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부터 1935년까지 [신학지남]에서 만우 송창근과 장공 김재준의 활약 - [신학지남] 목차 수록

신학지남에 송창근과 김재준이 합류하게 된 배경


1927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평양신학교 신약교수로 취임한 남궁혁 박사가 1928년에 「신학지남」의 편집인이 되면서 「신학지남(神學指南)」은 새로운 변신을 도모하였다. 1918년 평양신학교 기관지로 창간된 「신학지남」[1]은 당시 장로교 신학을 대변하는 잡지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기관지였다.[2] 

남궁혁은 신학교 교수들과 在外 선교사들 이외의 본국인 정규 기고자를 보강하였다. 이때 일본에서 철학을 연구한 숭실전문학교 교수 채필근 목사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산정현교회 박형룡 전도사가 집필진에 합류하게 되었다.[3] 남궁혁 박사는 이후 보다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 1933년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송창근과 김재준을 정규 기고자로 초청하였다.[4] 나아가 남궁혁은 김재준에게 「신학지남」의 편집 실무를 맡겼다.[5]

김재준은 「신학지남」의 편집 실무를 맡으면서 「신학지남」의 1933년 5월호(제15권 제3호)부터 1935년 5월호(제17권 제3호)까지 글을 게재하였다.[6]

미국 유학시절 장공 김재준과 만우 송창근


신학지남 목차 : 1933년 1월호부터 1935년 5월호까지


「신학지남」에 실린 김재준의 글들을 살펴보려면 당시 함께 실렸던 글들과 비교해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당시 편집 실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김재준은 자신의 글 이외에 함께 실린 다른 글들도 살펴보았을 것이고, 적절한 시기에 필요하다고 판단한 글을 기고했을 것이다. 「신학지남」에 수록된 김재준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글이 어떤 글들과 함께 발표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제15권 제1호] 1933년 1월호

  • 도끼날 잃은 일군 / 남궁혁
  • 예수는 개인전도자의 모범 / 이눌서
  • 예수와 민주주의 / H. Cotton
  • 가서 제자삼으라(상) / 스미스저ㆍ이눌서역
  • 미로에 방황하는 자유주의 신도에게 / 채필근
  • 현사상의 역사적 배경(속) / 박형용
  • 기독교의 윤리문제 / 송창근
  • 야곱 베-메의 신비도 / 강흥수
  • 천문강요 / 이성휘
  • 만국주일 공과 / 어도만
  • 에레미야서강의(속) / 박형룡


[제15권 제2호] 1933년 3월호

  • 진의와 허의 / 남궁혁
  • 가서 제자삼으라 / 스미스
  • 반신학적 경향 / 박형룡
  • 신앙의 실재화 / 채필근
  • 천문강요 / 이성휘
  • 추도량 목사 / 편집인
  • 주일학교 선생에게 / 곽안련
  • 주일공과 / 어도만
  • 로마서 강해 / 남궁혁
  • 빌립보 강해 / 남궁혁
  • 베드로후서 강해 / 나부열


[제15권 제3호] 1933년 5월호

  • 바울의 생활관 / 남궁혁
  • 관념의 신, 실존의 신 / 스미스
  • 부흥회의 障害(장해) / 이눌서
  • 진리를 말하는 사도 / 채필근
  • 욥기에 현한 영혼불멸 / 김재준
  • 성령과 교역자 / 고려위
  • 천문 講臺(강대) / 이성휘
  • 隨想(수상) / 강흥수
  • 기독교회의 사회約條(조약) / 한경직
  • 주일학교 선생에게 / 곽안련
  • 로마서강해 / 남궁혁
  • 빌립보강해 / 남궁혁
  • 베드로후서 강해 / 나부열


[제15권 제4호] 1933년 7월호

  • 기독관에 대한 역대의 이단 / 남궁혁
  • 바른 말을 하여 책망할 것이 없게 하라 / 이눌서
  • 조선기독교와 교회운동 / 정인과
  • 正信(정신)과 迷信(미신) / 채필근
  • 신학자와 설교가 / 송창근
  • 천문강대 / 이성휘
  • 소년성경학원방문기 / 일기자
  • 주일학교 선생에게 / 곽안련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빌립보강해 / 남궁혁
  • 로마서강해 / 남궁혁
  • 베드로후서강해 / 나부열


[제15권 제5호] 1933년 9월호

  • 그리스도를 평범한 생애에서 봉사하자 / 남궁혁
  • 종교학이란 무엇인가 / 채필근
  • 창조론주의와 진화론 / 이눌서
  • 그리스도의 愛慕(애모) / 송창근
  • 전기적으로 본 예레미야의 내면생활 / 김재준
  • 기독교와 노예 / 김택민
  • 성 프란시스 교단 생활기 / K 생
  • 주일학교 선생에게 / 곽안련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로마서 강해 / 남궁혁
  • 아가서 강해 / 남궁혁
  • 베드로후서 강해 / 나부열


[제15권 제6호] 1933년 11월호

  • 신비적 속죄론 / 박형룡
  • 인간이상의 합치점에 서신 예수 / 채필근
  • 창조주의자와 진화주의자가 합의할 수 있느냐? / 이눌서
  • 오늘 조선교회의 사명 / 송창근
  • 巡禮(순례)의 讚歌(찬가) : 시편 제84편 
  • 옥스퍼드그룹의 의의와 그 활동 / W. F. 로렌스
  • 그리스도의 애모 / 송창근
  • 아모스의 생애와 그 예언 / 김재준
  • 靜思 二三(정사이삼) / 장공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평양노회목사 가족 구제부 證券案(증권안) 실시에 대하여 / 곽안련
  • 로마인서 강해 / 남궁혁
  • 베드로후서 강해 / 나부열
  • 아가서 강해 / 이성휘


[제16권 제1호] 1934년 1월호

  • 정화운동의 필요 / 남궁혁
  • 신비적 속죄론(續) / 박형룡
  • 완전한 성년창조 / 이눌서
  • 어거스틴의 ‘신의 존재한 증명’에 대하여 / 채필근
  • 유혹(三) / 송창근
  • 仰慕(앙모)의 至情(지정) 시편 제42:43 / 편집인
  •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 / 김재준
  • 그리스도의 애모 / 송창근 
  • 에스겔 전편강도 / 곽안련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만세반석열리니 – 그 작자와 그 감화 / 장공
  • 지도자의 필요한 성격 / 곽안련
  • 로마인서 강해(完) / 남궁혁
  • 베드로후서 강해 / 나부열
  • 아가서 강해 / 이성휘


[제16권 제2호] 1934년 3월호

  • 일심단합 / 남궁혁
  • 스웨덴붉과 신예루살렘 교회 / 박형룡
  • 독일 나치쓰와 신교통일문제 / 채필근
  • 조선교인의 신앙을 논하여 성경적 신앙에 及함 / 송창근
  • ‘流謫(유적)의 원한’ 시편 제백삼십칠 / 편집인
  • 마음의 거문고(강도) / 곽안련
  • 강도도형[7] / 편집인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부활주일강도 / 곽안련
  • 변치 않는 설교제목 / 장공
  • 일터로 가는 이들 : 일인일언 / 곽안련
  • 갈라디아인서 강해(일) / 남궁혁
  • 바라보는 마음과 바라는 마음 / 장공
  • 베드로후서 강해 / 라부열
  • 聖(성)어거스틴의 기도
  • 아가서 강해 / 이성휘


[제16권 제3호】 1934년 5월호

  • 아동예배와 교회 당국자의 책무 / 남궁혁
  • 스웨덴붉과 신예루살렘교회 / 박형룡
  • 교회란 무엇인가 / 채필근
  • 조선기독교의 위기 / 송창근
  • 새 양심의 창조 / 김재준
  • 그리스도의 애모 / 송창근
  • 이상적 어머니(母주일 설교) / 곽안련
  • 인생과 종교 / 강윤림
  • 靈西亞(영서아)의 종교 / 편집인
  • 酒魔(주마)박멸론 / 백해수
  • 깨보이는 마음, 깨보는 마음 / 장공
  • 교회건물의 화재보험에 대하여 / 곽안련
  • 갈라디아인서 강해 / 남궁혁
  • 베드로후서 강해 / 남궁혁
  • 아가서 강해 / 이성휘


[제16권 제4호] 1934년 7월호

  • 칼빈신학과 현대 생활 / 남궁혁
  • 요한 칼빈의 일생 / 송창근
  • 칼빈의 예정론 / 박형룡
  • 칼빈의 교회관과 교회 정책 / 채필근
  • 칼빈신학과 그 감화 / 이눌서
  • 예정신학에서 예정신앙에 / 송창근
  • 성서해석가로 본 칼빈 / 나부열
  • 강단의 칼빈 / 곽안련
  • 핍박 / 요한 칼빈 – 장공 역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여름실과 / 곽안련
  • 아가 강해 / 이성휘 


[제16권 제5호] 1934년 9월호

  • 조선교회의 과거 오십년을 회고하면서 / 남궁혁
  • 원두우 목사의 생애와 그 사업 / 백낙준
  • 亞扁薛羅(아편설라) 목사의 생애와 그 사업 / 아펜실라孃
  • 마포삼열 목사의 생애와 그 사업 / 나부열
  • 스웨덴붉과 신예루살렘교회 / 박형룡
  • 나의 체험하는 신 / 채필근
  • 진화론을 부인하는 諸(제)사실 / 이눌서
  • 그리스도의 애모 / 송창근
  • 복음적 설교 / 김인준
  • 그리스도의 죽음 / 박형룡
  • 청년의 최고 이상 / 곽안련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강도도형 / 곽안련
  • 갈라디아인서 강해 / 남궁혁
  • 아가서강해 / 이성휘 


[제16권 제6호] 1934년 11월호

  • 양심생활 / 남궁혁
  • 기독교의 贖罪(속죄)사업은 창조적 집대성 / 채필근
  • 속죄일과 희년과의 관계 / 권찬영
  • 신경의 직조화 / 스미스저, 이눌서역
  • 실재의 탐구(전도서를 읽음) / 김재준
  • 그리스도의 애모 / 송창근 신역
  • 만국전도순방기 / 권태의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갈라디아인서 강해(五)


[제17권 제1호] 1935년 1월호

  • 권두언 : 自覺ㆍ停頓ㆍ建設(자각ㆍ정돈ㆍ건설)
  • 새해의 첫 표어 / 남궁혁
  • 새생활의 전제 / 송창근
  • 초대 교회의 특색 조선교회진흥론(기일) / 김화식
  • 죄와 성 / 채필근
  • 그리스도의 보혈 / 이눌서
  • 성서와 인류 / 최지화
  • 그리스도의 애모(신역) / 송창근
  • 뿍맨 운동과 그 비판 / 김재준
  • 성화(설교) / 곽안련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갈라디아인서 강해 / 남궁혁
  • 교회건축과 인간건축 / 편집실
  • 요한일서 강해 / 나부열
  • 아가서 강해 / 이성휘


[제17권 제2호] 1935년 3월호

  • 일 하러 가자 / 남궁혁
  • 영국 웨일스, 인도, 조선삼처의 부흥連結(연결) / 이눌서
  •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는 악마의 유혹 / 채필근
  • 신앙과 행위의 교량 / 김화식
  • 復活祭日(부활제일)의 아침 / 편집자 - 장공
  •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연구 / 김재준
  • 부활당일의 주님의 현현(설교) / 곽안련
  • 고한경희목사의 순교를 조함 / 이학인
  • 강도도형 / 곽안련
  • 목사의 사생활론 / 송창근
  • 졸업생 제군에게 주는 선배들의 고백과 부탁 / 편집실
  • 진정한 설교 / 뿌리-드
  • 갈라디아인서 강해 / 남궁혁
  • 요한일서 강해 / 나부열
  • 아가서 강해 / 이성휘


[제17권 제3호] 1935년 5월호

  • 교회의 병과 그 성서적 치료방법 / 이눌서
  • 교회의 부흥 / 채필근
  • 로마인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 남궁혁
  • 예루살렘의 종교회의와 바울 / 김화식
  • 바울의 신앙경험과 기독교의 사상적 부흥 / 이학봉
  • 감격의 생활 / 송창근
  • 주기도묵상 / 나부열
  • 위대한 終結(종결) / 김재준
  • 독서(문화운동에 대하여) / 곽안련
  • 강도도형 / 곽안련
  • 만국주일공과 / 어도만
  • 포도원 허는 작은 여우(어린이주일설교) / 곽안련
  • 갈라디아인서 강해 / 남궁혁
  • 요한일서 강해 / 나부열
  • 아가서 강해 / 이성휘

[신학지남]에서 김재준과 송창근의 역할과 의미


김재준과 송창근의 글의 특징


김재준과 송창근이 「신학지남」에 기고한 글을 보면, 김재준이 ‘성서’에 대한 글을 집중적으로 올린 반면, 송창근은 ‘교회’에 대한 글을 집중적으로 올렸다고 볼 수 있다. 김재준 입장에서 송창근의 ‘교회론’에 동의하고 있었기에 따로 교회에 대한 글을 올리지 않았으며, 반대로 송창근의 입장에서 김재준의 ‘성서관’에 동의하고 있었기에 따로 성서에 대한 글을 올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한경직이 적극적으로 글을 기고했더라면 성서에 대한 글 중에서 신약에 대한 내용이 보다 풍부하고 다양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박형룡의 입장과 김재준의 입장


박형룡의 입장에서 자유주의자인 김재준과 송창근은 1935년 5월호를 마지막으로, 채필근은 1935년 9월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신학지남」에 글을 기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 박형룡 본인도 밝혔듯이 줄기차게 문제제기를 한 성과였다. 박형룡의 입장에서 본다면 변증학을 선택했기 때문에 어떤 것을 진리라고 인식하고 그것을 변호하고 수호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8] 그렇기 때문에 그 진리의 기준에 김재준의 글이 맞지 않았음을 인식한 순간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김재준의 글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했던 것이다.[9] 반면 김재준의 입장에서는 성서신학에서의 다양한 비평은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더욱 진리답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역사적 비평을 통해서 성서를 더욱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진리에 한 걸음 더 나아간다고 본 것이다.[10] 

김재준 글의 특징


김재준의 글쓰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는 신앙을 바탕으로 글을 쓴 것이다. 그는 복음의 자유를 침해하여 교리의 문제를 가지고 ‘이단 재판’을 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라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복음의 자유’ 개념은 곧바로 ‘양심의 자유’ 개념과 통한다.[11] 그는 이러한 양심의 자유의 기반 속에서 글을 썼고, 그가 쓴 글에 대해서는 무한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의 글이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는 것은 단지 현학적으로 자신의 글쓰기 기술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을 치열하게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는 언행일치를 뛰어넘어 ‘문행일치’를 위해 노력한 학자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자연스럽게 도덕적 행동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김재준의 문장력은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에서도 인정할만한 수준이었다.[12] 김재준이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은 인간적인 고민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말하려고 한 노력이었다.[13] 또한 이 논문의 연구방법은 역사비평학이었다. 성서 본문을 역사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살펴보고 설명하고자 애썼다.[14] 이것은 당시 한국 장로교의 주류 세력인 근본주의자들의 성서 해석방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글이었다.[15]
그러나 어떤 신학자의 입장을 그의 글에서 파악하기에는 실제로 그 신학자가 쓴 글을 우선적으로 주의 깊게 읽는 독서가 필요하다. 김재준의 글을 선입견 없이 읽어보았을 때 그가 ‘성경파괴자’이고 기독교 신앙을 해치기 위한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16] 오히려 박형룡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든 글은 김재준의 글이라기보다는 송창근의 글이었다. 그리고 채필근 역시 박형룡의 입장에서 자유주의자로 인식되었지만 그의 글에는 전혀 자유주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중도에서 조금 보수쪽으로 기울어진 글을 많이 발표하였다.

[신학지남]의 신학적 수준 향상에 기여


「신학지남」 전체를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김재준과 송창근이 기고하던 시절의 「신학지남」은 보다 내용이 다양하고 풍부했다고 본다. 김재준은 박형룡의 글에서 착안하여 ‘뿍맨 운동’에 대한 글을 기고하였다. 박형룡 역시 김재준이나 송창근을 의식하고 자신의 글을 보다 설득력이 있게 다듬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김재준으로서는 신학지남에 다양한 양식의 글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유학 시절에 배운 신학을 실제 현장에서 실험적으로 적용하는 시기를 가졌던 것이다. 학문으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실제 현장 속에 조금 더 깊고 넓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형룡으로서는 아쉽게도 박사학위를 받을 때의 신학적 입장에서 이후 한국의 교계의 교권 다툼 속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서 학문적으로는 후퇴한 것이다. 진보적 신학이건 보수적 신학이건 과거의 모습보다는 조금 나아진 현재가 되어야 하고 현재보다는 더 나아진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하지만 그런 점에서 박형룡과 보수 신학은 한동안 제자리 걸음과 후퇴를 보여준 것이다.[17] 이것은 자신이 배운 신학을 계속적으로 단련시키고 훈련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박형룡으로서는 교권의 헤게모니 싸움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음으로 교세의 차원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신학의 차원에서는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다.



[각주]
1. 홍치모,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의 신학지남의 역할,” 「신학지남」, 제254호 (1998.3): 24-26. 「신학지남」의 영문 표기는 「The Theological Review, A Theological and Homiletic Quarterly」로 되어 있다. 신학지남은 신학적이며 설교학적 계간지로서 그 본래적인 성격과 내용은 신학의 실제적인 면을 다루는 실천신학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7회 회의록에는 「신학지남」 제1권 제2호가 2500부가 팔렸다고 전한다. 참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회 회록』(1918.9), 25쪽. 한편 1928년 남궁혁이 편집책임을 맡으면서 영문 표기는 “The Theological Review”로 바뀌었으며, 이 시기에 신학지남이 초기에 지켜왔던 실천신학 분야가 약화되는 인상을 주었다.
2. 이호우, “1930년대의 성서관 논쟁과 신학적 패러다임의 형성,” 79. 1916년에 감리교 신학교에 「신학세계」 창간호에 양주삼 목사의 구약에 대한 고등비평이 실리기 시작했다. 반면에 1918년 평양 장로교신학교에서 출판하기 시작한 「신학지남」은 성경에 대한 일체의 비평을 용납하지 않았다.
3. 박형룡 박사는 이후 1930년에 평양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박형룡의 입장에서 채필근 목사는 자유주의자였지만 온건한 자유주의자로서 자유주의와 정통주의의 평화공존을 주장하는 정도였다고 보았다. 참고. 채필근, “迷路에 彷徨하는 自由主義信徒에게,” 「신학지남」 제15권 제1호 (1933년 1월호): 24-28.
4. 송창근은 「신학지남」 제15권 제1호(1933년 1월호)에 “기독교의 윤리문제”라는 글을 처음 기고하였다.
5. 홍치모,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의 신학지남의 역할,” 32. 남궁혁은 김재준 목사를 평양신학교 교수로 초빙하려고 직접 혹은 간접으로 여러 번 시도하였지만 평양신학교의 선교사 교수들은 김재준 목사의 신학배경이 자유주의적이라는 이유에서 거절하였다고 한다.
6. 김재준은 「신학지남」에 ‘김재준’, ‘장공’, ‘편집인’ 등의 필명으로 게재하였다.
7. 홍치모,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의 신학지남의 역할,” 「신학지남」 제254호 (1998.3): 26-27. ‘강도도형(講道圖形)’이라는 말은 설교계획(Sermon plan) 또는 요약설교(Sermon Outline)을 의미한다. 신학지남의 총색인을 살펴보면 실천신학 분야의 논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 “신학지남 논문 총색인(1918-1983)”, 「신학지남」 제50권 제4호 (1998.3): 311-373.
8. 이상웅, “초기 박형룡 박사(1897-1942)의 신학 형성 과정에 대한 소고,” 「신학지남」 제79권 제1호 (2012.3): 235.
9. 주재용, “한국신학사에 있어서의 김재준의 위치,” 462-463. 박형룡에 의하면 한국교회가 신학을 수립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신학체계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적전통의 正信仰”을 그대로 보수하는 신학이요 한국교회가 창립되던 때 받은 신학을 “영구한 소유로 확보”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교회가 창립되던 때 받은 신학이라 함은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을 의미한다. 참고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56), 263.
10. 주재용, “한국신학사에 있어서의 김재준의 위치,” 471; 장동민, “1930-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에서의 소위 ‘자유주의’ 해석의 문제,” 217. 김재준이 성서에 대해 고등비평적인 접근을 한 것은 성경의 진리를 보다 학문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함이었다.
11. 장동민, “1930-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에서의 소위 ‘자유주의’ 해석의 문제,” 214-216.
12. 홍치모, “한국보수신학의 입장에서 본 김재준,”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서울: 풍만출판사, 1986), 286-310. 김재준의 예리한 문장은 젊은 독자층을 사로잡았다. 그는 글에 있어서 재사(才士)였다. 젊어서 문학서와 소설을 많이 탐독한 것이 그로하여금 명문장가로 만들었다.
13. 주재용, “장공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184-187. 김재준의 관심은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하심, 즉 역사에 있었단. 그의 역사의식을 가장 강하게 자극한 것이 예언자 연구였다. 김재준은 예언자 연구를 통해 혼돈과 부패, 무기력해 가는 당시 우리의 어두운 시대에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했고, 그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려고 하였다. 이 일념에서 그는 성서에 대해 학문적인 접근을 했던 것이다. 한국교회에 감추어지고 있었던 성서를 다시 발견해 드러내 놓으려고 하였다.
14. 김재현, 허선호, “장공 김재준의 마태복음 5:5 해석에 관한 연구: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의 성서 해석학을 위하여,” 「신학연구」 제79집 (2021.12): 108-109. 김이곤은 장공의 성서해석에서 전반적으로 구속사적이고 기독론적인 관심에 초점을 맞춘다. “실로 구속사적이고 기독론적인 관심은, 장공에게 있어서는 구약과 신약을 포함하는 성서 전체를 해석하는 중심적 파라미터(parameter)였던 것이다.” 이영미는 장공을 “비평적이면서 고백적인 현실참여의 성서 해석을 펼친 신학자”로 보았다. 송순열은 장공의 삶과 성서 해석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장공의 삶과 성서 해석을 한 평행선에서 살펴볼 때, “역사적 패러다임의 선구자”, “실증적 패러다임으로부터 해방과 실천적 해석”, “성육신으로 승화된 패러다임”으로의 변천과정이 있다고 보았다.
15. 주재용, “한국신학사에 있어서의 김재준의 위치,” 462. 박형룡에게 있어서 김재준의 신학은 기왕에 한국장로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파괴적 도전의 신학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16. 장동민, “1930-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에서의 소위 ‘자유주의’ 해석의 문제,” 194. 김재준의 글을 면밀히 검토한 장동민은 1930년대 김재준의 글들 가운데에서 성경의 영감이나 전통적인 교리를 반대하는 글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김재준이 글을 통해서 부정하려고 하였던 것은 성경의 영감이 아니라, 이른바 ‘교리주의적 성경해석’이었다고 주장한다.
17. 장동민, “1930-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에서의 소위 ‘자유주의’ 해석의 문제,” 200-202. 박형룡은 박형룡은 그의 학위논문, “Anti-Christian Inferences from Natural Science”(1931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소재 남침례신학교)에서 프린스턴의 이와 같은 해석의 유동성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적어도 박형룡은 그의 학위 논문에서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유지하면서도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기보다는 자연과학의 발견들을 인정하고 이를 해석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귀국한 이후에 그의 신학적 행보는 축자영감설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후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