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빈학사의 하로
김정준
어제 오날 도무지 이틀로 두달동안 가믐을 答[답]한다는 비의 心情[심정]은 자못 야릇하나 퍽도 고마웁니다.
C兄[형]! 나는 이글을 꿈도 꾸지 않았건만 金先生[김선생]님의 거듭하시는 付託[부탁]을 어김보다 不完全[불완전]하게라도 順從[순종]하는 것이 義務[의무]만 같애보여 無能[무능]의 廉恥[염치]를 不願[불원]하고 붓을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C형! 어느 곳, 어느 時代[시대], 어느 사람을 莫論[막론]하고 「貧[빈]」이란 것과는 퍽도 잘못 사괸 것 같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잘못인지 貧[빈]의 잘못인지 알수 없으나 우리부터라도 貧[빈]에 處[처]하기와 貧[빈]을 말하기를 싫어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사람을 싫어하는 「貧[빈]」字[자]를 붙었습니까」하는 疑問[의문]의 글과 「聖貧[성빈]이 자라 聖富[성부]가 되시옵소서」 하는 祝福[축복]을 종종 듣고 보았습니다. 정말 「聖貧[성빈]」이란 新術語[신술어]는 廿世紀[입세기]의 世界的[세계적] 新發見[신발견]도 같이 많은 關心[관심]을 끄을고 있읍니다. 콜롬보쓰의 發見[발견]이 新天新地[신천신지]를 찾어내었다는 것과 같이 宋先生[송선생]님의 「聖貧[성빈]」이란 新述語[신술어]의 發見[발견]의 動機[동기]의 結論[결론]은 「내가 새 하날과 새땅을 보니」하신 사도 요한의 默示[묵시] 一節[1절]을 「艱難[간난]으로 낫다가 艱難[간난]으로 살고 죽음까지 艱難[간난]으로 맞이하는 이 百姓[백성]들에게」 實現[실현]시키고저 하신 것입니다.
C兄[형]! 「幻想[환상]이 없는 百姓[백성]은 亡[망]하니라」 學校査經會時[학교사경회시]에 하시던 宋先生[송선생]님의 뜨거운 付託[부탁]을 아직 記憶[기억]하시겠지요. 先生[선생]님께서도 百姓[백성]을 살리기 爲[위]한 한가지 비-죤이 있었읍니다. 그 비-죤의 具體的[구체적] 實現[실현]이 今日[금일] 聖貧[성빈]이 되었읍니다. 그가 가지고 게시든 幻想[환상]은 한 개 시알로써 日光[일광], 水分[수분], 養分[양분]을 攝取[섭취]하야 말없이 웨침없이 謂[위]함도 勸誘[권유]함을 받음도 없이 이 땅을 淨化[정화]시킬 불꽃과 이 땅을 聖化[성화]시킬 洪水[홍수]를 가진 外弱內强[외약내강], 外無內有[외무내유]의 새싹
으로 地〇[지〇]을 뚫고 올라왔읍니다. 하날의 萬有[만유]와 땅의 萬有[만유]를 連結[연결]시켜 오직 하나로 만들고저 하는 聖勢力[성세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새싹의 出顯[출현]을 우리의 社會[사회]가 强烈[강렬]히 慾求[욕구]했던 것도 아니올습니다. 우리 時代[시대]와 現境[현경]이 이를 苦待[고대]했던 것도 아니겠읍니다.
C兄[형]! 나는 이것을 하나님의 恩寵[은총]이라고 봅니다. 이는 人類[인류]에게 나리우시는 하나님의 恩惠[은혜]이신대 特[특]히 차고 넘치는 空氣[공기]와 물까지 간란하게 마시는 우리 百姓[백성]에게 주신 特別[특별]한 恩寵[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恩惠[은혜]를 받을 資格[자격]이 있다고 거기에만 은혜를 나리우시고 없다고 거기에는 拒絶[거절]하시는 좁은 하나님이 아니시고 주시되 주시지 않는 것 같은 넓고 넘치는 恩寵[은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故[고]로 우리에게 무엇이 있고 苦待[고대]하는 사람이 많아서 구시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本性[본성]이 寬厚[관후]하시어서 비록 한사람이라도 게을르지 않고 求[구]하는 사람의 祈禱[기도]를 보시고 드르시어서 이 堪當[감당]못할 恩寵[은총]을 許諾[허락]했읍니다. 우리는 恩惠[은혜]의 必要[필요]좇아 느끼지 못하것만 하나님께서는 「只今[지금]은 恩惠[은혜]주실 때라”고 하시면서 恩惠[은혜]를 주시지 않고는 견듸지 못하십니다.
C형! 聖貧[성빈]의 內的意味[내적의미]는 너무 豐富[풍부]하옵니다. 안다고 한대야 어느 程度[정도]에까지 및이겠나이까 나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聖貧[성빈]의 하날은 至高[지고]하옵고 聖貧[성빈]의 땅은 至廣[지광]하옵니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은 것」을 可[가]히 測量[측량]할 수 없음은 이는 땅에 붙지 않고 하날에 屬[속]하였기 때문. 땅은 이를 胚胎[배태]할수 없으나 하날은 無難[무난]히 産出[산출]시킵니다. 이는 人間境[인간경]을 超越[초월]한 人間[인간]의 所有[소유]이고 하나님의 掌中[장중]에 있는 人間[인간]이라야 받을 거룩한 「분깃」입니다. 簡單[간단]하게 「마음이 가난한 者[자]는 福[복]이 있나니, 天國[천국]이 저이것이요」하신 主[주]님의 一句[일구]만으로 다 包含[포함]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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釜山[부산]! 이는 港口[항구]이지요 나가고 들어오는 배汽笛[기적]에 배가 불렀다 곺았다하는 港口[항구]입니다. 바다에서 불리는 汽笛[기적]은 山頂住民[산정주민]을 爲[위]하야 부는 것처럼 몬저 山[산]꼭대기를 칩니다. 汽笛[기적]을 몬저 듣는 것이 무슨 자랑인지 이들은 모다 솔포기를 심거야 할 곳에 녹쓸은
洋鐵[양철]집을 세웠습니다. 그 大小[대소]와 色彩[색채]가 아울러 참말 「게딱지」 같은 집이올습니다.
낮이면 戰大地[전대지]에 主人[주인] 잃은 집처름 쓸쓸합니다. 멫멫 아이들의 흙작란 하는 손이 奔走[분주]하겠지만 極[극]히 고요합니다. 좁은 뜰앞에 봉선화, 백일홍이 철따라 자라고 철따라 피건만 맑은 해빛아래 主人[주인]과 같이 우서보지 못하고 그 美態[미태]에 讚辭[찬사]도 들어보지 못하고 시들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밤이면 한집안 食口[식구]라고 한자리에 모혀앉고 한 食卓[식탁]에 둘러앉지만 무엇 때문인지 잘 웃지를 않읍니다. 間或[간혹] 우슴이 있지만 이는 그들의 아달과 딸로 말매암은 所望[소망]의 우슴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제나 「來日[내일]」이란 怪物[괴물]의 防禦策[방어책]을 爲[위]하야 머리를 짭니다. 비록 이마의 주름살이 올랐다 내렸다하는 것이 그의 戰略[전략]을 무던히 智惠[지혜]롭게 索出[색출]하는 것 같지만 結局[결국] 武氣[무기]없는 손이니 防禦陣[방어진]을 벌려놓기도 前[전]에 벌서 自〇[자〇]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아바지는 주름살로 어머니는 한숨으로 倦怠症[권태증]나는 艱難[간난]한 生活[생활]을 끄을고 갑니다. 그들이 하로에 단 一分[1분] 동안도 子息[자식]들에게 關心[관심]을 가질새가 없음은 그들이 奔走[분주]함을 糧食[양식]처럼 먹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어린것들의 우름까지 듣는체 마는체 버리고 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글이야 배우든 안배우든 책보를 끼고단니는 아들, 딸을 둔 집은 그렇게 陰鬱[음울]하지 않고 明朗[명랑]할 때가 많습니다.
「엄마! 오늘 예배당에 가서 창가 배았심더」하는 어린딸의 자랑에 「멋 배앗노? 한번 해바라」하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웃음이 꽃피고 있읍니다.
先生[선생]님에게서 배운 것을 길거리에 단니며 외우지 않고는 견듸지 못하고 그보담 어머니 아부지 앞에 報[보고]告하지 않으면 견듸지 못할 그 어린아이의 純眞[순진]. 그리고 비록 천근[千斤]의 머리를 가지고 萬事[만사]를 貴[귀]치 않게 넉이면서도 아들과 딸의 부리는 재롱을 보고 웃고 기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아버지의 慈愛[자애]. 한번 끌어 안어 보지 않고는 참지 못하는 어머님의 滿足[만족]. 子息[자식]이 어버이를 對[대]해 참지 못하는 不忍性[불인성]. 어버이가 子息[자식]을 對[대]하여서도 木石[목석]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不忍性[불인성].
C兄[형]! 이 不忍性[불인성]과 不忍性[불인성]에 結合[결합]이 되여 한떨기 꽃이 매마른 집안에 피게 됩니다. 이 꽃을 일카라 「우슴꽃」이라해도 過言[과언]이 아니겠지요.
그들의 우슴에도 아모것도 存在[존재]치 않읍니다. 있다고하면 다만 아바지앞에는 아달이 있고 어머니 앞에는 딸이, 子息[자식]들 앞에는 어버이가 있는 것뿐입니다. 그들의 感情[감정]은 子息[자식]으로 말매암아 있었다 없었다 흘렀다 말렀다 합니다.
「이놈아 널랑은 커서...」 그들이 가진 苦役[고역]에 또 羞辱[수욕], 賤待[천대], 蔑視[멸시]로 말매암은 痛憤[통분]의 生活記錄[생활기록]을 한아람 안ㅅ고 어둡게 도라와서 일즉 누어자는 아들을 보나 보선을 김는 딸을 보나 책장을 들추고 있는 아이를 볼때마다.
「이놈아 널랑은 그래도...」 한마듸로 偉大[위대]한 所望[소망]을 가지는 그의 마음은 湖水[호수]처름 고요해져 하로ㅅ일에 疲困[피곤]한 몸을 쉬입니다.
C兄[형]! 自己[자기]의 全所望[전소망]을 둔 子息[자식]이 無識[무식]하다면 亦是[역시] 그 子息[자식]의 生活[생활]도 自己[자기]와 같은 窮乏[궁핍]한 것이 되고 말리라는 어버이的[적] 念慮[염려]가 恒常[항상] 그들을 不安[불안]하게 합니다. 더욱이 자기 아이와 같은 年歲[연세]의 아이가 冊褓[책보]를 끼고 단니는 것을 볼 때 아달의 不幸[불행]을 生覺[생각]키 前[전] 몬저 自己[자기]의 無爲無能[무위무능]을 한스럽게 붓거러워합니다. 그들의 現社會制度等[현사회제도등]의 高級[고급]한 不平[블퍙]을 할 줄 모르나 「이놈의 세상 웨이런가?」하는 疑問[의문]쯤은 누구나 가집니다.
그런데 C형! 釜山港[부산항]이 커지면 커질사록 貧民層[빈민층]은 增加[증가]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독과 사발을 파는 陶器店[도기점]이 좀 景氣[경기]가 좋겠으나 不就學無産兒童[불취학무산아동]의 增加[증가]만은 否認[부인]할 수 없겠읍니다. 「現在[현재]에 府內[부내]에 있는 우리 學齡兒童[학령아동]이 約[약] 三萬[삼만]인데 그 中[중] 就學[취학]이 不過[불과] 萬名內外[만명내외] 그러니 二萬名餘[2만명여]의 兒童[아동]은 집에 가만히 있지 않으면 거리고 도라단닌다고.
이 말을 이곳 日本[일본] 監理敎牧師[감리교목사]에게서 듣고 나는 얼골을 붉힌적이 있었읍니다. 좀더 깊은 悲哀[비애]를 들추어본다면 「배울라니 배울 수 없고 배울 곳이 없는 것」입니다.
聖貧學社[성빈학사]의 첫재로 꼽는 事業[사업]은 至極[지극]히 微微[미미]한 範圍[범위]에서나 다못 한아이라도 배울 수와 배울 곳의 解決[해결]을 지어주자는 것입니다. 수의 解決[해결]을 짓기 爲[위]해 그들에게 授業料[수업료]를 받지 않는 것 곳의 解決[해결]을 지어주기 爲[위]하야 敎會堂[교회당]을 빌려 敎室[교실]을 삼은 것입니다.
現在 無産兒童敎養狀況[무산아동교양상황]을 大略[대략으로 表示[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敎科書[교과서]는 普通學校[보통학교]와 같이 모다 一年級用[일년급용]인대 現在[현재] 二學年程度[2학년정도]도 一級[일급]있읍니다.
다음으로 「施療事業[시료사업]」이라고 해서 現在[현재]는 嬰兒官[영아관]이 있으나 앞으로는 施療機關[시료기관]을 別築[별축]할 計劃[계획]입니다. 그 基地[기지]만은 完全買受[완전매수]하였음을 알외여 드림니다. 다음으로 「人生問題相談[인생문제상담]」 「圖書刊行[도서간행]」이 있는데 前者[전자]는 先生[선생]님께 直接[직접] 들은 바 없고 그렇다고 나의 抽象[추상]을 容納[용납]못할 것이나 다만 한가지 알 수 잇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곰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라」고 해서 그리 極[극]한 過失[과실]은 아닐줄 압니다. 後者[후자]는 보아서 알 수 있는 바대로 圖書刊行[도서간행]입니다. 맨처음으로 「팔려가는 아이」라는 少年文學[소년문학]을 刊行[간행]했었는데 이미 絶版[절판]되였읍니다. 다음으로 「祈禱[기도]의 靈力[영력]」이란 純信仰冊子[순신앙책자]가 나왔습니다. 萬人[만인]이 읽어 有益[유익]하고 恩惠[은혜]로웁겠지만 「說敎者[설교자]와 祈禱[기도]」라는 他名[타명]으로 指導人[지도인]들의 必携[필휴]의 것입니다. 自然[자연]히 알리워질 冊[책]이니 우리는 强勸[강권]을 하지 않읍니다.
다음으로 「聖貧雜誌發行[성빈잡지발행]」입니다. 지난 四月[4월]에 創刊[창간]이 되여 六號[6호]까지 나왔고 只今[지금] 七號編輯[7호편집]에 좀 奔走[분주]하겠습니다. 兄[형]이 이것은 每月[매월] 읽으시니 내 긴말을 하지 않겠읍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빼처 노을 수 없는 事業[사업]은 聖日[성일]에 하는 것입니다. 午前[오전]에는 學社事務室[학사사무실]로 쓰는 九〇半[구〇반]에서 先生[선생]도 벽에 붙고 學生[학생]도 壁[벽]에 붙어 主日學校[주일학교]를 합니다. 聖貧主校[성빈주교]라고 해서 學生[학생]이 五〇名假令[50명가령] 뫃입니다. 그리고 午後[오후]에는 市內[시내]에 있는 敎會重壁靑年男女[교회중벽청년남녀]가 宋先生[송선생]님 무릎과 입을 中心[중심]삼고 「거륵하신 말삼」 때문에 모히고 그 말삼으로 헤여지는 聖經班[성경반]입니다. 여기에 沈着[침착]하여지는 敬虔[경건]한 〇〇氣[〇〇기]와 그 말삼을 通[통]한 恩惠[은혜]의 充滿[충만]은 參與[참여]치 않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簡易聖經學校[간이성경학교]라고 해도 過言[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발서 「갈나듸
아」 「에베소」, 「요한1, 2, 3서」, 「山上垂訓[산상수훈]」 等[등]이 完備[완비]되였읍니다.
C兄[형]! 언제 한번 우리 빠이불 클라쓰에 자리를 같이하여 눈감고 손모하 祈禱[기도]하지 않으시렵니까.
兄[형]! 풋내가 나고 뼈가 없는 文[문]을 長惶[장황]스러히 드림이 罪悚[죄송]서러운 것도 같고 또 紙面[지면]에 對[대]한 不安[불안]도 있고해서 마즈막 한가지만 꼭 말하고 〇筆[〇필]하렵니다.
「大體[대체] 聖貧社[성빈사]의 經營[경영]은 어떻게 하느냐?」 이것이 兄[형]에게는 자못 알고 싶어 하는 것이겠읍니다. 나 역시 兄[형]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花〇[화〇]에 물을 줄랴면 水道[수도]나 샘에 가서 물을 길어오지 않읍니까 그런데 우리 聖貧社[성빈사]의 샘과 水道[수도]는 뚜렸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애써 볼라고 하면 이곳 濠洲宣敎會[호주선교회]의 若干[약간]의 補助[보조]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난한 百姓[백성]을 相對[상대]로 하는 우리 가난한 事業[사업]의 資本[자본]은 亦是[역시] 免[면]치못할 가난입니다. 우리의 舞臺[무대]에서는 가난이 第一[제일] 祝福[축복]받은 것 같습니다. 과부의 한푼이 主[주]님의 稱讚[칭찬]을 받은 그대로 우리는 우리의 큰 힘이고 資本[자본]인 貧[빈]으로 貧業[빈업]을 經營[경영]합니다. 언제나 가진 것 全部[전부]를 드려 남김없이 일을 하게되니 우리에겐 不足[부족]한 것이 없읍니다. 萬一[만일] 이 일을 그만두는 境遇[ 경우]가 있다고 해도 주께서 우리를 〇하지 않을 줄 믿습니다.
C兄[형]! 貧[빈]한 聖貧社[성빈사]에 主[주]의 恩惠[은혜]가 밤사의 도적같이 臨[임]하여 기름지고 潤澤[윤택]하게 함을 感謝[감사]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기다리지도 바라지도 생각지도 않었건만 있어야 하실 것을 주시고 받어야 할 것을 許諾[허락]하시니 「구하기 前[전]에 너이 쓸 것을 미리 아시나니라」 하신 主[주]의 말삼이 眞理[진리]이옵고 世上[세상]에 依支[의지]하고 바랄 이는 하나님뿐인가 하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너이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에 白合花[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를 生覺[생각]하여보아라... 하물며 너이는 더욱 잎이지 아니하시랴?」
우리에게 무슨 祈願[기원]이 있다면 「여호와의 나라와 그 義[의]」가 이 좁고 豊盛[풍성]치 못한 고장에 일우어지시옵소서. 우리에게는 來日[내일]의 念慮[염려]가 없고 오날 하로의 괴롬으로 足[족]하게 녁이나이다 하는 것입니다.
C兄[형]! 이를 爲[위]하야 加〇[가〇]하여주실 義務[의무]가 있음을 잊지 말으시기를 바라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