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1-7] 기독교의 고난은 명상 아닌 삶이다 – 1983년 3월 27일, 김상근 목사

기독교의 고난은 명상 아닌 삶이다

요한복음 9장 1-7절 / 1983년 3월 27일, 종려주일 / 수도교회


[말씀을 향한 물음]

오늘은 청년주일이면서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이다. 예수의 고난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분의 높고 깊으신 은혜를 명상하는가? 그분의 고통을 마음 아파하는가? 오늘 우리에게 고난이 과연 있는가? 신앙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난은 무엇인가?


[슬라이드]
















[설교 전문]

오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 주일이다. 하나는 오늘이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예배드리는 청년주일이라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종려주일이라는 점이다. 종려주일이란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군중이 몰려와서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의 뒤를 따라간 일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난의 첫 시작이었다.

군중들은 환호하고 만세를 부르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다 깔았다. 겉옷을 벗어 나귀 잔등에 올려놓는 제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실 왕의 행진이 아니었다. 타신 것은 왕의 말이 아니라 초라한 나귀였다. 온갖 장식으로 빛나는 가죽 안장이 아니라 가난한 제자들 중 한 사람의 겉옷이었다. 그리고 땅에 깔린 것은 왕이 걸어가는 곳에 깔리는 양탄자가 아닌 생나무 가지였다. 하여튼 조금은 희극적이고 또 조금은 비극 같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이 오늘이다.

왕 같은 대접에 전혀 왕 같지 않은 준비가 무언가 심각한 갈등을 표출시키고 있다. 그 둘 사이에서 벌써 ‘고난’이 쑥쑥 커 나오고 있다. 왕처럼 무엇을 타신 것은 분명하나 그것은 말이 아닌 나귀요, 왕처럼 안장 위에 앉으셨는데 그것은 가죽이 아닌 겉옷이요, 왕처럼 땅 위에 깔린 무엇인가를 밟고 지나가시는데 그것은 양탄자가 아닌 생나무 가지다. 여기서 우리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의 처지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예감할 수 있게 된다. 그 예감은 ‘고난’이다.

기독교의 표상은 부활이라기보다는 십자가다. 어느 교회든 십자가를 걸어 놓고 있다. 강대상에도 십자가요 의자에도 십자가다. 비록 금으로 만들었다 할지라도 목에 거는 장식도 십자가다. 십자가를 달고 다니든지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물건을 가지면 우리는 금방 그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안다. 그 십자가는 고난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고난’이라는 뜻이다. ‘십자가를 뺀 예수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성립된다면 그것은 곧 ‘고난을 뺀 기독교란 없다.’는 말과 같다.

마가복음을 보아도 그렇다. 네 복음서 중 맨 처음 씌어진 마가복음의 경우 총 95개의 대목이 있는데 거의 사분의 일은 순전히 예수의 수난에 대한 것이다. 전체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에서 시작한 마가복음은 8장 중간에 오면 어느새 수난과 관련된 보고를 하고 있다. 부활에 대한 기록은 단 한 장일 뿐이다. 다른 복음서 역시 그 중심되는 보고는 두말할 것 없이 예수의 수난이다.

기독교의 초기 역사는 수난의 역사다. 수난과 연관된 수많은 일화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기독교의 초기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 바울의 편지들, 야고보서, 베드로서, 맨 마지막에 있는 요한계시록까지 온통 고난의 기록이다. 바울의 편지 곳곳에는 바울 자신이 고난받은 사실을 쓰고 있다. 그 밖에 소위 일반 서신이나 요한계시록은 ‘고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신약성서 전체가 ‘고난’과 관계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반드시 오늘에 와서라고 말할 필요는 없겠으나, 적어도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에서 이 ‘고난’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고난이라는 말조차 듣기 싫어한다. 요사이 부흥회에 이상한 이름이 붙여지는 것을 보게 된다. ‘축복 성회’라는 것이다. ‘축복교회’라는 교회도 있다.

찬송가도 어느새 고난이 주제가 아니다. 고난을 주제로 하는 찬송가는 많지 않다. ‘수난’이라는 주제를 달고 있는 찬송가는 620장 중에서 불과 18장이다. 3% 정도다.


“십자가 그늘 밑에서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빛 심히 쬐이고 또 짐이 무거워”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말하자면 고난은 예수에게 있었던 것, 예수만이 짊어지셨던 특수한 것이요, 우리는 그 은혜 가운데 있을 뿐이다. ‘우리의 고난’을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다.

기독교 신앙이란 고난이 필수적이요 필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도대체 우리 중에 지금 기독교를 신앙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신앙을 고난과 관련하여 생각하거나 경험하는 사람이 있는가? 거의 없으리라.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편안하다. 물론 지금도 어려움 가운데 있는 교인들이 있다는 것을 전혀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절을 맞아도 2,000년 전 주님의 고난을 명상할 뿐 아무런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만약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고난과 불가분의 것이라면 이 고난절 이상 우리에게 맥박 쳐 오는 절기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고난이란 2,000년 전의 이야기요, 지금은 고난이란 없다고 결론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고난은 이북과 같은 공산주의 무신론 체제에서 정권이 종교를 용납하지 않을 때나 받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이북 동포들이,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북한의 압정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공산주의 무신론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리 없다.

또 일본 제국주의와 같은 다른 민족에 의하여 침략을 받았을 때 우리는 고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남의 나라의 침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독립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해야 할 그런 처지는 아니다.

또 한 가지, 문화의 상충으로 고난이 왔던 경우가 있었다. 말하자면 한 집안에 부모는 불교 신자요 며느리나 자식이 기독교 신자가 되려고 할 때 간혹 원색적인 충돌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경우도 퍽 드물어졌다. 지금에 와서는 대개 종교의 선택은 자유로워졌다. 오늘날에는 문화적 상충과 갈등에서 오는 고난도 별로 있을 수가 없다. 이상의 것들이 고난을 유발하는 이유라면 아무리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리 없다.

혹 고난을 말할 때, 우리 교회의 오정삼, 윤지희, 최근에 구속된 지태홍처럼 재판을 받고 교도소 생활을 하는 것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 시대의 진실과 정의를 위하여 외치고 투쟁하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는 때 우리나라에서는 고난이 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바로 그것을 삶의 일차적인 과제로 삼기는 퍽 어렵다. 우리는 주부고 학생이고 기업인이고 교사다. 그렇기에 이러한 경우 역시 신앙의 필연적 현상으로서의 고난을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 아무리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라 해도,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의미가 고난이라 해도 고난과는 거리가 먼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겠다 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지 퍽 막연하다. 신앙을 가진다고 해서 반드시 고난을 받거나, 고난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은 아닌 것 아닌가 여겨지게도 된다.

오늘 신약성서 본문을 보자. 본문은 두 부류의 사람들을 기술하고 있다.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앞에 놓고 한 부류의 사람은 ‘저가 왜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을까, 그 원인이 무엇일까, 이 사람의 죄 때문일까, 부모의 죄 때문일까’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관심은 퍽 사변적이다. 형이상학적이다. 생활과 동떨어진 질문을 하고 있다. 행동이 없는 논의다. 한가하고 긴박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일단 고난이 없었다. 누구도 그들을 고난 가운데 몰아넣거나 죽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과 행동 영역이 사변적인 한, 그들의 신앙은 고난이 필연적이 되지 않는다.

또 한 부류란 예수를 가리킨다. 그는 사변하지도 않는다. 눈먼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다. 위의 제자들과는 태도가 전혀 다르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 눈먼 사람에게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관심은 나면서 눈먼 사람을 어둠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예수의 신앙은 구체적이다. 삶과 직결되어 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전도를 시작하여 체포되시기까지의 마가의 보고를 보자. 질문에 대답하신 것이나 상황에 대한 마가의 설명, 예수의 가르침은 28 대목이다. 그러나 귀신 들린 사람에게 관심하며, 병자의 고통에 뛰어드시며,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시고, 성전을 정화하는 일, 다시 말하여 구체적인 행위를 22번이나 보도하고 있다. 마가가 보고한 예수는 구체적인 신앙을 하는 사람이었다. 대결하신 구체적 상대가 있었다. 아무개의 가난이요, 아무개의 고통이다. 나병환자 아무개의 문제다. 그리고 예수의 고난은 거의, 아니 반드시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삶 때문에 받게 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을 해야 하겠다는 첫 번째 음모는 예수께서 3장에 기록된 한 손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 주신 다음에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구체성이 빠져나간 신앙이다. 오늘의 기독교는 구체성이 없는 기독교다. 왜냐하면 삶과 부딪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공중에 떠 있다. 구체적으로 나의 삶과 이웃의 삶에 부딪치려 하지 않는다. 주일날 예배 보고는 돌아간다. 제 욕심에 관한 한 구체적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으로 살게 되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구체적 대결의 상대가 없다. 이러한 신앙에 고난이 있을 리 없다. 주님의 고난을 명상하고 고맙다고 말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지금 생각해 보자. 내 신앙은 대결의 구체적 상대가 있는가? 포로 된 자를 위해 그저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지 않은가? 가난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으로 신앙 생활을 다했다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서가 보도하는 예수는 그렇게 추상적이 아니다. 가난한 아무개에 대한 관심이어야 한다. 포로 된 자 아무개에 대한 기도여야 한다. 고통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 있는 아무개와 아무개이다. 막연하고 추상적일 때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행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면서부터 눈먼 자를 앞에 놓고 논쟁하고 궁리하고 혀를 차며 측은해 하는 거기에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흙에 침을 뱉어 이겨서 눈에 바르고 낫게 하였더니 - 행동이다. 구체적인 신앙이다. -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은 사람과 그 부모를 연행해 갔다. 고난이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교인 여러분, 청년 여러분,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구체적 대상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하겠다. 이 고난주간에 그저 예수의 고난을 명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나면서 눈먼 자를 앞에 놓고 ‘나면서 눈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는 것을 상고하고 논의하는 제자들과 같다.

우리는 나면서 눈먼 자 아무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결단을 가져야 한다. 고통 가운데 있는 아무개, 가난 가운데 있는 아무개의 문제, 생활의 이러저러한 문제로 곤경을 겪고 있는 아무개에게 구체적 관심과 행동을 하게 되는 전기로 삼아야 하겠다. ‘역사를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긴다.’ 가 아니라 이러이러한 구체적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그 길을 게으름이 막을 것이다. 그 길을 안이하고자 하는 본성이 막아 설 것이다. 그 길을 욕심이 막아 설 것이다. 그 길을 내 것 아까워하는 자본주의적 생리가 막아 설 것이다. 이것과의 싸움이 고난에 동참하는 첫 발걸음이다.

만약 우리의 신앙이 이러한 신앙이라면 우리에게 고난은 필연이요 필수일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제 추상적 신앙에서 벗어 나오자. 사변적 신앙을 떨쳐 버리자. 멍청하고 텅 빈 신앙을 팽개치자. 고난을 명상하지 말자. 주님의 생활에 참여하자. 금번 고난주간에 구체적 신앙을 일구어 내자.


[회상 노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교단 총무로 일하게 되었지만 아직 수도교회가 후임 목사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일예배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 주일마다 강단에 설 수는 없었다. 이곳저곳 교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수도교회에서 종려주일과 성 금요일, 그리고 부활주일 설교를 이어하게 되었다.

현대의 기독교인은 고난을 생각하지 않는다. “승리하십시오.”라는 인사가 유행되고 있다. 승리만을 생각한다. 고난은 예수가 내 몫까지 이미 다 치러버렸다고 믿으려 한다. 사실 소시민적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종교적 의미의 고난을 말하는 것은 무리다. 또 지금은 지난 시대에 비해 고난이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에도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노동자들의 삶에 다가가는 대학생들이 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삶에서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봤다. 그들의 삶은 어떤 것인가? 고난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예수처럼 내려간다. 그들의 신앙은 구체적이다. 추상적이

지 않다. 기복적이 아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불행한 것일까?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산 예수, 그를 죽음에서 살려내셨다는 것 아닌가! 그를 우리의 주가 되시게 하셨다는 것 아닌가! 이것이 기독교의 부활신앙이리라!

소위 운동권 학생들의 설 자리가 매우 좁아졌다. 당국의 압박이 그들의 공간을 빠르게 좁혀 왔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는 어떤 모임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간에 사용해 왔던 모임 장소도 어느새 모두 드러났다. 이른바 MT 장소는 이미 완전하게 노출되고 말았다.

학생들은 교회로 몸을 피하고, 교회에서 모임 장소를 얻고자 했다. 어찌 보면 교회가 최후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안고 가려는 교회는 많지 않았다. 서울에는 불과 몇 교회밖에 없었다. 내가 목회하던 수도교회는 몇 안 되는 교회 중의 하나였다. 나는 그들이 신앙을 가지고자 하여 교회로 찾아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받아들이고 뒷바라지를 했다. 그들이 옳고 가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내려갔다. 대학생이라는 신분, 그것도 소위 일류 대학의 학생이라는 특권, 이미 담보된 장래를 버린다. 나는 그들에게서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한 교인보다 더 그리스도인다움을 발견했다. 외형으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그들은 이미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예수를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기대를 가졌었다.

그들은 툭하면 구속되고 재판을 받았다. 이런 일은 차라리 일상적이 되어버렸다. 목사인 나는 고통스러웠다. 아니,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교인들 중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는 것이었다. 신앙 성향이나 정치적 입장이 달라서 그리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업하는 교인들 중에는 불이익을 당할까 봐서 그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회는 신앙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지 데모나 하고 투쟁이나 하는 데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신앙고백이 먼저라는 주장은 옳다. 목사의 지도가 과격하여 그런 성향의 학생들이 모이고 또 그들이 툭하면 구속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었다. 사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목사의 지도에 의해 이러고저러고 할 단계를 이미 넘어서 있었다. 그들의 생각과 안목과 철학은 목사의 그것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내려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예수의 삶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을 배웠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후원자요 보호자를 자임했었다.

나는 교단의 총무로서 교단의 교회들을 두루 살폈다. 불행하게도, ‘많은 교회가 학생들과 비교해 훨씬 교회답지 못하다. 교회는 과연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교회다운 교회로 거듭날 수 있게 할 것인가? 나는 그리할 수 있는 교단이 되도록 하는 책임에서 비켜설 수 없었다. 기장 교단을 어떻게든지 교회다운 교회가 되게 해야 했다. 그즈음 나의 설교는 여기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제는 ‘교회!’다. ‘예수를 따르는 신도!’다. 그것은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교회가, 신도들이 옳음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려는 신앙을 가질 때에만 교회는 교회 되고, 신도는 신도 된다.