 대한 여러분의 기대는 궁극적인가 아니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그것과 대동소이한 것인가?

최근 우리 역사 속에서 좌절하는 우리들, 젊은 시절을 보내고 3-40대에 이른 소시민들, 그리고 활기찬 출발의 경험을 가졌으나 이제 나이가 좀 든 교회의 사정이 바로 기원후 66년 유대 전쟁 직후의 그리스도인들의 형편과 같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 4절 말씀을 우리의 말로 받게 된다.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던 선배들도 죽었고 모든 것이 창조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느냐?’’

종말이고, 하나님의 나라고, 정의의 사회고, 의고 사랑이고 하는 것은 한 때 해보는 것일 뿐이지 우리가 피홀려 싸워 보고 땀흘려 노력해 보았자 모두가 헛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포기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일을 포기해 버린다. 선과 의를 위해 살겠다는 신앙의 결단을 포기해 버린다. 예수 잘 믿어 보고자 했던 첫 열심을 포기해 버린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굳게 밀고 나가리라던 결의를 포기해 버린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을 추상화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라란 이 지상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니 선이니 하는 것은 꼭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마음에 생기는 것을 말한다. 세상은 아무리 악할지라도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생길 수 있고 마음으로 의를 믿고 마음으로 선을 따르면 되는 것’ 이라는 논리가 서게 된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가난한 자” 앞에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마음”을 더하게 된다. 현실로 부딪치려 하지 않고 정신으로 도(道)를 트려고 한다. 시간 가운데 있는 것을 시간 밖으로 몰아낸다. 역사적인 것을 비역사화한다. 현실을 추상화해 버린다. 사람들은 현실을 보려 하지 않고 하늘을 보려 한다. 현실의 개혁보다 마음의 회개를 더 중히 여긴다. 현실에서 갚아야 하는 것을 하늘나라에 가서 할 일로 미루어 두게 된다. 이것이 일상성 속으로 돌아가는 데 가장 좋은 첩경이다.

그들은 이제 현실적인 예수보다 신격화되고 초역사화된 그리스도를 더 바라게 되었다. 현실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땀을 흘리고 피를 뿌리는 예수보다는, 예수의 이름으로 손만 얹어도 모든 병이 낫고, 거지를 부자 되게 하고 기사와 이적을 쏟고 다니는 예수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니, 어느새 예수는 그렇게 되었다.

여기서 마가복음 기자는 커다란 위기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마가복음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복음서 첫 대목을 무엇으로 시작했나? 다른 복음서는 예수의 탄생 기사로 시작했다. 그러나 마가는 첫머리에 “세례 요한의 활동”을 적었다. 그리고 몇 문단이 지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시작 시간을 쓰고 있는데 “요한이 잡힌 후”라고 썼다. 예수의 운동을 요한과 나아가서는 요한의 체포와 관련을 시키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 가운데서 가장 결정적인 것이 요한의 체포 사건이었다는 입장이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갈릴리로 갔다고 적는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한 동기에 대하여 마태, 누가는 대단히 우연한 일로 적고 있다. 마태는 예수의 부모들이 예수를 죽이려던 헤롯 왕이나 그 아들 아켈라오스 왕을 피하여 간 곳이 갈릴리였다는 것이고 누가는 원 고향이 갈릴리여서 거기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을 일단 떠나셨다가 요한이 잡힌 후에 갈릴리로 갔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성격상 마태나 누가처럼 우연이 아니라 갈릴리로 간 것을 예수의 의지적 행위로 보도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형이상학화 되어가고 추상화 되어가는 예수 신앙을 현실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일상성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이상’, 궁극적 관심이라는 현실에 다시 서게 하자는 것이다.

예수는 요한이 잡힌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다. 요한은 왜 잡혔나? 천당 이야기하다 잡혔나? 도덕 이야기하다 잡혔나? 예의 이야기하다가 잡혔나? 교세 늘리는 일, 축복해 주는 일, 입신출세시켜 주는 일 때문에 체포되었나? 이런 것이라면 결코 체포될 리가 없다. 더욱이 사형이 집행될 리는 없다. 복음서에 따르면 요한은 헤롯 왕이 자기 동생 부인과 결혼한 일을 힐책하였고 그것이 죄가 되어 처형당하였다. 한번 왕의 부도덕을 비판했다 하여 사형을 받을 수는 없다. 그가 아마도 계속적으로 왕을 비판하여 왔기에 이것을 기화로 처형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세례 요한이 반로마 선동 정치범으로 처형되었다고 기록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세례 요한이 체포당한 사건과 관련을 갖는다. 세례 요한조차 처형되는 마당이기에 피하고 후퇴하고 일상성 속으로 숨어 들어가야 하겠다는 것은 현실을 잘못 보는 것이다. 국민의 추앙을 받고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가진 세례 요한조차 의와 사랑, 자유를 구현치 못하는 터에 나 같은 세인이 나서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기원후 66년 유대 전쟁 이후 실의와 좌절에 빠진 이스라엘인들을 향하여 마가는 외친다. 예수는 바로 그러한 현실을 피하여 비역사의 세계로 도망치지 않고 갈릴리로 오셔서 복음 운동을 시작하시되 오히려 때가 찬 것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간파하였다는 것을 외치고 있다. 지금은 피할 때가 아니다. 일상성 속으로 숨어 버릴 때가 아니다. 오히려 이 극악한 시대가 바로 “때”이다. 카이로스다.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도망친 것이 아니다.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마가는 실의에 빠지고 일상성 속으로 도망친 저들을 다시 궁극적 현실로 끌어 내기 위하여 외친다. 먹고나 살자는 저들에게서 하늘 나라의 비범성이 회복되게 하기 위하여 열정을 가지고 지금 마가복음서를 써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시대의 희망을 버렸을지 모르겠다. 역사에서 소망을 잃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냉소주의에 빠졌는지 모르겠다. 나 자신의 젊은 날을 한낱 추억으로 영원히 버렸는지 모르겠다. 이 교회도 자칫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것을 잃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생에 생명력이 말라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악 - 모든 것을 처형하는 세상의 힘에 압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때”는 오지 않는 것이라고 체념해 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매우 비본질적인 일에만 관심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낙심할 일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일상성 속으로 도망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속에서 때가 찼음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보아내자. 그래서 다시 비범한 부름의 자리에 서자.


[회상 노트] 카이로스 회의

‘한 때 나도 그랬었지! 그러나 지내놓고 보니 그것 모두 쓸데없는 짓이었어. 세상은 으레 그런 것이야.’ 그래서 그렇게 누구나 사는 것과 똑같은 생활을 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수난의 기간이 너무 길다. 투쟁의 터널이 너무 깊다. 모두가 지쳐 있다. 나도 너도 이른바 일상성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그치지 않으나 우리는 옛날처럼 충격을 받지 않는다. 그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혀도 우리는 좀처럼 놀라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이리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했지만 희망은 사라지고 소망의 빛은 오히려 꺼져가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마치 블랙홀에 쓸려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일상성으로 급속하게 복귀한다. 나는 ‘초조해졌다. 포기구나! 좌절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고 있구나’ 어떻게 해야 하나?

성서를 펼쳐 들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성서의 계시는 포기와 좌절의 때가 곧 카이로스라 했다. ‘마지막이다!’라고 주저앉을 때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신다. 그때가 하나님의 때다!

이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신앙이란 포기하지 않는 것이리. 좌절하지 않는 것이리. 절망하지 않는 것이리. 포기와 좌절과 절망은 일상성으로의 복귀다. 그렇다. 중도 포기는 안 된다. 소시민적 성취나 비본질적인 것에의 지나친 집중은 궁극적 가치를 포기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