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에서 발행한 [십자군]
김재준은 북간도에 있는 은진중학교 교유로 취임한 이후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십자군」이라는 개인 잡지를 발간하였다. 평양신학교 기관지인 「신학지남」은 글을 쓰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 김재준으로서는 자신의 사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1920년대 장도빈의 밑에서 편집 실무를 했던 경험과 「신학지남」의 편집 실무의 경험이 「십자군」의 발행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1]
김재준은 1937년 5월에 「십자군」 창간호(제1권 제1호)를 발행하였다. 1938년 2월에 제2권 1호(통권 6호)를 내고 더 이상 발행할 수가 없었다. 비록 여섯 권이지만 십자군에 실린 글들은 김재준이 처음으로 자신의 사상을 온전하게 표현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편 김재준은 1940년에 단행본 『落穗(낙수)』를 발행하였는데 거기에는 김재준이 「신학지남」과 「십자군」에 발표했던 글의 다수가 실려있다. 따라서 해당 글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는 『落穗(낙수)』와의 비교가 필요하다.[2]
[십자군] 총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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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제1권 제1호] 소화 12년 5월(1937년 5월)
- 不滅(불멸)의 憧憬(동경) 【낙수】
- 신앙생활의 조화 【낙수】
- 沈默(침묵)
- 讀經片感(독경편감) - 전영택
- 단장이편 : 회심, 노래
- 낙수(1) : 聖句冥想拾遺
- 그리스도의 교회 – 로버쯔 박사
- 조선교회를 위한 충고와 기원
- 성자사화 : 성 겔라시어스 【낙수】
- 同情(동정)
[십자군 제1권 제2호] 소화 12년 6월(1937년 6월)
- 비장한 결의 【낙수】
- 損失(손실)과 味知(미지)의 길 – 전영택
- 보-리즈 氏(씨)와 近江兄弟團(근강형제단)
- 주의 발자최 – 추호(秋湖) 전영택
- 소문소감 – 교계소식
- 금후의 대사업은 연합 – 스탄리 쫀스
- 성자사화 : 문둥이의 사도 성 다미엔
- 영원한 고민
[십자군 제1권 제3호] 소화 12년 9월(1937년 9월)
- 신앙의 삼중성
- 移民群(이민군)을 생각하며 – 예레미야의 바빌론 書翰(서한)을 읽음
- 靜思(정사)와 祈願(기원) :
- 위대한 설교(1) : 사랑의 수고 – 스퍼-죤
- 施惠(시혜)의 성자 : 알렉산드리아의 요한과 그 일화 【낙수】
- 맨처음에(창세기 1:1-2:3) - 김재준 신역
- 경건문학 : 어거스틘의 懺悔錄(참회록) - 장공 신역
- 히부리人書演義
- 믿음은 모험한다
[십자군 제1권 제4호] 소화 12년 10월(1937년 10월)
- 신간소개 : 기도의 영력(이엠 빠운즈, 송창근 역)
- 위로의 말슴 : 주님을 쳐다보라
- 제26회 총회소식을 듣고
- 剪燈雜記(전등잡기) :
- 성빈학사의 하로 – 김정준
- 맨처음에(창세기 2:4-25) - 김재준 신역
- 히부리人書演義 (2)
- 경건문학 – 어거스틘의 懺悔錄(참회록) (2) - 장공 신역
- 자선비행사 – 김명혁
- 사서함
[십자군 제1권 제5호] 소화 12년 12월(1937년 12월)
- 어린이설교 : 맨처음 성탄 나무(크리스마스츄리)
- 박사들은 지금도 예수께 절합니다
- 성탄설교 : 『말슴이 육신을 일우어』 - 윌리암 피어슨 메릴 박사
- 금년도의 세계적 대회 에딘바라의 신조와 직제대회 – 편즙실
- 東滿(동만)선교3십주년약사 – 김약연
- 민요의 맹성자 聖 허-베 애화 【낙수】
- 맨처음에(3) - 김재준 신역
- 히부리人書演義 (3)
- 경건문학 – 어거스틘의 懺悔錄(참회록) (3) - 장공 신역
- 종소리 왜 낫는가?(이야기) - 알덴
- 迎新詞(영신사) - 테니슨
- 동방박사의 전설 – 장공
[십자군 제2권 제1호] 소화 13년 2월(1938년 2월)
- 架橋(가교) - 장공
- 본지의 선언
- 선지자적 심정 – 주간 【낙수】
- [설교] 생명의 샘 예수 – R. 레아드 박사
- 그리스도의 향기 – 勇師의 片貌 : 편집실선
- 맨처음에(창세기 4:1-26) - 김재준 신역
- 히부리人書演義 (4)
- 경건문학 – 어거스틘의 懺悔錄(참회록) (4) - 장공 신역
- 소문소감 – 해외교계동정
- D. L. 무디와 그 일화 - 편집실
[십자군]의 의미
해외 유학을 통해 풍부한 신학적 식견을 갖춘 김재준이 1932년 귀국하면서 마주한 조선의 현실은 그의 신학적 사고에 거대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일제 말기의 점증하는 억압적 식민 체제와 이에 편승하거나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조선 교회의 현실은 그의 신학이 더 이상 이론적 사변에 머무를 수 없음을 깨닫게 하였다. 당시 조선 교회는 일제 식민 지배의 현실 속에서 적당히 순응하거나, 외면하여 현실도피를 하거나, 타협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내부적으로는 교권주의와 교리적 경직성에 사로잡혀 초기 선교기의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은 김재준에게 신앙의 순결성과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신학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고 고통스러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그는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현실의 불의에 침묵하는 것을 직무유기로 보았다. 특히 숭인상업학교 재직 시, 『신학지남』을 통한 보수적 교권과의 충돌은 그에게 이론적 신념이 현실의 벽 앞에서 어떻게 시험되고 단련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평양에서의 경험 이후 북간도 은진중학교에서 재직했던 시기는 김재준 사상의 실천적 면모를 더욱 심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단지 교사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지성인의 역할을 넘어, 억압받는 민족의 삶의 현장, 즉 기독교적 민족운동의 현장 실천자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기독교 잡지 『십자군』의 편집인으로서 그는 암울한 시대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민족적 고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십자군』은 당시 청년들과 한국 교회에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으며, 김재준은 지면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더욱 넓게 전파하고 청년들의 행동을 촉구했다. 이 시기는 김재준이 자신의 신학을 단순한 ‘지적ㆍ학문적 사유’ 수준에 머물게 하지 않고, 민중 속에서 숨 쉬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실천하는 신학’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신학이 단순한 ‘자유로운 신학 사유’를 넘어, 실제 공동체적 실천과 역사 변혁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동력으로 진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북간도에서의 그의 활동은 이후 그가 주창할 ‘토착화된 한국 신학’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김재준이 발행한 [십자군] 제1권 제1호 이미지](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i-trOkkbMsZHQPsV60CSx0kXJUCimF1egsaGgopRj-fpajhX9R8SfHNqJz-1rj3XWyylocnxjiWlZIj9kWJUvKg3QE99-v4ELl63rUB0wjXEhWn3Gs3Lx5LXEvuD5cdjWvNNU8hgAsaWKhFDyjsBQtvGQuzN-ZXdvUuTZ6MWrWegeHb5D_udt3KwCbYNZ4/w245-h400/000.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