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27-33] 예수는 교회를 세우신 일이 없다 – 1997년 6월 8일, 김상근 목사

9월 20, 2026

예수는 교회를 세우신 일이 없다 

마가복음 8장 27-33절 / 낙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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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문]

예수는 ‘교회’를 설교한 적이 없다. 예수의 가르침 어디에도 ‘교회’ 중심적인 사고는 없다. 예수의 가르치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것이 예수의 중심 화두였다. 공관복음서는 똑같이 예수의 첫 설교의 테마가 ‘하나님의 나라’였다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역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다. ‘다스림’, ‘지배’, ‘통치’라는 개념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실 때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으라’, 이렇게 바꾸어 놓으면 전혀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통치를 수용하는 것이다.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즉시, 또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외에 더 필요한 것은 없다.

하나님의 통치를 가르치시고 또 통치적 현실을 몸소 실현하던 예수를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으로, 엘리야로, 또는 예언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드로의 판단은 달랐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확신하였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중요한 두 가지를 담고 있다. 그 하나는 고난의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통치란 수난을 통하여 현실화된다. 강제와 강압과 독재가 아니다. 스스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그 고난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고백자의 결단이다. 베드로는 놀랍게도 수난의 그리스도, 나아가 그를 따르겠다고 고백한 것이다.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은 이 둘을 포함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여기에 다른 것을 첨언했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스도 고백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중요한 고백이 되고 있다. 바로 이 중심적 고백과 “교회를 세우겠다.” 하신 말씀이 연계되어 있다.

여기에 얽힘이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했는데 결과된 것은 ‘교회’이며, 그 교회는 수난의 삶을 거부한다는 모순이 얽혀 있다. 이 말씀의 중심은 수난의 그리스도다. ‘교회’가 아니다. 이 반석 위에다가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은 수난의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바로 이 고백 위에다가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교회’ 의 본질은 ‘수난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교회’라 할 수 없다.

그런데 베드로의 고백에 이어 예수께서 자기가 당할 고난과 배척과 죽임을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동의하지 않았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베드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되 수난 받지 않는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 교회의 한계를 보게 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실현하며, 고난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베드로는 수난을 거부한다. 이것이 현실 교회다. 아니, 현실 교회의 한계라고 규정하기에 앞서, 예수가 그러한 교회를 세우려 하셨던 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대목은 오로지 마태복음에만 있다. 예수께서 ‘교회’를 언급하셨다는 대목은 16장 18절과 18장 17절 두 곳뿐이다. 예수에게는 ‘교회’ 개념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는데 나타난 것은 교회”(Alfred Loisy)다. 그렇다. 예수의 관심은 하나님 의 나라다. ‘교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관심은 전적으로 교회다. 한국 교회 설교의 중심은 교회를 강고하게 하라는 데 집중되어 있다. 교회 중심적이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통치를 수용하기 위한 몸부림보다 가시적인 교회 확장에 더 열성적이다.

낙산교회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우리는 다른가? 우리도 교회 지향적이다. 다만 이른바 대형 교회, 재벌 문화적인 교회, 관료화되고 계급화된 교회, 자체 조직에의 복무를 강제하는 교회를 지양하자고 했을 것이다. 부드럽게 표현하여 지양이지, 사실은 거부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내면적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를 결속시키고 조직화시키는 그 어떤 것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미미한 갈등도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딱히 대형 교회는 아니더라도, 딱히 재벌 문화 교회는 아닐지라도, 계급적 교회는 아닐지라도, 교회를 위한 교회는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있는 허술함, 이 허술함을 보강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겠다는 갈증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는 무교회주의 신앙자들이 세운 교회다. 무교회를 지향해 왔는데 결과는 교회가 된 것이다. 무교회로는 무교회적 신앙이 유지되지 못했다. 그래서 무교회주의 신앙을 유산으로 받은 교회로 귀착했다.

교회를 거부하지만 교회로 가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를 거부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교회의 직제나 성직자의 권위나 교회의 구속을 거부하는 것이다. 옳은 일이다. 도대체 예수께서 오늘과 같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다. 오늘과 같은 교회를 세워 무엇을 하시겠다고 죽임까지 당하셨겠는가? 성직자의 거들먹거림, 재벌화되는 교회, 기업화된 교회, 철저한 자본주의에 지배당하는 교회를 탈출해야 한다. 예수는 교회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추종자들은 결국 교회를 조직한다. 우리도 교회를 지향한다. 무교회! 교회를 거부했던 사람들도 교회를 세웠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나 자신을 특화하고자 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너와 다르다는 차별성을 가지고자 한다는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즉시 집단화한다. 유유상종이다. 유대인들의 게토가 그 대표적인 예다. 교회란 특수 집단이다. 교인들에게는 선민의식이 있다.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이 그 뿌리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민의식을 가졌던 것처럼 교회도 특수한 집단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구약성서나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복음서까지도 특수 집단의 구원의 틀이라는 의식을 담고 있다. ‘좀 다른 사람들’의 집단이어야 한다는 의식이다. 바리새인들도, 에세네파들도 그런 의식을 가졌고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그랬다. 그래서 교회가 생긴 것이다.

교회는 차별적 집단임을 자처한다.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이 구원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 ‘다름’을 보장하고 있다는 데까지는 이르게 된다. 그래서 교회에 속하라 하고 또 교회에 속하고자 한다. 교회란 근본적으로 다름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집단체가 되어 버렸다. 너와 차별되는 나들의 집단이 된 것이다. 죄인이 아닌 의인들이다. 교회라는 공간에 들어오면 그 즉시 그를 ‘성도’라고 부른다. 차별이다. 이런 인센티브를 줌으로써 교회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차별적 집단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예수는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다. 다르다 하는 그들이 구별하는 사람들을 예수는 배척하지 않았다. 이것이 예수의 스캔들이 되었지만 예수는 그랬다. 의롭고 경건하고 순수하다 하는 사람들을 모으려 하지 않았다. 차별적인 사람들이 모인 모임을 교회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차별적인 사람들의 집합일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렇다. 차별화되어야 한다. 그 차별화의 내용이 더 중요하다.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고백이 앞서 있다는 점에서 차별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고백은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고 그것의 실현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고백은 수난의 그리스도 고백이다. 그리스도 고백은 그 그리스도의 수난을 이어가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수난자 예수 그리스도, 고난에의 동참이 신앙의 핵심이다. 이 신앙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 요청에 부응하는 집단을 교회라 해야 할 것이다.

낙산교회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서 다름을 말하지 말자. 훨씬 다른 사람들의 집단임을 자랑하지 말자. 어느 교회나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하자. 교회에 집중하지 말자. 수난의 종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교회가 지향하는 바는 아니다. 수난의 종, 그가 남기신 고난을 이어가자고 결단하자. 교회를 해보자는 것은 아니다. 낙산교회는 오늘,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수난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이어내는 교회로 서자. 낙산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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