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소문의 회복
1981년 11월 15일 / 마가복음 1장 21-28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희망이 멀어지고 소망의 빛이 사라져 버리면 누구나 좌절해 버린다. 절망하고 포기해 버린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길은 아니다. 우리는 좌절의 파도, 절망의 골짜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절망하고 포기해 버릴 것인가? 우리에게는예수를 만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이 특권이 우리에게 살아 있는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지난 두 주일의 증언 시간을 통하여 마가복음이 씌어졌던 시대 상황을 살펴 보고 거기에 비추어 우리의 현실을 확인해 보았다. 선하게 살아야 하겠다거나 나라도 독립을 해야 하겠다거나 가난을 극복하여 좀 사람답게 살아야 하겠다는 일체의 소망이 무참하게 무너져 내린 때였다.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병든 자가 나음을 받게 되고 갇힌 자가 해방을 받으며 묶인 자들이 놓임을 받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그 모든 기대가 무너져 버렸다. 가난한 자는 여전히 가난하고 병든 자는 병고에 신음하다가 약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한 채 죽어가고, 갇힌 자의 숫자는 더욱 늘어만 가고, 자유는 오지 않고 모든 면에서 더욱 묶여가는 형편에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좌절은 컸다. 일체의 희망을 잃어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고 있었고 명실공히 국민적 지도자였다. 그를 따르는 자들의 수가 엄청났고 따라서 그의 조직 세력도 굉장히 컸다. 그런데 그마저 무참히 짓밟혀 체포당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실망하고 좌절해 버리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자포자기하여 소위 꿈도 이상도 없는 옛 생활로 되돌아 갔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마가복음은 언제 쓰여졌느냐?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우리의 처지를 돌이켜 보아도 그렇다. 개인적 차원의 형편은 뒤로 미루고 우리 공통의 형편을 우선 살펴보자. 역사적으로도 해방된지 거의 40년이 되어가도 아직껏 정치적 안정조차 이루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안정이라는 것도 어느 특정 정권이 안정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에게는 공산주의를 완전히 극복하여 큰 테두리가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40년 동안 줄곧, 더욱이 근일에 와서는 학생들이 완연히 공산주의화되어 간다 하여 정부가 크게 걱정을 하고 신문에서 큰 기사거리로 다루고 있다. 그와 같은 경향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고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선전하는 것이 학생 운동을 궁지로 몰아넣고 국민과 유리시켜 보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방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반공교육을 국민학교 때부터 시켜 왔는데 우리의 현실은 용공화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면 이거야말로 40년 국민교육의 좌절이 아닐 수 없다. 학생들이 용공화되어 가고 있다는 말은 나라의 큰 테두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말과 같다.
사회적으로도 세상이 너무 경색되어 간다. 언론만큼은 점점 자유로워져서 적어도 해방된 지 40년이 된 지금쯤은 비판하고 견제하고 지지하는 독립 언론의 이상이 어느 정도 실현될 기미가 보여져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소위 ‘참여 언론’ 논리에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이제 언론은 정부의 뜻을 받들어서 정부를 돕고 지지하여 역사를 정부와 함께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이 논리 앞에 이제까지의 언론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와 같은 경향은 어디나 있다. 지금 온 세상에 차 있다.
경제 문제도 너무나 엄청나다. 기업이 요사이처럼 어려운 때가 없었을 것 같다. ‘한국 중공업’의 경우가 이 어려움을 대표하고 있다고 보는데 9월말 현재 빚이 2,077억 원이라 하고 1985년까지 가면 물어야 할 이자가 1,076억 원이어서 빚을 갚을 길이 없어 ‘빚 갚을 빚’을 1,200억 원이나 계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나라가 외국에 진 빚은 9월말 현재 303억 불(21조 2천 1백억 원)로 1년 총살림의 두 배이고 작년보다 30억 불이나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해외 진출 기업들이 현지에서 빌어 쓴 부채는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경제문제는 강대국과의 연관성 속에서 풀어나가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 독립된 상태가 아니다. 최근 어느 기관에서 실시하고 있는 소양교육 시간에 거의 공공연하게 박정희 대통령은 카터가 죽였다고 가르친다는 것이고 죽인 이유는 박 대통령이 민족주의 노선으로 자신의 정치 노선을 수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민족주의가 설 수 없는 형편 속에서 경제적 자립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높은 차원의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자는 것인가? 오히려 개인적 차원의 형편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라고 대부분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 가정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생산성본부의 조사 보고에 따르면 생산성은 올라가고 있는데 실질임금은 줄고 있다. 말하자면 일은 더 열심히 하는데 임금은 실제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가가 올라가고 돈 가치는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해도 1980년부터는 감봉을 당하는 격이다. 올해 상반기만도 임금이 모두 4.6%가 줄어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태여 숫자를 말하지 않아도 직접 경험하고 계실 것이다.
여기저기서 감원의 고통을 겪고 있다. 실업자가 늘고 있다. 집에서 노는 식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직장을 구하려 해도 직장이 없다. 먹고 살 길이 막연한 집이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작은 기업은 작은 기업대로, 큰 기업은 큰 기업대로 모두가 고통을 겪고 있다. 요사이는 툭하면 자살해 버리고, 툭하면 사람을 죽이는 풍토가 생겼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기대하고 기다릴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형편, 가정의 형편이 어렵고 가치관은 혼미해져서 무엇이 선이며 의인가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에 있다. 나라는 나라대로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 하나 버티어 나간다고 하는 것이 큰 일이요 자기 집 먹고 살고 단속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가 아니될 수 없다. 의요 선이요 하는 것을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 일한다는 사람은 무언가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보여지게 된다. 그래서 모두가 제 일에만 몰두하고 모두가 일상성 속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마치 기원후 66년경 모든 선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고 일상성 속으로 좌절해 들어가 버리고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와 같은 형편이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아이구, 어떻게 해서든 먹고나 살자’ 라고 독백하며 일상성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 역사의 문제는 지금 어떠한 처지에 놓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전부가 아니다. 가장 불행하고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의 나라 형편이 어렵다. 평등과 자유가 어느 때보다 멀리 도망쳐 버렸다. 경제적 자립도 너무나 요원해져 버렸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문제의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 시점에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큰 죄다. 희망을 버리는 것 이상의 불신앙이 없다. 지금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누가 감히 결론을 지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하나님 모독이다. 우리 개인의 경우도 그렇다. 물론 어렵고 힘든 곤경에 놓였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가정 생활이 어렵다든지 불화가 있다든지 사업이 극심한 곤경에 처했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포기다. 좌절해 버리는 것이다. 될 대로 되라고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큰 죄다. 희망을 버리는 것 이상의 불신앙이 없다. ‘이제 마지막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마지막을 선언할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원후 66년에 그 극악한 유대 전쟁의 비극을 지금 막 겪고 비극적인 현실에 놓였으나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좌절하고 희망을 버린 것, 그래서 일상성 속으로 도망쳐 버린 것이 문제였다. 더구나 예수에 대한 신앙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조차 그렇게 되어가는 여기에 위기와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마가는 붓을 들어 이 복음서를 쓰기 시작했다. 포기한 이들에게 이 복음서를 주고자 했다. 절망한 이들에게 이 복음서를 읽어 주고자 했다. 요한이 잡혀간 이 때는 절망의 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라는 말씀은 지난 주일 증언에서 드렸다. 그 다음 말씀은 무엇인가? 너희들은 저 가버나움 회당에서 연설하고 가르치고 계몽하시던 예수에 대한 소문을 잊었느냐는 것이다. 그의 말씀에 사람들이 놀랐는데 율법학자들이나 당시의 지도자들 같지 않고 권위가 있었다던 그 예수를 잊었느냐? 여기 권위란 진리를 만났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참 의, 선함을 만나게 되었을 때 빨려들어가는 경험이다. 모든 사람은 예수에게 빨려들 듯 몰입했었다는 말을 듣지 않았느냐? 귀신들린 사람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지 않느냐? 귀신들린 사람 또는 나병환자는 당시에 절망과 포기의 상징이었다. 귀신이 들리거나 나병에 걸리면 좌절치 않을 수 없었다. 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마지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 주심으로 마지막이라 여겨 버렸던 그 시점에서 사람을 구하셨다는 소문을 듣지 않았었느냐는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이 “이게 어찌된 일이냐?”는 둥 “새로운 교훈”이라는 등 찬탄을 했었고 더러운 귀신들려 좌절의 늪에 빠진 사람도, 희망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도 다시 회생시키셨다는 것을 듣지 않았느냐?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와 그 근방에 두루 퍼”지지 않았었느냐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귀신조차 복종시키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회상시켜야 한다. 좌절하고 절망해서는 안 된다.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포기는 죄악이다. 악마의 꼬임이다. 포기해서는 안 되며 포기할 수도 없다. 좌절해서도 안 되며 좌절할 수도 없다. 절망해서도 안 되며 절망할 수도 없다. 귀신들린 사람을 살리신 예수가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 자리에서 좌절치 않으면 예수는 우리를 살리실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자리에서 절망을 걷어내면 예수는 우리를 살리실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자리에서 포기해 버리기를 중지하면 예수는 우리에게 다시 역사의 소망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 그 때는 영원히 명멸해 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이 그때, 카이로스다.
[회상 노트] 카이로스 회의
‘한 때 나도 그랬었지! 그러나 지내놓고 보니 그것 모두 쓸데없는 짓이었어. 세상은 으레 그런 것이야.’ 그래서 그렇게 누구나 사는 것과 똑같은 생활을 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수난의 기간이 너무 길다. 투쟁의 터널이 너무 깊다. 모두가 지쳐 있다. 나도 너도 이른바 일상성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그치지 않으나 우리는 옛날처럼 충격을 받지 않는다. 그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혀도 우리는 좀처럼 놀라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이리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했지만 희망은 사라지고 소망의 빛은 오히려 꺼져가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마치 블랙홀에 쓸려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일상성으로 급속하게 복귀한다. 나는 ‘초조해졌다. 포기구나! 좌절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고 있구나’ 어떻게 해야 하나?
성서를 펼쳐 들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성서의 계시는 포기와 좌절의 때가 곧 카이로스라 했다. ‘마지막이다!’라고 주저앉을 때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신다. 그때가 하나님의 때다!
이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신앙이란 포기하지 않는 것이리. 좌절하지 않는 것이리. 절망하지 않는 것이리. 포기와 좌절과 절망은 일상성으로의 복귀다. 그렇다. 중도 포기는 안 된다. 소시민적 성취나 비본질적인 것에의 지나친 집중은 궁극적 가치를 포기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