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서 4:16-21] 태양이 떠 있는 밤 – 1982년 1월 3일, 김상근 목사

태양이 떠 있는 밤

1982년 1월 3일 / 요한1서 4장 16-21절

김상근 목사


[말씀을 향한 물음]

새해를 맞았다. 새해를 맞는 우리의 처지와 형편은 무엇인가? 이 한 해를 어떤 자세, 어떤 믿음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 해를 살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슬라이드]











[설교 전문]

1982년 임술년 첫 주일 우리가 상고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요한1서 4장 16절 이하의 말씀을 택했다. 요한1서는 편지라 하지만 편지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로마서와 같이 논리정연한 신학적 논술을 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특수한 주제가 있어서 그 주제에 대한 집중적인 말씀을 전개시키고 있지도 않다. 대단히 자유스럽고 분방한 필치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성서는 일종의 ‘명상록’이라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요한1서가 씌어졌던 시대의 배경은 분명하다. 당시 교회 안에 파고 들어왔던 소위 “거짓 선지자”, 혹은 “적그리스도”들이 있었다. 교회 안에 깊숙하게 파고 들어와 있는 이 거짓 기독교를 어떻게 견제하고 내모느냐 하는 일에 교회가 부대꼈던 것이 시대적 배경이다.

기독교 복음이 팔레스틴에서 희랍 문명 세계로 전해져 나가게 되면서 희랍을 중심한 세계에 있었던 이원론적 사상과 혼합이 되어 기독교는 점차 변질되어 갔다. 노스티시즘, 즉 영지주의라 하는 것도 변질된 기독교였다. 그들은 영적인 높은 세계와 물질적인 낮은 세계가 있다고 보았다. 영적 세계는 하나님이 계시고 선한 곳이며 낮은 세계인 물질 세계는 어둡고 악한 곳이라 했다. 또 인간의 혼은 그 속에 하늘의 빛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은 육체라는 물질 세계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육신은 영혼의 감옥이다. 인간의 모든 비극과 불행은 어디서 오게 되느냐? 바로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는 여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땅히 이 어두운 물질 세계 - 육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하늘의 본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라고 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의 본향이 하늘 나라며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요, 외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벗어나서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을 아는 자가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한다.

이렇게 기독교를 해석하여 변질시킨 결과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실제로는 물질 세계에 오실 수가 없다. 그는 영적 존재요 하늘에 속한 존재인데 악한 세상에 오실 수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는 몸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신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영지주의(Gnosticism)의 그리스도론이며 그리스도의 섭리론이라 한다.

이 요한1서가 씌어진 때는 기원후 100년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기원후 100년 이후라면 그리스도인에 대한 갖가지 박해가 태풍처럼 지나쳐간 후이다. 박해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를 위하여, 예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싸우고 죽기를 불사하였다. 우리가 영화에서 흔히 보게 되는 장면들은 대개 이 때의 사건들이다. 예수를 신앙한다는 이유 때문에 옥에 갇히고 원형극장으로 끌려 나가서 사자에게 찢겨 죽게 되기도 하고, 무덤과 무덤을 연결한 지하 공동묘지에서 비밀히 집회를 해야만 했던 시대가 바로 박해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이었다. 그들에게 이 때는 칠흑 같은 밤이 아닐 수 없었다.

기원후 100년 이후라면 이제 그 극성을 떨던 박해는 조금 잠잠하여졌던 때다. 박해가 잠잠하여지면 따라서 약해지는 법이다. 그리고 쉽게 편안한 자리를 찾아 다리를 뻗고 앉아 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상정(常情)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억압과 공포의 복판에 있을 때는 속된 말로 악으로라도 버텼지만, 박해가 조금 시들해진 기원후 100년 이후에는 두려움만 남게 되고 저항의 힘은 완전히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무엇 하나 의지할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박해시대의 그 무서운 일들, 잡혀가고 숨어 살고 사자밥이 되고 쇠고랑을 찼던 일들뿐이었다.

바로 그러한 때 그리스도가 직접 우리에게 오셨던 것이 아니라 오신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섭리론이 퍼졌다. 그들은 두려운 기억들에 덧붙여 그 극심한 박해, 부당하기 짝이 없는 박해, 왜 하나님을 믿는 자가 죽어야 하고 편안히 살 수 없느냐는 회의에 밀리게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셨던 것조차 실재가 아니라는 영지주의의 주장은 그들 -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에게 더없는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패배감의 포로가 되어 있는 그들인데, 그들이 그 칠흑 같은 밤을 버티어 서려면, 그 두려움과 공포를 털어 버리려면 그리스도 신앙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신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가현설(假現說)은 그들의 신앙을 흔들기에 족했다. 그들의 신앙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의지할 것이 없었다. 믿을 데가 없었다. 무섭고 공포스런 세계에 홀로 버려진 것이라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적그리스도요 거짓 예언자는 이렇게 교회를 괴롭혔다.

요한은 가현설이라니 그게 웬말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알았고 또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미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자녀로 삼아 주심으로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 - 그가 너희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 날,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되는 그 날조차도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17절). “하나님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에(18절)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는 여러분은 도대체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확인될 수 있는가? 내가 사랑 가운데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는가? 19절 이하는 이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다.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너희가 서로 아끼고 미워하지 않고 돕고 지낸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 너희가 당면하고 있는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일이요 서로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서로 사랑함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이길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1982년 새해를 맞았다. 우리에게 이 새해는 희망을 주고 있는가? 기쁨을 약속하고 있는가? 기대와 소망을 확약하고 있는가?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거움과 두려움으로 이 해를 시작하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우선 경제적 불안이 극대화되어 있고 이것이 풀려질 가망이 없다. 세계적 경향이라 하지만 우리 나라가 특히 심한 것이 사실이다. 기업인들은 의욕을 잃었고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있다. 일차적으로 먹고 산다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 되어 가고 있다. 벌여 놓은 기업 전망이 이 새해에 들어선 우리를 오히려 두려움으로 몰아넣고 있다. 불가피하게 부도를 낸 기업들도 있고 부인들이 하는 ‘계’가 깨지고 있다. 가게가 안 되어 막대한 손해를 안은 채 문을 닫는다. 이 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정치사회는 연초부터 통금을 푸는 것으로 부드럽게 해보려 하는 반면 비판세력, 반대세력은 용납되지 않고 있다. 소위 제5공화국 벽두에 정의사회, 복지국가, 새 시대, 새 역사 등 온갖 말이 쏟아져 나왔지만 앞으로 어떤 시대가 될 것이냐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말은 ‘여당도 없고 야당도 없는 시대’ 라는 말이다. 이 표현은 완전한 전제주의적 사고다. 왕이 통치를 할 때는 여당도 없고 야당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는 찬성과 반대가 있어야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법이다. 국가는 권력이 상충하는 현장이지 종교단체가 아니다. 51%의 찬성과 49%의 반대가 있는 사회가 민주주의 국가다. 이것이 근원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현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은 우리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주고 있다.

종교의 세계에 선한 것이 없을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오늘의 종교는 세상 풍조를 따라가고 있으며 마치 기업처럼 되어 버렸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를 가리켜 세상 사람들이 “요새 제일 잘되는 장사”라고 말할 지경에 이르렀다. 우후죽순이라는 말이 있지만 우후죽순격으로 세워지는 것이 교회다. ‘세 집 걸러 여관, 두 집 걸러 다방, 한 집 걸러 교회’라는 말이 있다. 교회가 많다는 것을 비판하는 말이지만 그것보다 그 교회가 사회의 성숙에 오히려 역기능을 하고 있다는 비난의 말로 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현실을 곰곰이 뜯어 본다면, 그리고 1981년이 밤이었다 한다면 1982년 새해를 맞았다 하나 여전히 우리는 밤에 있다. 우리에게 1981년에 있었던 두려움이 그대로 있고, 작년의 공포가 역시 그대로 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고 공포가 있고 패배감이 있다면 우리는 밤 같은 새해에 들어선 것이다. 경제적인 밤, 정치적인 밤, 종교적인 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요한1서의 말씀을 경청하자. 지금 적그리스도들은 우리를 오늘의 이 어두운 밤에 홀로 있게 하려 한다. 그래서 다 뿔뿔이 흩어져 각각 저 살겠다고 아비규환을 이루게 하려 한다. 두려움에 빠져 절망케 하려 한다. 의욕을 잃게 하고 용기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평생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최후의 날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되는 심판조차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데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아무리 어둡고 두렵다 하더라도 우리가 절망하여 아무렇게나 살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받쳐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다.

같은 밤에 있다 할지라도 이 밤은 ‘태양이 떠 있는 밤’이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빼내어 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짓이요 거짓 예언자가 우리 가운데 와서 우리를 괴롭히는 결과다. 아무리 밤이라도 이 밤은 태양이 떠 있는 밤이라는 신앙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서로 사랑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다는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다는 데서 확인된다.

1982년 - 이 한 해를 두려움과 공포로 살지 말자.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 온갖 두려움과 공포를 벗어 던지고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이 해를 오히려 축복되게 살 것이다.


[회상 노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 때, 개선될 가능성이 예견되지 않는 때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1982년 새해 첫 설교를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아직도 여전히 캄캄한 밤인데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교인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텐데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공허한 축복소리만을 전할 수는 없다. 예수를 잘 믿으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힘 안 드는 공수표를 남발하는 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

믿음이다! 믿음을 말하려 했던 것 같다. 믿음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교하고자 했다.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 것처럼 믿음은 구체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자 했다.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고자 하고 사랑한다면 믿음 가운데 있는 것이리라.

당신들은 고달파졌지만 행동해 왔고 또 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성령의 특별한 도우심이다. 우리의 성정(性情)으로 어떻게 소외자를 사랑하고 정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일반화된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어떻게 거슬러 갈 수 있겠는가?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라고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과연 그것이 힘이 될 수 있었겠는가? 적어도 나는 그 힘으로 살았다. 그 힘으로 버텼다.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존재의 근거였다. 그것을 떠나 내가 존재할 수 없었다. 사랑이다! 실천이다! 행동이다! 그랬길래 잡혀 다니면서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열어 제낀 문, 그 문은 닫을 수 없는 문이다. 닫아서는 안 된다. 이 해도 가던 길을 가자. 수도교회 교인들도 나와 같은 믿음에 서기를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