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14일 수요일

[십자군 제1권 제1호] 信仰生活(신앙생활)의 調和(조화) - 1937년 5월호

信仰生活[신앙생활]의 調和[조화]

金在俊


『김재준 저작전집 제2권』 19-21
『김재준 전집 제1권』 138-142
☞ 붉은 글씨로 표기된 것은 1940년에 간행된 『낙수』와 다르게 표기된 것입니다.
로 표기된 것은 한자표기가 정확하지 않은 것입니다.



混沌[혼돈]한 宇宙[우주]를 품어서 거기서 빛이 생기며 거기서 秩序[질서]가 생기고 法則[법칙]이 서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混沌[혼돈]보다도 秩序[질서]를 願[원]하시며 極端[극단]보다도 調和[조화]를 願[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거스리지 않고 사람의 뜻이 하나님께 怒[노]여움이 되지않으며 사람의 뜻이 自然界[자연계]에 暢達[창달]되고 自然[자연]이 사람에게 順服[순복]하는 世界[세계].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草木禽獸[초목금수]가 



사람에게 順服[순복]하고 사람이 草木禽獸[초목금수]를 愛撫[애무]하던 時節[시절]을 가르처 우리가 樂園生活[낙원생활]이라 말하지 않읍니까? 이것이 곧 大調和[대조화]의 生活[생활]입니다. 調和[조화]는 所謂[소위] 「中立[중립]」이 아니며 「妥協[타협]」도 아닙니다. 調和[조화]는 사랑의 大團圓[대단원]이외다. 「中立[중립]」은 利己的[이기적], 自己中心的[자기중심적]이 될 수도 있으며 妥協[타협]은 不義[불의]에 對[대]한 屈服[굴복]이 될 수도 있으나 調和[조화]는 事爲[사위]를 全的[전적]으로 보아 各異[각이]한 部門[부문]의 活動[활동]과 主張[주장]을 尊重[존중]하면서도 同時[동시]에 한 共同目的[공동목적]을 發見[발견]하게 하며 그 共同目的[공동목적]을 中心[중심]으로 하야 서로 和[화]하게 하는 眞[진]과 愛[애]의 活動[활동]입니다. 나는 우리의 信仰生活[신앙생활]이 너무 極端[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좀더 調和圓熟[조화원숙]한 열매를 매치기를 爲[위]하야 企願[기원]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信仰生活[신앙생활]에는 세 가지 要素[요소]가 있읍니다.첫재는 「敎理[교리]」요, 둘재는 「神秘的靈交[신비적영교]」요, 第三[제삼]은 「社會的實生活[사회적실생활]」입니다. 이 세 가지는 恒常[항상] 있어야 할 것임과 同時[동시]에 또한 서로 調和[조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中[중] 어느 한가지만을 너무 極端[극단]으로 高調[고조]하는 때에는 우리의 信仰生活[신앙생활]에 變態[변태]가 생기는 것이며 따라서 惡魔[악마]에게 



틈탈 機會[기회]를 許[허]하는 것입니다.

爲先[위선] 「敎理[교리]」的[적] 方面[방면]을 생각합시다. 敎理[교리]는 사람의 몸에 比[비]한다면 「骨格[골격]」과 같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의 信仰生活[신앙생활]은 마치 「無骨虫[무골충]」과 같아서 刺戟[자극]받는대로 이리저리 蠢動[준동]하다가 그대로 짓발펴 버릴 것입니다. 우리의 信仰[신앙]에는 智的[지적] 滿足[만족]을 줄 만한 系統[계통]이고 組織化[조직화]한 理論[이론]이 必要[필요]합니다. 그러나 基督敎[기독교]의 敎理[교리]는 決[결]코 어떤 머리 좋은 學者[학자]가 自己[자기]의 생각대로 案頭[안두]에서 推理[추리]하여 얻은 結論[결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啓示[계시]하신 眞理[진리]를 사람이 받아 그 받은 것을 整頓[정돈]하고 組織化[조직화]하는 것이며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無識[무식]한 者[자]나 믿음 弱[약]한 者[자]가 聖經理致[성경이치]를 억지로 풀다가 스사로 滅亡[멸망]에 빠지는』[벧후 3:16] 것을 避[피]하게 하려 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直接[직접] 啓示[계시]한 것이니만치 어느 時代[시대]나 어느 環境[환경]에 局限[국한]될 것이 아니오 萬國[만국] 萬民[만민]에게 언제나 適用[적용]될 絶對[절대]의 道[도]가 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는 信實[신실]하시고 永遠[영원]하신 神[신]이신 까닭입니다. 그의 말슴에는 오직 「아-멘」이 있을 뿐입니다. [고후 1:19] 近者[근자]에 所謂[소위]



「日本神學[일본신학]의 樹立[수립]」이니 「朝鮮神學[조선신학]의 樹立[수립]」이니 하는 것은 「神學[신학]」의 原則上[원칙상] 있을 수 없는 空論[공론]입니다. 적어도 語弊[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啓示[계시]하신 바를 從來[종래]의 諸學者[제학자]들이 옳게 理解[이해]하지 못하였다던가 옳게 整頓[정돈]하지 못하였다던가 또는 옳게 發見[발견]하지 못하였다는 點[점]에서 朝鮮信者[조선신자]가 이 缺陷[결함]을 채울 使命[사명]이 있다고 하는 것이라면 勿論[물론] 크게 硏◯할 必要가 있는 것이겠지요마는 그렇다고 그 發見[발견]한 것이 「日本[일본]」 神學[신학]이나 「朝鮮[조선]」 神學[신학]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께 屬[속]한 것이며 따라서 다만 「神學[신학]」일 것뿐입니다.

敎理[교리]가 우리의 信仰生活[신앙생활] 骨格[골격]이 되는이만치 極[극]히 重要[중요]한 것이지마는 그렇다고 敎理[교리]만으로 信仰生活[신앙생활]이 營爲[영위]되는 것은 아닙니다. 敎理[교리]만을 너무 極端[극단]으로 高調[고조]하는 宗敎[종교]는 마치 病院[병원] 實驗室[실험실]에 세워놓은 白骨[백골]을 보는 것과 같은 無氣味[무기미]한 느낌을 줍니다. 메첸 博士[박사]의 有名[유명]한 著書[저서] 『信仰[신앙]이란 무엇인가?』하는 冊[책]은 基督敎[기독교]의 敎理[교리]를 밝힌 點[점]에 있어서 莫大[막대]한 貢獻[공헌]이라 볼 수 있으나 「信仰[신앙]」을 밝힌 點[점]에 있어서는 部分的[부분적] 價値[가치]밖에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基督敎[기독교] 敎理[교리]는 啓示[계시]받은 것을 整頓[정돈]하는 데에 不過[불과]한 것이라고 하겠지마는 그렇다고 一律的[일률적]으로 機械的[기계적]으로 萬人[만인]이 다 똑같은 信條[신조]를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같은 啓示[계시]에 對[대]해서도 그 解釋[해석]이 같지 않으며 그 價値判斷[가치판단]이 不一[불이]한 까닭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敎理問題[교리문제]는 累千年[누천년] 敎會內[교회내] 分爭[분쟁]의 癌[암]이 되어 온 것이며 지금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敎理問題[교리문제]에 있어서 調和[조화]를 齎來[재래]하려면 結局[결국] 가장 重要[중요]한 敎理[교리], 가장 中樞[중추]되는 信條[신조], 即[즉] 使徒信經[사도신경]과 要理問答[중요문답] (웨스트민스터 告白書[고백서]) 等[등]을 그대로 信奉[신봉]하는 者[자]면 其外[기외]의 聖經解釋[성경해석] 等[등]에는 各其[각기] 自由[자유]를 許[허]하고 彼此[피차] 그 때문에 敎勸[교권]을 發動[발동]식히는 等事[등사]가 없도록 하는 것이 最善[최선]의 調和[조화] 方策[방책]인가 합니다.

나는 以上[이상]에서 敎理[교리]만의 宗敎[종교]는 白骨[백골]과 같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러면 이 白骨[백골]우에 살이 붓고 피가 돌아서 生氣[생기]를 띄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곧 神秘的[신비적] 靈交[영교]입니다. 우리는 깊은 祈禱[기도]와 瞑想[명상]으로 直接[직접] 



하나님과 交通[교통]하는 가운데에서 남못보는 世界[세계]를 보고 또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體驗[체험]임과 同時[동시]에 信仰生活[신앙생활]의 生命[생명]입니다. 敎理[교리]를 말하는 者[자]들은 「神秘主義[신비주의]」라고 하면 덮어놓고 無價値[무가치]한 꿈과 같이 녁이며 或[혹]은 迷惑[미혹]이래서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神祕[신비]한 靈感[영감]가진 信者[신자]를 높여야 하겠읍니다. 이것은 말로 說明[설명]할 수 없으나 生命[생명] 自體[자체]와의 接觸[접촉]을 意味[의미]하는 것인 까닭입니다. 그러치만 이것도 極端[극단]에 흘러 거저 꿈꾸기만 일삼는다면 그것은 큰 弊害[폐해]를 끼칠 것입니다. 神祕[신비]한 가운데 恍惚狀態[황홀상태]에서 異像[이상]을 보는 者[자]는 잘못하면 純然[순연]히 主觀的[주관적] 自己浸淪[자기침륜]에 빠저서 理智[이지]가 感情[감정]을 批判[비판]할 能力[능력]을 잃고 다만 感情[감정]만이 그의 信仰[신앙]을 支配[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自己[자기]의 보고 느낀 世界[세계]가 絶對完全[절대완전]한 것이오 그와 달른 것은 다 거짓이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自己[자기]의 神秘的[신비적] 體驗[체험]에만 맛지 않는 것이면 敎會[교회]의 權威[권위]나 一般信者[일반신자]의 忠告[충고]를 容納[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聖經自體[성경자체]의 權威[권위]까지도 否認[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極端[극단]의 神秘主義[신비주의]는 信仰[신앙]의 無政府狀態[무정부상태]를 齎來[재래]하는 것이며 따라서 結局[결국]은 「虛無[허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이 神祕[신비]한 靈驗[영험]이 豐富[풍부]한 이가 健全[건전], 調和[조화]된 信仰[신앙]을 保持[보지]할 方途[방도]는 무엇입니까? (1) 이런 神祕[신비]한 靈驗[영험]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 個人[개인]에게만 준 恩惠[은혜]인 줄 알고 스사로 간직하야 오직 主[주]와 함께 기뻐할 것이오 決[결]코 一般[일반]에게 자랑하거나 宣傳[선전]하지 말 것이며 (2) 敎會[교회]의 權威[권위]나 聖經[성경]의 權威[권위]에 絶對順服[절대순복]하여 自己[자기]의 본 世界[세계]가 敎會[교회]의 制度[제도]나 聖經[성경]의 敎訓[교훈]에 相違[상위]되는 것을 發見[발견]한 때에는 自己[자기]의 經驗[경험]을 바리고 聖經[성경]에 딸을입니다. 그러나 體驗[체험]이란 것은 제마음대로 버리기는 極[극]히 어려운 것이니까 아주 버리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自己[자기]의 體驗[체험]이 敎會[교회]나 聖經[성경]의 敎訓[교훈] 以上[이상]이라고 宣布[선포]하는 데에는 이르지 말 것입니다.

以上[이상]에 敎理[교리]와 靈驗[영험]의 重要性[중요성]과 그 調和[조화]의 方途[방도]를 말하였거니와 이것만으로는 信仰生活[신앙생활]의 圓熟[원숙]을 期[기]할 수 없읍니다. 사람에게 骨格[골격]이 서고 血肉[혈육]이 움즉이여 산 사람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가증스럽고 게을러서 도모지 일하는 것이 없다면 무슨 意味[의미]가 있겠읍니까? 그와 같이 우리의 信仰[신앙]도 健全[건전]한 敎理[교리]와 神祕[신비]한 靈驗[영험]이 있음과 同時[동시]에 이것이 實生活[실생활]에 나타나지 않으면 結局[결국] 열매 없는 나무 일안하는 「製糞機[제분기]」와 같이 無益[무익]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信者[신자]의 實際生活[실제생활]이란 무엇인가? 「福音宣傳[복음선전]」과 「愛[애]의 實行[실행]」 이 두 가지로 要約[요약]할 수 있다. 이 生活[생활]은 그대로 基督敎[기독교]의 社會的[사회적] 進出[진출]을 意味[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基督敎[기독교]의 「社會的[사회적] 福音[복음]」이라는 主張[주장]과 理論[이론]을 싫여하는 나마지에 敎會[교회]의 社會事業[사회사업] 



全體[전체]를 輕視[경시]하는 者[자]가 많읍니다. 勿論[물론] 우리 힘으로 이 世上[세상]을 天國化[천국화]할 수 있다는 信念[신념]은 妄計[망계]라 안할수 없으나 그 理論[이론]은 何如間[하여간] 實際[실제]에 있어서 우리가 眞正[진정]으로 福音[복음]을 萬人[만인]에게 滲透[삼투]식히려면 또는 우리가 사랑을 「實行[실행]」하려면 이 社會[사회]의 萬般事爲[만반사위]에 直接關係[직접관계]하야 그것을 基督敎的[기독교적] 理想[이상]에 가까운 機關[기관]으로 化[화]하려는 運動[운동]을 일으키지 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가난한 者[자] 病[병]든 者[자]를 사랑하려면 自然[자연] 그들을 救濟[구제]할 社會的[사회적] 施設[시설]을 要[요]하는 것이며 各樣[각양] 職業[직업]에 從事[종사]하는 사람에게 福音[복음]을 傳[전]하려면 그이들의 日常生活[일상생활]에 直接關係[직접관계]되는 事業機關[사업기관]을 提供[제공]하지 않고는 될 수 없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基督敎[기독교] 社會事業[사회사업]에 從事[종사]하는 이들은 그 環境[환경]이 너무나 物質的[물질적]으로 悲慘[비참]하니만치 그 사람들의 物質的[물질적] 生活[생활]을 좀더 改善[개선]하려는 데에만 汲汲[급급]하야 社會制度[사회제도]의 改革[개혁]만을 생각하고 祈禱[기도]도 군소리다 敎理[교리]도 抽象的[추상적] 遊戱[유희]다? 



다만 빵 問題[문제]의 解決[해결]을 爲[위]한 實際的[실제적] 勞力[노력]이 時急[시급]할 것뿐이다 하고 웨치는 일이 많읍니다.

이것은 勿論[물론] 極端[극단]의 主張[주장]입니다. 그러므로 基督敎[기독교] 社會事業[사회사업]에 從事[종사]하는 이들은 實際運動[실제운동]이 그 本務[본무]니만치 敎理的[교리적]으로 무슨 獨立[독립]된 理論[이론]과 體系[체계]를 세우려는 徒勞[도로]를 避[피]하고 一般[일반]의 信俸[신봉]하는 敎理[교리]를 尊重[존중]할 것이며 그 事業[사업]이 計劃[계획]과 努力[노력]을 要[요]하는 것이니만치 그것을 主[주]님의 뜻대로 運轉[운전]할 수 있는 靈力[영력], 사랑의 偉大[위대]한 心情[심정]을 培養[배양]하기 위하야 더욱 祈禱[기도]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朝鮮[조선] 敎會[교회]의 平和[평화]와 團結[단결]을 爲[위]하야 爲先[위선] 理想的[이상적]으로 이 調和[조화]된 信仰生活[신앙생활]에 置重[치중]하기를 祈願[기원]하며 彼此[피차] 尊敬[존경]과 理解[이해]로 主[주]안에서 한 兄弟[형제]된 誼分[의분]을 宣揚[선양]하여지이다고 비는 바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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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30년대 김재준의 신학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 신앙생활의 세 가지 요소(교리, 신비적 영교, 사회적 실생활)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서로 조화가 되어야 올바른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별히 여기에서는 ‘교리’에 대한 김재준의 기본적인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교리’는 신앙생활의 골격을 이루는 것으로 상당히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언급한다. 김재준이 가장 기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교리는 ‘사도신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고 언급하면서, 그것에 바탕을 둔다면 성경해석에 자유를 허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교리만의 종교에 생기를 띄게 하는 것은 ‘신비적 영교’이지만, 이것만 강조되어 극단적 신비주의에 빠지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고 보았다.

김재준 신학에서 독특한 것은 건전한 신학과 신비한 영험이 신자의 실제 생활에 드러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신자의 실제생활은 ‘복음선전’과 ‘사랑의 실행’이고 이것은 사회적 복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을 위해서 기독교의 기관은 사회사업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중간에 ‘일본신학’과 ‘조선신학’을 비교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1940년에 단행본으로 발간된 『낙수』에는 누락되어 있다. 아마도 당시가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일제말기에 일본과 조선을 구분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문단을 삭제한 것일지도 모른다. 

[범용기 제1권] (86) 간도 3년 - 어머님 가시다

어머님 가시다 1936년 여름, 어머니는 즐거우셨다. 헤어졌던 아들, 손자, 며누리 [1] , 옛집에 다시 모여 오손도손 옛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등불 심지 돋우며 밤 새워도 끝안나는 죄 없는 『까십』 보구 [2] 싶어 애타던 지나간 긴 세월도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