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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14일 수요일

백낙준 박사의 교회사관 : 선교사관

백낙준 박사의 ‘宣敎史觀’(선교사관)


한국 기독교(개신교) 역사를 일정한 사관을 갖고 전체적으로 개괄하면서 정리한 첫 번째 학자로 백낙준(白樂濬) 박사를 꼽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를 한국 기독교사 연구의 태두(泰斗)란 칭호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927년 예일대학교 철학박사 학위 논문으로 “The History of Protestant Msiions in Korea, 1832-1910”를 제출하였다. 이 논문을 지도한 미국 교회사가 라투레트(K. S. Latourette)의 말처럼,

“그는 서양사학가의 방법응용에 능숙할만한 훈련을 받았으므로 지구력을 가지고 자료를 수색 모집하였고, 그 자료의 비판과 해석에는 객관성을 견지할 줄 아는 기술을 소유하였다.” 【白樂濬, 『韓國改新敎史』(연세대학교출판부, 1973), iv(서문).】

방대한 자료, 이에 대한 객관적 분석에 충실하고자 노력한 백낙준 박사의 노작은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 출발점을 이루었다... 백낙준 박사의 『한국개신교사』는 그의 주장처럼 선교사관(宣敎史觀)이란 한국 기독교 첫 사관을 정립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基督敎史는 그 본질에서 宣敎史다. 또한 반드시 宣敎史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基督敎史上의 한 중간적 존재이다. 우리 주님이 죽으심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만 존재하게 되어있다(고전 11:26). 이 중간적 存在體인 교회의 철두철미한 사명은 복음선포이다. 基督敎史는 自初至今에 宣敎史로 일관되어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우리 韓國改新敎史도 宣敎史가 되어야 한다. 宣敎史를 外人 선교사에 의한 피선교의 과정으로 해석하여서만은 아니된다. 기독교 2천년사에서 교회의 興衰는 교회에서 행한 전도활동의 消長에 있었고, 전도활동의 消長은 신도들의 信仰虛實에 좌우되어 왔다. 전도는 교회의 지상명령이다.”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v-vii.】


백낙준 박사의 선교사관의 한계


그가 비록 “선교사를 외인 선교사에 의한 피선교의 과정으로 해석하여서만은 아니된다”고 경계하고는 있지만 그가 말하는 한국 기독교사의 맥은 한국 바깥의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복음을 수용한 한국인들의 ‘전도’ 활동이 언급은 되겠지만 그것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사의 초점이 한국 ‘바깥’에 맞추어질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곧 한국 기독교 역사의 실질적 주역이었던 한국인들의 신앙적 체험과 고백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해석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다음과 같은 민경배(閔庚培) 교수의 지적은 타당한 면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 선교사(宣敎史)는 저자 자신이 시인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기독교 선교의 확장 역사이며, 따라서 관심의 테두리나 사료의 대부분이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의 교회와 인사들에게서 수집되었다고 하는 일방성을 가진다. 한국 교회쪽의 고백과 증언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못한 것이다.” 【閔庚培, 『韓國基督敎會史(改訂版)』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20.】

엄밀한 의미에서 선교사관은 백낙준 박사 한 개인의 사관으로 끝나버린 아쉬움이 있다. 그가제시한 사관에 의해 기독교사를 연구하고 서술하는 공동체적인 학파가 창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책의 속편에 해당될 1910년 이후의 기독교사를 정리해주지 못한 백낙준 박사에게도 아쉬움을 느낀다.


“한국교회 쪽의고백과 증언”을 정리하려는 시도


토마스 목사의 순교 사적지를 발굴하고 그와 관련된 한국측 자료 수집에 심혈을 기울였던 오문환(吳文煥), 시인으로 한국 기독교 여성사를 포함시켜 『조선기독교 50년사화』(1934)를 저술했던 장정심(張貞心), 탐문과 문헌자료를 통해 “조선기독교발전사”를 신문에 연재(1938)했던 채필근(蔡弼近) 등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같은 한국교회 ‘안쪽’에서 자료를 찾아 그것을 바탕으로 기독교사를 서술하려는 노력은 해방 후 김양선(金良善) 목사에게 이어졌다. 일반 한국사, 특히 고고학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던 그는 이북에서 수집한 상당수의 귀중한 기독교 관계 사료들을 해방직후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서울로 무사히 옮겼으며 6ㆍ25 사변 중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여 그 자료들을 보관하여 오늘의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의 기본 자료가 되게 하였다. 그가 수집한 귀중한 자료들이 오늘에도 한국 기독교사 연구의 기초 자료로 이용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자료 축적의 과정을 거쳐 그는 “한글성서번역사”를 『성서한국』에 연재하였고(1955) 초기 성경 번역과 문서사업에 관한 비중있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그에게서 한국 기독교 통사가 나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다만 해방 이후의 혼란기 기독교 역사를 직접 체험한 후 비교적 자료 제공에 충실을 기하며 저술한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1958)와 고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펴낸 『한국문화사대계』에 수록된 “한국 기독교사(二) 개신교사”(1970), 그리고 그의 사후에 단편적인 논문들을 모아 편집되어 간행된 『한국기독교사연구』(1971) 등이 있어 그의 기독교사 연구 실적을 증언해 주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기독교의 역사 1(개정판)』 (서울: 기독교문사, 2011), 6-10.

십자군 제2권 제1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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